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향적이라는 말을 종종 듣고, 나 스스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왔는데, 때로 완전히 반대로 내가 굉장히 내향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대화 중에 우연히 내가 좀 낯가리잖아 혹은 내가 수줍어서 말을 먼저 잘 못거는데 같은 말을 흘리면, 친구들은 웃기시네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내가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잘 모르는데,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에 보면 내향성을 판단하는 설문지가 나와있다. 이 질문지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들에게 외향적으로 비치는 내 성격에서 내향성의 점수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그게 내 참모습인데 속이고 살려니 피곤한 듯하다.


1. 나는 단체 활동보다는 일대일 대화가 좋다.

2. 나는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게 좋을 때가 많다.

3. 나는 혼자 있는 게 좋다.

4. 나는 동년배들보다 부나 명예나 지위에 덜 신경 쓰는 것 같다.

5. 나는 잡담은 싫어하지만 내게 중요한 문제를 깊이 논의하는 것은 좋아한다.

6. 사람들이 나더러 “잘 들어준다”고 말한다.

7. 나는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8. 나는 방해받지 않고 깊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즐긴다.

9. 나는 생일에 친한 친구 한두 명이나 가족과 소박하게 지내는 게 좋다.

10. 사람들이 나더러 “상냥하다 거나 “온화하다”고 한다.

11.나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사람들에게 내 작업을 보여주거나 그것을 논의하지 않

12. 나는 갈등을 싫어한다.

13. 나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일한다.

14. 나는 먼저 생각하고 말하는 편이다.

15. 나는 밖에 나가 돌아다니고 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라도 기운이 빠진다.

16. 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게 내버려둘 때가 종종 있다.

17. 꼭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일정이 꽉 찬 주말보다는 전혀 할 일이 없는 주말을 선택하겠다.

18.나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19. 나는 쉽게 집중할 수 있다.

20. 수업을 들을 때는 토론식 세미나보다는 강의가 좋다.


이 20개 문항중에서 14, 19, 20을 빼놓고는 대부분이 해당된다. 결국 나의 내향성은 나의 내향성 속으로 깊이 감출 수밖에 없고 외향성의 외피를 쓰고 계속 살아가고 있지만, 내 방을 처음 가졌을 때, 대가족으로 북적대던 ‘안방’에서 빠져나와 나 홀로 가질 수 있는 깊은 밤의 시간들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회상하면 나의 내향적 내향성은 나만 알고 있는 깊은 내면 속에 숨겨져 있던 것 같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향성의 이면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성격이든, 능력이든, 신체 사이즈이든, 뇌의 활동 부분이든 어떤 표준 속에 여러가지의 멀티속성을 한꺼번에 다 구겨넣고 그것을 표현하면 개인이 가진 고유성 그러니까 여러가지 속성들의 들쑥날쑥함은 사라지고당 단어 혹은 범주보다 낮거나 높거나 하는 단순한 비교만 남는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이 있다. 서두(와 1장)의 내용을 축약해 보았다.


공군 전투기의 잦은 사고로 조종석의 규격이 최근 전투병들의 신체 사이즈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가정을 했고, 조종석 설계상 가장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10개 항목의 신체 치수에 대해 평균값을 냈다. 이 평균값을 바탕으로 평균적 조종사를 각 평균값과의 편차가 30퍼센트 이내인 사람으로 넓게 잡았다.조종사 4천여명 가운데 10개 전 항목에서 평균치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10개 사이즈 중 3개 항목만을 골라서 평균치에 드는 조종사를 골라도 3.5퍼센트 미만이었다. 그들은 이미 전투조종사의 신체조건이라는 기준을 통과한 자들이었는데도 말이다. 평균적 조종사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이 대니얼스라는 한 젊은 장교가 밝혀낸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뷰로크라틱의 전형일 것같은 군에 그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받아들여져 평균치가 아닌 개개인에 맞춘 시스템으로 바뀐다.엔지니어들은 비용이 많이 들고 불가능하다고 꺼려했지만 군이 밀어붙이자 곧 해결책을 제시했다. 현재 모든 자동차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조절가능한 시트가 그렇게 탄생되었다.


노르마는 1만5천명의 젊은 성인 여성들에서 수집한 신체 치수 자료로 평균값을 내어 젊은 여성의 표준 체격을 만든 조각상이다(조각가 아브람 벨스키, 의사 로버트 L 디킨스). 이 완벽한 표준에 가장 부합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치열한 경쟁 끝에 막판 경쟁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우승자가 결정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참가자 3천8백여명 가운데 9개 항목 치수중 5개 항목에서 평균치에 든 참가자들이 40명도 채 되지 않았다.당시 대다수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미국 여성들이 건강하지 못하고 몸상태가 나쁘다고 결론내렸다. 미공군 대니얼스의 직관과 어긋난다.


평균이 쓸모가 있을 때도 있다. 두 집단간을 비교할 때다. 개개인에게 평균은 허상이며, 평균에 기반해서 비교당할 때 개인의 자신의 고유 가치를 잃게 된다는 게 저자가 서두에서 강조하는 말이다. GPA 평균(-D)에 의해 자신이 젊은 날의 한 때를 얼마나 낙오자로, 우울하게 지내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면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고등학교 중퇴 후 15년만에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저자는 어떤 추상적 철학을 발견하거나, 공부에 눈을 떠서가 아니며, 처음에는 직관에 의해 그 다음에는 의식적으로, 모든 인간은 다르며, 그 개개인의 원칙을 따라 삶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앞장에 소개된 뇌 활동 영역에 대한 내용인데, 우리가 무얼 하면 어떤 영역이 활성화되고 저걸 생각하면 또 어떤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뇌의 어떤 정해진 영역이 특정 기능을 한다는 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런 영역 역시 앞에서 본 것처럼 많은 데이터의 평균을 낸 것으로서, 같은 활동에 대해 뇌가 활성화되는 영역은 천지차이로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전적으로 외향적이거나 전적으로 내향적이지 않다. 평소에 말이 없고 타인과 거리를 두는 듯 해 보이는 사람도 끊임없이 사람과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사회적 활동을 찾는 것을 보면 평균이라는 것은 어떤 단어로 뭉뜽그려 표현하는 수단이될 뿐 다양성이 가진 개별 인간의 특징을 절대로 표현해주지 못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내향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만나고 말하고 듣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향성의 측면을 남들이 못보는 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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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9-02-18 12:19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평균이라는 허수가 삶을 수치화해서 끊임없이 비교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어요
 


이런 깔끔하고 산뜻한 문체에 섬뜩하거나 잔인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강한 심리적 반전이라니. 계속 보고 읽고 알고 있던 주인공의 습관적 행위를, 이미 한 번의 반전으로 해피 엔딩의 결말을 맺나 하고 안심하고 나서야, 눈여겨 본다. 

처음 만남부터 남의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언젠가는 헤어져야 겠기에, 철저히 베일에 쌓인 남자이기에,  그가 남긴 모든 것, 커피에 넣어 마시고 남은 각설탕, 콘돔 껍데기 같은 잘잘한 흔적들마저도 소중하다.  그런 것까지 모은다니 우웩 소리가 나오려는 것까지 그가 남기고 간 것은 그렇게 서랍 깊숙히 은밀하게 보관된다.  

그렇게 읽었다. 이해할 수 있다. 남자는 근처 아파트 공사장에서 건축사로 일하는 데 그 공사가 끝나면 그들의 관계도 끝난다.아이가 둘 씩이나 있는 남의 남자를 안을 시간은 퇴근과 귀가 사이의 얇은 시간의 틈새 한시간 절도 뿐이다. 문체가 어찌나 간결하고 건조한지 도통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힌트도 주지 않지만 둘의 애정행각은 영화로 본 장면처럼 시각적으로 생생하다.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하다 못해 조금만 더 있어달라 투정부리지도 못하는 사랑. 그의 아내와 가족은 금기시된 주제다.   이별의 시간은 다가오고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의 흔적들을 다루는 그녀의 행위 만으로 그녀의 절절함이 전해질 것 같은데….끝이 다가오자 그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이별을 준비하는 것일까. 긴장했던 순간에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 그의 물건은 이제 더 소중하지 않다.  잠겨진 서랍 속에 새로운 물건이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이 두번째 반전은 첫번째 반전보다 더 충격적이다. 문체가 건조하지만, 묘하게 시적 반복성과 중독성이 있다.  뭐 대단한 상징이나 문학적 기법 같은 걸 찾을 필요 없이 소재 자체가 일상적 드라마에 머물러서 쉽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메디치상이 프랑스 문학상 중에서도 새롭고 독특한 실험적인 작품에 수여한다는데, 정말 새롭고 독특하다.1993년 수상작이다. 종이책이랑 전자책 모두 단행본으로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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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좋아한다.그런데 내 주변에는 가족이건 친구건 면요리 매니아가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주변에 면요리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잘도 먹으러 다닌다. 부럽다. 저자는 면요리를 먹기 위해 일부러 맛난 집을 찾아가 4인용 식탁에서 혼밥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그래도 부럽다. 그만큼 나도 국수 좋아하는데.


저자와는 약간 취향이 다른게 나는 탱글탱글한 면발의 식감을 국수 사랑의 제1요소로 사랑하는데 비해 저자는 뜨겁고 깊은 국물도 면식 수행의 중요한 요소로 본다. 면빨이 중요한 나는 너무 뜨건 국물이 식지도 않는 뚝배기에 나오는 국수류는 먹다 보면 불어져 그닥 좋아하지 않고 외국서 저렴한 중국 식당에서 먹던 볶음국수류를 좋아하는데 나라마다 그 이름이 다르더라. 라면도 국물을 좀 적게 해서 끓인 후 궁물을 버리거 면만 건져 접시에 담아 먹기도 한다. 아이가 지나빠 닮아서 국물까지 마실 때 빼앗아 미리 따라 버리곤 했다. 그 짠 궁물을 후루룩 후루룩 마셔대는 게 나트륨 섭취를 너무 높일 거 같아서였는데, 이렇게 궁물 좋아하는 사람이 쓴 국물 애호에 대한 설득력있는 잘 쓴 글을 읽으니 그게 좀 횡포있던 거 같기도 하다. 

목숨줄과도 같았던 직장과 집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어이없는 이유로 전업주부가 되어 뭐라도 써보려고 십여년 동안 무얼 했나 따져보니 잘 하는 거 전적으로 좋아하는 게 국수 밖에 없더란다. 이 책은 국수 맛집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인생에서 만난 국수와 얽힌 삶의 자취들이다. 잘 모르는 저자가 자기 얘기 줄줄 늘어놓는 책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게 아니라 자기 지식이나 자기경험의 자랑을 싫어하는 거지 이런 식의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또 울컥하기도 한 진솔한 자기 고백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글도 참 잘쓴다. 뭔가 대단한 사상이나 지식을 전달할 것도 아니고 창작적인 소설이나 시를 보여줄 것도 아니라면 이런 류의 에세이류의 글을 쓰려면 이 저자만큼의 글솜씨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말도 아니지만 같은 뜻의 말을 전하더라도 솔깃하고 공감가게 만드는 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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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9-02-16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수클럽 같은 거 만들면 좋겠네요 ㅎ
 














아작에서 코니 윌리스에게 덤벼러 내가 상대해주마 하고 올인하고 있는 듯하다. 쉴 새 없이 코니 윌리스의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방금 출간된 따끈따끈한 《올클리어1, 2》를 끝으로 아작에서 윌리스의 옥스포드 시간여행 시리즈를 드디어 완간했다. 열린책들에서 《개는 말할것도 없고 - 주교의 새 그루터기 실종사건》과 《둠즈데이 북》을 오래 전에 출간했지만, 절판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SF 출판의 구세주 아작출판사가 짜잔 하고 등장하면서 작년과 재작년에 절판된 책들을 재출간하고, 새로 번역하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SF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니 윌리스를 《여왕마저도》에 실린 단편들로 처음 접했었는데 처음 읽은 단편은 지구에서 외계인과의 조우를 블랙 코미디적으로 그려낸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All seated on the ground)》였다. 너무 수다스러워 서사를 파악하는데 산만한 문제로 내 타입은 아니라고 영영 멀어질 수도 있었지만 인연을 도와준 건 작년에 출간된 《개는 말할 것도 없고》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그 전에 읽은 제롬 K 제롬의 《자전거 탄 세 남자,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과 연결된다. 정말 책은 책을 부른다.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에서, 달에 가고 싶어하는 주인공 킵의 아빠가 늘상 읽고 있는 책이 《자전거 탄 세 남자》 다.  어린 딸이 아빠 나 달에 가고 싶어, 키득거리면서 책장을 책장을 넘기던 아빠는 무심히도 말한다. 가려무나. 킵의 아빠는 이 책을 자나 깨나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과연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자전거 탄 세 남자》는 빅토리아 시대 세 영국 남자가 템즈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 올라가는 여정을 다룬 슬랩스틱 코미디다. 하지만 당시 우주복=>자전거탄=>개는말할것도 로 이어지던 책의 여정은 개는에서 좌절되었었는데, 열린책들의 절판에 묶여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년 아작에서의 재출간 소식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시간여행이 실현된 어느 미래를 그린다. 그런데 시간여행이 실현된 후, 고대에서 온갖 보물을 가져오면 떼부자가 되겠거니 했던 투자가들이 어떤 물리학 법칙에 의해 물건을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시간여행은 개밥에 도토리가 된 상황이다. 그래서 시간여행은 대학에서 연구용으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어떤 부자가 자기 증증증증조 할머니 일기장에 써있는대로 대성당을 재건하겠다고 나서면서 연구원들을 들볶아 파괴되기 전의 상태를 파악하러 빅토리아 시대와 2차 대전 폭격 직후 등으로 시간여행을 다니며 생기는 일들을 그린 작품이다. 부제는 《신부의 새그루터기실종사건》으로, 이 '신부의 새 그루터기'라는 물건은 재건할 성당에 복제하기 위해 필요한 소품으로 일종의 매거핀 같은 역할을 한다. 코미디와 탐정을 시간여행이라는 판타지와 SF 쟝르 속에 아주 찰지게 빈틈없이 정교하게 버무려놓은 방대한 작품이다. 미세한 단서까지도 놓치지 말고 읽어야 해서, 여러 번 뒤로 돌아갔다가 앞으로 돌아왔다가 하면서 뒤적거려가며 읽어야 했다. 뒤로 돌아가서 읽을 수록 처음 읽을 때 단순 수다로 방치하고 놓친 더 많은 단서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시간을 넘실넘실 넘나들며 사건의 인과 관계와 미스터리를 파헤친다는 면에서 탐정적 성격이 짙지만, 시간여행물의 핵 로맨스 역시 놓치지 않는다. 사소한 사건과 수다에도 인과관계가 엮여 있고 모든 의문이 거의 해소된다. 유쾌하고 즐겁고 지적이고 방대한 소설이다. 
















알고 보니, 작년부터 아작에서 열심히 출간되는 코니 윌리스의 시간여행 장편들은 모두 이 작품의 시간여행 세계관을 공유한다. 편의상 옥스포드 시간여행 시리즈로 불린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에서 제롬K의  《자전거 탄 세 남자》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제롬 K의 주인공들을 보트들로 가득찬 템즈강에서 조우한다. 깜짝 출연인 셈이다. 코니 윌리스는 이 제롬K의  《자전거 탄 세 남자》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알게 해 준 로버트 A 하인라인에게 이 책의 헌사를 바쳤다. 와이 낫 제롬? 아마도 한참 전 세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것도 그렇고 작품 자체가 오마주이고 제목까지 부제를 끌어다 썼는데, 그보다 더한 헌사가 있을까. 

이 책은 코니 윌리스의 빅팬이 되기로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시에 아작에서는 이 책과 이미 출간된 《둠즈데이 북》과 《화재감시원》, 《블랙아웃》을 포함하여 이번에 새로 나온  《올클리어》를 끝으로 코니 윌리스의 시간여행 시리즈를 완간한 것이다.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는 SF 중에서 휴고와 네뷸러 로커스 등의 상을 안받은 작품을 찾는 게 더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작품은 이 세 개의 작품을 거의 대부분 수상하였고, 일부(내가 알기로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 《둠즈데이 북》 )는 세 개를 동시에 받았다. 


















이 중에서  《둠즈데이 북》은 가장 먼 곳으로의 시간 여행이다. 넷플릭스 역사 드라마를 즐겨보다가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영국 역사의 한 복판에서도 《둠즈데이 북》이라는 코니 윌리스의 옥스포드 시간 여행 시리즈 책 제목과 같은 제목의 문서를 만날  수 있었다.  모루아의 역사책에 따르면 정복왕 윌리엄은 개사기꾼이다.  《둠즈데이 북》은 윌리엄이 세금을 쥐어짜기 위해 만든 토지대장이었던 거다. 서자여서 애비없는 자식이란 별명을 가졌던 그는 그나마 노르만디의 공작이었던 아버지의 정실에게서 다른 자식이 없었던 덕에 뒤를 잇고 어린 나이에 공작이 된다. 후에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별명을 갖고 영국을 노르만왕조의 손아귀에 넣은 그는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바이킹스에서 라그나 로스브로크의 동생으로 질투와 배신의 화신으로 등장해 결국 형제와 종족들을 배반하고 노르망디를 차지한 롤로의 후손으로, 영국왕이 될 연결고리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왕은 선출제여서 어느 먼 친척이든 영주들만 잘 구워삶으면 왕이 될 수 있었던 모양으로, 영국 왕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에드워드 왕위의 강력 후계자 헤럴드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협박하여 모종의 서약을 맺게 했는데 영국왕이 되겠다는 윌리암의 계획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으나 이는 훗날 해럴드가 전임 왕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침략의 구실이 되었다. 자격 미달인이 왕이 왕이 되려니 여기저기서 힘을 모아야 했고 교회를 지어주고 교황청과 결탁하여 교황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이때부터 영국 왕은 로마 교황청의 영행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후 잔인한 학살과 살육을 동반한 토지 개혁으로 대부분의 자유농민은 농노로 전락했고 장원이라는 단위의 영주와 농노들로 구성된 봉건제가 자리를 잡게 된다... 어쨌든 윌리엄의 둠즈데이 북은 세금을 걷기 위해 살림살이 하나하나에서부터 기르는 닭 한마리까지 아주 자질구레한 세부사항까지 치졸하게 재산 내역을 기록한다. 코니 윌리스의 옥스포드 시간여행 시리즈에서 《둠즈데이 북》은 가고자 하는 시간 목적지가 중세로, 책 제목은 주인공이 시간 여행 기록을 윌리암의 토지대장 《둠즈데이 북》의 꼼꼼함에 영감을 받아 이를 사용한 것이다. 

"던워디 교수님. 저는 이 기록을 ‘둠즈데이북’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시행한 조사가 그랬듯이 제 기록도 중세의 생활에 관한 내용을 담게 될 테니까요. 물론 윌리엄 1세가 만든 《둠즈데이북》은 소작인들이 내야 할 조세와 땅에서 나는 금 한 알갱이라도 확실하게 알아 두기 위해 만든 방편이었지만 말이죠."


코니 윌리스의 옥스포드 시간여행 시리즈의 순서를 굿리즈에서 퍼오면 다음과 같다 

Book 0.5 화재감시원  
Book 1   둠즈데이북 
Book 2   개는말할것도 없고 
Book 3   블랙아웃
Book 4   올클리어

나는 쥐뿔도 모르고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부터 읽었는데, 저 순서대로 읽으면 훨씬 재미있을 것 같다. 코니 퓔리스 풍의 수다가 코니 윌리스 입문자들에게는 복병이 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장편에서 그 모든 수다는 의미없는 헛소리들이 단 한마디도 없고, 시간과 공간이 여러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 복잡한 작품의 서사에 스위스 시계 부품처럼 정교하게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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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9-02-12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까 책을 주문했는데...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이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빼먹었는데요. 취소하려고 들어가보니 이미 출고완료네요. CREBBP님 글을 보니 빨랑 코티 윌리스 옥스포드 시간여행시리즈를 마무리지어야할 것 같아요. 말하자면 올클리어죠 ㅋㅋ

CREBBP 2019-02-13 10:07   좋아요 0 | URL
이게 한꺼번에 짜잔 나온게 아니라서 꿰어 맞추다 보니, 저도 소장 목록이 엉망이에요. 제일 재밌다는 <개는말할것도없이>는 전자도서관으로 읽어서 사실 살 필요가 없거든요. 읽으면서 꿰어맞추다보니 거의 전 텍스트를 거의 두번씩 읽게 되더라구요. 게다가 전자도서관에서 이 시리즈는 거의 언제든 빌릴 수 잆는 상태라서, 다 읽은 책을 구매하기도 그렇고(안읽은 책 살 것도 많고 많은데), 게다가 화재감시원과 둠주데이북은 9년후면 서재에서 사라지고 블랙아웃과 올클리어만 남게 되겠죠 ㅋㅋㅋㅋ 그냥 보르코시건 시리즈나 파운데이션 혹은 르귄처럼 한꺼번에 짠 하고 구매해놓으면 맘도 편하고 흐뭇하고 그런데 말이죠. 결국 제일 소장하고 싶은 책만 쏙 빼놓고 갖춰놓게 되었어요. 근데 빌려보면 밑줄긋기가 잘 안돼서 불편...

transient-guest 2019-03-09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둠스데이북‘을 먼저 읽고, 그 다음으로 ‘화재감시원‘을, 그리고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읽었습니다. 나머지는 주문한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개는...‘에서 언급된 작품을 따로 찾으셨네요. 저도 구해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CREBBP 2019-03-11 17:20   좋아요 1 | URL
그게 우연히 하인라인의 책을 먼저 읽고 보트위의 세 남자를 읽고 나서야 그 책이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의 서두에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어요. 세 개의 작품을 나란히 보면 유머 코드가 어딘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아요. 물론 개는 말할것도 없이 에서는 개를 오마주했고요. 하지만 원래 제롬의 개가 훨씬 더 웃겨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21세기 가상의 애완동물

일하던 동물원이 폐쇄된 후 일자리를 찾던 애나는 블루 감마라는 게임 회사에서 뜻밖의 일자리를 제안받게 되는데 디지탈 애완동물의 일종인 디지언트들을 훈련기키는 직업이다. 고작 몇달간의 소프트웨어 테스터 교육으로 큰 게임회사에 취엄할 수 있었던 건 블루 감마가 출시하는 디지털 애완 동물이 실제 동물을 다루던 기술이 절실히 필요할 만큼 고차원적으로 진화했기 대문이다.

20여년 전 다마고치의 형태로 전세계에 가상펫 열풍을 일으켰던 가상펫의 21세기 버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디지언트들은 뉴로 블래스터 라는 게놈 엔진을 사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개체의 진화가 나타나고 의식이 있다. 이들의 서식지는 데이타 어스라는 게임 플랫폼으로 인간과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데이터 어스 환경 내 에서 다른 디지언트들과 상호 소통하면서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있다. (참고로 유전학적 진화와는 다른 의미로 이 책에서는 개체의 변화를 진화라는 말로 쓰고 있다) 침팬지와 곰 등 여러 형태의 아바타를 사용하여 개별 사용자의 선호도와 니즈를 만족시킨다. 뉴로 블래스트 게놈 엔진을 사용한 디지언트들은 기본적으로 애완 동물의 필수 조건인 순종적 성격과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언어 능력을 비롯해 학습과 훈련에 의해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당연히 출시와 함께 전세계적인 빅히트를 친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여러 단편과 중편에서 보여준 소재의 신선함과 참신함으로 작가 테드 창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러 문학상을 받고도 전업작가가 아닌 모양이어서, 작품 발표눈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한 편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비교할 때 임팩트 있는 반전의 묘미는 없지만 훨씬 성숙된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이 작은 소설이 현실과 근미래의 가상적 현실에 투사하는 방식에서 보여주는 핍진성과 현실에 대한 통찰은 놀랍기만 하다.

과학 소설이 독자에게 인도하는 것은 조금 다른 버전으로 대체된 가상의 시스템을 경험함으로써 철판같은 현실에서 제공하는 가치관과 철학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다. 익숙한 일상 속에서는 자각하지 못한 다른 시선이 보는 미러를 통해 세계관을 이루는 것들을 자각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에 객체라는 말이 붙기에 프로그래밍을 배우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제목부터가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사실 내용도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테스트, 출시, 고객 대응 유지보수 등의 일련의 주기를 다룬다. 따라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이거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익숙하다면 훨씬 풍부하게 컨텐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IT 산업의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책의 문장 하나 하나가 주는 의미와 현실에 대한 비유를 일부 놓칠 가능성이 있다. 장황한 설명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테드 창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가 주로 중단편을 쓰는 이유는 서사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핍진성을 생략해서도 아니다. 나는 이 작가의 간결함이 주는 울림이 좋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 놓은지 오랜만에 읽은 이유 중 하나가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은 독자평 몇개를 읽고 기대가 조금 떨어져서였는데, 전작을 읽은 독자들의 그런 실망감은 아마도 반전을 기대하는 장르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내게는 오히려 잔잔한 울림이 오래도록 남는 과학기술적 상상력이 감성과 결합한, 전작 이상의 수작으로 평가된다.

소프트웨어의 소프트함 때문에 소프트웨어는 흥하고 소프트웨어는 망한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는지 몰라도 우리는 무생물 소유물에게 자주 감정이입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끼던 물건들을 쉽게 방치하고 잊고 버린다. 유행이 밀물처럼 온세상을 덮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듯 한 때 세상 전부라도 가진 듯 소유 속에 행복을 찾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것들로 변하고 새 것들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크게 보면 이 소설은 그 대체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SNS만 해도 우리는 대세의 변화에 따라 천리안에서 각종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싸이월드에서 페북과 트위터 인스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파도 타듯 갈아타기를 반복하머 영원할 것 같았던 가치들 영광과 몰락을 지켜보았던가.

소프트웨어의 유지 보수가 어려운 건 아이러닉하게도 소프트웨어의 그 소프트함에 있다. 공장에서 찍어낸 상태에서 고작 망가진 부품을 교체하는 수리 차원의 유지 보수를 요구하는 하드웨어 기계와 달리 소프트웨어는 출시 후에도 고객의 다양한 요구 사항을 쉽게 수용하고 변경할 수 수 있다. 계속되는 업그레이드는, 계속 생겨나는 다른 버전을 의미한다. 안드로이드 앱은 기본으로 자동 업데이트 되도록 설정되어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기능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갑자기 원하지 않는 (광고) 기능이 추가되거나 오래된 폰에서 메모리 문제나 오류 등이 나타나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거나 혹은 있던 기능이 사라지고 그 기능을 쓰려면 유료 버전을 사야되는 것 같은 정책의 변화를 수용해야 할 때가 있다. 원치 않은 업그레이드를 정지시키면 새로운 기능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를 경험하며 툴툴거리겠지만 개발사 측에서는 매번 발생하는 버전마다 다르게 발생하는 오류와 문제들을 개별적으로 관리할 수 없으므로 다른 대안이 없다.

동일한 유전자,  다른 객체
 
객체라는 것의 예를 들면 이렇다. 마르코와 폴로는 같은 게놈을 가졌으므로 동일한 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디지언트들은 일정 기간 사이버 공간 상에서 훈련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성격이 발현하기 때문에 똑같은 게놈을 가졌다 해도 둘은 다른 개체이다. 쌍둥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트레이너들이 이 디지언트들을 훈련시키는 이유는 유아기가 끝나 말을 배운 상태에서 주인과 소통할 수 있고 기르는 재미를 줄 수 있는 훈련된 상태의 애완동물을 구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고 배변 훈련을 시키고 세상을 이해시키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디지들도 마찬가지.

마르코가 먼저 태어났고(생성되었고) 집중된 훈련을 통해 분별력도 생기고 말도 잘하게 되었을 때 이를 복사하여 복사판은 폴로라고 이름지었다. 애완동물로서 상품의 가치가 높아졌을때를 2살 버전이라고 한다면 이 때가 어떤 사용자에게는 가장 분양받기 적합한 상태일 수 있다. 이 버전의 복사본이 체크포인트에 저장되고 복사본은 언제든 얼만큼이든 판매가 가능하다. 소프트웨어는 매 업그레이드가 있을 때마다 체크포인트가 생성되어 모든 단계의 소스 코드들을 저장하고 있지만 학습된 버전은 매 순간 ‘진화’가 진행되므로 체크포인트는 주기적 혹은 어떤 임계점을 넘을 때로 임의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치 않는 버그가 발견되면 이전 버전으로 롤백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한 디지언트가 욕을 배워 쓰는 것이 발견되자 모든 디지언트들을 한꺼전에 롤백하여 해당 트레이너가 디지언트 앞에서 욕하기 이전의 체크포인트로 되돌아간다. 

이들은 블루 감마가 채택한 뉴로블래스터 계열의 게놈 엔진으로 순종적이고 높은 지능을 가진 특성을 지냈고 각 개체마다 고유 게놈을 가지고 학습과 환경에 따라 개체 차원의 ‘진화’를 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일정 수준까지 학습을 시키고 이를 전시하는데 이들은 애나와 동료들이 각각 한두 명씩 맡은 프로토타입으로 블루감마의 마스코트라 불린다. 마스코트들은 여러 단계의 체크포인트에서 복사본으로 팔려 나가게 된다.

가령 내가 만일 디지언트라면 1살 버전 2살 버전.....10살 버전 이렇게 많은 나의 체크포인트에서 멈춘 상태의 여러 나이의 복사본이 존재하며 각기 다른 상태에서 각기 다른 무수히 많은 주인들에게 팔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객체가 된 복사판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각기 다른 능력을 획득하며 각기 다른 성격으로 변화해 가기에 둘은 서로 만나도 각기 다른 개체가 된다. 여기에 설상 가상으로 소프트웨어 자원의 평등을 외치는 해커들에게 노출되어 해적판 디지언트들이 난무하게 되고 더욱이 데이터 어스 플랫폼 그러니까 가상세셰 자체도 복제판이 생겨나기까지 한다.

아무튼 마르코와 폴로는 애나와 평생 썸을 타면서도 안타깝게 매번 비껴가는 아바타 디자이너 데릭이 키우는 침팬치형 디지언트고 잭스는 애나가 맡은 로봇 바디를 가진 디지언트다. 마르코의 특정 나이에서 복사되어 동일 환경에서 양육 되었지만 둘의 성격은 다르다. 하나는 더 신중하고 하나는 더 모험적이다. 트레이너들 역시 가상 세계에서 디지언트들을 만나야 하므로 아바타를 쓰고 그들을 만난다.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를 만날 때

가장 소름끼치는 설정은 이들이 가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를 만나는 장면이다. 디지언트들이 크게 세계를 휩쓸자 로봇 회사에서 디지언트들의 기능과 감각에 상호 작용하는 로봇 바디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를 갈아입듯이 디지언트들은 아바타를 이 현실 세계의 로봇으로 갈아입으면 그들의 현실은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아바타로만 보던 애나의 몸을 현실에서 본 애나의 디지언트 잭스는 매끈한 아바타로만 만났던 애나의 실제를 보고 미세한 신체의 특성들 작은 땀구멍과 솜털들 같은 것들에 놀라고 매료당한다. 로봇 회사는 홍보를 위해 감마 블루의 디지언트들에게 주기적으로 이 로봇 바디를 입히고 현실 세계로 소풍을 내보낸다. 사회적 동물인 그들은 함께 어울려서 동물원에도 가고 현실 구경을 한다.

디지언트들의 성장과 쇠퇴는 현실의 소프트웨어의 흥망성쇠와 같은 맥락으로 흥하다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초기 투자와 유지 보수 비용이 워낙 크기에 판매만으로는 유지하기 어려워 사료 산업과 같은 보조적인 수익을 기대했지만 몇년 후 휩쑬고간 유행이 잦아들다 신규 고객의 유입은 줄고 디지언트를 중지시키는 고객이 점점 늘어나고 수입 창출을 기대했던 사료 투입 소프트웨어는 실패한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디지언트들이 성장하면서 제조사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요구사항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들의 게놈에 내재하는 예측불가능성은 개발자들의 목표를 빗나갔다. 너무 어려운 게임처럼 디지언트들의 도전과 보상 사이의 균형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재미를 벗어나 기울어졌고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고객들은 그들의 디지탈 애원 동물들을 정지시키게 된다.

어떤 생태계도 인구 자체의 감소는 쇠퇴와 궁국적으로는 몰락이라는 길로 예언처럼 흘러가기 마련이다. 까탈맞고 돈도 많이 드는 디지언트들을 정지시키거나 유기하는 사례가 늘면서 이들을 보호하려는 여러 시도는 번번히 물거품이 되어간다. 그러는 사이 데이터 어스에서 게임도 하고 애완동물도 키우고 사회 생활을 하던 많은 사용자들은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 가고 그들이 즐기던 게임둘도 새로운 플랫폼으로 이식이 시작되면서 데이터 어스는 점점 인적없는 폐허가 되어 가고 남아있는 디지언트들은 몇몇 매니아층이 소유한 한 줌 안되는 디지언트들 뿐이다. 새로운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게놈의 디지언트들은 이런 복잡한 자아가 제거되고 한 가지에 집착하는 특성을 가졌는데 매력은 없지만 전문적인 일을 학습하는 데 뛰어나서 돈벌이가 되어 여러 산업에 응용되고 있지만 귀엽기 위해 태어난 디지언트들은 골고루 잘 하지만 어떤 특수 분야에 부각을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 발현될 지 모를 천재성을 발굴하기 위해 없는 살림에 디지언트들의 교육비로 더욱 생활은 짜듯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충성 고객과 몇몇 대형 게임들로 근근히 유지하고 있던 데이터 어스는 결국 잘나가는 새 플랫폼회사와 통합라는 이름으로 폐쇄하기에 이르는데 데이터 어스에 기반한 모든 게임 앱들은 그쪽우로 이식되어 통폐합하기로 결정된다. 그러나 디지언트들의 게놈 엔진을 설계한 뉴로 불래스터는 데이타어스 통합 이전에 이미 망한 회사라 새 플랫폼에 이식할 수 없게 된다. 하루 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된 상황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네이버에 블로그를 차려 놓고 콘텐츠를 관리하던 사용자가 하루 아침에 네이버가 망하면 블로그까지 쫄딱 망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 내 경우 드림위즈 때 파놓은 이메일 계정이 드림위즈 통폐합으로 서버를 잃은 경험이 있는데 다행히 인수한 네이트가 메일 계정을 유지해 줘서 근근히 1세대 메일계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경헙들은 나만 해당되는 건 아닐것이다. 플랫폼이 없어지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소프트웨어는 새로운 플랫폼에 이식해야 하는데 니 경우 처럼 이미 엔진 회사가 망해버렸다면 그야 말로 하루 아침에 길바닥에 나앉는 거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다행히 해커들이 만든 복제판 풀랫폼에서 기거할 수는 있지만 인적 없는 텅빈 그곳에서 몇 안되는 수의 디지언트들은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로 삶의 질이 크게 낮아지고 유기되는 디지언트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점점 즐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자신이 일시 정지되는 동안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에 대한 상실을 슬픔으로 인식할 줄 아는 디지언트들을 이러한 폐허 속에 사느니 차라리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일시정지시키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남은 디지언트 소유자들은 디지언트의 양욱의 부담이 매니아 수준을 넘어 사회적으로 이해 불가이 가정 생활이 파탄날 지경에 이른다.

섹스 로봇은 궁극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

이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섹스로봇 회사의 제안. 그리고 새 타입의 무뚝뚝한 디지언트를 훈련시키기 위해 트래이너들에게 친밀성을 높이는 항정신성 약물 주입을 요구하는 회사의 취업 제안. 이 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의식이 있는 디지언트들을 섹스 산업의 돈벌이 수단으로 훈련시키킬 것인지 혹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가 약물투여라는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전락할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이다. 디지언트들은 자기들이 쓸모가 있으려면 스스로 모든 법적 책임과 의무와 자유를 갖는 법인등록을 하여 성인으로서의 지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섹스 로봇 회사의 제의를 주인 맘대로 거절할 수 없다. 디지탈 애완동물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애나와 이를 미친짓이라고 여기는 애나의 남편은 그렇다 쳐도 자신의 두 디지언트들에게 법인 등록을 함으로써 스스로 책임과 의무에 벗어나고 한 발 더 나아가 섹스 산업에서의 직업을 스스로 판단케 하고 애나를 구하려는 데릭은 그러한 배반이 다시 애나를 화나게 하여 친구인 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비록 아바타 없이는 형체조차 없지만 조금씩 의식이 께어나고 자아를 표현하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객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딜레마들이 서로 얽힌 상황을 너무나도 지적으로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키보드 몇 스트록으로 일시에 그동안 쌓은 모든 추억, 기쁨과 슬픔, 함께 했던 모든 기억을 얼려 버리고 시체도 남지 않는 영원한 유기 방기 상태에서 죽음도 삶도 아닌 어떤 상태로 남겨졌다가 휘발되듯 잊혀지고 사라질 이 존재들이 소프트웨어라서 아바타 없이는 물적인 형체가 아니어서 쉽게 잊혀질 수 있을까. 그 기억, 그 시간, 그것들에게 쏟았던 내 애정을 사랑한다면 그렇게는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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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7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드 창 책 읽고 싶은데...김겨울이 추천해서 더 읽고 싶은데...계속 이러고만 있네요 ...ㅋ

CREBBP 2019-01-14 17:42   좋아요 0 | URL
정말 추천해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보다도 저는 개인적으로 더 좋았어요. 잔잔한 전개가..

2019-01-0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9-01-14 17:43   좋아요 0 | URL
기대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