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열린책들에서 블루 리커버리 컬렉션을 시리즈로 냈는데, 이 시리즈의 표지들이 마음을 끌었다. 열린책들에서 특별히 블루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여덟 개의 책을 냈는데,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열해보니, 모두 프랑스 현대 작가의 소설이고, 어디로 통통 튕겨갈 지 모르는 유쾌하면서도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있는 중편 분량의 작품들이다. 리커버리 블루 컬렉션의 중 [밑줄 긋는 남자] 외에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와 [달리기]를 읽었는데, 각각의 작품 분위기는 다르지만 대략 열린책들에서 어떤 작품들을 함께 모았는지는 알 듯하다. 프랑스대통령의 모자는 그 전에 읽었고 블루 컬렉션에 있는 책들이 취향저격이어서 나머지도 읽을 예정이다. 오늘은 [밑즐 긋는 남자]부터 소개한다. 


스물 다섯의 싱글. 애인없음. 직업없음. 주인공 콩스탕스의 톡톡튀는 재기발랄함과 솔직함, 그리고 엉뚱함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야기가 어디로 어떻게 튈지 궁금궁금.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 보니 아쉽게도 이야기가 끝나 있고 해피엔딩이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한 상대는 로맹 가리인데 서른 몇 개의 작품만을 남겨놓고 죽었다. 이미 읽은 대여섯 개의 소설을 제외하면 1년에 한 권씩 읽는다고 해도 평생 끌어안고 살아갈 만큼의 갯수가 되지 않는다. 다른 책들을 섭렵해 보기로 하고 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책을 빌려 오지만 빈번한 시점 교차와 수많은 등장인물에 집중하지 못한 채 안구 운동만 하다가 마지막 책인 [오렌지 빛]을 펼치는데 조금 읽다가 다시 흥미를 잃고 책장을 휘리릭 넘기다가 밑줄 친 부분을 발견한다. 


"당신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혹은 중고 서적을 샀을 때, 이전 사람이 밑줄친 것을 보면, 나 역시 왜 이 사람은 이 부분에 밑줄을 쳤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전 독자의 밑줄의 위치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대로 맞아 맞아 하며 공감하기도 한다. 그렇게 때로 밑줄은 같은 책을 읽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약하고 느슨하게 연결한다. 우리의 사랑스런, 심심했던 콩스탕스는 이 밑줄을 계시로 해석하기로 한고 반납을 결정한다. 도서관 직원 지젤은 반납 책을 검사하다가 낙서를 했다며 핀잔을 준다. 억울한 콩스탕스는 펄쩍 뛰다가 자신이 발견한 밑줄 말고 마지막 장에 글자가 써져 있는 걸 알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27쪽)


마침 노름꾼은 대여중이고 도스코예프스 특별 전집에도 그 작품이 있을 거라는 지젤의 권고를 사양하고 꾸역꾸역 대여중인 일반판 노름꾼을 찾아 대여를 하고 밑줄을 찾는다. 여러 부분에서 발견된 밑줄은 자신을 사랑하는 새로운 사랑의 등장이라 믿고 설레발을 친다.  집에 와서 밥만 홀딱 먹고 설겆이 한 번 안하고 돌아가던 남친을 차버린 후 아버지와 아저씨와 생일을 보낸 후 외로움에 지쳐 홀로된 처지를 비관하던 중 밑줄은 새로운 사랑을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밑줄은 계속 그녀를 흠모하여 멀리서 지켜본다는 듯한 암시를 준다. 참을성 없는 콩스탕스는 책의 끝에서 가리키는 다른 책을 계속 찾아가며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를 쫓는다.


메시지가 끊기기도 하고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지젤을 통해 길고도 절절한 편지를 전달하고자 했지만 뜻대로 밑줄 긋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던 어느날. 짜잔 자신이 그 밑줄 긋는 남자라며 나타났는데 기대했던 것처럼 시적이고 괴팍한 천재적 중년이 아니라 다소 소심하고 젠틀하고 배려심있는 평범한 학생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크게 실망을 하고는 돌아선다. 여기까지가 초중반의 내용이고 이후에 잔잔한 반전과 반전이 계속되면서 결국 콩스탕스의 사랑이 진행되는 이야기다. 


천진난만한 스물 다섯 살 싱글 여성의 변덕스런 사랑의 심리를 어쩌면 이토록 사랑스럽고도 솔직하게 그려놓었는지 만족스런 결말임에도 너무 짧아 작가를 살짝 원망할 뻔했다. 한국어판에 붙이는 서문부터 평이한 듯하면서도 참 맘에 들었는데 다른 책은 번역된 것이 없음에도 20년째 절판되지 않고 계속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어줘서 기특하다고나 할까 하는 기분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 작가지만 개성넘치는 캐릭터 드리븐의 유쾌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결코 실망하지 않늘 작품이다. 가독성도 좋아서 정말 술술 읽히고 여러 문학 작품을 매개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많은 소설들의 일부를 엿볼 수도 있다 특히 로맹가리는 콩스탕스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니 모아둔 책에서 한권 꺼내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트랜드에 맞춤 제작한 듯한 표지와 제목, 젊은 감각과 가볍고 쉽게 읽히는 인문서도 아니고 심리서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이런 류의 책을 리뷰에 쓰면 '글자 옆에 공간많아요' 때문에 가차없이 별점을 깍고 싶었을텐데, 젊(어보이는)은 저자의 두번째 책 이라는 눈높이에 맞춰볼 때, 그리고 이런 트랜드의 책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괜찮은 편이다. 


페이지는 종이책 기준 250쪽 정도인데, 챕터 사이의 공백 페이지와 일러스트 빼고 나면, 책을 싫어하는 독자라고 해도 충분히 쉽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개인적으로 일러스트를 좋아하는데, 문제는 종종 이런 일러스트가 책의 이미지에 크게 이바지함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 작가의 이름이 당당히 저자로 이름을 못올리고, 단지 편집자 난에 조그맣게 실리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다. 한 때 문단에서는 (신춘문예) 데뷔 작가와  비데뷔 작가를 구별 혹은 차별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신춘문예 작가가 아닌 그 글을 쓴 작가에게 어떤 기자인지 기래기인지 혹은 다른 작가인지가 작가님이라고 안부르고 누구누구씨 라고 하더란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구별(혹은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 출판계가 아닐까 하고 의심해본다. 


이 책은 솔직히 글보다 일러스트가 더 좋았다. 글이 별로였다는 게 아니라, 책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러스트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에서 풍기는 잔잔한 감각이 글과 함께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글 빼고 그림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러니까 책에 대한 평가에 있어 그림을 빼고 생각할 수가 없는데, 저자 란에는 김혜령 작가만 나오고 일러스트의 이름은 표지 디자이너처럼 작게 표시되어 있는 게 뭔가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지만, 글자옆에 공간많게 하려면 적어도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시적 상상력과 표현력이 심금을 충분히 울려, 그림조차 필요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 내용이 허접하다면 일러스트마저 허접해보였을 것이겠지만. 암튼 그런 생각들을 해봤고.




친숙한 형태의 글이지만 동의하는 대목들, 공감가는 구절들이 자주 눈에 띄어 몇 개 긁어와본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로부터 건강하게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정신적 자립이 되어야 타인에 의한 기쁨에 전염될 수 있다. 연결고리가 그저 손을 잡고 있는 정도라면, 온기를 느낄 수 있고 마주 보고 미소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얽히다 못해 엉켜 있는 경우라면 다르다. 타인으로 인해 일희일비하거나, 내 감정이 나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타인에게 내맡겨진 상태는 위험하다.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남녀나 부부사이 혹은 자식과 부모 사이라고 하더라도, 그 관계가 너무 엉키고 섥힐만큼 의존적이라면 곤란하다는데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홀로는 고독하지만, 둘이서 하나가 되어 버리면 둘 중 하나는 억제되거나 의존적이되어 버려 한 사람에게는 부담으로 한 사람에게는 의존으로 분리 불가능한 관계 속에 갈등을 숨기고 살아갈 것이다. 


책이나 영화, 시, TV 컨텐츠 등에 약간의 심리학적 지식을 버무려 행복이라는 주제에 맞게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책은 진행된다. 언급하는 책들이 많이 읽히는 책들이라 친숙하고, 읽었는데도 까먹었던 내용을 복습하기도 하고, 기억하지만 저자가 얘기했던 방향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읽은 책과 영화에 대해 책에서 이야기하면 참으로 즐겁다. 작가와 뭔가를 공유하는 느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톨킨의 반지의 제왕,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르귄의 어스시 마법사는 세계 3대 판타지라는 말이 떠돈다. 그만큼 많이 읽혔다는 소리인지, 판타지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소리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 '3대' 시리즈라고 하는 세 작품들 중 《반지의 여왕과 나니아 연대기에 비해 어스시의 마법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어스시 마법사가 영화화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영화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든다고 해서 르귄이 승낙을 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그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이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머나먼 바닷가를 원작으로 해서 게드전기를 만들었는데, 평단과 흥행 모두 "망했어요"였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100만달러를 유일하게 넘긴 나라가 한국과 프랑스인데, 한국의 경우 23만 정도였다고 하니 세계적으로는 대략 얼만큼 망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르귄 원작의 영화로 치지 않은 이유는 영화가 망해서가 아니다. 르귄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는 내 영화가 아니라고 했을만큼 원작을 크게 훼손시켰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2 부작 드라마로도 만들었다고 해서 찾아보니 유튜브에 돌아다녀도 누가 저작권 시비를 걸 만한 가치도 없을 만큼 사실 여기 언급할 언급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성인물(?)의 일종 같다. 


일단 반지의 제왕이나 어스시의 마법사 수준으로 대형 실사 영화화가 되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의 피부색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자기들 스스로가 하얗다고 생각했던 백인들이(내 눈에는 백인들 피부가 하얘 보인적이 별로 없다. 실제로 아이들이 아닌 경우에는 죄 태워서 구리빛을 갖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구리빛 대신 벌겋거나 뭐 여러 지저분한 색을 만들고는 하얗다고 하는 거 같다). 지금은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많이 달라졌지만, 오랫동안 헐리우드 영화판을 주도하는 곳에서 백인이 주인공이 아니면 전세계의 관객이 작품을 외면할 것이라 생각해서인지, 백인이 아닌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걸 아주아주 꺼려했을 것이다. 주인공의 피부색이 '순수 백인 혈통'이 아닌 경우 대개 저자와의 협의로 영화가 흥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인공의 인종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어스시의 독자들과 르귄 저작권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다. 여기서 주인공의 색은 '붉은'색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실 나는 르귄의 열렬한 팬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피부색을 붉은 색으로 묘사한 부분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백인의 눈으로 볼 때 원주민들의 피부색을 지칭하던 색이었던 거 같고, 그런 색의 묘사 자체 역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 소설은 수십년 전에 쓰여졌고, 그 때의 사고 방식과 지금은 다를 수 있으니까, 그것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어쨌든 백인으로서 르귄의 소설 속 우위를 점하는 캐릭터는 백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인류학을 전공하고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인권에 헌신했던 학식있는 부모님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자라면서 함께 보아온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교감 그런 것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르귄은 페미니즘 작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소설은 르귄의 초기 소설 10년, 페미니즘에 영향을 받기 전에 쓴 소설이라,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여성 배제(?)적인 관습을 그대로 수용했다. 패미니즘을 주도하는 SF 소설가들에게 당연히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면을 다분히 많이 갖춘 소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을 키워준 여자 마법사에 대한 설정이 그렇다. 후에 마법사로 성장하는 주인공 게드의 능력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키워준 마법사 이모는 그저 작은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잘한 마술만을 펼치는 소시민적 마술사로만 그려질뿐 별 비중이 없다. 작품 전체에서 다른 여성의 비중도 거의 없다. 오죽하면 명예남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향후 르귄은 철저한 자기의 작품 비판을 수용하고 진정한 페미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작품 세계에 돌입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소설의 내용과 분위기는 대략 이렇다. 거대한 대양 위에 점점이 박힌 군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용이 나타나고 배와 바람만이 섬 사이의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마법사들이 각 섬 혹은 각 마을마다 배치되어 마을의 대소사와 질병 등을 관리한다. 마법을 통해 마을을 위기에서 구한 게드는 그 마법의 에너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가 위대한 스승을 만나지만, 그저 조용하고 고요한 삶을 사는 스승을 뒤로 하고 더욱 강력한 마법을 갈구하며 마법학교로 가고 거기서 뛰어난 능력으로 마법의 힘을 과시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그림자의 존재와 맞닥뜨리게 된다. 


해리포터의 마법학교 이전에 이미 마법학교가 주요 서사의 배경으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마법사의 돌도 나오고, 볼더모트의 이름 대신 you know who라는 불리던 상황이, 이 소설에서 사물의 진정한 이름에 그 힘이 들어있다는 진명 사상의 모티브와 연결된다.  이 정도면 르귄 측에서 롤링을 저작권 침해로 고소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르귄 역시 마법적 요소들을 수없이 많은 신화와 이전 작품들에서 차용했다고 하고, 해리 포터 팬들의 규모와 영향력을 봤을 때 이런 소리 했다가는 돌맞기 쉽상이라 함부로 표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조심스럽고, 무엇보다도 작품의 결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이 소설을 영화화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전체적인 주제와 완벽한 합일을 이루는 결말을 스펙터클한 엔딩과 선악의 선명한 구분을 필요로하는 영화적 관점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화를 하려면 선과 악이 명확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르귄 작품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마법의 능력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악의 그림자와 대면하고, 이후로 그 그림자에게 쫓겨다닌다. 쫓기거나 무언가를 쫓고, 길위의 무언가를 향하는 여정 속에서 여러가지 모험을 하는 이야기들은 초기 르귄 작품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쫓기고 또 쫓기는 게드는 위대한 스승의 조언으로 그림자와 대면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쫘잔... 그가 그림자를 대면하기로 마음먹고 그림자를 쫓기 시작하자 그토록 자신을 위협하던 그림자는 이제 도망을 간다. 


결국 이 소설은 그림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고 긴 여정이다.  십대들을 위해 처음 쓰였다고 하는데,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익숙한 어른들에게 더욱 감동스러운 엔딩을 주는 책이다. 그림자는 무엇일까를 알게 되는 순간, 르귄이 인도하는 세계, 관습을 깨고, 편견을 깨고, 짧은 진실 같은 것이 스치쳐 지나가는 순간을 대면하게 되는 게 그것이다.  그림자의 실체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주인공이 찾는 과정이고 주제다. 


그림자는 무엇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먹고, 건강하게 사는 법>이란 건 어쩌면 허구가 아닐까 싶다. 각 개인마다 타고난 유전자가 다르고, 식습관이 다르고, 환경과 생활 방식이 다른 상태에서, 어떤 한 음식만 먹으면 건강해진다, 혹은 어떤 한 음식은 완전히 배재해 버리라는 식의 가이드는 내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 이 책에 있는 내용은, 저자가 책 뒤에 제시하고 있는 참고서적들(대중건강서)에 기반하고 있는 내용인데, 그래서 그런지 대충 무난한 내용이다. 뭐 갑자기 우리가 건강식품이라고 알던걸 갑자기 전복시키거나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약 십여년 전부터인가 우유 한 컵이면 대충 허기도 달래고 몸에 필요한 영양소도 보충할 수 있다는 생각을 뒤집는 책들이 우유의 해악을 강조하는 걸 자주 봤었는데, 여기도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고기보다는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많이 섭취하라는 것, MSG가 해로우니 인스턴트 식품을 줄이고 운동을 하고, 명상과 복십호흡 건강한 식습관으로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강서들은 읽을 때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많고 많은 이론과 주장들 중에서 저자들의 관점을 지키기 유리한 결과들만을 선택적으로 가져와 완성시킨 한 권의 책이라는 사실이다. 책. 책이다. 누구도 자신의 건강을 지켜주지 않는다. 이런 책의 저자들이 책을 써서 얻는 이점은 물론 건강한 식습관을 널리 알리는 게 첫번째 목적이긴 하지만 부수적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건강 교실(?)도 홍보하고, 강연도 나가고 하는 방법으로 하나의 자기 개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책에 자신의 건강을 모두 맡기면 안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왜냐하면 책이 당신의 건강을 책임져주지 않으니까. 아프면, 탈이나면 병원에 가야 한다. 결국 몸을 망치고 났을 때 그걸 수리하는 건 의사들이다. 


전에 내가 아마도 <그레인브레인>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 책을 읽고 하도 감명을 받아, 엄마를 사다 줬는데, 좋은 정보가 많다며 줄을 그어가며 읽으셨는데, 어느날 쓰러지셨다. 심혈관 계통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검사를 했지만 원인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했고, 그 와중에 여러가지 문제들을 발견, 그 중에서도 콜레스테롤이 수치가 매우 높다며 처방을 했는데, 엄마가 의사에게 아주 당당히, 똑똑한 4학년 짜리 여자 아이처럼, 그건 안먹겠다고 하신다. 책에 써있는 내용을 그대로 읊으면서..거기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콜레스테롤이 심혈관 질환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다며, 스타틴 계열의 약에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는 말이 강조되어 있었다. 의사는 그런 약물은 퇴출되었으며, 여기서 처방하는 약은 부작용이 없는 것이며, 현재 수준의 콜레스테롤이 그 연세에 위험할 수 있고, 가장 중요하게는, 현재 콜레스테롤의 위험성은모든 의사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책을 읽는 사람 중에 전문가가 있다면 견해를 들업고 싶다. 


콜레스테롤 저하제는 오히려 수많은 질병을 양산하는 유도제가 되어 버렸다. 사실 콜레스테롤은 세포막과 신경막, 뇌와 남성 호르몬의 구성 성분으로 우리 몸에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다. 콜레스테롤은 간에서 필요한 만큼 만들어내는데, 스타틴계 약물은 간에서 콜레스테롤 만드는 것을 차단한다. 그래서 장기 복용 시 뇌세포에 콜레스테롤이 부족해져 치매가 유발된다. 1980년대 중반, 스타틴계 약물이 많이 팔린 뒤로 치매 환자, 발기 부전 환자가 급증한 것도 이 같은 까닭이다. 그러니까 치매약과 비아그라는 콜레스테롤약이 만들어낸 새로운 약이다.


노인이 되면 더욱 고집스러워지셔서,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으시는 엄마에게, 다시 약을 드시게 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짐작도 못할 거다. 여기서도 약은 천하에 나쁜놈 취급하고, 음식으로 건강을 지키자는 얘기인데, 내 생각에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이건 어느정도 건강한 사람들이 약의 오남용으로 인해 피해를 볼 때의 이야기이지, 심각한 당뇨병이나 약을 통해 조절해야 하는 단계의 대사 장애에서는 투약 및 통원 치료 거부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해독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데, 이 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자연치료는 말만 풍성하고 실제로 알아먹을 수 있을 만큼의 정확한 메카니즘을 보여주지 않는다. 과일과 야채 쥬스 같은 게 해독작용을 한다고 하는데, 독을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독이고 해독작용을 한다는 간과 신장에 어떤 식으로 작용해서 쥬스 하나가 해독작용을 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한국인이 너무 많은 약물에 의지하는 것 그리고 약이 약인 이유는 약리 작용 뒤에 독성이 숨어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생각을 같이한다. 한약이건 양약이건 건강식품이건 뭔가를 축출해서 어떤 증상을 겨냥해서 만든 거라면 그 속에 알게 모르게 증상을 완화하는 그 똑같은 성분이 가지는 반대의 작용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카더라 발 정보도 숱하다. '미국 사람들의 사망 원인 3위는 의약물 남용이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많다'라는 문장은 출처와 조사 시기와 오남용 실태 등의 상세한 내용을 정확히 명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연대감이 건강에 좋다는 건 동의가 되지만 일본사람들의 수명이 세계1위인 이유를 사회적 결속과 연대감 때문으로 보는 견해는 별로 공감되지 않는다. 그들의 (정치적) 단결이 따스한 연대감의 산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북한 사람들은 100살까지 살아야 된다.


복식 호홉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이게 이해가 잘 안된다. 숨은 폐로 쉬는 건데, 그러니까 공기는 배를 볼록하게 만들던 홀쭉하게 만들던 상관없이 폐로 들어가서 뭐심방이니 심실이니 하는데를 들러 혈관을 돌아다니다면서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걸로 배웠는데, 그 들이쉰 숨을 어떻게 배로 보낸다는 말인가. 5초동안 숨을 마시고 2초동안 멈춘다고, 몸의 구조가 바뀌어 폐가 배로 내려간다는건지. 아니면 들이쉰 숨이 기도로 가는 대신 소화기로 들어가 위속에 가서 풍선처럼 배를 부풀린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까지는 그냥 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 크게 숨을 쉬라는 비유 정도로 알아들었는데 다음 문장을 보니 더더욱 아리송하다.


복식 호흡의 방법은 간단하다. 코로 5초 동안 숨을 마시고 2초 정도 멈춘 다음, 배로 내려보냈다가 입으로 10초 정도 후 하고 내뱉는다. 5초 들숨을 10초까지 늘릴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어쨌든 이 책(완전소화)을 읽으면 또 혹 하고 과일식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매 챕터마다,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게 과일 섭취의 중요성이다. '오전 공복에 과일을 섭취하면 체내 독소 배출을 도와서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한다. 식전 과일은 효소를 공급해 소화를 도와주고, 현미 등 통곡식과 푸른 야채는 대장 기능을 활발하게 만든다.'는게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신선한 야채와 통곡식이 몸에 좋다는 걸 반대할 사람은 크게 없을 것 같다. 다만 그걸 위주로 먹어야 한다는 말에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거 같다. 과일에 다량 포함되어 있는 과당이 중성지방이 되고 단백질 결합하고 산화하면 혈관에 흡착한다는 뭐 그런 비슷한 말도 딴데서 들었다.


무엇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건 의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한 가지 책을 읽는 사람의 건강을 책을 쓴 사람이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것, 문제가 생겨서 위급한 상황을 수습하는 곳은 국제적 표준 절차에 따라 시술이든 투약이든 해서 사람을 살리는 병원이라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 서재에 마가렛 애트우드의 원서 Testaments가 종종 떠서 무슨 일인가 봤더니, 시녀이야기 2탄이라는 부제들이 딸려다닌다. 원서를 찾아서 읽는 독자가 많을 정도로 애트우드의 위상이 한국에서 이토록 높은 지는 알지 못했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지목되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녀이야기 자체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기도 하려니와, 패미니즘적 정서를 높은 수준의 독특한 SF 적 상상력으로 담아 내고 있어서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내 경우 흥미롭게 읽히기는 하는데 원초적인 자극을 지향하는 느낌이어서 그닥 내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책을 들으면 계속 궁금하게 끝까지 읽게 하는 다이나믹한 서사의 힘을 강하게 분출하는 작가라 언제라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책을 많이 샀다는 뜻)









이 쯤해서 시녀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자. 조지 오웰적 디스토피아에 여성의 인권이 사라진 시대를 그렸다. 사실 주제의식이 너무 선명한 작품은 식상할 것 같고 오웰적 디스토피아라면 읽기 힘들 거 같아서 책을 사두고도 오랫동안 펼치지 않고 미루어 두었다. 읽은 소감을 거칠게 정리하자면《1984》에 《안나의 일기》를 섞어놓은 느낌이다. 애트우드 특유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엽기적 장면을 배합한 수작다. 유명 작품은 유명한 이유가 있다.


오웰의 《1984》가 상상의 사회이기는 하나 누구라도 스탈린 통치의 소비에트 연방을 모델로 했다는 점을 알수 있게, 그 사회와 유사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이 작품을 보면 무슬림 근본주의가 장악한 아랍권의 어느 나라들을 떠오른다. 암울한 어떤 미래를 그린 것이 아니라 소설의 출간 시점인 1985년에서 근미래 혹은 현재 역사를 바꾸고 상상의 사회로 대체한 듯 하다. 동시에 해당 서사의 액자 바깥의 에필로그에서 150년 후 미래의 관찰자들을 두어 대체 역사가 이어진 이후의 만 미래가 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까지 입체적 시각을 보여준다.

에필로그에서 드러나는 이 이상한 계급 사회의 이름은 길리아드이고,  소설의 이야기 전체는 길리아드가 해체된 후 한 여성이 카세트 테이프의 음악 사이에 남긴 기록으로 밝혀진다. 기록이 발견되어 심포지엄이 열린 시기는 2195년으로, 이 기록의 발견은 길리아드 시대에 핍박받은 여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의미있는 역사 기록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기록물의 진위 여부 또한 확실치 않다. 만일 조작되었다면 은폐된 시대를 조명하는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의 필요성 만큼이나, 조작 자체가 내포하는 20세기 말의 역사적 시대적 의미를 대변한다. 에필로그가 전체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본문이 고통받는 한 개인을 그렸다면 에필로그는 본문의 화자가 겪은 사회가 전체 인류 역사에서 갖는 인과 관계를  다룬다. 그러므로 에필로그가 비록 짧고 뜬금없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처했던 짧은 길리어드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우리가 안나의 일기에서 갖는 감정은 단순하다. 피상적으로만 들리는 홀로코스트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 개인이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옥죄어오던 삶 속에서 느끼던 공포와 불안의 나날의 생생한 기록은 바로 감정이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본문의 화자(오브프레드 OfFred) 역시 길리어드로 가는 전조 증상에 무감각하게 노출되지만, 본인이 직접 그 사회의 희생양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매일 뉴스에 폭력과 공포가 보도되는 불안한 사회 속에서 그 무엇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평화로운 듯 일상을 살고 있다. 그것은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왔고 끓기 얼마 전까지도 무지로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즉시 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자기도 모르게 끓는 물에 익어 죽어 버리는 거다. 물론 신문에는 많은 뉴스가 있었다. 도랑이나 숲에서 발견된 시체들, 둔기에 맞아죽거나 사지가 절단되거나, 속된 말로 성폭행당한 시체들. 하지만 그런 건 다 다른 여자들 이야기였고, 그런 짓을 하는 남자들도 다 다른 남자들이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신문에 나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겐 꿈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꾸는 악몽처럼. 진짜 끔찍하지 않니 하고 우린 말하곤 했고 실제로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끔찍하다는 게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신파조여서 우리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만 같았다. 우리는 신문에 이름이 오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신문 가장자리의 여백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훨씬 더 자유로웠다. 우리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간격 속에서 살았다.”(본문 인용)

하지만 신문 속 이야기들은 간격을 점점 좁혀오고 결국 그녀와 모이라가 신문에서 나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끔찍한 이야기.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공포 속의 주인공.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이제껏 모아온 계좌 속의 돈이 더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가게에서 카드 결재를 시도할 때 깨닫게 된다. 직장에서 당신들은 해산되었음을, 더이상 직업을 가질 수 없음을 알려준다. 대통령이 사라지고 국회가 해산되고 계엄군이 정치적 주최가 되었을 때까지, 그건 나의 일이 아니니까 상관없었던 일들이, 계좌가 동결되고 여성이 인간의 자리에서 밀려나 어떤 다른 무언가가 도구인지 소유물인지 알지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그에 따라 어느날 갑자기 법적으로 재산은 물론 직업조차 가질 수 없게 된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 모든 전조들이 결국은 나의 이야기였음을 이해한다. 


그렇다. 방관하면 그 방관의 대상이 어느 새 나의 이야기가 되어도 더이상 그 이야기를 들어줄, 저항의 공간이 사라진다. 망명 계획은 허술했고, 함께 도망치던 남편은 생사조차 모르고 아이는 빼앗겼고 자신은 정신 교정을 받고 어느 사령관의 집에 보내진다. 사령관의 집에서 사령관의 시녀가 되었다는 의미는 단순하다.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다. 자궁일 뿐 한 인간이 출산 이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聖杯)다.”(본문 인용)

핵전쟁과 환경 파괴 환경 오염 성병 등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이렇다. 불임이 늘고 인구가 줄자 사회는 불안해지고 폭력이 만연하는데 패미니즘의 영행으로 여겅의 인권이 신장되고 직업과 재산을 가진 여성들이 늘자 사회 불안을 ‘성경’에 반하는 여권 신장으로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에 따라 여성의 인권, 재산, 직업, 아이까지 강탈한 후 임신 가능한 여성들을 불임 가정에 보낸다.이런 씨받이들의 사회적 구분은 시녀라고 불리는 계급이고 만일 출산에 성공하지 못하면 콜로니로 유배되어 방사선이 노출된 채 핵폐기물을 치우며 폐기된다.

자신의 이름조차 잃고 주인의 소속으로 오브 주인이름의 형태로 불리는 시녀들은 의복의 색깔이 결정하는 신분이 요구하는 역할 즉 출산 이외에는 아무 존재 의미가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빈궁이라 불리는 불임의 아내들이다. 워낙 인구가 줄고 있어 성공적인 출산이 진급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시녀의 역할은 필요악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은 이 씨받이 시녀들에게 경멸감을 숨기지 않는다. 여기에서 근원적 모순을 본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구조적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계층을 얼마나 경멸하고 멸시했던가. 필요해서 가두고 남편과 섹스를 강제하면서도 그 행위에 의한 혜택은 자신과 남편이 공유하게 될 것이면서 마치 시녀들의 태생이 더럽다는 듯이 자기 남자를 유혹해서 빼앗는 사람을 대하듯 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출산을 의한 섹스에 은밀한 공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터코스에 매뉴얼이 있는 건지 의식이 치러지는 날은 무슨 종교 의식처럼 경건함을 추종한다.

쓰리섬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형식적이고 엽기적이다. 시녀와 몸을 포갠 아내들은 숨죽여 울며 아이를 만드는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출산은 더더욱 엽기적이다. 그것은 구역의 축제다. 고대 이교도들의 새디스트적 봉헌 의식에 가깝다. 모든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출산의 고통을 맞는 시녀와 그것을 지켜보며 정신적으로 고취되어 그의 고통을 경험하는 분위기가 그렇다. 해당 아내가 두 개의 출산 의자 중 윗 의자에 앉아 출산자와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케어를 받고 소리까지 지른다. 그렇게 하면 시녀가 낳은 아기가 마치 자신의 아기라도 된다는 듯이.

나치가 그러했듯이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수많은 죽음이 전시된다. 공포는 단기간 내에 정권을 확립하는 데 효과가 있다. 한 마디 말이 한 발자국의 어긋난 경로가 혹은 나도 모르게 비어져 나온 웃음이, 참고 참아도 통제할 수 없어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자신에게 하얀 올가미를 씌우고 바람에 휘날리는 빨래처럼 목매달 수 있다는 걸 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오늘을 살며 오늘을 믿을 수 없는 오브프레드는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을까.

“그렇게 믿을 필요가 있다.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심지어 아무도 없더라도 말이다.”(본문 인용)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밑줄)

인간의 육신이란 풀잎 같아. 자기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하느님이 남자들을 그렇게 만드셨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어. 여자들은 다르게 만드셨지. 선을 긋는 건 여러분에게 달린 거야. 그러면 훗날 그들이 여러분에게 고마워할 거야.

행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끔 이렇게 문득 비치는 정상적 삶의 흔적이 매복하고 있던 병사처럼 옆에서 나를 덮칠 때가 있다.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 세찬 발길질처럼 과거를 환기시키는 것들. 문맥에서 떨어져 나온 행주 한 장을 보며 나는 그만 헉 하고 숨을 멈춘다.어떤 사람들에겐, 어떤 면에선, 세상이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게 아닌 것이다.

“누가 목욕을 시키지? 나는 이 닭을 보들보들 연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리타였다. 내가 아니라 코라한테 한 말이다. “내가 나중에 할게요. 먼지 털고 나서.” 코라가 말한다. “그럼 되겠네.” 리타가 말한다. 두 사람은 내가 귀머거리인 양 말한다. 그들에게 나는 집안일, 그것도 숱한 일거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나 또한 메마르고 하얗고 딱딱한 과립형 분말이 되어 있다. 마치 그릇 가득 담긴 말린 쌀 속에 손을 담그고 휘젓는 느낌이다. 꼭 눈송이 같다. 어쩐지 죽은 듯한, 버려진 듯한 느낌이 감돈다. 나는 마치, 한때는 갖가지 사건이 일어났으나 이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방 같다. 창 밖에서 자라는 잡초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아 들어와 마룻바닥에 먼지처럼 쌓일 뿐.

너희처럼 젊은 사람들은 고마운 줄을 몰라. 너희에게 이런 세상을 만들어 주려고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저 친구 좀 봐, 당근을 썰고 있잖아. 바로 저걸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몸을 탱크가 밀고 지나갔는지 모르는 거냐?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말이란 결코 정확할 수 없으며 언제나 뭔가 빠뜨리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너무 많은 단편들이 있고, 관점들이 있고, 반목들이 있으며, 뉘앙스가 있다. 이런 의미도 저런 의미도 될 수 있는 몸짓들이 너무 많고, 말로는 절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길 없는 형상들도 너무 많으며, 허공에 떠다니거나 혀끝에 감도는 향(香)도 수없이 많고, 어중간한 색채들도 한없이 많다.



나는 그 여자에게서 뭔가를 빼앗고 있었다. 좀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빼앗은 것은 그녀가 전혀 원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쓸모도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거부한 것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여전히 그건 그녀 것이었고,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신비스런 ‘그것’을 내가 빼앗아 버린다면, (사령관이 내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극단적인 감정이라고 여기는 것을 나는

출생률이 다시 일정 수준을 회복하면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지 않아도 될 테지. 인력이 많아질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애정의 유대가 생겨날 거야.

나는 기억한다. 혀가자미, 대구, 황새치, 가리비, 참치, 속을 채워 구운 가재, 분홍빛 통통한 살을 지글지글 구운 연어 스테이크. 그것들이 전부 고래처럼 멸종되어 버렸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