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같은 할아버지


대학 1학년 때, 교문앞에는 허술한 라면집이 하나 있었다.
주인은 노부부였다.
통나무를 툭툭쳐서 이어붙인 간판에는 
하얀 페인트로 <캐빈>이라고 써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 할아버지를 캐빈할아버지라고 불렀었다.
할머니는 주방에서 열심히 라면을 끓이시고
할아버지는 하얀 행주치마를 두르셨는데
베레모를 멋드러지게 비껴 쓰셨다.
늘 웃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라면집에 들어가 본일이 없었다.
-한번 가 봐! 맛있어...할아버지가 얼마나 친절하시다고...
친구들은 그렇게 말을 했지만 
나는 단돈 오백원이라도 헤프게 쓸 수는 없었다.
꼬깃꼬깃 접어 모았다가 학비에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구두쇠!
노랭이!
그런 호칭에 달관한 지는 벌써 오래된 일이었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았기 때문이었다.
미쳐 내 학비까지 조달할 수 없는 가정형편 때문에
나는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했었다.
식당에서 접시도 닦고,신문도 돌리고,
밤으로는 호떡을 구워 팔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떡리어커를 끌고 나갔다가 소나기가 줄기차게 내리는 바람에
그냥 돌아오던 날의 밤이었다.

-학상,학상 이리좀 와 봐!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리어커를 한쪽으로 대고 가게에 들어가니 라면을 한 대접 주신다.
(전..라면을 안먹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돈을 주고 라면을 사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게도 호떡이 있었고 숙소에 돌아가면 밥도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괜찮아,뜨거울 때 후루룩 마셔! 그러면 기운이 날거야.
이런 억센 비를 맞고 다니면 큰 탈이 나는 벱여.
어른 말은 들어,어서!하시며 재촉하셨다. 

망서리다가  라면을 뚝딱 먹었다.시장했었던 것 같았다.
신세지는 것이 싫었던 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그만 둬!
할아버지가 내 친구이름을 대면서 짐짓 역정을 내셨다.

-종호학상 친구지?
-녜?
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시며
다음에 돈을 많이 벌면 그 때 라면값을 내라고 했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할아버지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셨다.

-내가 종호학상한테 자네 얘기를 들었지.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한다매?
매일 이 앞을 지나가는 자네 모습을 눈여겨 보았는데..
우리 아들 같애...
나도 자네같은 아들이 있었어...참 착한 애였지. 효자였어!

할아버지의 외아들이 법대 4학년이었는데
그만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한없는 인생의 무상과 허탈함이 소용돌이 쳤지만
그런 마음 역시 살다보니 보잘 것 없는 감상이었다는
아리송한 얘기였다.

그 때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었고
내 스스로 고생을 한다거나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조금 짜증나기도 했었다.
또한(누구나 환경이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다하는 것 아닐까?
가급적 신세는 지지 말아야지)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야,임마!
너 캐빈에 갔었다매?
평소 캐빈에 갈 시간이 없다고 버텼던 나를 비웃듯이
친구 종호가  킥킥대며 말을 붙여왔다.

-할아버지가 너같은 놈 처음 봤다카더라.
세상은 서로 신세지기도 하고 서로 베풀기도 하며 살아가야
세상사는 재미가 있는 벱이라고  꼭 전하라더라.

그래서 그랬다기보다는
그 이후로 가끔 캐빈에 들려서 라면도 먹고.
이런 저런 얘기도 들었었다.

라면집 캐빈의  특징은 이러했다.
카운터에는 구태어 돈받는 사람이 없었다.
수북히 잔돈만 채워놓고는 손님들이
-손님이라야 대부분 학생이었다-
스스로 알아서 계산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알아서 거스름을 거슬러가기도 했다.

-손님이 라면을 먹고 그냥가면 어떻게 해요?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하얗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할 수 없지,뭐! 오죽하면 그냥가겠나....
그래도 여직 장사를 하면서 밑진 적은 없어!
밑지다니...한 15년을 이곳에서 장사를 했는데...

언젠가는 불쑥 중년의 아줌마가 어린  꼬마를
데리고 들어와서는
<여기가 엄마 처녀시절에 라면을 먹던 곳이다>하며 
자랑스럽게 같이 라면을 시켜 먹기도 한걸...
바로 저 탁자야!

할아버지가 가르키는 곳에는 아주 오래 된 듯한
나무 탁자가 두개 있었다.


-처음 라면가게를 냈을 때 쓰던 두개의 탁자지.
지금은 몇 갠가...?
여나무개는 될걸.

어떨 때는 불쑥 말쑥한 신사분이 찾아와서는
(영감님, 죄송합니다. 옛날에 제가 철이 없어
번번히 라면을 먹고는 몰래 나갔거든요) 하며
(이제사 철이 들어 그 외상값을 갚으러 왔다)며
돈을 내놓기도 하지...
하하하!

 
그게 다 인생을 사는 재미지...
자네도 그것을 빨리 깨달아야 해!
착하기만 하다는 건 자랑이 아니야,
성실하다고하는 것이 다 자랑은 아니야...

사람은 모두 어우러져 울고 웃으며 살아야 하는 벱여!
그래서 저 나무탁자 두개는 아무리 낡아도 없애지 않는거야.
또 누가 아남?  어떤 추억을 가진 분이 와서
저 탁자에 앉게 될 지....

기가 막힌 철학이었다.
그 인생철학이 곧장 내 호떡가게에도
적용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 간이 포장마차 호떡집은 인근 학생들에 의해
금방 유명해졌다.
더 달라면 더주는 집으로,
없으면 돈을 안내는 집으로...

뜻밖에 호떡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기가막힌 마켓팅 전략이기도 했다.


비로소 밝히지만
나는 덕분에 무사히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졸업을 무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익명의 독지가>가 준
장학금이었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아마 익명의 독지가는 캐빈할아버지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할아버지는 극구 부인을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라면집 캐빈의 벽에 써있던
몇장의 글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던 자리의 흔적은 늘 아름답다.

@ 내일은 주님의 것. 나는 오늘을 소중히 한다.

@ 주님이 지배하시는 세상 일을 걱정하지 말라.
   안되는 일은 안되는 일이니 괜한 걱정을 하지말고
   되는 일은 되는 일이니 미리 걱정을 하지말라.

@ 주님주신 재능을 자랑하지말라.
   재능을 고이 접어 후배에게 전하라.

대충 그런 얘기들이었다.
장학금을 받을 때 써낸 각서의 내용이
그 작은 벽보의 내용과  비슷했었다.

<받은 것을 소중히 하여 반드시 후배에게 갚는다>
라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포장마차 호떡집을 졸업과 동시에
신나는 마음으로 후배에게 물려줬음은 말 할 것 없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캐빈할아버지와는
왕래가 뜸해졌었는데
지방 발령이 끝나고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학교앞 캐빈을  찾았을 때
학교 앞은 아주 커다란 도로가 생겨나 있었다.

라면집 캐빈이 서있었던 곳은 도로 한복판이 되었고
베레모를 늘 쓰고 계셨던 할아버지의 멋진 모습은
두번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길을 가다가 문득문득 할아버지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길 위에 떠 올라 혼자 미소를 짓기도 했다.
마치 깊은 산속의 옹달샘같았던 할아버지셨고...
우리 시대의 진실한 어른이셨음을 후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그 소소하지만 아름다웠던 기억은 가뭇가뭇 사라지려고 한다.
그러나 늘 말없이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었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나만의 추억이 아닐 것이다.

내가 다시 장사를 하게되면 <캐빈>같은
그런 라면집을 낼 것이다.

무슨 일이든 받아주는...

누구든 와서 울거나 웃거나 하는...

무슨 나쁜일을 해도 도닥거려주는...

그래서 속이 하늘처럼 탁 터져서 나갈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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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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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은 요크셔테리아인 사쿠라입니다.
모모코라는 주인과 함께 살고 있는 사쿠라.
남자한테 항상차이는 실연의 달인인 모모코를 위로하는 사쿠라.
 

-그러던 어느날, 팻팅이라는 곳을 가게되요. 강아지 동호회, 뭐 그런곳 같네요.
거기서 모모코는 한남자를 알게되고, 그남자가 키우는 '로즈'라는 강아지도 만나게 됩니다.
강아지들이 다 탈을 쓴사람이네요 ;;;;
 

-모모코와 또 남자 코타로.. 둘은 같이 살게 되고,
그러다 현관문을 였었는데, 쪽지가 있네요.  개짓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그러던 도중 관리인이 찾아오고, 이 건물은 강아지 두마릴 키울수 없다 합니다.
캡쳐는 안됬지만 로즈가 나와서 뭐라뭐라 하면서 한마리만 있다고 관리인에게
말하는 도중 사쿠라의 방울 소리가 울려서 시선이 사쿠라에게... 그대로 발각됩니다.
 

-분양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결국 버려지는 사쿠라...
 

-그렇게 밤이 되고 '쿠로' 라는 강아지 손에 이끌려
다른 버려진 강아지들의 아지트(?)로 가게된 사쿠라.
 

-배고파하는 사쿠라는 보고 쿠로는 먹을 것좀 가져오라고 시켰더니,
자신이 먹어본적 없는 음식을 가져다주고,
사쿠라는 못먹겠다 하는데, 어떤 한 강아지도 자존심을 부리다 결국 죽어 나가는걸 보고
결국 살기 위해 먹기 시작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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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소설 속 최고의 오프닝을 뽑는 시상식 같은 게 있다면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이동윤 옮김, 북스피어 펴냄)도 당당히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소설의 어조는 때로 영국적 블랙 유머를 발휘하는 듯 빈정대지만, 대체적으로는 르포라이터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재구성한 다음 보고서를 쓰듯 냉담하다.

트루먼 카포티의 논픽션 소설 <인 콜드 블러드>(박현주 옮김, 시공사 펴냄)와 비견할 만큼. 대신 카포티는 모든 문장이 '나의 문장'임을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개성을 드러냈지만, 루스 렌들은 철저한 익명성 뒤에 모습을 감춘다. 아주 가끔 "왜 전화를 걸지 않지요, 재클린? 당장 그 전화번호로 다이얼을 돌려요" 하는 식으로, 커버데일 가족의 가볍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간단히 지적하는 데에만 그칠 뿐이다.

이 전지적 시점의 능수능란한 치고 빠지기는 상당히 오싹한 체험이다. 유니스 파치먼과 조앤 스미스라는 두 기이한 인물의 심리를 헤아리는 데만도 쉽지 않은데, 그 와중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엄숙하게, 때로 조롱하듯 그러나 결코 나는 여기에 책임 없다는 오만한 태도로 기술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결국 이 모든 것은 지나갔으며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사후의 전언처럼 심란하다.

유니스 파치먼은 마흔일곱 살이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글도 깨우치기 전에 시골로 피신해야 했다. 런던에 돌아왔을 때 다른 아이들은 이미 진도를 저만큼 앞서 있었다. 그녀는 시종일관 어리둥절한 상태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결국 글을 배우겠다는 욕망을 스스로 거세해 버렸다.

대신, "읽거나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는 각종 속임수와 수완을 깨우치게 되었다." 뛰어난 기억력, 특히 보고 듣는 것을 완벽하게 암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며 유니스의 일상은 힘들지 않게 흘러갔다. 그녀는 손재간이 좋았다. 청소, 장보기, 요리, 바느질 등에 뛰어났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수치스런 비밀만 외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면, 유니스는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유니스가 커버데일 가의 저택 로필드 홀에 하녀로 취직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문명의 초석이다. 문맹은 기형으로 취급된다. 육체적으로 기형인 사람들을 겨냥하던 조롱의 방향이 문맹인 사람들 쪽으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만일 문맹자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살아가려 한다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이 나쁜 사람들의 나라에서 장님이 배척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처럼. 유니스를 고용해서 그녀를 아홉 달 동안 집에 둔 사람들이 유별나게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는 사실은 유니스에게나 그들에게나 불운이었다."

커버데일 가족은 유난히 책을 많이 읽었다. 유니스는 로필드 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책의 양에 압도당한다. 거실의 벽 한 쪽 전체가 책장이고, 응접실에도 커다란 붙박이 책장 2개가 있으며, 탁자 옆, 선반, 식탁 위에도 책이 널려있다.

"유니스는 그들이 자신을 도발하려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심지어 학교 선생들조차 재미로 그렇게 책을 많이 읽을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 발렌타인데이에 하녀 유니스 파치먼과 그녀의 친구 조앤 스미스가 커버데일 가족을 모조리 총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유니스의 문맹은 큰 역할을 담당한다. 루스 렌델은 노골적으로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심리학자들이 애정이라고 부르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그녀의 기질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고 누설한다.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김재혁 옮김, 이레 펴냄)와 스티븐 달드리의 동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나치 수용소 간부 한나가 자신의 문맹을 감추기 위해 홀로 투쟁을 해온 과거가 밝혀지는 순간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아이히만을 두고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라며 "상상력의 결여",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로 인해 악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한 사실과 겹쳐진다.

하지만 루스 렌들이 그토록 당연하다는 듯 이곳저곳에 "유니스가 문맹이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라고 떠들어대는 문장을 삽입한 것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려는 정직한 의도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외부에 대한 호기심과 쌍둥이처럼 붙어있고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입문인 것은 틀림없다.

"
유니스의 어휘는 굉장히 빈약했다. 그녀는 상투적인 문구를 반복하거나, 자신의 어머니나 길 아래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 샘슨 부인이 하는 말을 따라 할 뿐이었다." 어휘가 빈약해지고 삶이 진부해지고 언제나 모방과 반복에만 그치는 일상. 그런데 유니스는 정말 쓸모없는 존재인가? 괴물인가? <활자 잔혹극>을 읽어나갈수록 그 점에 대해 조금씩 판단력이 흐려진다.

먼저 루스 렌들은 문자의 과도함을 유니스의 절대적인 결여와 대립시킨다. 커버데일 가가 문자를 통해 향유하는 고급 문화의 중심부는 기실 텅 비어있다. 조지와 재클린 커버데일 부부는 서로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 위해 찰스 디킨스,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조지 엘리엇을 함께 읽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한 아들 자일즈는 <바가바드기타>, <우파니샤드> 등을 읽으며 결코 실행할 의지조차 없는 불가능한 연애의 몽상 속에서만 만족한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딸 멜린다는 시험과 과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전에 코를 박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한가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일상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어있기 때문이다. 커버데일 부부는 하녀를 부릴 수 있고, 아들딸들은 자신들을 최상위 1퍼센트쯤으로 여기며 더없이 소중하게 대하는 부모 덕분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취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재클린은 "난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헛된 상상을 해요. 멋진 저택의 가사를 기꺼이 맡아 주려는, 적당히 교육받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자일즈는 조지 고든 바이런이나 에드거 앨런 포, 인도의 종교 수행자나 카톨릭 신부가 되는 망상에 잠겨있다. 멜린다는 옥스퍼드 대학 근처 극빈자 구제 기관 상점에서 1920년대 빈티지 제품을 구입하며 특별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려 하고, 부모의 경제력에 안온하게 의존하면서도 "아빤 비민주적인 파시스트야"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구세대와 단절하는 혁명가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이를테면 멜린다가 유니스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순간, 유니스를 불쌍하게 여기고 도움을 자청할 때조차 자신이 하층 계급과 완벽한 교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있을 뿐이다. 유니스가 "추잡한 매춘부, 귀찮은 년 같으니"라고 차분하게 대답할 때 멜린다의 자족적인 세계는 산산조각난다.

두 번째의 과도함은 유니스의 친구 조앤 스미스로부터 온다. 조앤은 도둑질과 거짓말과 매춘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지금은 '하느님의 강림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전도와 회합에 열중하고 있다. 그녀의 취미는 우편물에 김을 쏘여 열어본 다음 마을 사람들의 사적인 비밀을 낱낱이 알아내는 것이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 중 누가 죄인인지 알아내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 그녀는 사람들이 죄인이기를 바랐다. 죄인들이 없으면 그녀는 현자가 될 수 없었으니까."

조앤은 마을 사람들에게 창녀였던 과거를 떠벌리고 다니며 상대방이 놀라움과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즐겼다. "그녀는 언제나 극적인 면을 좋아했고,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충격을 안겨 주는 행위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늙어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여학생들이나 입을 법한 짧은 치마에 긴 양말을 신고 천박한 화장으로 얼굴을 뒤덮고 소란스런 제스처로 가장했다.

심지어 성적인 만족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남자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맡겼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젊음과 아름다움과 부를 전부 보유한 재클린 커버데일을 증오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한, 문자-편지를 훔쳐볼 수 있는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재클린을 파멸시킬 계획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 과도함에 대립되는 유니스의 결여는 어떤 식으로 보충되는가. 유니스는 방 안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을 본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는 <로스앤젤레스 경찰 이야기>. 추격전과 총격전, 욕설과 살인으로 점철된 프로그램이다. 루스 렌델은 여기서도 "유니스가 텔레비전에서 처음으로 본 프로그램은 폭력과 총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 영상과 앞으로 보게 될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그녀의 잠재적 폭력성을 자극하여 공격성을 촉발시켰을까?" 하는 노골적인 참견을 한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글자를 모르는 유니스가 폭력적인 이미지에 감염되었다'는 결론은 너무 손쉬워 보인다. 유니스는 주로 스포츠 중계, "레인보 거리에서 익히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연속극", 경찰 드라마를 좋아했다. "뉴스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날씨가 어떨지는 직접 살펴보면 될 터였다."

차라리 텔레비전이 그녀에게 책의 역할, 혹은 스스로에게 금지했던 타인의 일상으로 연결시켜주는 통로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고장이 난 텔레비전 앞에서 당황하는 유니스를 표현하는 무심한 문장, "화면은 여전히 텅 빈 채였고, 차라리 거울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지경이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유니스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텔레비전이 마치 '더 나은' 상태의 자신인 양 거울을 들여다보듯 매혹된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거울, 유니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미지다.

소설의 끝부분, 그녀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과 마주하는 순간 기절하는 장면은 텔레비전 앞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미지에 정신없이 몰두하는 모습과 기이한 대구를 이룬다.

소설의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딕 스케일즈와 마리아 스케일즈는 또 다른 유니스다. 이탈리아 이민자 마리아는 검역을 받지 않은 동물을 외국에서 들여와서는 안 된다는 법을 피해 강아지를 바구니에 넣고 입국했다. 하지만 딕이 강아지에게 물렸는데도 병원을 가지 못하고 끙끙 앓으면서 이들은 이상한 우연으로 유니스의 살인 사건과 연결된다.

영국 법망을 피해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이민자들이 뜻하지 않게 강아지의 정체가 들통 나서 쫓겨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문맹자 유니스가 문자의 지배하에 펼쳐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든다. 순종적인 하녀를 원했던 커버데일 부부는 유니스의 일솜씨에 만족했다.

일을 어렵게 만든 것은 유니스가 일만 하는 기계이기를 원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순간에는 상냥하게 기분을 맞춰주는 인간이길 원하는 그들의 욕심 때문이다. "(커버데일 가족은)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고 상대방도 자신의 눈높이로 끌어올리려는 자만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커버데일 가족과 유니스는 평화로운 공존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니스는 분명 괴물이다. 하지만 그 괴물의 봉인을 풀어버린 것은 문명인들이다. 조지 커버데일이 사냥한 꿩을 요리할 때, 유니스가 먹으려던 가슴살에는 "둥글고 작은 총알 세 개"가 들어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독극물을 유니스에게 주입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니스가 조앤과 함께 가족을 몰살시키기 전, 이미 멜린다의 참견에 짜증이 날대로 난 유니스의 상상은 의미심장하다. "그런 짓을 하면 커버데일 가족이 어떻게 나올 것이며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행동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 즉 혓바닥이 말을 멈추고 피가 솟아나와 저 하얀 목덜미를 물들이는 모습을 상상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유니스가 원했던 것은 참견하고 재단하는 혓바닥을 없애는 일, 그게 전부였다. 훼손된 시신들이 살인범의 심리를 증명하는 텍스트라고 할 때, 유니스가 처음으로 살인의 충동을 느낄 때 주목하는 부위는 입이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실제로 살인을 실행에 옮길 때 유니스는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남편을 찾으며 울부짖는 목소리는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다가 비꼬는 듯한 겉치레 인사를 건네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알 수 없는 어떤 작용에 의해, 유니스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활자로 바뀌어 버렸다. 그들은 책꽂이에 꽂혀있는 존재이자, 흰 종이 위에 군데군데 박힌 검은 존재였다. 유니스가 증오했던 동시에 갈망해 마지않았던, 그녀의 영원한 적."

이 부분은 <활자 잔혹극>이 느슨하게 기반을 두고 있는 '파팽 자매 살인 사건'을 연상시킨다. 레이첼 에드워즈와 키스 리더의 <잔혹과 매혹 : 20세기 프랑스 지성을 사로잡은 자매 살인자와 끝나지 않는 텍스트의 변주>(이경현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 따르면, 1933년 프랑스 르 망 시에서 하녀 크리스틴과 레아 파팽 자매는 주인 랑슬랭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랑슬랭 모녀는 망치로 난타당하고 칼로 다리와 허벅지가 도려내어졌으며, 맨손으로 눈알이 뽑혔다. 파팽 자매는 희생자들이 죽어가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지만 실제로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동생 레아 파팽은 "나는 귀가 먹었고 말도 못해요"라고,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은유를 사용했다.

"자매와 그들의 고용주들 사이에 언어적 소통은 거의 없었다. 랑슬랭 부인은 그런 식의 가내 위계가 필수적이라고 믿었으며, 랑슬랭 씨와 주느비에브는 크리스틴과 레아에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특히 문화적 간극은, 지나가는 농담으로라도 소통하거나 의미 있는 대화를 생산해 내기에는 너무나 깊었다."

주인과 하녀 사이의 말의 부재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초기 논문 <편집증적 정신질환과 성격의 관련성>에서 이렇게 썼다.

"다른 집안이 부러워한 모범적인 하녀들이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하녀들이었다고 한다. 주인들이 이상하리만큼 인간적 호의를 결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고 해서, 하녀들의 고고한 초연함이 단순한 대응이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녀와 주인, 어느 쪽도 '서로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침묵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파팽 자매 사건에는 어머니와의 관계, 계급 간의 갈등, 동성애적 측면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파팽 자매는 랑슬랭 모녀가 이들에게 가한 언어적, 성적 억압을 살인 행위에 내포시킴으로써 세상을 향해 발언했다. <잔혹과 매혹>의 문장을 빌려오자면, "(파팽 자매가) 한 일이 일종의 행동화였음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표현(ex-pression),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을 어떤 것 또는 어떤 것들을 '외부로 밀어내기'였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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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의 유니스도 커버데일 가족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지배하고 겁먹게 했던 목소리와 언어에 굴복당하지 않는다. 유니스는 살인으로부터 엄청난 해방감을 느낀다. 남이 이미 했던 말을 흉내내는 삶을 살았던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온전한 발화를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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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을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잔혹과 매혹> 그리고 <활자 잔혹극>을 영화로 옮긴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 혹은 파팽 자매 사건에 불멸의 명성을 안겨다 준 일등 공신인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오세곤 옮김, 예니 펴냄)을 곁들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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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11-12-04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전작 단 한편만 읽어봤는데, 이 책 무척 궁금하더라구요. 리스트에 담겨 있는데 곧 꺼내줘야겠군요. ^^

후애(厚愛) 2011-12-05 08:06   좋아요 0 | URL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