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봄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4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뭔가를 아주 잘 아는데 아무리 애써도 그게 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



 저 한 마디로 시작하는 소설. 그 앞의 책날개엔 이러한 소개가 있다.




 1890년 영국 데번에서 미국인 프레더릭 밀러와 영국인 클라라 베이머 부부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고 열여섯 살 때 파리로 이주해 학교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다. 1912년 영국으로 돌아와 2년 뒤 아치볼드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했고 1차 대전 시기에 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으로 데뷔했다. 1976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BC 살인사건' 등 80여 편의 추리소설을 집필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출간 직후 애거사는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등에 큰 충격을 받고 스스로 실종 사건을 일으키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내지만, 이때의 사유를 바탕으로 1930년부터 1956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정원의 여자, 39세의 피부가 희고 꼿꼿한, 부유한 집안의 잘 교육받은 여자. 뭔가를 경험하여 타인에게 보일 동정심이 없는 여자. 일요일에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페스트리, 수플레, 볼로방. 프랑스어와 상상 속의 친구들. 간결하게 힘을 빼고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밤새 이야기해나가는 여자. 바로 '두번째 봄'의 셀리아의 이야기인 동시에 메리 웨스트매콧의 이야기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다른 이름은 고스트 라이터일 수도 있고,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애거사 크리스티와 메리 웨스트매콧이 될 수도 있다. 이미 굳어진 지문을 피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의 자기 이야기. 이 책은 한낮에 읽다 쉬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잘 읽기 위해서라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첫 장을 펼쳐 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쭉 읽어야 할 것이다. 셀리아의 이야기엔 그런 그림자가 있다. 어디까지가 내 엄마이고 어디까지가 아빠의 부인일까? 어느 구름 뒤에 해가 있고 어느 구름 뒤에 폭우가 숨었을까?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불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다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애거사 크리스티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자신의 자서전에도 빼놓을 만큼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나는 지금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의 앞면과 아무도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거울에 비추어보는 독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아는 추리소설의 여왕, 데임 작위의 애거사 크리스티. 직업의 성공, 유복하고 풍요로운 유년, 탄탄한 자기 세계. 숨죽여 울고만 싶고 돌아가고만 싶은 어머니의 품속, 이제 더는 없는 그 온기. 누구보다도 가까이하고 싶었던 세계가 점점 멀어져 가고 급기야는 자신을 아프게 할 때의 탄식. 글 앞에서 한없이 강하다가도 겸손해지는 작가의 자의식. 이 모든 것이 바로 메리 웨스트매콧이었다. 바로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림자.


 


 단어, 낱말, 문장, 문단, 이야기로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 작가로서의 애거사 크리스티가 있었다면 하나하나 과거를 되짚어가는 메리 웨스트매콧이 있다. 그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일 수도, 남편의 외도일 수도, 이혼, 혹은 자살 시도일 수도 있다. 아니다. 그것은 방아쇠에 불과하다. 이야기 속 셀리아가 반해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고 너무나도 사랑한 더멋같은 남자는 아무리 부모의 죽음과 배우자의 외도, 이혼과 자살 충동을 겪어도 이렇게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듯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셀리아가 지닌 이야기에의 열망, 자신을 돌아보고자 함에서 오는 성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삶에 대한 오만함의 삼위일체가 빚어낸 때늦은 결과물이다. 삶의 상징은 그런 것이랍니다. 라고 말하는 나직한 작가의 목소리. 만약 삶이 우리 앞에 기호로 놓여 있다면, 사는 것은 한결 간단할지도 모른다. 아예 간단함을 넘어서 정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1:1로 해석할 수 없는 것.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무엇. 상징은 그러한 것이고 사는 것 또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어떤 여자일까?' 하는 케케묵은 질문일 수도, 핀에 찔린 나비가 너무 불쌍한데 그 나비를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자 아이일 수도, 화가의 글로 남은 셀리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에 걸린다. 





 셀리아에게는 친절도 동정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헛되이 소진해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알았듯 그녀는 그런 점에서 바보 같았다. 그녀는 너무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베풀 동정심이 없었다. 입가에 새겨진 깊은 주름은 그녀가 지금까지 참고 견딘 커다란 고통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이내 내게도 '어떤 일이 일어났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우리는 동등했다. 그녀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고, 날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내 불행은, 그저 내가 어떻게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는 그녀의 결심을 알아보았는가를 이해하는 근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타오른 불길과 거친 물결에 투신했던 사람은 길에 버려진 동물에게 품을 동정심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오히려 커다란 재앙에 효율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감정은 빨리 지나가지만 깊은 통찰은 바뀌지 않는다. 감정을 버리고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걸었던가. 탕플 감옥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 직전에, 골든 게이트 브릿지에서 투신자살하는 이들이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리고 셀리아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총을 든 남자에게서 도망쳐 다시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이들은 다들 모종의 위험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남은 사력을 다한다. 이때 작품 속에 녹아드는 작가의 목소리. 





 그렇다. 나는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어찌됐든 그녀가 무너져 항복할 때까지-그녀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쓸 수 없는 화가가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라는 듣는 이의 결심은 곧 메리 웨스트매콧이 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마음이다. 커다란 파도 앞에서 당시에는 정신을 잃었지만, 지금은 더는 잃을 정신이 없다는 이의 마지막 자의식. 남편의 외도 앞에서 셀리아의 모든 정신은 남편에게 가 있다. 남편의 여자에게 가지 않는 그의 놀라운 강인한 자의식 앞에서, 메리 웨스트매콧이 되어야 했던 애거사 크리스티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작가가 늘 앉던 책상 앞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했을 때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읽고 싶은 마음. 스스로가 창조한 세계가 아닌, 창조한 세계 속에서 숨 쉬던 자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하여 어렸을 때, 핀에 찔린 나비를 보고 괴로워하고, 아주 드높이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한 산이 멀찍이 있는 모습이 실망하고, 아빠가 죽었을 때 엄마에게로 가서 '아빠는 천국에 갔어요. 계속 아빠를 불러서 휴식을 방해하고 싶진 않죠, 엄마?'라고 착하게 말하는 여자아이를 만나는 마음. 





 이야기 마지막, 셀리아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녀는 서른아홉 살에 돌아갔다....성장하기 위해....'라고 말한다.

 아, 이 한 가닥 자만심이라니! 

 책장을 덮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 글귀에서, 이 오만한 추리소설의 여왕이 남긴 채찍질은 너무나도 근엄하여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도록 느꼈던 모종의 일체감이 경외심으로 바뀔 지경이었다. 셀리아가 서른아홉 살에 돌아간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던 그가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였다.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는 정리된 손길, 삶이 간혹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호가 아닌 상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 동정심과 상상력, 어머니의 따스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 힘을 탕진해버릴 수 있는 책임감. 가짜를 가졌을 때는 진짜를 가질 수 없는 법. 




 애거사 크리스티는 아마도 이 소설을 쓴 다음에야 자신이 직조한 추리소설로 한결 가볍게 돌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 큰 일과 작은 일. 굵직한 사건과 조그만 느낌. 큰 결심을 뒤로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가 들려주는 자기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유모가 잠자리에서 입에 넣어주는 달콤한 과자, 아름답고 다정한 어머니와 자상한 아버지.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 아버지의 죽음 이후 좀 이상해 보이는 어머니. 늘 자신만만한 할머니, 사교계! 너무나도 원했기에 손에 쥐기를 오히려 주저하는 겸허한 사랑, 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랑. 자신의 것을 최대한 지키려는,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낼 수 있는 당당한 목소리. 자신을 닮지 않아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없는 딸. 그 사이를 적시는 것은 어머니의 미소, 아버지의 목소리. 남편의 포옹, 딸의 냉정함. 사람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의 셀리아. 혹은 홀로 정원에 앉아 굴렁쇠를 하마라고 상상하는 셀리아. 정원에 나가면 그 어린아이가 앉아 공상하고 있었고, 집안에 들어가면 마호가니 가구 사이를 뛰어다니는 어린 셀리아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셀리아, 전쟁 중의 셀리아. 더멋과 결혼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다 주려는 셀리아......





 이 모든 것이 당신이에요. 라는 목소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짙어진다. 

 메리 웨스트매콧이, 셀리아가, '나는 바보였어요. 다른 여자들에게는 다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을 펼치면 그가 거기에 있다. 책을 읽으면 그가 거기에서 서성인다. 그는 셀리아이기도 하고, 셀리아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모든 것을 부수는 총을 든 남자이기도 하다. 셀리아가 너무나도 사랑해서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된 더멋이기도 하고 죽도록 머리를 쓰며 살아온 셀리아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무엇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책장을 덮은 나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받아쓴 메리 웨스트매콧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셀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단 한 사람만이 어렴풋이 짐작할 뿐, 이야기 속의 모든 인물은 우리에게 이렇게 늘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우리의 읽는 눈과 말하는 입이 앞으로도 이야기 속의 그들과 오버랩되는 삶을 살며 무언가를 느낄 것이며, 그 모든 것이 모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실마리를 조그맣게 남긴 채.






 출발 경적이 울렸고 나는 뛰어야 했다......

 그래서 내게 그런 인상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인상은 아주 선명했다.

 공포......그리고 안도.

 안도라는 말은 너무 약하다. 그 이상의 것이었다. 구제가 더 적절한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은 총을 든 남자였다. 그녀에게 공포를 상징하는......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쫓아다녔던 총을 든 남자......

 그녀는 마침내 그를 똑바로 대면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 같은...... 




따옴표 속 모든 말은 책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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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01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iforte 2015-09-1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노페디, 제 알람음악입니다. 어떤 음악을 알람음으로 써도, 아침마다 그 음악이 `hate`해지던데..ㅋㅋ 유일하게 질리지도, 화가 나지도 않고서 제 잠을 깨웁니다. 신기하죠? ㅋㅋ
오늘도 일 중간에 잠깐 들려 자알 쉬다 갑니다. 잘 계시지요?

iforte 2015-09-10 01:01   좋아요 0 | URL
아.. 근데 개인적으로는 Gnossiennes를 더 좋아합니다. 특히 3번 & 4번. 혹시 Elegy란 영화를 보셨는지. 저 음악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장면을 찾지 못하겠다 할 정도로 적절한 장면에서 묘하게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놓더군요.

Jeanne_Hebuterne 2015-09-17 14:31   좋아요 0 | URL
iforte님, 제 지인은 짐노페디를 듣더니 대뜸 `마음이 가라앉습니까? 우울함에 젖어드나요?` 이렇게 성우 나레이션 흉내를 내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한때 프로작 광고음악으로 짐노페디를 쓰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에 관한 기억은 이렇게나 다른가 봅니다. 저는 어느 겨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이 음악을 계속 반복해 듣던 겨울날이 떠올라요. 차갑고 청명한 느낌이 들었는데 iforte님은 알람 음악으로 활용하시는군요.

요즘 고양이 꼬리를 따라다니느라 문화생활을 도통 하질 못했는데 iforte님 글을 보니 영화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imdb를 찾아보니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영화가 뜨는데, 도서관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19금. 스포일러 있음.
































시간은 흘렀고, 엔터테이너는 예술가가 되었고 그때의 소녀는 색정광이 되었습니다. 자, 이제 총소리가 들렸으니 웃음을 지을 차례입니다. 그것은 귀찮아서 하지 않으려다 끝내 졸라서 하고야 마는 사정 같은 흔적에 불과하니까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보는 일은 늘 도식적일지언정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도그마 선언은 20년 전에 이루어졌고 이제는 원더키드가 그리던 그해가 되었으니 옛일 곱씹는 노인 같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화면을 응시하는 일만 남았어요. 모름지기 비평은 원작의 뒤꿈치를 조용히 따라가는 일. 감상은 작가의 눈을 응시하는 일. 말하지 않음으로써 의견을 말한다는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난히 늙어버린 눈매를 드러내며 그러나 웃을 때도 종종 있어야겠지? 하고 계산한 듯한 라스 폰 트리에의 스산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네, 당신과 함께 혹은 당신 없이. 안티 크라이스트(2009), 멜랑콜리아(2011), 님포매니악을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증 3부작이라고 부릅니다만 님포매니악을 그 안에 넣을 수 있을까...... 좀 망설여집니다. 형벌 3부작. 섹스 트리오. 안티 크라이스트 3 명. 그 사이 교집합은 여자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늘 빛과 그림자, 현상과 그림자, 깊이와 그림자, 상징과 그림자를 넣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에 꼭 그림자가 들어가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식이 재미있어요. 그는 늘 대립 항을 혼란스럽게 하고 상징을 끼워 넣고 은유에 방점을 찍으며 태양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닌 태양 속의 존재로서의 그림자를 이야기합니다. 왜 책을 읽어야 하지? 왜 간첩을 잡아야 해? 왜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지? 아마 한국에서 그가 유년을 보냈다면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해서 이루지 못하는 목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차례로 익사시킨다며 숫자를 곳곳에 숨겨놓는 피터 그리너웨이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목표와 생각을 없애버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습니다. 이것이 그의 '영화'를 여는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흑점으로서의 그림자는 안티 크라이스트에서는 부모의 섹스 앞에서 떨어져 죽는 아이의 얼굴에 서린 기묘한 미소로 나타납니다. 멜랑콜리아에서는 지구 종말에 앞서 이별을 고하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좋게 끝낼 수도 있었는데.' 전자를 보면서는 그 섬뜩함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마음이 멈추었고 후자를 보면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딸꾹질을 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정사 도중 침대에서 나와 베란다로 갑니다. 가는 도중 부모의 정사를 보고(화면은 움직입니다), 눈길을 돌립니다. 아기의 것이 아닌 기분나쁜 미소의 숏이 나옵니다. 이 때 진실은 알 수 없는 침몰한 배와 같이 밝힐 수 있으나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와 도식, 은유의 삼위일체를 라스 폰 트리에는 무간도처럼 펼칩니다. 아이의 미소를 읽으려 애쓰는 순간, 님포매니악의 조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무 상투적이어서 당신 주장에 반박해야 직성이 좀 풀릴 것 같은데 너무 피곤하네요."











 '좋게 끝낼 수도 있었는데'라는 대사 또한 그렇습니다. 지구가 곧 멸망합니다. 과학을 신봉하는 남편이 온갖 대처를 하다 도망치고 자식을 생각하며 절망에 빠지는 아내가 림보에 갇히지만 정작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행성 멜랑콜리아와도 성교를 나눌 수 있는 저스틴만은 의연합니다. 넘치는 노란빛과 푸른빛의 향연 속에서 저스틴은 조용히 말합니다. '지구는 사악해. 우리는 그를 위해 슬퍼할 필요가 없어.' 영화의 마지막은 넘치도록 다가오는 행성 멜랑콜리아와 지구의 키스입니다. 그것을 거대한 종말이라고 보아야 할지 출구라고 해야 할지를 판단하려면 그다음 장면이 나와야 했을테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다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시선과 생명이 사라지고 판단과 가치가 소멸하는 순간. 당연하게도 그 뒤의 시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후'는 없습니다. '완전히 알든가, 아예 모르든가! 중간 따위 없어요!'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일례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저스틴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만이 멜랑콜리아에서는 온전해 보입니다. 비평과 평론은 모든 것을 알 수도, 아무 것도 모를 수도 없다는 점을 떠올려 봅니다. 멜랑콜리아의 얽히고섥킨 쇼트은 해석에의 비웃음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작품 님포매니악은 어떨까요. 일단 님포매니악은 제목과 달리 색정광 조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실패한 무식쟁이 셀리그만의 이야기입니다. 온갖 것을 다 알며 친절하게 평을 붙이고 이해해주며 재워주고 집어넣으려 하는 셀리그만이 왜 실패한 무식쟁이란 말인가? 오히려 쓰러져 있는 사람 구해왔더니 색정광인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한 번 하자고 들이밀었더니 총을 쏘는 조에가 더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실패한 평론가에 보내는 조소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거친 밤 쓰러진 조에를 셀리그만은 부축해 옵니다. 그의 온갖 성 편력기를 다 들은 셀리그만은 예의 바르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듯싶더니 다시 돌아옵니다. 조에는 온갖 남자와 다 잠을 자본 색정광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성적 편력에 관련한 것입니다. 셀리그만은 성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며 지식인, 교양인, 책벌레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몇 시간에 걸쳐 온갖 형상의 성기를 다 구경하기 때문에 이 순간 셀리그만의 발기도 되지 않은 성기를 아무 생각 없이 넘기기는 좀 어렵습니다. 안된다는 조에의 목소리, 무지 화면, '너는 수천 명이랑 섹스했잖아!', 무지 화면, 총소리, 자리를 뜨는 발소리. 죽은 것은 발기도 안 되는 성기를 들이밀다 총 맞아 죽은 늙은 남자 지식인. 아, 한심해서 눈물이......








 


 네, 저는 앞서 '한심해서 눈물이......'라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가 슬픈 것은 발기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석을 갖다 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신호라고 생각하고 온갖 평론을 들이밀기 때문입니다. 아주 엄청난 성적 표현이 아닌 심술궂은 유머를 시도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본질입니다. 조에는 '사람을 죽이는 게 어렵다지만 내 생각에는 안 죽이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을 할  때는, 그리고 그 말이 미래와 과거 시제를 아우르며 나왔을 때는 좀 더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대신 셀리그만은 기제, 프로이트, 휴머니즘, 체계 따위를 포장하여 해석합니다. 너무 상투적이어서 반박하고는 싶지만, 지금은 피곤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조심해야 했습니다. 지식으로 무장한 평론가 앞에 라스 폰 트리에는 이렇게 유머로 답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고 온갖 용어 뒤에 숨는다 이거지. 그럼 좀 귀찮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한 방 쏴줄 테니까 이제 그만하고 이야기나 좀 똑바로 들어.' 물론, 트뤼포처럼 '평론가 따위가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에 관한 반박으로 아주 훌륭하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트리에처럼 지질한 남자 성기로 유머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감독과 평론의 이 묘한 관계를 보면 '안 죽이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는 조에의 말이 더 절묘하게 들립니다.





크기와 촉감, 소리와 만족도. 무엇보다도 크고 아름답고 단단하게 일생에 걸쳐 자신을 증명하는 일은 피곤하기 짝이 없지만 태어난 이상,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를 일. 여기서 잠깐,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어떻겠습니까. 스케일과 조명 활용, 이펙트와 완성도. 이 남성성이 영화의 성질로 대치될 때 관객은 이 뻔한 섹스에 희열을, 평론가는 이 스크린 속 모든 도구가 자신을 향해 비웃음의 윙크를 보내는 것을 느낍니다. 이 영화까지 찾아본 관객들은 이미 아기가 베란다에서 추락사하고 자기 음핵을 가위로 자르는 여자도 봤고(안티 크라이스트), 지구가 마지막을 맞는 장면(멜랑콜리아)까지도 보았습니다. 더는 아름다움은 없는 '님포매니악'은 두 전작에 비해서는 파행성이 덜합니다. 셀리그만의 이성과 과학, 지식으로 조에의 색정증과 비이성을 치료하려는 시도 자체가 뻔하니까요. 라스 폰 트리에의 이 '우울증 3부작'은 적그리스도, 우울증, 신성모독, 불경스러움, 자기파괴를 거쳐 이렇게 뒤틀린 유머로 끝을 맺습니다. 물론, 이 유머라는 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쓴웃음을 남깁니다만. 

 이 삼부작을 보고 난 후,'1Q84'의 남자가 남긴 말이 떠올랐습니다. '설명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건, 설명해줘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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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8-2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데 뭔가 엄두가 안나는 영화들이네요.
한국어판도 있는건지 우선 검색부터....


Jeanne_Hebuterne 2015-08-26 15:14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어지간하면 안보시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요. 제 지론인데 한국에 김기덕이 있다면 외국엔 라스 폰 트리에가 있다는....님포매니악은 함께 보던 남자가 으억, 하는 비명을 지르며 화면을 꺼버리더라고요. 정말 진심으로 다는 댓글인데요, 어지간하면 보지 마셔요.......

yamoo 2015-08-30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님포매니악의 그 감독이군요! 전 괜찮게 봤습니다만, 찾아서 보게 되는 감독은 아닌 거 같아요. 근데, 진 님의 페이퍼를 보면 한 번쯤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요~
한 번 보고 말겠어요!ㅎ

Jeanne_Hebuterne 2015-08-31 12:52   좋아요 0 | URL
안돼요 안돼요 야무님 복세편살이란 말도 있는데 굳이 저런 걸 찾아봤다가 꿈자리 뒤숭숭해지고..안됩니다. 도그빌 때 까지만 해도 좀 성격이 쎈 엔터테이너 정도로 생각했어요. 니콜 키드만이랑은 둘이 숲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싸우고, 뷰욕은 두번다시 같이 작업안하겠다고 착취한다고까지 말하고..의외로 샬롯 갱스부르와 괜찮게 작업했나봐요. 음...근데 굳이 보시겠다면 님포매니악은 안보셔도 될 것 같기도 해요. 에디팅 작업에 아예 참여도 안했다고 그러고, 찍기만 하고 후반 작업은 아예 손놔버렸다니 라스 폰 트리에의 뜻이 끝까지 반영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멜랑콜리아가 그래도 이 셋 중에 가장 괜찮았어요. 굳이 꼭 보셔야 한다면 그나마 멜랑콜리아를 권해드려요. 영화 초입은 정말 우아하기까지 하거든요!
 
어이없게도 국수 -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지켜준 이
강종희 지음 / 비아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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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식사로는 국수가 좋다

영혼이라는 말을 반찬 삼을 수 있어서 좋다


퉁퉁 부운 눈두덩 부르튼 입술

마른 손바닥으로 훔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으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린다


국수는 뜨겁고 시원하다

바닥에 조금 흘리면

지나가던 개가 먹고

발 없는 비둘기가 먹고


국수가 좋다

빙빙 돌려가며 먹는다

마른 길 축축한 길 부드러운 길

국수를 고백한다


-이근화, '국수' 중에서.



 


 편안한 옷, 오래 걸어도 아프지 않은 신. 선글라스도 없이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맨피부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어디를 가나 바람이 춘삼월 봄바람처럼 부는 곳에 와있다. 골목 모퉁이마다 다른 방향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친다. 언제나 떠났던 곳. 그림자가 또렷했고 커피는 진했고 무지개빛이 선명하다. 햇빛과 바람을 온 피부로 받고 싶다. 이제 이곳에 당분간 뿌리를 내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펼치면 연필 대신 모나미 153으로 볼펜 잉크를 닦아가며 쓴 메모. 꽃노래도 한철이어라. 이제는 몇 번을 들여다본 남의 일기장이 더는 궁금하지도 않을 지경이 되었을 때 들려오는 고백 따위, 무슨 상관이람. 그래서 이곳의 바람을 온 피부로 받으며 스쳐 보내고 싶었나 보다. 




 몇 번 들렀던 편지지와 카드 따위를 파는 가게에 들어간다. 고양이 그림이 있는 카드를 구경하다 문득 집에 있을 고양이들이 생각난다. 궁금함과 그리움이 아니다. 그들이 내게 해주었던 곡진한 위로, 웃음 그 자체의 웃음, 격렬한 감정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온종일 공기만 들이마실 때 내 옆에 종일 누워있던 그 털 뭉치. 맹렬하게 뛰어가다 문에 박치기 하던 슬랩스틱. 조금 전까지 내게 뽀뽀, 골골이, 꾹꾹이를 해대며 애정을 표현하다가 내가 억지로 잡아챌 때 드물게 하던 하악질. 그 작은 털 뭉치가 고양이가 되고 그 작은 비누거 품이 단단한 그림자가 된다. 




 그들에게는 완벽한 일체의 감정이 없다. 좋아 죽겠는 순간에조차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 너는 너의 일을 했고, 나는 나의 일을 했어. 이 말이 이렇게 완벽히 성립하는 관계가 오랜만이다. 그간 얼마나 이 선을 등신처럼 못 그어서 전전긍긍, 많은 검은색을 희게 칠했나. 사실은 아직도 등신이고 앞으로도 바보 천치일지도 모른다. 속을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 속이 내 속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것은 죽은 정자와 죽은 난자가 만나 죽은 아이를 잉태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의 열망이다. 최선을 다하여 미쳤던 시절 찾아낸 최선의 미친 모습을 아직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니. 결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으로 고리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쳤고 나의 사랑은 늙었다. 지침과 늙음을 상쇄하기 위해 이렇게도 거리를 없애려 기를 쓰고 또 쓰다가, 결국,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 사랑이 제멋대로 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니,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는 나의 사랑이 지닌 것 이외의 모든 것이다. 나는 흰 피부로 햇빛과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삶에 대한 비관적인 낙관이 가득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불신, 닫고 절대 열지 않는 서랍을 가진 주제에 다른 서랍을 넘본다. 사랑 그 뒤의 쓸쓸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뒷모습까지 알아챘을 때 나는 더 무섭고 대담해졌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헤더가 그리 말했듯, 비밀을 고백하는 것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이다. 나는 결코, 내 비밀을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걸어서 이번엔 다른 가게를 찾는다. 





 작은 골목 안에 숨은 더 작은 골목에 그 국숫집이 있었다. 벽에 붙은 메뉴에는 그저 2인분, 3인분, 4인분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식당 안에는 휠체어를 탄 여인을 데려온 가족 한 팀이 있었고,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어색하게 낀, 아마도 고용주인듯한 남녀 일행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테이블 네 개가 고작인 작은 식당이 꽉 찼다. 다들 막걸리에 소주까지 반주를 하는 눈치였다. 나도 그때는 정말 술 생각이 났다. 아쉽지만 아이를 데리고 몸을 못 가누는 형편이 될 수는 없으니......사이다와 2인분을 주문했다.

 10여분을 기다린 끝에 커다란 양푼에 담긴 국수와 김치 한 보시기가 나왔다. 마그마처럼 붉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국물을 훌훌 저어가며 국수를 양껏 대접에 퍼 담았다. 한눈에도 매운탕이나 어탕 국수에 더 가깝지 않을 까 싶게 걸쭉한 국물과 제법 튼실한 생선 토막들이 눈에 띄었다.

-책속에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분위기가 길마다 많이 다르다. 아무렴 그 국숫집은 명품샵이나 고급스러운 호텔 옆에 있지 않았다. 좀 많이 허름한 간판, 들어가면 와글와글 각국어로 외치는 소리. 강한 타이 억양은 목소리를 한층 더 높게 만든다. 한 명, 먹고 갈 거에요. 이렇게 말하면 주로 바 자리를 내어준다. 벽을 마주하거나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창밖의 한무리 사람들이 보인다. 구중 구월 생활처럼 그들은 자주 오는 사람을 보고도 아는 체하지 않아 좋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달구는 것은 온갖 해산물 볶음, 생숙주의 향, 고수, 향신료 냄새. 내 왼편의 여자는 내 그릇을 흘깃 보더니 뭔가를 길게 이야기한다. 채식주의자가 먹을만한 국수를 주문한다. 오른편의 여자는 자기 앞에 놓인 국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찰칵, 소리를 내고는 한 입 후후 불어먹기 시작한다. 오늘은 뭐 먹느냐는 문자에 가끔 나도 사진을 보내기도 했고, 국수를 먹는다고 말하기도 했다만 주로 이 가게에 와서는 이제 그러지 않는다. 책도 잘 읽지 않고 그저 내 앞에 나온 국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국물을 삼킬 뿐. 






 




 언젠가는 잔치국수를 해먹고 싶어 애호박, 표고, 국물용 멸치, 시금치, 당근, 양파, 새우, 오이 등을 사 온 적이 있었다. 때마침 집에 새로 냉장고와 냉동고 기능을 겸한 기기를 장만했다. 사용설명서가 없었고 다이얼을 2로 맞추어 놓았더니 당근이 야구 방망이로 변했다. 다이얼을 5로 하자 이번엔 포도주병이 터졌다. 그 뒤로 다시 장을 봐와서 국수를 삶아 먹으면 그만이었겠으나 나는 대장금처럼 경합과 역경을 딛고 스스로 재창조해나가는 인간이 아니었던지라 그때 냉장고에 기분 상한 그 마음은 아직도 회복되질 않고 있다. 대신 내게 위로를 건네고 싶거나 따뜻하게 내가 나를 안아주고 싶다......싶을 때. 정신 차리고 보면 나는 그 국숫집에 가서 앉아있다. 이 따끈한 국물을 삼키고 면을 훌훌 불어 젓가락으로 감아 입에 밀어 넣는다. 국수는 참 바쁘고도 고즈넉한 음식이다. 뜨거운 국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국물이 뜨거울 때 삼키고 싶어 국물을 마시다 보면 면이 불어난다. 쫄깃한 면을 먹다 보면 국물이 조금씩 식는다. 혀를 델 만큼 뜨거운 통각, 몸을 녹이는 샤워, 그 뒤 머리카락을 말리며 마시는 따끈한 검은 커피. 살다 보면 이런 것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콩나물, 그 날 들여온 생선, 기계로 뽑은 납작한 칼국수 면을 고춧가루 듬뿍 풀어 끓여낸 모리국수는 원래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던 음식이었다. 국물이 시뻘개지도록 투하한 고춧가루도 그렇지만 마늘이 듬뿍 들어간 데다 생선과 국수의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이 칼칼하고 든든했다. 거기에 2인분이 웬만한 3~4인분에 해당할 만큼 그 양이 푸짐했다. 마늘이 잔뜩 들어간 김치는 생선을 넣은 개성 강한 칼국수와 함께 먹기에 적당한 맛이 들었다. 

-책속에서




 스물아홉 개의 국수 이야기를 담은 책.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많이 흘려 국수 국물이 넘치는 느낌이 좀 아쉽지만, 그런대로 국수를 먹고 싶어서 국수 대신 흘깃거린 책. 야근의 밤을 넘어가며 동료와 함께 들이키는 두부 국수. 아이와 함께 먹는 모리 국수. 엄마와 함께하는 명동 칼국수. 





 미각은 기억이며 음식은 추억이다. 박찬일의 요리 이야기는 쉐프의 부엌을 보여준다. 용윤선의 커피는 눈물을 삼킨다. 카모메 식당이 품은 따뜻한 마음, 바베트의 만찬이 펼치는 우정. 강종희의 국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먹다가, 막상 생존을 위해 먹는다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각종 조미료를 뿌리고 더 많은 재료를 찾고 다른 맛을 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장면의 달콤한 캐러멜 소스가 주는 기억. 누군가 내게 차려준 스파게티의 느낌. 애써 품고 온 팟타이의 아삭한 숙주의 식감. 오빠와 동생이 같이 먹는 한밤의 라면, 지글지글 불판 위의 고기를 구우며 원시 부족처럼 동지애를 다진 다음 먹는 열무 냉국수. 계속된 야근의 끝에 고기를 불판에 굽다가 마지막 순간, '밥 할래, 냉면 할래?'라는 물음을 받고, 총무는 밥은 몇 명, 냉면은 몇 명...되내이며 주문을 하던 밤. 그 와중에 '소주 하나 더요'라는 목소리가 옆에서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까지 갉아먹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길게 살다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일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천만의 말씀. 불판의 열기를 느낄 때가 있고, 냉면의 냉기를 속에 들일 때가 있다. 






누군가가 그랬다. 생선은 낯설고 잔인하다고. 육지의 생명인 나와 다른 세계, 비밀의 바다에서 온 생명을 먹는 나라는 존재의 생존을 직시하는 행위다. 낯설과 원초적인 바다의 존재, 생선이 그득한 국수 냄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던가.

 버텨.' 불과 수시간 전에도 넘치는 생명력으로 바다를 헤엄쳤을 아귀가 소근, 내게 던진 귓속말은 이랬다. '날 먹고 버텨봐. 길게 가늘게 이어지는 국숫발처럼 그렇게 버텨. 괜찮을 거야.'

-책속에서




 강종희의 기억과 인물이 화려한 만큼 국숫집의 정보는 맛 기행 블로그를 넘지 않을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이 어느 한쪽으로 더 나아가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이 슬쩍 스민다. 웃음이나 눈물을 더 채웠더라면. 혹은 지도나 좌표를 더 찍었더라면. 어떤 책은 스스로 위치를 더없이 확실하게 해주어 명쾌함을 더한다. 론리 플래닛의 여행 시리즈가 그렇고 이케아 카탈로그가 그렇다. 반대의 명쾌함을 주는 경우는 김영하와 김연수의 에세이가 그렇다. 여기서 적당한 타협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 거란 짐작을 다시 한 번. 임원직을 맡은 워킹맘의 고단하고 치열한 마음이라는 개인의 경험이 국숫발에 그대로 녹아들기는 조금 힘들었나 보다. 

 모름지기 햇빛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 나간 나뭇가지를 자르기란 힘든 노릇. 쓰는 자와 읽는 자의 틈, 벽은 이럴 때 조금씩 자라난다. 쓰는 자는 하나이지만 읽는 자는 여럿이므로. 읽는 이가 걷는 평행우주, 이해하면서도 비교하고 추억하는 저울질을 감당하기에 저자의 목소리 힘이 조금 강하고 높게 느껴진다. 재료 하나를 두고 떠올리는 깊은 통찰과 보편성 대신 야트막한 언덕과 누군가의 다이어리를 잠시 엿보는 느낌을 대신 택한 책. 제목만큼은 그러나 분명하고 당연하며 지당하다. 어이없게도 나를 지탱시켜준 국수. 국물과 면발을 홀홀 들이키고 싶은 날 불현듯 생각난 책.



 





끝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우린 이미 알고 있었지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걸
이것이 마지막 잔이라는 걸

눈빛을 나누고 건배를 하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내 마음 속에 버려두었던 사진기를 꺼내 찍는다

'찰칵' 울림이 없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서 얼마나 걸었던가
'찰칵' 이제는 무엇을 따라
또 얼마나 걸어가야 할까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
서라벌 호프에 우린 사라지겠지만
서울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
서라벌 호프는 다시 오지 않겠지만
서울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마시자 마시자 마시자
서라벌 호프에 우린 잊혀지겠지만
서울의 꿈은 이제부터,
우리들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아립, 서라벌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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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1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2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5-07-2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Jeanne Hebuterne님, 저도 지난 달에 아기 고양이 입양해서 함께 살고 있는데 고양이는 처음이라 여러가지로 낯설고, 예쁘고 , 신기하고 그래요. 개와는 정말 많이 다른 생명체더라구요. 에너지가 많은 건지 , 제가 많이 놀아주지 못해서 그런건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제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늘 후다닥 후다닥이거나, 뭔가를 가지고 혼자 놀거나 그래요.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잠깐 반겨주고 , 식사때 되면 가까이와서 살살 비벼대는 것이 전부인 너무나 독립적인 녀석과 살고 있어요. 제가 일하는 동안 필요한 잠을 다 자는 듯 해요. 세 녀석을 들이기 쉽지 않으셨을 듯 싶은데 , 녀석들 행운이네요.

Jeanne_Hebuterne 2015-07-22 09:10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

어므낫, 냥이 집사시로군요! 저도 냥이 셋을 지켜보다 보니 정말 정말 정말 신기한 생명체 같아요. 소설가 김영하도 그러더라구요. 고양이는 인간보다 훨씬 작고, 약하고, 빨리 죽는데 한없이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낯설고 예쁘고 신기하다는 말 정말 동의해요. 그 많은 이들이 집사가 되고나서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냥이로 도배하는 것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고, 2년 전 죽은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우는 친구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고.

식사 때 살살 비벼대는 것이 전부, 잠깐 반겨주는 것이 전부. 그 구분이 명확한 이 생명체가 참 좋습니다. 사람이 제각각이듯 고양이도 제각각이어요. 제 곁에 있는 님부스는 제가 다른 고양이들 등을 만져주면 꼭 `냥!` 하고 소리를 내며 빤히 쳐다보고서는 천천히 다가와요 셜록은 슬랩스틱의 대가죠. 칼리는 얼마나 새침한지요. 다들 사료 앞에서 야옹거리며 펄쩍거리는데 칼리는 늘 물그러미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있어요. 칼리가 사료 앞에서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죠. 지금은 셋이서 챔피언스 리그 나간 것처럼 소리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만, 고참 집사들에게 물어보니 이 우다다는 성묘가 되면 그리 많지 않을거라고들 하더라구요.

캣닙 줄까? 하고 물어봤을 때에도 `그 당시는 여러가지로 미친 시기이므로 좀 더 커서 늘 식빵굽기만 할 때 주어도 된다`라는 답변도...

코코 잘 있죠? 아, 이제 다른 고양이들도 궁금해지는 시기!

덧-냥이는 넷이었는데 차마 넷은 감당 못하고 한 마리는 입양 보냈어요ㅠㅠ

아무개 2015-07-2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잔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짬뽕, 우동, 라면 등등
면 요리를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 두었었는데,
쟌님의 페이퍼로 읽은 셈 치렵니다. ㅎㅎㅎ

Jeanne_Hebuterne 2015-07-22 09:16   좋아요 0 | URL
아무개 님
면 요리 정말 좋죠! 밀면, 잔치국수, 막국수, 평양냉면, 자장면, 짬뽕, 우동, 라면, 비빔면! 비빔면은 하나는 약간 부족한 것 같고 늘 두 개는 좀 많은 것 같고..아, 그러고 보니 간짜장도 떠오르고..제가 살던 곳에서는 꼭 간짜장에 계란을 같이 얹어서 줬는데 다른 지역에서 시켜먹을 때 계란이 없어 놀랐던...문화충격이 떠오릅니다. 뭐! 간짜장에 계란이 없어! 뭐! 순대에 장이 안나오고 소금만 나온다고! 뭐! 소고기전을 안해먹는다고!! 종종 어떤 문화충격은 먹는 것으로 더 격하게 다가와요.

사실 이 책은 기대가 꽤 컸는데, 저자의 화려한 경력과 바쁜 일상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할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이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이고 특수성을 띠지요. 그가 백수든, 학생이든, 사장이든, 의사이든 자기 일상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 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전문성으로 치자면 막상막하일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훨씬 낯설고 생명스러운 러시아 이야기, 통역하며 일어난 일들이 오히려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펼쳐졌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 일말의 차이는 글쓴이가 얼마나 상대를 덜 의식하고 쓰는가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이도 저도 아니다.' 혼란스럽고 못 올 데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우리 할머니가 쓰는 말이었다. 비행기는 내게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는 하늘에 열네 시간을 떠 있는 동안 내내 샤샤 생각만 하거나 멋진 몸매로 인기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긴 시간을 채워 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진한 크림 맛이 느껴지는 리큐어만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엘에이도 아니고 멜버른도 아니고, 이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유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니었다. 뚱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날씬하지도 않다. 확실히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패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내 디스크맨에서 너바나의 희귀곡이 흘러나왔다. 커트 코베인이나 나나 엉뚱한 곳에서, 이해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신세였다. 커트 코메인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을 때도 죽은 후에도 그렇다. '자살을 하면 행복해 질지도 몰라' 라는 가사를 들으니, 자살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더는 이런 끔찍한 경주를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폭삭 늙어 버리거나 죽을 때가 다 되면 새 시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표지 모델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어쩌면 성공항 배울, 스타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호의 기회를 잡고도 그걸 살리지 못했다. 모든 면에서 남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자신에게 너무 스트레스를 주다 보니 내 인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장애물 경주가 되어 버렸다. 허들을 뛰어넘으며 허덕허덕 50년을 보내리라는 생각을 하니, 그 경주를 바로 내가 해야 할 거라고 생각을 하니 또 베일리 생각이 났다.







 머릿속이 꼭 수챗구멍같을 때가 있다. 이게 잘하는 일인가, 뒤돌아보게 되거나 하루 종일 햇빛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있는 날들. 날 선 말에 맞받아칠 기운마저 내려놓게 되는 날. 전의를 다지지도, 생각을 정리하지도 않는 날. 바빠야 할 때인데,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괜찮다며 '낭낭하게' 있을 때. 누군가는 욕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살아있다는 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동네 뒷산을 백 번 정도 오르는 일이라 했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종종 이도 저도 아닌 걸까, 생각하다 읽은 책.





 계속 포샤 드 로시의 사진을 보게 된다. 이 금발과 이 매력적인 눈매의 여자가 써내려간 고백은 거식과 폭식, 성적 주체성과 배우로서의 자괴감과 성취감을 오락가락하지만 사실 읽는 내도록 그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생생하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전달하지도 않고, 옛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지도 않는다. 체념과 머뭇거림도 없다. 오히려 이 책을 가득 채우는 것은 넘칠듯한 강박의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강렬해서 오히려 젊음이 빛난다. 살을 빼야 한다. 먹어서는 안 된다. 달려야 한다. 더 작은 사이즈를 입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녀의 강박감이 드러난다. 그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파괴적이고 지배적이어서 그녀는 마침내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마저 한다. 그 절망 속에서 오히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을 때' 마침내 생리가 멈추고, 골다공증 진단을 받고, 관절 통증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마저 힘들어질 때 찾아오는 것이 바로 폭식이다. 거식과 폭식은 마치 나쁜 남자 같아서, 그는 자신을 어르고 달래고 혐오하는 광경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거식증 없는 폭식증은 본 적 있어도 폭식 없는 거식증은 본 적 없다. 구토 없는 거식증은 더더욱. 손등에 이빨 자국(토할 때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야 하는데 이때 손등에 윗니가 닿는다), 멈추는 생리, 빠지는 머리카락. 





 무엇 하나에 매달리지 않고는 숨 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조경란은 '백화점'에서 카드를 긁는 그 찰나의 순간 없이는 살기 힘든 순간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캐롤라인 냅은 친구를 만나기 전 먼저 한 잔 더 하려고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약속장소에 나가 있었다는 말을 한다. J는, 한 병을 마시면 한 박스를 다 마셔야만 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모든 걸 다 해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들에 비하면 극단적이지 못했다.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기에는, 그래도 이루어야 할 것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알량한 핑계지만 그것 역시 자랑의 일종일 것이다. 불행의 비교. 포샤 드 로시, 조경란, 캐롤라인 냅, J, 그리고 나, 이 다섯 명이 서로의 불행을 자랑한다면 누가 이길지를 상상해 본다. 자기 제어의 측면에서는 포샤 드 로시가 이긴다. 거식증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미칠듯한 자기 제어, 온종일 칼로리만 생각해도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의 강박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취 욕구 측면에서는 누가 이길지 쉽사리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취는 행복일까 불행일까. 1Q84에서 하루키는 '누구든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라고 했더랬다. 하루키 선생의 저 문장이라면 나야말로 부동의 1위. 그러나 1위와 2위, 3위를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라고 불러도 된다면) 우리 다섯 명은 그 강박의 세계 속에서 누구보다도 생생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는 것이 무엇일까. 행복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생활을 보내는 것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내겐 반쪽짜리 인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불행이라는 낱말을 뜯어보면, 그것은 단지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행복 본위의 사고가 나는 두렵다. 그것이 정반합 중 합의 상태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성춘향이 괜히 변 사또의 이것을 주랴, 저것을 주랴 하는 말에 '아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라고 말했겠는가. 희로애락에 셋을 더 붙여 칠 정을 느끼는 삶. 자신을 온전히 느끼고 계속 질문하는 삶. 

 그리하여 아주 찰나 떠오르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을 얻는 삶. 제대로 된 결핍을 선택하고 제대로 그 공간을 메우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떨까. 체중계가 40을 찍었을 때, 수입에 비해  지나친 소비를 매일같이 할 때, 술과 수면제를 동시복용할 때에는 그 여자는 너무 바빴다. 종일 음식 생각만 했다. 먹고 싶은데 먹을 수가 없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때에는 사고 싶지도 않았던 물건을 사들였다. 죄책감에 상표를 그대로 붙여둔 옷과 가방, 구두가 쌓였다. 그다음엔 정신을 잃는 일만 남았을 뿐. 그리고 당시 온갖 정신 나간 실수를 하면서도 결정적인 실수는 하지 않는 상태.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본인 자체가 문제였으니까. 





 지금 그러지 않는 것은 그럴만한 기력이 없기 때문이다. 포샤 드 로시의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그가 당시 얼마나 젊고 또 젊었던가, 하는 것이다. 앨리 맥빌을 찍으러 갔는데 스커트가 꽉 낀다. 운전하려고 앉았더니 뱃살이 접힌다. 로레알 광고를 찍으러 가서는 그 어떤 옷도 맞지 않는 수모를 당하면서, 그는 하루에 1000 칼로리 이하로 섭취하며 죽도록 달린다. 비행기에 타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이 강박적인 거식의 이면에서, 그는 내도록 사랑받고 싶음을, 인정받고 싶음을 말한다. 뱃살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신을 책망한다. 39 킬로그램까지 살을 빼고 자랑스러워 한다. '다이어트 지옥에서 탈출한 스타들!'이라는 기사 사진으로 등장하면서 꿈속에서 다이어트 콜라가 아닌 그냥 콜라를 마신다. 그가 정말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이었다.





울며불며 뱃살 생각만 하다가 그만 촬영을 위해 쓰기로 한 로레알 제품이 아니라 다른 싸구려 샴푸를 써 버렸다. 큰일이다. 눈은 퉁퉁 부었지, 똥배는 툭 튀어나왔지, 머리는 짚단인데 이 꼴로 촬영장에 가게 생겼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로레알 샴푸 신제품을 광고하기로 한 모델이 로레알의 광고 문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엉뚱한 샴푸를 쓴 건 아닐까? '나는 소중하니까요'라는 그 유명한 카피 말이다.

 "나는 소중하니까요." 거울로 턱에 난 뾰루지를 보면서, 세상에 대고 자기들은 소중하다고 외치는 지난 로레알 모델들의 말투를 큰 소리로 흉내 내어 보았다. 광고에 나오는 꼭 그런 투로. 좀 웃겼다. 나는 집안을 걸어 다니며 계속 말했다.

 "나는 소중하지 않으니까요." 예쁜 속옷을 찾아보았지만 서랍장에는 보기 싫고 늘어난 속옷밖에 없었다. 촬영을 앞두고 예쁜 속옷을 사 놓을 생각도 안 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소중하지 않으니까요." 중얼거리면서 블랙커피를 마셨다. 아주 날신해서 크림을 듬뿍, 마음껏 타서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블랙커피가 너무 진해서 썩은 행주 냄새가 났고 혀도 얼얼했다. 아침은 건너뛰자. 나는 소중하지 않으니까. 





 이 자학의 유머를 보면 오히려 그가 자기 자신을 지금은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진다. 그의 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내려놓음이 보이지 않는다. 종종 인생의 모든 것이 회색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눈빛을 한 이들의 말을 듣노라면, 그들이 전하는 말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회색이었고, 회색이며, 회색일 것이라는 그 어두운 괴로움 앞에서는 지나간 고통의 시간조차 회색이다. 이때 그들이 전하는 것이 무채색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을 공간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또한 그렇다. 포샤 드 로시 역시 그렇다. 어떤 공간에 머무르는가. 어떤 공간에 있어야만 하는가. 어떠한 공간에 머무르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그 압도적 실수. 그리하여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 상황, 정체성마저 결정짓게 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 우리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이 아니던가. 총량이 아닌 결정적 순간을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그 시간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내가 무엇을 포기하거나 얻을 수 있을지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래서 햇빛 아래 미동 없이 앉아있는다. 핸드폰은 방해금지 모드. 음악 없는 적막함. 꿈을 기억하는 얕은 잠. 답을 남기지 않는 작별, 응답하지 않는 이메일, 들추어본 남의 연애편지 같은 속내. 바람은 세차게, 햇볕은 강렬하게. 내가 말하는 그 어떤 것도 진짜이기 힘들 때는 가만히 그리고 멍청히 앉아있는 것이 차선일지도 모른다. 의도를 감춘 채 원하는 바를 상대를 통해 이루려는 것이 수사학이라면, 나는 참으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므로. 이 눈치 없음으로 나 스스로 계속 질문을 해본다. 달의 반대편을 다 보고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을까? 이미 나는 한 가지 중독에서 헤어날 길 없으니, 더는 강박에 쏟을 힘이 남아있지 않다. 이런 나 같은 인간이 다시 강박에 빠져든다는 것은 자폭과 다름없으니, 이제 다시 묻는다. 잘할 수 있을까? 포샤 드 로시가 이 책 내내 깔고 있는 이 질문은 당위가 아닌 존재이다. 확신을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여배우의 폭식증과 거식증 이야기인데, 읽고 나면 그것이 체중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책.

 당신을 닮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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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5-07-23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경란의 백화점 읽어 보고 싶어요. 감사해요.

Jeanne_Hebuterne 2015-07-24 13:55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
조경란 작가의 책은 사람에 따라 호오가 극명하게 나뉘는 것 같더라고요(배수아 만큼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호`쪽이고, 백화점은 픽션이 아닌 백화점이라는 공간에 관한 층별 탐구여요. 읽고나면 그 거대한 공간이 담은 사람 이야기가 들어오는 책이랍니다. 몬스터 님의 감상이 궁금해집니다 ^^
 
사물의 안전성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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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날 가만,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밖으로 나섰다. 굳이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문 앞에 서서 내가 키우는 그 고양이가 문을 한 번 보고 야옹, 내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야옹, 내가 다른 곳으로 가면 따라와서 또 뒤에서 나를 보고 야옹. 나가자는 신호라고 생각하고 깃털 같은 그 몸을 가볍게 한 손으로 안아 들어 품고 문을 열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바람은 살랑살랑. 야옹, 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눈은 동그래졌고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한 발짝 더. 꼬리가 가볍게 들리고 목을 길게 빼며 얼굴은 앞으로 쭉. 하지만 그 작은 몸은 여전히 내게 꼭 붙어있다. 그러다 한 발자국 옮겼을 때 저 너머에서 작은 소음. 고양이의 몸이 홱 틀어지면서 내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발톱을 세웠고 그 발톱은 내 팔을, 목을, 어깨를 단단히 갈고리처럼 움켜쥐었다. 악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긴장한 그 몸은 내 어깨에 닻처럼 상륙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단단하고 여린 발톱이 내 어깨를 붙들던 순간. 나는 그가 본디 육식동물이면서 호기심 많은 포식자임을 다시 직감했다. 사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숨겼던 발톱을 어느 순간 내세우는 모양새를 내 몸으로 겪는 일. 동그란 애원하는 눈과 어둠 속에 빛나는 맹수의 눈을 다시 확인하는 일. 햇빛은 사그라지고 바람이 잔잔해지면 이 일상이 다시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을 느끼는 일.


 


 홈스의 '사물의 안전성'은 그런 맹수의 발톱과 아기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 사이의 간극을 오간다. 내가 가진 펭귄판 페이퍼백에는 안전핀의 날카로운 끝이 그림자를 가볍게 드리웠다. 만지기가 망설여지던 책. 당신의 일상은 얼마나 안전합니까? 라는 질문과 그 아래 무엇이 놓였을까, 하는 호기심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면, 그 다음 오는 것은 그 위태로운 왈츠이다. 내가 한 발자국 나가면 상대가 매끄럽게 끄는 힘이 느껴진다. 고개를 쑥 내밀면 상대는 살짝 고개를 젖힌다. 미끄러지거나 발을 서로 밟을 때도 있다. 심지어는 내가 헛발을 짚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멀리 누군가가 살짝 눈을 빛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귀엽기도 하다. 어린아이처럼 텔레비전에 빠져 놀고 있는 폴이라니. 하지만 그 모습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애처로운 면도 있다.

 "소리 좀 줄일 수 없어?" 일레인이 말한다.

 폴의 자동차가 도로에서 미끄러져 광고판을 들이받는다. 자동차는 불길에 휩싸이고 '게임 오버, 게임 오버'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내가 뭘 하고 있으면, 가만히 좀 봐주면 안 돼?" 폴은 재시작을 누르며 소리친다.

 "별것도 아닌 게임이나 하면서 뭘."

 "나 좀 내버려둬."

 일레인은 위층으로 올라간다. 폴을 참아줄 수가 없다. 뭐 하나 참아줄 만한 게 없다. 생각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보는 방식. 전부 다 싫다. 그도 그녀를 미워한다는 걸 알기에 더하다. 미치겠다. 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를 미워할 수는 없는가.

-adults alone.


 


 아이들을 캠프에 보낸 후 일레인과 폴은 데이트하고, 콜레스테롤을 잠시 잊고 외식을 한다. 대마초를 피우고 보드카를 마신다. 그 친밀함의 시간, 사랑한다는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온 다음 별것도 아닌 게임을 하는 남편 폴을 보는 일레인의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를 거리낌 없이 미워해야 한다는 원문의 마음이 한국어판에서는 좀 더 조용한 책망의 목소리를 띤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자책 사이의 간극은 독자가 바라보는 일레인의 표정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차이의 날 선 감정은 이 두 부부의 일탈에 맞서 조용히 반짝인다. 




 함께 식료품 쇼핑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스테이션 왜건을 몰며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내는 삶. 왜 아니겠는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아이들이 혹시 상어를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조용히 작동하는 집안 사물에서 느끼는 낯선 감정을 이렇게 예리하게 잡아채는 순간이 있는데. 뭉툭한 발 사이 숨겼던 발톱을 조용히 꺼내게 되는 순간. 그것은 기지개를 켜다 시원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두려워서일 수도, 위협을 하려 그럴 수도, 상대가 싫어서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때 드러난다. '미워서 죽겠어!'에서 '미워서 죽여 버리겠어!'로 단어 하나가 바뀔 때. 일 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일이 일 초 후엔 더이상 그러지 않을 때. 사물은 더 낯설게 숨 쉬고 그 앞에서 나는 낯익은 숨을 내쉰다. 나는 숨 쉴 수 있고 너는 숨 쉴 수 없다는 착각은 그럴 때 사그라든다. 어쩌면, 내가 눈뜨고 눈감는 이 하루가 좀 더 위태로운 지반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닐까.





 "I was just looking." I said.

 "Whose room is this?" he said.

 I shrugged.

 'Whose?" he asked.

 "Yours."

 "Did I say you could look? Did I say you could come in here? Did you ask? NO!" he yelled into my face. "Some things belong to a person himself. They're private and you can't take them away."-Looking for Johnny


 "그냥 둘러봤을 뿐이에요." 내가 말했다.

 "이게 누구 방이지?" 그가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 방이냐고?" 그가 물었다.

 "아저씨 방이요."

 "내가 너더러 봐도 된다고 했어? 여기 네가 들어와도 된다고 한 적 있어? 나한테 들어와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냐? 천만에!" 그가 내 얼굴에다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들에겐 제각각의 소유물이라는 게 있어. 그건 아주 개인적인 것이고 너는 그걸 엿봐서는 안돼. -조니를 찾아서





 놀이터에서 놀다 자신을 조니라고 부르며 엄마 대신 찾으러 왔다는 남자가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다. 알 수 없는 약을 먹이고 엄마는 지금 다른 일로 분주하며, 자기가 당분간 돌보러 왔다며 차에 아이를 태우고 자신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서 며칠간 지내게 되는, '조니를 찾아서'. 그러나 이 남자가 조니라고 부르는 이 아이가 겪는 것은 엄격한 통제와 강력한 권유. 방을 들여다볼 땐 불같이 화내며 뜨거운 김을 뿜어댄다. 그 다음 날엔 아이에게 낚시를 가르쳐준다. 아침을 주고 장작을 패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사이 나타나는 이상한 연대의 감정. 이 사람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과 엄마를 보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이 시소의 양쪽을 오가다가 어느 순간 휙 기울어질 때가 있다. 





 "Let's go." I finally said.

 "Go on, give it another try."

 -Lookig for Jonny.





 마침내는 엄마에게 몰래 전화를 하려다 남자에게 들키고 만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엄마는 왜 통화 중인 걸까. 어쩌면 진짜 이 아저씨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스스로가 멍청하게 여겨질 때, 이제 가자고 말할 때 오히려 이 남자는 '다시 걸어 봐. 한 번 더 해 봐.'라고 말한다. 그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일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느낄 때. 이제 이것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 오히려 남자는 에롤을 집에 데려다준다. 그 일상이 너무 낯설어서,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지만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추측이 무럭무럭. 다시 돌아온 일상은 사그락사그락. 어쩌면 나의 무심한 하루는 다른 누군가의 굳건한 등에 위태롭게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게임을 하는 남편의 등이 측은하다가 밉다가(어른들끼리), 무서웠던 어떤 남자의 등이 듬직해지기도 했다가(조니를 찾아서), 숨어서 도저히 그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가(그럼 이만),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인 아들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우게 되거나(밤의 에스더), 아무런 말 없이 웃는 바비 인형을 향한 사랑이 사그라지는(진짜 인형) 것이다. 





 그 모든 감정은 홈스의 열 편의 이야기 속에 조용히 출렁거린다. 바다의 파도가 일을 쉬지 않듯 홈스도 글을 쉬지 않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장편과 다른 단편.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일관적인 이야기.

 42.195 킬로미터가 아닌 42.195 미터의 산책을 하다 보면 숨이 가빠지지 않는 대신 발밑이 어지러워진다. 어떠한 사건을 지나가는 사람의 가쁜 숨 대신 저물녘 찰나를 막 지난 이의 어지러움. 대차대조표처럼, 어떠한 사건을 가장 잘 꿰뚫기 위한 작가의 조용한 바느질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아이와 어른, 낯선 사람과 친숙한 사람, 아이들이 있는 일상과 아이들이 없는 일상, 모두가 똑같이 보이는 쇼핑몰에서 발견한 낯익은 소녀의 얼굴 속에서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흔적. 회사에서 폭탄 테러의 위협으로 집에 와서 잠시 쉬게 되는 남자가 느끼는 혼란. 일상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이의 낯선 눈매.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날 선 발톱을 언제든 내 어깨에 초대할 수도 있는 낯선 사건. 

 넓게 퍼진 구름 가운데, 어느 구름 뒤에 비가 숨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작가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다. 비구름만 가려낼 수는 없지만, 달무리를 보면 다음 날의 비가 보인다고. 비가 내리건 바람이 불건, 살아있다면 이 날선 낯선 일상을 감수하는 것이 독자와 작가의 일이라고. 






 Downstairs, as they are cleaning, Elaine and Paul look at each other and as if they've each had the same thought at the same moment, as if they're sharing a secret, they go into the living room and carefully check the cushions on the sofa making sure there's nothing there, no empty vials. -Adults Alone.

 아랫층에서 청소를 하며 일레인과 폴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이 같은 순간 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 비밀을 나누는 듯한 느낌. 그들은 거실 소파의 쿠션을 청소하며 집안에 텅빈 약병과 같은 잔해가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한다.-어른들끼리.



*인용은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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