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아홉 가지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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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델센의 인어 공주가,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지느러미와 말을 포기하고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두 발을 얻었다면, 오스카의 동화에서 인어 공주를 사랑한 어부는 인어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영혼을 제거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어부와 그의 영혼> 이야기다. 동화적 순수함과 영혼의 의인화가 주는 기괴함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9개의 이야기가 모두 동화같은 이야기들이다. '같은' 이 아니라 이미 동화책으로 어릴 때 혹은 어린이들이 드글거리는 치과나 소아과 같은 곳의 대기실에서 흔하게 집어들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행복한 왕자>나 <저만 아는 거인> 를 여기 저기서 많이 본 듯 익숙했지만, 정독을 해보면 어린 아이들에게 단순한 교훈이나 흥미를 주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라기 보다는 훨씬 풍부한 컨텐츠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배경의 묘사 등은 충분히 아름답고 우화적으로 쓰여 있지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비극적인 결말을 갖는다. 크게 <행복한 왕자와 그 밖의 이야기들>과 <석류의 집> 두 파트로 나뉘는데, 각각 1888년도와 1891년도에 따로 출간된 동화집의 제목이다. 앞의 이야기들이 조금 더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직조된 것에 반해 뒤의 이야기들은 보다 더 진지한 이야기들로, 두 파트 모두 삶의 비참함과 탐욕의 대조, 허영과 욕망, 죄, 구원 같은 무겁고 진지한 문제들을 다루면서, 그 이야기의 이면에 숨은 작은 디테일들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의 해결불가능한 모순들을 풍자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어부와 그의 영혼>이 특히 흥미로와 요약을 남긴다. 


우연히 인어를 낚아 올린 어부가 처음엔 그 인어를 풀어주는 댓가로 물고기들을 유인을 위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는데, 물고기도 물고기지만 자신이 그 인어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는 인어의 사랑을 얻고 싶어 구애하지만, 인어의 세계에는 영혼이 없으므로 영혼을 떠나보내야 구애가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영혼 따위, 볼 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는 영혼을 떠나보내기로 결심한 어부는, 신부를 찾아가 영혼을 제거하는 방법을 묻지만, 신부는 노발대발하며, 영혼은 그 어떤 보석보다 값진 것이며, 인어야말로 버림받은 존재들이며, 선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짐승에 불과하며, 그런 사악하고 타락한 것들과 함께하려는 자네 역시 타락한 존재라며 내쫓아버린다. 


실망한 어부는 상인을 찾아가 자신의 영혼을 팔겠다고 제안하지만, 이번에 상인은 그의 영혼이 닳아빠진 은화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차라리 그의 몸을 판다면 노예로 사겠다고 제안한다. 이번엔 마녀를 찾아가는데, 마녀는 젊고 아름다운 어부에 반해 자기랑 춤을 추면 영혼을 파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유혹하고, 드디어 영혼을 떠나보내는 방법을 알아낸다.


The shadow of the body is the body of the soul.


사람들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몸의 그림자가 아니라 영혼의 몸이란다. 바닷가에서 달을 등지고 서서 네 발에서 그림자를 잘라 버려. 몸의 그림자를 말이야. 그러고는 네 영혼에게 널 떠나라고 하면 돼.


그리하여 어부는 마녀에게서 받은 살모사 자루 달린 칼로 바닷가 모래밭에서 그의 영혼인, 영혼의 몸인, 그림자를 잘라낸다.  그의 영혼은 슬퍼하며, 어부에게 어부의 마음을 함께 달라고 부탁하지만, 만일 마음을 주어버린다면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며 거절한다. 영혼은 비정하고 두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달라며 재차 부탁하지만, 어부에게 마음은 사랑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한 기독교적 사고관에서 정신을 다시 마음과 영혼으로 나눈다는 발상이 신기한데,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를 보면, 오스카 와일드에게 영혼은 인간의 정신 중에서도 특정한 부분을 말하는 것 같다. 신부에게는 보석 같은 것, 하지만 상인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 사랑할 때에는 필요하지 않지만, 악과 선을 구분할 때는 필요한 것. 동물(인어)에게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있는 것. 게다가 마음과 영혼의 관계 역시 석연치 않다.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이 그의 마음도 달라고 하는 걸로 봐서, 마음은 몸에도 속할 수 있고 영혼에게도 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이란 어떤 종교적인 믿음 혹은 윤리적인 잣대, 선과 악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몸을 떠난 그의 영혼은 해마다 바닷가에 찾아와서 그를 부른다. 홀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경험한 모험담을 들려주는데, 인어 공주와 바닷속 왕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부에게, 그에게서 떨어져나간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유혹하는 상상도 못한 재물과 신기하고 기이한 모험과 세상 구경도 그에게는 별 관심사가 못되는데, 3년이 되던 해에, 하얀 발로 춤추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에, 자신의 인어 아내에게서는 없는 하얀 발에 대한 욕망이 생겨, 하루만 세상을 구경하고 오기로 동의하고 그의 영혼을 따라 나선다. 


어부가 뭍에서 나가 영혼의 손을 잡는 순간 그림자는 다시 어부에게 달라 붙으며, 소녀를 보여준다던 그의 영혼은 그를 이 도시 저도시로 데리고 다니며 절도와 폭력과 살인을 교사한다. 어찌된 일인지, 어부는 영혼이 시키는 대로 어린 아이를 때리라면 때리고,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을 죽여 금덩이를 훔쳐내라면 그렇게 한다. 어부는 일단 한 번 떼어낸 영혼을 다시 붙였다면 두번째로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자신의 손을 동여매고 입을 막고 영혼의 지시에 저항하고 바닷가 앞에 서서 인어를 부르는데, 인어는 나타나지 않고... 부서지는 파도에 밀려온 하얀 거품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의 영혼의 타락은 어떤 의미일까. 어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3년간 그의 영혼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많은 경험을 한다. 이 부분은 다시 찬찬히 읽어야 해석이 가능할 것 같긴한데, 영혼의 타락은 그 도시에서 생긴일과 관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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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난해성이야 제쳐놓고라도, 이 작품이 연작인지, 단편인지, 헷갈렸다. 처음 줄간될 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과 <기교들>로 따로 출간되었던 것을 두개로<픽션들>에 합친 것이라 그렇다. 첫 작품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본편이 있고 그 본편과 연결되는 듯이 보이는 <1947의 후기>가 또 있다. 이 두 개의 작품은 연작처럼 내용이 연결되어 있고 1947의 후기라는 제목을 갖지만, 목차상으로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속해있다.


내가 꼽는 '가장 잠에 빠지기 좋은' 책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첫권인데, (늘 읽다 잠들어서, 2편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이 소설 역시 잠을 불러오는 데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비교적 얆음에도 불구하고, 몇 줄 읽기만 하면 늘 잠에 빠져서,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있을까 의아했는데, <틀뢴>이 독자의 기선을 완전 제압해 놓은 후는 살짝 풀어주는 느낌으로, 그 다음부터는 읽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우선 해석적 난해성은 제쳐놓더라도, 실존인물들과 가상인물들이 마구 섞여 한도 끝도 없이 언급되어 내용 파악조차 어려웠다. 이 요약 불가능한 이 첫번째 소설을 억지로라도 요약해보면,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괴상한 사람들과 괴상한 이론들이 브리태니어 백과사전의 해적판에 몰래 숨어있으면서 수 세기에 걸쳐 세계의 지식과 관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내용이다. 이게 내가 내 식대로 파악한 전체적 줄기고, 실제로 그런 내용인지 확신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제목을 볼 때, 틀뢴은 17세기에 결성된 비밀 결사이고, 우크바르는 그 특정 판본의 백과사전에 실린 지명 이름으로, 실제 틀뢴의 사상이 싹트고 발전하는 국경과 역사,  언어, 문학 등이 모호한 세계다.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우나, 여기 저기서 그 환상의 세계가 조금씩 드러나고 매혹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현실에 침투할까.


이 모호하고 이상한 세계의 국가들은 태생부터 관념적이고, 그리하여 ‘틀뢴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공간 속에 물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연속물’이다. 틀뢴의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동사로 이루어졌거나(남반구) 형용사로만 이루어졌다(북반구). 모든 학문은 심리학의 하위에 속해있고, 그들은 ‘우주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p23)’한다. 이 곳에서 ‘정신적 상태는 축약이 불가’능하므로, 거기에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하는 행위는  왜곡과 편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언어 모두에서 왜 명사가 없는지를, 이해 가능한 몇 안되는 부분이다. 명사는 축약이고, 압축이다. MP3 포맷이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영역의 음폭을 모두 제거하여 깨끗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작디 작은 기기의 어느 작은 하드웨어가 담을 수 있는 적은 용량에 압축한다. jpg와 png 같은 사진 파일이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쓸모 있는 정보들만 축약하여 효율적으로 저장한다. 이처럼 언어(명사)는 모호하고 들쭉날쭉하고 무한한 어떤 세계를 하나의 단어로 그 복잡성을 마치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단호하게 그 단어가 오랫동안 품어온 뜻에 어긋나는 의미들을 그것을 표현하는 세계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면 형용사나 동사는 다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하자.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이미 모든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대한 어스레한 기억 혹은 반영이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왜곡되고 훼손되었다고 단정(p25)’한다. 또다른 학파는 ‘우리가 여기서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어떤 곳에서 깨어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실상 두 사람’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동시에 있다는 말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연상되어 소름돋는다. 작품의 알레고리보다는 뭔가 괴상하고, 신비한 걸 찾다 보니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도 생각난다. 아니나 다를까, 진중권은 틀뢴의 이러한 알레고리를 과학기술, 네트워크의 사이버 스페이스와 연결짓는 통찰을 보인 바 있다. 해석보다는 모호한 채로인 게 더 선호될 때가 있다. 소설 속에서 틀뢴이라는 비밀 결사가 생긴 17 혹은 18세기와 같은 시기에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과학기술이 전면에 대신하면서 가치관,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속화된 것을 주목했을 거란 건 확실하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리고 <원형의 폐허들>은 일단 황당함에 있어서 <틀뢴...>을 따라잡지 못하므로 읽기가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훨씬 수월했다. 그 중에서 <원형의 폐허들>이 가장 흥미로와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틀뢴의 난해성을 토로하다 보니 한쪽이 되었다. <원형의 폐허들>에 대해서는 훨씬 얘기거리가 풍부할 것 같다. 다음으로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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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이야기를 더 어이없이 만드는 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이다. 소설은 이반이라는 한 이발사가 아침에 빵굽는 냄새를 맡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커피도 사양한 채 갓 구운 빵을 먹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세부적인 디테일로 시작한다. 날짜와 장소까지도 정확하게 서술되는 이 부분은 사실상 보통의 미스터리 서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상황의 작은 디테일들에 주목하게 하여 긴장감을 유발하시키지만 그렇게 조심조심 읽어가며 갑자기 맞닥뜨리는 건 건 황당함 자체다. 마치 어둠속에서 더듬어 가다가 웅덩이에 빠진 기분이랄까. 그러면서도 그 엘리스처럼 그 이상한 세계를 배회하며 미스터리가 풀리기를 기대하며 글자들 사이를 움직여보지만 결국 작가에게 유린당하는 건 독자다. 


이발사 이반은 갓 구운 빵속에서 나타난 코가 자신이 이발한 코벨레프 8등관료의 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면도하다가 잘못해서 베어낸 걸로 생각하고 전전긍긍한다. 이 때 아내는 쓸데없이 소리를 지르고 이반에게 온갖 구박을 다한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그런 거 없다.   마치 어떤 영화에서 초반에 지나가는 행인이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데 관객은 그게 맥거핀인 줄 알고 잔뜩 주목하는데 단지 그 씬을 길게 잡았을 뿐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소심한 이발사 이반의 성격을 나타내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전체에서는 이렇게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일에는 정성들여 설명을 하고 객관적 정보와 세부사항을 전달하지만, 중요한 것, 가장 궁금한 것에 관해서는 설명이 야박하다. 모든 불가능한 일이 마치 원래 자연의 일부인 듯 천연덕스럽게 간략하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천조각에 싸서 이를 몰래 버리고자 거리로 나가지만, 가는 데마다 사람들의 시선과 경찰관 때문에 쉽지 않고, 결국 다리 밑으로 던졌지만, 경찰에 걸리고 만다. 


한편 여자를 밝히는 8등관 코벨로프는 아침 잠에서 깨자 자신의 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는 좋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신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골(1809~1852)은 카프카(1883~1923)보다 훨씬 전에 태어났다.  카프카가 고골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비현실적 세계와 맞닥뜨리는 시작이 비슷하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 그 모든 면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코》를 읽게 된 계기는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1906~1954)의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 소개의 첫줄로부터다. “러시아 작가들이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면, 터키 작가들은 모두 사이트 파이크의 우산 아래서 나왔다.”[1].  찾아보니 고골의 러시안 문학적 위치에 대한 저 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이었다. 고골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는 이 말과 더불어 여러 핵심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 쪼가리들을  인용한 한 논문을 인용하면 설명이 될 듯하다. 아바스야느크의 첫 작품을 읽고 나서 뭔가 조금 기괴한 느낌이 들어, 작가 소개를 펼쳤다가 발견된 고골 <외투>의 문학적 위상이 그렇다는 걸 발견하고는, <외투>를 읽으려고 고골을 펼쳤다가 <코>에 빠졌던 것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과 창조의 전형인 고골의 문학은 예로부터 낭만성, 현실성, 상징성, 심리성, 신화성, 종교성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널리 평가되어 왔다.2) 일찍이 도스또옙스끼(Ф. М. Достоевский)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Все мы вышли из гоголевской “Шинели.”)”라고 말했듯이, 작품 「외투 」는 고골 문학의 독창성과 풍부함을 함께 지닌 ‘가장 심오하고 가장 뛰어난 작 품의 하나’3)로서 러시아 문학사에서 실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코대신 코가 있던 자리가 평평해진 걸 발견하는 코벨로프는 황당하고 낙심하고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워 코(가 있던 자리)를 손수건으로 감춘 채로 돌아다니다가 마차에서 내리는 5등관료를 발견하는데, 그 5등관이 자신의 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코에게 가서 당신은 내 코이니 자신의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코는 자신은 당신의 코가 아니며 자신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그러던 중 어떤 여자에 눈이 팔리는 동안 자신의 코이자 신사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나서 코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코면 코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자신보다도 신분이 높은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코가,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면 일단 스케일이 맞지가 않고, 물리적으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없는데, 바로 알아보다니,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는 곳곳에서 벌어진다. 후에 경찰이 코를 가져와서는 이발사 이반이 꾸민 짓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더욱이 코를 발견한 당시 경찰관의 눈에도 코는 신사로 보였다는 것이다.  마차에 타고 있는 '그'를 길에서 잡았다고, 처음엔 자기도 그가 평범한 신사로 보였지만, 근시여서 코나 수염 같은 건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이 안경이 있었기에 그가 코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냈다고 말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깨알같은 디테일이라니. 


하지만 정작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들만 골라서 빠져있고, 장소와 시간 혹은 그 외에 쓸데 없는 부분에서만 객관성과 정교함을 유지한다. 즉 코가 어떻게 사람으로 보이는지,  그렇게 보인건지 혹은 변신한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빵 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에 빠졌다가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이반을 잡은 경찰에게 잡혀서 다시 코로 변신했는지에 대한 가장 황당한 부분에 대한 디테일들이 뭉텅이로 빠진채, 화자는 자기도 이 이야기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더욱이 작가들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소재로 삼는지 알 수가 없다며 발뺌하면서 미스터리를 푸는 대신 메타소설의 형식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고 있는 재기발랄한 문체와 다중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거리를 줄 것 같지만, 19세기 초, 이러한 소설을 썼고, 결국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 있는 오늘날의 소설들도 다양한 경로로 고골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오래된 작품이라 조금은 고리타분한 문체를 예상했는데, 하도 황당하다 보니까, 그리고 그 황당한 방식이 그 옛날 것인데도 낯설고 새롭게 느껴져서 흥미롭게 읽혔다. 



[1] 현대문학단편선 11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 세상을 사고 싶은 남자 외 38편 - 세계문학단편선 11


[2] 은닉된 논쟁: 고골의 「외투」와 체홉의 「관리의 죽음」의 비교 분석, 오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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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그타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5
E. L. 닥터로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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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잎과 가지가 달린 나무도 그걸 받치는 메인 몸통과 뿌리를 찾을 수 있듯이, 관련도 없어 보이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들은 산재하여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다가 축을 주위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크게는 두 개의 축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실제 사건의 주인공인 에벌린을 둘러싼 삼각관계와 살인 사건, 또 하나는 콜하우스 워커의 자동차 똥 투척 사건이다. 백만장자 랜들 쏘가 자신의 아내 에벌린 네스빗과의 16세 때의 일을 빌미로 스탠포드 화이트를 총으로 쏴 죽인 살인 사건은 백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세기의 스캔들이지만 콜하우스 워커의 자동차 파손에서 시작된 테러극은 가상의 이야기로 보인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는 가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들이 섞여 있고 실제 이야기와 실제 이야기가 가상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소설인지 찾아보기 전에는 구분하기 힘들다. 이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실존했던 세기의 마술사 해리 후디니의 이야기가 점점이 박혀 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콜하우스 워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특별 주문 제작한 가죽 지붕을 씌운 세심하게 잘 관리된 포드 모델 T 뒷좌석에 지역 소방서 직원들이 똥을 사서 얹어놓고 통행세를 요구하는 행패를 부린 이유는 그 멋진 차의 주인인 콜하우스 워커가 ‘니그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니그로가 니그로답지 않아서다. 그는 옷을 잘 차려 입었고 예의바르고 정중했으며 교육받았고 교양있게 말했다. 그들은 그의 차를 지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통행세를 요구했으며 그 아름다운 차 뒷좌석에 똥을 갖다 넣았다. 이렇게 시작된 콜하우스 워커의 테러적 복수극이 전체 스토리의 가장 큰 줄기인데 이렇게만 보면 무슨 액션 혹은 스릴러 극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전히 이들 사건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20세기 초의 인간군상들이고, 쉼없이 가속화되던 미국 사회 신문에 뉴스에 등장했던 역사적 인물들이 직조해 내는 거대한 역사의 조각들이다.


니그로도 없었다. 이민자도 없었다. 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는 당대 중산층 백인들의 행복하고 안락한 삶 속에서,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반대쪽 편의 삶과 고통이 안중에도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시제의 이 말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 가족에게 이민자들과 흑인들이 가족의 삶 깊숙히 스며들게 되며 어떤 변활 겪게 됨을 암시한다. 이것은 인식의 변화다.


‘단란’했던 가족의 변화는 로버트 피어리를 따라 북극 탐험을 떠난 몇달간의 아버지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가부장적 권위와 그럭저럭 중산층의 부를 유지시키는 성공 궤도의 사업을 운영하는 가장은 처가 식구들을 부양하고 처남의 월급을 주는 성실한 남편으로, 수줍고 순종적이고 예쁜, 전통적 역할에 충실한 아내와 쌍을 이루어 모범적 가정의 질서를 유지해왔다. 가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전통적 여성인 어머니의 가치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발견된다. 그의 부재기간 사업상의 위기를 해결하고 능동적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는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집안에 묶여 남편의 시각으로만 보던 사회를 스스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그 기간동안 자립 변화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에 눈뜨기 시작한다. 뜰에서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산채로 묻힌) 신생아와 아기의 엄마 새라를 가정에 들이고 돌보기 시작한 어머니는 당대 중산층의 눈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이지도 않던 흑인을 가정 속에 편입시킨 혁명적 결정일이 된다. 이 일은 이들 가정에서 변화와 진보의 물결을 어머니를 통해 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북극 탐험에 얼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귀국한 아버지는 갈색 아기와 새라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머니의 결정을 존중한다. 


어느날 부터인가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가 새라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새라와 콜하우스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끈질기게 매주 새라를 찾아오던 콜하우스를 새라는 얼굴 한 번 안비치고 그대로 돌려보내기를 계속한다는 것. 그러나 다른 흑인들과는 달리 양복을 잘 차려입고 특별주문한 가죽 루푸가 달린 포드 모델 T를 타고 와서 정중하고 예절바르게 행동하는 이들 가족은 어느 날 그를 집으로 들여 차를 대접하고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가다. 그들의 거실에서 래그타임을 연주하자 우울과 대인 기피로 윗방에 숨어 지내던 새라는 음악을 매개로 점차 마음을 열고 콜하우스를 받아들여 약혼하고 결혼 날짜를 잡는다. 그토록 우울하고 어두웠던 새라는 아름답고 행복에 겨운 꽃같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신한다. 결혼을 앞둔 어느날 콜하우스에게 자동차 똥 투척과 동반된 파괴 사건이 일어나고 콜하우스는 그 특유의 예의 바른 태도로 경찰에 호소하지만 조롱과 무시만 돌려받고 차는 점점 더 파괴되어간다. 콜하우스는 자신의 자동차를 변상받을 때까지 결혼할 수 없음을 알려오고, 때마침 부통령 방문에 이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했던 새라는 경찰의 오해로 폭력을 당해 죽게 된다. 


내러이터가 누구인지 불분명한데 가족을 설명할 때의 기준이 소년을 중심으로 어머니 아버지 외할아버지 외삼촌이 이름없이 언급되므로 화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분명치 않은 화자의 시점은 이 가정의 구성원들 개개인들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환하고 빛나는 세계를 온전히 구성하는 듯한 이 중산층 백인들의 사회와, 어둡고 우울한 유색인 및 이민자들 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는 듯한 사람은 어머니 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월급만 축내는 줄로 알고 있던 외삼촌은 처음에 소개된 에벌린 네스벳을 짝사랑하며 쫓아다니다가 훗날 콜하우스 워커의 테러 지원을 하는데 그가 죽은 후 아버지의 부재 중 회사에 큰 성과를 남겼음이 드러난다. 결국 외삼촌은 가상과 실제 사이를 연결하고 정의를 쫓아 온몸을 불태우다 ‘의롭게’ 죽는더. 아버지의 부재 중 그가 회사에서 개발한 일련의 무기들이 아버지의 부 뿐만 아니라 미국의 세계 대전에 복무했음은 그의 추후 행적과 비교할 때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백인의 눈에 외삼촌이 도운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 나오는 와습들은 이름이 없는 주인공 가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위키에 이름을 넣으면 행적이 나오는 실제 인물들이다. 전설의 마술사 탈출가 해리 후디니,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 모델 영화배우 애블린 네스빗, 스탠포드 화이트를 죽인 백만장자이자 애블린의 남푠 해리 켄달 쏘, JP 모건, 포드 자동차 회장 해리 포드,무정부주의자 사회 운동가 옘마 골드만 등이 그렇다. 이민자 타테와 소방서 직원들 세라 콜하우스 등은 가상인물이지만 실제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이름을 날리지 못했을 인물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허구의 프레임 속에서 장르적 경계를 허물어 확장하고 그를 통해 20세기 초반 미국이라는 나라의 면면을 노출한다. 역사란 단지 전쟁과 제도와 대형 사건들로만 구성되지 않으며 그 역사 속의 개인이 역사와 함께 주고 받는 영향들의 복잡한 네트웍이다. 저자는 가상의 맥락에서 역사적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들을 교차시킨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 자유와 평화는 미국이 추구하는 이상이지만 그 자유와 평화는 백인 중산층이 독점할 자유이고 평화였던 게 시대의 비극이었다. 




콜하우스 워커는 자신의 슬픔을 전쟁을 위한 촉매로 썼다.세라를 잃은 슬픔 그녀와 누렸을 행복한 삶에 대한 아쉬움은 고대 전사들이 복수를 다짐하는 의식으로 굳어졌다.247


이민자들은 대부분 이탈리아나 동유럽 출신이었다. (..) 이민자들은 더러웠고 문맹이었다. 몸에서는 생선 마늘 냄새가났다. 상처에서는 고름이 흘렀다. 이민자들은 자존심이라 건 없었고 무보수나 다름없는 삯을 줘도 일했다. 이민자들은 도둑질을 했다. 술을 마셨다. 자기 딸을 강간했다. 별 것 아닌 일로 서로를 죽였다. 이민자들을 가장 멸시하는 자들 중에 아일랜드인 2세들이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들 역시 예전에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다.25


그런 여러 경험에도 불구하고 후디니에게는 우리가 정치적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 생겨나지 않았다. 후디니는 자신이 왜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 합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후디니는 자신의 삶이 보통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혁명적으로 살았는지를 평생토록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후디니는 유대인이었다. 진짜 이름은 에리히 바이스였다 45



결혼 관습과 매춘 관습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도 없습니까 부끄러운 줄 아시오. 63



진실은 여성들은 투표할 수 없으며 원하는 상대와 사랑을 할 수 없고 정신과 영혼을 개발할 수 없고 영적인 모험을 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옘마 골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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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 - 내 인생의 X값을 찾아줄 감동의 수학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3
최영기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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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은 보편적 진술을 찾는 학문이다. 어느 곳에서는 작동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은 보편적이지 않다. 어느 시대에는 사실이지만 다른 시대에는 사실이 아닐때 보편적이지 않다. 항상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는 것 그게 수학이고, 수학의 아름다움이란 이토록 바스러지기 쉬운 사회에서 변하지 않는 성질들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은 또한 인간의 능력 내에서 이해되는 것들에 대한 진술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불변하는 것이란 인간의 눈으로 귀로, 뇌로 불변하는 것으로 아는 것 것들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수학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인지 능력이 닿지 않는 저 너머에 있을 수 있는 예외적 상황에 그 모든을 적용하여 단언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이라는 표현은 무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다루기 어렵다. 아무리 보편적인 개념이라도 ‘모든’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인간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다. 이 ‘모든’을 ‘임의의’라는 말로 바꾸면 난제를 해결된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불변의 진리가 되려면, 지구가 둥글고, 그래서 지구에, 땅에 직선을 계속 그으면 시작한 선과 만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보편적 기초 수학에  여전히 파워를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지구 스케일의 문제가 일상적 스케일의 문제에서는 크게 대두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수학은 철학이자 종교였다.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해석하고 묘사하는 방법으로서의 한 측면과 플라톤의 이데아 처럼 영혼을 고결하게 하는 종교이자 하나의 진리라는 한 측면에서 접근했다. 

“피타고라스는 숫자의 논리적 속성을 통해 어떤 현상에 담긴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또한 숫자 자체에 완벽한 구조를 통해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를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더 높은 세계를 지영은 문학의 된다고 생각했다  “

피타고라스 학파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이 중세에 이르러서 사그러들은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모순되는 진리가 수학의 고결함이 종교화 이상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신을 복원하려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 수학의 발전은 그리스 시대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후퇴해왔다. 저자는 르네상스 시대에 수학의 재발견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하지만 데카르트 이후 수학의 실용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은 수학을 자연과학의 아버지 또는 반대로 자연과학의 시녀로,  논리를 전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했으며, 그리스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이데아라는 목적적 개념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수학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까닭을 생각해본다. 숫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와 미라는 게 무엇일까, 피타고라스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린 숫자는 우리에게 투쟁이 과열화된 사회상을 의미한다. 나는 왜 수를 종교화 하였는지 공곰히 생각해보았다. 하나 둘 셋 수를 세다 보면 무한이라는 개념과 맞닥뜨린다. 무한은 하나 둘 셋 처럼 뚜렷하고 명확한 추상은 없지만, 그것이 밤을 새도 평생을 세어도 끝나지 않은 영원에 가 닿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며, 인간의 수 역시 유한하며, 일상에서 만나는 숫자들은 유한의 숫자들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무한을 만날까. 이 책에 답이 있다. 집합론의 창시자 칸토어는 ‘두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성립하면 두 집합의 농도 즉, 원소의 갯수의 크기는 같다고 정의함으로써 자연수 집합의 농도와 그의 부분인 짝수 집합의 농도가 같음’을 일대일로 대응 시켜 보여주었다. 

저자는 하루살이와 인간의 삶을 비교하면서, '인간에게 하루살이의 인생은 단 하루겠지만 하루살이는 그 하루 동안 짝을 만나 새끼를 낳으며 인간의 100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며,  마찬가지로 1초 안의 시간의 농도와 1조년 안의 시간의 농도가 갖고, 1조년 시간의 농도와 1조 1조 년 동안의 시간이 농도가 갖고... 이런 식으로 1초 안에서 무한한 시간을 느낄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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