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을까

_대중영화, 그 정치적 읽기의 매혹과 한계 


1. 대중영화, 특히 '천만영화'로 비롯되는 작품에서 정권과 정치, 시대/당대의 분노와 좌절을 징후적으로 읽어내려는 건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자 거부하기 어려운 매혹이다. 며칠 뒤 학생들과 '천만영화라는 감정'의 테마로 이야길 나눠야 하는데, 사실 나는 이 확신과 자신이 묻어날 수 있는 테마에서 꽤 오래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지금도 혼란스럽다.


2. 평자가 비평의 초반부에 어떤 무력감이나 곤경을 표하는 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나, 여전히 완료된(그것이 유사-의 형태로라도) 귀결점(그것이 영화의 의미를 넓히든, 안온한 윤리적 소실점의 제시든 무언가 손에 쥘 수 있는 목소리를 '예리하다'는 평으로 보고 싶어하는 도착지로서)이 익숙한 가운데, 그럼에도 그 곤경과 무력함을 숨기지 않는 쪽은 내게 어떤 모험으로 다가온다.


3.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최근에 영화평론가 김경욱이 쓴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 '국제시장'에서 생긴 일》을 읽고 많이 실망했다. 쉬이 정의하기 어렵지만 소위 '정치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최근 대중영화의 한 장르에서 정작 '정치적 탈색'이 일어나고 있음을 논하는 이 비평집은 평자가 대상으로 삼은 너무 쉽게 정치를, 사회를 들이미는 요즘 영화들만큼이나 비평 또한 그러했다. 차라리 신중함 측면에선, <부러진 화살> <도가니>를 통해 고다르의 관점 "정치에 대한 영화"/ "정치적인 영화"를 숙고해본 남다은의 옛글 <정치영화는 정치적인가>(《에프》기고)가 나았다.


4. 하나 남다은 또한 예술=이데올로기라는 투박한 관점의 개입으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대중적 "분노의 드라마"를 고찰하는 데 대한 허술함을 잘 털어놓았으면서도, 자신이 대안적 모델로 삼은 영화들에 내재된 실험성과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그 목소리를 영화의 정치적 실천으로 내세운다. 남다은은 '불온한 실험성', 그 또한 글에서 경계하려 하지만, 여전히 매혹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 특유의 '유사-멸망'의 정서에서 오는 답없는 공간들의 은근한 자기 확신에 대해 쉬이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 물으면서 나는 또 방황하는 내 마음을 확인했다.




5. 그리고 여기 노무현을 관통하는 두 영화평론가의 글이 있다. 하나는 <변호인>을 다룬 허문영의 <살균과 표백>이고, 다른 하나는 김선일 피랍 영상을 논한 정성일의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다. 두 글 다 비평가로서 어떤 곤경과 난색, 괴로움을 표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두 글은 토로로 시작하면서 자신이 무얼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은지란 고백이 예상외로 평문의 열쇠가 된다. 어떤 불안과 무력감으로 시작하는 두 글은 결국 선명한 정치적, 윤리적 결단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비평의 테크닉이기보단 둘 다 쓰면서 작동하는 감정들에 자신을 내맡긴 결과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6. 다만 허문영의 글은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가 실화 속 인물을 신화로 가두게 되는 사회적 단계가 어떻게 정치를 삭제할 수 있는가란  차원에서, 정성일의 글은 윤리적으로 역겨운 것을 봄으로써, '봄(seeing)'이 어떻게 정치적 타개책이 아니라, 더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는가, 보기를 수행하면서 정치를 행한다고 확신하는 눈이 실은 '탈정치적 눈'이라 주장한 점에서. 여전히 영화와 정치적 독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곤경은, 정치에 대한 살균과 표백이 일어난 영화상의 '재현, 선택, 배제'의 문제임을 의도치 않게 제시해버렸다. 그나마 정성일이 '보지 않음'이란 실천을 정치적 행위이자 윤리적 결단으로 확언하는 바는 투박했지만 필요로 한 지점이긴 했다.


7. 그러나 정성일이 피랍된 김선일의 비디오 영상을 보지 않음을 외치는 것과 다른 맥락일지라도, 여전히 볼 수밖에, 아니 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보지 않음'이란 이 정치-윤리적 실천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야구팀을 향해 무관중 시위를 보여주자는 헛헛한 결의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8. 지난주 샹탈 애커만의 회고전을 다녀와서 마음에 남는 한 작품으로 나는 조금 생각을 정리해보는 중이다. 1999년 발표된 <남쪽>이란 작품이다. 텍사스 주 캐스퍼 시에서 일어난 '인종 차별 범죄'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류의 '법의학적 눈'으로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사건 이후, 보통 영화들은 사건을 다시 재현하고자 노력하며, 그 가상의 세심함으로 관객 앞에 '사실이란 허구'를 내놓는다. 그러나 애커만은 재현하기 위해 단서를 찾지 않으며, 증언의 목소리는 관객의 울분과 애도를 동원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애커만이 집요하게 잡아대는 이 '트래킹 숏'에서 비춰지는 길에 백인들에게 죽임당한 제임스 버드 주니어라는 인물을 둘러싼 흔적은 없다. 영화는 속된 말로 '그것이 알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인다. 여기서 밀어붙이는 어떤 무심함에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읽고 싶은 유혹과 아니, 삼가야지 하는 유혹이 서로 스며들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9. 그렇다면, 이 어지러운 마음, 뭔가 정의하기 어려운 이 마음은 정치적인 것일까. 다시 돌아와 <국제시장>에서 덕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절삭된 한국 현대사를 비판하며, 여전히 국가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세대론의 헤게모니 각축전 으로 대중영화에서 정치를 읽어내며, 탈정치적인 것을 색출해내는 이 확신 어린 비평은 정치적인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정의할 수 없는 아니, 이 좀비 같은 현대인에게서 함부로 읽어낼 수 없는, 아니 읽어내기가 두려운 영화의 실험성과 그 비서사적 제스처들, 거기에 내재된 세계관의 징표를 우회하는 비평은 과연 정치적인 것일까.


10. 여전히, 그 어느 쪽이든 확신에 찬 말들 속에서 나는 <남쪽>의 집요한 트래킹 숏이 담아내는 길을 떠올리며, 우리가 알아야 할 일들에 대해 '그것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일까?'라고 묻는 영화의 질문에 대해, 영화로 행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 무엇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본다,  보려고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아는 것에 무심하다. 괘씸하지만 고마운 영화다.  그 괘씸함을 통해 나는 다시 영화를 통한 정치의 발견을 더듬거려본다. 물론 더듬거리기 때문에 확신에찬 대답은 금물이며, 이미 실패를 예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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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6-03-1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호인].. 인상깊게 봤던 영화에요. 내용들이 떠올라서 VOD 사진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네요.(웃음)

얼그레이효과 2020-02-28 16:21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래되어 이 덧글을 보실진 모르겠지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날 관계는 ‘매개’에 의존하고 있다. 관계가 매개적이라는 건, 나와 타인 사이에 나름의 벽이나 창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벽이 있어야 타인에게 편히 이야기를 한다. 타인의 따가운 반응을 듣지 않아도, 가상의 벽에서 반사된 내 목소리를 그 반응이라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창이 있어야 안정감 있게 목소리를 낸다. 내가 짜놓은 틀 안에서 본 모습으로 표현해야 당황하지 않고 의사를 강하게 표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개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제대로 의미가 전달되기까지 나름의 단계와 우여곡절을 겪는다. 길로 치자면 지름길보다 기어코 에움길을 택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 또한 고양이성 인간의 특색이다.


문제는 에움길에 주저앉아버리는 때다. 결국 내 앞에 놓인 벽과 창이 세계의 전부라고 여긴 채,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자기 자신과 섹스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은 관계의 에움길에 정착해버린 고양이성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웹디자이너 마틴과 건축가 마리아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둘 다 누군가에게 어떤 교감을 느끼다가도 이유 없이 확 식어버린다. 특히 이 작품엔 심리 전문가도 주인공들의 관계 실패를 제대로 짚어주지 못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마틴은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심리학자를, 마리아나는 수영장에서 심리 상담사를 만나 데이트를 즐기지만 카메라는 취향에 대한 교환에서부터 섹스까지 욕망의 접점을 찾지 못해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들을 지긋이 보여준다. 차리리 마리아나가 행복한 순간은 물건을 쌀 때 쓰는 뽁뽁이를 터뜨리며 분을 풀거나, 자신이 디자인한 마네킹에 올라 타 자위를 할 때다. 마틴 또한 우연히 알고 지내는 도그 시터와 섹스를 하는 것보다 컴퓨터에 설치된 온라인 채팅 사이트, 미니 컴포넌트와 텔레비전, 강아지와의 대화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마틴과 마리아나는 일찍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탐구해왔던 ‘자기 자신과 결혼해버리는 사람들’에 가깝다. 




지젝은  "나는 나 자신과 결혼했네"라는 뷔욕의 노랫말에 감명받은 중년 사진작가 그레이스 젤더의 삶을 소개한 바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결혼 서약을 했고, 결혼반지를 낀 채 거울 속 자신에게 입을 맞췄다. 타인과의 만남이 점점 불안한 시대다. 젤더가 올린 결혼식을 마냥 참 이상한 사람이다, 하고 볼 수만은 없다. 다만 문제는 삶의 안정에 있어 자신>타인이란 부등식이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계의 부등식이 만연해질 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족쇄란 없을까.








여기 문이 하나 있다. 확 열리지도, 확 닫히지도 않은 문이다. 영화 <경주>에서 최현은 윤희의 집으로 함께 간다. 늦은 밤, 둘 다 술에 취했다. 최현과 윤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희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최현은 초를 키고, 혼자 운동을 하며 반쯤 열어놓은 문에 대한 해석을 벌인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많은 문들이 닫혀 있을 때, 방긋이 열려 있는 듯 마는 듯한 그런 문의 이미지에 주목하며, 감수성의 상상을 제안한다. 바슐라르의 제안에 잠시 기대어본다면, 우리는 최현과 윤희의 행동에 '찌질함'이란 반응을 보내는 이들을 싱겁다며 충분히 야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경주>가 인상 깊은 이유는 영화 속에선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해 곤경을 겪은 사람들 뿐이다.  다들 관계의 에움길, 욕망의 에움길에 안주한다. 영화 초반부, 친구의 문상을 치르고 추억이 묻어난 경주를 찾은 최현은, 역 앞에서 담배를 피려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에게 "여기서 담배를 피면 안 돼요"라는 말을 듣는다. 하나 최현은 전 장면에서 담배를 피는 친구 옆에서 담배 냄새만 맡고 있던 터였다. 담배를 피려 하면 중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가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소녀는 아내의 역할을 한 셈인데, 이어지는 소녀의 질문은 더 중요하다. "아저씨, 그거 진짜 담배예요?" 최현은 흡연하기 위해 담배를 들었지만, 정작 담배는 입이 아니라 코 앞에서 맴돈다. 담배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현은 자신이 담배를 피었다고 자위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 소녀의 말은 이중적 속박이다. 소녀는 최현에게  그곳에서 담배를 피지 말라는 사회적 규율을 전했지만, 한편으론 왜 너는 너의 욕망을 해소할 물건을 사놓고 그 물건의 효용을 제대로 만끽하지 않냐고 묻는 것이다. 소녀의 이중적 속박은 최현에겐 상처다. 몸에 난 상처는 약을 바르면 낫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과연 그러할까. 






최현이 담배를 피기 시작하는 장면은 옛 연인 여정을 만나면서부터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정은 최현에게 강렬한 진리를 남기고 경주를 떠난다. 서울로 올라가려 기차를 기다리던 중, 여정은 오래전 최현과 술에 거나하게 취했을 때, 최현과 잠자리를 가졌으며, 그때 임신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에 흐른 뒤에야 처음 전한다. 여정 대신 중국 여성이란 결혼한 것에 마음이 남았던 최현은 충격을 받는다. 여정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와 대화 속에서 교환되고, 여정의 상처는 최현의 마음속을 움푹 찌른다. 최현은 드디어 담배를 피기 시작한다. 다만 최현은 이제 딱 하나, 자신의 욕망적 절제선을 끊어냈을 뿐이다. 그는 영화 내내 보이지 않는 금기를 의식하며 갈등한다. 자신을 움푹 찌르는 타인의 상처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한 건물에 사는 이웃의 얼굴마저도 제대로 쳐다보기 어렵다. 이웃이 있다고는 느끼지만, 그것은 층간 소음에 의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의해, 음식쓰레기봉투를 문앞에 내놓지 말라는 메모에 의해 확인될 뿐이다.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의 앞 모습을 볼 때 그 놀람은 개인의 이상한 기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의 원제는 'medianeras', 건축 용어로 측벽이란 뜻이다. 건축가인 마리아나는 타인의 앞과 뒤를 제대로 보기가 두려운 요즘 세상을 증언한다. 그녀는 건축법상으로 불법인 측벽에 창을 내려 한다. 마침 그녀와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사는 디자이너 마틴도 측벽에 창을 낸다. 마리아나는 여성의 G-스팟이 연상되는 건물 벽 이미지 안에 창문을 만들었고, 마틴은 남성의 팬티 그림이 그려진 건물 벽 안에 창문을 만들어, 팬티에 구멍을 낸다. 자기 자신과 결혼해버린 사람들, 타인과의 만남이 설레지만 그 설렘과 욕망의 기한은 '우리 언제, 어디에서 만날까요?'라는 그 말을 한 순간 최고조에 올랐다가, 정작 만남이 이뤄지면 식어버리는 이 '약속 오르가슴'에 걸린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불법적인 창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러한 창은  나에게 침잠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이 불완전하고 위험한 세상을 향한 개입과 응전의 가능성이다. 타인은 곧 만남이며, 타인을 욕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외려 우리를 흠칫하게 하는 저 올바른 배려와 우회 속에 놓인 관계의 언어들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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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시리즈 네번째 작품인 <만월의 밤>(1984)은 '영역과 성격'에 관한 이야기다. 


A 실제로 영화의 실내디자인을 책임지기도 한 주연배우 파스칼 오지에는 루이즈란 디자이너로 나온다. 현실 속 오지에의 미적 취향은 주인공 루이즈의 취향이다. 


B 삶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는지 신경쓰는 루이즈. 그러나 루이즈를 독점하려는 남자들인 도시건축가 레미, 작가 옥타브는 그런 루이즈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관계맺음을 자기 영역 안에서만 잘 발휘하려 한 채, 타인의 영역에 발들여놓는 걸 어색해하는 모습들을 그려낸다 


C 특히 레미와 옥타브는 자신의 실내 공간에선 기가 살지만 바깥에 나가면 사람들을 힘겨워한다. 루이즈는 그들을 간파하고 변화를 줄 것을 제안하지만 레미는 거부를, 옥타브는 외려 자신이 실은 사교적인 사람임을 강변한다 


D 영역을 확보한다는 건 일과 여가 사이의 균형, 삶의 패턴과 그 배치이기도 한데 본작에서 이를 인상적으로 연출한 장면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될까'라고 묻는 대화씬이다. 영화에선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받고 그 누군가의 취향을 구경한 뒤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간다. 이때 자신이 늘 해온 삶의 패턴이 있는 주인공들은 상대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고 말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영화에선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는 질문이 세 씬에서 꼭 한 번씩 등장한다) 


E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과연 서로의 영역을 확보해준다는 건 가능한가란 질문을 시종일관 던진다. 


F 영화엔 시적인 영화가 있고, 소설적인 영화가 있으며, 에세이적인 영화가 있는 것 같다. 로메르의 영화는 아마 에세이적인 영화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의 영화엔 아주 세심하고도 인상적인 말들은 없지만, 우리가 늘 쓰는 말들의 산문적 배치 속에서 곱씹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다. 


G <만월의 밤>하면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두 여성을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 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는 로메르 본인이 지은 격언이 유명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과 영역을 늘 고민하는 여성 루이즈가 카페에서 처음 만난 이에게 듣는 어떤 한마디를 더 좋아한다. "동전을 던져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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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프로듀스101>을 눈여겨보는 이유
_'플랫폼화된 (예술적) 신체'에 관하여

1. <프로듀스101> 같은 프로그램은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특색 있는 컨텐츠를 갖고 있냐는 기준으로 보기 쉽다. 하나 매주 에피소드를 챙겨 보면서 101명 중 자신의 신체 감각을 고유의 컨텐츠가 아닌, 하나의 플랫폼으로 보는 몇몇 캐릭터들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2. 아이돌도 엄연히 문화노동자임을 감안할 때 그 개인은 자신의 미적 감각, 신체에 내재된 그 취향의 채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적 자원을 배치하는가. 

3. <프로듀스 101>에서 트레이너는 있지만, 그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와주는 범위는 지정된 에피소드의 성과에 부합하는 '조직화 생성'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걸그룹 데뷔를 이루려는 101명이다. 본 프로그램은 센터, 메인보컬, 서브보컬, 랩, 서브랩 등 대중적 성공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여야 하는 임시 공동체에 필요한 역할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분업 형태를 인식한 101명 중 김청하나 전소미, 임나영(물론 이들은 주어진 미션에서 뛰어난 컨텐츠를 보여준다)은 101명의 캐릭터를 나름 하나하나 살펴가면서 매 프로젝트에 주어진 목표를 위해 다른 동료의 미적 신체가 무슨 위치에 있어야 하고,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 '미적 배분'을 수행하고, 기꺼이 자신의 신체를 플랫폼으로 삼는다. 

4. 이런 플랫폼화된 신체를 보여주는 그들에게 반드시 좋은 결과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미적 에너지의 분할과 배분 속에서 그들은 임시 공동체를 위한 그라운드가 되어주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순위는 생각보다 최상위권은 아니다.

5. 101명 다 크고 싶어서 왔지만, 이미 그 안엔 누굴 키울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 <프로듀스101>엔 소속사, 브랜드의 힘, 국민프로듀서와 투표, 미모와 매력 등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클 가능성의 요소'에 따른 금수저-흙수저(이미 될놈될 같은), 101명의 열의를 착취하는 문화노동 구조와 이를 안전하게 가린 채 냉정한 소비자로서 보고 싶어하는 대중의 심리 등, 비판해볼 지점이 있지만 그게 이 프로그램에서 보려는 내 관심사는 아닌 것 같다.

6. <프로듀스101>에서, 몇몇의 플랫폼화된 미적 신체를 현시하는 개개인은 얼마나 '자기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던져준다. 프로젝트식 삶에 최적화된 임시 공동체의 형성, 그것에 따른 관계의 탈부착과 여파, 임시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취향과 각자의 정서에너지까지 챙겨야 하는 오늘날 청춘의 미적 신체와 그 감각이 어떻게 배치되고 있는지. <프로듀스101>을 계속 눈여겨보게 되는 이유다. 101명은 걸그룹 데뷔를 해야 하면서도 실은 그 안에서 자신이 '걸그룹 데뷔를 시켜줄 능력'이 있는지도 동시에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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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매체는 발전하지만, 매체에 대한 성찰은 외려 과거를 참조해야 할 때가 많다. 매체에 대한 성찰은 다종다양한 테크놀로지의 존재, 능수능란한 수용과 지식에 있는 게 아니라, 매체가 희소했던 시대에 사람들이 보여준 감정, 유령 같은 행위에 내재된 당시엔 해석할 수 없는 어떤 깨우침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B. 버스터 키튼의 <카메라맨>(1928)은 이를 입증하는 영화다. 1919년부터 미국에선 뉴스릴카메라가 활용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 뉴욕은 사건과 사람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든 사진가들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버스터 키튼은 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을 찍어주는 사진사인데, 우연히 언론인 샐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샐리가 다니는 언론사에 입사하려 한다. 그는 오디션을 거치면서 '정지된 사람의 모습'이 아닌,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찍는데 <카메라맨>은 이 오디션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연발의 해프닝을 담은 작품이다. 


C. 이 영화의 공동감독이기도 한 키튼은 사건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사건을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드러낸다. 영화는 사진의 시대에서 영화의 시대로 신체와 그 감각을 안정적으로 옮겨가는 미국 사회의 풍경 속에서, 결국 좋은 사건(으로 인정받는 것)이란, 누군가의 모습이 있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사건이 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D. 사건이 중요해지고 그만큼 이를 담아낼 매체의 발전과 엘리트, 대중의 호기심도 커지는 시기. 그러나 이 영화는 오늘날 대중이 사건에 느끼는 피로감을 예언이라도 한 듯,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 사건과 특종, 카메라맨들의 활력이 두드러질 시기에 <카메라맨>은 사건에 대해 어떤 허무함을 강조한다. 


E. 그리고 그 허무함은 "스톤 페이스"란 별명답게 무표정이 자아내는 버튼의 유머로 인해 도드라진다. 이는 며칠 전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가 좋아했던 개념인 "우모리스모", 즉 희극에서 어떤 비극을 아울러 느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이어진다. 


F.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지만, 나는 자기 예언적인 실현을 담은 영화에서 어떤 매력을 느낀다. <카메라맨>은 카메라, 사람, 눈, 시각성, 보는 대중에 대한 미래를 스스로 내장했던 작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키튼은 희극이란 도래하는 비극을 감지하는 예술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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