<다락방의 미친 여자> 10장은 다시 읽어도 재밌다. 다른 부분보다 쉽게 읽혀서 그렇게 느끼는 것 실토한다. ㅋㅋㅋㅋ

진짜 바이런은 로체스터가 아니라 제인 에어라는 점이 빅토리아 시대 평론가들을 화나게 한 이유라는 지적도 후련하고(600) 제인이 억압에 대처하는 방식은 자기 포기가 아니라 여전히 불처럼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방식(615)이라는 규정 또한 “왜 페미니즘적 인식 이전부터 이 소설이 매력적이었을까”라는 개인적인 궁금증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것 같다.
다만 마지막 결혼의 의미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명쾌하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저자들은 (펀딘 영지에서의) 결혼이라는 제인 에어의 선택은 ”제한되고 고립되어 있더라도 진정한 마음으로 결합“한 “길”(에밀리 디킨슨 재인용)이며 희망이라 평가하면서 브론테는 이후에는 이런 낙관주의를 벗는다고 분석한다. 653쪽

저자들은 버사를 어둡지만 진실된 자아, 제인 에어의 또 다른 화신이라고 힘주어 짚는데 제인 에어가 그런 버사가 죽고 나서 불구가 된 로체스터와 결혼하는 결말이 과연 “평등주의적 관계”를 그린 브론테의 낙관이라는 설명과 양립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제인 에어가 버사가 죽고 나서야, 사회적 위장이 벗겨진 로체스터와, 그것도 펀딘이라는 소외된 장소에서..결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다른 비극의 시작 같다고 하면 오바일까 ㅋㅋㅋ 본인의 기혼 상태에서 허덕이는 아줌마의 “으그.. 저거저거.. 내 동생(동생 없음)이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지(남 잘 못 말림)..”류의 오지랖인가ㅋㅋㅋ

에이드리언 리치는 책의 다른 여성들(템플 선생님, 다이애나)처럼 제인에어의 결혼도 삶의 완성이지만 적어도 구별되는 점은 이 결혼이 “단순 해결책이나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급진적으로 이해된 형태,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으로서의 결혼”이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76쪽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이거 읽고 나니 아, 나의 도시락 오지랖이 맞는 거 같다. 빅토리아 시대니, 집안의 천사니, 이런 말이 무색하게 지금도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으로서의 결혼” 같은 것은 아득하지 싶은데. (제가 못한다는 거고 그렇게 하고 계시는 분들께 존경을..) 동일한 말로 결혼의 환상을 조장, 압박하는 세태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제인 에어를 다룬 리치의 비평, 부제는 어머니 없는 여성의 유혹이다. 읽어보면 고아 여성이 “들게” 되는 유혹인 셈인데 여기서 리치는 제인 에어를 설화로 정의하면서 그동안의 비평을 다시 구조화하고, 이 설화의 관심사가 “인간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주어진 것의 영역과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운명적인 것의 영역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글에 따르면 제인 에어가 빠지는 세가지 유혹은 1. 피해자성의 유혹(숙모 리드 부인 저택) 2. 자기 혐오와 자기 희생이라는 유혹(로우드 학교) 3. 낭만적 사랑과 굴복이라는 유혹(손필드 저택)

리치가 마지막에 이르러 제인 에어의 결혼을 저렇게 높이 평가한 이유는 이 세 가지에 대한 대안이 소설 속에서 연결되면서 “가부장제 개념을 버리고 로체스터의 고난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독자에게 제시한다는 것 때문인 듯하다. “이 여성에게 어떤 종류의 결혼이 가능한가”라는 리치의 질문은 결국 사회는 어떤 여성성을 수용하는지, 그 폭에서 사회가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돌아보게 만들고 다시 나는 기분이 별로…ㅋㅋㅋㅋ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 돌아가서.. 로체스터에 대한 평가 보고 섬뜩했다. “로체스터가 제인의 주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주인이기 때문이라거나, 매너가 왕자답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녀와 동등하기 때문에, 또 그녀의 미술과 영혼을 알아보는 유일한 비평가이기 때문에 제인은 로체스터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책에서 말하듯 남성과의 독점적 인간 관계에서 헤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얼마전에도 친구랑 나를 알아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기가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비슷한 얘기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면서 내가 당시에 의미있다고 생각했던 바보다 훨씬 더 가치있었고 힘있게 나를 떠받쳐준 사람들과의 관계, “두 사람 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인에게는 어머니다.”614 문장에서처럼 어머니같은(!!) 우정들을 생각했다.

앞으로 브론테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 염두에 두려고 리치의 문장을 통째로 옮겨둔다. “샬럿 브론테는 인간관계란 꽤 다른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이 작가에게 인간관계란 ‘고통스러운 수치심이나 풀죽은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거래, 그리고 누구도 타인에게 이용 가능한 대상이 되지 않는 거래를 말한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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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12-05 1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앗!! 유수님 글 너무 좋네요!
근데 저는 이런 결말이 651쪽의 문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부장제 억압이라는 문제에 실행 가능한 해결책을 그릴 수 없었던 브론테....

저는 브론테가 생각하는 제일 근사한 대답이 동등한 상태에서 재산권을 가진 개인으로서 제인과 로체스터의 결합,이었을거라 추측합니다. 낭만적 사랑의 결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으니까요. 다만 제인이 로체스터의 아내이자 간호사가 되어 갖은 돌봄노동으로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고요.

아.... 유수님 글이 많이 노출되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이제 막 읽었거든요. 앞으로도 우리 같이 읽어요!!

유수 2022-12-06 11:2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서 651을 읽었는데 책도 더 보고 브론테도 더 봐야 판단력이 생기려나 봐요. 지금 시대에 그릴 수 있는 해결책은 뭘지도 궁금해지고요. 댓글 넘 감사합니다. 단발님💜 불씨를 이어가보아요.
 

“광고주들이 노렸던 것은 여성의 자유를 언급하는 기업에 대한 잠재적 소비자들의 지지였다. 여성의 자유를 언급하는 광고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성적 대상화에 대해서는 미처 비판적 시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 ..”

… 미국 최초의 여성 인권 집회가 열렸습니다. 여성의 투표권 획득을 위한 혁명이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뗀 순간입니다. 이제 당신은 여성운동사의 이정표가 된이 날을 기념하고, 그 집회에 참석해서 여성 투표권을 주장했던 용감한 사람들의 신념과 의지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당신이 ‘퍼스트USA 은행의 기념일 시리즈 플래티넘 마스터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여성 인권을 찬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당장 신청하세요."
1998년 퍼스트USA 은행이 신용카드 홍보를 위해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여성이 빚을 질 자유를 연결시킨 것은 굉장히 뻔뻔한 행동이었다. 자본주의에 봉사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언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퍼스트USA 은행은그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사람들이 첫 결제를 하면 ‘여성 연감‘을 무료로 보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 P23

… 그래서 1974년 신용기회평등법 Equal Credit Opportunity Act의 의회 통과는 여성해방이 실현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로 은행에서는 신용카드를 발급할 때 혼인 여부를따지지 않게 됐다. 여성들은 그들의 돈으로 언제든지 상품을 구매할 권리, 그리고 남성들과 똑같이 빚을 질 권리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권리가 페미니즘과 연결될 때, 그것은 시장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핵심 교리와도 연결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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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소영 출구 3
정소영 지음 / 봄알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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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서울 간 김에 책 얘기 나눠주시던 분들을 오프라인으로 처음 뵈었고.. 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시 알라딘에 붙어있고 싶다는 생각에 기들어왔다.



11월에 좋은 책들(덮고 나서 뻐렁치는)을 꽤 만났다. 기록은 그 중 하나였던 이 책으로 시작할까 보다.



읽으면서 책의 흐름과 직접적 상관은 없지만 꼰대라는 말이 품은 좌절된 기대에 관해 생각했었다. 인생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 혹은 내 발로 이 길로 걸어왔단다, 하는 ‘어른’의 이야기에 대한 갈증에 소영이 진솔한 대답을 해주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여러 서신들중에 특히 ‘아버지’와 ‘에미’, ‘엄마’가 수신인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부모 마음 몰라주기로 유명한 자식..인 나..도 적당히 해야것다.. 반성도 쫌 했다.

소영의 젊은 시절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읽다가 한번씩 책밖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 동네가, 그 산에서 그런 일도 있었구나. “노동운동의 불모지“, ”정치 무풍지대” 등의 말에서 소영의 보이지 않았을 분투가 내가 이 곳에서 느끼는 안락과 대비되어 부끄러웠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지만 동시에 내내 부끄러웠다.

딴 얘기지만 부끄럽다는 걸 자주 느낀다는 게 싫다.

입시를 목표로 한 공/사교육을 받고 자라 한국문학을 비판없이 흡수하면서.. 머리가 말랑할 때에 어떤 성별의 식민지 지식인 특수성을 성수처럼 마시고 체화한 탓에 이제서 급체와 구역질이 매일 난다. 원효대사 해골물은 하룻밤만에 깨닫기라도 했지 이십년 돼가는데 뭐냐ㅋㅋ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게 뭐가 있지. 하등 무용하다.

여하튼 다시 <감옥으로부터의 소영>으로 돌아가서.. 책이 주는 부끄러움은 그것과는 다르긴 하다. 2014년을 겪으며 얻은 현실감각.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가 이제 어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 사회의 균열과 깨진 곳을 마주할 때마다 저항해야 할 기성의 구태가 아니라 그 구정물에 내가 기여한 바 부정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



분신한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고문 당하고 감옥에서 적는 곧 찢어 없앨 편지, 교도소에서의 노래자랑과 민중에 대한 고민. 서신들 하나하나가 살아있고 아프다. 책을 소장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마지막에 실린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다. “… (여성혐오적 인습) 너에게서 나에게로 새로 들어오더구나. 매번 내 뼛속까지 들어와 있는 남아 선호 그리고 반민주적 태도와 전투를 해야 했다. 내가 배운 세상은 민주도 평등도 아니었거든.” 딸이 태어나고 새로운 전투를 해야했다는 엄마의 회고. 성인이 된 딸을 엄마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묵묵히 응원하는 모습에 깊이 의지하게 되었다. 구닥다리같지만 롤모델, 멘토, 뭐라 이름붙이든 간에 그런 게 나라는 양육자한텐 너무나 절실하다.

“ 민주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정작 삶의 태도는 민주적이지 않고, 자유를 주장하면서 스스로는 자유를 모르고, 평등을 이야기하고 원하지만 대부분 차별 속에 살고 있거든. 우린 배운 것이 반민주고, 부자유고, 불평등이고 어디에서도 민주, 자유, 평등을 체득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는 자신을 단련시킬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상황에 연애는 힘들다고 에둘러 거절하면서 편지에 이렇게 말한게 킬포ㅋㅋ)

“자유는 더 이상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더구나. 내가 선택한 것을 지키고 가꿀 자유의 가치가 절실하게 와닿았어. 내가 선택하는 것이 나의 자유이고 그 길에서 다시 자유가 자랄 수 있도록 계속 선택해나가야만 한다.”

“ 민주화가 된다고 해도 여성의 권익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내가 가사노동과 양육에 임금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을 때 너는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어. 한국의 현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인데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말야.”

˝소영아. 슬픔이 도를 넘으면 생명도 파괴된다.˝

“… 파도와 함께 춤춘 것뿐이지. 파도가 나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나는 파도가 아니라 배였더라” 그렇게 답해주고도 싶었습니다.“

“ 평생의 화두였던 자유. 저는 지금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아닌 한 인간으로 자유롭습니다. 사회 안에서 길들여진 자유가 아니라, 그저 자유하는 자유입니다. 인식하는 만큼은 자유롭습니다.”

책에서 소영은 ‘자유’를 주로 동사로 쓴다. ‘자유를 위해’, ‘자유로운’ 같은 표현이 아니라 “자유하는 자유”, “자유하는 인간”이다. 인간이 현재형으로 자유를 누린다는 것. 그런 본위를 위해 평생 애쓴 소영다운 표현이다. 시대의 여러 고민들에 응답해주는, 내겐 그런 책이었다.

다음엔 무리해서 서울에 가게 한 그 책. 북토크 다녀온 책에 대해 써야지. 생생했던 것들, 말하고 싶었던 것들 날아가기 전에 잡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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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3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수 2022-12-03 20:13   좋아요 0 | URL
흐흐흐 졸리님 글 보려고 온 것도 있으니께요

단발머리 2022-12-06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수님 책읽기 글쓰기 응원합니다! 🥳🥳🥳

유수 2022-12-07 00:26   좋아요 0 | URL
뭣보다도 단발머리님 글을 볼 수 있어 좋네요 ㅋㅋㅋㅋㅋ
 
스패로
메리 도리아 러셀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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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못 읽었는데 백자평 나중에 수정 되나요ㅋㅋ친구 강력추천으로 구매. 복간에 이유가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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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을 만난 세계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정창조 외 지음, 비마이너 기획 / 오월의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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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함께 읽는 6월의 책으로 읽었다. 여덟 명 장애해방운동 열사의 삶과 죽음을 조망한다. 초반에는 책이 잘 읽히지 않았다. 고인들의 인생 면면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가이드에 따라 일부는 쫓아가더라도 나머지는 독자가 채워가며 읽어야 한다. 혹은 “유언”으로밖에 그들을 만나지 못한 내 무지함 때문도 있겠지.
“노점상 운동”, “분신”, “의문사”, “폭력 진압과 시신탈취”와 같이 굵직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사건들이 사실은 아주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한 장애인의 투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 책의 내용도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울고 웃고 노래하고 투쟁하는 장애인들의 일상이 우리에게 철저히 비가시화된 영역이었다가 유언을 읽으며 부끄러움과 함께 눈이 밝아지는 것처럼. 함께 읽은 친구들 모두 “노점”이 장애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점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아도, 최옥란 열사에 대해서는 다들 꼭 읽어봤으면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는 최저생계비 현실화 요구 농성을 하며 본인의 “모든 것”인 기초생활수급비를 보건 복지부 장관의 집에 찾아가 반납했다.

“저는 청계천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기초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저에게 노점과 수급권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의료비 때문에 수급권을 선택하고 노점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점조차도 포기한 저에게 정부는 월 26만원(생계급여)을 지급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시청과 구청 그리고 동사무소를 찾아다녔습니다”

책 표지의 유서는 최옥란 열사의 것이다. 고인이 되시기 한 해 전에 썼다고 한다. 생전에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는 아들의 이름을 한번, 두번 적으며 보고싶구나.. 너와 같이 살고 싶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써두고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문제를 제기하며 일년을 더 투쟁했다. 26만원 수급을 받기 위해 최옥란이 포기해야 했던 것을 생각해본다. 아픈 몸을 치료받는 것. 일하러 가는 것.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것.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건강하였다면 대학교 3학년이 될지도 모르고 직장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이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현실을 사랑할 수가 없다. 좌절밖에는 없다.” - 최옥란의 일기 중에서

최옥란 열사 챕터의 제목은 “이르게 온 미래”다.




“유언은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 뱉어낸 천둥 같은 말이다. 생生이라는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이 낯선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선 생의 씨줄과 날줄까지 읽어내야 한다. 유언의 속성은 지시성에 있다. ‘복수해달라.’ 그러므로 유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듣는 자’가 있을 때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말’로 남는다.”

다들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스스로가 주변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고 말을 모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왜 티비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을까. 매체에서 가끔 보이는 시각장애인 주인공은 왜 젊고 예쁜 여배우가 연기하는지, 장애인이 주인공인 몇 안 되는 드라마에서조차 왜 낭만적으로만 재현되는지. 가족구성원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비장애인 주인공의 앞날을 순탄치 않게 만드는 고민거리로만 빈번하게 그려지는지.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생계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장애인을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점, 지하철 시위에 대해 잠시잠깐 들었던 생각도. 열사의 유언은 우리 인생에서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듣는 자’였던 적이 없다.

버틀러는 신간에서 “애도가치의 평등”을 얘기한다. 주류사회에 구속받지 않는 평등한 “애도될 권리”를 구현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이 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유언을 만난 세계다.


“(…) 생명이 그 지속가치와 애도가치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의 이상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자유를 새롭게 정의하는 방향으로, 곧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의존성을 사회적 자유의 정의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투쟁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투쟁을 위해 모종의 평등주의적 상상계, 곧 모든 살아 있는 유대 관계에 잠재해 있는 파괴성을 감안할 수 있는 상상계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상호의존성이야말로 우리의 사회적 세계이니(아니 우리의 사회적 세계이어야 하니), 폭력으로 망가지는 게 바로 그 상호의존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이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인지가 분명해진다.”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서문

"그러나 사실은 삶만큼이나 죽음에도, 나아가 사후의 삶에도 등급이란 게 있다. 죽음은 불평등으로 채워진 삶의 연장이지, 삶과의 전적인 단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도될 권리‘는 죽은 자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바깥으로 내몰린 이들 중 죽음을 통해 그 존재가 사회적으로 음미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설령 죽어서야 겨우 존엄성을 회복한 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주류 사회‘의 주목은 보통의 애도와 어딘가 결이 다르다."
기획의 말, 정창조

"장애인의 존엄과 삶의 권리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는 가족들에게 모든 돌봄의 짐을 지웠고, 마음에 자책감마저 새겨 넣었다. 그들의 가슴엔 깊고 검은 상처가 패였고, 고통은 오로지 사적인 것이 되어 그 틈 속에 봉인되었다."
박기연 열사, 유서가 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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