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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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30년 전쟁에 대한 공부는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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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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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읽고 나서 먹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얼마 전에, 러셀 뱅크스라는 작가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민음사에서 나온 모던클래식 시리즈가 하나둘 절판이 되는 가운데 무려 14년 전에 나온 책들을 구해서 읽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떤 책과 만나게 되는 시점은 어쩌면 이렇게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리의 법칙>은 당장 구할 수가 없어서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산 <달콤한 내세>부터 다 읽었다. 뉴욕주 에섹스군 샘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스쿨버스 참사가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매사추세츠주 뉴턴 출신의 러셀 뱅크스는 생전에 모두 14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양반은 작년 1월에 작고하셨다. 그리고 14권의 책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책은 <달콤한 내세><거리의 법칙>이 전부다. 아쉽다. 두 번이나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지만 두 번 모두 수상에는 실패했다. 아마 최소한 퓰리처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만 있었어도 국내에 더 많이 소개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원서로라도 사서 시도라도 해봐야 하나 어쩌나. 내가 애용하던 전 세계 무료 책배송 서비스 북디파지토리가 망해서 이젠 돈내고 주문장을 날려야 한다.

 

새로운 작가를 느지막하게 알게 되었다는 마음에 평소처럼 횡설수설이 길어졌다. , 이제 본격적인 썰에 들어가 보도록 하자. 1990127, 평소처럼 돌로레스 드리스콜 여사는 샘덴트 마을 아이들을 잔뜩 태운 스쿨버스를 운행 중이었다. 러셀 뱅크스 작가는 돌로레스의 시선으로 아이들이 사는 샘덴트 마을의 이모저모와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 스케치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인디언 혈통의 베어 오토는 아이가 없던 오토 부부가 입양한 아들이다. 메이슨과 제시카는 19살에 베트남 전에 참전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전쟁 영웅이자 수노코 정비소의 사장인 빌리 안셀의 쌍둥이 남매들이다. 숀은 마을에서 망조가 들린 모텔을 운영하는 워커 부부의 외동아들이다. 숀은 다른 건 몰라도 비디오 게임 부분에서는 천재적 재능을 보여준다. 14세 니콜 버넬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자 장차 미스 아메리카 후보가 될 지도 모를 그런 범상치 않은 캐릭터의 소유자다.

 

하지만 이런 우주를 가지고 있던 아이들이 탄 버스가 돌로레스가 개인지 사슴인지 모를 동물을 피하려고 하다가 가드레일을 받고(제대로 설치가 되어 있었다) 모래채취를 위한 파놓았던 얼음물 구덩이로 추락하면서 샘덴트의 비극이 발생했다. 마을 아이들의 절반이나 되는 14명의 아이들이 이 사건으로 사망했다. 미래가 창창했던 니콜 버넬은 척추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됐다.

 

러셀 뱅크스 작가는 대단히 영민한 작가다. 상당히 건조한 시선으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우선 사고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돌로레스 드리스콜의 시선에서, 다음에는 피해자의 아버지이자 마을에서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사업가이자 전쟁영우 빌리 안셀의 시선으로. 그리고 소송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변호사가 빠지면 섭섭하니 뉴욕 출신 55세의 메르세데스를 몰고 다니는 유능한 미첼 스티븐스를 배치한다. 그리고 사건의 피해자 니콜 버넬의 냉소적 시선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돌로레스를 재등장시키면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건이 없었다면 아무 일 없었을 것 같았던 샘덴트 마을의 이면과 치부를 조금씩 드러내면서 독자는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우선 사랑하는 아내 리디아를 잃은 빌리 안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친구 웬델의 아내 리사와 불륜에 빠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 조용하고 보수적인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가 살아 숨쉬는 샘덴트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 알고 보니 남몰래 추악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그리고 돈도 벌고 엄마 역할까지 해야 하는 중압감 때문에 이런 일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그를 이해해 주어야 하나? 작가는 이런 교묘한 설정으로 독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판단해 보라고 묻는 느낌이다.

 

돌로레스 역시 마찬가지다. 몇 년 전 뇌졸중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남편 애봇을 봉양하면서 가장으로 돈을 벌기 위해 스쿨버스 운전이며 차를 운전해서 버는 부수입 전선에 뛰어 들었다. 그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인지, 어지간한 정비는 스스로 한 모양이다. 바로 옆에 빌리의 솜씨 좋은 수노코 정비소가 있었지만 말이다. 샘덴트 출신으로 해당 공동체에 그동안 다양한 역할을 해온 돌로레스가 단 한 번의 치명적 사고로, 마을의 역적이 되어 버린 아이러니는 책에 몰입한 독자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을 떠나야 할 것인가? 지금 미국의 현재 상황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반세기 전, 뉴욕의 한적한 마을 공동체의 정서는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소설 <달콤한 내세>의 가장 문제적 인물이 바로 뉴욕에서 샘덴트 스쿨버스 참사 소식을 듣고 달려온 변호사 미첼 스티븐스가 아닐까 싶다. 그는 다른 탐욕적인 변호사들과는 자신이 다르다고 선언한다.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만, 이런 사건이 터지면 미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변호사들이 사건을 수임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그 중심에는 막대한 손해배상금이라는 금전적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사업 성공의 기회로 그리고 수입의 원천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조금은 다르다고 스스로 변명한다. 이런 아이들이 연루된 사건에 자신을 움직이는 동력은 금전으로 환산되는 탐욕이 아니라 분노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핵분열된 자신의 가족 가운데 마약중독자가 되어 부자 변호사 아빠에게서 끝없이 돈을 갈취하는 딸 조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유능한 변호사 스티븐스는 우연한 사건은 없다는 자신의 믿음에 취해, 경찰 조사를 능가하는 추리력을 발휘해서 사건의 전모를 캐고 승소를 자신하면서 워커 부부와 오토 부부에게서 승소 조건부 수임 동의서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예 무료 변론을 하는 건 아니고, 승소할 경우 배상금의 1/3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이런 점에서 아예 탐욕이 없다고 보는 건 무리가 아닐까.

 

과연 미첼 스티븐스는 유능한 변호사답게 비극에 빠진 샘덴트 마을에 침투해서 현지인들의 관계를 분석하고(리사와 빌리의 불륜에 대해서도 상당한 추리를 전개한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하게 판단하면서 그야말로 컴퓨터 같은 속도로 자신과 자신에게 사건을 수임한 고객들에게 유리한 정황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의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니콜 버넬이 배심원 재판에서 배심원을 설득하는데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는 점을 인식한다. , 과연 니콜에게 맥 컴퓨터로 호감을 산 미첼 스티븐스가 그녀에 대한 예비 심문에서 과실 소송 승리의 쾌거를 이루고 승전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샘덴트 스쿨버스 참사라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이 물 흘러가듯 조용한 삶이 영위되었을 곳에 비극이 도래했다. 러셀 뱅크스는 무덤덤해 보이는 시골 마을의 일상에 대한 리포트로 시작해서, 사건의 발생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복잡다단한 애디론댁 산맥 인근 마을에 사는 인간 군상들의 평범한 위악을 조용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러셀 뱅크스는 자신이 직조하는 서사에 독자를 확실하게 옭아매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렇게 스토리의 올무에 걸린 독자들은 계속해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말이지.

 

돌로레스 드리스콜 여사처럼, 우리는 모두 삶의 어느 순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작가는 보여준다. 평생을 타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공동체의 선한 일원으로 살아왔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런 인물에게 가혹한 짐을 지우기도 한다. 그런 십자가를 회피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 혹은 도주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돌로레스는 다른 선택을 했다. 소설의 어딘가에 나오는 말처럼, 막대한 보상금도 책임자의 사과와 반성도 이미 죽은 사람들을 되살릴 수는 없으니 그저 온몸으로 비난을 맞을 수밖에. 그런 비난과 극복 다음에야 어쩌면 비로소 자기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네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으니까.


[뱀다리] 감히 작년에 읽은 최고의 책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대단했다.


[뱀다리2] 1997년 아톰 에고이앙 감독 연출로 이 소설이 영화화됐다고 한다.

영화로도 만나 보고 싶은데, 너무 오래 전 작품이라 구할 수가 없네. 아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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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1-01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민한 작가의 소설을 레삭매냐님께서 넘 (영민하시게?^^) 정리 잘해주시니 마구마구 읽고 싶은 마음.
민음사 모던클래식은 구하기가 어렵나요?^^ 저는 도서관대출파라서... 중고 말고 도서관에 알아봐야겠어요

새해 첫 시작 어떻게 시작하셨는지요?^^ 새해복 많이 받으시어요 매냐님

레삭매냐 2024-01-01 17:38   좋아요 1 | URL
모던클래식 시리즈는 거의 절판의 운명
에 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판권 재계약이 되지 않아 차례로 절판
되고 있더라는.

예전에는 책을 정말 깨끗하게 읽었었는
데, 언제부터인가 책에 마구 4B 연필로
밑줄도 좍좍 긋고 메모도 하고 그런 스
타일로 진화하다 보니 가능하면 소장각
의 책들은 사게 되더라구요 :>

<거리의 법칙>은 미처 수배하지 못해서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 있는데... 메모
와 밑줄을 긋지 못하니 어렵네요 고저.

오늘 청소와 장보기를 하고 나니 해가
져버렸네요. 새해의 출발 조옿습니다.
감사합니다 얄라님.

2024-01-01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1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4-01-01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셀 뱅크스, 강렬한 작품을 연속적으로 내놓아 주목하고 있는 작가인데 번역본이 별로 안 보여 아쉬운 작가입니다. 저도 이 양반 좋아합니다. 새삼 반갑네요!

레삭매냐 2024-01-01 17:58   좋아요 1 | URL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
번역된 책이 꼴랑 두 권이라니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 중에서도
<콘티넨탈 드리프트>와 <클라우드
스플리터>는 젭알 번역해 주시길.

이제 작고하셔서 새로눈 작품으로
는 만날 수가 없게 되부렀네요.
참말로 아쉽네요.

서니데이 2024-01-01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오늘부터 2024년입니다.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복많이받으세요.^^

레삭매냐 2024-01-01 18: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써니데이님도 햅삐 뉴 이얼~ 되시길
기원합니다 !!!

새파랑 2024-01-02 0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최고의 소설이라 하시니 안읽어볼수가 없군요~!! 레삭매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24-01-02 11:23   좋아요 1 | URL
무려 14년 전에 나온 책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그래도 지금이라
도 읽어서 다행입니다 :>

다른 책들도 캄온 -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자목련 2024-01-02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요^^

레삭매냐 2024-01-02 13:01   좋아요 1 | URL
넵, 자목련님 감사합니다 :>

새해에도 열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독서괭 2024-01-02 1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최고로 꼽으셨는데 절판이라니... 아쉽네요.
새해에서 많이 읽고 써 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24-01-02 13:49   좋아요 1 | URL
작년 말에 허겁지겁 읽어서
올 해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고
합니다. 좀 시간이 지난 다음
에요.

독서괭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열심히 같이
읽어 BoA요.

페넬로페 2024-01-02 18: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딱 한 가지 안 좋은게 있다면 자꾸 신간에 눈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책장에, 도서관에 조금 지난 좋은 책이 많은데 신간에 자꾸 밀려요.
레삭매냐님께서 극찬하시니
이 책도 찜하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작가가 너무 많아서 기쁩니다^^

레삭매냐 2024-01-02 23:50   좋아요 2 | URL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책들에
대한 리뷰와 정보를 올려 주시니...
읽지도 못하면서 꾸역꾸역 사고 또
읽지 못하고 죄책감의 연쇄 반응 ㅋㅋ

해마다 하는 다짐이지만, 올해는 책을
좀 덜 사고 집에 있는 책을 읽자아 ~
고 신년 결심으로 정해 봅니다.

coolcat329 2024-01-10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찾아보니 19년에 읽었네요. 거기다 놀라운 건 <거리의 법칙>도 읽었다고 삭제하고 싶은 독후감에 써놨네요. 읽은 기억이 안 나는데 참 당황스럽습니다.
당시 좋았기에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었겠죠? ㅎㅎ

레삭매냐 2024-01-10 13:00   좋아요 1 | URL
전 좀 늦게 작가를 알게 되서 이제서야
읽었네요 ^^

<거리의 법칙>도 거의 다 읽었네요.
러셀 뱅크스의 책들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는데...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고양이와 할아버지 1
네코마키 지음, 오경화 옮김 / 미우(대원씨아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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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뱅크스의 <거리의 법칙>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출동했다. 평일 오전의 도서관은 한산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책상에 앉아서 신문을 보시고 계셨다. 나도 지난주에는 도서관에서 보수언론의 사설을 읽었지. 요즘은 모든 기사를 온라인으로 소비하다 보니 진짜 신문은 집에서 거울 닦을 때만 사용하게 된다. 콩으로 만든 인쇄잉크로 찍은 어느 신문은 품질이 정말 좋더라. 화장실 세면대 거울 닦는데 아주 유용하다. 세면대 얼룩이 뽀득뽀득 잘 닦인다.

 

843 분류 코드로 가서 <거리의 법칙>을 찾다가 우연히 네코마키 작가의 <고양이와 할아버지>라는 만화책과 조우했다. 이런 게 도서관의 참맛이 아닌가 말이다. 권수 제한으로 다 빌릴 수 없었고, <거리의 법칙><고양이와 할아버지> 두 권을 빌려서 집으로 향한다. 룰루랄라~

 

2년 전에 요시에 상과 사별하고 외롭게 일본의 어느 섬마을 사는 은퇴한 교사 다이키치 씨가 이 만화의 주인공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모두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얼핏 보기에 게으르고 귀차니즘의 정수 같아 보이는 고양이 타마(사부로)가 다이 씨의 보살핌을 받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작고하신 요시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홀로 남게 될 남편 다이 씨를 타마 녀석에게 부탁했다고. 확실히 네코마키 작가는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아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썰들을 왕창 풀어 헤치지는 않는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아주 조금씩 그렇게 50년짜리 이야기 보따리를 슬슬 풀어주신다.

 

다이 씨의 이웃에는 고양이라면 질색하는 어릴 적 시절 동무 이와오 할아버지가 산다. 다이 씨가 입시 준비를 해서 교사가 되었다면, 이와오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아버지의 배를 탄 평생 뱃사람이다. 지금도 배를 띄우고 바다에서 숱한 물고기를 기력 좋게 낚아 올리신다. 그런 그의 주변에 동네 고양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다이 씨와 오랜친구 이와오 씨가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물고기 회를 떠서 사이좋게 마루에 걸터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는 장면은 참 보기 좋더라. 그리고 어느새 주변에서 슬슬 모여드는 냥이들. 할배들만 먹지 말고 자신들에게도 좀 나눠 주라는 눈길 레이저빔을 내쏜다. 이와오 씨가 주섬주섬 물고기들을 잘라서 아기 냥이를 비롯한 고양이 친구들에게 인심 좋게 한턱 쏜다.

 

요시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홀로 남은 다이 씨의 주변을 고양이 타마가 지킨다. 장성한 아들은 대처에 나가 살림을 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아버지를 대도시 자신이 사는 곳으로 모시고자 하지만, 우리의 다이 씨는 단박에 거절한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웃에서 농사지은 완두콩으로 조촐하게 밥도 짓고, 컵청주도 즐기고 그야말로 미니멀한 삶을 즐긴다.

 

문제는 나이든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뜬다는 점이다. 직접 농사지은 무를 공급해 주던 삿짱도 하늘나라로 떠나고.. 지금 1편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2편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좀 헷갈리지만 어쨌든 다이 씨도 큰일(?)을 치를 뻔한다. 매일 같이 들리는 우체국 아저씨의 도움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한다. 만화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네 인간이 삶이 마주하게 되는 생로병사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요시에 할머니와 만남도 아마 다른 고양이 녀석이 이어주었던가? 묘생 10년차의 타마도 아기 고양이 시절, 할머니가 구해줘서 다이 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소심한 남자 다이 씨가 요시에 씨에게 청혼하는 방식도 참 예스럽더라.

 

심장이상으로 쓰러져서도 자신 이상으로 타마를 걱정하는 다이 씨의 모습에서 과연 타마가 그에게는 반려묘 이상의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에서 이런 잔잔한 이야기들을 퍼올리는 네코마키 작가의 실력에 감탄했다. 해가 마루에 든 날 좋은 날, 다이 씨와 타마가 같이 마루에서 낮잠을 즐기는 시퀀스는 과연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쇼와 시절, 마을에서 차출된 젊은이들이 남양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마을의 댕댕이들이 희생양이 되어 끌려가는 장면도 애처롭더라. 무지막지한 권력을 행사하며 아무 의미 없는 전쟁을 계속하던 일본 군부와 정치 시스템을 비난하는 대신, 애꿎은 댕댕이들이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지. 섬마을 특유의 고립감과 미신적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 추락한 미군 비행사의 금발머리를 연상시키던(귀신?) 신원미상의 인물이 록밴드 가수를 꿈꾸던 동네 청년이었던가 어쨌나.

 

올해 9월까지 9권이 번역 출간된 <고양이와 할아버지> 시리즈를 검색해 보니 2016년부터 1년 주기로 한 권씩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75세 다이 씨가 85세 정도 된 모양이다. 아니 그렇다면 타마가 20살 정도 되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의 무병장수도 그리고 냥이 타마의 활약도 앞으로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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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2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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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스트라우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을 그리고 새로운 문학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작가의 책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도전 의식이 뿜뿜하는 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이 책은 민음사 모던 클래식에서 나온 책인데, 절판됐다. 절판돼서 이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자크 스트라우스의 <구원>의 원제를 해석하면 <잭 필제의 수상쩍은 구원> 정도가 될 것 같다. 제목에 등장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바로 11세의 소년 잭 필제다. 이 발칙한 꼬마 녀석은 9살 때부터 마스터베이션의 세계에 잠입했다. 그리고 요하네스버그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수지 마피사를 자신의 제2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반으로 갈수록 이 녀석이 진짜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선 주인공 잭 필제의 인종적 배경으로 말해야 할 것 같다. 아버지 빌럼은 변호사 출신 법조인이다. 나중에 사형 제도가 폐지된 다음에는 판사가 된다. 그는 아프리카너 그러니까 보어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영국인이다. 그러니까 잭은 어려서부터 남아프리카라는 문제적 국가에 사는 하이브리드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보어전쟁을 치를 정도로 아프리카너와 영국인들은 앙숙이었지. 그리고 그 밑에는 그들 공통에게 차별받는 흑인들이 있었고. <구원>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점 중의 하나는 십대 초반의 꼬맹이들이 자신의 엄마 뻘 되는 흑인 아주머니의 노동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때는 1989년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공산주의가 몰락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은 자신들이 보호령이라고 생각하는 나미비아 건너 이웃나라 앙골라의 좌파정권이 불안하기만 했던 모양이다. 러시아 아니 그 당시 표현으로는 소련인들은 그들에게 악마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남아프리카 백인 정권은 앙골라에서 MPLA 정권을 상대로 정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조나스 사빔비의 UNITA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설적 우파 게릴라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의 이름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사실 사빔비라는 이름 때문에 책읽기를 멈추고 한참 동안, 그의 생애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오래 전, 신문 기사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을 다룬 너튜브 영상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런 걸 보면 마냥 너튜브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발칙한 꼬마 잭 필제는 붉은 베레모의 전설적 게릴라 투사 사빔비에 마음에 빼앗겼던 모양이다. 사빔비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이 리뷰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 무난해 보이던 꼬마 잭의 일상에 수지의 아들 퍼시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왠지 꼬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수영장에서 혼자 재미(?)를 보던 잭은 퍼시에게 수치스러운 순간을 들키게 되고, 퍼시를 쫓아내 버리고 만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을까? 결국 수지의 곁을 떠난 퍼시는 대형 사고를 치고 잭이 자신에게 제2의 엄마라고 생각하던 수지마저 필제 가정을 떠나게 된다.

 

사빔비에서 갑자기 엔딩으로 치달아 버렸지만, 그 와중에서도 잭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백인 가정에서 하녀로 일하던 이들이 좋아서 백인들의 뒤치다꺼리를 했을까? 전혀 아니다. 아무런 기술도 없는 유색인종들이 할 수 있는 그것 밖에 없어서였다. 그래서 수지는 아들 퍼시에게 그렇게 종합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가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한 것이었다. 대학 진학이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지 않을 진 몰라도, 퍼시처럼 대형사고를 치는 건 최소한 막아줄 수 있을 거라는 주술적 믿음에서 말이다.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보니 잭의 친구 아버지도 뱀에게 물려 갑자기 죽었다고 했던가? 아니면 자신의 아버지 빌럼이 독사 블랙 맘바에게 물리는 환상을 겪었었나. 인종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상이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수지 아줌마는 잭에게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해 보려면 다시 책을 뒤적여 봐야 하는데 귀찮다. 어떤 이미지들은 이렇게 정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의 기억의 저장고에 남게 되는 건지도. 이 또한 내 맘대로 그리고 오독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잭의 절친 페트뤼스네 가정은 전형적 보어인 가정을 소설에서 대변한다. 영악한 페트뤼스는 친구 잭에게 세상살이의 실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쇼핑몰에서 점잖은 백인 아주머니들을 도와주고 부족한 용돈벌이를 하는 법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페트뤼스였다. 이 녀석들 하여간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보잘 것 없는 여성적 이미지의 페트뤼스였지만 움 프릭(페트뤼스의 아버지)과 함께 나선 사냥에서는 개코원숭이의 얼굴 반쪽을 날려버리면서 진정한 아프리카너로 거듭나게 된다.

 

이 장면은 소설의 어디선가 잭의 누나 리사가 바닷가에서 상어잡이 아저씨와 대판 싸우는 장면과도 일맥상통하는 그런 기시감이 들었다. 이것을 문명과 야만의 충돌이라고 봐야 할까? 잭의 아버지 빌럼까지 나서서 드잡이질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소년 잭 필제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이다. 왜 아프리카너들은 남아프리카의 땅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그 땅의 원주인들은 따로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돌아갈 고향의 뿌리를 잃어버린 이들이 새로운 안식처라고 그곳을 정하고 나름대로 만든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고약한 방식의 차별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표현대로 모든 것이 비정상인 나라에서 구원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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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1-10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모던 클래식을 사랑하시는^^

새로운 작가에 도전하시는 ^^

그런데 9세에 마스 ㅌㅂㅇ션 세계에 진입한 이 꼬마는 하이브리드 정체성 때문에 손해 본적은 없었나요? 특권(의식)만 누리고 살아도 괜찮았던 삶으로 상상이 되어서요.

매냐님의 도전정신 반의 반만 따라가도 훨 바빠질 것 같아요 모던 클래식 1권도 안 읽어본 저!

레삭매냐 2024-01-10 22:35   좋아요 1 | URL
세상에 십수년 전에 모클이 나왔을 적
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고 있다가 이제
사, 점점 절판이 되어 가는 마당에 뒷
북치는 저란 닝겡...

제 생각에 이 발칙한 꼬맹이의 하이브
리드 정체성은 훗날 작가로서 글감이
적어도 부족하지는 않는 그런 장점을
주지 않았을까요?

어려서는 이도저도 아닌 정체성에
고통(?)받았을 진 몰라도 어쨌든 백인
이었으니 알라님 말쌈대로 다 누리고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초란공 2024-01-10 2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던 클래식이란 시리즈를 처음 들어본 자, 인사드려요^^ 존 밴빌도 어서 읽어야하는데 말입니다. 잠시 하루키 옹 책들을 읽어보느라 ㅋㅋ 늦어지고 있네요.

레삭매냐 2024-01-10 22:58   좋아요 1 | URL
수년 전부터 모클이 75권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지라, 독서인들
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못내 아쉬
운 1인이랍니다. 꽤 괜찮았던 기획
이었는데 말이죠.

전 존 밴빌의 <뉴턴 레터>와 <블루
기타>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또다른 8년이 필요할까요...

초란공 2024-01-10 23:00   좋아요 1 | URL
저도 뉴턴 레터는 나오면 바로 사려고요!

그레이스 2024-01-11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작가입니다.^^
저도 처음 듣는 작가는 호기심과 도전의식이 생기는 편요.

레삭매냐 2024-01-11 09:56   좋아요 1 | URL
아마 더 이상 국내에는 소개가
되지 않을 그런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아공 보어인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는 좋은 기회였지 싶습
니다.
 
폭식 광대
권리 지음 / 산지니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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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분양 주택과 임대 주택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정책을 고수하는 단지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읽고 있는 자크 스트라우스가 살던 19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에 따른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했다면, 2023년 대한민국에서는 부에 따른 그야말로 치졸한 차별정책이 백주대낮에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종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아프리카너들처럼 우리나라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왔다.

 

어제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권리 작가의 <폭식 광대>에도 그런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단편이 하나 실려 있더라. 원래는 문제적 표제작부터 시작하려고 했으나... 어쨌든. 제목은 <구멍>. 대한민국의 중심 강남의 어딘가에 위치한 게딱지 마을에 작은 빨간 벌레가 등장하면서 발생한 구멍이 문제였다. 별것도 아닌 작은 벌레들이 지반을 갉아 먹어서 초라한 판잣집들을 연쇄 붕괴시키고 있었다.

 

어느 사회나 별것 아닌 것들이 항상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부에 따른 노골적 차별을 부추기는 언론과 사회 풍조가 나에게는 게딱지 마을을 넘어 그 근처의 백년구에 즐비한 고층 아파트들마저 붕괴시킬 기세의 작은 빨간 벌레와 동의어로 읽혔다.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백년구의 구청장이 이름도 무시무시한 불도저로 바뀌면서 또 다른 욕망이 스물스물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재개발이라는 괴물이었다. 눈엣가시 같았던 게딱지 마을을 불도저로 싹 밀어 버리고 뉴타운 혹은 녹지공원 그리고 천연지하수 개발을 추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불도저 구청장은 선보였다.

 

권리 작가가 구사하는 <구멍>에는 건설 아파트 공화국이 가진 모든 추악한 민낯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던 말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실체가 솟아오른다. 어떻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씁쓸해지는 모르겠다. 너무 현실을 동조해서일까? 결국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공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경고가 이어진다.

 

<광인을 위한 해학곡>에서는 도대체 이해 불가한 현대 미술계 비판의 장이 열린다. 아무리 예술이 주관적 해석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피카소가 창조한 추상미술이 기득권화된 이래 팝아트 등등 고전 미술만 보고 자란 나로서는 도무지 주석이나 해석을 읽고도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난해한 해석으로 미술을 대중과 분리시키려는 그런 음모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 장 콕도를 모방한 게 분명해 보이는 장곡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추적하는 것으로 <광인을 위한 해학곡>은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아니 제목에서부터 예술가들이야말로 광인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선언이 아니었을까.

 

고전 미술가들이 창조를 담당했다면, 최근 현대 행위예술가들은 어렵게 만들어진 창조를 파괴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았나 싶다. 평론가와 예술가들의 협잡 같은 컬래버도 인상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예술 작품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행위가 평론가들의 멋진 포장 버프에 힘입어 전무후무한 예술적 행위로 거듭나기도 하니 말이다. 어쩌면 나도 MOMA를 찾아 한편에서는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다가, 또 폴락이나 앤디 워홀의 변기나 수프 깡통 사진을 보고는 또 다른 차원의 격찬(1도 알지도 못하면서)을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예술은 어쩌면 거대한 자본과 미디어가 총동원된 멋진 사기가 아닐까... 암튼 그렇다고.

 

<해파리>도 인상적이긴 했지만, 본 프로인 <폭식 광대>로 속히 넘어가자. 무려 12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긴 하지만 폭식이라는 기괴한 관음증에 현혹된 우리 대중의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좀 유행이 지나긴 했지만, 한 때 먹방이 대유행한 적이 있다. 어마 무시한 음식들을 그야말로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이듯 입안에 집어넣는 퍼포먼스에 감탄했던 적이 있다. 무도에서 국수를 흡입한 어느 방송인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식성을 자랑하는 이들이 너튜브로 무대를 옮겨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한다. 사람들은 화면에 등장하는 폭식 광대들의 퍼포먼스에 열광한다. 미디어에 공개된 화제는 바로 수익으로 직결된다. 자서전도 대필해서 인세도 벌고, 각종 굿즈들도 만들어서 짭짤한 부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행사장과 미디어 출연 요구도 쇄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한 그런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문제는 소설에 등장하는 폭식 광대가 그렇게 허겁지겁 집어삼킨 음식들을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소화가 아닌 저장 방식을 선택(?)했던 폭식 광대는 결국 방송에서 토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어쩌면 폭식 광대의 추락은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우리도 매일 같이 쏟아지는 너튜브 비주얼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그 내용들을 미처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도 어느덧 너튜브 중독자가 되었지만, 의도적으로 먹방이나 여행 콘텐츠는 기피한다. 왜 나의 즐거움을 타인의 그것에 의존해야 한단 말인가. 구독이나 시청으로 그들의 수익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이 1도 없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잘 먹고(기본적으로!) 잘 사니 무슨 걱정할 필요가 있겠냐고.

 

마지막은 오래 전에 가수 마돈나의 뮤직비디오에서 본 문구로 대신하련다.

타인의 허락에 따라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은 가련하다.”

 

[뱀다리] <폭식 광대>로 드디어 올해 100권 읽기 돌파했다.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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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2-25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 권 읽기 돌파, 축하합니다!!!

레삭매냐 2023-12-25 23:38   좋아요 0 | URL
가까스로 채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