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립과학재단이 지난 20년간 수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분의 2 이상은 DNA가 유전을 밝히는 열쇠임을 알지 못한다. 열에 아홉은 방사선과 그것이 인체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성인 다섯에 하나는 태양이 지구 주의를 돈다고 확신한다. 이런 응답들은 초• 중등학교의 공교육이 놀랄만큼 실패했음을 가리키고, 따라서 대중이 왜 진화론이나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자의 경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 혹은 DNA에 우리 개개인을 인간 종의 고유한 성원으로 만드는 생물학적 지시 사항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꼭 지식인이 되어야 하거나 학사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수준의 과학 문맹이 더없는 무지에 기초한 정치적 호소가 자라기에 비옥한 토양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온난화를 거짓말이라고 일축해버린 트럼프를 유권자들이 심판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준다. 전문가를 조롱할수록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사랑을 더 받을 뿐이었다. 2017년 8월 21일, 대통령으로서 일식을 관측할 때 트럼프는 눈 보호를 위해 NASA가 권장한 특수 안경을 착용해야 한다는 강권을 무시했다. 진짜 사나이는 태양으로부터 망막을 숨기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트럼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무시하는 것은 그런 문화를 반영한다. 현재 읽기와 쓰기에서 미국인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는 표현은 문맹이 아니라 활자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2002년 국립예술기금이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01년 미국 성인 가운데 소설이나 시집을 한 권이라도 읽은 이는 절반이 안 되었다. 탐정소설, 로맨스소설, 요한계시록에 기초한 ‘휴거‘ 소설도 포함해서 말이다. 논픽션을 한 권이라도 읽은 미국인은 57퍼센트뿐이었는데, DNA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은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이 점점 더 활자를 싫어하면서 독서의 즐거움뿐 아니라 비판적 사고도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인이 40년 전에 비해 사색과 판단력이 부족해진 사회에 살고 있다.



1998년 텍사스대학 연구 조사원들이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립학교 생물학 교사 넷 중 하나가 인간과 공룡이 동시대에 살았다고 믿었다. 이런 오인들을 통해 교사들의 종교적 믿음이 어떠한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을지라도 미국 교사들 상당수가 얼마나 형편없는 교육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더 혼란스럽게도 미국인은 과학뿐 아니라 종교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그만큼 무지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선진국 가운데 가장 종교적이라고 하는 국가의 성인 대다수가 4대 복음서를 대지 못하거나 창세기가 성경의 첫 번째 저작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도 한때 ‘진화’라는 말을 금기시하고 교사가 공룡과 인간이 함께 땅 위를 돌아다녔다고 시사하는 수업을 들은 수백만의 아이들 중 하나였다면, 그들이 진화의 정의를 이해하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인터넷에는 세계 각지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연합시키는 명백한 잠재력이 있으며 그에 따라 소셜미디어와 결부된 문화적 편협성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 특히 늘였다. 문제는 ‘생각이 비슷한’이란 수식어에 있다. 자신과 견해가 같은 이들에게만 귀를 귀울이고 편견에 더 사로잡힌다면 사람들은 거의 무엇이든 믿게 될 것이다. 편협함과 반지성주의는 늘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지만 소셜미디어가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연결해 즉석에서 편협한 커뮤이티를 만들어내는 역량은 새로운 것이다.

이념 혹은 문화에서 생각이 다른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악마에게 뿔이 있다면 직접 만져봐야 알겠다는 그런 종류의 호기심은 모든 사회의 지적, 정치적 건강에 필수적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지식인과 비지식인 모두가 똑같이, 좌파건 우파건, 자신의 주장에 공명하지 않는 목소리는 모조리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외고집은 게으른 정신과 반지성주의 본질을 드러내는 징후다.
- P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시민 자유는 우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 개념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고대 자유는 곧 도시 통치에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고대 자유는 의회에 출석하고, 토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어느 한 쪽 편을 들면서 투표할 특권과 의무로 이뤄져 있었다. 아울러 행정관으로 봉사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배심원으로 일할 가능성도 고대 자유에 속했다. 고대 자유는 정치 과정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적 일이 가장 중요했다."<개인의 탄생>



















토크빌은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 다른 하나는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 또는 공민적 자유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생한 모순과 충돌이 대단히 컸던 탓에 프랑스인은 그들 구호(자유, 평등, 박애) 중 자유를 자연적 자유, 곧 구속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자유로 이해했다. 그들은 혁명 전 사회에서 수많은 불합리한 제한과 압박을 받았고, 혁명으로 이 제한과 압박을 깨부쉈으므로 그 결과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크빌은 미국이 자유로운 국가지만 미국인이 자기 국가에서 누리는 자유는 결코 자연적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미국인의 자유는 처음부터 영국인에게서 쟁취한 것, 곧 시민적 자유, 공민적 자유라고 본 것이다. 미국 독립 혁명의 기원은 식민지 백성이 모국 영국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겠다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임의로 조종당하거나 자기 재산을 침범당하지 않는 기본적 자유를 원했다. 이러한 자유는 시민적 자유이며, 특정한 권리 영역에서의 자유이지 프랑스인이 생각한 전면적이고 보편적이며 무한정의 자유가 아니다.



토크빌은 프랑스인이 이러한 공공 정신을 훈련받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공공 정신은 시민의 기본 조건이다. 미국은 시민이 국가를 이루지만 프랑스에는 시민이 없고 속민(subjects)만이 있을 뿐이다. 시민은 공공사무를 자신의 일로 여기지만 속민을 공공사무를 윗사람 일로,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의 일로 생각한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중대한 차이다. 토크빌은 프랑스 독자들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자극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대혁명 이래로 프랑스인은 줄곧 시민을 소리 높여 외쳤다. 심지어 입으로는 모든 사람을 시민이라고 불렀다. 시민 말고는 다른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온 거리를 가득 채운 시민’의 사회는 사실 말로만 시민이었을 뿐이다. 프랑스인은 그토록 시민을 떠들썩하게 외쳐 댔지만 모두 뼛속은 여전히 속민이었다.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없어서 시민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 정치의 근본이 고도의 독립성을 갖춘 타운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도의 독립성을 가진 주라고 해석합니다. 연방 대통령은 주지사에게 지시를 할 수 없다. 처음부터 타운의 행정은 시민이 선출한 공공사무위원이 책임지고 처리한다. 타운에는 심지어 대표도 없다. 모든 타운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단위로서, 주에는 주 의회가 있어서 각 타운의 법률과 규범을 제정한다. 하지만 주의 법규 범위 밖에서는 타운이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타운 집회를 통해 자신의 처리 방법을 결정한다. 주는 여타 타운을 대표하고, 연방 내의 다른 각 주와 관련을 맺기도 하지만, 주 정부는 여전히 임의로 타운의 독립권을 간섭하거나 침범할 수 없다.



이것이 토크빌이 19세기에 본 미국의 상황이다. 그 이후로 미국 정치에는 여러 가지 변동이 생겼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 특히 구조에 깔린 설계의 정신은 줄곧 보존되었다. 미국 정치의 실체는 자립적인 단위로서의 수천 개, 수만 개의 타운이며 대부분의 권력은 이러한 위계로 배치되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pp. 170-174.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칸트의 도덕법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자유롭지 않은 존재에게 도덕법칙을 명하는 것은 난센스다. 칸트는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너는 자유롭다.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너는 도덕적 존재이기에 분명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자유로운 의지가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는 최고선이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최고선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두 조건은 바로 영혼불멸과 신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요청함으로써 최고선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천이성의 요청’, 나아가 ‘실천이성의 우위’다.



홉스 철학의 의미도 절대왕정의 옹호라는 그 표면상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철저한 ‘개인주의’, 합리적으로 계산해서 자신 이익(자유의지)을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점에 있다.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자신들 주권을 ‘양도’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없다. 오로지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철저한 계산의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결과적으로 구성해낸 국가 모습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모순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개개인의 권리의 ‘양도’를 통해 성립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모든 안전과 번영은 적으로 국가 몫이며, 개개인들에게 외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이 된다. 개개인의 집합은 다중일 뿐이며, 국가라는 끈이 없다면 이 다중은 그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구슬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여기에는 오직 국가가 외적으로 부여하는 정치만이 있을 뿐, 개개인들의 내적인 힘[자유의지]을 통해서 그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홉스의 세계에서는 국가와 다중이 있을 뿐, 개개인들이 서로간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하는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의 법과 시민사회 고유의 도덕, 관습, 문화 차원들 사이의 구분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국가라는 주물과 그것이 형태를 찍어낼 때 사용되는 재료로서의 다중이라는 구도를 극복하고서 시민사회의 자율성, 시민사회라는 고유한 차원을 창조해낸 것이 근대적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성취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홉스의 정치철학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아니 전근대보다 더 후퇴한 그 무엇이라고까지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 이론적 구성 과정에서 전제되는 강렬한 개인주의와 그 구성 결과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반-개인주의가 드러내는 모순이야말로 홉스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로크에게 자연권의 기초는 사유재산이다. 로크는 자신이 확립한 경험적 주체 개념에 입각해 정치적 주체를 사유했다. 인식론적 맥락에서 주체적 경험은 곧 ‘인식’이다. 이에 비해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주체적 경험은 바로 ‘노동’이다. 인식의 주인공이 마음[자유의지]라면 노동의 주인공은 몸이다. 노동이란 한 주체가 자연을 가공해 변형하고, 그 변형을 통해 그 자신도 변형되는 과정이다. 이때 가공된 대상은 곧 노동주체의 ‘소유’가 되며(노동가치설), 그 소유를 통해서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서 ‘property’를 가지게 된다. 노동은 이렇게 한 주체 고유의 ‘property’를 생성시키는데, 노동 이전에 한 개인이 천부인권으로서 소유하는 것은 생명과 자유이므로 결국 한 개인의 ‘property’는 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뜻한다.



다만 내전 시대를 살았던 홉스에게 생명이 가장 소중했다면, 명예혁명 시대를 살았던 로크에게는 재산이 가장 중요했다. 로크 사유에서는 사유재산을 가지고서 사회계약을 하는 것이지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유재산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자유만이 아니라 사유재산 또한 자연권인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의 자연권은 한 주체의 ‘존재’ 즉 내적인 역량이지만, 로크에게서는 그의 ‘가진 것’ 즉 외적인 소유다. 이것은 형이상학자인 스피노자와 경험주의자인 로크 차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험주의자인 로크가 당대 현실을 상세하게 관찰하기보다는 원시적인 상황을 상정해 논의를 전개한 것은 묘하게 느껴진다. <통치론>의 저자 로크는 자신이 <인간지성론>의 저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로크 정치철학의 이런 경향은 영국 중산층에게 유리했는데, 사유재산을 절대시하는 것은 곧 위로는 권력자들의 강제적 탈취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하층민들의 무력 도발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크의 저작이 18세기 이래 본격화되는 ‘자유주의’ 철학의 성경이 된 것은 바로 사유재산에 대한 이런 절대 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철학사 3>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기회를 제한하는 어떤 구조도 없다. 모든 사람은 재산을 늘리고 쌓을 권리와 기회가 있다. 다시 말해 평등한 사회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은 사라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분 차이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귀족이나 평민, 승려, 장인, 농부 등이 모두 같아진다. 그래서 사회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르게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돈이 있으면 부러움을 받고 존경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평등한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불평등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르메스주의는 헬레니즘시대(BC 305-30)에 이집트의 현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에 근거한 사상이다. 1471년에 피치노가 <해르메스 문서>를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활성화되었다(하지만 훗날 이 문헌은 사실상 2세기의 신플라톤주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헌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헤르메스주의는 자연을 영험한 힘으로 가득찬 곳, 힘 – 공감과 반감(인력과 척력) -의 그물망으로 이해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그 심층적 힘을 읽어내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고자 했다. 아울러 파라켈수스(1493~1541)가 역설했듯이,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이 소우주로서의 인간에게서 대우주로서의 자연의 생명력을 발견하고자 했다.



헤르메스주의는 근대 물리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중력’ 개념으로서 물리학의 중심에 있는 만유인력 개념이 이 헤르메스주의에서 연원했다. 근대 물리학 맥락에서 ‘운동’이란 사물의 본성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상태’일 뿐이다. 사물 자체는 그저 x로 놓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발견이라기보다도 특정 영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초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의 차원과 물리의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분절을 예민하게 고려하기보다는 연속적인 방식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근대 역학은 이 체계에서 물리적 측면을 따로 떼어내어 그 부분을 탐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틀린 것이고 새로운 존재론이 맞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이 경우 역학의 맥락에서) 그런 존재론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 존재론이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역학이라는 특정한 맥락을 위해 이런 식의 존재론 혁신이 필요했다고 해서, 그 존재론이 존재론 자체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보다 더 ‘진리’인가 하는 것은 따져볼 문제다. 아니, 애초에 양자의 비교는 짝이 잘 맞지 않는 비교라 하겠다. 짝이 맞는 비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 근대 역학을 철학화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세계일 것이다.



‘과학적 사유’의 기본틀은 무엇인가? 첫째,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을 세계에서 분절해낸다. 현대식으로 말해 어떤 ‘계’(system)를 분절해낸다. 이 점에서 과학적 사유는 철학적 사유와 다르다. 철학적 사유가 세계를, 삶을 그 전체로서 보려는 데 핵심이 있다면, 과학적 사유는 반대로 세계의 어떤 부분을 오려내서 ‘대상화’함으로써 시작한다. 둘째, 이 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을 변항(variable)으로서 잡아낸다. 즉, 시간에 따라 양적으로 변화하는(때로는 계속 유지되는) 핵심적인 존재단위들(entities)을 설정한다. 이것이 과학기술이라는 행위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설정이다. 예컨대 낙하 운동의 경우 시간(t), 거리(s) 등이 될 것이고, 천문학적 계의 경우 질량(m), 거리(R), 힘(F) 등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변항들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 변항들 중 가장 근본적인 변항, 정확히 말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변항은 시간(t)이다. 왜일까? 과학의 기본 목적은 운동의 법칙성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란 항상 시간에서의 운동이다. 따라서 모든 변항 중 가장 일차적인 변항은 바로 시간이라는 변항인 것이다. 셋째, 이 변항들에 관한 데이터를 모아 그것들 사이의 함수관계, 특히 미분방정식을 사용한 함수관계를 잡아낸다. 이 함수관계가 확증되면 그것은 ‘법칙’으로 승격된다.



넷째, 이렇게 얻어낸 수학적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그 이론에 있어 중요한 부분 – 그곳을 실증할 경우 그 이론의 설득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부분 -에 관련해 실험을 즉 ‘결정적 실험’을 행한다. 이렇게 실험을 통해 이론의 타당성을 확증한다. 다섯째, 모든 운동 법칙은 결국 시간의 함수이므로, 시간-변항의 각 함수값은 곧 해당 시간에서의 그 운동 법칙 전체의 함수값을 산출한다. 따라서 운동 법칙에 미래의 어떤 시간을 대입하면 미래의 해당 계의 상태를 예측할 수 있다. 예컨대 천문학에서, 훗날 라플라스가 장담하게 되듯이, 물리법칙과 해당 초기조건만 주어지면 어떤 시간에서의 우주 상태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왜 먼저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은 곧 과학기술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긍정적인, 때로는 거의 당위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판단을 은연중에 깔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특히 기술문명이 가져온 세계가 과연 긍정적이고 심지어 당위적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람들은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비극들에는 무관심하고,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흥미/재미와 ‘부가가치’에만 관심을 쏟는다. 드론이 가져올 편리와 부가가치에는 관심을 가져도 (최근 중동이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무차별로 이루어지는) 무인폭격의 섬뜩함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열광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불행에 대해서는 거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런 흐름은 대중매체/대중문화에 의해서 점차 공고한 것이 되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음 물음은 결국 자본주의-과학기술-대중매체에 의해 형성된 가치를 밑에 깔고서 제시되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가치와는 반대의 가치를 가진 경우, 오히려 물음을 반대로 던져야 할 것이다. “왜 서양에서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전이 몰락하고, 외물에 집착함으로써 마음을 잃어버리는[玩物喪心] 과학기술이 기형적으로 발달했는가?’라고. 하지만 오늘날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가치에 이미 강하게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수은 운명공동체다. 자본주의는 신기술을 발명해야 이익을 볼 수 있고, 신기술은 자본을 통해서 일반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막강한 힘은 경제만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돈의 힘이 정치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문화도 지배하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감각을 가지고 볼 때, 동북아 지식인들이 왜 외물을 조작하려는 경향[機心, 기심]을 경계하면서 내면 가꾸기에 힘썼는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물질문명의 폭주가 가져올 파괴와 혼란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명에서 물질문명은 지식인들보다는 장인들에게 맡겨져 있었고, 이 두 집단 사이 거리는 멀었다. 그리고 동북아 지식인들은 그 거리를 메울 수도 있었을 자본주의 경향에 대해서도, 특히 윤리 없는 상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감각적 쾌락을 주는 사람들은 상찬의 대상이 되지만, 이런 가치들의 폭주를 경계했던 선철들의 지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매도되기 일쑤다. 바로 그런 가치/시선이 이미 현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세계사적/인류사적 함축에 대해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나 자연과의 합치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만든 장난감에만 열광하는지. 왜 우리 선철들이 그토록 애써 가꾸었던 ‘사랑의 마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사물의 조작과 계산에만 몰두하고 인간 스스로를 그런 틀 속에 밀어 넣어 물화(物化)하고 있는지. 왜 사람과 사람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외물이 가져다주는 흥미와 이익에는 그토록 집착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근대성과 과학기술문명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23-06-07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도구,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의 한계는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존재와 비존재, 목적과 수단 등에 대한 지나친 분화를 통해 과학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이러한 세분화된 관점이 종합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를 페이퍼를 통해 생각해봤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6-08 15:15   좋아요 1 | URL
넵, 그런 것 같습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닌데, 분석으로 부분만 보고 종합적인 판단을 못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대로의 인간일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의 

인간이기도 하다.” 

- 군나르 시르베크








우리는 나중에 발생한 일이 이전 일보다 더 완벽한 상태라고 믿으며 ‘발전’ 개념을 확신한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은 그냥 새로운 태도일 뿐이며, 특히 19세기 말 무렵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은 태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되면서 진보란 개념이 확산되었고, 그와 함께 역사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생겨났다. 『종의 기원』 마지막 페이지에 ‘진보’라는 단어가 있다. “자연선택은 오로지 각 개체에 의해, 개체를 위해 작동하므로 모든 정신과 물질적 자질은 완성을 향해 ‘진보’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는 “진화는 특정한 방향성이 있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진화는 ‘무엇인가’가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이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일로 봐야 한다”라며, 다음과 같은 표현은 모두 잘못된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 35억 년 전 지구에 살던 생물은 박테리아와 그 사촌들 같은 아주 간단한 종류의 단세포 생물들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는 쇠똥구리와 해마, 피튜니아[관상용 식물], 인류 등으로 붐비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진보가 생명의 역사를 진전시켜 온 기본 추진력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는가?

· 지난 몇 십 억년 동안 동물은 전체적으로 몸의 크기, 먹이 섭취 및 방어 기술, 뇌와 복잡한 행동, 사회적 조직화, 환경 조절의 정확성 등에서 상승 진화했다.

·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생물의 구조나 생리 기능에서 전문화 정도가 커진다.

· 인간의 해부학적 복잡성, 신경의 정교함, 습성의 다양성과 유연성 등 호모 사피엔스의 생명 특성을 보면, 인간은 틀림없이 어떤 진보의 경향을 보인다.

· 생명체 발달 과정은 복잡화, 조직화, 전문화를 통해 진화 단계를 하나씩 밟아 사다리 위로 올라간다. 어마어마한 대뇌 피질과 기막히게 복잡한 행동 패턴을 소유한 인류는 우리가 아는 한 그 정상에 위치에 있다.

· 인류가 지구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존재라는 지질학 발견을 봐선, 진화 방향은 인간을 향한 예정된 진보다. 

· 다른 생물은 인류보다 못하다.



우리가 이렇게 착각하는 이유는 “경향성을 알고 싶어 하는 강렬한 인간 욕망이 종종 실재하지도 않는 방향성을 찾아내거나 입증되지 않는 원인을 추론해” 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건에서 반드시 패턴을 찾아내려는 습성이 있어서, 단순히 무작위로 발생한 사건도 뚜렷한 경향성을 잡아내어 그 원인으로 삼는다. 대부분 사람은 순전히 무작위적인 결과에서도 규칙성이 자주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착각인 “외견상 방향성이나 경향성은 사실 자연계에서 변이 정도가 축소되거나 확장된 ‘부차적’ 결과이지, 어떤 것이 특정 방향으로 움직인 결과가 아니다.”
















‘다른 생물은 인류보다 못하다‘는 믿음은 인간의 ’고질병‘이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중세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이미 ‘세상은 곧 인간과 같다’라는 개념으로 그 씨앗을 엿볼 수 있다.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우주관은 “인간이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세계가 인간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수도사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역시 인간 이성에 대해, 인간 삶에 대해, 인간 구원에 대해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성 토마스와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 또한 인간 본성을 영광스런 신의 피조물로 찬양했으며, 인간과 신의 동역(同役)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同役)자 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린도전서 3:9>) 더욱이 그들은 인간 이성 능력을 굳건히 믿었다. 이후 스콜라 철학에 영향 받은 단테(1265~1321)도 현세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택하고 악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그의 희망과 궁극적 믿음은 중세 전성기를 지배했던 분위기를 대표한다. 이 점에서 단테는 인간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확신을 표명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세 후기가 되자 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새로운 계급, 곧 상인 계층이 번성했다. 상인은 당시 영주와 성직자, 기사, 농노로 이어지는 봉건 피라미드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상인은 농노를 자유민이라고 이름 붙인 임금노동자로 삼기위해 영주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상인은 또한 자신이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안정되길, 소유권이 보장되길 원했다. 그들은 돈이 넘쳤는데, 세입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던 국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왕은 상인들에게 세금을 늘려 국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상인과 국가가 함께 공생하며 발전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신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인 계급은 자신들 위상을 강화할 다른 방법도 찾았다. 당시 유럽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이슬람 세계가 상인들 소망을 이룰 방안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가 그동안 연구한 그리스-로마 문명을 십자군 전쟁 원정으로 접하게 된 상인들은 기독교 이전 고전 사상에 탐닉하게 되었다. 그 사상은 중세 신학자들이 보잘것없고 덧없는 존재로 여겼던 바로 ‘인간’이었다. 무역이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독립적이고 지적이며, 모험심이 강하고 능력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인간형은 전형적으로 돈을 잘 버는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시기(14~16세기) 상인 계급은 인본주의라는 뿌리를 고대 그리스에서 캐어내 자본주의에 이식했다. 

 


스피노자(1632~1677)는 인간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계를 판단하기에, 예컨대 ‘식물과 동물은 인간에게 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인간은 신이 “자신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면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고, 인간만의 가치를 세계에 투영해서 좋음과 나쁨, 질서와 무질서,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이항대립적 가치론을 구축한다. 하지만 이런 가치론은 사물의 참된 원인을 몰라서 내리는 인본주의일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비판한다. 사람들은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자연은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모든 목적인(目的因)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특히 목적론 사고 속에서 사물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본질만 가지며, 그러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未完)의 존재로 간주된다. 사물 변화는 오직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설명되며, 이로부터 벗어난 것은 비본질적이고 비정상적일뿐이다. 이러한 목적론 사고가 갖는 위험성은 ‘차별주의’ 논리로 쉽게 전용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목적론 사고 바탕이 다름 아닌 ‘인본주의’ 사고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인 이상 애초부터 인본주의 사고를 벗어날 순 없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우리가 인본주의 사고를 벗어나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한 이분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서양 역사에서 최근 들어 보편화되었다.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인류 분류 방식은 하위 속물에서 상위 이상형 상태까지 위계적 연속체를 이룬다는 ‘단성 모델’이 선호되었다. 물론 그때에도 인간을 크게 여자와 남자 두 무리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적인 형태는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과거부터 계속되어 온 여성 억압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분류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단성 모델에서 전통적인 남성성은 더 큰 열정에 의해 단일 사다리의 정상에 있고, 전형적인 여성성은 힘의 생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단일 사다리 밑에 위치한다). 객관적인 자연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자연과 교감한다. 이 점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어떠한 범주가 너무나 명확하기에 그 구분법은 시간과 문화를 초월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1948~ )도 인간이 항상 자신 망상 속 사다리의 꼭대기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다른 동물들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한다고 말한다. 드 발은 과학자들이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의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해석한다. 어떤 면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인지 능력을 지닌다면 – 예를 들어 특정한 새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 – 과학자들은 이를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인본주의란 과학을 통해 인류가 진리에 다가설 수 있고, 그래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신념지만,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 면에서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속임수를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을 뿐이라고 냉소한다. 과학자들은 수년 전에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뒤 침팬지나 코끼리 같은 몇몇 동물이 나무 막대기와 돌 같은 물건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인간만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침팬지가 막대기를 목적에 따라 변형시킨다는 사실이 또다시 밝혀졌다. 그들은 이제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해 다른 도구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자연에서 인간만이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수정되고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라곤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밖에 없다. 

















도시에 사는 까마귀들은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 위에 견과류를 떨어뜨려 지나가는 차바퀴에 껍질이 깨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다음에는 부리로 길 건너기 버튼을 눌러 자동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은 다음에 껍데기가 열린 견과류를 안전하게 회수해 온다. 이러한 행동은 여러 도시에서 여러 번 관찰되었다. 
















문어는 무척추동물로 분류될 뿐 아니라, 지능이 없다고 알려진 달팽이나 조개류와 마찬가지로 연체동물에 속한다. 조개류는 심지어 뇌가 없다. 하지만 문어는 뇌가 있으며 영리하다. 어린아이들이 열지 못하도록 설계된 약병 뚜껑을 문어는 열 수 있다는 사실이 보고된 바 있다. 무척추동물 치고 문어 뇌는 거대하다. 호두 정도 크기인데, 아프리카 회색앵무새 뇌 크기와 똑같다. 훈련된 어떤 회색앵무새는 구어체 영어단어 수백 개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형태와 크기, 재료 개념 또한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수학을 할 수 있었으며, 질문을 던졌다. 회색앵무새는 또한 조련사를 고의로 속이다 못해, 속인 일이 발각되면 사과할 줄도 알았다. 동물 뇌의 처리 능력을 좌우하는 것은 신경세포 수다. 문어는 신경세포 3억 개가 있다. 쥐는 2억 개가 있고, 개구리는 아마도 1600만 개가 있을 터다.



미국 시애틀 아쿠아리움에 사는 태평양대왕문어는 반쯤 돌려서 나사로 고정시킬 수 있는 야구공 크기의 플라스틱 공을 즐겨 가지고 놀았다. 직원은 공 안에 음식을 넣어두었는데, 나중에 놀란 점은 문어가 공을 여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나사를 조여 원래대로 조립해놓았다는 사실이다. 집에서 어류를 키우는 사람 다수는 문어가 자신들과 함께 텔레비전 보기를 즐기는 듯싶다고 말한다. 권위 있는 저서 『두족류: 가정 수족관을 위한 문어와 오징어』에서, 심지어 주인과 문어가 함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도록 TV를 수조와 같은 방에 두라고 권한다.



타인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고도로 발달한 인지 상태로, 소위 ‘마음 이론’(theory of mind)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마음 이론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이라 여겨졌다. 일반적인 어린이는 마음 이론이 3세에서 4세 사이에 발생한다. 마음 이론은 의식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되는데, 자의식의 존재를 암시하는 까닭이다(‘난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개조차도 자신에게 없는 지식이 다른 개체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다른 생물 마음이 어떠한지 그려보는 지구상 모든 생물 가운데 으뜸은 틀림없이 문어일 듯하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문어는 각양각색의 기만술로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어 암컷한테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이, 수컷한테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이, 둘 다에게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코스테론이 있다. 암컷 문어의 에스트로겐 수치는 산란 연령일 때와 수컷을 만날 때 급등한다. 수컷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도 올라간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은 인간의 욕구와 공포, 사랑, 즐거움, 슬픔에 관계하는 화합물이며서 여러 생물에게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든, 원숭이든, 새든, 바다거북이든, 문어든, 조개든 간에 내면 깊숙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생리적 변화는 동일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뇌 생물인 가리비의 작은 심장조차도 포식자가 접근해오면 한층 빨리 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감정과 지능이 없다고 여기려 한다. 이런 선입견은 어류와 무척추동물에 대해서 특히 더하다. 하지만 동물은 우리가 상실했거나 결코 획득한 적 없는 감각이 확장된 세계에서 우리가 끝내 듣지 못할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존재다. 

















동물들이 잠을 자는 방식도 놀랍다. 돌고래와 고래는 꿈을 꾸지 않는 비렘수면으로 잠을 자는 데, 한쪽 뇌 반구만 잠들 수도 있다. 즉 어느 한 시점에는 뇌 반쪽만 잠을 자고 있다는 뜻이다. 한쪽 반구가 잠을 충분히 자고 나면 서로 교대하여, 깨어 있던 반구는 깊은 비렘수면에 푹 빠져든다. 뇌 반쪽이 자고 있을 때에도, 돌고래는 계속 움직이고, 심지어 음성대화까지 할 수 있다. 뇌 활성을 교대로 ‘켜고, 끄는’ 경이로운 기술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수생 포유류만 양쪽 뇌가 따로따로 깊은 비렘수면을 취하는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 조류도 할 수 있다. 조류는 주변을 지켜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새가 혼자 있을 때는, 뇌의 반쪽과 그 반쪽이 담당한 눈은 깨어서 주변에 어떤 위협 요인이 있는지 계속 지켜본다. 그렇게 할 때, 다른 쪽 눈은 감긴다. 그럼으로써 그 눈을 담당하는 뇌 반구는 잠이 들 수 있다.



새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는 더욱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일부 종에서는 새들이 무리지어 있을 때면, 양쪽 뇌 반구가 동시에 잠을 자는 개체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위협을 피할 수 있을까? 답은 참 창의적이다. 무리는 먼저 나뭇가지에 한 줄로 죽 늘어서 앉는다. 양쪽 끝에 있는 개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뇌 양쪽 반구 모두가 잠에 빠져든다. 양쪽 끝에 앉은 새들은 뇌의 반쪽(서로 반대쪽)만 깊이 잠든다. 따라서 한쪽 끝 새는 오른쪽 눈을, 다른 한쪽 끝 새는 왼쪽 눈을 활짝 뜨고 있다. 그럼으로써 무리에서 양쪽 반구 모두가 동시에 잠들 수 있는 개체 수를 최대한 늘리면서, 무리 전체를 위해 두 마리 새만 위협 요인이 있는지 주변을 지켜본다.. 시간이 좀 지나면, 양쪽 보초병들은 일어나서 몸을 180도 돌려서 다시 앉아, 다른 쪽 뇌를 잠재운다.



대양을 건너서 수천 킬로미터 이주하는 철새들은 한 자리에서 충분히 잠잘 기회가 없다. 하지만 뇌는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철새들은 비행할 때 겨우 몇 초씩 지속되는 놀라울 만치 짧은 잠에 빠지곤 한다. 이 극도로 강력한 선잠만으로도, 오랫동안 전혀 잠을 자지 못했을 때 뇌와 몸에 닥칠 여러 결핍 증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흰정수리멧새는 아마 장거리 비행 때 잠을 줄이는 능력 면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례일 것이다. 이 흔한 작은 새를 미군이 수백만 달러 들여서 연구하고 있다. 미군은 24시간 잠을 자지 않는 군인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여왕개미 평균 수명은 14년이며, 한 마리가 평생 낳는 알의 수는 약 1억 5천만 개에 달한다. 이처럼 많은 알을 낳기 위해 여왕개미는 숫개미 여러 마리와 교미하며 적어도 정자 2억 개 이상을 비축한다. 여왕개미는 저정낭이라 불리는 정자주머니 속에 정자를 저장해 놓고 평생 사용한다. 여왕개미가 알을 낳을 때 저정낭에서 정자를 꺼내어 수정시키면 암컷이 되고 저정낭을 막아 미수정란을 낳으면 숫컷이 된다. 다시 말해 숫컷들은 동정녀로부터 태어난 개체다. 숫개미는 정자 도움 없이 오로지 난자로부터 만들어지는 반수체 동물이기에 그들 세포 속에는 언제나 단 한 벌의 염색체만 들어 있다. 숫개미는 아버지가 없는 개체다. 



남미 지역에 사는 잎꾼개미 군락 하나가 파 엎은 흙 양은 평균 20m^3가 넘으며 무게로 따지면 약 44톤이나 된다. 일개미 한 마리마다 자기 몸무게 너댓 배나 되는 흙덩이를 적어도 10억 번 이상 굴 밖으로 끌어낸다. 이파리를 운반할 때도, 사람으로 치면, 약 15km나 되는 귀갓길을 300kg이 넘는 짐을 입에 물고 시속 24km 속력으로 달리는 셈이다.



개미는 태양과 각도를 측정하여 갈 길 방향을 찾는다. 개미는 먹이가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태양과 각도를 측정해 두었다가 먹이를 짚어들고 180도 회전하여 집으로 향한다. 해를 방향지표로 사용하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만일 먹이를 구하러 나가는 시각과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생겼을 경우다. 하지만 개미 뇌 속에 생물시계가 있어서 한 시간에 15도씩 각도를 조절하여 정확하게 집으로 향한다.



일개미는 자기 의사도 전혀 없는 기계적인 개체가 아니다. 그들도 엄연히 독립적인 몸을 가지고 개별적인 삶을 영위하는 생명체다. 일개미가 알을 낳는 경우도 상당수 관찰되었다. 암놈인 일개미가 낳을 수 있는 알은 결국 미수정란이므로 모두 숫개미로 성장한다. 여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 일개미가 숫개미를 키우는 일이 언제나 순조롭지만 않다. 실제로 많은 종에서 여왕개미와 일개미들 간 갈등은 끊일 날이 없다. 일개미들은 대체로 여왕 화학물질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군락 변방이나 굴 속 어느 한 방 입구를 막은 채 여왕 눈을 피해 자기들끼리 알을 낳는다. 여왕개미가 일개미의 역적모의를 눈치 채면 손수 역도 소굴로 행차하여 그들을 가차 없이 물어 죽이는 일도 있다. 개미 군락에서 일개미들이 아무런 지각도 없이 그저 전체 복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엄한 군주의 압제 하에서도 틈틈이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꿀벌이나 다른 곤충들이 빠르게 날갯짓을 하면 순간적으로 상당한 정전기가 발생한다. 정전기로 충만한 곤충 몸뚱이가 꽃 속으로 들어오면서 촉촉한 암술대와 암술머리에 닿으면서 식물의 중앙 관다발 시스템으로 직접 연결되는 전기장을 만들어낸다. 전기장은 뿌리로 연결되는 수분에 의해 접지되어 땅속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정전기 이동은 곤충 몸에서부터 꽃가루가 떨어져 나와 암술머리에 달라붙기 쉽게 해준다. 또한, 꿀벌이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취하는 방법 중 하나는 겨울 동안 자신들 머리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핀란드의 어느 한 학자가 꿀벌은 겨울에는 뇌 활동과 뇌 크기를 줄이고 꽃이 피는 봄에는 뇌 크기를 늘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야말로 겨울에 에너지를 절약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자신 내부 컴퓨터 용량을 줄이는 것이다. 꿀벌을 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뇌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꿀벌은 겨울 동안에도 꽃이 피어 있던 방향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핀 머리만 한 크기의 뇌로서도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인간에게는 근면이 미덕이라는 윤리의식이 있지만, 게으름 피우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변별 있는 행동 양식이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미덕이다. 이솝 우화에는 일벌과 일개미가 대단히 부지런한 동물로 나온다. 하지만 그 동물들이 과즙을 모으거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은 낮 시간의 20%에 불과하다. 그외 시간에는 게으름뱅이처럼 일은 안 하고 빈둥거리기만 한다. 개미나 벌이 근면한 동물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벌집이나 개미집 전체가 보여주는 번잡함 때문인 듯하다. 벌집이나 개미집은 겉보기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작은 우주 같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각각의 개미와 벌이 매순간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체 하나하나에 일일이 꼬리표를 붙여 관찰한 결과, 벌과 개미의 휴식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에는 군집생활을 하는 곤충들이 사소한 활동에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개미와 벌은 건전지와 같아서 집단을 위해 사용할 일정량의 에너지를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재충전 되지 않기에 빨리 사용하거나 천천히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한다고 해서 더 얻을 수는 없다. 결국 열심히 일할수록 빨리 죽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꿀을 모으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벌들의 심정 공감된다.



인간은 생존에 쓰고도 남을 만큼의 자원을 모은다. 인간의 물욕은 대개 문화적인 탓인 것 같다.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고, 그렇게 획득한 자원을 대체로 그날그날 소비하는 동물들은 하루에 서너 시간만 일한다. 사실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싶어 하는 선천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인간은 일부러 게으름을 육욕이나 대식과 함께 일곱 가지 죄악(seven deadly sins)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옥수수가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내보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다. 또는 나무가 다른 나무와 조난신호를 ‘주고받을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아무도 식물이 공격을 받게 되면 재빠르게 화학적 대응책을 강구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한다. 식물들은 단순히 한자리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면 이에 대응할 수 있고 또 방어물질도 동원할 수 있다. 비록 식물이 신경망도 없고 뇌도 없지만 그들 세포는 서로 연락도 할 수 있고 협조된 대응 체계도 만들어낼 수 있다. 비록 전기충격처럼 신경 섬유를 따라 빠르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식물의 여러 다양한 부분은 질병에 대해 반응할 수 있고 식물의 다른 부분과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옥수수는 상업적으로 중요한 작물이기에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최근에서야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먹성이 좋은 옥수수 천공충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인 옥수수 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하면 옥수수는 냄새나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내 이에 대응한다. 이 화학물질은 휘발성이 강하고 바람에 의해 멀리까지 전달된다. 이 냄새는 바로 조그만 나나니벌들을 자극해 모여들도록 하는데, 나나니벌은 옥수수 천공충 애벌레에 모여든다. 암컷 나나니벌은 천공충 애벌레 몸뚱이 속에 알을 낳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나나니벌 애벌레가 깨어나 자라나면서 옥수수 천공충 애벌레를 서서히 안으로부터 갉아먹는다. 나나니벌 애벌레가 당장은 옥수수를 보호해주는 못한다. 천공충 애벌레는 금세 죽지 않고 계속해서 옥수수 줄기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공충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것을 막아 천공충 번식을 제어하기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방어 전략이 된다.



생물학자들은 꽃을 피우는 식물을 속씨식물이라고 부른다. 속씨식물 종의 수는 대략 26만여 종이나 된다. 지구상 모든 식물 종의 수가 30만 종정도 된다고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주변 식물 중에서 속씨식물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꽃을 피우는 식물이 생물학적 분포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나비나 나방, 딱정벌레, 벌, 베짱이, 메뚜기 같은 곤충들만 전부 더해도 100만 종은 훌쩍 넘기 때문이다. 딱정벌레만 해도 그 종류가 4만5,000종을 넘고 지금도 새로운 종이 매일매일 발견되는 실정이다.



생물학은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이 아니다. 화학이나 물리학과는 다르게 어떤 규칙이나 법칙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는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이 보이기는 하지만 생물학 분야는 일반적으로 광범위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꽃’과 같은 정도의 생물은 아주 간단하게 그 정의와 특성을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꽃은 그 크기나 모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다양하다. 



우리가 동물이나 식물이 단순하고 열등하다고 여겨 지배하려 든다면,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는 일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며 물리학자 김상욱(1970~ )은 우리의 잘못된 논리를 꼬집는다. “폭발물 탐지 로봇은 인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위험에 몸을 내던진다. 기계지능이 인간과 비교하여 열등한 것이 있다면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가 추구하던 궁극의 경지란 대개 자아와 욕심을 버려서 도달하는 상태다. 기계지능은 버려야 할 자아나 욕심이 아예 없다. 기계지능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열반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 대신 이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상상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지도 모른다. 더 낫다는 기준에 반드시 인간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2010) 저자 존 그레이에게 인본주의의 다른 말은 곧 악의 상징, 루시퍼의 속성인 ‘오만’이다. 인간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경계를 넘어’버렸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거의 ‘악’에 가까우며, 그 대표적인 오만한 인간의 사상이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레이에게 서양 인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에 있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좌든 우든 기본적으로는 이 ‘인본주의’ 사상과 ‘진보’의 결합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게 그레이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힘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에 과학과 기술이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를 차지했다. 인간은 다시 자신이 과학과 기술을 잘 다스려서 운명을 개척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과 기술이 ‘객관적 지식’인 듯 보여도 그것의 활용방식은 인본주의이고, 그 인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이고, 기독교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편협한 신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 역시 하나의 허상이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슈아 그린(1974~ )은 “인본주의가 중요한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인본주의는 우리의 주관적 느낌을 마치 추상적인 도덕적 실체인 양 만드는 편리한 합리화 도구일 뿐이다. 합리적 논증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인본주의를 수사적인 무기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에 호소하는 것은 논증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논증의 시간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사람-동물 관계에서 뿐 하니라 사람-사람 관계에서도 수사적인 무기로 삼지 말아야 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 )은 인본주의가 지배 계급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비판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메워질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인본주의 방식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시스템 문제를 ‘인간’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린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인본주의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평론가 문강형준(1975~ )은 휴머니즘 강조가 사회문제를 개인 ‘인간’ 문제로 둔갑시킨다고 비판한다. <인간극장>처럼 휴머니즘(인본주의)을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는 “매번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감동적으로 그려내,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일상의 행복’을 선전하는 프로그램은 일말의 진실은 있을지 몰라도, 생활세계의 잡다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싸잡아 ‘마음의 변화’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메시지야말로 힘든 세상 문제는 그대로 두고 정신의 변화만 요청해서 자기만의 가짜 행복에 빠져들게 만드는 아편이기도 하다. 오직 마음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면 결국 사회와 인간의 분리만 가속된다. 행복은 결코 개인적인 결단으로만 가능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이란 습관들이기 나름인가 보다!” 

- 셰익스피어, 『베로나의 두 신사』 中








4,000년 동안 존재했던 인간사회 100여 개를 표본 삼아 분석한 한 인류학자는 식인풍습 사회가 34%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현재 식인이 불러일으키는 우리 혐오감은 보편적인 일이 아니다. 인류에게 식인이 생각보다 낯선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왜 식인을 할까? 예를 들어, 비행기 추락사고의 생존자들이 굶어죽을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람들은 대개 먼저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식인을 왜 할까?
















특정 사회에서는 시체를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먹는다. 인류학자들은 자기 부족 시체를 먹는 행위를 족내 식인풍습이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형태가 있다. 베네수엘라 아마존의 야노마미족은 시체를 장작불에 태워서 타고남은 뼈 조각을 수습해서 가루로 만든다. 죽은 자 친척들이 뼈 가루를 바나나 죽에 섞어 먹는다. 반대로 파라과이의 구아야키족은 시체를 잘라서 굽는다. 죽은 사람 가족을 제외한 부족 전체가 시체 살을 종려나무 수액에 곁들여 먹는다. 뼈는 잘라서 불태워 버린다. 족내 식인풍습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를 흡수한다는 의미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완전히 통합된다. 

















장례의식 절차로써 자손이 죽은 자를 먹는 것이 허락된 사회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원한 결합을 상징한다. 이런 사회에서 적절한 식인 의식이 거행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 삶이 불행해 질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 같은 장례 만찬은 종교적인 일체감과 관계가 있거나, 죽은 자의 살이 살아있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생각과도 관계있다. 물론 그런 의식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정당성이 부여되더라도 오늘날에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회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든 문화에서 쉽게 인정하는 가치 – 고인의 마지막 소망을 존중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 사랑의 표현 –를 고려한다면 그렇다. 고인에 대한 존경이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면, 투피-구아라니족이나 카리브족처럼 많은 남미 부족은 전쟁 포로를 처형하여 의례적으로 먹었다. 아즈텍 사람들도 수십만 명을 식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즈텍 문명은 전쟁-인신 공양-식인풍습의 복합적 문화 풍습을 만들었다. 식인 대상은 주로 전쟁 포로였다. 아즈텍 군대는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 후 식인할 포로를 되도록 많이 잡아오는 일에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적의 항복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무 많은 적군을 죽이게 될까봐 군사적 우세를 밀고 나가는 것을 종종 삼갈 정도였다. 아즈텍 문명의 피라미드는 가파른 경사로가 있는데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희생자 몸뚱이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쉽게 굴러떨어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 희생자를 성직자가 거두어다 사람들에게 인육으로 배분했다. 아즈텍인들의 식인풍습은 종교적 의식 일환으로 사람을 겉치레로 먹는 시늉이 아니었다. 식인풍습은 불과 100년 전까지도 전 세계 광범위하게 생각보다 많이 행해진 문화였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사람에게 식인은 천성이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이에 쉽게 길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천성이 아니지만’ 주변 생태 환경이 파괴되고 고갈되어 먹을 것이 없을 경우에만 식인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밝힌다. “다른 식량이 부족해 식인풍습이 생겼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일단 생겨난 인육에 대한 입맛은 식량부족 사태가 해결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인육은 사람들이 열렬히 찾는 대상이 되었다. 원시 부족은 인육을 즐겨 먹는 것을 절대 수치로 느끼지 않았다. 아마 인육을 먹은 것이나 동물 고기를 먹는 것이나 도덕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식인 풍습은 한때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원시부족 중 식인풍속이 없는 곳은 거의 없었다. 멜라네시아에서는 친구들에게 구운 인육을 대접하면 추장의 사회적 명성이 크게 높아지곤 했다. 브라질의 한 현인 추장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인육보다 맛있는 사냥감은 알지 못 한다. 당신네 백인들은 정말 음식을 너무나 가린다.” 



아일랜드인, 이베리아인, 픽트인(로마 제국 시기부터 10세기까지 스코틀랜드 동부 및 북부에 거주하던 부족), 11세기 데인족(덴마크계 게르만족) 같은 후대 종족들도 식인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고기를 주요 교역 상품으로 취급하고, 장례식 같은 건 모르던 부족도 상당수 달했다. 콩고의 우알라바 강에서는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를 말 그대로 식품 일종으로 산 채 사고팔았다. 뉴브리튼 섬에는 현재 우리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팔 듯 인육을 파는 가게가 있기도 했다. 솔로몬 제도 일부 지역에서는 잔치에 쓰기 위해 인간 제물을(여자를 더 선호했다) 돼지처럼 살찌우기도 했다. 한편 푸에고인들(남미 마젤란 해협 남쪽 섬사람들)은 ‘개고기에는 수달 맛이 난다’며 여자 인육을 개고기보다 높이 평가했다. 타이티 섬의 한 늙은 폴리네시아인 추장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백인 고기는 제대로 구우면 잘 익은 바나나 맛이 난다.” 하지만 피지인들은 백인 인육은 너무 짜고 질기며, 유럽 선원 인육은 먹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불평하곤 했다. 폴리네시아인 인육 맛이 더 났다는 것이다.



한편 16세기 철학자 몽테뉴 눈에는 죽은 사람을 구워먹는 것보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고문하는 것(몽테뉴가 살던 시대에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다)이 더 야만적인 일로 비쳤다. 듀런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인간은 서로가 가진 착각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