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문장들~!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분가루처럼 엷게 떨어져내리는 햇빛뿐이었다. 내가 들은 것은 환청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입안쪽의 살처럼 따뜻하고 축축한 느낌이 내 몸을 둘러싸고 있음을, 내 몸 가득 따뜻한 서러움이 차올라 해면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떠돌던 고추잠자리가 잠깐 물에 스치듯 꽁지를 담갔다 뺀 순간이었을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햇빛이 사위었다는 것뿐. - P50

인생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뒤를 이을 어떤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 P97

동네 뒤터에 천막을 친 서커스단에서 종일 떠들어대던 풍각쟁이, 만담가도 쉴 참인 저녁답이라 가끔 땅거미를 재우며 스쳐가는 바람 소리뿐, 사위는 조용했다. - P107

나는 다시금 소설책 읽기에 몰두했고, 퇴근 후면 그 무렵 발견한 조용한 찻집에서 한잔의 차를 시키고 상업학교 졸업, 경리 직원 2년 경력의 내 앞에 놓인 미래를 창밖의 풍경처럼 쓸쓸히 내다보며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이란 다만 비바람 치는 날 손안에 간직한 찻잔의 온기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찻잔이 싸늘히 식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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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왜 때리는 거지? 왜 내 남편은 치료도 받아보기 전에 그렇게 빨리 떠난 거지? 어떻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그녀는 댓돌에 앉은 채 엄마가 알려준 방법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아픈 엄마를 버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엄마를 땅에 묻어주지 못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 그런 일이 있다. 그건 항상 그랬던 일이다.
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그래, 개성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었다. - P55

엄마가 벤치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별다른 감정 없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지쳐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등지고서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도 엄마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 P134

그때의 내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측량할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지구 밖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유한함을 위로했다. 우주에 비하자면 나는 풀잎에 맺히는 물방울이나 입도 없이 살다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았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내 존재가 그런 생각 안에서 가벼워지던 느낌을 나는 기억했다. 무리를 이루는 듯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철저히 혼자이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있던 물질들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껴왔던 슬픔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그 순진무구한 사랑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차츰 빛을 잃어갔고, 그 자리는 현실적인 크기의 희망으로 대체됐다. 나의 숨쉴 구멍이었던 존재가 일이 되고, 나의 가능성이 한계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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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열 받는 이야기! 사위가 바람 피워 이혼하는데 딸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라니! 이런 부모라면 안보고 살겠다. 우리 엄마는 뭐라고 할까나?!

그와 이혼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입은 상처보다도 이혼당하고 혼자가 될 사위를 신경썼다.
‘나는 너는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 약한 애가 나중에 자살이라도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남자에게 쉽게 공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혼을 언급하며 나를 욕했듯이, 그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바람피우는 계기를 만들었을 나를 상상하며 비난했듯이. 그러나 엄마마저도 자신의 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들에게 공감하고 나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사실에 나는 무너졌다. - P18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내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나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아빠의 모습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아빠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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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31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 요기!ㅜ.ㅜ
제발 참고 살아라 소리는!

햇살과함께 2021-10-31 08:2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어머님들!! 이젠 바뀌셔야 합니다~!!
 

시간이 약탈해간 내 젊음은 육체의 그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지. 그 시절 나는 격렬한 냉소나 깊은 우울, 끝없는 회의가 다신 내게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던 중이었다. 내가 내 인생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난해하게 여기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내가 더는 혼란스러운 상념들에 붙잡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더는 그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어. 그러니까 나는 시간이 나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호출기가 울렸을 때, 나는 이제 허구의 절망을 느끼려고 애를 쓸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어. 그러나 그 사실조차 그리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지. 그 순간 내가 내 삶을 조소하고 있었다는 것도 좀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 P284

생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을, 자신의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절대로 홀로 존재할 수 없어서,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하면, 그 변화가 세상의 다른 것들을 바꾸기도 한다고 하셨어요.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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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보다 많게는 열 살쯤 많을 것이다. 자기도 십 년이 지나면 저렇게 되어 있을까, 다시 생각했다. 저렇게 불안하고 우울하게 안정감 없게 외롭게 가진 것 없게 내쳐진 채 나쁘게, 살게 될까.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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