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추 엄마의 눈물


곱추였던 여자와 곱추였던 남자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부부는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혹시나 부모의 유전을 받아
꼽추가 되지 않을는지...

그러나 부부의 걱정과는 달리
무척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곱추 엄마는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살폈고,
착한 아이도 엄마를 잘 따르며...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이제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게 된 엄마는
다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철이 들어감에 따라 엄마를 외면할까봐...
그런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엄마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한 번도 학교에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도시락을 놓고
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고민하기 시작했죠.

이 도시락을 학교로 갖다 주는 게 나은지...
도시락을 갖다 주면 아이가
무척 창피해 할 텐데...
그렇다고 갖다 주지 않으면
점심을 굶게 되는데...
이런저런 고민 끝에 학교에
살짝 갖다 주기로 했습니다.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이 볼까봐 몰래...
수업시간 중에 학교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아이의 학교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 엄마였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웬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습니다.
어느 반의 체육시간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저쪽 나무 밑에서
엄마의 아이가 보였습니다.
아이의 반의 체육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순간 당황했고
학교를 급히 빠져나가려했습니다.

아이가 볼까봐서...
친구들이 볼까봐서...

서러운 맘을 감추지 못하고
힘든 몸을 이끈 채 조심조심 뛰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이가 엄마를 발견했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엄마는 놀라며 더욱 빠른 발걸음으로
교문을 빠져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쪽 나무 밑에서...
아이가 교문 쪽을 바라보며
손으로 입을 모으고 소리쳤습니다.

엄마!!!

꼽추 엄마의 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쥐가 나서 수영은 커녕 . . .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웠습니다.

어느 덧 13살이 된 시골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습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싶어,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 명이나 있어서 집안 일을 도와야 해”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 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졸라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그 시골 소년은 런던의 의과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 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 의학상을 받는

“알렉산드 플레밍”입니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은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
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 플레밍”

이 만든 ‘페니실린’

이급송되어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굳게 지킨

“윈스턴 처어칠”입니다.

어릴 때 우연한 기회로 맺은 우정이 평생동안 계속 되면서 이들의 삶에 빛과 생명을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이의 마음속에 새로운세계를 열어 줄 수 있다면 그에게 있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후일 영국 수상이 된 부유한 귀족의 아들

“윈스턴 처어칠”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무시했더라면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어 ‘페니실린’을

만들 수 없었을 테고 처어칠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귀족 소년과 시골 소년의 깊은 우정 농부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

노벨의학상을 받을 수 있었고 귀족 소년은 전쟁 중에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킨 수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보다 지위(계급)가 낮은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학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하대하기 쉽습니다.  

이는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업신여기거나 깔보면 안됩니다.

위의 귀족 소년과 시골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처럼,

무슨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자기 보다 못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을 베풀 때 서로에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
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갖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편지 전문, 현대어로 표기)


1998년, 택지 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

주인 모를 무덤 한 기의 이장(移葬) 작업이 있었다.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外棺)은 갓 베어 놓은 듯 나뭇결이 살아 있어

혹시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 아닌가 추측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야간까지 이어진 유물 수습 과정에서 무덤은 수백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물을 절반쯤 수습했을 무렵 망자의 가슴에 덮인 한지(韓紙)를

조심스레 벗겨서 돌려 보니 한글로 쓴 편지가 있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는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전하며 심금을 울렸던 이 편지는

남편의 장례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씌어진 죽은 남편에게 그 아내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내는 지아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하고픈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종이가 다하자 모서리를 돌려 써내려 갔다.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아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적어 나갔다.


이 편지 외에도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유물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겉을 싸고 있던 한지를 찬찬히 벗겨 내자 미투리의 몸체가 드러났다.


조선시대에는 관 속에 신발을 따로 넣는 경우가 드문데다 미투리를

삼은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져 이 미투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검사 결과 미투리의 재료는 머리카락으로 확인되었다.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았는지 그 까닭은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

에서 밝혀졌다. 한지는 많이 훼손되어 글을 드문드문 읽을 수 있었다.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그리고 끝에는 "이 신 신어 보지..........(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내용들이 얼핏얼핏 보였다.


편지를 쓸 당시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이 미투리를 신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풀어 미투리를 삼았던 것이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이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은 것이다.


유물 중엔 아내의 편지 외에도 2편의 시와 11통의 서신이 있었다.

이 편지들 가운데 9통은 망자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것으로,

모두 묻힌 이가 죽기 1년 전에 쓴 것들이었다.


한문 초서로 흘려 쓴 이 편지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발견 되었다.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子應台寄書)에서 피장자의 이름이

응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31년 아우와 함께했다"는 형의 글에서 뭍힌 이가 서른한 살에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물에서 확인한 단서를 정리하면 묻힌 이는

고성(固城) 李氏 가문의 응태라는 남자였고 그에겐 형이 있었으며

서른한 살(1586년)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아내는 남편을 자내(자네)라고 부르기까지한다.

"자내다려 내 닐오되(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자내 몬저 가시난고(당신 먼저 가시나요).......". 등


이응태의 처는 남편을 가리켜 "자내"라는 말을 모두 14번 사용했다.

요즘 부부라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문데 어떻게 자내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을까?


순천 김씨의 간찰(簡札)에서 아내가 남편을 그 사람이란 의미의 3인칭으로

지칭한 예는 있어도 이 시기에 씌어진 글에서 아내가 남편을 대놓고

"자내"라고 부르는 경우는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응태 처의 편지는 임진왜란 전까지 부부가 모두 자내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기본적으로 이런 "하소체"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응태 아내의 편지는 그들이 살던 시대에 남녀가 대등한 관계였음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400년 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의 육신은 비록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들의 영혼은

지난 세월 동안에도 줄곧 함께였다.


죽음조차 갈라 놓을 수 없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 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남편의 가슴에 고이 품어 묻어둔 마지막 편지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보, 오늘 저녁에는 누룽지도 끓이지
남편의 말을 들으며, 눌려놓은 밥에 물을 부으려는데
문득 십 년도 넘게 지난 옛일이 떠올랐습니다.
집이 시골이었던 저는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자취를 했습니다.

월말 쯤, 집에서 보내 준 돈이 떨어지면,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하곤 했어요. 그러다 지겨우면,
학교 앞 밥할매집에서 밥을 사 먹었죠. 밥할매집에는
언제나 시커먼 가마솥에 누룽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오늘도 밥을 태워 누룽지가 많네.
배가 안 차면 실컷 퍼다 먹거래이. 이 놈의 밥은 왜 이리도 타누."

저는 늘 친구와 밥 한 공기를 달랑 시켜놓고,  
누룽지 두 그릇을 거뜬히 비웠어요



  그런데, 하루는 깜짝 놀랐습니다. 할머니가 너무 늙으신
탓인지, 거스름돈을 원래 드린 돈보다 더 많이 내 주시는 거였어요.

'돈도 없는데 잘 됐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눈감고 넘어
가는 거야. 할머니는 나보다 돈이 많으니까...'

그렇게 한 번 두 번을 미루고, 할머니의 서툰 셈이 계속
되자 저 역시 당연한 것처럼 주머니에 잔돈을 받아넣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밥할매 집엔 셔터가 내려졌고,
내려진 셔터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어요.
며칠 후 조회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단상에 오르시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모두 눈 감어라. 학교 앞 밥할매 집에서 음식 먹고,
거스름돈 잘못 받은 사람 손 들어라.“

순간 나는 뜨끔했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 부스럭거리며 손을 들었습니다.

많기도 많다. 반이 훨씬 넘네.“  

선생님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죠.  

밥할매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 아들에게 남기신 유언장에 의하면
할머니 전 재산을 학교 장학금에 쓰시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셨어요.
그 아들한테 들은 얘긴데, 거스름돈은 자취를 하거나
돈이 없어 보이는 학생들에게 일부러 더 주셨다더라.
그리고... 새벽부터 일어나 그날 끓일 누룽지를 위해
밥을 일부러 태우셨다는구나.
그래야 애들이 마음 편히 먹는다고..."

그날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유난히
'밥할매 집'이라는 간판이 크게 들어왔어요.
나는 굳게 닫힌 셔터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할머니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할머니가 만드신 누룽지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내와 나는 20년 동안 가게를 하면서 참 많은 손님을 만났다.  

그 가운데 특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은 손님이 한 분 있다.

  얼마 전 저녁 무렵에 사십 대로 보이는 남자 손님이 가게로 들어왔다. 아내는 얼른  

"어서 오세요"하고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손님은 남성용 물건 대신 여자 지갑이 진열된 곳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따로 보아 둔 지갑이 있는지 아내에게 지갑의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다행히 손님이 원하던 것과 비슷한 물건이 있어 손님은 그것을 사기로 결정했다.

지갑 값을 치른 다음 손님은 만 원 짜리를 한참 세더니 방금 구입한 지갑 안에 그 돈을 넣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부인에게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갑을 하나 샀으니 지금 시장 입구로 나와요."

아내는 "지갑만 사 드려도 좋아할 텐데 돈까지 그렇게 많이 넣어 주세요? 부인 생일이신가 봐요"  

하면서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손님은 "아니에요. 우리 집사람이 지갑을 잃어버리고 집에 와서 너무 우울해하기에 위로해 주려고요.  

잃어버린 것과 같은 지갑에 잃어 버린 만큼의 돈을 넣었으니 그 일 깨끗이 잊고 힘내라고요" 하면 빙긋 웃었다.

잡시 뒤 손님은 곱게 포장된 지갑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가게 문을 나섰다.

아내는 그 손님이 나간 문 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나 또한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감동이 밀려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라면 어땠을까? 지갑을 사 주기는 커녕 지갑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해 빠뜨리고 다닌다며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겠지…. 그 뒤 나는 누군가 실수를 하면 그때 그 손님을 떠올린다.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마음,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