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책들도 보고 있는데 

어느 날 새벽 산책하다가 어느 집 앞에 나와 있길래 주워왔던 이 책도 "그래 이것. 이것부터.."이어서 펴서 보기 시작했다. 삼분의 일 정도 진입한 상태인데, 읽지 않았다면 가질 책은 아니겠으나 읽었다면 버릴 책도 아니겠. 정도로 평가 중이다. 


좋은 책이라 버릴 책이 아닌 것은 아니고 

.... 80년대에 우리는 이런 책을 읽었다, 이 정도가 80년대의 성취였다.... : 이걸 기억하고 싶다면 버릴 책이 아닌. 




이 책도 이사하면서 발견한 책이고 

책장 조립하고 청소하고 집 정리하고 등등의 와중 <사람의 아들>보다 먼저 읽기 시작한 책이다. 

이 책은 54년 나온 책. 


이 책에 거의 처음부터 독자를 압도하는 면모가 있는데, 주인공인 짐과 마가렛의 관계. 

마가렛은 짐을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짐을 이모저모로 조종하고 이용한다. 짐의 시점에서 마가렛이 어떤 '막장'인가 (인간성의 막장), 이걸 참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말한다. 여러 의미에서 사실적인데, 사실주의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하기도 하고, '원래 여자들이란 흔히 이렇다'고 깔고 간다는 느낌에서도 그렇고, 나 이런 사람 알아 내지는 내가 바로 그녀였어 같은 실감 자극한다는 데서도 그렇고. 


이것은 여혐인가? 이런 책을 읽을 때 기준점으로 쓰기 위해, 여혐을 정의해 두어야겠다는 심란함이 든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사람의 아들>을 읽으면, 여혐도 여혐 나름이라는 잡념이 드는데.....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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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이사하고 찾은 책이다. 마틴 에이미스의 회고록. 

어린 시절 자기가 아버지에게 "아빠?"하고 말 걸면 킹슬리 에이미스가 "왜?" 하고 답할 때, 거기 어김없이 담겨 있던 짜증에 대해 말하는 걸로 시작한다. 킹슬리에 따르면 이 때의 "아빠?"는 잉여이고 그러므로 불필요했다. 그렇게 부를 수 있을 때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으며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암묵적이고 혹은 산만하든) 대화가 진행 중이라는 뜻이므로. 


그로부터 긴 세월 뒤 자기 아들이 자기에게 "아빠?" 해서 시작되었던 몇 대화들을 기록한다. 

그 중 이런 것도 있다. 


- 아빠. 

- 응? 

- 우리는 무슨 계급이야? 

(나는 딱딱하게 답한다). 

- 우리는 계급이 아니다. 우리는 계급과 무관하다. 

- 그럼 우리는 뭐야?  

- 우리는 뭐도 아니다. 우리는 그 모두의 바깥에 있다. 우리는 인텔리겐차다. 

- 아. (아들은 어조를 바꾸고 비꼬듯이 묻는다). 그럼 내가 지식인이야? 


저렇게 시작하여 두 아들이 아버지의 허세를 절묘하게 붕괴시키는 대화가 이어진다. 

"우리는 어느 계급도 아니다. 우리는 지식인이다": 아버지에게서 어린 시절 이런 말을 듣고 자라는 거 어떤 걸까 상상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특히 같은 업에 종사한다면 흔히 있게 되는 경쟁의 관계. 

이것이 자기와 킹슬리 사이에 없었던 것, 그래서 아버지와 불화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이 부자는 좀 특별한 사이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로 잘 이해했고 언제나 넘치게 사랑하면서 또한 남처럼 지낼 수도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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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얘기를 더 이어서 하자면. 

오전 8시에 시작하면 점심 시간 즈음 끝이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싣기까지 한 시간, 이동에 한 시간, 정리에 한 시간. 세 시간에 한 시간 더하면 네 시간. 12시-1시면 이사완료. 아니겠? 아니었다. 싣기까지 세 시간이었. 짐 다 싸서 지금 집에 도착했을 때 점심 시간이었고 인부들이 "우리는 점심 먹고 바로 올테니 조금만 가디려라" 하고 사라졌을 때 지금 집 앞에 나 혼자 남겨짐. 잠시 후 묘하게도 (이런 우연의 일치가! 의 묘함) 중국집 배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앞에 있던 오토바이에 타려 했고 내가 그를 보는 시선이 너무도 간절했는지 그가 먼저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같은 질문을 했다.  


그는 실제로 중국집 배달원이었음. 

너무 목이 마른데 물도 포함해 짜장면을 바로 이 자리로 배달해 줄 수 있겠느냐. 

... 그는 '그럴 수 있고 말고 (너무 쉬움)' 식으로 답했다. 그리고 10분도 걸리지 않아 길 위의 내게 짜장면이 배달되었다. 


모르는 동네. 짜장면 받아 놓고 앉을 만한 구석을 찾아내 불편하게 먹었던 짜장면. 

지금 침이 고이려고 한다. 불편한데 술술 들어가던 짜장면. 술술 들어가던 양파, 단무지. 


그 날 저녁, 받아두었던 번호로 전화해서 볶음밥을 시켰고 

볶음밥 먹고 나서, 정리를 하기에는 힘이 없고 누워서 자기에는 흥분된 상태인 때. 

.... 이런 땐 맥주지. 어쩔 수 없다, 나는 맥주를 마셔야 한다. 결정한 다음 아직은 내 동네가 아님에도 내 동네 풍으로 나가서 레트로한 인근 수퍼에서 맥주를 샀다. 비오던 그 날. ㅋㅋㅋㅋㅋ 하튼 그 피곤하고 심란하고 또한 기쁘던 바로 그 날. 맥주 사와서 책상 앞에서 인터넷이 안되니 전화기로 이것저것 들으면서 맥주를 마셨는데


이 노래. 

이 노래도 잘 알지만 처음 듣는 노래처럼 들렸었다. 

이 노래가 기억하게 하는 방들을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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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5-2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몰리님. 이 페이퍼는 영화같아요!

몰리 2021-05-28 12:46   좋아요 1 | URL
뭐랄까, <우묵배미의 사랑> 분위기가 있다 이 동네는....
같은 느낌이기도 했어요 저도!

scott 2021-05-28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인정 넘치는 중국집 배달원님 10분만에 모든 걸 완료하시는 ㅎㅎ
몰리님 비내리는 날에 이사 하시느 라 고생, 고생,,
그래도 이사가신 동네 분위기는 괜찮은듯!

몰리 2021-05-28 12:49   좋아요 1 | URL
아니 정말 배달원님이 ˝이 사람 구원이 필요하다˝ 같은 표정으로 절 보더라고요?! 아...;;;; 이 동네, 집값 싸고 서울에서 빈촌으로 꼽히는 동네인데, 신촌 연희동 이런 동네와는 뭔가 많이 다르다는 걸 매일 실감하는 중. 검정 비닐봉지 어디서나 쓰고 있고 (이건 좋은 게 아니겠...) 반찬가게에서 반찬 사면 직접 재배한 상추를 서비스로 주고. 맛있는 만두집이 있는데 진짜 진짜 집만두! 가격도 매우 저렴!
 



예전에도 좋았던 이사가 있었지. 그것에 대해 뭐라 쓴 것도 있었지. 

뭐라 다른 곳에 썼던 것을, 여기 서재에 옮겨 왔던 포스팅이 있다. 찾아보니 17년.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중독은 직접 대면하기엔 너무 고통스런 감정들을 승화시키는 방법.. 이랬나, 브렌다가 찾아갔던 섹스중독 전문 테라피스트의 말. 담배 중독에도 그런 면이 분명 있긴 한거같음. 몇년전 끊었을 때 처음에 맥주를 거의 매일 마셨는데, 이상하게도 끊기 전이었다면 어떻게 담배 없이 술을 마셔? 였겠지만, 끊고나자 술이라도 없었으면 담배없이 어떻게 견뎠을까. 중독은 중독으로 싸우는 거였군. 하하. 그럼서 즐겁게, 많이는 아니고 그러나 자주 맥주를 늘 짝으로 쟁여두고 마셨다. 사실 담배 끊고 어느 정도 지나면 미각이 살아나는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여튼 덕분에 맥주가 더 맛있어진다. 하긴 거기선 맥주 자체가 맛있는 맥주였구나. 그게 더 맛있었으니 얼마나 맛있었을까. 한국오기전 아파트 계약기간이 끝나고 두달 동안 서브렛을 구해 살았었는데 서브렛 구한 아파트로 이사하던날 저녁 하이네켄 사서 냉장고에 넣고, 거실에 TV 연결하고 책과 기타 살림은 벽으로 밀거나 해서 다닐 통로만 만든 다음 테이블 위에 맥주 놓고, 김과 와사비 간장 놓고, Stand by Me 틀고 어둡게 전등 하나만 켠 다음 영화보면서 혼자 맥주 마셨었는데 그게 생애 최고의 술자리 중 하나였다. 그런 술자리를 가져보기 위하여 수시로 이사다니고 싶어질만큼. 막 이사를 끝낸 집이고 짐정리가 대강만 된 집의 어수선함 + 그래도 여기가 이제 내집이라는 안정감이 필요하다. 안주는 가장 간단해야하고 조명은 최소한이며 밤은 (바깥이나 안이나) 고요해야 한다. 그리고 맥주는 하이네켄이나 스텔라 아투아나 코로나. 서울이라면 '고요함'에서 탈락하기가 쉽겠구나. 금연 얘기 중이었지 참. 그 술자리가 최고의 술자리가 된데엔 당시의 내가 논-스모커였다는 것이 눈꼽만큼이라도 기여했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담배 피우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면 담배 없이 술마시는 기쁨도 알게 된다고. 술! 술에만 집중할게! 이런 느낌이기도 하고. 천천히 알뜰하게 취해가는 것이죠. 



금연자로 술 마시고 싶어지면서 
흡연자로 술 마시던 중 찾아본 예전 글. 
흡연자인 현재 신세가 서글퍼서 울고 싶어짐. ;;; ㅜㅜ ;; 

그런데 저 날 저녁 정말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 집에선 초를 아예 쓰지 않는데 당시엔 초가 많이 있었다. 
초를 넣고 켜는 그릇들도 여럿 있었고, 녹색 파란색 유리로 된 아주 예쁜 것이 하나 있었음. 
그것에 초 넣어서 켜고, 하이네켄과 와사비 간장 마른김. 그리고 Stand by Me. 

Going to see a dead kid -- I don't think it should be a party. 
이런 대사에 목이 메이며 (그래서 맥주는 더 맛있어지고) 보던 시절이었다. 

(*여기까지가 17년의 포스팅). 

..................................... 


저 날 저녁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 저 정도라도 적어두었던 덕분의 생생함이겠.  


저기 적은 녹색 파란색 유리로 된 아주 예쁜 초 그릇. 이것도 바로 어제까지 썼던 것처럼 생생하다. 

오호 애재라. 너 바늘이여, 우리가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이런 감정을 말하는 "조침문"에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이, 이런 경험 때문이기도 할 것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면서 쓰던 것들. 내 삶에 빛을 주던 것들. 


어쩌다 깨뜨렸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깨뜨렸던 기억은 난다. 깨뜨리지 않았다면 지금 옆에 있을 것이다. ㅎㅎㅎㅎ 아 하찮은 candle holder 따위에 이런 감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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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집이 원래 목욕탕이 있던 공간을 쪼개어 다세대 주택으로 만든 곳이었는데 

아마 그래서인가 좀 특이한 공간들이 있었다. 작은 광 같은 것도 있었고 (아주 작았지만 느낌은 옛날 촌집의 광 느낌. 허리 수그리고 들어가는 미니미니한 방이었) 창문이 있는 쪽 벽을 마주보는 넓은 기둥이 있어서 기둥과 벽 사이, 그 공간에 나무를 짜넣어서 만든 수납장이 있었다. 이 수납 공간을 책으로 채우고 살았다. 책이 있으면 뭐하냐 찾을 수가 없는데, 한탄 일으키던 책들이 거기 있던 책들. 이사하던 날 특히 욕먹은 게 그 공간이었다. 이게 뭐냐고. 그럴 만했다. 그 앞에도 책장이 있었다. 책장을 치우면 나타나는 책장...  


Philosophy in a new key. 얼마 전 궁금하다고 포스팅했던 책인데 

이 책도 이번에 발굴, 출토되었다. 이 책도 저 공간에 있던 책이다.

또 득템이 저 챈들러 전집. 오늘은 챈들러를 읽어야 하는 날인데, 전집이 집에 있어도 읽을 수 없다..... 꺼낼 수 없다, 하던 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가버린 날들. 


지긋지긋했던 곳인데 (그럴 이유가 집이 좁다, 말고도 있었다. 괴랄한 집주인 포함) 이렇게 이 정도 적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예상 못한 감정이 든다. 그리움 비슷한. 그 집에서의 삶, 그 집에서 하던 일들이 갑자기 생생해짐. 그게 이렇게 쉽게 가버린 세월, 가버린 세계가 된다는 게, 슬프다 같은 느낌. 


어제 책장 배송하러 오신 분은 지식인 느낌이었다. 실제로 지식인일(이었을) 수도. 삶이 안 풀린. 

그 왜 미간을 찡그릴 때 그게 "사유" 이런 걸 하느라 찡그림인 사람. 하튼 그런 느낌인 분이었는데 

책장 배송되는 그 시각에 가구 하나가 더 배송될 예정이었고, 해서 전날 배송 관련 통화할 때 그 가구도 

같은 사다리차 쓰면 안되냐고 문의했더니 무슨 말이냐, 당연히 안되는 거라고 펄쩍 뛰더니 막상 다음 날 책장과 다른 가구와 사다리차가 다 모였을 때, 자기가 알아서 착착 진행시켜 줌. 사다리차 요금은 요즘 6만원이라고 한다. 6만원을 두 번 쓸 수도 있었으나 한 번 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낀 6만원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도 온종일 책 정리를 했고 

좀 놀라는 중이다. 생각보다 더 많다. 그 좁은 집에 이 많은 책들이 어떻게 다 들어가 있었나. 

그러니까 실제로 12평은 그렇게 아주 좁은 공간은 아니었던 걸 수도. 거기서 인간이 확보한 공간이 6평 이하였던 걸 수도.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면서 보게 된다, 아직도 정리 안되어 쌓여 있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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