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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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사회, 과학, 문화, 예술분야를 선도하는 그룹은 단연 유럽이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는 것들이 유럽의 음악가들이 남긴 산물이며, 방학만 되면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전에서 놓치지 않고 전시되는 것들이 우리가 흔히 명화라고 일컫는 유럽 화가의 작품들이다. 과학 시간에 배우는 것들의 대부분을 유럽 사람들이 발명하고 발견한 것들이며 수학 공식 또한 그렇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곳은 유럽과 멀어도 너무 멀다는 점이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에 해당하는 나라들은 지금 어떤 모습이던가. 그나마 근래 들어 중국이 체면유지를 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도대체 유럽은 무엇 때문에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지적 유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 궁금하던 차에 만난 책이 바로 , , 였다. 다 읽은 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직접 발로 뛰며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작가소개에서도 드러나듯이 사회학과 과학을 두루 섭렵했기에 독자가 쉽게 수긍할 수 있도록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해준다. 문명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러한 문명이 어떻게 다른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는지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왜 지금처럼 지역적으로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유럽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큰 장애물이 없었기 때문에 종횡으로 전파될 수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오늘날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 그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중국이 4대 발명품을 최초로 개발했으나 그동안 주도권을 쥐지 못한 이유가, 그들에게는 밖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명쾌하다. 또한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동물을 길들이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진화와 연결된다. 간혹 맛없는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맛있는 무화과나무가 선택되는 과정이 생각난다. 언젠가는 이 복숭아나무도 맛있는 복숭아나무에 밀려 사라지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처음 책을 접하는 사람들은 두께에 놀라 선뜻 결심하지 못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의외로 속도가 빨라진다. 중간에 중언부언하는 느낌도 있지만 책을 덮을 때쯤에는 무언가 해 낸 것 같은 뿌듯함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한층 높아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칭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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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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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책이기에 진작 사 놓고 읽으려고 했으나 내용이 너무 어려워 쌓아 놓기만 했던 책인데 이번 여름에 다시 시도해보니, 읽을 만하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마도 그동안 과학 분야 책을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즉 독서력이 좀 좋아졌다고나 할까.

 

책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로 워낙 유명하고 많이 읽히고 리뷰도 많은 책이지만, 또한 이 분야의 리뷰는 되도록 쓰지 않지만(대개는 책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대개는 책을 다 읽으면 바로 다른 책을 읽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다.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뭔가를 끄적거려야 할 것 같은 중압감에 결국 간략한 느낌이라도 적어야겠다.

 

이 책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을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계로 보았다는 점인데, 맣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그 정의에 살짝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생물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손을 많이 퍼트리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저자의 의견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손이라는 것이 결국 유전자의 집합체이므로. 극단적인 표현으로 생존 기계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이지 의미면에서는 동일하다고 본다. 3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한 여학생이 이 책을 읽고 인생이 허무하고 목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교사가 항의 편지를 보냈다는데 이 또한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책을 덮을 때쯤에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다만 나는 '허무주의적 염세관'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자연의 신비에, 그리고 결국은 유전자의 신기함에 놀랐을 뿐이다.

 

진화론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처음 생명체가 생겨날 때는 하나의 원소에서 시작했는데 어떻게 전혀 다른 개체들이 생겨났는지, 또 언젠가는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로 수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조금은 해결되었다. 원시 수프(이에 대한 설명이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데 <코스모스>를 전에 읽었기 때문에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만약 <코스모스>를 읽지 않았다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어깃장을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에서 생명체가 태어나고 그러한 것들이 서서히 진화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위의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는 해결이 안 된 상태였으나 이제 이해가 간다.

 

우선 진화란 유전적인 변화, 즉 돌연변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를 하면서 개체를 만들고 끊임없이 이어져내려오는데 돌연변이가 없다면 언제나 같은 모습일 게다. 만약 돌연변이가 안 좋은 상태로 되었다면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 긍정적인 돌연변이가 결국 개체를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병목형' 생활사에 대해 병목말과 가지말을 예로 들며 자세히 설명하는데 명쾌하다. '병목'이란 개체가 단일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세포분열을 한 후 완성된 개체로 발전하고 최종적으로 수정란이라는 단일 세포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병목형 생활사에서는 전혀 새로운 제도판으로 돌아가서 어떠한 돌연변이로 인하여 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체가 다른 개체로 수렴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인다. 어차피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므로. 기껏 변해봐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원시 수프에서 하나의 원소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지금처럼 수많은 종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가 의문으로 남는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13장의 '숙주와 기생자'에서 설명하고 있다. 기생자 유전자와 숙주 유전자가 후손을 남기기 위한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같이 일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두 개의 몸이 하나의 몸이 되도록 진화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애초에는 두 운반자가 존재했다는 것조차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즉 '우리 같은 개체는 이러한 유전자들 여럿이 합쳐진 궁극적인 통합체(412쪽)'라고 설명하는데 그렇게 되면 위에서 제기한 첫 번째 의문이 해소된다. 물론 <코스모스>에서는 조금 다르게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을 내 짧은 지식으로 정리할 수 없으므로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적어보았다. 이 밖에도 죄수의 딜레마가 인간의 생활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생활에도 적용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으며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는 여학생의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다시피 어차피 유전자는 스스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정도로 영악한 것이 아니라 미리 프로그램된 대로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냥 자기가 가던 길을 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읽었던 이 분야의 책들이 실은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래 과학이라는 학문이 선과 후가 명확한 경우가 꽤 있다고 들었다. 따라서 저자의 의견을 기반으로 이후 더 많은 연구가 활발했을 테고 그에 대한 책을 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한 책을,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던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름은 뿌듯하게 보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세포는 똑같은 유전자를 품고 있다. 다만 다른 종류의 특수화된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질 뿐이다. -417-

만일 흡충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난자나 정자 속에 들어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고 하면 두 개의 몸은 하나의 몸이 되도록 진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애초에는 두 운반자가 존재했다는 것조차 알아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같은 `단일` 개체는 이러한 유전자들 여럿이 합쳐진 궁극적인 통합체다.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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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하기 좋아하는 말 더듬이 입니다 - 2014년 뉴베리 아너 상 수상작 마음이 자라는 나무 6
빈스 바터 지음, 김선영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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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 동화다. 뭐, 말더듬는 아이가 처음에는 위축되고 자존감이 낮았다가 노력해서 극복한다는 이야기겠거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작가 소개를 읽어보니 자전적인 이야기란다. 그러면 이때부터 관심이 조금 더 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훈계조 내지는 교훈조로 흐를 가능성이 큰데 자전적인 이야기라면 그럴 가능성이 조금 줄기 때문이다. 즉, 처음부터 약간의 프리미엄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게다가 2014년 뉴베리 아너상을 받은 작품이라니 일단 작품성은 인정받은 셈이니 즐길 일만 남은 셈이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주인공의 이름을 말하려다 보니,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찾아보니 '나'로만 나왔을 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타자기로 치고 있다니 자기 이름을 직접 거론할 일은 없을 테고 보모는 작은 신사라고 불렀으니 이름이 나올 이유가 없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이름에는 발음하기 어려운 'ㅂ'이 두 번이나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는가 보다. 여하튼 바터는 그냥 보았을 때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지만 입을 여는 순간 다르게 본다. 왜냐하면 심하게 말을 더듬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을 시켰는데 이처럼 심하게 더듬으면 계속 들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중간에 끊을 수도 없고 난감하긴 하겠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바터는 더욱 신경을 쓰고, 그럴수록 말을 더욱 더듬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래도 바터에게는 래트라는 친구가 있다. 말더듬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이름을 바꿔 불러도 신경쓰지 않는 그런 친구다. 래트가 방학에 할아버지댁에 놀러가는 사이에 바터가 대신 신문배달을 해주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바터가 던진 강속구에 입술이 터진 래트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 대신 신문배달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바터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말더듬는 증상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고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던 바터가 신문을 배달하며 만나는 사람과 서서히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특히 스피로 아저씨와의 만남은 바터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집안 거실을 가득 메운 책을 보고 지적 갈증을 느끼게 해주었고 보다 깊이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멘토가 된다. 워싱턴 부인은 이제 막 어린 티를 벗고 청소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게 해주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연민을 넘어 누군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신문 대금을 받으러 갈 때마다 TV만 쳐다보고 있어 TV보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폴이 사실은 청각장애인이라 독순술을 배우느라 그랬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 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그렇다고 신문배달 하며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라티 아저씨 때문에 가정부 맘과 바터가 죽을 뻔한 일도 있었지만 그 또한 바터에게는 인생의 좋은 경험이 된다. 가정부는 백인 아이와 같이 있을 때 버스 앞자리에 앉을 수 있다던가 동물원에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글의 시대적 배경이 아직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사라지지 않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그런 제도에 대해 살짝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책의 주제를 벗어나니까.

 

주인공은 말더듬는 것을 고치지는 못했지만 극복해서 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지역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단다. 아마 신문 배달을 하며 겪었던 일이 현실을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 싶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며 그때 경험했던 다양한 일들이 바터의 내면을 튼튼히 받쳐주었다는 것을, 신문 배달을 했던 4주가 지난 후 바터가 부쩍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어도 제목과 맞지 않는 듯해서 원제를 보니 'Paperboy'다. 나중에 보니 표지에도 적혀 있다. 그제서야 내용과 제목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읽으면서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부분이 있다. 바로 바터의 현재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대처하는 방식이다. 우리네 드라마나 동화에서 흔히 보이는 반응을 생각했는데 전혀 의외다. 아마 우리 동화 같았으면 그것이 하나의 큰 사건이 되어 방황하다 결국 화해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바터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방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고마워한다. 사건의 축에도 못 끼는 것을 보며 또 한번 문화차이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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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6-05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느낌 좋은 글이네요. 읽어봐야겠어요

봄햇살 2015-08-17 10:55   좋아요 1 | URL
표지는 좀 촌스럽지만 내용은 좋더라구요.
 
정답을 알려 줄게 라임 청소년 문학 13
케이트 메스너 지음, 이보미 옮김 / 라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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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를 받았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당황해하는 꿈, 누구나 한 번쯤 꿔봤을 것이다. 또한 정답을 알려주는 연필이 있으면 하는 희망을 누구나 가져봤을 것이다. 시험이란 우리에게 그토록 중압감을 주는 현실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어린이책 중에서도 그런 소재를 다루는 이야기가 간혹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외국 동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책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더니 그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책을 읽어갈수록 소재는 비슷하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어디 풀어가는 방식 뿐인가. 그들이 중점을 두는 방향이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것이 바로 문화차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에이바는 시험만 보려고 하면 앞이 캄캄해져서 공부한 것의 반도 풀어내지 못하는 아이다. 어찌보면 매사에 걱정이 너무 많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보잘 것 없고 너무 평범한 연필이 사실은 마법 연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동화에서 그런 연필은 전적으로 시험을 볼 때만 사용되고 알아서 정답을 결정하기에 결국 그것으로 시험을 잘 봐서 처음엔 기분이 좋지만 차츰 불안해하는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 연필은 문제를 써야만 답을 알려주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다. 문제를 쓴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알려 준다. 일종의 영혼이 알려준다고 할까. 나중에 보면 왜 그런 식으로 답을 알려주는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우리 동화와 다른 점은 여기부터다. 에이바는 그것을 시험 볼 때는 쓰지 않고 다른 질문에 더 많이 사용한다는 점. 에이바의 친구 소피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신발을 언제 할인하는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애는 누구인지 등을 묻는 것이다. 여기 아이들은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우리처럼 크지 않기 때문에 굳이 마법 연필을 그처럼 양심을 속이는데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주제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법 연필은 요양원에 계신 외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그곳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비밀을 알아내어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이쯤되면 우리와 접근 방식이 달라도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법 연필을 통해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이바는 엄마를 건강 검진을 받게 하기 위해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할 모험 캠프에서 모든 과정을 완료한다. 아주 작은 것까지 사서 걱정을 하는 에이바가 모험 코스를 전부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처음에는 엄마를 위해서였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힘든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다.

 

마법 연필의 정체를 알고 아쉽지만 그것을 원래 있던 자리로, 아니 원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람에게로 보내는 용기 또한 아름답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모든 것이 걱정투성이인 에이바가 외할아버지를 의연하게 떠나보내는 모습은 또 얼마나 의젓하던지. 앞으로도 걱정을 사서하는 성격은 변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소중한지, 어떻게 헤쳐나가는 것이 현명한지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성장하는 것일 테고.

 

처음에는 마법 연필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양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했다. 으레, 우리 동화가 그랬으니까. 그러나 이야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결론 또한 그랬다. 어린 독자들은 에이바를 따라가다 보면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배려하는 것을 보았으며 때로는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잔잔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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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6-0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소재지만 사회분위기와 생각의 차이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것같네요. 이런걸 문화차이라 하는거겠죠?
오늘 덕분에 책을 두권이나 장바구니에 넣어요

봄햇살 2015-08-17 10:57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으며 정말 문화차이가 이런 거구나를 느꼈지요. 우리나라는 드라마에도 출생의 비밀이 꼭 들어가잖아요. 그게 있어야 이야기가 전개되고...
 
50 대 50 라임 청소년 문학 11
S. L. 파월 지음, 홍지연 옮김 / 라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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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며 옳은 선택이란 과연 무엇인지, 혹은 옳다고 단정할 근거가 무엇인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일례로 고기를 좋아하는 나는 채식주의자를 존경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특별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사람에게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생각없고 야만적인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 기준에서 보자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채식주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일 뿐이다.

 

한때 한창 이슈가 되었던 동물 실험도 나로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화초를 기르다 보면 가지가 너무 위로 자라기 때문에 제대로 균형이 안 잡혀서 예쁘질 않아 화원에 물어보면 가지치기를 해 줘야 한단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가지치기를 하려다 문득 깨닫는다. 과연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가지를 마음대로 잘라도 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을 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이처럼 식물에 대해서도 배려(?)를 하면서 동물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다. 그것으로 인해 과학과 의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이것은 다분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것이 또한 내 한계라는 것도 잘 안다.

 

이 책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길버트가 사춘기라서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고, 그래서 사사건건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길버트의 부모는 지나치게 자식을 온실 속에서만 키우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나라도 그렇구나라며. 어느 나라나 부모 자식간의 갈등은 비슷한 모양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방향은 좀 다르게 나아간다. 길버트가 순전히 반항으로 시내에 나갔다가 환경보호론자인 주드 형을 만나면서 길버트의 반항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길버트가 주드 형을 만났을 때는 공원에 있는 나무를 못 베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동물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자 한단다. 실험실에서 고통받으며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동물들을 다음 목표로 하고 마침 길의 아버지가 그 실험실 연구원이었던 것이다. 길이 처음에는 주드 형을 돕는 일이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일이자 자신도 어떤 큰 일을 해낸다는 뿌듯함에 적극 협조하지만 마침 부모님에게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경위를 듣고는 갈등한다.

 

소설은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든 옳고 그른 방향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가 지지하는 방향은 정해져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는 있지만 보편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길버트는 처음에 동물이 학대받으며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는 주드의 이야기를 듣고 그 현장을 고발하고자 적극 가담하지만 직접 그 현장을 본 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드가 그 동물들을 풀어주려고 한다니까 자기 아버지가 실험하는 동물은 빼돌리려고 한다. 주드의 말대로 자기 한테 적용할 때와 남에게 적용할 때가 달랐던 것이다. 물론 주드의 말이 곧 작가의 말이기는 하지만 작가가 여기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한다. 주드의 편도, 길버트의 편도 들지 않음으로써 딜레마 상황을 잘 빠져 나갔지만 다른 실험용 동물은 사라진 반면 아버지의 쥐만 남도록 하면서 길버트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즉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내가 하는 건 괜찮고 남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길버트의 행동들이 분명 잘못된 것이고 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셋은 그냥 덮고 만다.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해결책일까. 잘못을 해도 아버지가 그늘이 되어주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해서 영 불편했다. 길버트의 온갖 반항과 동물에 대한 일시적인 감정은 단지 가족의 화합을 위한 도구였던가. 뭐,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하지만 그것이 길버트의 변화를 이야기 하기에는 부족했다. 작가가 좀 더 소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작가는 사회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족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기 위해 제목도 이렇게 지은 것이겠지만 책이란 그 당시의 사회를 담고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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