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7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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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상한 얘기지만, 나는 어렸을 때 이상한 냄새 맡는 것을 좋아했다. 다락방의 콤콤한 냄새, 주유소의 달착지근한 냄새, 보일러 스팀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예시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마주치기 싫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양가적인 심리를 갖고 있다. 귀신을 보기 싫어서 눈을 감아버리고는 이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눈을 뜨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갖고 있는 심리도 이런 것이다. 코스믹 호러, 말 그대로 우주적 공포의 냄새를 맡은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냄새를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알 수 없는 공포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아가고, 마침내 그 공포와 대면한 후에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것. 이것이 크툴루 신화세계의 인간들이다. 


이렇게 공포를 향해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인간들의 모습이 조금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을 특징짓는 본능은 알고자 하는 욕구이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이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 피해자들은 자신의 본능에 따라 불확실한 공포를 포착해서 이해하려고 했고, 그때문에 파멸을 맞게 된 것이다. 


사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자체만 보면, 시대착오적인 설정이나 대사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아직까지 읽히는 것은 그가 만든 세계가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리스의 예술품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듯이, 우리가 모르는 오지의 기괴한 조형물 역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인간은 코스모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카오스에서 알수없는 흡입력을 느끼기도 한다. 


러브크래프트는 카오스의 매력을 극대화한 인물이다. 빛의 세계에서 활동한 수많은 작가들 역시 코스모스와 카오스를 넘나들었지만, 러브크래프트만큼 극적으로 혼란스럽고 기괴한 것을 다룬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독창적인 작품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런 작품들은 사회에 의해 억압되어 왔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철저히 억압해왔던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어둡고 기괴한 것을 보고자하는 욕망은 부정되었다. 동시에 러브크래프트의 세계 역시 외면받아야 했다. 도덕적이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한 그의 작품세계는 그 당시의 관념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크툴루 신화에서 파생된 수많은 문화 컨텐츠를 소비하고, 심지어 그의 작품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방증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무의식을 부정하지도 않고, 어두운 세계를 다룬 소설을 꺼리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드는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를 읽으면 재밌어서 기분이 조크든요.”이 말이 현재 러브크래프트가 사랑받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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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3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브크래프트 본인은 자신들이 썼던 작품들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동료 작가들에게 알릴 때 츤데레 끼가 있어요. ^^

Postumus 2016-07-13 17:11   좋아요 0 | URL
러브크래프트 성격이 점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작품과 작가의 싱크로율이 ㅎㄷㄷ해요ㅎ
 
[eBook] 다윈 지능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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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다윈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과학자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유산인 진화론은 가장 논쟁적인 과학분야이기도 하다. 다윈과 진화론을 혐오하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해 또는 신념이다. 특히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 두가지 모두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종교는 다윈주의의 오랜 숙적이다. 물론 나같은 무신론자가 보기에는 그런 종교인들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화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자유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과 그들이 과학을 짓밟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더군다나 고의적으로 진화론을 곡해 함으로써 이 사회에 창조론을 관철하려하는 것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교회 안에서 그들만의 경전을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나, 그것을 사회에 강요함으로써 한국을 중세시대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은 문명에 대한 파괴행위와 같다.


 하지만, 종교를 가진사람들은 차치 하고서라도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조차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된다는 식의 잘못된 내용은 너무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 진화론, 정확히 진화생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만물의 영장”으로써 이 세계를 지배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인간이나 그밖의 동물이나 종의 탄생 과정만 보면 크게 다를바 없다는 사실은 신의 자녀라고 믿어왔던 인간들에게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불편한 진실에는 고개를 돌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종교지도자를 비롯해서 다수의 대중은 쉬운 언어(과학적이지 않은)를 사용해서 진화론을 맹렬히 공격한다. 반면, 진화생물학측은 진화론을 이해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지만, 대중은 어려운 말에 쉽게 지친다. 그러던 와중에 도킨스 같이 효율적인 종교킬러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의 신중한 태도와는 달리 종교를 무자비하게 물어 뜯는다. 말 그대로 “오늘만 사는 진화생물학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과학자들도 결국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종교를 가진 대다수의 이웃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진화론을 친절하게 서서히 알려나간다. 나는 이러한 과학자들을 “진화생물학의 몰몬교도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최재천 교수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진화생물학자이고, “진화의 몰몬교도”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다윈 지능>은 교양서를 가장한 진화생물학의 전도 팜플렛이다. 이 책은 진화생물학의 중요한 이론들을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감싸고 있다. 그덕분에 이 책의 독자는 가벼운 내용의 당의정으로 쓰디쓴 진화생물학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4장 <변이, 변화의 원동력>에 있는 유전자 편집과 관련한 내용이다. 우리는 유전공학의 발전을 떠올리면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떠올린다. 불치병이 모두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건강한 신체를 갖고 살 수 있는 사회. 그러나 유전학적 측면에서 이러한 “이상적 상태”가 반드시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문제의 소지를 갖고 있는 유전자를 기능적으로 훨씬 우수한 맞춤 유전자로 갈아 끼운 개인은 개선된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개선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즉 개체군의 상황은 어떤가? 참으로 기막힌 모순이다. 유전자 치환은 개체는 보다 탁월하게 만들어줄지 모르지만 개체군은 더없이 취약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


 유전자 다양성은 종의 안위를 지키는 장치이다. 만약 어떤 종의 개체들이 모두 비슷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종은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 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인간에 의해 재배되는 종자들에서 볼 수 있다. 만약 미래에 인간도 작물이나 가축처럼 유리한 유전자만으로 표준적인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면, 인류 역시 그로 미셸 바나나가 겪었던 치명적인 궤멸을 겪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유전자는 한 국가나 사회집단을 넘어서 인류 전체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전자는 커녕 진화에 관한 이야기조차 외면하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왜 어떤 이들은 백신이 면역력을 없애는 독극물이고, 현대의학은 사기이며, 진화생물학은 반인륜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다윈 시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다윈이 사망한지도 10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다윈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진화생물학의 싸움은 다윈의 후예들이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다윈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윈의 진화 이론은 이제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교양 지식을 뿐 아니라 첨단 학문 분야의 학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전문 지식이다. 당신의 미래에 다윈이 함께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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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2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해를 많이 받고, 죽어서도 지지자들에게 발등 찍혀 고생하는 학자가 다윈과 애덤 스미스일 겁니다. ㅎㅎㅎ

Postumus 2016-07-12 17:14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애덤스미스도 죽어서까지 고생하고 계시네요ㅎ 언젠가 에덤스미스의 책도 읽어보고 싶은데 엄두가 안나요;

cyrus 2016-07-12 17:16   좋아요 1 | URL
국부론, 종의 기원. 훌륭한 책이라는 점은 인정하는데, 내용이 지루합니다. ^^

Postumus 2016-07-12 17:1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고전이겠죠ㅎ 그래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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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와 펠릭스


 이 책의 제목인 <포르투나의 선택>에서 말하는 포르투나는 로마 신화 속 행운의 여신이다. 그리고 술라의 별칭인 펠릭스는 라틴어로 행운을 뜻한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3부의 제목인 <포르투나의 선택>은 3부에서“펠릭스” 술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를 암시하고 있다. 사실 1,2 부에서부터 술라는 포르투나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술라의 ‘포르투나’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연이은 행운같았던 것은 모두 술라가 안배한 것이었다. 오히려 마리우스와 술라는 모두 노년에 포르투나의 질투라도 받은듯이 불행을 여러차례 겪는다. 사실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서 불행을 겪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가족을, 재산을, 심한 경우 자신의 목숨까지 잃었다. 술라는 포르투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행운 자체였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누가 뭐래도 술라는 이 소설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주요인물이다. 특히 이번 <포르투나의 선택>에서 술라의 비중과 카리스마는 다른 인물들을 압도한다. 1,2 부의 마리우스와 비교했을때 술라의 사회적인 위치는 그와 비슷하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술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성을 갖고있다. 마리우스는 술라에 비하면 예측가능하다. 명예와 권력을 중요시하며, 말년이 되기 전까지 어느정도 상식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술라는 트릭스터이다. 그는 남을 속이는 데 능숙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치 않는다. 또한 외설적인 것, 즐거운 것, 일상적이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그는 로마의 전통, 모스 마이오룸을 수호하고자 하며, 혈통과 역사를 존중한다. 그는 불확실성의 화신이다.

 이것만 봐도 술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다크나이트>의 빌런인 조커처럼 어떤 목적은 가지고 있으나, 거기에 대한 자신의 태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 남을 대하는 태도 모두 예측이 어렵다. 왜 그는 아우렐리아에게 그런 것을 갑자기 즉흥적으로 요구했을까? 왜 카이사르에게 그런 처분을 내렸을까? 거기에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술라 특유의 즉흥적 선택이었는지는 좀 더 시리즈를 읽어봐야 알 것 같다.


영웅 혹은 괴물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사람이라면, 3부 에서는 이전의 영웅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영웅들이 일어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영웅들의 마지막을 보면서 <다크나이트>의 대사를 떠올렸다. 하비 덴트와 지인들의 대화에서 배트맨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나왔던 대사인데, 대강 ‘그는 영웅으로 죽거나, 살아서 괴물이 될거야’라는 내용이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뒷모습을 보면 이 대사에 딱 들어맞는다. 그들이 만약 로마의 일인자가 되고나서 일이 어그러지기 전에 죽었다면, 그들은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다. 마리우스는 로마를 지킨 영웅으로, 술라는 그보다는 덜 했겠지만 아폴론같은 모습의 빛나는 전쟁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들에게는 수명이 조금 더 허락되었다. 그들이 완전하게 뜻을 이루기에는 모자라지만, 괴물이 되기에는 충분할 만큼.

 그래도 아무리 괴물이 되었다지만 정들었던 인물들이 떠나는 것은 아쉽다. 이것은 삼국지에서 전반부 장수들이 하나씩 세상을 뜰 때마다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 1권부터 마리우스와 술라의 눈부신 활약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시리즈 전체로 보면 초반부의 인물일 뿐이지만, 마리우스와 술라는 자기들 이후의 로마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는 이들이 없었다면 카이사르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카이사르는 그들이 기존의 법칙을 뒤흔들어 놓은 곳에서 태어났고, 그들이 보여준 길을 자신의 방식으로 변주했다. 결국 카이사르는 괴물들이 키워낸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상아 대좌의 게임


 미드 <왕좌의 게임>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판타지 시리즈가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한 주인공이 없고, 스토리 전개가 작위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나 작품 내 주요인물이 위기에 처하더라도 어떻게든 위기를 빠져나온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생존을 위해 무리수를 두다보니 스토리가 허술해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왕좌의 게임에는 그런 부분이 적다.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인기가 많은 등장인물도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상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계속 궁지에 몰아 넣는다. 창조주인 작가가 이렇게 어느 인물의 입장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 안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시리즈도 이와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일단, 이 작품에도 주인공이 특정되어 있지 않다. 1,2부를 읽어본 독자들에게 술라와 마리우스 중 누가 주인공이냐고 물어보면 아마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어느 부분에서는 실로나 미트리다테스 같은 인물들도 주연급의 존재감을 내뿜는다. 이렇게 많은 주요인물은 때로 독자의 기억력에 부담을 주기도 하지만, 소설 속 로마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기도 한다.

 또한 <마스터스 오브 로마> 역시 등장인물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1부 <로마의 일인자>에서부터 유혈이 낭자하고, 작가가 공들여서 묘사해 놓은 인물들도 순식간에 스틱스 강을 건넌다. 물론, 인물의 생사여부는 역사책에 이미 쓰여있는 것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그 인물이 죽을 것이라는 암시조차 주지 않고 갑자기 죽여버림으로써 충격을 최대화한다. 그렇다보니 나는 이제 읽는동안 누가 죽을지 몰라서 겁까지 난다. 하지만 이 덕분에 이야기의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대충 쓴 역사소설과 비교했다가는 큰 호통을 들을 것이야!


 내가 군복무 중이던 몇 년전에 한창 김모 작가의 역사소설이 유행했었다. 여기저기 광고도 많이 나오고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올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래서인지 부대 내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아무리 잘 팔리는 책이라고 해도 내 취향에 안맞는 것은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예전부터 워낙 유명했던터라 궁금하기도 해서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을 100쪽 정도 읽고나서 바로 덮어버렸다. 읽으면서, 읽고 나서도 짜증까지 났던 것 같다. 일단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문장은 물론이고 구성이 너무 허접하고 유치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끊은 지 오래 됐지만 학창시절에 무협지 깨나 읽었던 사람으로서, 중학교때 수도 없이 읽었던 불쏘시개와 그 소설의 차이점을 모를 정도였다. 고등학교때 조악한 문장이 싫어서 무협지를 다시는 안읽었는데 거기서 지뢰를 밟을 줄이야….

 솔직히 그 소설을 읽고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이런 작가를 이렇게까지 띄워주지? 그리고 왜 이렇게들 많이 읽지?’하는 것이었다. 아무리봐도 대여점에나 꽂혀있어야 할 책인데 책에 대한 반응만 보면 무슨 민족의 자랑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 책을 왜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그 허접한 문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 소설은 역사소설의 탈을 쓴 무협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머리를 식히려고 읽는 무협지가 깊은 문장으로 채워져있고, 엄격한 역사적 사실을 들이민다면 타겟 독자층에게 외면받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다 필요 없고, 결국 주인공이 짱먹어서 우리민족 화이팅’이렇게 되는 것 아닐까? 작가의 문장력이 원래 그런 것인지는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니 언급할 부분이 아닌 것 같다.

 역사소설은 시청자들이 요즘 사극을 소비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읽힌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역사적인 고증이나 작품성보다는, 쉬우면서도 흥미롭고 자극적인 내용을 원한다. 그러다보니 작품 퀄리티는 점점 떨어져서 말도 안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역사소설은 흥미위주의 콘텐츠라는 인식이 박혀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그런 태도로 접근한다면, 큰 코 다칠 것이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문장에서는 그리스 고전 같은 고풍스러움이 느껴진다. 인물들의 대사 한 마디에도 로마인의 철학이 담겨있고, 인물이 가진 복잡한 심리가 드러난다. 그렇기에 설렁설렁 읽어서는 작품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분명히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하지만 집중해서 한문장 한문장 곱씹으며 읽다보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그저 정신차리고 소설의 인물들을 꽉 붙들고만 있으면, 이번 편은 술라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이 소설을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를 다칠 것이야!


*본 리뷰는 포르투나의 선택 독자 원정단 제공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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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정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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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오페라의 매력

 스페이스 오페라란, SF의 배경을 빌려서 신화나 서사시적인 내용을 풀어놓은 소설이다. 여기에는 엄격한 과학이론이나 고증이 필요하지 않다. 소설 내의 모든 장비들은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체로 비과학적이고, 과학보다는 인간의 상상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이런 점을 좋아한다. 물론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에서 비롯된 소설도 흥미롭지만, 이렇게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과학소설을 읽는 것은 훨씬 편안하기 때문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또 다른 매력을 꼽자면, 인간세계를 옮겨놓은 듯한 서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외계 생명체들과 인공행성, 수 많은 우주함대가 등장하지만, 그 인물들의 행동은 인간과 매우 비슷하다. 체스는 체스인데 말의 생김새가 특이하고, 말들이 날아서 움직일 수 있는 특이한 체스의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이런 특징은 독자들이 소설의 내용과 전체적인 흐름을 쉽게 받아들이고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요소이다. 

 그렇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의 장점에 편안함과 익숙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장르의 가장 큰 매력은 자유로운 설정놀음에 있다. 작가는 자기 마음대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세계의 신화, 역사, 문화 등이 생겨난다. 이런점에 비추어보면 스페이스 오페라는 판타지 장르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세계의 창조주로서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다른 장르와 달리 스페이스 오페라의 세계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고, 거기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중력이 없고 빛 보다 빠른 우주선이 있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의 우주에서는 아무 문제없다. 

 동시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진중하기도 하다. 이 장르도 작품 속에 인간세계의 모습을 반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사에 제약이 없다는 특징 덕분에 작가는 더 쉽게 작품 속에 현실과 유사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가치관이 투영된다.

 <사소한 정의> 역시 꽤나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인공지능과 자아에 대한 고민, 획일적 사고, 배타적 계급주의, 성차별, 인간의 폭력성 등 은유로 볼 수도 있는 여러가지 사건들이 펼쳐진다. 그때문에 주인공인 브렉이 살아가고 있는 우주는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 잠겨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분위기를 싫어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 속의 그 어두운 공기가 좋았다.


떡밥 보따리

인기있는 시리즈 영화나 드라마에는 항상 떡밥이 있다. 소설에도 마찬가지다. 떡밥은 중간 기착점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서사 속에 떡밥이 없다면 독자는 스토리의 끝까지 하나의 소재에만 집중해야하고, 그렇게되면 필연적으로 피로감을 느끼고 곧 책을 덮게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 흥미로운 떡밥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그것을 따라가는 동안 긴 스토리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소한 정의>의 떡밥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가장 궁금한 내용은 프레즈거에 관한 것이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프레즈거의 위엄이 실로 대단하기 때문인데, 등장인물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라드츠 군주조차 그들을 함부로 어쩌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단지 라드츠와 맺은 조약을 통해 그들의 태도와 우주에서 그들이 갖는 위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과연 프레즈거가 단순히 스페이스 오페라의 필수요소인 강력한 악당일지, 아니면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종족일지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어느쪽이 되었던 간에, 이들이 스토리의 중심에 등장한다면 더욱 흥미진진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293쪽
 -“왜냐하면 프레즈거와 우리가 체결한 평화조약이 프레즈거가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인 ‘유의미종’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 ‘무의미종’을 죽이는 건 프레즈거에겐 아무 문제가 없어. 그리고 같은 종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도 문제가 없지. 하지만 다른 ‘유의미종’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건 용인 할 수 없다는거야."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드츠 군주에 관한 것이다. 어떤면에서 라드츠 군주는 보조체와 닮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와 보조체 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과거 역시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녀는 왜 보조체가 되었을까? 보조체가 되기 전 그녀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런 떡밥들이 회수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야 할 것같다. 


라드츠, 낯이 익은데?

 라드츠 3부작은 말그대로 라드츠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라드츠 제국의 모습을 보다보면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사는 곳만 다를뿐 지구인의 행태와 매우 비슷했다. 적어도 전쟁과 계급에 대한 태도에서는 그러했다. 특히 오온 대위의 출신을 문제삼던 토렌호 장교의 모습은 거의 지구인 사회의 클리셰처럼 보였다.

 전쟁. 그들이 말하는 “병합”에 있어서, 아마도 라드츠 역사에서 최초의 “병합”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러하듯이 전쟁은 인간의 손에 의해 한 번 시작되면, 인간의 의지로 멈출 수 없다. 전쟁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희생자를 찾게된다. 라드츠에서도 마찬가지였다.“병합”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병합”이 필요했고, “병합” 자체가 “병합”의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특정한 인물의 의지에 따라 “병합”이 수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쯤되면 아무리 지성이 발전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잘린 신체조직을 재생시키고, 함선에 인공지능을 장착하는 엄청난 문명인들도 결국 폭력을 손에서 놓질 못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믿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인간보다 더 폭력에 알맞게 진화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투철한 신념, 라드츠인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종족이었다.

272쪽
-“확장과 병합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야. 하지만 필요했어. 처음부터 그랬지. 라드츠 본국 주변을 완충지대로 감싸  어떤 종류의 공격이나 간섭으로부터도 보호하려면 그게 필요했어. 나중에는, 저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필요했고, 그리고 문명이 미치는 범위를 확장하는데 필요했고… 이전 병합의 비용을 치르는데 필요했고, 보통의 라드츠 국민에게 부를 제공하는 데 필요했어."

314쪽
 -“나는 라드츠가 최근에 내렸던 결정과 정책들에 대항하는 논쟁이 시각적으로 벌어지기를 원했다 … 나는 한번에 탄민드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내게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누군가를 제거할 수 있었겠지.  소소한 목표들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경계심을 늦추거나 무장을 해제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두에게 각인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능한 손에 권한을 부여해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도."


사소한 정의의 정의

 독자가 소설을 만나는 가장 첫번째 문장은 제목이다. 그런점에서 제목을 대충 짓는 작가는 많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소한 정의>는 무슨 뜻일까? 나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만들어봤다. 물론 텅 빈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기 때문에 별 설득력은 없다. 

 우선, 가장 무난한 것은 Ancillary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브렉이 저스티스 토렌의 부속물이었음을 나타낸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저스티스라는 단어가 이 정도로 단순하게 사용되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저스티스는 라드츠인이 믿는 정의. 그들의 “병합”을 정당화하는 정의를 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소설 내의 라드츠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병합"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언젠가는 당신들이 우리에게 감사 할 날이 올 것이라는 태도마저 보인다. 
 
 그러나 라드츠 군주가 말한 병합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되면 병합의 목적으로써 라드츠인이 갖는 정의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전쟁과 정복을 정당화하는 정의가 사실은 곁다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저스티스의 부속물인 보조체와 라드츠인들이 갖고 있는 부차적인 목적으로써의 정의. 이 두 개의 justice가 책의 가장 앞을 장식하고 있는 <사소한 정의>인 것이다.


나만의 재미를 찾아서

 지금까지 이 책에대한 리뷰를 진지하게 써내려왔지만, 사실 이 소설은 읽기에 따라 여러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 속 라드츠와 주변 우주의 모습에서 인류의 역사를 보았고, 브렉의 모험을 통해서 첩보물이나 복수장르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찾았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면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로맨스 소설로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페미니즘적 요소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에 거부감이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꼭 한 번 읽어보고 자신만의 재미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 생각없이 읽어도 재밌는 소설이다. 그게 스페이스 오페라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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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0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대가로 이언 뱅크스도 유명한데, 그의 ‘컬처 시리즈’를 열린책들 출판사가 꾸준히 펴냈으면 좋겠어요. 책이 잘 안 팔려서 그런지 후속작 출간 소식이 뜸해졌어요.

Postumus 2016-06-03 17:52   좋아요 0 | URL
사실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는 영화만 좋아했는데 이번 기회로 좀 읽어봐야겠네요ㅎ
 
한국인은 미쳤다! - LG전자 해외 법인을 10년간 이끈 외국인 CEO의 생생한 증언
에리크 쉬르데주 지음, 권지현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이게 진짜라고?˝하는 생각이 수십번은 들게하는 책. 특히 의자를 집어던진 미치광이 한국인 직원이나, 연수원에서 구보를 시켰다는 이야기는 정말 도시전설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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