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소년을 찾아서
정선엽 지음 / 연지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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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소년을 찾아서] 영감과 깨달음을 준 빨간 머리 소년은 어디에...

 

제목처럼 표지 그림이 빨간 머리 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소설 속에 나오는 카페에서 일하는 빨간 머리 소년을 표지그림으로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대개 소설은 작가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저자는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여러 교회에서 일했지만 달아나거나 쫓겨나거나 했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로서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두기에는 교회라는 폐쇄적인 공간이 갑갑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소설에서도 삶에 적응하고자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럽의 유명한 신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주인공은 그 곳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글도 쓰고 있다. 종교개혁유적지나 프로테스탄트 유적지, 성당, 신학교를 안내하는 동안 한국에서 온 여러 여행자들을 만나게 된다. 보물섬 만화를 그리며 보물섬을 찾고 있다는 여자, 유명한 신학교 탐방을 온 예비 목사 부부, 가이드의 존재를 알고 다시 목사의 길을 가라는 여행자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깨닫게 한 사람은 빨간머리 소년이었다.

 

빨간머리 소년은 괴짜 시인이 살고 있는 간판이 없는 서점에 근무하는 아이였다. 주인공은 고래의 오렌지 뱃속 같은 서점에서 빨간 머리 소년을 만나면서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알게 된다. 꿈을 간직한 채 앞만 보고 달리기를 하던 어릴 적 순수한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달리기를 잘하던 소년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담임의 추천으로 육상부에 들게 된다. 잠시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내 부상으로 인해 합숙훈련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자퇴로 이어진다.

 

주인공이 달리기를 하던 소년 시절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어릴 적 순수했던 시절을 동경한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찾아 다닌다고해서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텐데..... 어쩌면 빨간머리 소년이 주인공에게 영감과 일깨움을 주진 않았을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욕이 샘솟는 존재이진 않았을까. 소설에선 나타나지 않기에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쩜 주인공의 방황하는 모습이 보통의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일찍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을 잘 분석한다고 해도 좋아하거나 잘 하는 일을 찾는 게 쉽지는 않기에 부단히 부딪치면서 알아 갈밖에. 어쩌면 매일 달리던 어린 시절처럼 지금도 그렇게 달리고 싶었을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영감과 깨달음을 주는 빨간머리 소년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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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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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은근히 끌리는 마성의 남자, 오베라는 남자~

 

소설이 영화화 된다는 건 그 내용이 분명 재미있다는 뜻이리라. 그 내용에 보편적인 관심을 끄는 흥밋거리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리라. 대중을 포복절도 시킬 유머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시사성이 강렬하거나, 그도 아니면 진한 감동으로 눈물샘을 자극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영화화 된다는 소설 오베라는 남자는 어떤가. 약간의 유머, 약간의 시사성, 약간의 감동이 버무려진 소설인데 은근히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처음엔 이 남자 왜 이래?’ 했다가 점점 이 남자 진국인데!’로 바뀌는 캐릭터다.

 

 

얼핏 영화화 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은 100세 노인과는 비슷한 듯 다른 코드다. 영화에서는 오베가 어떻게 그려질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서의 오베는 진흙 속의 진주 같은 매력 넘치는 남자다.

 

오베는 59세 꽃 중년의 남자다. 그는 시계같이 정확한 원칙주의자다. 시대 조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일에 성실히 최선을 다하는 남자다. 말보다 행동으로 남자다움을 보이는 남자다. 문제는 세상이 점점 오베 같은 남자를 뒤쳐진 남자나 후진 남자로 본다는 것이다. 오베는 세상의 흐름에 따르기보다 자신의 원칙을 지키려는 소시민일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오베를 은근히 무시한다.

 

예를 들면, 모든 이웃이 외면을 중시하고 허영에 빠질 때도 오베는 기능과 실용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오베는 후방탐지기나 하이브리드 차량을 갖는 것보다 후진할 수 있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구 하나 가는 일에 일꾼을 부르기보다 자신의 도구상자를 가지고 자신이 직접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직성이 풀리고 차는 주차공간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다. 그리고 알아듣기 힘든 최첨단 컴퓨터 설명에는 짜증을 참지 못하는 남자다.

어쨌거나 그는 시계 같은 남자이기에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고 정확한 양의 커피를 내린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정확한 시간에 마을 시찰을 하면서 불법 주차 차량과 쓰레기 투기 등을 점검한다. 그는 매사에 정확하고 불필요한 것은 없어야 직성이 풀리는데 세상은 점점 스마트화되면서 불필요한 것이 늘어만 간다. 그리고 문제는 그가 아내를 먼저 보내고 쓸쓸히 사는 남자인데다 갈수록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다는 점이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씩이나 된 오베는 그녀 없이 산다는 게 자꾸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오베는 이제 평화롭게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통하는 이웃만 있어도 살 맛 나는 세상이 아닌가. 하지만 원칙을 강조하는 까칠한 오베에게 이웃들은 여유를 가지라고 조언하거나 조금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대화 코드가 맞지 않는 세상에서 오베가 선택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오베는 자살을 하려고 그의 성격대로 철저한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유서를 작성한 뒤 아내가 좋아할 가장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오베와 주변 인물들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이다. 비싼 첨단 기기에 의존하면서 기본을 지키지 않는 이웃들과 실용성과 필요성을 중시하는 오베이기에 오베는 이웃들과 늘 부딪치게 된다. 외면과 겉치장을 중시하는 주변 사람들과 기능과 원칙을 중시하는 오베와의 접점이 없기에 서로가 늘 큰소리를 내게 된다. 그러니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면 떠나는 수밖에. 하지만 오베에겐 세상을 떠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

 

자신과 맞지 않는 세상, 스스로 해 볼 생각은 않고 뭐든지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세상, 점점 더 나빠지는 세상과 작별하려고 하는 순간 오베에게 이웃들이 들이 닥친다. 시비를 걸거나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하던 이웃들이 오베가 자살하려는 순간마다 오베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트레일러를 단 차의 후진을 도와주어 고맙다며 비스킷을 들고 오기도 하고, 라디에이터를 고쳐달라는 이웃, 사다리를 빌려달라는 이웃, 병원까지 태워달라는 이웃, 선로에 떨어지려다 외려 먼저 선로에 떨어진 남자를 구하게 되는 상황 등 자살의 순간마다 방해꾼이 등장하다니.......

 

삶의 끝자락에서 무의미함을 느꼈던 오베는 그렇게 점점 할 일이 많은 남자, 쓸모가 있는 남자, 고마운 존재가 되어간다. 주변 사람들이 점점 오베의 실용성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오베 역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고, 그렇게 서로 소통하게 되고…….

 

진실한 마음을 언젠가는 알아주는 가보다. 옳은 걸 옳다고 하는 게 별난 행동이 되는 세상이지만, 스스로 고치는 일이 별난 행위가 된 세상이지만, 유행과 풍조에 따라야 남들이 알아주는 세상이지만 언젠가는 원칙주의자를 알아주니 말이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중심을 갖고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 살다보면 누군가는 알아주기도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자신의 원칙과 삶의 철학이 있는 오베라는 남자, 세상에 도움이 될 지언정 피해를 준적은 없던 오베라는 남자,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려던 오베라는 남자,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오페라는 남자, 정직하고 성실해서 고지식하게 보이는 오베라는 남자, 남의 돈을 가진다거나 남을 일러바치는 일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믿던 오베라는 은근히 끌리는 마성의 남자지 않나.

 

블로그에서 시작한 소설이 입소문을 타고 출간이 되고 영화화 되다니, 대단한 작가다. 첫 장편소설이 이토록 대박을 터뜨리다니. 놀랍다. 게다가 30대 중반의 저자가 50대 후반 남자의 심리와 생각을 세밀하게 파헤치다니, 대단타. 영화에선 누가 주인공으로 등장할까, 오베라는 남자를 어떻게 그려낼까, 궁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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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이룬 안중근의 피 달걀이 걸어 간다 : 베델과 후세 4
이영현 지음 / 하우넥스트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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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이룬 안중근의 피] 안중근 의사와 언론인 베델, 인권 변호사 후세가 펼치는 통일한국 이야기

 

한국사에서 가장 뼈아픈 시기라면 일제강점기 전후가 아닐까.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기고 강토와 물산까지 빼앗겨야 했으니까. 본래 무수한 외침을 받은 민족이었지만 선조들은 언제나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지켜냈고, 비록 중국의 속국으로 지내기도 했지만 몸과 정신을 지켜왔던 선조들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엔 일제가 이 땅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니까. 그러니 그런 환경에서 독립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이들을 보면 늘 존경하게 된다. 존경에 강약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단연 안중근 장군이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다시 살아나 남북 분단의 현실을 본다면 무슨 일부터 할까. 아마 통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까.

 

 

소설에선 안중근 의사(1879-1910)와 일본인 인권 변호사인 후세 다츠지(1880-1953),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 등 그 시대를 살았던 실제 인물들을 다시 살려내어 통일 한국을 이루는 여정이 그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외쳤던 두 외국인 후세와 베델, 부당하게 사형판결을 받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통일 한국에서의 재판,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가는 과정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사실을 바탕으로 그려낸 가상의 이야기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후세 다츠지는 평등과 인도주의적 신념으로 일본 내 하층민의 권리보호에 애썼던 변호사였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선과 대만 등 식민지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변론해 준 변호사였다.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조선에 대한 일본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억울하게 당하던 한국인과 대만인들의 인권을 위해 변론해 준 인권 변호사였다. 그는 19192.8 독립선언으로 조선 유학생들이 잡혀가자 조선 유학생들을 변론하기도 했고, 1920년대 의열단 사건과 관련한 변호도 담당했으며, 일본의 조선 토지 수탈과 관련한 조사를 위해 조선을 방문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자행한 조선인 학살사건을 비판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은 1904년 영국 크로니클 지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 취재차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인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세운 언론인이다. 그는 박은식, 신채호, 장지연, 안창호들과 함께 신문을 통해 일제에 억압받는 조선인의 실상, 을사보호조약의 무효, 명성왕후 시해사건, 항일무장 투쟁, 헤이그 특사 파견 보도, 국채보상 운동 등을 국내외에 알리거나 국민들에게 항일 사상이나 계몽사상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언론 활동으로 탄압을 받다가 벌금형과 금고형을 받게 되면서 심장병을 얻었고, 결국 37세의 나이에 조선에서 생을 마감했던 언론인이었다.

 

베델은 힘없는 조선 백성들의 인권,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후세 역시 조선의 독립 운동과 민중운동을 적극 지지했던 공로로 2004년에 뒤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너무나 유명한 우리의 영웅이다. 그가 동지 열한 명을 모아 단지동맹을 만들어 손가락을 잘라 대한 독립이라는 혈서를 쓴 것, 일본의 조선 침략이 부당함을 알리고자 이토 히로부미를 성공적으로 저격한 일, 재판정에서도 떳떳하게 동양평화를 근거로 이토의 죄를 고발하기까지 한 대범함, 31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조국을 위해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는 늘 심금을 울린다.

 

소설은 후세 다츠지가 꿈속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고 언론인 베델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이 안중근 의사의 소원과 가르침으로 통일 한국을 열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편과 반대편에 서서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사람 후세와 자신의 목숨보다 조선의 억울함을 알리고자 애썼던 베델이 꿈속에서도 정의의 편에 서는 이야기다. 이들과 함께 저 세상에서도 한국전쟁과 분단을 안타깝게 여기는 안중근 의사가 통일 한국을 이루고 지금까지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간다는 역사 판타지다. 실제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10326일은 안중군 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올해 2015326일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순국한 지 105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책이 유독 끌렸다. 이 책은 안중근 의사의 소원인 통일 한국을 이루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기에 더욱 의미있는 책이다. 민족과 나라를 떠나 의로운 일에 헌신과 희생을 보여준 베델과 후세에게도 존경과 감사를 드리고 싶다. 안중근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통일 한국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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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과 세바스찬
니콜라 바니에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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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과 세바스찬/니콜라 바니에/밝은세상]양치기 소년과 떠돌이 개의 우정과 용기~

 

공감은 인간과 인간 관계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공감을 나누고 우정을 나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말 못하는 동물과 인간이 서로 공감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따뜻하다. 특히 개와 인간이 서로 공감하고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에선 신뢰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서로를 믿고 배려 한다면 개든, 동물이든 인간과의 우정이나 의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1960년대 프랑스 국민드라마였던 TV드라마 벨과 세바스찬을 새롭게 리메이크 한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든다. 개와 인간도 서로 믿고 배려한다면 친구 이상의 공감을 나누지 않을까.

 

 

소설의 배경은 나치가 유럽을 점령한 시절의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지대다. 알프스 산자락에서 할아버지 세자르, 누나 앙젤리나와 함께 사는 세바스찬은 이제 여덟 살의 어린 양치기다. 세바스찬은 학교를 다니지 않기에 친구가 없이 늘 외롭게 알프스 자락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닌다. 그러다 떠돌이 개 베트를 만나게 된다.

 

떠돌이개 베트는 마을 사람들이 양을 잡아 먹은 범인으로 여기고 잡으려던 개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베트를 만날수록 양을 잡아먹은 범인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베트가 양을 잡아 먹은 범인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베트와 더욱 가깝게 지낸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소년 세바스찬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베트와 친하기 위해 조금씩 다가간 방법이다. 아이들에겐 친구를 사귀는 본능이 내재하는 걸까. 세바스찬은 베트와 친구가 되기 위해, 베트가 출물하는 곳에 가서 베트를 기다리거나 치즈나 빵 조각 등 먹을 것을 주고 오거나 자기 손수건을 놓고 오기도 한다. 심지어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세바스찬의 노력이 통한 걸까. 베트는 세바스찬 가까이 오게 되면서 서로 우정의 냄새를 교환한 뒤 그렇게 알프스 친구가 되어 간다. 세바스찬은 베트와 함께 낚시도 하고 수영도 하던 중 베트가 흰 털을 가진 암캐임을 알게 되면서 이라고 부르게 된다. 늑대들이 양 우리를 공격한 날, 벨은 양치기 개의 본능을 살려 양을 지키기 위해 늑대들과 혈투를 벌이면서 할아버지의 인정도 받게 된다.

 

한편, 마을엔 독일 군이 점령한 상황에서 젊은 의사 기욤은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스위스로의 도망을 돕고 있다. 누나 앙젤리나도 비밀스럽게 기욤을 돕는다. 물론 벨과 세바스찬도 유대인 도망자를 돕게 되고......

 

독일군 중위의 반전이 스릴 있다. 엄마가 계신 스위스를 아메리카라고 듣고 자란 세바스찬의 스위스 행은 위험해서 아슬아슬하다. 게다가 독일군의 추격에 긴박감마저 느끼게 된다. 벨과 함께 눈덮인 알프스를 안내하며 유대인 도망자를 돕는 모습에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생각나기도 하고......

 

 

떠돌이 개와 외로운 소년의 우정을 보며 종의 한계를 초월한 신뢰와 사랑의 승리를 느끼게 된다. 벨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이나 위험스런 상황에서도 자유를 찾으려는 유대인들을 안내하는 모습에선 대단한 용기를 배우게 된다. 양치기 소년과 떠돌이 개의 깊은 우정과 용기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뭉클해진다. 소설을 영화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2014년 영화 벨과 세바스찬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웃한 영화관에서는 예고편조차 본 적이 없다. 감동적인 영화를 놓쳐서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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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꿈결 클래식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민수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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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카프카 단편선, 실존의 의미를 깨치게 하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순간 자신의 모습이 흉측한 벌레로 변신했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대개 현실을 부정할 것이다. 벌레로의 변신이 한 순간의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곧 깨어나게 될 잠깐의 꿈이라고 말이다. 어쩜 현실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벌레에 대한 대우가 아닌 인간적인 대우를 바랄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던 외판사원인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의 몸이 바퀴벌레 같은 혐오스런 벌레로 변한 것을 알고 경악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변신을 걱정하기보다 놓친 새벽 기차를 생각하며 출근을 서두르려 한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망각한 채 여전히 출근과 회사의 비난, 가족의 부양문제를 고민한다. 시간이 흐르고 출근 시간이 지체되자 결국 회사 지배인이 집으로 찾아온다. 지배인은 갑옷 같은 딱딱한 등, 아치형의 딱딱한 배 마디,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 더듬이까지 있는 벌레를 보고 경악해서 돌아간다.

 

식구들은 흉측한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의 모습에 식겁을 한다. 평소 그레고리와 친했던 여동생은 처음엔 오빠를 걱정하며 먹을 것을 갖다 주지만 이내 지쳐간다. 어머니 역시 처음엔 아들을 걱정하다가 점점 불편해 한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방에 갇혀서 여동생이 주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서 점차 벌레의 삶에 적응해 간다. 그레고리는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던진 사과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한다. 이전에는 자신이 가족을 돌봤다면 지금은 자신이야말로 가족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가족 중 누구 하나 그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돌봄을 주지 못한다.

 

결국 이대로 살 수 없다며 절규하는 여동생을 보며 가족들은 벌레를 내쫓기 위해 궁리를 한다. 며칠을 굶은 그레고리는 말라서 죽게 된다.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각자 결근계를 쓰고 하루 휴식 여행을 떠난다. 이들은 전차를 타고 교외를 가면서 아들의 죽음, 오빠의 죽음에 슬퍼하기보단 집을 옮겨 분위기를 바꿀 생각과 계획으로 희망에 차 있다. 더구나 어느새 그레고리의 부모는 성숙한 딸을 보면 신랑감을 찾을 때가 됐다며 새 삶과 새 꿈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사람과 벌레의 대화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벌레로의 변신은 더 이상 소통 불가를 의미할 것이다. 벌레 취급 받던 밥벌이 아들이 결국 벌레로 변신하는 모습에 가족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불편해 하고 징그러워 한다. 아들을 이해하고 안쓰럽게 보기보다 도망가고 회피하고 부끄러워 한다.

 

밥벌이 기계던 아들의 죽음, 가족애와 인간애가 없는 가족, 아들의 죽음보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는 모습을 보며 이들에게 아들의 존재가 있기는 했을까 싶다.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자신의 모습이 결국 바퀴벌레로 변신했다니. 낯설지만 슬프다. 너무 슬퍼서 웃긴 이야기다.

 

저자인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체코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자수성가한 다혈질의 아버지와 조용하고 사색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독선적인 폭군 아버지에게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해 노동자재해보험국의 샐러리맨으로 살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 소설은 카프카의 삶이 투영된 작품이다. 자신처럼 비루한 샐러리맨의 슬픈 종말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는 없고 자신을 돈 버는 기계로 도구화하는 삶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고 싶은 실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밥벌이로 타성에 젖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 독선적인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벌레 같은 삶을 투영한 소설이다. 자신의 현실과 내면의 갈등을 잘 드러낸 실존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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