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리스 코넬이 죽었다고 했을 때 많은 이가 시애틀 그런지의 중추 4인방(너바나, 펄잼, 앨리스인체인스, 사운드가든/알다시피 코넬은 사운드가든의 간판보컬이었다)을 애도했다. 이는 단명했지만 짙은 인상을 남긴 90년대 하위문화 '슬래커slacker'에 대한 애도이기도 했다.


2. 우리가 이후 '너드nerd'라고 부르는 테크노 괴짜가 주목받고, 너드가 테크노 여피가 되어 실리콘 밸리에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자유주의와 기술결정론이 결합된 문화정치)를 꾀하기까지.


3. 돌아보면 슬래커는 보보스처럼 세계를 누비며 명망높은 글로벌한 문화적 보헤미안이 되지도 못했고, 《WIRED》가 주목하는 '어벙한 듯 생겼지만 머린 좋은 하이테크 일인창업가'의 삶도 누리지 못했다. (소수만이 두 경로를 택했다.)


4. 슬래커는 영화 매체의 역사에서 가장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시장의 관점에선 일찍 생을 마감한 비디오의 운명과도 닮았다.


5.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낀 세대'였던 슬래커는 아날로그적 정서를 부여잡으려는 90년대식 낭만주의였고, 이를 따르는 젊은이들은 예민함을 신경쓰는 우회의 화법 대신 서로의 감각과 감정을 타격하는 직설과 헛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6. '슬래커 컬처'의 신봉자였던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슬래커>로, 케빈 스미스는 제이 앤 사일런트 밥 콤비로 대표되는 <점원들>로 90년대 미국 청년들의 루저덤(loserdom)을 지지했다. 마이크 마이어스의 <웨인즈 월드> , 빌과 테드로 대표되는 엑셀런트 어드벤처, 위노나 라이더와 벤 스틸러, 에단 호크가 남긴 소품인 <청춘 스케치>는 슬래커가 남긴 유산이 되었다.


7. 이 시기를 문화적 연원점으로 두고 있는 주드 애파토우 사단이 슬래커의 복원을 21세기식으로 이뤄냈지만, 사람들에겐 영화의 스타일로 다가올 뿐, 우리네 일상과 연계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8. 예전에 대중음악웹진 <weiv>에 쓴 '라나 델 레이: 우울의 리더십과 명성문화'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오늘날 이 사회는 인디라고 하는 특질이 어떻게 제도권에 포섭될지 가장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감각을 내장한 개인들이 살고 있다.
아울러 나보다 뛰어나게 우울을 표하는 이를 보며 우울이 독창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닌, '스펙으로서의 우울' '격차로서의 우울'이 되었음에 또 한 번 좌절하게 되었다.


9. 어찌 보면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정념과 우울과 직설을 표출했던 슬래커의 짧은 삶은 돈 없고 빽 없지만 '우울'만큼으로는 서로 평등할 수 있었다는 희망과 기대가 사라졌음을 일찍이 예견한 사례였는지 모른다.


10. 이젠 아무도 하위문화를 연구하지 않는다.

슬래커이자 슬래커의 우상이었던 뮤지션 크리스 코넬을 이렇게 보낸다.

아쉽지만.


크리스 코넬 196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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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래커세대 2019-05-2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90년대 슬랙커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 문화를 추구했던 젊은 시절을 보낸 엑스세대로서 정말 잘 정리된 글이라 생각합니다. 서구의 청춘스케치와 아시아의 중경삼림은 그 대표격인 영화들이었죠...

얼그레이효과 2020-02-28 16:20   좋아요 0 | URL
댓글 달아주셨는데, 서재 관리를 도통 못해 답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정오의 낯선 물체

1.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를 읽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정오의 낯선 물체>가 떠올랐다. 어떤 톤이. 
그 다큐는 한 소년과 여교사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데, 그 이야기는 주민들에 의해 B란 이야기로 변하고, C란 이야기로 변하다가, 끝난다. 실은 그러다가 꼬맹이들의 공 차는 장면이 건조하게 나오면서 끝나는데, 그 건조함에서 드럼세탁기에서 빨래하면 나는 어떤 냄새가 느껴진다.


2. 떠올랐다는 게 어떤 시너지의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박솔뫼의 소설과 위라세타쿤의 영화엔 묘하게 친할머니보단 외할머니 냄새가 나는 듯하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외할머니 냄새가 좋고, 그래서 두 사람의 작품에서 매력을 느낀다.


3. 박솔뫼는 지도와 약도에 관심이 있고, 주전공은 여름이며, 도미와 다미라는 이름을 좋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커피와 맥주를 자주 언급하지만, <수영장>의 다미처럼 보리차에도 관심이 있으며, 얼음이 녹는 소리를 '꺅꺄'라고 표현하는 귀가 예민한 사람이다.


4. 《귀신, 간첩, 할머니》에 실린 위라세타쿤의 영화노트는 박솔뫼의 기운과 닮았는데, 나는 박솔뫼의 소설에서 '분미'들이 숨어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고, 그녀는 부산이나 오키나와나 사쿠라이 다이조 같은 인형을 실은 뽑을 줄 알지만, 뽑아서 자기 쪽으로 가져가다 말아서 인상적이다.


5. <정오의 낯선 물체>엔 몸속에 구슬을 지녔다 몸밖으로 뱉는 이의 설화가 나오는데, 박솔뫼의 인물들도 그래서 다들 구슬이 있을 것 같고, 구슬을 지녔다는 것 혹은 구슬을 뱉는다는 것에 속으론 신경쓰지만, 그 결론이 무심해서 좋다.


6. 당신이 에어컨을 옵션으로 한 원룸에 산다면, 밤 10시쯤 에어컨 실외기쪽 창과 방 입구를 열고 선선한 바람의 통로를 만들자. 다행히 박솔뫼는 커피와 맥주를 글자에 많이 심어두었고, 아핏차퐁은 조금 습하지만 우리를 어떤 숲속으로 데리고 간다. 물론 돌아오는 길은 모른다. 그저 맡길 뿐이다. 오늘은 그러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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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작가의 새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의 해설을 썼습니다. 살면서 소설집 해설은 처음입니다.  '착잡한 자들의 몸짓'이란 제목의 글인데, 본 소설집을 '밥값' '밥심' '밥때'란 관점으로 재구성해 다시 읽어본 시도를 담았습니다.


독자들의 작품 읽기에 소소한 도움되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살과 타액의 교환이 형편의 교환으로 한 단계 나아가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이 정도밖에 못 살았다’는 미안함과 ‘그런 것 따지는 사람 아니다’라는 의연함을 주고받는 과정임을 안다. 표면적으론 훈훈한 성품의 교환이지만, 이면에는 ‘사회적 삶의 상처’들이 교환된다. 김이설은 이 상처를 전략으로 읽어내고 계발해내는 사람들, 그러한 그들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는 사람들, 이 잔혹한 현실이 자신도 모르게 이뤄져버린 데 대해 멍한 사람들의 구도를 정밀하게 소묘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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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30세상보기. 연재 마지막 글입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영화계는 잠시 일상성이란 용어에 취했다. 관객은 자신이 목욕탕 한증막에서 자주 보인 습관, 사과를 감자 깎듯 할 때의 당황스러움, 가끔 발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냄새를 맡는 동작까지 영화가 담아낸다는 것에 공감이란 반응을 보냈다.


더 깊은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영화비평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선 홍상수 감독의 작품과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작품이 주목 받으면서 일상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영화계에서만 일상성을 주목한 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출판계에서는 ‘○○가지’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20대에 운명을 바꾸는 50가지 습관’처럼 일상은 소소한 미담과 체험이 가득 찬 에피소드로 가지런히 수집되었다.

뒤돌아보면 일찍이 이게 대체 일상성인가라며 의문을 표한 사람들은 많았다. 당시 평자들은 ‘쇄말주의’란 용어를 자주 언급하곤 했다. 쇄말주의는 삶에 대해 우리가 놓쳐선 안 될 질문을 던지는 대신, 삶을 유난히 자잘하게 표현하는 데 그치고 마는 어떤 기교를 비판할 때 쓰인다. 이 기교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것은 일상 속 한 장면을 ‘~하는 법’으로 재현하는 경우였다.


과거 영화계나 출판계가 주목해온 일상성은 최근 피키캐스트 같은 생활플랫폼, 웹툰 그리고 독립출판계로 옮겨온 듯하다. 선뜻 입 밖으로 꺼내기엔 창피하거나 곤란한 생활상을 ‘짤방’과 위트 있는 짧은 글로 보는 게 낯설지 않은 요즘, 기존 언론사와 포털도 주요한 카테고리에 ‘~가지’로 수렴되는 이야기를 자주 게시한다. 작은 서점, 독립 책방에 꽂힌 다종다양한 잡지와 책들에는 생활들이 난무한다. 가히 생활이 폭발 중이다. 나는 이를 ‘가지 저널리즘’이라 부르려 한다.

가지 저널리즘에서 눈여겨보는 지점은 배려와 배움이다. 가령 생활툰이라 불리는 웹툰, 그리고 우리 삶을 유머러스하게 재구성해내는 피키캐스트의 감각엔 배려가 있다. 특히 피키캐스트는 삶 속에서 신경 쓰이는 여러 순간을 재치로 전달한다. 이때 재치는 우리가 예민하게 고민한 생활상을 불편하지 않게 전하는 배려의 기술이다. 하나 뒤틀어 보면 배려란 당신이 사회가 세워놓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게 권하는 삶의 소극적 방어술일 뿐이다.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 푸는 법 TOP5’ ‘조별 과제할 때 챙겨야 할 갈등 5가지’를 통해 얻은 재치에서 내가 속한 세계를 탈바꿈할 수 있는 상상은 없다.

가지 저널리즘이 우리에게 재촉하는 것은 이른바 ‘생활 지능’이다. 우리 삶이 베스트로, ○○가지로, 탑으로 항목화되는 사이 개인은 생활의 미세한 장면을 그때그때 어떻게 신경 쓸지 요구 받는다. 이는 어린 시절 들었던, 몇 살 인데 아직도 형광등을 제대로 못 갈아?, 신발끈도 못 묶어? 같은 부모들의 ‘생활점수’ 채점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다.

가지 저널리즘은 개인의 눈에 심리를 부여한다. 카페, 칸막이 책상, 술집, 고시원, 교실에 위치한 ‘나’는 상대의 마음을 활달히 꿰뚫어볼 수 있는, 그러나 성격상 내향적인 관찰자로 규정된다. 관찰자인 나도 누군가에게 생활지능을 평가 받는다. 관찰 속에서 생활은 점차 오디션이 된다. 그럴수록 내 관찰은 정찰로 변한다. 조용한 당신과 내가 일상 속에서 언제 음침하고 괴물 같은 적으로 다가올지 모르니 미리 조심하자는 정찰. 여기엔 서로 부대끼며 얻는 배움의 예상치 못한 묘미란 없다. 예측 가능한 심리적 패턴을 접하면서도, 공감이란 이름 아래 전혀 생각지 못한 삶에 관한 고민을 만난 마냥 연기(演技)할 뿐이다. 생활의 세밀화(細密畵)에만 집착하는 가지 저널리즘이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공감이야말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괴물이 아닐까. 난 여전히 공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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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과 김엄지의 작품을 비교해보면서, 과연 작품을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가 범위인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두 작품 다 표면적으론 시적인 호흡과 소설적인 호흡의 경계를 되묻는다. 물론 당신은 이런 '시도' 자체에 대해 이미 기대치를 낮추고, 실험이란 용어에 냉소라는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기에, 내가 할 이야기를 비교적 냉랭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일 줄 믿는다. 아울러 나 또한 실험이란 용어를 내걸어 언급하는 작품들에서 느낀 아쉬움을 어떤 성공작으로 둔갑시키고픈 마음은 없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명백한 실패작을 완성도 있는 성공작으로 둔갑시키는 독창적인 해석'이란 지젝의 견해를 고스란히 내 시야로 전유할 능력은 아직 내겐 없다. 물론 내가 언급하는 작품들 또한 명백한 실패작도 아니다.

2. 난 두 작품을 읽으면서 책이라는 물성을 띤 출판이 과연 그 작품에 어울리는 것일까 생각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시적인 호흡과 소설적인 호흡이란 장르에 대한 신경 씀에서 온 것은 아니다. 특히 김엄지의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손은 검은 글자를 지면에 새기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끝내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게 맞는 걸까, 아리송했다. 소설도 일종의 조형이라면, 소설가는 자신의 언어를 '디자인을 기다리는 말들'로 규정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에 대한 디자인까지 책임지는 것이 작품을 쓰는 것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을까.

3. 어느 문학 웹진에 실린 김엄지의 소설을 보면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한 번, 데스크톱으로 한 번 작품을 읽었다. 그리곤 스크롤바를 내리는 내 손가락의 감각과 눈의 이동, 이 감각적 배치에 스며든 작품의 행갈이와 어떤 호흡, 서술하는 언어들의 헤엄침을 보면서, 과연 웹진이라는 형태의 공간, 더 나아가 책이라는 형태의 공간과 그 공기는 김엄지가 글자로 자아내는 공기와 어울리는 걸까. 나의 눈과 몸은 그리 익숙하게 작가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여전히 우리는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어떤 미적 결과물을 위한 오퍼레이터 정도로 염두에 두고선, 텍스트에 대한 보완적 성격으로 디자인의 미적 가치를 한정해버린다. 그러나 과연 디자인은 소설을 위한 어떤 전략이자 소설의 언어를 뒷받침하는 테크놀로지로만 치부해야 하는 것일까.

5. 가령 나는 최근 한 계간지에 실린 이종산의 단편을 보면서 '페이스북화된 관찰기'라는 특성을 떠올렸다. 본 작품 속 등장하는 카페에서 주인공 화자가 선보이는 어떤 '심리적 눈'은 페이스북 사용자 중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자신이 카페에 앉아 주변을 살피던 내용을 1. 2. 3. 순번을 매겨가며 공유하는 것과 유사했다.(물론 이종산 작가가 직접 그런 행위를 벌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실천의 감각 또한 우리 삶의 신체적, 심리적 재배치를 유도하는 '디자인적인 것'으로서 저 소설이 책이라는 지면이 아닌 다른 영역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6. 여기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있고, 그 작품은 작가의 손과 독자의 손에 의해 어떤 의미를 갖는다. 그러했을 때 우리는 어떤 단촐함과 평상심으로 독서 경험이라는 자체의 향수와 여전한 매력을 공유한다. 하나 우리 손이 느끼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과감함을 느껴봐도 되지 않을까. 작가의 손과 독자의 손은 문학과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재설정을 도모해봐도 되지 않을까. 디자이너의 어시스트와 소설가의 텍스트라는 형태가 만들어내는 기존의 시각적 실험 체제라는 영역 대신, 우리는 좀 더 소설가 본인의 직관에 따른 시각 체제의 구상과 그 실천을 작품을 쓴다는 것이라는 범위로 더 밀어붙임을 같이 모색해봐도 되지 않을까.

7. 언젠가 웹투니스트 이자혜 작가가 너의 아버지는 부자란다라는 암호와도 같은 짧은 말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 암호를 제각각 받아들이면서도 뭔가 해석될 수 없는 기운 가운데 리트윗을 하고 관심을 보였다. 나는 김엄지의 작품이 외려 책이 아닌 트위터를 통해 공유되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했을 때 비평가들은 자신의 앎의 깊이로 표층 너머를 해부하려는 데서 오는 허탈함을 돌아볼 경우가 올 것이다. 암호와도 같은 말에 대해 그 암호를 푸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이 아리송한 고민에 대한 답을 풀려고 발버둥치다 보면, 표층 너머의 세계를 '소설 너무 쉽게 쓰는 거 아냐'라는 식으로 작가의 태만으로 몰고 싶은 유혹과 전진하지 않는 자동차 바퀴에서 나는 탄 냄새 자욱한 '공회전식 물음' 같은, 비평은 왜 하는 걸까란 마주하기 싫은 질문 사이에서 또 한 번 방황한다. 나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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