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징비 - 치욕의 역사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박기현 지음 / 시루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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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징비] 참회와 반성의 임진왜란 기록…….

 

 

임진왜란 때 이미 대동아공영을 꽤했던 왜적은 욱일승천기까지 준비하고 철저하게 계획하고 저지른 전쟁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왜적의 침입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방관했으며 당쟁에 휩쓸렸던 때였다. 임진왜란이 허술한 군사체제, 국제 정세의 무지가 낳은 결과였기에 더욱 아쉬운 전쟁이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의병과 의병장, 민초들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만약 류승룡이 전시재상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망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징비록은 당시 전시 재상이었던 류승룡이 남긴 7년 전쟁의 원인과 경과, 그 결과와 참회의 기록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볼 수 없는 국제적인 정세와 조정의 움직임, 전국 백성들의 형편, 전쟁을 지휘했던 자신의 느낌까지 솔직하게 담겨 있기에 임진왜란에 대한 진정한 전쟁기록인 셈이다.

 

전쟁 전의 일본을 보자.

일찍이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통일 전쟁을 펼치면서 일본의 경제와 상권을 장악했다.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총을 보급하게 되면서 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군사력도 신식으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의 불만을 분출시키고자 조선을 넘어 명을 정벌하는 대동아 공영을 야심차게 준비하게 된다, 조선 통신사를 통한 꾸준한 조선 탐색전과 철저한 전쟁 준비를 마친 히데요시는 일본사신으로 온 황윤길과 김성일에게 명나라를 침입한다는 입대명의 답신을 주기에 이른다.

 

한편 전쟁 전의 조선을 보자.

임진왜란이 있기 전 류성룡은 조선의 6대 임금을 모신 정승이었던 신숙주와 성종의 대화록에서 큰 예지력을 발휘한다.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지 말라는 신숙주의 권고를 보며 왜를 예의주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순신을 전라도 좌수사로,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왜적의 침공의도를 알고부터는 명나라에 알리고 전란에 대피하자며 선조에게 청원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의 방어체제를 제승방략에서 진관제로 환원하자는 건의도 하고…….

조선 최고의 명장인 신립과 마주한 류성룡은 왜놈들의 전쟁 준비에 대한 소문을 대해 만일 변란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할 지를 묻기도 한다. 하지만 신립은 왜놈이 조총으로 얼마나 맞힐 수 있겠냐며 왜놈을 무시한다.

 

더구나 조정을 혼란케한 것은 일본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는 전혀 상반된 보고였다. 왜국이 전쟁 준비를 마쳐놓은 듯하다는 서인인 황윤길의 보고에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그런 낌새가 없으니 괜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보고를 올리게 된 것이다. 당파적 논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에, 일본의 상황을 알면서도 황윤길의 보고와 전적으로 반대되는 보고를 하는 김성일의 보고에 혼란스런 조정은 무사안일을 택하게 된다. 명나라를 침입하겠으니 조선을 길을 내어 달라는 왜에 대한 보고를 제대로 했더라면, 이런 혼란을 막을 수는 있었을 텐데...... 두 사람의 보고가 상반된 이유가 당쟁 때문이라니.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터지자 조선의 초기 대응은 부실했고 정보도 엉망이었다. 새벽을 틈타 침입한 왜적 앞에 부산은 금방 쑥대밭이 된 것이다. 군사 20만에 4~5만 척의 왜선에 대한 정보를 군사 1, 적선 400척으로 보고되기도 한다. 쑥대밭이 된 부산의 초전 상황이 조정에 제대로 보고되지도 않았다. 더구나 초기의 전투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가짜 병부와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었고, 오합지졸에 엉성한 지휘체제여서 싸움조차 못하고 도망가기 일 수였다고 한다.

급기야 선조를 탓하는 양반들의 상소가 이어지고,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의 목소리는 거세지고, 부산, 충주, 한양까지 삽시간에 뚫리고, 왜가 한양에 당도하기 전에 도성은 성난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탈 정도였을 정도다.

 

의주에 가서 기다리다가 명나라로 가자는 이항복, 북도로 가자는 윤두수의 건의가 있었지만, 국토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는 류승룡의 만류로 겨우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당시에 선조가 명나라에 들어가서 조선을 비웠다면 조선의 운명이 온전했을까. 임란 후 조선이 명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일은 쉬운 죽 먹기였을 것이다. 어쨌든 권위와 체통에 연연하던 선조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속물이 되어 버렸고, 최적의 요새지라는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의 패배로 한양은 순식간에 뚫렸고, 백성들의 궁에 대한 방화로 평양 진격은 더욱 빨라졌으니, 왜군이 조선을 얼마나 우습게 보았을까.

 

그나마 광해군의 활약과 결사항쟁으로 싸우는 병사들, 평양까지 순식간에 진격한 왜의 보급을 끊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진군을 멈추게 된 왜군, 조선을 넘보려던 여진족 누르하치의 구원병 제의를 거절한 류승룡은 명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고, 전쟁 중 이순신의 하옥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 등 긴박하게 흐르는 전쟁의 기록들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역사란 지나간 흔적을 되새기도 오늘의 삶에 교훈을 얻기 위한 기록일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난리를 치르면서 조선의 역사가들은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록 유산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그 많은 학자들은 왜 임진왜란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막을 수도 있었던 난리, 일찍 끝낼 수도 있었던 전쟁이기에 가슴에 사무치는 회한이나 반성의 기록이 분명 필요했을 텐데 말이다. 혹시 가보로라도 남겨진 개인 기록은 없을까. 보다 많은 징비의 기록들이 전해졌다면 일제 강점기를 그리 허망하게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임진왜란이 일제강점기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기에......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562(선조25)에서 1598년까지의 그 당시의 상황이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132)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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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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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유성룡/서해문집]임진왜란을 돌아보고 후생환란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지니…….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 일을 기록한 것이다. 난이 발생하기 전의 일 또한 조금씩 기록했으니 이는 난의 처음부터 근본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임진년의 화는 참담했으니, 수십 일 만에 한양·개성·평양의 세 도읍을 잃었고 온 국토는 무너져 내릴 정도였으니 임금께서 도읍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나라를 얻었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뜻이요, 조종의 어짊이 깊은 덕분이었다. 백성들의 굳은 결의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았고, 임금께서 사대하는 충성심이 천자를 감동시켜 여러 차례 출사했기 때문에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생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 《징비록》을 저술하는 까닭이다. (16쪽)

 

《징비록》의 저자인 유성룡은 중종 37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고, 25세(1566년)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도 총괄했다. 선조가 난을 피해 개성으로 갔을 때 영의정이 되었고, 평양에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훈련도감의 제조를 맡아, 군비 강화와 인재 양성을 도모했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군의 동태를 수상히 여겨 정읍 현감인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했고 형조정량으로 일하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그가 나이 50이 넘은 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격적으로 좌수사로 천거할 수 있었던 이유엔 그의 안목과 나라에 대한 걱정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릴 적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일찌감치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을 늘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562년(선조25)에서 1598년까지의 그 당시의 상황이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제132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징비록》은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끈질기게 사절단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이니 이러고서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25쪽)

 

일본 사신으로 온 야스히로가 조선 통역에게 한 말이다. 그는 조선에서도 관직을 얻은 자였지만 조선 관리들의 문란과 기강해이를 보며 얼마나 한심했을까.

당시 조정은 수로가 험악해서 사절단을 보낼 수 없다며 도요토미의 요구를 거절했고, 이를 전하던 야스히로는 도요토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계속되는 사절단 요청에 결국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신으로 보내지만 도요토미의 거만함을 확인하고 왔을 뿐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를 올리지만 김성일은 그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만약 두 사람의 보고가 일치했다면, 일본의 침략야욕을 알아채고 같은 보고를 올렸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에 대비를 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순신의 더딘 승진에 대한 답답함, 신립의 무사 안일한 태도에 대한 속상함, 명나라까지 넘보는 일본에 비해 보고를 올려도 무사태평한 조정, 왜적이 쳐들어오자 도망치는 관리들과 장수들, 적의 공격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보고하는 병사를 민심을 어지럽게 한다는 죄목으로 죽이는 관리들……. 읽고 있노라면 속이 터질 지경이다.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명나라까지 넘보는 분위기인데, 조선의 조정과 관리들은 그런 정보를 모두 무시하며 자신들의 권력욕만 채우고 있는 모습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더욱 황폐해져 170만결이던 농토가 54만 결로 줄었고, 군량미 조달을 위해 백성들은 더욱 굶주려야 했다. 사람이 인육을 먹는 일도 빈번했고, 백성들의 난도 잇달았다고 한다고 한다.

 

 

만약에,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기 전 이율곡의 십만양병설(1583년)이 받아졌더라면 조선의 위기는 없었을 텐데…….

이미 일본은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많은 무사들이 생겨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로 무인들의 힘과 전술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일본은 수많은 무인들의 막강한 실력을 바탕으로 조선과 중국 대륙 침략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보일 정도다. 하지만 조선과 명은 그런 준비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1592년에 동래성을 침입한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나아갈 밖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조선을 보며 더욱 기세등등했으리라.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사신들도 양반들이 당파싸움에 집중하느라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아웅다웅 하는 모습에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서애 유성룡의 눈물과 통한의 기록인 《징비록》을 당시의 관료들이 얼마나 읽었을까? 지금의 관료들이 얼마나 읽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참고로, 유성룡의 옳은 표기는 류성룡이겠죠. 후손들이 주장하는 대로 해야 맞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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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말 소울메이트 고전 시리즈 - 소울클래식 7
영조 지음, 강현규 엮음, 박승원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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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말]탕평책과 개혁정치를 펼친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어록…….

 

 

영조는 비록 개인사적으로는 출신에 따른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친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등 굴곡이 많았지만, 정치적으로는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해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한 개혁군주였다. 또한 조선의 왕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위민과 애민의 군주로서 민생문제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해소하며 손자인 정조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1)

 

개혁과 위민의 군주인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장수한 임금이요, 가장 오래 재위한 임금이다. 천한 태생 콤플렉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이었을까? 그는 생활이 검소하고 눈물 많고 인간적이며 백성의 삶을 잘 헤아린 임금이다.

 

   

 

영조의 출생과정은 조선 역사상 가장 미천할 정도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숙종의 총애로 후궁 자리에 올라 아들을 낳아 정1품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 숙빈 최씨는 궁녀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궁녀의 시중을 들며 물을 길러주던 무수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핏줄에 대한 배경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영조를 더욱 괴롭힌 것은 경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영조가 경종에게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죽음에 따른 죄책감과 출신성분에서 오는 자격지심이 더욱 그를 검소하고 강한 임금으로 키웠을 것이다. 그런 충정으로 노론과 소론을 두루 중용하는 탕평정치를 펼쳤지만 노론의 계락으로 아들인 사도세자를 믿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것 또한 영조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위민 애민의 강력한 정치를 펼치던 영조는 장수한 세월만큼 많은 어록을 남겼다. 영조는 80종이 넘는 어제에는 백성에 대한 사랑, 치열한 자기수양, 과거에 대한 회고와 개탄 등을 적기도 했다.

 

그의 어록에는 왕이 농사를 짓는 친경의 실시하고, 준천 공사에 백성의 의견을 듣고, 홍수와 가뭄에는 백성들을 걱정하고, 방만한 국가 재정을 막기 위해 새로운 회계법을 만들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신문고를 부활해 백성의 억울함을 듣고, 균역법을 시행해 양역의 불균형을 잡고, 오늘날의 청계천을 준설해 하수처리를 해결하고,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첩을 만들고, 여종의 공납을 정지하고, 붕당의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을 고민하고, 사도세자에 대한 고민한 모습들이 담겨 있다.

 

도량을 파내는 하나의 일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다. 한번 명령을 내려 시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와 같은 큰 역사는 즉위한 뒤에 처음이다.(이하 생략) (88)

    

영조 35년에 영조 임금이 명정전 월대에서 준천을 주관하는 관리와 백성들을 만나 준천에 대해 하교하는 말이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백성들을 격려하고 직접 공사에서 삽을 뜨며 일꾼들을 독려하던 영조였다.

    

두루 사귀면서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않는 것은 실로 소인의 사사로운 의도다. (105)

 

당쟁의 중심인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있는 말이다.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물든 붕당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왕의 노력이 보인다. 노론과 소론의 분탕질 같은 붕당 싸움에서 백성을 위해 탕평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해 양역을 생각하고, 백성을 위해 정치를 생각했던 왕의 노심초사도 담겨 있다.

 

네가 왕손의 어미(사도세자의 후궁인 경빈 박씨)룰 때려죽이고, 비구니를 궁으로 들였으며, 평양으로 여행가고, 북한산성으로 놀러 나갔으니, 이것이 어찌 세자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들을 수 있었겠는가? (중략) 이와 같이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194)

 

영조 38년 왕이 사도세자의 악행을 꾸짖는 대목이다. 늘 아버지의 눈에 들지 못했던 사도세자의 악행은 진짜 사도세자의 짓일까? 아니면 노론이나 소론의 음모일까? 궁금하다.

 

지금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226)

 

영조 37년 세손(정조)과의 강연 후 강관들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아버지를 잃은 세손에게 그 슬픔을 잊고 백성을 위해 정치하기를 늘 강조하는 대목이다. 정조의 선정에도 할아버지 영조의 가르침이 컸으리라.

 

이 책의 사료는 영조 재위 529개월간의 기록인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최고의결기관이던 비변사의 매일 업무를 기록한 책인 비변사등록, 정조실록,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영조가 지은 글(어제) 등이라고 한다.

 

    

위민 애민의 강력한 정치를 펼쳤던 영조의 어록을 보니, 미처 몰랐던 영조의 삶과 가르침을 알 수 있었다. 역사책 한 자락에서 탕평책과 균역법으로 만났던 영조에게 이리도 기구한 사연이 많을 줄이야.

 

일찍이 할아버지인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노론의 역할로 왕이 될 수 있었던 영조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유약한 아들 사도세자에게 만큼은 누구보다 엄하게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만고에 없던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세손을 훌륭한 성군으로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어록들, 가정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먹먹함을 더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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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에 꼭 알아야 할 한국사 열 살에 꼭 알아야 할 역사
김영호 지음, 이용규 그림 / 어린이나무생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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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에 꼭 알아야 할 한국사/김영호/이용규/나무생각] 우와~~열 살 한국사!^^

 

우와 한국사닷!!^^

지나간 이야기인 우리의 역사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옛날 옛적 이야기다. 역사는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기에 우리 모두가 당연히 관심 가져야 할 이야기다.

 

초등학생이 되면 역사에 관심을 가질 시기다. 동화와 위인전에서 만났던 역사를 5학년이 되면 배우게 된다. 하지만 3, 4학년 단계에서도 연관된 문화재들을 통해서 배운다. 그러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학교에서 우리 역사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역사를 어려워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오천 년이나 이어진 긴 이야기를 한꺼번에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단어들에 한자어가 많아 어려울 것이고 과거의 문화, 풍습 등을 본 적도 없기에 더욱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역사 만화나 역사 동화,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미리 익힌다면 아무래도 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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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에 꼭 알아야 할 한국사.

사회와 역사로 관심이 넓혀지는 초등학교 3~4학년 들을 위한 책이다, 5학년에서 배울 한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익힐 수 있는 스토리 형태의 한국사다. 쉽게 쓴 글이지만 내용은 꼼꼼하고 친절하다.

 

주인공 우람이의 가족과의 대화,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역사 이야기를 친근하고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45억 년 전 지구가 태어난 이야기, 10억 년 전 지구에 생명체가 나타난 이야기, 300만 년 전에 최초의 인류가 나타난 이야기, 4만 년 전 현생 인류가 나타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원시 사회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문명을 이루며 지구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인간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인류는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자유로워진 손으로 사냥을 하고 도구를 만들었다. 도구를 만들게 되면서 정착하고 모여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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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플러스' 코너를 통해 깊고 풍부한 자료와 사진, 도표들이 설명되어 있다.

단군 신화, 고조선 사회의 모습, 고조선의 8조법, 반구대암각화, 한반도 국가 연표, 호류사, 대조영과 발해, 장보고 장군과 청해진, 고려의 문화재, 세종대왕의 업적들, 산업 혁명, 조선의 실학자들, 일제 강점기, 선거, 민주화 과정들 등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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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끌리는 건 주제별로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한류는 언제부터?, 역사도 장점과 단점이 있다, 멋지게 이긴 전쟁들, 오랜 역사를 품은 한강, 끈질기게 나라를 지킨 우리 민족, 역사를 바꾼 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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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원시 시대부터 고대사 중세 근 현대사를 두루 총정리 한 책입니다. 스토리가 있어서 읽는 재미가 있다. 초등 사회 5학년 교과 연계 추천도서다.

역사 공부는 온고지신이다. 옛 것을 알고 오늘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과거의 실수를 거울삼아 오늘의 나침반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한국사다. 흥미진진한 엣날 엣적 이야기다.

열 살이라면 알아야 할 조상들의 삶의 자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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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조선건국사 - 드라마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고려멸망과 조선 건국에 관한 얽히고설킨 흥미진진한 이야기
조열태 지음 / 이북이십사(ebook24)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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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조선건국사]드라마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조선개국과 정도전의 타이밍!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틀, 국가적 기틀을 잡는데 큰 기여를 한 정도전. 이름만큼이나 그는 도전적인 인생을 살았을 텐데.

정몽주를 따랐던 그가 정몽주에 등을 돌리면서까지 조선개국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결국 조선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개국공신이었던 그가 어떻게 해서 간신이란 누명을 쓰게 되었을까. 또 요동 정벌과 위화도회군의 결과, 무섭게 떠오른 시골 무사였던 이성계, 그는 어떻게 해서 백성들의 피를 보지 않고 왕좌에 올랐을까.

 

 

 

 

이 책은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쓴 조선 건국 이야기다.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조선시대에 기록된 것이기에 다분히 조선의 입장에서 쓴 고려 말, 조선 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조선이라는 승자의 관점에서 쓴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정도전의 이야기보다 고려와 이성계 이야기에 더 초점이 맞춰진 책이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TV드라마 <정도전>, <기황후> 등으로 고려사가 재조명되고 있기에 더욱 눈길을 끄는 책이다.

 

 

 

고려 말은 무신정변과 원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왕권이 약해져 있었다.

왕위에 오른 공민왕(31대)은 왕권강화를 위해 신돈과 함께 개혁정치를 펼쳤다. 개혁적인 학자 이색의 귀국으로 힘을 얻은 공민왕은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공민왕의 강인한 성격과 지독하고 치밀해서 무섭기까지 한 계책들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등장도 공민왕의 개혁과 맞물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개혁에는 북벌정책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기황후의 아들이 원나라 황태자에 책봉된 시점이었다. 원의 소속이던 쌍성총관부의 장수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쌍성총관부는 원래 고려 땅이었기에 고려인, 고려 장수들이 많았다. 원나라 소속이던 이자춘이 공민왕을 돕겠다고 자발적으로 항복하면서 공민왕은 원으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다.

 

공민왕은 유인우를 동북병마사로 임명하고 기황후의 일가인 기철 일당 제거에도 성공한 뒤에 원의 내정간섭기구인 정동행성이문소를 폐지하고 변발과 호복도 금했다. 원나라 연호를 쓰지 않겠다고 공표하고 선왕에게 올리는 시호와 국가의 제사 의식도 다시 고려 의식으로 회복했다.

그리고 이자춘의 도움으로 쌍성총관부 탈환에 어렵지 않게 성공을 하면서 옛 고려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 기세를 몰아 요동 진출까지 노리게 된 것이다. 요양행성일대는 원래 고구려 땅이었고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요동 정벌은 원래 고려의 땅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원이 몰락하면서 한족인 홍건적의 1,2차 침입은 고려의 국력을 더욱 약화 시켰다. 하지만 아직도 북원이 존재하던 시절이라서 무인들의 힘이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나하추의 침입이 있자 공민왕은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게 된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나하추 부대는 이성계의 유인, 매복 작전에 말려들어 거의 전멸되기도 했다. 나하추 부대의 퇴각으로 시골 무사 이성계의 명성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성계는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최영과 이성계의 등장은 북방 전쟁과 왜구 토벌의 승리로 얻은 것들이었다. 이성계는 여기서 쌓은 세력을 기반으로 조선 건국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시대가 영웅과 무장을 필요했던 시대였으니 어쩌면 조선의 건국은 당연한 귀결이었을까.

 

 

친정이 공민왕에게 몰살된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즉위 시킨다는 교서를 받아낸다. 그 뒤 공민왕은 암살을 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무신정변과 원 간섭기를 지낸 고려에 공민왕의 개혁은 필수불가결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왕권 강화에 집착하다 죽음을 당했지만 공민왕의 불벌정책이 없었다면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 고려를 뒤엎은 조선은 종묘에 공민왕의 신위를 모셨다는 것을 봐도 조선에서 조차 공민왕은 훌륭한 임금으로 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편 정도전은 19세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가 이색, 정몽주, 이승인 등과 인연을 맺게 된다.

성균관이 중수될 즈음 정도전은 부모의 무덤을 지키느라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를 탐독하는 정도였다. 임금이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지 않고 폭정을 휘두르면 역성혁명도 가능하다고 한 맹자. 맹자의 왕도정치와 민본사상, 역성혁명에 대한 자극을 받았을까. 고려의 충신이던 정몽주의 선물이 역성혁명을 기반을 제공했다면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그렇게 그는 유학, 역사, 병법, 불교, 수학, 의학 등 다방면에 걸친 책을 섭렵하게 된다.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우게 되는 시점에서 고려에서는 2차 요동정벌 명령이 내려진다. 하지만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게 된다. 상관이자 실세인 최영의 명령을 어길 만큼 이성계의 위상과 그의 군사력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이유는 4가지였다.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덥고 비가 많이 와서 활의 아교가 녹기에 사용하기 어렵다.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른 일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해서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성공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정몽주의 죽음 등 피의 수청이 있었지만.

 

 

공양왕이 쫓겨난 뒤 5일간 고려에는 주인이 없었다. 신하들이 이성계를 추대했지만 그가 사양했기 때문이다. 관례상 바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형식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신하들의 거듭된 요청에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드디어 왕위를 받아들였다. 1392년 7월 17일이었다.(책에서)

 

 

 

 

고려의 왕위를 계승한 이성계는 처음에는 고려의 국호, 고려의 의장, 고려의 법제를 그대로 사용한다. 하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그렇게 새 왕조 건국에 있어서 정도전의 이론적 토대가 등장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은 명분이었다. 고려의 명이 다했음을 알려야 했고 조선의 태동이 불가피함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념이었다. 고려의 불교에 맞설 유교적 이념.

그런 기초를 세우기에는 정도전의 박식한 지식과 지혜가 폭넓게 활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도전이 새 왕조 건설에 기여한 바는 엄청난 것이었다.

새 왕조의 수도를 결정하는 일, 궁전, 궁문, 도성문의 이름 짓기, 도성 내외의 49방의 이름 짓기, 군사제도 개혁, 병법 개혁, 요동수복을 위한 전쟁준비, 사병의 공병화, <경국대전>의 기초를 마련 등…….

 

 

조선건국에서 최대공신이었던 정도전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신권 정치를 펼친 개혁파였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과는 늘 라이벌 관계였다. 이방원은 야심이 커서 왕권정치를 주장했다.

결국 이방원에게 숙청당하게 된다. 정몽주처럼.

뛰어난 화술의 소유자, 핵심을 찌르는 설득력의 소유자, 방대한 독서량, 폭넓은 지식을 지닌 개혁적인 학자 정도전.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백성들이 흘린 피는 없었지만 권력층 사이에서의 피비린내는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따르던 정몽주와 등을 돌려가면서까지 정도전에게는 새로운 왕조가 이 땅과 백성들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을까.

 

어쩌면 고려 말의 무수한 전쟁, 암투가 국력과 왕권을 약화시킴으로써 야욕을 가진 이성계와 역성혁명의 의지를 가진 정도전의 만남을 역사적 만남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고려가 계속 되었더라면 세종의 한글창제가 가능했을까. 만약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말고 그대로 치고 갔다면 요동정벌이 가능했을까. 당시 명은 이제 시작단계라 어수선한 상황이었으니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조선이 명에 사대하지 않고 세력을 키워갔다면 조선이 그렇게 나약하게 망하기만 했을까.

 

 

단순하게 알고만 있던 역사적 사실에서 긴 이야기들을 읽으며 역사도 타이밍임을 생각한다.

우연과 필연의 틈바구니에서 위인과 명장의 만남, 망국과 개국의 역사도 분명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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