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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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생 김경미 시인,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는 제목에 끌렸다. 같은 연배여서 그런지 수록된 시가 대체로 공감되었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기에 뭔가 비법이 있을까 기대했는데 순서는 없고 그냥 견디는 거란다.ㅜㅜ 하긴 나이테가 늘어나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지천명이요, 모든 걸 견디는 게 삶이라는 것도 알겠더라.^^ 

 

고통을 달래는 순서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장 차이다 토련(土련)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르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볼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게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했던가?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오후'라니~ 시인들은 참 묘사도 잘한다. 세상을 살면서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린다는 '질'에 특히 공감됐다.   

 

질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 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좨지
고기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도, 생리대만은
최고급이다 먹는 입 하찮아도 칫솔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산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그렇다 라일락꽃들의 불립문자 탁발의 봄밤 혹은 청색
다도해의 저녁 일몰이야말로 아니다 연애야말로 삼각
관계야말로 진정 질이 전부이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벳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잘 지어 입혀야 한다
몸이야말로 시계를 꺼낼 수 없는 곳 영혼이든가?
그렇다! 품종이 좋은 하늘을 써야 한다 관건은, 가장 비싼 것 하나쯤엔 서슴없이 값을 치르니
귀함이 곧 가장 싼 셈, 목숨만큼은 정말 제대로 값을 치르라고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오후
싸구려 플라스틱용품들 한없이 늘어놓아진 봄길에
값이여, 말 너무 많이 하지 말아라
   


하하~ 나는 먹는 것 입는 것은 질을 찾지 않지만 문화적 혜택이나 책을 사는 건 질을 헤아리고 아까워하지 않는다. 내 곁에도 책은 빌려봐도 유기농으로 최상의 것을 먹는 이웃이 있고, 책은 안 사도 옷치레엔 아끼지 않고 돈을 쓰는 이웃도 있다. 다들 무엇인가 자신을 만족시켜 줄 것엔 최상의 질을 찾는다. 촌철살인의 유독 짧은 시도 눈에 띈다. 

  

변덕 

촛불에 컵 덮듯 탁, 물 부어버렸다가 

젖은 촛불 들고 나가 종일 바람에 말리다가 

 

불참 

너무 허름한 기분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미안하다 오후 여섯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첫눈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라리다 

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다 

 

 

이 시집은 해설이나 발문 없이 시인 자신이 쓴 '부재에 홀리다'란 산문이 실렸다. 난해한 비평용어나 시보다 어려운 해설도 없고, 시인이 네번째 시집을 작업하기 위해 직장을 접고 온전히 전업시인이 되어 2008년 8월,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국제창작프로그램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에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천창이 유리로 되어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 하지만 천둥 번개와 밤새 쏟아지는 빗소리에 공포에 질렸던 이야기는 어찌나 웃음 나던지... '시란 무엇이고,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토론답변을 쓰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했지만, 다른 작가들은 솔직하게 '왜 쓰느냐고 묻지 마라, 무슨 대단한 답을 기대하지 마라, 그냥 쓸 뿐이다...글을 잘 쓰기 위해선 별 방법이 없단다. 그냥 많이 읽고 많이 써라... 시인도 이 경험으로 크게 깨닫고 시도 솔직하게 쓴 것 같다.^^ 

나이 먹은 이들의 장점이란 솔직해진다는 거, 시인도 예외는 아니듯 어머니와 모텔이냐 교회냐를 놓고 벌이는 갈등을 소재로 쓴 '나의 노파'는 심각한대도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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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2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기언니, 순서 없고 그냥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이라구요? ^^
처음부터 끝까지요. 그렇구나..

순오기 2009-08-23 15:21   좋아요 0 | URL
더위를 견디듯이 사는 일도 견디는 것이더라고요.

같은하늘 2009-08-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서 없이 받아들이고 견뎌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순오기 2009-08-27 08:19   좋아요 0 | URL
하하~ 그 나이에 벌써 아시는군요.^^
 
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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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으로 만난 박성우 시인이 2002년에 낸 첫시집이다. 대학 때 매주 4~5편의 시를 써서 교수님께 내밀었다는 박성우, 교수님은 한번도 시를 갖고 야단치지 않아서 울었다는 박성우는 시인이 되었다. 이 시집 끝에 실린 강연호교수의 해설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썼으니 시인이 되었고, 좋은 시를 쓰게 되었음이 이해되었다. 

예전에 사회교육원 시창작반을 기웃거릴 때, 매주 시를 써오라고 했지만 나하고 옆집 언니는 한 번도 써가지 않았다. 다른 분들이 써오는 시를 들으며 잘썼다, 못썼다 평가만 했다. 하지만 그때 사춘기 소녀의 낙서같은 시라도 열심히 써오던 분들은 지역 신문 공모에 당선돼 시인이란 이름표를 붙였고, 옆집 언니랑 나는 여전히 시 한 편도 쓰지 않으며 시집만 사들이는 독자로 머물렀다.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신경숙 작가와 같은 정읍 사람이다. 사람은 결핍으로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시인은 시적 감성을 훈련받기도 한다. 박성우 시에는 그의 가족사나 생활이 고스란이 드러나 그의 시세계를 가늠하게 된다. 처절하고 절박한 현실, 경제적 궁핍이 불러왔을 삶의 무게가 드러나 짠한 마음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러한 결핍이 그를 시인으로 키웠구나 생각되었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성되었다는 '거미'를 비롯한 시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림을 그리듯 섬세한 묘사와 시인의 진술에 저절로 공감된다. 쉽게 이해되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는 무거워서 마음이 편치 않아도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에 반하게 된다.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8~9쪽 '거미' 전문>

감꽃 

옹알종알 붙은 감꽃들 좀 봐라
니가 태어난 기념으로 이 감나무를 심었단다
그새, 가을이 기다려지지 않니?
저도 그래요, 아빠 

뭰, 약주를 하셨어요? 아버지
비켜라 이놈아,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담장 위로 톱질당한 감나무, 이파리엔 햇살이
파리떼처럼 덕지덕지 붙어 흔들렸다
몸을 베인 뒤에야 제 나이 드러낸 감나무
나이를 또박또박 세고 또 세어도
더 이상의 열매는 맺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안에서
나는 그렇게 베어졌다 

후략
                <56쪽 '감꽃' 부분>
  

찜통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통 내미신다 

중략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면 모가지라는
디 
                     <84~85쪽 '찜통' 부분> 

 

콩나물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올린다
           

참으로 비통할 가족사와 없는자들이 감당했던 현대사 산업발전의 역꾼이었던 미싱공이 등장한다.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인지 보조사원 박성우도 등장한다.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여전히 몸으로 책을 읽히시는 어머니께 바친다는 시인의 말이 그 어떤 시보다 애절하게 다가왔다. 

*인용된 시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와 출판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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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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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이란 제목에 걸맞게, 1부에는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이 날 시들이 포진했는데 한여름 땡볕에 읽었다. 그래서일까 감정이입이 안되고 시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익숙지 않은 낱말들이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했고... 어쨋든 내게는 쉽게 쏘옥 쏙 들어오는 시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몇 편은 확 들어와서 다행이었지만, 시집 말미에 정끝별 시인이 쓴 해설을 읽으니 조금 이해가 됐다. 그래서 다시 찬찬히 읽어봤더니 마음에 드는 시들이 더 늘어났다.  

잠깐 동안  

잠깐!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말이 위안을 준다.
잠깐이 몇 섬광(閃光)인가?
(57쪽 전문)

이 시집에서 제일 짧고 쉽게 이해되는 시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읽는 순간 화악~ 이해되는 시다. 읽는이가 느끼는 대로 이해하면 되지, 굳이 해설을 덧붙여야 알 수 있는 시라면 독자와 친해지긴 어렵다. 어릴 때는 시간이 안 지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고 보니 세월이 너무 빨라서 뭔가 이뤄 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시처럼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 받을 때가 있다. 이런 삶이 한 생전 계속된다면 살아내기가 버거울 거 같다. 즐거움도 고통도 잠깐이기에 견디거나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삶을 살아낸다는 건 

다 왔다.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자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16쪽 부분) 

사는 일이란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며 살가운 정을 나누는 것이다. 같이 투덜거려주는 이웃,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웃이 있어 사는 일이 즐거운 거다. 예전 농경사회에선 공동의 생활이 많았지만 현대화된 사회에선 개인주의가 팽배해 알면서도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사는 이웃이 많다. 시인의 발견처럼 걸음 멈추고 인사를 나누는 살가운 이웃들과 열심히 살아가자.   

 

헛헛한 웃음 

요새 뭘 하지?
뭘 하다니?

(중략)

뭘 하고 있지?
뭘 하든 않든 아침저녁으로
하늘과 땅이 서로 들고 난 곳을 새로 맞춰보는
소나무들이 솔가리를 촘촘히 빗질해 내려보내는
가을이 오고 있겠지.
그래 그 가을의 문턱에서 지금 뭘 해?
여름내 속으로 미워한 자 하나
내처 미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지.
그 할까 말까가 바로 피 말리는 일.
아예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 미워하든가
마음에서 슬쩍 지워버리는 거야.
아니면 어느샌가 바위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저녁.
바위의 피부를 간질이는가벼운 햇볕.
볕이 춤춰. 하면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가만히 춤추다가
생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한번 헛헛하게 웃든가?
 
(112~113쪽 부분) 

두번째 읽으니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시들이 많아서 시읽는 재미가 더했다. 황동규 시인은 소설가 황순원의 아드님 아니던가? 마종기 시인은 동화작가 마해송의 아드님이고. 부전자전이라고 다른 영역도 그렇겠지만 문학도 대물림이 많다. 황동규 시인과 마종기 시인처럼 대물림 된 문학적 유전자가 탐나고 시를 쓰는 삶이 부럽다! 표제작인 '겨울밤 0시 5분' 일부만 소개한다.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 

(20~22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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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8-0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샌 도통 시를 보질 않는데 황동규님 신간이군요. 저도 얼른 사야겠어요.^^

순오기 2009-08-06 21:58   좋아요 0 | URL
시집은 많이 보는데 리뷰는 안 쓰고 주로 시를 소개하는 정도의 페이퍼만 썼는데... '도착하지 않은 삶'리뷰 이후 그냥 내 소감 정도로 써야겠다 생각해요.^^

하늘바람 2009-08-0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가요? 이상하게 마리에요 시는 마음이 아주 처절하고 슬플때 아플 때만 도올라서요.
ㅣ를 쓰게되면 아주 슬플 것같아요

순오기 2009-08-06 21:58   좋아요 0 | URL
그럴때 떠오른 시를 남기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

같은하늘 2009-08-06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동시집 밖에 안봤는데...
저도 읽고 이해가 쉬운 시가 좋아요~~

순오기 2009-08-07 00:38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동시집이 더 좋아요.^^
처음 읽을 때 내 마음에 꽂히는 시~~ 그게 좋지요.
 
공선옥 마흔살 고백
공선옥 지음 / 생활성서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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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푹 빠져들었던 공선옥. 그녀가 마흔살 언저리에 썼던 생활성서에 연재한 글을 모아서 낸 책이다. 생활성서에 실은 글이라 종교적인 성찰을 깔고 있지만,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지 사람다웁게 살려는 것이기에 타종교라도 무리없이 읽힌다. 3부로 나뉘어진 '그것은 인생,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것들, 잊히지 않는 하루'라는 제목만 봐도 생활인의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글이다. 

이미 내가 지나온 마흔 살 주변의 공선옥 이야기에 공감하며 같이 눈물글썽이거나 미소 지으며 읽었다. 사실 에세이는 읽기에 부담없지만 읽을 때 가볍게 끄덕이는 공감으로 족하지, 오래도록 기억하는 내용은 실상 많지 않다. 그래도 에세이집을 읽고 나면, 나도 삶의 흔적을 남겨야지 생각은 하는데 알라딘에 리뷰 쓰고 페이퍼 쓰는 것 말고는 손글씨를 쓰지 않는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일의 지엄함을 감당하는 작가라는 걸 행복으로 여기면서도 원고 마감이면 스트레스 받는 글쟁이들의 생활도 쉬운 건 아닌 듯하다. 농부가 씨뿌리고 거둬들이듯 글쟁이도 날마다 무언가 쓰는 일이 농부의 일상과 같다는 말에 끄덕여진다. 소소한 일상에서 글감을 건져올려 따뜻한 시선으로 감동을 담아낸 글쓰기가 부럽다. 하지만 작가도 써야 할 이야기에서 삼천포로 빠지는 걸 보면서 살짝 즐거워했다.^^

그녀의 신산한 삶이 이제는 좀 편안해진 것 같아 다행이다. 절름발이 자기 할머니를 동무들과 같이 악을 쓰며 놀려대는 삼식이의 눈물에 나도 같이 눈물이 났다. 자기 할머니를 동무들과 같이 놀리는 것으로 저항하고 절규했던 삼식이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맏이 아람이를 '내 인생의 선장'이라고 말하는 그녀, '못난 어미 만난 죄로 어미와 고난의 세월을 함께 해 준 나의 동지'라는 말은 어찌나 눈물겹던지 내가 우리 큰딸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 아이를 키우며 홀로 사는 그녀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글 곳곳에 보인다. 사는 일의 녹록치 않음에 마음이 짠해진다. 셋째 아빠인 전 남편에 대한 이야기, 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둘째를 전주 대안학교에 보낸 이야기, 결핍으로 배운 감사한 생활 등 짠하게 공감됐다. 여수에서 살다가 눈을 실컷 보고 싶어 춘천으로 이사했다는 그녀, 그곳도 사람과의 인연으로 정을 붙이며 살아간다. 사람 사는 곳 어디든지 정들면 고향이 된다. 나도 광주살이 21년째, 이제는 본래의 고향보다 더 정이 들어 광주사람보다 더 광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을 보는 일도 엄마의 마음으로 보듬는다면 성내거나 투덜댈 일도 없으련만, 살다보면 벌컥 성을 내는 일이 종종 생긴다. 공선옥 그녀가 사람이 많은 터미널에서 애꿎은 둘째에게 성내고 하지 않아야 될 말을 쏟아내고 부끄러워 하는 이야기는 정말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더란 말이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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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8-06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도 공선옥은 나이가 굉장히 많을 것 같단 생각을 줄곧 했어요. 64년생이니까 40대 중반인데 사진보고 너무 젊어서 깜짝 놀랐죠. 작가님의 글에선 삶의 치열함과 처연함이 같이 보였어요. 짠해요...

순오기 2009-08-06 00:51   좋아요 0 | URL
어~ 63년생 아닌가요? 나보다 세 살 아래라고만 기억하거든요.^^
삶의 치열함과 처연함이라~~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는게 편치 않을지도...

세실 2009-08-0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씨도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군요....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깊이 있는 작가들은 에세이도 좋아요.

순오기 2009-08-06 22:02   좋아요 0 | URL
공선옥씨 삶도 공지영씨 못지 않게 드라마틱하지요~ ㅜㅜ
나도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로 공선옥씨를 만난 후, 그녀의 작품을 여럿 봤지요~~

hnine 2009-08-0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도 제가 묻지도 않고 일단 읽고 보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거든요. 이 책도 구입해서 지금 바로 제 눈 앞에서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미리 순오기님 리뷰 읽고 가요.

순오기 2009-08-06 22:02   좋아요 0 | URL
오호~ 묻지 않고 일단 보는 작가로군요. 한때는 나도 그랬는데...내가 사는 게 힘들 때는 일부러 보지 않았어요.ㅜㅜ

같은하늘 2009-08-0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흔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다가올 나이...
책이 한번 보고싶어지네요...

순오기 2009-08-07 00:37   좋아요 0 | URL
소소한 일상에서 글감을 잡아내는 센스도 배우고~~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좋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8-07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남출신의 40대 여성문인 중 유명작가가 몇 명 있는데 신경숙이나 은희경 같은 인기작가는 아니지만 은근히 공선옥 팬이 많은 것 같죠? 같은 공씨인 공지영과 비교되는 것 같기도 하고...공선옥 고향이 곡성일 거예요.

순오기 2009-08-08 07:54   좋아요 0 | URL
나는 은희경이나 신경숙보다 공선옥이 더 유명하다고 생각했는데...^^
공선옥씨 곡성출신 맞아요~ 공지영씨와 여러 면에서 닮았으면서 또 다르죠.
 
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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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며 포효하는 사자처럼 등장한 최영미, 그녀도 이젠 쉰에 근접한 나이가 됐다. 지천명이란 하늘의 도를 아는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것으로 나는 이해되던데, 그녀의 지천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조심스레 시집을 넘겼다. 








일요일 오전 11시
 

유럽인들이 버린 神을
아시아의 어느 뭉툭한 손이 주워
확성기에 쑤셔넣는다  

중년의 기쁨 

화장실을 나오며 나는 웃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시작됐어!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
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
가까이 코를 갖다댄다 

그렇게 학대했는데도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벌써 가버렸던가? 하하~~ 완전히 가버리기 전에 잠간 다시 찾아온다더라.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거시기는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한 일정일 텐데...... 시로 쓸만큼 즐거워하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난, 그녀보다 한 살 위지만 아직 건재하단 말이지.^^ 
 

나쁜 평판 

예술가에게도 도청 공무원의 품성을 요구하고
시인도 지방 면서기의 충성심을 보여야
살아남는 한국 사회에서 

(중략) 

어차피 사람들의 평판이란
날씨에 따라 오르내리는 눈금 같은 것.
날씨가 화창하면 아무도 온도계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이 시를 읽다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실렸던 Personal Computer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아아 - - 할 수만 있다면!' 
글자까지 굵게 새겨 넣었던 그녀의 이 시를 보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선운사' 하나 빼곤 건질게 없다던 지인의 말도 생각났다. 어딜가든 따라 붙었을 평판에 그녀도 이제는 온도계를 보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된 게야, 동감하며 동지의식을 느꼈다.^^ 

나는 시를 쓴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 
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 

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
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려 

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
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렵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 

젊은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
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 

안전하게 미치기 위해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명적인 시간들을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
부끄러움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  

 

-----시를 저지른다는 표현에, 그녀는 타고난 시인이구나 싶었다. 여기저기로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을 기다리며, 빠져나간 젊음을 후회할 시간도 모자른다는 그녀의 삶은 시와 함께였음을 다시 새긴다. 4부로 나뉜 59편의 시를 읽으며, 그녀도 나이 먹었고 그의 시도 같이 나이 먹은 듯 많이 부드러워졌다. 얼굴 붉히며 읽지 않아도 되는 시가 좋아진 내 나이만큼이나 그녀의 시도 둥글어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솔직한 그녀의 시어들이 반갑다. 도착하지 않은 삶을 기다리는 시인처럼, 나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내 삶을 기다려 보련다.

시집을 읽다 보면 시보다 뒤에 쓰인 해설이 더 어려운 시집을 만나기도 하는데, 여기에 실린 일본인 사가와 아키씨의 해설은 어렵지 않아서 좋았다.^^ 그녀의 예전 시집을 뒤적이며 더불어 보는 맛도 좋았다.

  

*리뷰에 인용된 구절과 사진이미지의 저작권은 출판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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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7-2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이매지님께 선물받고 문학기행때 상품으로 쓰느라 한 권 샀더니 '구매자'마크가 떳습니다. 나는 은근 '구매자'마크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처음 사는 책은 꼭 알라딘에서 구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매지 2009-07-28 18:00   좋아요 0 | URL
구매자 마크에 집착하는 순오기님 ㅋㅋㅋㅋ
은근 귀여우시다능 ㅎㅎ

순오기 2009-07-29 03:46   좋아요 0 | URL
'구매자'마크를 무슨 훈장처럼 생각하나 봅니다.ㅋㅋㅋ
이매지님 고마워용~ ^^

마노아 2009-07-2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리뷰도 잘 쓰시는 순오기님. 시집은 잘 읽지도 못하지만, 리뷰 쓰긴 더 어려워요.^^

순오기 2009-07-29 03:45   좋아요 0 | URL
어~ 시집 리뷰 잘 못 써요. 갖고 있는 시집이 그럭저럭 50여권에 이르는데 정말 리뷰를 쓴 시집은 아마 이게 처음인 듯~ ㅋㅋㅋ 동시집 리뷰는 그래도 좀 올렸지만.
예전에 '한 줄도 너무 길다' 리뷰 올린다면서 아직도 안 올린 걸 보면 아실듯...^^

같은하늘 2009-07-28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선물 보따리중에 제일 부러웠던 바로 그 책~~~
구경만 하고 갑니다...^^

순오기 2009-07-29 03:45   좋아요 0 | URL
아하~ 제일 부러워한 시집이었군요.^^

꿈꾸는섬 2009-07-2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영미님 시 오랜만이에요. 차분히 앉아 시를 읽고 싶은데 아직은 어렵네요.

순오기 2009-07-29 13:31   좋아요 0 | URL
애들 어릴 땐 아이에게 동시 읽어주기도 좋아요.
최영미 시는 만날 날이 또 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