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작품, ‘마음의 눈’으로 읽기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비채] | (2020)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서 작가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일 수 있지만 작가는 아니다. 작가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파악했던 인물들이 새롭게(때론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과 행동을 작가와 동일시하는 일은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작품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독자가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무심코 발견하기도 한다.
최근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역시 텍스트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이제 기억은 가물가물하여 신빙성 있는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대학 시절에 하루키 열풍은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것 같다. 책을 어지간히 읽지 않았던 나도 대학 시절에 읽은 ‘몇 권’(분명히 5권도 안될 것이다)의 책 중에 《상실의 시대》(언젠가 《노르웨이의 숲》으로 제목이 바뀌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의 부실한 독서 실태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반대로 하루키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개인적인’ 지표다. 수많은 ‘하루키 매니아’들의 유대감 어린 대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에 유일하게 읽어낸 책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물론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독자들에게 두꺼운 책읽기가 고역인 것처럼, 나도 이 책을 읽다가 번번이 의식을 상실했다. 아마 책읽기가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 고충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당시에 내게 ‘문학’이란 장르의 유일한 효용은, 숙면을 위한 것으로 한정되었다. 《상실의 시대》는 적당히 두꺼웠고, 더 크고 두터운 전공도서 위에 받치고 책상에서 베개로 삼기에 나쁘지 않았으니까. 이제 20여 년이 지나 온라인 서점의 서재에서 놀며 조금씩 읽다보니 다시 하루키와 만나게 된 셈이다.
다시 최근에 읽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돌아가 보자. 1부에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화자는 이제 2부에서 40대의 중년이 되었다. 주로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펼쳐진다. 생활인으로 평범한 나날들을 살아가는데, 도쿄에서 후쿠시마현의 작은 마을 도서관장이 된다는 것이 조금 독특할 뿐이다. 화자는 신임 도서관장이 된 후 월요일마다 전임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 씨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것은 화자가 하나의 의식처럼 되풀이하여 지키는 일정이 되었다. 실제로 만나보지도 못한 한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화자는 고야스 씨의 무덤 앞에서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흘리는 눈물에서 뜨거운 온기를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이 내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이 장면에서 받은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 화자가 눈물을 흘리고 그 온기를 느꼈던 것은, 바로 한 인간의 ‘소멸된 역사’에 대한 애도 행위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그 앞에 놓인 격한 삶의 파고를 헤쳐 나갔을 인생을 기억하는 ‘인간적인’ 행위였다. 스스로 뜨거운 온기를 유지하며 분투했을 한 존재와의 연결됨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의 소멸을 애도하는, 뒤에 남은 자의 존중어린 감정이었을 테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제 “눈물도 혈액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몸에서 짜낸 것이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430) 라는 문장은 내게 보다 생생하게 피부로 느껴졌던 것이다.
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감수한 화자를 돌봐주는 노인이 나온다. 그 노인이 고백하듯 내민 한 마디 “나는 과거에 군인이었네.”(97)가 기억났다. 뜬금없어 보이는 노인의 말은 곧바로 작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의 충격적인 말이 각인되었을 어린 하루키의 마음 속에 전쟁을 경험했던 남자의 이미지는 아무런 맥락없이 등장하지는 않았을 테다. 작가의 아버지가 학살이 자행된 공간에 파견되었던 부대의 병사였다는 사실. 작가의 아버지에겐 오랜 트라우마로 남았음이 분명한 사실이, 작가에게는 오래도록 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결국 소설 속의 노인은 작가 아버지의 모습으로도 읽혔다.
그러면 이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노인이 한 말 가운데 한 가지 단서를 더 찾아볼 수 있다. “구덩이에 던져 넣고 유채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지. 오후에는 도시 어디서나 그 연기를 볼 수 있어. 그게 매일 이어진다네.”(121) 하루키의 소설에서 슬쩍슬쩍 지나가는 이런 문장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사용된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분명히 작가가 지니고 있던 학살-아버지와 관련 있는 난징학살-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고한 희생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은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루마니아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시인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유대인들)을 태운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수록된 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시집 《죽음의 푸가》중 시 「죽음의 푸가」, 41면,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여기서 ‘푸른 눈에 금발의 마르가레테’는 허구적 개념인 '순수한 아리안족'을 상징한다. 반면 ‘재가 된 머리카락의 줄라미트’ 혹은 ‘회색 빛 머리카락을 한 줄라미트’는 유대인을 나타낸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은 최근에 출간된 홀로코스트 문학작품 《숄》(신시아 오직 지음)의 첫 페이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시에는 가해자와 희생자가 대비되고 있다. 희생자는 소각되어 연기가 되어 ‘공중 무덤’으로 올라간다는 이미지가 또렷하다. 하루키가 이 시 혹은 연기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음직한 대목은 또 다른 작품에서 발견된다. 홋타 요시에의 《시간》(1955)이란 소설에서다. 여기에서 이 ‘연기’의 이미지가 다시 나타난다. 이 소설 역시 ‘난징대학살’을 중심테마로 삼는데, 독자로서 놀라웠던 점은 가해국 일본의 작가가 희생국의 장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홋타 요시에,《시간》, 74)
하루키는 아버지의 역사를 조사하면서, 난징과 관련한 문헌을 보았을 것 같다. 이 소설 역시 말이다. 그러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무력하게 죽어갔던 단각수들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죽어간 희생자들을 1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엔 하루키가 표현하듯이 ‘무의미하게 죽어간 일본 병사들’뿐만 아니라 전쟁과 집단의 광기에 희생된 민간인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러면 이 단각수들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 등장하는 양들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아래로 강요된 폭력에 휘둘리고 희생된 양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화자가 도서관의 소녀와 함께 도시 주변부에 있는 거대한 웅덩이를 보러 가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소녀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옛날에 여기에다 이교도나 전쟁 포로를 던져 넣었다고 해요. 벽이 생기기 전 시대에.”(145) 스쳐가듯 던져진 이 문장에서 나는 하루키가 계승한 아버지의 트라우마의 흔적을 발견한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하루키의 정신에 남은 응어리의 기억이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자국 내에서 발생한 ‘간토대학살’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웅덩이 혹은 구덩이는 난징대학살이든, 간토대학살이든 무모한 전체주의의 폭력에 스러져간 희생자들을 ‘처리’한 장소가 된다. 이 장소는 이제 망각을 위한 장소, 애도가 금지당한 장소로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은가. 그 자체로 전체주의 폭압을 암시하는 대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올해 첫 날 일본 본토(혼슈 도야마현)에서 진도 7.4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벌써 220명이 넘었다고 한다. 나는 안타까운 희생자와 이재민에 관한 뉴스기사를 보면서, 동시에 ‘간토대학살’을 떠올려보았다. 일본군과 관계 기관에서 퍼뜨린 유언비어로 현재까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조선인 및 중국인과 일본인 희생자가 발생했던 사건이다. 조선인 희생자 수만 6600여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어떤 입장에서 조사하느냐에 따라 그 숫자가 크게 다르다. 중요한 건 여전히 정확한 수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건,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도, 일본에 ‘간토대학살’에 대한 정식 조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셈이다. 사건 발생 10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아직까지 희생자에 대한 ‘애도’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리고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다. 정리하면, 하루키 아버지의 개인사는 ‘난징대학살’이라는 세계사적인 사건 속에 엮어 있었고, 이것이 작가 하루키의 어린 시절에 큰 사건이자 오랜 기억의 응어리로 ‘계승’되고 있음을 염두에 두며 읽어갈 수 있다. 40여년 동안에나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을 차지했을 이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는 고민을 거듭했을법하다. 일흔이 넘은 시점에 다시 묵혀둔 글을 다듬어 3부로 구성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세상에 내놓았다. 작가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그의 작품을 감상해볼 수 있다.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으며 확인할 수 있는 점은, 하루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는 작가라는 점이다. 앞에서 인용한 51페이지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51)
작가 자신의 존재는 이 ‘우연’ 속에서 결정된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 얘기한다. 세상에 던져진 이상, 이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당대에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한 수재였고,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꾸었던 엘리트 청년이었으리라. 다만 20세에 국가에 의해 징집되고 학살의 현장에 가야만 했던 개인의 역사를, 후손인 하루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리 어떤 선택이 존재할 수 있을까. 훗날 하루키는 관계가 멀어진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하루키에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란 인간이 이후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선택에 관한 것이었을 테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평생 매일 아침마다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도와 독경을 하며 애도했다. 마찬가지로 하루키에게 문학 행위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도를 보내는 행위였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일부 독자들이 말하듯 하루키 작품을 단순히 ‘가벼운 작품’이라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작품을 대하는 진정성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하루키의 문학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최근 감상한 장욱진 화백의 그림과 작업들이 떠올랐다. 이 두 사람이 무슨 관계냐고? 내겐 아주 중요한 연결지점이 있다. 장욱진 화백은 평생 반복해서 그린 대상이 몇 가지 있다. 새(까치), 소, 강아지, 나무, 여인과 아이 혹은 가족 등등이다. 하루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우물과 웅덩이, 단각수, 고양이, 코끼리나 거북, 꿈, 소녀(혹은 소녀와의 관계), 노인 등등 작품에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내놓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욱진 화백의 작품에서 ‘형식적 진정성’을 찾고자 시도했던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이하 《장욱진》)에 주목해보자. 저자 정영목이 장욱진의 작품 이해에 시도했던 감상 태도를 하루키에게 적용해볼 수는 없을까. 하루키와 장욱진 모두 평생에 걸쳐 사용했던 라이트모티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의 작품들을 작가 내면의 ‘마음 풍경’을 그려낸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다고 여긴다.
“반복되는 시각적 상징들은 작가의 관념적인 마음 풍경을 전달하기 위한 의미로 작동할 뿐, 그림을 설명하거나 상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장욱진》, 71)
다시 말하면,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에도 ‘심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다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장욱진이 극히 제한적인 사물 혹은 대상에 관심을 보였다든지, 그 관심의 대상들이 동어반복적인 조형 이미지로 일생 내내 작품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사회심리적인 정신분석의 영역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장욱진》, 144)
이처럼 장욱진 화백의 작품을 분석하고 작품 자체의 가치를 발견해보고자 했던 저자의 접근 방식 혹은 관점을 하루키의 작품에도 적용해본다. 화백의 작품 대신 하루키의 작품을 대치해도 잘 들어맞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청년시절부터 엄청난 독서를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프로이트의 책도 상당히 읽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꿈’이 등장하는 것 역시 프로이트나 융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심증을 더해본다. 여기에 하루키의 작품에 흐르는 태도에는 ‘반복’과 ‘계승’이라는 표현도 눈에 띈다. 이건 장욱진 작품을 분석하는 방식을 하루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장욱진은 그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와 행위를 형식의 문제가 아닌, 자연과 삶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걸쳐 있는 일종의 ‘진실’을 추구하는 문제로 보았다. 또한 조형으로서의 ‘압축’과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조형은 자신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표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같은 스타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미 조형 이전의 문제인 것이다.”(《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 47)
어떤가? 나는 이 접근방식이 하루키의 작품 감상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긴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조형’은 하루키에서 반복되는 대상(이를테면 단각수)이 갖게 된 독특한 맥락과 연결지어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서는 문화적 혹은 관습적으로 적용되는 단각수의 상징성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 장욱진 화백의 책 《강가의 아틀리에》에서도 언급되지만, 화가 자신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자아의 발견’, ‘자기에 대한 사고방식’을 개발하고 발현시키는 일이었다. 장욱진 화백은 “자꾸 반복할수록 그림이 좋은 거예요”라고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반복되는 테마에서 독자들은 진부함을 지적하기 전에, 하루키 작품의 진정성을 먼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다. 또 정영목 교수가 “그림 속 대상은 작가의 분신이라 보아야 한다”(《장욱진》, 161)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최소한 몇몇 인물들) 역시 작가가 규정해 놓은 자신의 다른 모습들로 볼 수 있겠다. 이 말은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김응교 교수가 그의 저서 《일본적 마음》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확인되는 점이다. 하루키의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두 번째 작품 《1973년의 핀볼》,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소설 쓰는 쥐나 제이스바의 J 역시 작가 하루키의 또 다른 자아상이라는 언급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우연히 20여년 만에 하루키 문학을 다시 접하게 되었는데, 하루키와 그의 작품이 정말로 궁금해졌다.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이 담긴 이 책과 작가의 최근 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를 읽고, 이어서 작가의 초기 작품 세 편(《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비교하며 반복되는 주제들도 찾아보았다. 이 반복이란 키워드에서 장욱진 화백의 작품 감상에 대한 방법론을 하루키의 작품 감상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추어 독자의 읽기 놀이’로 보아주시면 될 것 같다. 내게는 하루키의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기회가 된 독서 경험이었다. 아직 어설픈 독자이긴 하지만, 작가 하루키가 평생 구축한 문학 세계라는 성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가 될 만한 단서들을 생각해보았다. 이 단서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나는 ‘마음의 눈’이란 표현에 주목한다.
“관찰할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관찰한 대상을 독창적인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서구 모더니즘의 기본 개념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장욱진》, 49)
결국 하루키의 작품 역시 심리적인 관점에서, ‘마음의 눈’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상을 그의 작품을 읽으며 떠올려보았다. 흥미로운 건 이 ‘마음의 눈’이란 표현이 최근에 등장한 표현은 아닌 듯하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이 표현이 나온다.
햄릿: 내 아버지 - 아버님을 본 것 같아.
호레이쇼: 오 어디서요, 왕자님?
햄릿: 내 마음의 눈으로, 호레이쇼.
[《햄릿》, 김정환 옮김, 아침이슬, 25면]
장욱진 화백의 작업 세계와 작품 감상에 대한 접근법을 기계적으로 하루키의 작품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테지만, 하나의 방법으로서 참고할 수 있겠다. 다만 작품 속에 반복되는 대상에 대해 일대일 대응물을 찾듯이 그 상징성을 하나하나 캐물어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신 이를 반복하는 작가-하루키의 ‘진정성’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한번쯤 독자는 아버지를 발견한 햄릿의 ‘마음의 눈’으로 하루키의 작품에도 접근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가오 옌)
[책 속으로]
[1] "왜 그 고양이는 해변에 갖다 버려야 했을까? 왜 나는 그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건 - 고양이가 우리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 지금도 하나의 수수께끼다."(16)
[2] "아버지가 왜 번듯한 불단이 아니라, 그렇게 조그만 유리 케이스 앞에서 매일 아침 독경을 했을까? 그것도 나는 알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그러나 아무튼, 그 일은 아버지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뜻하는 중요한 습관이었다."(17)
[3] "어린 시절에 한 번,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누구를 위해서 독경을 하는 것이냐고. 그는 말했다.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전쟁에서 죽은 동료 병사와 당시에는 적이었던 중국인들을 위해서라고. 아버지는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그 이상은 질문하지 않았다."(18)
[4] "중국 병사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참수되었다. 실로 훌륭한 태도였다,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참수된 중국 병사에 대한 경의를 - 병사이며 중인 그의 혼에 - 크나큰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49)
[5]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초년병이나 보충병을 살인 행위에 길들이기 위해 포로로 잡은 중국 병사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일이 흔했던 것 같다. 요시다 유타가 쓴 《일본군 병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후지다 시게루는 1938년 말부터 1939년에 걸쳐 기병 제28연대장으로서, 연대 장교 전원에게 ‘병사를 전장에 적응케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살인이다. 즉 담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에는 포로를 사용하면 된다. 4월에 초년병이 보충될 예정이니, 최대한 빨리 기회를 만들어 초년병을 전장에 적응케 하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는 총살보다 척살이 효과적이다‘하고 훈시했다고 회상했다."(50)
[6]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격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 -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51)
[7]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로 문장을 쓰는 것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태생이 추상적,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에 서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조망하고, 그걸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환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리고 그걸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나 자신이 투명해지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88)
[8] "나는 툇마루에 앉아 소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자주 상상했다. 조그만 손톱을 세우고 온 힘을 다해 소나무에 들러붙은 채 죽어서 말라비틀어져간 조그맣고 하얀 새끼 고양이를.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고양이에 얽힌 또 하나의 인상적인 추억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아직 어린 내게 생생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내려가기는 올라가기보다 훨씬 어렵다’ 하는 것이다. 보다 일반화하면 이렇게 된다 - 결과는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고양이를 죽이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도 죽인다."(92)
[9]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92)
[10]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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