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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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그날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 날 죽은 사람 한 명의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꾸자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학살을 속죄할 수는 없다.

 그 끔찍한 날 뒤로 16년이 흘렀다. 그 열여섯 해를,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에 바쳤다. 어떻게 창창한 아이의 삶이 그렇게 한순간에, 바로 내 눈앞에서, 재앙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전문가들, 우리 식구들, 딜런의 친구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대체 무얼 노힌 건지,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었는지. 내가 쓴 일기를 들추고 또 들추었다. 법의학자처럼 엄밀하고 철저하게 우리 가족의 삶을 파헤치고 일상적 사건이나 대화를 곱씹어보며 내가 놓친 단서를 찾았다. 뭘 놓친 걸까? 어떻게 했어야 할까?




  

 한 아이를 기르는데 십육 년, 그 아이가 죽은 다음 그 아이 생각을 하는데 십육 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 바로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 중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이다. 너무나도 거대한 사건이어서 운을 떼기조차 어려운 사건을 담은 이 책의 표지에는 두 모자의 사진이 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강렬한 제목 뒤에 숨은 원래 제목은 이보다 훨씬 조용하게 말한다. 엄마의 회고록. 비극 이후의 삶. 



 습관대로 제목 뒤의 목차를 본다. 1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 즉 총격, 마지막 밤, 다른 사람의 삶, 쉴 곳, 불길한 예감, 어린 시절, 엄마가 엄마에게. 슬픔의 자리, 비탄을 안고 살아가기, 현실 부정의 끝. 2부는 이해를 향해. 즉 절망의 깊이, 치명적인 역학, 자살로 가는 길, 폭력으로 가는 길, 부수적 피해, 새로운 인식, 선서증언, 뇌건강과 폭력의 교차점. 

 



 딜런을 키우는 16년과 딜런이 죽은 다음 16년이 1부와 2부 사이 그 어딘가에 평행선을 그리듯 놓였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결론과 주, 자료이다. 결론에서는 모든 이에게 안전한 세상이라는 제목에 각종 자살 예방, 폭력 예방, 총기 안정, 위협 평가 관련 도움을 받거나 지침을 참조할 수 있는 곳이 실려있다. 즉, 저자는 자신이 벌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관련된 문제에 관해 끝없이 사과하고 참회하고 회고하는 것을 넘어서 비슷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막을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다. 

 목소리는 내도록 조용하고 끈질기다.  자기가 남긴 빵조각을 찾아 거꾸로 집에 가는 길을 찾으려는 눈길처럼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다르게 보며 다르게 읽는 일. 마침내 수 클리볼드가 딜런 클리볼드의 마음에서 읽어내려는 것은, '왜'이다. 그러나 대답할 아들은 세상에 없으며 그에게는 다시 살아가야 할 일만 남았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죄를 짊어지고, 온갖 소송이 난무하고, 모든 언론이 그들에게 눈길을 쏟는 당시 빠르게 도망치면서 수 클리볼드가 하는 일은 단 하나, 끝없이 파헤치는 일이다.




 정말 몰랐을까?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거짓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은 했다, 하지 않았다 정도로 간단한데 문제는 그 간단함이 제대로 된 질문을 만났을 때만 열리는 문과 같다는 것. 수 클리볼드의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 혹은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애초에 수백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해 수백가지 경우의 열쇠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기대와 끝없이 펼쳐지는 서로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경우에는 통하는 방법이, 어떤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딜런이 주머니에서 스테인리스 술통을 꺼냈다. 위쪽에 깨진 부분을 솜씨는 없고 땜납은 많은 누군가 지저분학 때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게 뭐니? 내가 물었다. "어디에서 났어?"

딜런은 주웠다고 했다.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묻자 딜런이 페퍼민트 슈냅스가 들어 있다고 했지만 그 술이 어디에서 났는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늘 읊는 술의 위험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딜런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저를 믿어도 되고 로빈을 믿어도 된다고 말슴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오늘 밤에 마시려고 술을 담아놨어요. 아주 조금밖에 안 먹은 것 보이죠." 딜런은 나에게 술통을 주면서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다.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듯이. "처음에 조금 마시고 그 뒤에는 안 마셨어요. 보여요? 거의 차 있잖아요." 나는 술통이 거의 차 있다는 걸 알겠다고 했다.

 "절 믿어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딜런이 말했다. 나는 아직 약간 충격 받은 상태였지만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너를 믿어." 그럭는 아닛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술 한 번도 입에 안 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한테 먼저 말해주었으니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용한 한밤에 있었던 어마와 아들 사이의 이 사적인 순간을 그 뒤에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돌아보면 나에게 그 술통을 보여준 게 딜런이 나에게 한 가장 잔인한 장난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딜런이, 한편에서는 학살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내가 자기를 믿도록 일부러 조종한 것인가? 나를 놀린건가? 이러나저러나 며칠 안으로 죽을 생각이었다면 왜 나의 신뢰를 더욱 북돋으려 한 걸까? 내 믿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가, 아니면 내가 혹여 자기 방을 뒤질까봐 쐐기를 박은 걸까?

 이런 생각들을 정신과의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딜런이 솔직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어쩌면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그 뒤에 있었던 일과는 무관하게요.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다. 




 사람의 마음은 한 가지 요인과 한 가지 답을 지니지 않아서 이제 없는 아이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는 엄마의 마음은 더욱 막막하다. 그때 딜런은 왜 술통을 보여주었을까? 담배를 피우냐는 말에 '내가 바보로 보여요?'라고 왜 답했을까? 정신분석학자가 말했듯, 남을 죽이려고 갔는데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아이가 에릭이었고, 자신이 죽으려고 갔는데 남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딜런이었는데, 대체 왜 자살과 학살 직전 SAT 시험을 치르고, 몇몇 대학교에서 합격 통보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기술사를 보러 가고, 프롬에 참석하였던 걸까?



 

 거꾸로 짚어 보자. 딜런은 에릭이 종종 만나자고 하면 엄마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그럼 수 클리볼드는 딜런, 너 오늘 방 청소해야 해! 라는 등의 말을 꺼냈고, 딜런은 '엄마가 잔소리해서 못 가' 같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또한, 시합에서 졌을 때 에릭이 너무나도 분통을 터뜨리며 딜런을 모멸스럽게 대할 때에도 딜런은 '괜찮아요. 늘 저래요.'라고 말하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에릭은 딜런 말고도 다른 몇몇을 물망에 올린 적이 있으나 콜럼바인 학살에 참여한 것은 에릭과 딜런, 두 사람이었다. 둘의 관계의 어떠한 교집합이 맞아떨어진 것일까? 엄마가 여겼던 아들과의 친밀한 감정 공유는 아이가 다른 특정 친구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거절을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속이 깊고 의연하게 대처한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되짚어 보니 자기 주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르다고 생각한 일도 참게 되는 일이 된다. 한마디로 수 클리볼드가 되짚는 모든 일은, 당시에는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겪어보니 몰랐던 일들이었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해야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만고 불면의 진리이건만, 이 복잡한 마음과 관계의 양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한 편지는 검은 마커로 쓴 굵은 글씨로 이렇게 외쳤다. "어떻게 모를 수 있어요??"



 스스로도 밤낮으로 던지는 질문. 심지어는 장애 학생들을 돌보는 일을 했고, 나름대로 과보호라 생각할 정도로 딜런의 교우관계, 가족 내에서의 위치에 신경을 썼던 수 클리볼드로서도 답할 길이 없는 질문. 그는 자신을 위로하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 혹은 이웃과 친구들의 이해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받아들인다. 잘못된 점을 군소리 없이 사과하고 되짚어나가려고 한다. "좋은 부모라면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죠."라는 컴퓨터 교사의 말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던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판단할 줄을 안다. 자기가 기울인 수많은 노력이 더 실패했음을 깨달았을 때 필사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다른 방향을 찾게 되는 지점은, 마침내 보안관 사무실에서 증거 영상을 보는 시점이다.


한 가지 사실이 의문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딜런이 그 일을 했다는 것.


 의미와 무의미, 헛됨과 전혀 의도치 않았던 사건의 결실 앞에서 이 사건이 뜻하는 바는 자명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 있고,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 

'엄마가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아이는 감추지 못하고 어떤 아이는 감춘다는 것. 

수없이 많은 '만약에'는 다른 경우를 대비하여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을 몰랐다고 인정하고, 제대로 된 질문을 해보는 것.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만 대비할 수 있는 어떤 일에 앞서 수 클리볼드가 이 책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아들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사과하고 참회하는 것. 그리고 다른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악의 얼굴은 단순하지 않고 사랑의 얼굴 또한 맹목이 아님을, 어둠의 역설을 통해 써내려간 책. 생각의 맺음을 책표지 뒤의 서천석(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씨의 말로 대신한다.



이 책은 어둠이다. 저자가 위험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멀쩡한 바닥이 무너지며 갑자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어둠 속의 희미한 빛과 촉각에 기대어 그 어둠을 통과해나간다. 그 힘은 아이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나는 이 책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란 많은 부분이 설명할 수 없기에 평소엔 살짝 가려져 있을 뿐 막막함은 본질이다. 그 막막함을 통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책이다.-서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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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의 여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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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언젠가 그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갑자기 불쑥 나타난 그림이니 미술관마다 서로 나서서 전시하려고 할 테니까. 카를 슈빈트는 지금 이 시대에 의심의 여지 없이 전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하고 최고로 비싼 화가가 아닌가. 그의 일흔 살 생일날에는 무슨 신문을 펼쳐도, 텔레비전의 무슨 채널을돌려도 어김없이 그의 얼굴이 나타나곤 했다. 물론 나는 한참을 쳐다본 다음에야 그 노인이 내가 아는 젊은 얼굴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그림은 보자마자 즉시 알아차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넬레 노이에하우스, E.T.A. 호프만, 프리드리히 실러, 괴테.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법학 전공 내지는 법조계 종사자. 어쩌면 이 나라 국민들은 법학과 문학을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게 다룬단 말인가. 어쩌면 '작은 이야기'인 소설의 무용함이 사실과 진실의 충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더 리더'(책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계단 위의 여자'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전작에서 그가 팽팽하게 다루었던 인간 개인의 의사, 그들이 행하는 행위, 작용과 반작용, 이런 것이었다. 아무렴, 문제 해결의 최적임자는 문제 당사자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슐링크가 쌓아올린 탑은 번역자 배수아의 말을 빌리자면 건조하고 담담한 톤으로, 허식이나 과장, 과도한 감상은 찾아볼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는 법관처럼 슐링크의 낱말은 단정하고 소설의 구조는 간단하다. 소설의 화자의 삶이 그러하듯 최소한도로 바라고, 최소한도로 행동한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되 감상적이지 않고 추리를 해나가되 장르 문법에서도 비켜나가있다. 그러니 차분하게 조용히 이야기 속에 스며, 그의 이야기 문법을 즐기기에 독자로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전신을 그린 그림에서 시작한다. 두 명의 남자가 그림 하나를 두고 싸운다. 그 사건을 중재하는 것은 주인공인 '나'. 그러나 그림의 주인공 이레네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 그는 이레네가 두 남자, 남편과 화가(슈빈트) 모두를 그림과 함께 떠날 수 있게 도와준다. 


 "쉿." 그녀는 손을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내가 알아서 다 할게. 그의 집에 있는 내 짐들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런 넌 언제 올 건데?"

"나중에. 일이 끝나는 대로."

...그렇지만 두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불안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집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으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연신 창밖을 내다보았고, 차를 끓였고, 찻잎을 주전자에서 빼는 것을 잊었고, 그래서 다시 차를 끓이고, 다시 마찬가지로 찻잎을 잊어버렸다. 그녀는 혼자서 그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 그녀에게 너무 무겁진 않을까? 도와줄 사람은 있을까? 누구일까? 아니면 진짜 혼자서 들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를 믿고 맡기지 않는 걸까? 



 그러나 기다리는 이 남자의 마음 속에서, 제대로 된 답이 떠오르지 않는것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쉴새없이 이유를 생각해내는 인간의 어쩔 수 없음, 그럼에도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이 교만함. 40년이 흐른 뒤 갤러리에서 과거의 그 그림을 본 그는 다시 이레네를 찾아낸다. 늙고 주름지고 쇠약하고 아픈 그녀를. 또한 그녀의 남편과 화가 슈빈트도 그녀를 찾지만 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늙은 남자들의 니코틴에 절은 손가락 같은 것. 그림의 소유권이 무슨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자기 자식들의 영락을 자랑하고,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뽐내고, 그런 것이 죽어가는 자 앞에서 무엇 하나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림, 이레네, 군트라흐, 슈빈트.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은 조력자이자 구경꾼일 뿐. 그 자각과 각성의 시기에 맞물리는 서늘한 죄책감. '위협이 없어도 느껴지는 공포와도 같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밀려오는 슬픔과 같은 느낌.'이락 화자는 말한다. 조용하고 어두운 집안. 죽어가는 이레네, 그리고 모두가 돌아가자 두 사람은 둘만의 과거를 미래의 시간으로 겪는다. 그러는 와중 맞딱드리는 시간의 옹이, 이상한 후회와 지금에서야 찾아오는 자각. 이른 봄, 풀밭에 누워 잠시 잠이 들었다가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차갑고 서늘한 회한.



 "넌 어디서 누벨바그 클리셰를 읽은 모양이로구나? 60년대 후반에는 아무도 검게 차려입지 않았어. 여학생들은 소녀 시절을 보낸 지방 여학교에서 못해본 일을 만회하려고 안달했고, 남학생들은 비판 이론이나 혁명적 프락시스 등을 커다란 소리로 떠들면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를 썼지. 이런 걸 정말로 전혀 모른단 말이야?"

"말했잖아. 난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고." 

"그럼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고, 그게 전부야? 법률회사에 입사해서 회사를 인수하여 크게 더 크게 키운 것 말고는 없어?"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너에게서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어." 그녀는 내 팔을 잡았다. "네 삶을 상상해보는 것뿐이야. 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 삶을. 그럼 케이스 속에서 일생을 산다면 바깥세상은 정말로 클리셰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직업상 많은 해외여행을 했고 항상 열린 마음과 눈을 유지했다. 집에서는 두 종류의 신문을 구독하면서 경제와 금융 면을 주로 읽었지만 정치와 문화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단지 60년대 후반 대학생 패션 유행을 잘 모른다고 해서 일평생 케이스 속에서 산 셈이 되어버린단 말인가?그녀의 팔에 벗어나려는 내 몸짓을 느낀 그녀는 나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넌 네 아이들이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구나? 아이들과 함께 학생 주점에 가거나 대학 축제를 구경한 적도 없지?"

"내 아이들은 열네 살 때 영국의 기숙학교로 갔고 대학도 거기서 다녔어. 케임브리지 졸업식에는 나도 참석했지. 화려하고 위엄있는 대단한 행사였어. 막내아들이 옥스퍼드 대항 보트 레이스에 출전해서 우승한 날도 거기 있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나?" 

"아이들은 영국에서 계속 살아. 큰딸과 큰아들은 변호사고 막내아들은 소프트웨어 회사를 갖고 있지. 손자나 손녀가 태어나거나 뭔가 함께 축하할 일이 있으면 나도 영국으로 건너가. 그 이상은 아이들에게 부담 주는 걸 원치 않고." 

이레네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넌 만사를 훌륭하게 하려고만 하는구나." 그녀는 상냥하면서도 슬프게, 다시 한 번 더 반복했다. "순진한 바보같으니."



 꼬마야, 내 꼬마야. '책읽어주는 남자'의 여자가 그랬듯 계단 위의 여자, 이레네는 그의 삶을 한 번에 통찰하고 관망한다. 이레네의 질문, 정말 생활 속에서 공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는지에 대한 남자의 모든 답은, 아무리 애를 써도 출구를 찾지 못한채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새 한마리와 다르지 않다. 흘려보낼 수 없는 감정, 다른 사람과 '나' 사이 가로막힌 유리벽, 마침내 그것을 보여줌으로 화자에게 자각시키는 이레네의 서늘한 목소리를 듣노라면, 지나간 시간이 이제는 어제와 오늘, 일주일 안 정도로 나뉠 수 없는 독자의 귓가가 아득하게 울리는 듯하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그녀가 말했다. "너는 살아오는 내내 너의 투쟁을 치렀어. 마치 기사들이 자기 시대의 종말을 알지 못했듯 너 또한 그 투쟁이 어느새 허상의 투쟁이 되어버렸고, 진즉에 전부 종말에 이르렀음을 알지 못한 거야. 그토록 열심히 계약과 계약을 성사시키며 다니고, 합병과 인수 건을 매번 충실하게 해치우고, 그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라고, 그렇게 진심으로 믿고 있는 네가 나는 정말 좋아. 그런 태도는 나를 감동시키지. 그리고 동시에 슬프게 만들어."

 나는 항의하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했다. 합병과 인수가 왜 중요한지,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내가 싸웠던 투쟁들이 허상이 아니라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모든 거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나갔다고 말하고 싶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대개 그들 자신에 관한 내용이니까. 아마도 내가 지금 유일하게 견딜 수 없는 건, 세상은 계속해서 굴러가는데 나 홀로 종말을 맞는다는 그 사실 때문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진정해!"





 아, 우리는 이렇게 생긴 거울을 얼마나 많이 구경했던가. 그 거울은 지나가는 버스 정류장에도, 책을 읽으려 들어간 카페 옆 테이블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기이한 뉴스가 실리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도,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는 거울  그 자체로 있지 않은가. 


 마침내 질문과 대답, 대화와 함께 나누는 공기가 다 떨이진 다음, 화자는 마침내 생각한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헤어져야 할 존재에게는 작별 인사를 하고, 멀리 있는 소중한 존재에게 전화를 하기로. 우아한 자각의 퇴장은, 이렇게 커튼을 내린다.



 회사에는 내일에나 가볼 예정이다. 오늘은 묘지로 가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거이다. 나는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리고 작별의 인사를 하고, 내가 왜 더이상 우리들의 집에서, 우리들의 물건과 함께 살 수 업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아내에게 이레네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전화할 것이다. 카르힝어와 다른 파트너들에게 할 이야기를 준비할 것이다. 그들이 퍼붓는 수많은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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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 - 어느 심리학자의 물렁한 삶에 찾아온 작고 따스하고 산뜻한 골칫거리
닐스 우덴베리 지음, 신견식 옮김 / 샘터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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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고양이는 이튿날부터 꾸준히 나타났는데 가만 보니 우리 정원 창고에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어쩌다 키우게 된 고양이 이야기. 큰 목소리도 짙은 그림자도 없는 조용조용 나직나직한 목소리. 



 반려동물 이야기를 하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는 종종 같은 톤의 음색을 띤다. 그것은 종종 사랑이 지나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도 있고, 익숙해진 생활을 이야기하느라 듣는 귀를 피곤하게 할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 일지도 모른다. 모든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니까. 




 그것은 자신과 감정을 공유하는 대상을 향한 연서, 혹은 하나의 인격체를 그리워하는 편지. 

 '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에는 감정이 극에 달하는 끓는점이 높다. 액체가 기화되기 시작하는 지점, 그 비등점이 높다는 것은, 어쩌다 키우기 시작한 '나비'라는 고양이를 세상 유일한 것으로 두되 자신의 위치를 동등한 집사의 자리에 놓음에서 비롯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비의 어떤 특성, 나비가 글쓴이에게 오게 된 계기, 나비를 떠나보내게 될 때를 생각하는 집사로서의 박사의 모습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감정의 과잉과 고양이에 대한 신격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멀리서 조금씩 가까이, 천천히 거리를 두며 고양이 나비와 저자가 나누는 이야기에 관한 책.





 어느 날 작은 고양이가 저자 닐스 우덴베리의 집에 나타난다. 처음부터 키울 생각은 없었기에 늘   두고 보던 그 모습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저자의 집 헛간을 자기 집으로 삼았고 저자는 저자대로 고양이를 그대로 둔다. 눈에 익숙한 고양이가 며칠 안 보일 때도 있고 저자가 집을 비울 때도 있다. 고양이는 선택하고, 글쓴이는 받아들인다. 받아들여진 후의 고양이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그런 고양이를 가족들이 함께 돌보기로 한 다음에야 고양이와의 함께 살기가 시작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곁을 서로 내어주기. 밥을 같이 먹기. 이야기와 체온을 나누기.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하나씩 조금씩 주고 반응을 살피는 것. 어느 날에는 햇볕을 쬐는 고양이를, 또 어느 날에는 무언가에 집중해서 응시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 사람이 고양이를 보는 것일까, 고양이가 사람을 보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반려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의 한가지 양상을 띤다. 공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 필요충분조건의 모든 조건을 갖추지는 않지만 어떤 몇 가지를 갖춘 관계. 이런 관계를 갖는다는 것, 어떤 기분일까?





아침에 우리는 창문을 연다. 나비는 한동안 밖에 나가 있었지만 곧 돌아온다. 차가운 편북풍이 불어서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집 안에서 한다. 나비는 창문을 들락거린다. 여기저기 검사하며 돌아다닌다. 개들이 사라졌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걸까? 내가 뭘 알겠는가.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쉽사리 참견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씩 있었을 수도 있는 사람과 동물의 감정 공유는 '섣불리 다가서지 않기'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처럼 간접적인 것이 있을까? 소리처럼 직접적인 것이 있을까? '초록색'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한정한다. 나머지의 모든 아흔아홉 개의 색은 사라진다. 사람이 느껴 표현하는 감정을 언어가 다른 동물이 더 잘 느낀다는 것이 나는 늘 신기했으나, 이제는 그 생각의 기본 바탕이 바뀌는 경험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모든 사랑하는 대상이 꼭 그렇게 숨 막히는 관계는 아니라는 것. 이렇게 담담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애정의 비등점이 낮은가 싶어 천천히 글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용히 햇볕을 쬐는 고양이 나비가 보인다. 





 3 킬로도 안 나가는 이렇게 작은 생명이 어떻게 내게 이런 안정감을 불어넣는 걸까? 나는 나비보다 훨신 더 힘이 세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손쉽게 이 녀석을 망가뜨릴 수 있다. 나비는 나를 능가할 그런 힘이 없다. 나비가 내게 보이는 신뢰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내가 보여준 자비심과 호감을 나비는 고맙게 받아들인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인간 역시 고양이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다. 혹은 받아들인다. 즉, 인정한다. 저자는 나비가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고양이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비의 몸뚱이에 곧바로 다가서면 물러서며 나비는 불안해하고, 저자는 이것이 '위에서 오는 공격에 대한 공포는 굶주린 독수리가 많은 아프리카 평원에서 진화한 모든 작은 동물의 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며 고양이의 움츠러듦을 이해한다. 뾰족한 귀, 동그란 눈, 돋아난 수염, 복슬복슬한 털. 조용한 걸음걸이와 종종 내는 그르렁거리는 소리. 




 세모꼴 두 귀는 여러 방향으로 향할 수 있고 예리한 두 눈은 칠흑같이 어두운 열대의 밤에도 먹잇감을 찾을 수 있으며 코는 개만큼 예민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히 무딘 후각을 지닌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달했다. ... 나는 고양이의 안정적인 성격 형성도 역시 인간처럼 초기 경험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때로 우리 고양이가 인간과의 관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걸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추측하되 확신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되 무시하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관찰과 서로가 공유하는 집안의 공기. 이 책의 어조가 내도록 무심하고 차가워 보인다면 그것은 이 조심스런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동시에 서로는 다른 존재이며, 다를 수밖에 없음을 명확하게 선을 긋는 저자를 보노라면, 이 책은 아주 담담하고 조용한 러브레터라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 한 마리가 온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기적은 없지만, 대신 함께 살아가는 조용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나비도 우리와 지낸 뒤로 달라졌다. 몸과 마음이 다 무르익은 듯하다. 장난기를 ㅇ맇었다기보다는 잘 자라서 제 처지를 더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내 정원 바구니를 안식처로 삼던 덜 자란 고양이가 이제 자신만만한 집고양이로 발전해 숙녀의 풍모와 나름의 버릇도 갖추었다. 어느 때는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똑바로 훈련받아 까다로운 고양이를 어떻게 대할지 안다는 것을 각인하고 만족하는 듯싶기도 하다. 물론 녀석이 옳다. 우리가 고양이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우리를 길들여진 집사로 만들었다. 우리는 쌍방이 기쁘도록 서로 길들였다. 

 나로서는 고양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파악하려는 것이 철학적 과제가 되었다. 나비는 어쨌든 내 일상적 사교 활동의 일부고, 가장 가까운 이를 이해하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것이 설령 고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고양이, 아내, 나는 쭉 함께 살기를 기대한다. 고양이는 15년 넘게 살 수 있으니 오래 책임져야 한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아흔 살이 된다. 아마 그 나이까지 못 갈지도 모른다. 나비가 나와 아내보다 오래 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도 뭔가 마음에 든다. 가까이에 나비를 두고 내 침대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만큼 우리는 좋은 동무가 되었다.


 


 *따옴표 안의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원래 제목은 'old man and 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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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습니다.




가엾고도 가엾고나.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강렬하고 단호하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지 않았으니 그만큼 아름답다. 








 


 박찬욱 감독의 2016년 작품 '아가씨'는 이름만큼 요사스럽다.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듣게 하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얼굴을 다시 보게 한다. 관객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는 감각을 이미지로 응축시켜 만든 것 같은 주제는 뜻밖에 단호하다. 바야흐로 박찬욱은, 자기 작품을 자유롭게 통제하고 거칠게 풀어뜨려 이 소품과도 같은 영화로 한숨 쉬어가려 한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골방에 갇혀있다가 풀려난 남자가 찾아가는 군만두의 맛, 떨어질 때의 타, 타, 탁월한 황홀함, 이런 것들을 이루어낸 감독이 선택한 로맨스는 어떤 것이었던가.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의 초반 몇몇 부분을 가져와 각색한 박찬욱의 '아가씨'는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속고 속이는 사기극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자기가 속는지를 모르고 속았으면서도 다행이라고 말하는 1930년대 배경의, 숙희와 히데코의 터널. 

 자, 이것은 어떨까. 매일 밤 잠들기 전 생각나는 액수의 돈을 가로채기 위해 사기꾼 백작은 아가씨 곁에 몸종 숙희를 붙여둔다. 어머, 백작님이 오신 다음부터 발톱이 빨리 자라네요. 사랑하게 되실 거에요. 라는 말 따위로 아가씨가 백작과 사랑에 빠졌다고 믿게 한 다음, 마침내 결혼하게 되면 아가씨를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아가씨의 상속재산을 나누자는 모의.

 아니면 이것은 또 어떠한가. 다섯 살 무렵 벚나무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와 평생 어딜 가본 적도 없고 하는 일은 이모부가 모은 책 낭독회를 하면서 얼마 후면 그 늙은 이모부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 '되어 있는데', 이 모든 수동태 앞에 나타나는 능동의 동사. 사기꾼 백작이 속내를 밝히고 같이 도망가자고 한다. 물론 돈은 좀 나눠야겠지만. 도망가고 나면 이모부가 찾을 테니 몸종 여자아이를 자기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넣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읊은 이야기는 영화 '아가씨'의 1부와 2부이다. 같은 이야기가 두 번에 걸쳐 변주를 이루는 1부와 2부. 1부는 하녀 숙희의 눈으로, 2부는 아가씨 히데코의 머리로, 3부는 두 사람의 맞닿은 손으로 끝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나오는 씬이 몇 가지 있다. 아가씨와 숙희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으며 바라볼 때 마주하는 두 사람의 얼굴. 혹은 두 사람이 섹스할 때 맞잡게 되는 손. 능동과 수동의 경계, 보여주는 탐미를 넘어서 즐기는 손이 주는 느낌은 강렬한 주어의 느낌. 어쩌면, 손이 두 사람의 살결을 탐미적으로 훑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손을 아가씨의 장갑 서랍을 들여다보듯 아래에서 위로 쓸어내리지 않아서인지도, 또는 그 맞잡은 손이 굳게 서로만을 의식하고 있어서인지도, 혹은 전부 다 인지. 어느 것에도 잠식되지 않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나는 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그 손에 담긴 힘이 참으로 명쾌하고 담대해서 그와 반대로 영화 속 남자들의 속은 시커멓고 남은 여자들의 얼굴은 허여멀건 하다. 





 1부의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2부의 아가씨의 시선이 하나하나 붙잡는다.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애는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내가 되고 물새 같은 히데코는 물새 같은 내가 된다. 숙희가 히데코를 속이려 했던가? 히데코가 숙희를 속이려 했던가? 백작이 이 둘을 속이려 했었지. 그러다가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를 인정하는 순간, 두 사람의 욕망이 뻗어 나가는 시점에 와서 함께 문 앞에서 멈추어 앉아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밀어서 여는 장면이 몇 번에 걸쳐 나오는 순간, 박찬욱이 하려는 말은 무엇보다도 간단하다. 이것은 로맨스.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부터 인지한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뛰어넘어 마침내 서로 손을 굳게 잡는 연대의 이야기. 나는 굳이 '연대'라는 단어를 골랐는데 그것은 이 두 여자의 사랑이 에로스적 색채와 더불어 '평등'의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 만약 연대와 사랑,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느끼는 그 모든 감정의 기본값이 사랑이기 때문에. 극중에는 '사랑? 사기꾼이 사랑을 하나?'라고 스스로 말하는 숙희의 모습이 나오는데 영화 전체는 이 말을 천천히 뒤집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가득 채운 것은 눈빛과 시선, 소리와 낱말, 빛과 그림자.







 배경은 주로 실내이고 서로서로 속일 때 가장 사소하고 중요한 것이 눈빛이니, 영화 속에서는 인물의 시점 숏이 유난하다. 숙희가 처음 아가씨에게 인사할 때 아가씨는 마침 거울을 등지고 있어 숙희에게는 아가씨의 얼굴과 목덜미가 한눈에 보인다. 아가씨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숙희의 강아지 같은 눈이다. 그 직전 등장했던 라쇼몽과도 같던 군인들의 빗길 속 행진, 얼굴이 누렇게 달아올라 돈 이야기와 모의에 정신이 없는 보영당 사람들을 비추던 그 빛과 소리는 아가씨에게 이르면 아이보리빛의 보얀 향내로 피어난다. 지그재그 길을 숙희가 비를 맞으며 걸어와 마침내 커다란 착각에 이를 때, 실내를 채운 것은 아가씨와 백작의 가짜 대화. 세상 부자 중에서도 누구보다 서책을 사랑해서 금을 팔아 책을 산다는 코우즈키가 모은 것은 사실 성애 소설. 의외, 역설, 진짜와 가짜 사이의 틈은 보영당에서는 누렇게라도 들던 빛이 코우즈키의 서재에는 아예 들지 않으며, 그의 지하실은 숫제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가 푸른 안개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아가씨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분명 류성희 미술감독이 공을 들인 저택이 분명하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oil on canvas, 1948



 숙희가 히데코 아가씨의 집에 처음 들어갈 때 작은 불빛 하나로 앞을 밝히며 가는 자동차가 가는 길은 마치 피터 그리너웨이의 차례로 익사시키기를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한밤중 보이는 집 전경은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 아닌가. 섬세하면서도 계속 보노라면 기괴한 윌리엄 모리스가 작업한 듯한 느낌의 벽지가 드리운 아가씨의 방, 벨라스케스가 한 번쯤 그렸음 직한 아가씨의 옷자락. 거기에서 나아가면 남성 성기의 상징인 뱀이 대가리를 든 코우즈키의 서재가 나온다. 한 번도 영화 속에서 쓰임을 발휘해보지 못한 코우즈키의 성기 대신 빳빳하게 선 뱀 대가리의 쓰임을 보노라면 영화 속 모든 세트가 어떻게 등장인물과 함께 호응하는지가 그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가만히 있음으로는 자신의 존재증명을 다 할 수 없는 코우즈키의 서재는 그런 의미에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낭독회도 열고 서책도 탐하고, 어린 조카에게 변태적 글읽기도 가르치고, 아내를 고문할 수 있는 그의 공간은, 앞서 말했듯 '누군가의 무엇'같은 무언가가 가득 채운 코우즈키 월드다. 영국, 일본, 한국의 가옥이 한데 붙어있고, 실제로는 조선인이면서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서 일본인 행세를 하고, 이 겹겹이 문과 문으로 쌓인 집을 보노라면 코우즈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얄팍한 거짓말 그 자체의 인물이라는 것을, 이 모든 '지나가는 세트'가 그 전부로 말하고 있다. 









 영화 전체를 세트가 앞서나가지도, 뒷걸음질 치지도 않는 말하는 배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조화로운가 하면 이질적이고 어지러운가 하면 간단하다. 뒤틀리고 암담하면서도 제 할 일 못하는 흐리멍덩한 이 안개 속을, 두 사람의 사랑은 거침없이 뚫고 지나간다. 가는 길목길목이 어떠하던가. 커다란 보름달은 숙희의 문에 있다가 두 사람이 저택을 탈출할 때 흐리게 웃는다. 마침내 해피 엔딩에서 달이 환하게 걷혔다가 엔딩 크레딧 장면에서 숙희의 방문에 가서 앉는 커다란 보름달. 이렇게 분명히 밝혔음에도 이 영화 속 두 사람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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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7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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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4 0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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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쪽
마르셀 서루 지음, 조영학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후기 / 사월의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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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나름대로의 힘이 있다. 서쪽 사막에서는 씨앗 상태로 100년 동안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식물들도 많다. 그저 다시 꽃피울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비가 100년만에 내렸는데도 바위와 모래가 온통 꽃과 식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책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여러 갈래를 지녔다. 어떤 글씨는 아름답고 어떤 글씨는 섬세하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서루의 글씨는 묵직하다. 형용사와 부사를 뺀 진실, 현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벗어난 미래. 그 가까운 미래, 씨앗의 파종기한을 보며 종종 린넨을 세탁하는 에반젤린의 메이크피스를 보면 묵직한 거품 같은 안개를 보는 느낌. 거품은 가라앉고 안개는 걷히기 마련이지만 이 슬픈 sf가 꿈꾸는 것은 현재라는 점이 마음을 찌른다.





 sf가 꿈꾸는 것은 언제나 역설적으로 현재. 물론 이 작품이 전적으로 sf는 아니다. 아마도 작가가 특정 장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 장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었다는 점이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돕는다. 







 이 책 속 메이크피스는 에반젤린의 유일한 시민이자 보안관이다. 작가는 체르노빌의 거주 금지 구역에 들어가 혼자 자급자족하는 여인을 취재한 다음 이 소설을 생각했다는데, 체르노빌 금지 구역의 유일한 주민과 메이크피스가 다른 점이라면 고요함의 정도일 것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메이크피스의 마음이 여행을 함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 번씩 요동치는 것을 보면 생각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씨앗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 황량하고 먼지와 적막함이 감돈다. 책장을 넘기고 얼마 안 되어 메이크피스가 만나는 사람이 임신 상태의 핑이라는 것,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서 메이크피스의 이 기록이 '혹시나'라는 기대를 품었다는 것은 인류가 꿈꾸는 세계와 닿았다. 

 세월이 잘 맞물리는 시계처럼 돌아가고 봄이면 작물을 심던 시절. 언제나 옛날은 '좋았던 옛 시절'로 기억되고 윤색되기 쉽다지만, 마르셀 서루의 '현재'는 엄정한 현실을 담았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의 사람은 어떻게 될지 품었던 의문. '더 로드'에서 무겁게 그렸으니 '먼 북쪽'이 굳이 필요할까 싶었으나 sf가 꿈꾸는 것은 이제 종말 후의 삶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생각의 솜털이 곤두선다. 





 아주 오랜 옛날 해저 이만리와 달세계 여행을 꿈꾸던 인류가 이제 와서 그리는 미래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라니. 

 이 저릿한 슬픔 이후, '이 없음'에 던져진 것이 여자 두 명과 태아 하나라는 설정은 이상하게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어쩌면'하고 생각해 본다. 남자는 유전자 전달 이후에도 너무 오래 살아남아 문제이고 여자는 생명 잉태 이후에도 또한 너무 오래 살아남아 문제라면,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30년을 살 수 있는 생명체가 2년 후 도살되고 30년이 전부인 생명체가 100년을 산다면 이것은 생명의 이상한 진행이다. 이 나선세계의 행진이 도착하는 곳이 설사 오염된 세계,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쓸모없는 플라스틱 조각이라 해도 기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플라스틱 조각에라도 희망을 품게 되는 때가 있다. '드디어'와 '혹시나' 사이를 가파르게 오가는 사람의 마음. 메이크피스라는 화자가 일인칭으로 모든 것을 서술하는 이 모든 사건에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택한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일인칭 화자를 내세우고 시제는 현재로 제한할 것.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다 죽고 여자만 살아남아야 한다'라든지 '남자는 다 불안한 존재다', 혹은 '여자만 완전하다'라는 느낌은 없다. 메이크피스가 살아남은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강한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작품 속 여성성과 남성성은 극도로 제한된다. 메이크피스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가 가녀려 보이거나 행동이 독자에게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like a girl'을 뒤집은 'like myself'의 느낌이 이야기를 장악한다. 



 


 끝이 없는 한계를 그리는 마르셀 서루의 스타일은 모호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문체는 분명한 형식에 간단한 수단을 고의로 심어놓는 것인데, 이 자체가 아름다움을 일구어 낸다. 여성성도 남성성도 사라진 인간성을 그리기 위해 이보다도 더 명확한 입장이 있을까. 허구 없는 진실은 이런 것. 메이크피스가 마지막으로 접하는 것은 어느 소녀의 기록. 메이크피스 역시 '언젠가 내 글을 볼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남겨둔다'라는 대목을 접하노라면, 인간의 읽는 행위 자체의 숨은 뜻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언급하는 '마음과 마음이 겹쳐지는 신비로운 행위'로서의 읽기.



 


아버지는 일이 작못되면 '서쪽으로 빠진다'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서쪽은 나한테 항상 좋은 느낌이었다. 결국 서향은 태양의 길이 아닌다. 더욱이 내가 아는 어떤 역사에서도 사람들은 자유와 거처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반대로 우리 세상은 '북쪽으로 빠진' 셈이다 정말로 북쪽으로 빠졌다. 그것도 얼마나 먼 북쪽인지 나도 이제 막 배우려는 참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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