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칠드런 - 2014 제8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6
장은선 지음 / 비룡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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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이야기지만 결코 미래가 아닌 과거의 이야기. 그러나 상황 설정으로 보나 과학의 발달 정도를 보면 분명 미래다. 단, 미래의 선택받지 못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렇다면 과거, 그러니까 현재 중년 세대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들의 생활은 미래의 선택받지 못한 잉여들의 생활이나 마찬가지로 비참했다고 볼 수 있다. 이유없이 맞아야했고 이유가 있으면 더욱 맞아야 했으며, 아직 어른(그래야 비로소 인간으로 대우받는다.)이 아닌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시기에 겪어야 했던 온갖 부당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그것을 결코 '과거'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멀지 않은 미래일 뿐.

 

문도새벽이 어느 사립고등학교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새벽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대우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시간적 배경이 멀지 않은 미래로 설정되었지만 이 고등학교 울타리 안에서만큼은 과거와 지나치게 흡사하다. 다만 새벽의 입을 통해 간간이 들려주는 등록아동들의 삶으로 미루어 밖은 과학이 발전한 미래가 맞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이미 인간의 수명을 통제하게 되면서 죽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인구를 강하게 통제하고 아이를 키우려면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한단다. 즉 돈 있는 사람만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지라 그렇게 몰래 키우다 들켜서 수용시설로 오게 된 아이들을 헤이하이즈라고 부른다지. 문도새벽의 부모님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졸지에 이런 학교로 오게 된 것이다. 사람의 수명까지 통제하게 되는 미래에서도 불의의 사고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좋은 유전자만 골라서 물려받았기 때문에 시험에서 간단히 1등을 할 수 있는 새벽과 달리 이오는 정말 열심히 해서 일등을 한다. 새벽이 학교에 갔을 때 유일하게 호의적이었던 이오는 마음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자의 여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새벽은 나중에야 안다. 일등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성인으로 나갈 자격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성된 자신감이 아니라 결과에 의해, 타의에 의해 얻어진 자신감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이오를 통해 보여준다. 새벽이 별다른 노력도 없이 1등을 하자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는 이오를 통해서.

 

새벽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말도 안 되는 감옥같은 학교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들의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일지 의문스럽다. 이미 사회는 가진 자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선택받지 못한 이삼류 시민들에게는 오로지 1등만 제대로 된 성인 자격이 주어지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분명 새벽과 그 친구들이 비인간적이고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고치기 위해 애쓰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을 암시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래가 결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청소년들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래도 새벽의 앞날은 적어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도 있겠다. 세상은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으니까. 물론 잠시 후퇴하기도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어쨌든 좋은 방향으로 나아지는 것은 틀림없다.

 

새벽과 그 친구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비인간적이고 비열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가도 문득 그것이 지금 중년 세대들이 거쳤던 삶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온다. 아차, 그들이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었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윽박지르고 억압해도 어느 정도 통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 청소년들은 적어도 그때 보다는 아주 조금 나아졌으리라 믿고 싶다. 아직도 오로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기는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럴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본다. 부디 지금의 청소년들은 이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기를, 부모 세대가 들려줬던 이야기라고 여기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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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아이들 라임 청소년 문학 8
다마리스 코프멜 지음, 김일형 옮김 / 라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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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고 나면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등장인물 중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고 이야기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회피할 수도 없으니까. 피해자는 있는데 특정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것. 그래서 사람들은 간혹 '너희들이 인생을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으로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이고 그런 사회를 만든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어른이니까.

 

마르시우도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고아원에 맡겨졌고 거기서도 노력을 하든 하지 않든 힘든 생활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아이를 낳고 책임도 지지 않는 마르시우의 엄마도 문제지만 그런 상황이 될 때까지 사회에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게다가 고아원에서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다. 단지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거리의 아이들보다는 너희들이 낫다고 착각하는 어른들이 있는 한 바뀌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작가가 거리의 아이들을 소재로 글을 쓰기 위해 직접 상파울루에 찾아갔다가 그곳의 참상을 목격한 뒤 브라질에서 10년 간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여겨도 될 것이다. 어쩌면 작가 소개를 먼저 읽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나서 그 나라 고위 관리자들 혹은 힘 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고 정치가 안정되었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아닌가. 하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마르시우는 비록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지만 의지가 곧고 굳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떻게든 괜찮은 사회인으로 자리잡으리라 기대한다.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와 거리의 아이가 되었을 때도 범죄가 될 만한 일에는 손도 대지 않는 걸 보며 계속 그러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 상황에서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텐데 마르시우는 그래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는 걸 보니 소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데 자립해서 어느 정도 기반도 닦고 인정도 받았는데 가구공장에서 저녁마다 클럽에 가서 술 먹고 불성실해지는 걸 보며 마르시우가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초심을 잃은 것 같아서. 그토록 어려운 상황도 잘 이겼는데 왜 이제 정신을 못 차리느냐 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파울루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가진 돈을 몽땅 잃어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거리의 아이가 될 뻔한다. 하지만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마르시우라면 충분히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거리의 아이들이 되어 부랑자가 된 동생들도 제대로 된 길로 이끌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뜨듯이 동생들은 내일 다시 찾아가서 진심으로 설득하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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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과수원을 지키는 소년 라임 청소년 문학 9
윌리엄 서트클리프 지음, 이혜인 옮김 / 라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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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뱅크시의 작품을 살펴보다 발견한 분리장벽 그림. 낡은 장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마치 장벽 구멍으로 바다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장벽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채 공사장 울타리 정도로 생각하고 멋지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그것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암담한 현실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꿈쩍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며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책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조금 위안이 되고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다만 그들에 의해 씌어진 책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이 쓴 책이라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말이다. 흔히 피해자의 눈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는 많아도 가해자의 눈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데 이 책은 가해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피해자의 모습이라 인상적이었다.

 

  팔레스타인인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조슈아는 엄마와 함께 팔레스타인 사람을 극도록 경멸하는 리브 아저씨를 따라 이스라엘 정착촌인 아마리아스에서 살게 된다. 한창 사춘기이기도 하지만 뭔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인지 조슈아는 리브 아저씨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비록 조슈아 아버지가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죽었지만 아버지의 평소 행동을 보면 개인의 신념과는 무관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총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에서는 절대로 군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리브 아저씨는 정반대의 사람이니 조슈아가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나중에는 결국 화해하고 함께 살게 되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조슈아는 우연히 땅굴을 발견해서 이웃 마을이자 원수와 같은 나라인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가지만 위기에 처한 조슈아를 구해준 팔레스타인 소녀를 직접 보고 나서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말, 분리 장벽 저편에는 우리를 내쫓고 죽이려고 하는 원수가 산다는 그 말이 과연 사실일까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변화의 시작은 작은 의심이 아닐런지. 자신을 도와준 릴라 가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마리아스에 있는 릴라네 올리브 과수원을 잘 가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철저히 세뇌된 새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조슈아를 도와주다 크게 다친 릴라 아버지를 위해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몰래 들어갔다 나오다가 척추에 손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가 되고 만다.

 

  과연 조슈아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그곳에 얼마나 될까. 어느 곳이나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있겠지만, 공격 받을 팔레스타인 땅을 구경하기 위해 언덕에 올라가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리브 아저씨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꼬인 매듭을 풀 날이 올런지 모르겠지만 조슈아와 같은 사람이 차츰 늘어가기를 기대한다. 그들 내부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온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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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진 남자가 되는 법 라임 청소년 문학 7
벤 데이비스 지음, 마이크 로워리 그림, 서지연 그림 / 라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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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과 동시에 외국을 동경하곤 하는데 이런 책들을 읽어보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이 된다. 물론 풀어가는 방식은 다를지 모르지만 청소년들이 겪는 고충은 비슷하니까.

 

솔직히 조와 같은 상황이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다. 어디나 게빈과 같은 학생이 있다고 하지만 괴롭히는 양상을 보면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괴로울지 짐작이 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대개의 아이들이 그런 상황이라면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공부를 못 할 텐데 조는 할 게 없어서 공부만 한다는 점이다. 즉 공부라도 잘 하니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는 당하지 않는 것. 뭐, 보아하니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곳은 우리와 달라서 성적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진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무시는 당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조가 하는 행동을 보면 좀 상황 파악을 못 하긴 한다. 뒷표지에 있는 것처럼 장점이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지나치게 입바른 소리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고.

 

일부러 조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게빈과 한 집에서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의 마음은 어땠을까.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조는 슬기롭게 상황에 대처했다. 물론 좀 지나친 장난을 치긴 했어도 게빈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는 게빈과 동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게빈도 알고 보면-언제나 그렇지만-심성이 못 된 아이는 아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지. 그리고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조의 엄마는 아들의 상황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게빈의 아빠도 게빈이 어떤 아이인지, 몰라도 너무 모른다. 결국 어른들은 둘의 문제를 끝까지 모른 채 스스로 해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현실에서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내지는 여기 청소년들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설마, 스스로 해결하는 게 하나도 없지는 않겠지. 내가 우리의 상황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본 것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이 나라는 청소년들에게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교육 방식에 놀랐다. 남녀가 한 조가 되어 아기 인형을 돌보는 방식이라니. 아기가 취하는 모든 행동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인형을 가지고 직접 느끼도록 한다는 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모교육을 청소년 시기부터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는 제대로 교육하고 있었다. 외국 동화를 읽다 보면 그들의 생활방식을 아는 것과 더불어 이처럼 교육이나 문화에 대한 것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소한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일지라도 작은 것에서 감동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런 독자도 있다는 것을 작가는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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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9
쥘 르나르 지음, 전혜영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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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초등학생용으로 된 <홍당무>를 읽으며 어떻게 이런 가족이 있을까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의구심은 청소년용으로 된 책을 읽으면서도 여전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이것도 가족인가 싶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사실이야 안다. 그러나 르픽 부인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는 엄마가 있을까 싶어 의아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엄마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는 홍당무가 안쓰럽다. 굳이 그렇게 애쓸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어린이에게 부모란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홍당무가 더 안쓰럽다.

 

흔히 소설은 주인공의 상황이 차차 나아지길 바라며 읽는데 홍당무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르픽 부인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끝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잠시 홍당무가 엄마에 대한 불평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길래 앞으로는 홍당무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서 상황이 조금 나아지려니 기대했건만 이 조차도 거기서 끝이었다.

 

작가는 어린이들이 사실은 마냥 순진한 것이 아니라 악덕과 미덕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인격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자 홍당무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그 의견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책을 덮었을 때 무언가 찜찜함이 남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소설에 비현실적인 환상을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비록 어린이들이 선하지 않고,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가족도 많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소설에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홍당무에게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아버지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왕이면 조금 더 나아가 홍당무가 자신의 고민과 부당함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가길 기대했으나 아버지도 자신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작가는 당시의 가족 문제를 꼬집고 싶었던 것일까. 사랑없이 결혼하고 교양없는 아내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했던 홍당무의 아버지를 통해 남자의 고뇌에만 집중한 듯하다. 여자 작가였다면 어떻게 풀어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프랑스 중산층 가정을 모델로 한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던 시절에 인간과 가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이 책이 나왔을 당시 사람들의 충격을 이해할 만하다. 그래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과 함께 읽었을 때 이 책의 가치와 의미가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홍당무가 가족들로부터 차별받는 모습에만 초첨을 맞추고 읽으면 처음에 내가 느꼈던 것처럼 그저 홍당무가 안쓰럽고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뒷 부분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처럼 문학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또한 그래서 이 시리즈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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