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골드 - 이슬람 제국의 '새하얀 금' 백인 노예들의 잊혀진 이야기 가일스 밀턴 시리즈 5
가일스 밀턴 지음, 이충섭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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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문자로 이루어진 책은 거의 유일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었다. 21세기에는 인터넷과 그에 기반한 너튜브가 그동안 책이 수행해온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아니 대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대체가 되었던가. 동영상 컨텐츠로 만나게 되는 신속한 정보는 몇 시간 아니 며칠 걸려 읽는 책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올드패션 스타일의 우리 책쟁이들은 책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런 걸 더딤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느린 속도로 수집하는 지식과 정보들을 나는 더 좋아한다.

 

대중역사가 가일스 밀턴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사무라이물이 읽고 싶어졌고, 중고서점에 가서 사무라이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사무라이 윌리엄>이 떴다. 그 책은 17세기 초, 일본에 상륙하게 된 영국 출신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윌리엄 애덤스)의 일대기였다. 가일스 밀턴이 저술한 책들이 궁금해져서 하나하나 컬렉션을 시작했다. <사무라이 윌리엄>을 읽고 나서 <향료전쟁> 그리고 <화이트 골드>를 읽기 시작했는데 후자를 먼저 읽었다.

 

<화이트 골드>에서 저자 가일스 밀턴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이트 골드, 백인노예들의 처절한 삶의 추적에 나선다. 아니 백인노예가 있었다고? 노예하면 아프리카에서 북아메리카로 끌려간 흑인노예들 이야기가 아니었나? 수세기 동안 지중해 연안에서 맹활약한 이슬람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영국과 네덜란드, 에스파냐 유럽 각지의 선박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배에 실린 화물들 외에도 그들이 진짜 노리던 상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백인노예들이었다.

 

저자 가일스 밀턴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했다. 당시 편지들은 물론이고, <화이트 골드>의 지분을 양분한 영국 웨스트컨트리 콘월 펜린 출신의 백인노예 토머스 펠로우의 일대기의 상당 부분을 참조했다. 이렇게 멋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료 조사를 위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

 

171511살 짜리 꼬마 토머스 펠로우는 집에서 얌전히 라틴어 공부나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원양 항해에 나섰다.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선장인 삼촌 존 펠로우의 배에 올랐타가 살레 해적에게 포로가 되어 자그마치 23년이나 되는 노예생활을 하게 됐다.

 

살레 해적들은 당시 모로코의 술탄이었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주를 받아 백인노예들을 납치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영국 본토에까지 가서 노예사냥을 벌였다. 살레의 노예시장에서 두당 35파운드에 팔린 백인노예들은 이른바 노예우리에 갇혀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게 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유인이었던 꼬모 토머스 펠로우의 운명을 생각해 보라.

 

토머스 펠로우의 23년 간의 노예생활이 <화이트 골드>의 한 축을 차지한다면, 그를 포로로 잡은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의 엽기적 행태도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분명하다. 오스만 투르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렇듯 물라이 이스마일 역시 왕위계승 과정에서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형제 친지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그가 부리던 검은 친위대는 술탄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이 잡아온 여자 백인노예들은 자신의 하렘에 넣었고, 쓸만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한 남자노예들은 모두 제국의 수도 메크네스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곽 건설에 동원됐다. 술탄의 비인도적 처사는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술탄의 잔혹함이야말로 어쩌면 제국의 통치하는 원동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자식의 자식이라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건장한 흑인 노예를 동원해서 어쩌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지도 모를 아들의 목을 부러뜨리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국가들에게 바르바리 해적들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은 게 아니었을까. 영국에서는 노예로 잡힌 자국의 포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수차례 특사들을 메크네스에 파견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고, 해상에서의 협상협상을 진행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물라이 이스마일은 수차례 협상의 갱신과 파기를 번복했다.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 군주가 아닌가. 게다가 무슬림 통치자들은 대다수가 기독교도들인 백인노예들의 개종을 재미삼아 시도했다. 백인노예들이 반항할수록 그들이 실시하는 족발치기같은 가혹한 고문은 지속됐다. 우리의 어린 포로 토머스 펠로우 역시 고문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배교자가 되었다.

 

포로석방 협상에서 이런 배교자들은 제외가 되었다. 강제의 의한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들은 고려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형식주의야말로 현대 외교에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부조리가 아닐까 싶다. 토머스 펠로우는 이십대 무렵에 강제로 결혼해서, 그곳에서 딸도 낳고 어려서부터 배운 아랍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젤라바를 걸친 배교자 백인노예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술탄의 신임을 얻어 백인노예 출신 용병이 되어 술탄에게 반항하는 제국의 이곳저곳을 진압하기 위해 각지를 누비기도 했다. 그러다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고향 펜린을 잊지 못해 탈출 시도도 해봤지만,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악랄한 독재자 물라이 이스마일의 죽음과 그에 이어진 후계자간의 내전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결국 토머스 펠로우는 영원히 살 것 같았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후, 아내와 딸이 죽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 상태에서 결국 모로코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영국령인 지브롤터를 걸쳐 런던 그리고 마침내 23년 만에 고향땅인 펜린을 밟는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토머스 펠로우가 포로가 된 지 근 100년 만인 18168월 펠로우의 사돈의 팔촌 조카 뻘 정도되는 에드워드 펠류가 이끄는 영국 대함대가 북아프리카 백인노예 무역의 거점도시인 알제를 공격해서 수백 년에 걸친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데 성공한다. 영국인들에 이어 들어온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아 새로운 형태의 노예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에드워드 펠류의 활약으로 트리폴리와 알제 그리고 살레 일대의 백인노예 무역을 일소할 수가 있었다. 토머스 펠로우의 후예들은 그 뒤로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바다로 자유롭게 나갈 수가 있었다.

 

최근 소말리 해변을 중심으로 활약 중인 21세기 해적단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과 행정의 공백기를 파고드는 무법자 해적들의 실체를 엿보게 됐다. 18세기 초반, 비슷한 궤적의 그리던 살레의 해적들은 아예 권력집단과 결탁해서 해상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고 선박에 탑승하고 있던 백인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었다. 이 책의 제목인 화이트 골드가 암시하듯이 해적드에게 포로로 인간들이야말로 수지가 맞는 상품이었다.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그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할 수가 있었고, 그들이 보유한 무기 제작기술 혹은 건축술로 자기가 건설한 술탄 제국의 질서와 안녕을 모도했다. 또 서방 제국들이 비싼 몸값을 내고 자국 출신의 노예들을 되산다고 하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서사의 다른 축에서 토머스 펠로우라는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를 배치해서 사실감을 더하는 작법으로 가일스 밀턴은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과연 글 좀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건 토머스가 펠로우가 고향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펜린으로 돌아온 토머스는 고향에서 돌아온 영웅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고 부모님마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펜린이 낯설었고, 오히려 그가 노예 생활을 했던 메크네스가 더 그에게 편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고향으로 돌아온 지 7년 뒤인 1745년에 토머스 펠로우는 죽었다. 눈물과 고통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그렇게 끝났다.

 

윌리엄 애덤스/미우란 안진의 경우처럼 익숙한 고향을 떠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디아스포라 같은 삶을 산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동질감을 느꼈다. 아울러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무대에 올렸다는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과연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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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 을미사변과 황해 위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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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근대사에 대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됐다. 아니 국권침탈의 시대를 외면하고 싶은 어떤 마음의 발로에서 아예 이 시절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보면 볼수록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8월말부터 읽기 시작했다가 지지부진하던 17번째 이야기들은 어제 하루 작정하고 다시 읽기 시작해서 날을 넘기지 않고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오늘 도서관에 가는 길에 반납하려고 리뷰까지 부지런히 써야겠다.

 

1894723일 경복궁 폴런으로 이미 조선은 망국으로 접어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다음 해인 을미년에도 다시 한 번 조선 왕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궁궐이 털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심각했다. 일단의 일본 낭인들로 구성된 자객들과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합세해서 일명 왕비 처단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계속되는 정변 속에서도 고종 정권의 핵심으로 부활하는 왕비 민씨를 물리적으로 처단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돌리기 시작했다. 친일파 유길준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며느리이자 정적인 왕비를 처단해 줄 것을 일본 측에 요청했다고 하나, 믿을만한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왕비 민씨는 이미 백성들의 온갖 미움을 받고 있는 터여서, 십여년 전 임오군란 당시에도 민중에게 잡혔더라면 바로 죽었을 것이다. 조선 국가를 망국으로 몰아넣은 핵심 인물 중에 하나이자 오직 정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던 그에게 동정이 일지 않는다.

 

어쨌든 일국의 왕비를 처단한 행위는 만국의 지탄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일본이 주도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항거하는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을미사변 후에 구성된 김홍집 주도의 친일내각이 주도한 단발령 역시 의병활동에 불을 끼얹는 효과를 가져왔다. 신체발부수지부모 타령하며 단발령에 극렬 저항하던 유생들의 속마음은 양반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에 더 컸다는 굽시니스트 선생의 지적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와이프가 국가의 정전인 경복궁에서 살해당한 사실을 알게 된 군주 고종은 PTSD에 시달리게 됐다. 그리고 국가의 안위나 군주로서 체면보다 오직 자신의 신변만 걱정하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튀게 된다.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이런 전후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앵무새처럼 아관파천을 외우던 시절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는 기분이랄까.

 

이를 계기로 해서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게 되고, 조선 병탄의 야욕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내비치던 조선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조선을 홀로 다 먹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러시아와 나눠 먹겠다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이 조선 37도 분할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2차 세계대전 후 미소에 의해 분할된 한반도의 미래가 엿보이기도 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해서 다시 정권이 뒤집어지고, 불사조 같아 보이던 총리대신 김홍집과 어윤중이 순검들에게 맞아 죽고 갑오파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은 김윤식은 유배형을 받는다. 그리고 정동파 선수들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비로소 을사오적의 수괴 이완용이 등장한다.

 

한편, 청일전쟁으로 2억냥이라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일본에 할양된 포모사(대만)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대만 할양에 동의했지만, 현지에 있던 외성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남방 양무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장지동은 갖은 꼼수로 대만 할양을 막아 보려고 시도했고, 대만순무 당경승과 대만군무 유영복은 이른바 대만 민주국을 수립하면서 일본에 저항했다.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최초로 해외 식민지 획득에 성공한 일본이 이런 사태를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결국 사단급 병력을 동원해서 타이베이와 타이중 그리고 타이난을 차례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대만 전토를 장악한 일본은 총독을 파견해서 패전까지 50년 동안 대만을 지배하게 됐다. 대만을 일본의 현으로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본 헌법의 테두리 밖에서 예외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것은 식민지 사람들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훗날 조선에서도 써먹게 된다. 이런 방식이 주는 다른 효과로는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특권의식을 갖게 했다나. 위정자들은 상층부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다음의 소소한 이야기들로는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의 대관신에 관련된 에피소드들, 이홍장의 세계유람 그리고 거대한 청제국을 무너뜨리게 되는 젊은 혁명가 손문(쑨원)의 굴기가 이어진다. 하와이에서 성공한 형님의 도움으로 미주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손문은 광저우에서 기의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도주한다. 뜻을 같이 하다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동료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청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손문은 역적인 셈이다. 나중에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납치되어 있다가 영국 정부의 압력으로 석방되면서 네임드 인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 차르 대관식 잡상편에서 보리스 아쿠닌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오늘 도서관에 가면 빌려서 볼 생각이다.

 

일본의 압력과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시원하게 러시아의 뒤통수를 때리고 환궁한다. , 방대한 경복궁 대신 주위에 외국공사관이 많고 단출한 경운궁이 고종의 픽이었다. 그리고 고종은 처음에 일본이 제의한 칭제건원을 시행하고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망해가는 나라에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지. 아마 세계열강들의 비웃음만 사지 않았나 싶다. 그럴 시간에 개혁과 내실을 다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러시아가 만주에서 러청밀약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보이자, 역시나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이번에는 러시아에게 만한 나눠먹기를 제안한다. 고종을 자기 공사관에 품은 러시아는 조선 경영에 자신감을 품고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영도)에 저탄소를 만들기 위한 조차 요구에 나선다. 중국에서 거점을 만들고 싶었던 독일제국이 칭다오와 교주 조차에 들어가자 부동항을 노리던 러시아가 뤼순을 점거하고 25년짜리 조차를 따내기에 이른다. 세계 최강대국 영국은 독일의 교주 먹기는 양해했지만,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 러시아는 철저하게 견제했다. 갑신 역적으로 몰려 미주로 건너갔다가 미국인으로 신분 세탁해서 조선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한 서재필의 독립협회 주도로 절영도 조차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시도는 무산되고 뤼순 확보에 만족해야했다. 다음 세기에 벌어질 러일전쟁에서 뤼순이 육전에서 가장 결정적 전투의 중심지가 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고s> 에피소드에서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사들의 부고장을 돌린다. 일본이 맺은 불평등조약 갱신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를 필두로 해서, 영국 수상 글래드스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청나라의 공친왕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편을 통해 19세기말 극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열강의 치열한 각축전의 실태를 알게 됐다.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엯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차르 니콜라이의 대관식 즈음에 벌어진 호딘카 압사 사건이 제국의 종말을 가져올 줄 누가 알았을까. 보잘 것 없는 흥중회라는 단체를 설립한 애송이 혁명가가 거대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아마 그런 점에서 훗날 역사를 복기하는 재미가 있지 않나 싶다. 그렇게 역사 가운데 미처 몰랐던 그런 소소한 점들을 애써 전파하는 이 시리즈를 내가 좋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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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9-22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리즈를 읽으시는 분, 훌륭합니다!!!
저도 긴 역사 시리즈를 읽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어요. 계 획 만...
한국 근현대사나 로마인 이야기 같은...
완독하고 나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3-09-23 22:44   좋아요 1 | URL
저는 오래 전에 <로마인 이야기>를
열심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 작가가 극우 성향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바로 끊어
버렸네요. 책을 읽으면서도 영웅주의
사관이 좀 그랬거든요.

그리고 보니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
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네요. 흠...

말씀해 주신 대로 다 읽었을 적에는 왠
지 성취감이 생기더라구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 거문도 Crisis와 방곡령 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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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 선생은 본격 한중일 세계사 권마다 두 개 정도의 굵직한 사건들을 메인 테마로 삼지 싶다. 15편에서는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그리고 그 전편에 해당하는 14편에서는 거문도 크라이시스와 방곡령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한국 근대사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됐다. 국사 공부하던 시절에도 안하던 공부를 이렇게 다시 하게 될 줄이야. 놀랍지 않은가. 바로 이게 책의 힘이지 싶다.

 

15편에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공부했다면, 그 전편이 14편에서는 19세기 내내 영국와 러시아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에 대해 아주 살짝 맛만 보게 됐다. 영국은 1803년부터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하를 막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1세기 가까이 진행된 러시아의 남진 정책은 러시아가 동방에서 영국의 대리인이었던 일본 제국주의에게 패배(러일전쟁)하고 1907년 영러협약으로 종식될 때까지 계속됐다.

 

그중에서도 1885년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판즈데에서 시작된 양국의 충돌은 전면전 위기까지 치닫고 있었다. 어쩌면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은 판즈데 위기로 29년 먼저 시작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1858년 영국의 보석이라 불린 인도를 사수하기 위해 영국 내각은 전시자금 1,100만 파운드를 조성하고 판즈데에서 러시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 동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의 또다른 열강 프랑스와 독일은 영국와 러시아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불똥이 엉뚱하게 동방으로 튀었으니, 조선 남쪽바다에 나타난 영국 함대가 느닷없이 1885415일 거문도를 무단 점거한 것이다. 과연 식민제국주의 모국 다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 영국군은 제국주의 종주국답게 후발 주자들처럼 가혹한 약탈이나 깡패짓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국 신사(?)다운 무단점거라고 해야 할까.

 

조선이 한반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조러 비밀협약을 맺었고, 조선은 유사시 거문도를 러시아 함대를 위한 석탄보급기지로 제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이 선수를 친 것이다. 9월 경, 어찌어찌해서 판즈데에서 벌어진 영러의 첨예한 갈등이 봉합되고 영러전쟁 위기를 넘기게 된다.

 

다음은 갑신정변에서 청군에게 한 방 먹은 일본의 내정이 다뤄진다. 지금까지도 일본 정계를 주름잡는 사족 문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조슈-사쓰마-히젠-도사 네 개 번 소속 인사들이 메이지 원훈의 자리에 올라 일본 정계를 좌지우지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개항 이래 일본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은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일본을 서구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서구 세력들이 일본이 원하는 것을 내줄 리가 만무했다. 일본은 당대 최강국 영국과의 외교에 전념하면서 영국이 불평등조약을 개정해 주면 다른 나라들도 뒤따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영국과의 외교에 전념했다던가.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889년 일본 국왕을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 아래서 서구식 헌법을 발표하고, 다음에는 총선거를 실시해서 형식적 근대화를 완성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파벌정치의 화신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시조새라고 부를 수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3대 총리대신)1888년에 발표한 독트린에 의하면, 일본 본토를 주권선 그리고 한반도를 이익선으로 규정하면서 정한론의 후예로 장차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군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태평양전쟁 당시, 절대방위선 운운하던 대본영의 군국주의자들의 그것과 결을 같이 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막 출범한 의회의 대장성 관료들은 경제개발에 중점을 둔 예산을 짜고 싶었지만, 야마가타를 필두로 한 군국주의자들은 부국강병이라는 기치 아래 군부가 국가 예산을 먹어치우게 되는 시스템을 획책했다. 수년 뒤에 벌어진 청일전쟁의 전쟁배상금으로 벌어들인 2억냥(청나라 2년치 예산, 일본의 4년치 예산)을 종자돈으로 삼아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해 결국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런 전쟁 약발의 맛을 잊지 못해 패전이라는 국가적 망신을 당할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제는 일본의 경제침탈에 맞선 방곡령 이슈다. 1889년과 그 다음해인 1890년 황해도와 함경도 일원에서 조선의 쌀과 콩을 입도선매해서 일본으로 수출하려던 일본 상인들에 대해 지방관인 관찰사들이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리면서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갑신정변 이래, 청이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면 일본은 인천과 원산 그리고 부산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경제 영역에 치중했다.

 

당시 일본은 산업혁명으로 영국에서 생산된 세계 최고 품질의 면직물을 수입해서 조선에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나는 쌀과 콩을 헐값에 사들여 본국으로 송출했다. 어기 왠지 훗날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자국의 부족한 식량생산을 메우기 위해 조선의 식량자원 수탈의 전주곡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일본에 대항해서 황해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들이 내린 방곡령이 항일운동의 하나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있다고 들었다. 사실 방곡령 시행의 취지는 좋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지방 수령들과 아전들의 재테크 수단일 뿐이었다. 그들은 곡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가을에 방곡령을 내려, 곡식 가격의 하락을 유도해서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런 다음, 곡식이 부족한 춘궁기에 비싼 값에 판매해서 폭리를 취하는 방식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 이것이 조정 대신들부터 시작해서 지방 수령은 물론이고 아전들까지 모조리 썩은 조선의 실체였다. 오죽했으면 다음 편에 등장하는 동학농민운동 기치 중의 하나가 (탐관)오리척결이었겠는가 말이다.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백성을 일본 상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콩에 대한 방곡령을 내렸다고 하지만, 조병식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탐관오리 가운데 대표선수라 할 만하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사촌간으로 뇌물죄와 공금횡령으로 5번이나 중앙정부로부터 문책을 당하면서도 고위관리직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혹설에 의하면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명성왕후의 비선실세였던 진령군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말이 있다. 국가의 기강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져 가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어쨌든 조선 지방관들의 방곡령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측의 손해배상 요구로 막대한 조선 조정은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다.

 

그 외의 소소한(?) 사건으로 1891511일 일본을 방문 중이던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 니콜라이 로마노프 황태자를 시가현 오쓰에서 일본 순사 쓰다 산조가 암살하기 위해 습격한 일화에 대해서도 작가는 설명한다. 망상에 빠진 쓰다 산조가 칼로 황태자를 공격해서 부상을 입혔다. 어쩌면 러시아와의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그런 사건으로, 일본 조야를 뒤흔들었다. 황태자 사건에 사죄하기 위해 어느 여성을 자결하고, 전국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사죄하는 편지들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쇄도했다. 메이지 국왕까지 나서서 교토행 열차에 올라 황태자에게 사과하는 쇼가 연출되기도 했다.

 

국사 사건으로 대법원 단심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살인미수죄를 적용해서 쓰다 산조에게 대법원장 고지마 고레가타는 모두가 원하던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일본 정계를 주무르던 번벌 출신 원훈들은 사형 선고를 내리라고 공공연하게 사법부에 압박을 행사했지만, 대법원장은 삼권분립을 내세우며 우직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당연히 러시아 측에서는 노발대발했지만 일본 외무대신을 경질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굽시니스트는 가상 역사전개를 펼쳐서, 니콜라이 황태자가 암살당하고 보다 온건한 다른 황위 계승자들이 제위에 올랐다면 1차 세계대전 중에 혁명으로 제국 자체가 사라져 버린 러시아의 운명을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18917월에 청나라 북양함대의 주력함인 정원과 진원을 필두로 한 6척의 함대가 일본 요코하마에 내항한다. 거함거포 시대, 자신들보다 월등한 전력의 북양함대의 전력을 직접 목격한 일본은 미래의 가상적국 청나라를 앞서기 위해 다음해부터 막대한 세금을 들여 함대 건설에 나선다. 이 때, 청나라 함대에 승선해서 청나라 함대의 어수선한 분위기, 돼지나 닭을 배에서 기르고 함포 포대에 빨래를 너는 모습에 경악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3년 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북양함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건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역시나 많이 배웠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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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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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난 토요일에 왜 도서관에 갔더라? ,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갔었구나. 도서관에 방문한 김에 그냥 올 수가 없어서 서가를 뒤지다가 잠시 멈춰 있던 시리즈 책들 생각이 났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지? 일단 읽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두 권 빌렸다. 항상 이 시리즈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국사 공부하던 시절에 이 책이 있었다면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던 한국 근대사가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다. 그리고 보니 그전에 타임빌라스 휘게문고에서 이 책을 보던 초등학생 생각이 났다. 좀 어렵지 않았을까나. 읽기 쉬운 만화인 줄 알고 덥썩 물었다가 후퇴하던 그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한중일 세계사 15편은 1894년 한반도에서 발생한 두 가지 큰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일전쟁이다. 그리고 보니 역사 시간에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듣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동학농민운동의 기본 성격은 조선 조정에 대한 반란이다. 아마 기존 세력에 대한 반감을 품게 만드는 그런 운동의 실체를 교단의 선생님들이 자세하게 설명하는 걸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동학은 더 이상 조선 백성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유교 이상과 혹은 서구에서 전래한 기독교 사상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중심의 학문이라고나 할까. 1864년 순교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으로 필두로 삼남을 중심으로 동학운동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한 가운데 민란을 위한 시발점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 때문에 고부민란이 발생하고, 동학 남접을 중심으로 편성된 농민반란군이 홍경래의 난 이래 82년 만에 정부군을 패퇴시키면서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동학의 교단 센터가 위치한 보은을 중심으로 한 북접이 온건파였다면, 김제 부근의 원평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굽시니스트 작가에 따르면 래디컬정도가 되겠다. 접주이자 훗날 녹두장군으로 불리게 되는 전봉준을 필두로 손화중, 김개남 지도부가 편성되어 척왜양 기치 아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황토재전주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전주성으로 쇄도하여, 공성전에 돌입한다. 하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저항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가운데, 폐정개혁안 수용을 전제로 한 화약을 맺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진짜 문제는 위기를 느낀 고종이 자력으로 동학혁명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최악의 수를 두었다는 점이다. 인조와 더불어 고종이야말로 조선 최악의 군주가 아닌가 싶다. 텐진조약으로 청나라 군대에 조선에 출병하면, 이웃의 승냥이 같은 일본 역시 조선에 병력을 진주한다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청군의 출병이 조선 조정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면, 일본군의 그것은 순전히 조선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자의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왜 외국 군대가 출병한단 말인가.

 

척왜양, 봉건타파 그리고 외세개입 반대를 천명한 동학농민운동이 역설적으로 청과 일본이라는 외세 개입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이 역사가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무능한 국가의 대계보다는 정권 유지에만 급급했던 고종의 판단 착오가 망국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청일전쟁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10년 전 벌어진 갑신정변에 주목해야 한다. 자유주의 민권운동가로 알려진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변법개혁가들(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의 주도 아래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시도했다. 하지만 민씨 정권의 요청을 받은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이 창덕궁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이들의 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됐다. 그리고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은 일본의 파트너 이토 히로부미를 톈진으로 불러 톈진조약으로 조선에서의 사태를 마무리했다. 양국이 조선에 출병할 경우 사전에 통보를 하고, 공동출병한다는 게 이후에 벌어진 사태에 대한 핵심조항이었다.

 

갑신정변으로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일소되다시피한 일본은 언제라도 다시 조선에 출병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이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아산에 상륙할 예정이라는 소식에 일본 역시 조선 출병을 결정하고 4,500여명의 병력을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일본의 외상 무쓰 무네미쓰는 전주화약으로 외국 군대의 출병 이유가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22일까지 조선의 내정개혁이 선행되어야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무리수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723일 오시마 요시마사 지휘 하의 9여단 소속 5천명의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잡는데 성공한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꼭두각시 삼아 김홍집을 수장으로 삼아 친일내각을 출범시키고, 이른바 갑오경장을 실시했다. 이틀 뒤인, 725일 아산에 주둔 중인 청군을 증원하기 위해 파견된 청의 함대를 일본 연합함대가 기습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의 막이 오르게 된다. 육지에서는 성환에서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일본 육군이 청군을 격파하면서 초전부터 청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청의 잔여병력은 평양으로 후퇴해서 지원군과 합세해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81일 일본이 청나라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면서 비로소 전쟁이 시작됐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평양성마저 패한 청군을 의주로 도주했다. 당시 일본군은 속전속결을 원했지만, 청군은 장기전으로 전쟁을 끌고 가서 열강이 개입해서 사태를 마무리해주길 바랬다고 한다.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권은 <황해 해전>에서 청의 북양 함대가 일본의 연합함대에게 박살이 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일본 해군에 비해 장비나 수적으로 압도적이었던 청 해군은 포탄으로 부족으로 미처 훈련받지 못한 미숙련 수병들, 연료 부족, 군기 해이 등 다양한 이유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열세의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건조한 북양 함대의 거함 거포들이 일본 해군의 속사 공격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와중에 청나라 정권의 실력자 서태후의 환갑잔치 비용과 이화원 건설을 위해 거액의 국방비 예산이 전용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일본 대본영은 연합함대에 북양함대를 격멸하고,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라는 전략 목표를 지시했다고 하는데 황해 해전을 통해 일본 연합함대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제압하고 한반도에 다시 진주하게 된 일본은 훗날 조선을 병탄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별다른 저항 없이 경복궁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어쩌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존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망국을 향한 수레바퀴가 거세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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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14 10: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다양한 대중서, 읽을 거리들이 많이 나와서 큰 복이란 생각을 해요!ㅎㅎ 저 학교다닐 때는 진짜 재미없는 책들만ㅋㅋㅋ 이 책 시리즈도 제법 많이 쌓였네요. 도서관 갈 때 한 번 시도해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9-14 22:35   좋아요 2 | URL
한창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던 시절
에 이런 훌륭한 보교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해 봤답니다.

재밌고 유익하니 추천해드립니다.

coolcat329 2023-09-15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 시리즈 정말 꾸준히 읽으시네요. 대단하세요. 이 책 초등생에겐 어렵더라구요.
저도 아이 초딩때 사줬다가 실패했답니다. 저라도 읽었어야 했는데 에휴...

레삭매냐 2023-09-15 09:06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전 지난 달에 의왕 타임빌라스
휘게문고에 갔다가 새로 나온
17편을 초딩생이 보다가 어렵다
는 말을 하는 걸 들었거든요.

당시 세계정세를 이해하기 위해
서는 또 별도의 공부(?)가 필요
한지라 쉽지가 않은 듯 합니다.

꾸역꾸역 읽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반역자와 배신자들 - 제2차 세계대전 속 논란의 인물들
이준호 지음 / 눌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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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나온 이안 부루마의 <부역자>란 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이준호 작가의 <반역자와 배신자들>이라는 책이 나와 호기심에 나열된 인물들의 일대기를 읽게 됐다. 네이버 브런치북 시리즈 턴코트인가로 시작된 프로젝트였는데, 기존의 10명에 책에는 4명을 추가해서 1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역사상 유명한 반역자와 배신자들 가운데서도, 2차 세계대전이라는 공간으로 한정했다. 광활한 공간인 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습들을 엿볼 수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영웅일 수도 있지만, 상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반역/배신자로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이 핵심이 아닐까 싶다.

 

먼저 가장 많이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은 바로 지난달에 읽은 <베를린 함락 1945>에도 등장하는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이었다. 소비에트 적군 출신으로,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의 피바람 속에서도 살아남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 중의 하나였던 독소전 초기에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파죽지세로 적도 모스크바까지 쇄도한 독일군을 상대로, 소비에트 엘리트 장군 출신 블라소프는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독일군을 격퇴시키는 엄청난 무공을 세웠다. 아마 이 때가 그의 군인생 최고의 절정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블라소프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1942년 독일군에 대한 역습에 나섰다가 역으로 포위되어 결국 독일군의 포로 신세가 된 블라소프. 스탈린의 군부에 대한 대숙청에 진절머리가 나고 스탈린의 소비에트에 환멸을 느낀 블라소프는 독일군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군의 기세는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가 알다시피 히틀러의 제3제국은 패망했다. 소비에트군은 그 누구보다도 독일에 협력한 히비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고, 그 사실을 잘 알던 히비들은 발악적으로 전투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히비(Hiwi: 힐프스빌리게(Hilfswilige, 자발적 조력자)들로 구성된 자유 러시아군을 이끌던 블라소프는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됐다.

 

앙리 필리프 페탱이야말로 문제적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군인으로서 페탱의 출발은 소박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끝낼 전쟁(1차 세계대전)을 통해 조국 프랑스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하면서 영웅으로 거듭났다. 슐리펜 계획을 앞세워, 1871년의 영화를 재현하겠다는 독일군의 침공을 마른 전투에서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100만에 가까운 전상자가 발생했지만, 베르됭 전역에서도 페탱은 독일군의 날카로운 공격을 막아냈다. , 그전에 자신의 수하 부하로 애송이 장교였던 샤를 드골과의 만남도 잠시 언급이 되었던가.

 

모두에게 칭송받는 전쟁영웅이었던 페탱은 전후 프랑스 좌파들이 잇달아 집권하는 시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39년 초, 자신과 인연이 있던 프랑코 총통의 나라 스페인 대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군이 참패하고 파리가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페탱을 말리지만, 조국의 위기를 못본 체 할 수 없었던 페탱은 인생에서 최악의 결정을 내린다. 독일군이 조종하는 비시 괴뢰정부의 수반이 되면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쌓아온 그동안의 업적을 무위로 돌린 것이다.

 

나치의 프랑스 지배와 정복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으로 끝났고,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비시 정부를 대신하게 됐다. 졸지에 부역자 신세에 사형 선고까지 받은 왕년의 전쟁 영웅의 말로를 그냥 볼 수 없었던 드골은 직권으로 페탱을 종신형으로 감형시켰다. 어느 순간 엇나가기는 했지만,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어느 장군의 말로가 씁쓸하게 다가왔다.

 

매국노의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노르웨이 출신 비드쿤 크비슬링의 이야기도 관심을 끈다. 나는 처음에 크비슬링이 그저 평범한 나치즘에 경도되어 나라를 팔아 먹은 정치인 출신 매국노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출발점은 노르웨이 육사 출신의 군인이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아르메니아에서 활약은 인도주의자였다. 이런 인물이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놀랍지 않은가. 물론 여자관계를 포함한 사생활은 좀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영국으로부터 훈장도 받은 이른바 소련통이었던 크비슬링은 소비에트 독재 치하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게 됐다. 조국 노르웨이로 귀국해서는 유사 파시스트 정당활동을 하면서 점점 더 오른쪽으로 치닫게 됐다. 노르웨이 국내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나쁜 친구알프레드 로젠베르크(나치 이론가)를 만나게 되면서 선을 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전쟁 수행을 위해 스웨덴의 철광석 수입과 영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나치 독일이 베저위붕 작전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하게 되고 크비슬링을 괴뢰 정권의 수반으로 삼았다. 베저위붕 작전이 궁금해서 어제 너튜브를 검색해 보니, 철광석 자원과 부동항 확보가 주된 요인이 아닌, 1년 뒤에 개시될 소련 침공을 대비한 작전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약체로 생각했던 노르웨이군의 치열한 저항으로 국왕 호쿤 7세와 정권 인사들이 탈출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이 때 베저위붕 작전으로 입은 독일 해군의 손실로 독일의 영국 침공 작전에 차질이 왔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치 발칸 작전으로 소련을 제압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음 주자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로 넘어가게 되는 건가. , 크비슬링은 전쟁이 끝나고 당연히 반역자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서방에는 체트닉 지도자로 알려진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역시 문제적 인간의 전형이다. 구 세르비아 출신 민족주의자 그리고 엘리트 군인이었던 미하일로비치는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다. 그리고 보니, 첫 번째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들도 상당히 많이 이 책에 등장하는 점도 눈에 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발생한 반독 성향의 쿠데타를 제압하기 위해 히틀러가 정예군을 파견하면서 그 결과 바르바로사 소련 침공을 6주 정도 연기하게 되었는데, 총통이 소련 공략에 실패하게 되는 후과를 초래했다. 당연히 유고군은 독일군에게 10일 만에 조국이 유린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닉과 티토의 빨치산이 점령 독일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저항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서방 진영에서는 티토의 빨치산보다 체트닉 지원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티토보다 왕정 복고를 주창하는 민족주의가 미하일로비치가 서방 연합군의 취향에 맞아서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대독 저항에 미온적인 미하일로비치의 애매한 태도였다. 독일 점령군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티토의 빨치산과 달리 체트닉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은밀한 지원 아래,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 소속의 우스타냐나 티토의 빨치산과 전후를 대비한 권력 투쟁에만 관심이 있었다.

 

결국 이를 알게 된 서방에서는 체트닉에 대한 지원을 끊고, 유고슬라비아 국왕 페타르 2세도 티토를 저항군 지도자로 추인하게 된다. 물론 체트닉이 많은 연합군 조종사들을 구출한 공로도 있지만, 저항세력의 주도권은 티토의 빨치산으로 넘었갔다. 전쟁이 끝나고 1년 가까이 도주하던 미하일로비치와 잔당들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티토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던 구 유고의 질서가 붕괴되면서 대 세르비아주의의 부활로 미하일로비치의 이미지가 반역자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반역자와 배신자들> 최악의 빌런은 역시 카렐 추르다가 아닐까 싶다. <새벽의 7>, <유인원 작전>, 로랑 비네의 인프라 소설 <HHhH>, 리디체 학살 그리고 라인하르트 프리드리히. 역사에 빛이 있다면 어둠이 있는 법이다. 체코 출신으로 동지들을 배신한 카렐 추르다야말로 저자가 꼽은 14인의 악인열전 중에서도 압도적 존재감을 자랑한다.

 

히틀러의 재무장과 인근 국가들에 대한 영토적 야욕으로 2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고조되어 가던 가운데, 1938년 뮌헨 회담으로 신생독립국 체코의 운명이 결정됐다. 300만 소수 독일인들이 거주하던 주데텐란트 병탄을 줄기차게 요구해오던 독일에게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결국 전쟁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주데텐 할양을 허용해 버렸다. 그것으로 레벤스라움을 주창하는 히틀러의 야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째로 삼킨 히틀러는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체코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그런 존재였다. 독일 전쟁기계를 위한 병기창이었다고나 할까. 한편, 체코 지하 저항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히틀러는 보헤미아-모라비아 총독으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국보안대 수장을 지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프라하에 파견했다. 이 희대의 악당은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전 유럽의 유대인 전멸계획은 세웠다. “금발의 짐승혹은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린 골수 나치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기대에 부응해서 보헤미아의 소요사태를 일소하기에 이른다.

 

이런 악당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 정보부와 런던의 체코 망명정부는 이른바 <유인원 작전>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얀 쿠비스와 요제프 가브칙을 필두로 한 암살요원들을 프라하에 파견한다. 그리고 그전에 먼저 파괴공작을 위해 투입된 이가 있으니 바로 배신자 카렐 추르다였다. 그 역시 조국을 점령한 독일에 저항하는 전사였다. 하지만 쿠비스와 가브칙이 우여곡절 끝에 하이드리히 암살에 성공하고, 나치가 대대적인 범인 검거에 나서자 그만 막대한 현상금과 사면이라는 유혹에 눈이 멀어 그만 동지들을 배신했다. ‘새벽의 7인들이 성키릴과 성메토디우스 성당에서 벌인 처절한 사투는 영화에서 리얼하게 그려졌다. 얀과 요제프의 마지막 순간은 정말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언젠가 프라하에 가게 된다면 7인의 용사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한 성당을 찾아가 보도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드리히 암살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고위직을 상대로 유일하게 성공한 표적암살 사례로 기록되었다. 나치의 보복으로 리디체 학살사건과 카렐 추르다의 밀고로 숱한 체코 레지스탕스들이 나치 독일군에게 처형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전후 처리과정에서 독일에게 할양되었던 주데텐란트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으며, 체코 망명정부의 위신도 올라갔다. 인터넷의 어느 글에서 보니 이 사건이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들며 왜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영화를 만들지 않냐는 지적을 인상 깊게 봤다.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은 계속해서 영화나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승승장구하던 독일 제국의 승리에 베팅했던 카렐 추르다는 결국 독일의 패망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됐다. 왜 동지들을 배신했냐는 질문에 배신자는 100만 마르크를 준다면, 너도 그랬을 거라는 말로 응대한다. 바로 영화 <암살>의 엔딩이 떠올랐다. 밀정 염석진은 조국이 해방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해방될 줄 알았다면 그랬(배신했)겠냐는 말과 너무 똑같지 않나.

 

군출신 행정가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의 행적은 책에 등장하는 다른 이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지금은 폴란드 영토가 된 포센 지방 출신의 괴르델러는 보수적 환경에서 자라났다. 책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처럼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기도 했고, 철십자훈장을 두 개나 받은 베테랑이었다. 전후에는 자유군단 소속으로 독일 좌파들과 대결하기도 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부시장과 라이프치히 시장을 역임하면서 유능한 행정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파펜 이후,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 모양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히틀러가 수상이 되면서 역사가 뒤바뀌게 되었지만 말이다. 괴르델러는 뒤통수를 맞아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고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극우 나치즘과 결을 같이 했지만, 반유대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괴르델러는 결국 히틀러를 암살해서 소련군이 서쪽으로 더 진군해 오기 전에 서방연합군과 종전에 협의하겠다는 이른바 <발퀴레 작전>을 가동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인사들이 가담한 발퀴레 작전은 히틀러가 볼프샨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면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작전이 성공했다면 총리의 자리에 올랐을 지도 모를 괴르델러 역시 체포되어 194522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교도소에서 처형당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독재자의 폭주를 막고 조국을 파멸에서 구하기 위해, 독일에도 이런 양심가들의 저항이 존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 외에도 독일 출신으로 미국 할리우드 건너가 화려한 은막 스타가 된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필두로 해서, 벨기에 출신 마지막 파시스트라는 별명의 레옹 드그렐(베를린 전투에서 독일인이 아닌 외국 의용군 출신 무장병력들이 소련군에 대항해서 더 악착같이 싸웠다), 귀족 출신 외교관이자 무솔리니의 사위에서 나락으로 추락한 갈레아초 치아노 같은 인물들도 흥미를 끌었다.

 

처음부터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페탱이나 블라소프처럼 한 때는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정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들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이 연상됐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일개 너튜버들의 자의적 해석에 의지해서 무리한 일을 벌이는 모습에 안쓰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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