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갖춰진 모습으로, 예의 그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풍기며 나타나주었다. 어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짓누를 수 있다는 걸 현진은 그날 알게 되었다. - P18
윤미는 마음이 자꾸만 차가워졌다. 잃어버린 돈이 아깝다는 마음보다, 오한처럼 다가오는 원망이라는 감정 때문에 자꾸만 몸서리가 쳐졌다. - P29
자기 자신이 초라해질수록 말을 함부로 하고 노망을 가장한다고 이해했다. 할머니는 천부적으로 연극적 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리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태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어디까지가 위악이고 어디까지가 노망인지 알 수 없어졌다. - P39
소설을 쓸수록 소설은 삶을 닮을 수밖에 없고, 삶은 소설보다더 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쓰는 일은 앞으로도어렵고 복잡하고 어색하리라. 각오는 하고 있다. - P44
상처에도 약간의 메이크업은 필요한 법이니까. - P59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 P65
살면서 나를 고통스럽게 통과해간 일에 대해 쓰려다가 무참히실패한 습작 몇 편을 가지고 있다. 그처럼 거듭된 실패 끝에 난파하듯 도달한 장소가 아마도 이 소설일 것이다. 돌풍에 휩쓸린 새가 창문에 몸을 부딪히듯,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 P84
상처를 발화하는 건 얼마간 수치를 감당하는 일이다. 제때 처치하지 못해 괴사한 피부나 병으로 도려낸 가슴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수치를 겪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필사적으로 저항해왔다는걸 이제 알겠다. 세간에 떠도는 치유와 극복의 서사에 수동적으로 편입되느니 차라리 나만의 절망으로 고꾸라져 내파破되기를바랐다는 것도. - P85
즉 이 소설은 ‘아픔을 팔아넘기는 것‘과 ‘아픔 속에서 생존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방향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쓰였고, 그 길을 보여주기 위해 트라우마의 정원에서 이토록 세련되게 뒹군다.
- P88
"그런데 있잖아. 왜 그런 상황들을 하나하나 가정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게 이제 너무 피곤해."
- P118
아뇨. 무겁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상처일 테니까요...... 그 일이. 미지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일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도 있었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 P170
해답을 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썼으나 쓰고 보니 미답으로남았다. 그러나 구겨지고 찢어지면서도 계속되는 {무엇}은 분명 유의미하다고 믿는다. 그 일그러진 괄호는 우리가 질문을 놓지 못하도록 부추기는 단초가 될 테니.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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