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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ㅣ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평점 :
약 450년 전에 집필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끊임없이 원작 그대로, 때론 변형되어 무대에서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만큼 위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잔뜩 기대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바로 감동을 느끼기가 힘들고, 왜 그토록 위대한가에 대한 납득이 쉽게 되지는 않는다.
그의 글은 약강 오보격에 맞춰 써진 영어로 된 희곡이라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되기 힘들다. 어떤 번역자는 영어 문장의 운율에 한글을 그대로 들이밀어(물론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문장이 억지스러울 때가 많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운문을 거의 산문처럼 의역한 경우도 있다. 그런 이유로 논리적이지 않은 앞 뒤 맥락이나 급작스런 장면 전환을 연결시키는 것에 애를 먹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뿐만 아니라 어떤 문학 작품을 읽어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소설은 작품 안에 배경이 잘 설명되어진 것이 많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을 목적으로 쓴 희곡이라 독자가 직접 찾아야 한다. 르네상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글을 썼지만, 작품마다 검열을 받아야 했고 지체 높은 사람들의 눈치도 봐야했던 셰익스피어의 글에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만큼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땐 행간을 읽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금 읽어도 현실적으로 공감될 수 있는 동시대성이 그의 작품을 가치 있게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산 시대의 전근대성을 작가 역시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셰익스피어 x 황광수』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스트랫퍼드와 런던, 파리에서 빈에 이르는 중서부 유럽,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중해 지역을 저자가 차례로 직접 여행하며 적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완벽한 설명서이다. 철학과 여행자의 감상이 공존한 훌륭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이 각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저자의 여행지)에 맞게 잘 설명되어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 인용된 희곡 문장들이 모두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발행한 ‘The Oxford Shakespeare’ 시리즈를 통해 저자가 직접 번역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번역한 인용문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싶게 하는 마력이 들어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어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저자의 조예가 엄청나다. 오랫동안 음미하고 반복해서 쌓아 온 흔적이 이 책에 가득하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셰익스피어 문학의 일반적 특징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쓴 마지막의 ‘셰익스피어 문학의 특징과 현재적 의미’까지 어디하나 버릴 것이 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이미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재독하고,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을 읽고 싶게 한다. 작가 셰익스피어의 매력을 계속 피력해 나를 완전 셰익스피어의 광팬으로 만들어버렸다.
책 속에 책이 들어있는 책을 읽기 힘든 것은 그 속에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설명이나 감상이 있어서이다. 읽지 않아 그 해석이 지루할 수도 있고, 혹시 다음에 그 책을 읽을 때, 온전한 나의 느낌이 아닌 설명되어진 것의 프레임에 갇힐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황광수의 <셰익스피어>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나는 그의 해석을 듣지 않으면 아직 읽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할 능력이 없다.
황광수의 해석은 깊이 있고 철학적이며 신랄하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찬양과 비판이 동시에 있어 셰익스피어를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대 비극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좋았다. 어릴 때 동화로 읽었던 ‘베니스의 상인’에서 권선징악적인 면만 봤지만, 나이 들어 다시 읽고 재해석된 ‘베니스의 상인’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 느낌을 이 책의 다른 작품에서도 받았다. 셰익스피어를 떠나 단지 여행자가 되어 느끼는 저자의 감상도 공감되었다.
-『헨리 4세』의 배불뚝이 술고래 ‘폴스타프’의 동상-P75
저자의 폴스타프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다. 셰익스피어는 실제 인물인 ‘로버트 그린’을 모델 삼아 ‘영국 문학사에서 가장 빼어난 희극적 인물인 폴스타프(P.73)’를 만들었다. 알라딘 서재의 ‘폴스타프 님’ 덕분에 이 부분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는 추잡한 사기꾼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비판자이다.
폴스타프의 진면목은 비대한 몸과 재기 발랄한 언어에 있다.
폴스타프의 신체적 과잉과 언어적 방종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최근에 다시 읽은 『햄릿』, 『맥베스』, 『리어왕』에 대한 설명도 좋았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런던 브릿지’에는 효수된 머리가 쇠장대 끝에 걸려 있었다. 그 시대엔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많고, 흑사병이나 역병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민중은 여전히 살기 힘들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그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사극의 특징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셰익스피어는 먼저 ‘역사’가 덧씌운 영웅의 허울을 벗겨버렸다.
셰익스피어는 권선징악의 틀을 해체했다.
셰익스피어는 역사적 인물들의 언어를 현실의 토대 위에서 심문했다.
셰익스피어는 왕족들의 역사를 평민들의 삶과 의식에 투사했다.]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원칙으로 희극을 집필했다. 개인적으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많은 갈등과 우여곡절이 극 중간에 있음에도, 또는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이 더 많을 때에도 얼렁뚱땅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끝맺음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에는 법으로』의 법에 대한 고찰, 시와 소네트에 대한 설명, 사랑과 셰익스피어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옹호에 대한 비판으로 그의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서술은 우리가 가진 견고한 편견과 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셰익스피어는 기독교 사회의 편견 속에서 끝없는 모욕과 무시에 시달린 샤일록의 내면에서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말에서)두 종류의 언어 층위에 미묘한 차이를 심어놓았다. 하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자의 절규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고통을 오락거리로 삼는 자들의 잔인성이다.]
저자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서 괴테가 해석한 ‘햄릿‘을 서술한다. 이 부분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소설의 주인공인 빌헬름은 ’햄릿‘을 읽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에 제정신을 잃었을 정도로 감동받았지만, ’햄릿‘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의 구성상의 느슨함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개작에 가까울 만큼 본격적으로 수정한다.(P.163~170)
-햄릿을 연기하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배우 사라 베르나르(P.157)
프랑스의 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여성 배우임에도 남성 햄릿을 연기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초연된 해로부터 약 430년 후인 2024년 7월에, 한국의 여배우 ‘이봉련’은 ‘햄릿’ 왕자가 아닌 ‘햄릿’ 공주를 연기한다. 당연히 오필리어는 남자가 된다. 해군 장교 출신인 공주 햄릿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지만 그녀에게 복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햄릿 공주 또한 왕이 되고 싶은 권력욕도 있다. 무대 가운데에 물이 있는 커다란 공간을 두고 수시로 천장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서 연극 ‘햄릿’의 배우들은 자주 물에 들어가고, 비를 맞아가며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따라 간다.
‘사라 베르나르’도 ‘이봉련’도 연극의 마지막에 레어티즈와 결투를 하며 죽는다. 그녀들이 연기한 ‘햄릿’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는 분명 다른 해석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그들의 ‘햄릿’은 셰익스피어와 연결된다. 다양한 해석은 있지만 완벽한 변용은 있을 수 없을 만큼,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대단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언어는 끊임없이 재인용되고 있다.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멋진 신세계’, ‘소리와 분노’, ‘Petious spectacle!’의 ‘스펙터클’ 등 수없이 많다. ‘광대무변한 텍스트의 세계(p.318)’를 바탕으로 한 연극 또한 계속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황광수 저자는 이것의 원인을 셰익스피어가 빚어내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 ‘동시대성’, ‘현대성’에 두고 있다. 충분히 납득이 간다.
오랜만에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책 속의 책’을 읽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론이 자신이 서술한 작가를 부각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듯, 황광수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 자신과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충분히 공부했고, 저자의 지성에 감탄했다. 몇 년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을 때 이 책을 사두었지만 이제야 읽은 것이 후회된다. 그때 읽었더라면 셰익스피어 읽기가 훨씬 더 재미있었을 것이고, 연속해서 그의 작품을 읽었을 것 같다. 뒤늦게 찾아 본 황광수 저자의 이력에 그가 2021년 암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렇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진귀하고 신기한 것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래서 2014년에 스트랫퍼드 주민들은 그를 ‘450년 젊은 셰익스피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그의 문학의 영원성을 꿰뚫어 본 이는 그 자신도, 스트랫퍼드 주민도 아니었다.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던 벤 존슨이었다. “셰익스피어는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불멸성에 관해 이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알지 못한다. -p.321]
-작자 미상, <셰익스피어> (1610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