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의 안도


멸종 직전의 우리, 김나정, 작가정신, 2014.


  지금 멸종직전에 서 있다. 다행인가, 아직 멸종은 아니다. 멸종으로 들어서는 길인가, 멸종에서 비켜갈 것인가.

  멸종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한데 이 소설 역시 시종일관 그 분위기를 끌고 간다. 봉인했던 기억을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이에게 주도잡힌 일상은 잠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뒤흔든다. 그것은 과거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도 이어진다.

  소설의 얼기는 간단하다. 내 소중한 아이를 죽인 아이를 향한 엄마의 복수다. 그 복수가 20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다 마침내 20년이 지난 어느날 폭발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작가는 이 줄거리를 가해자와 피해자, 둘러싼 등장인물의 여러 시점으로 돌아가며 전개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시간을 역행하고 시점을 달리하면서 그저 신문 단신으로 처리될 내용이 아니라 보다 풍부한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시종일관 답답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겐 내 아이가 죽은 순간이 복수의 시작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엄마의 과도한 집착이 죽음의 그림자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엄마의 복수가 20년이 지난 시간에야 절정을 이루는 것은 똑같이 아이를 잃게 하는 것을 의도한 것일까.

  죽인 아이, 김선주는 사는 내내 사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 겨우 아들 미혼모로서 안도에게 의지한 채 윤수인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이어가는 그녀는 마침내 아들까지 유괴당한다. 아들의 유괴자가 자신이 죽인 친구 이나림의 엄마, 권희자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죄를 지었기에 분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어린 시절의 기억 역시도 끔찍하다. 그래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에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던 어린 그녀의 삶은 지금 자신의 아들의 안전 때문에 멸종 직전에 처해 있다. 죽은 아이, 이나림을 살려내라는 저 엄마의 말은 실행될 수 없기에 그렇다.

 

아이를 잃은 여자는 도끼를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앞을 가로막는 겹겹의 나무에 도끼질을 했다. 몸은 몸부림쳤다. 진저리치는 나무 꼭대기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튕겨 오른 가지는 달을 겨눴다. 도끼날을 받아먹은 나무는 흉터가 나되 쓰러지진 않았다. 숲이 사라질 때는 까마득했다. 여자는 치마를 벗어 말았다. 치맛자락에 횃불에 댔다. 바람은 불을 싣고 숲을 살라갔다. 타들어가는 숲에서 순록과 늑대, 말코손바닥사슴, 불곰과 흑곰, 스라소니가 튀어나왔다. 덫들이 틉틉, 아가리를 다물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발버둥친들 발목은 끊어지지 않았다.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은 웅성거렸다. 불꽃은 나무를 감싸 하늘로 끌어당겼다. 잎사귀들은 수런수런 몸을 뒤집었다. 줄기 속 수액이 뜨거워지고, 껍질이 툭툭 터졌다. 이글거리는 나무 사이로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은 숲 바깥쪽으로 밀려나가고, 숲과 하늘의 경계가 울렁거렸다. 나무와 나무 사이, 붉은 그림자가 서 있다. p7~8

 

  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다. 나림의 엄마가 나림을 위한 복수를 하며 광기의 도끼질을 하고 불을 지른대도 아이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아이는 엄마의 그 광기에 질려 이미 죽음을 꿈꾸었기에.

  그 옛날 이뤄진 사건의 진실을 알고 나면 허무함과 동시에 나림이의 영악함과 소심한 수인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뒤범벅된다. 표면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백히 나림이와 수인이지만, 수인이 또한 나림이에 의한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를 향해 칼을 들이댄 것은 분명 수인이지만 그 칼을 잡아 제 몸을 찌른 건 나림 자신이니까.

 언제던가, 이런 류의 기사를 본 것도 같다. 왕따를 견디지 못하고 칼을 휘두른 초등학생에 대한 기사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한줄로 요약되는 사실과 수많은 페이지를 담은 진실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사실에 귀기울여 삿대질하고 어떤 이들은 진실을 알지만 거기다대고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적어도 나림의 엄마, 권희자는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제 엄마의 기대가 아이를 어떻게 짓눌렸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이가 타인을 얼마나 끔찍하게 괴롭혔는지, 제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타인을 제물로 삼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안도’가 살 수 있다. 안도가.

  마침 아이의 이름이 ‘안도’인 것에 그나마 기대어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은 ‘안도’가 ‘안도하다’의 안도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안도’ 왕에서 따온 듯한 이야기에서 무너진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안도’. 백마리 코끼리를 부하로 거느린 왕, 사막을 가로질러 세계를 정복한 코끼리의 제왕 안도. 불에 타 황량한 저 숲을, 사막을 정복하는 안도가 될까?

  엄마 권희자의 증오는 복수는 나림을 위한 것일까. 자신을 위한 것일까. 나림의 죽음 이후로 황폐화된 자신의 가정과 자신에 대한 것까지를 모조리 전가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이루지 못한 피아니스트에 대한 열망을 이뤄주기 바랐던 딸의 죽음.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압박감에 손가락이 마비된 이나림. 선주는 그저 피아노를 동경해 피아노를 잘치는 아이가 누구인가에 이나림을 외친 죄밖에 없다. 삶을 살아내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라는 것을 사건의 시작을 보며 느끼게 된다.


그래, 난 김선주를 괴롭힐 때만큼은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미운 건 내가 아니라, 김선주다. 미움은 안쪽으로 졸아들지 않고 바깥쪽으로 뿌려졌다.


  딸이 그러한 것처럼 권희자 역시 타인에게 미움을 전가시키고 있는 거라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이 복수라고 행하는 일을 멈추겠지. 미움을 안쪽으로 졸아들었던 김선주, 윤수인이 자신의 미움을 바깥쪽을 뿌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인 역시 권희자처럼 제 생의 모든 것을 안도에게서 얻고 있는데, 안도가 죽게 된다면 수인은 다시 복수를 하게 될까. 그리하여 이 복수는 이들 간의 끊임없이 반복되어 움직이게 될까. 끊어낼 수 없는 증오로 이어져 멸종으로 향해 갈까.

  헌데, 이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리하거나 정해진 싸움같은 거였다. 수인은 처음부터 복수를 키우기보다 자신을 힐책하는 사람이었다. 나림처럼 희자처럼 자신에 대한 미움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삭이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인물의 성격에 기대어 어떡하든 이 증오와 복수의 고리를 이어가지 않고 끊어낼 ‘용기’를 보여줄 것이라고 수인에게 기대해도 될까. 그러다 문득 마지막 수인이의 이름이 왜 또 ‘수인’인가에 머무른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사람. 어떤 삶을 살게 되더라도 수인에게 씌워진 멍은 지워지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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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탈출기


망원동 브라더스, 김호연 저, 나무옆의자, 2013.


  누군가의 집을 구경한다는 건 그 사람의 내장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내시경으로도 볼 수 없는 몸속 어떤 상태 말이다. ‘방학 옥탑남’에게선 소화불량이 엿보였고, 그에 비해 ‘수유 반지하녀’는 리드미컬한 연동운동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내 옥탑방은 어떤가? 아마도 만성변비일 것이다. 빠져야 할 똥차가 너무 많은. p251


  여기, 그런 집이 있다. 똥차가 가득한 집. 이 소설은 그 집으로 안내한다.

  세상에서 백수로 산다는 건 삶에서 뒤쳐진 제일의 선으로 이야기된다. 벌써 삼심 중반, 나이도 먹어가지만 서울 한켠에 무려 8평짜리 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그 삶에서 위로가 되는 일일 것이다. 다시 생각하면, 수입이 없다 뿐이지 무명의 만화가라는 직업도 가지고 있는 백수니까.

  내 공간을 가지고 이 공간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도 소통하고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히키코모리가 되어 우울과 절망에 풍덩하거나 타인을 해치는데 열을 올리는 인간이 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참으로 자랑스러운 백수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이라도.

  이런 옥탑방 속으로 어느날 갑자기 타인들이 침투한다. 백수가 가진 유일한 공간에 타인이 들이닥치는 이들은 한여름의 모기만큼이나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낯모르는 이들이 아닌 이상 거절하지 못하는 이 백수같은 오영준 작가의 성격 덕분에 점점 옥탑방은 10대에서 60대의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함께 직장생활을 했으나 지금은 기러기 아빠가 된 40대 김부장, 만화계에 입문하게 해준 50대의 황혼이혼남이 된 싸부, 그리고 후배인 만년 고시생 20대 삼척동자가 푸닥거리며 사는데 이들을 보며 집주인이자 오지랖이신 60대의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이자 자퇴생인 10대도 이 옥탑방을 들락거린다. 이들은 각자의 고민들을 지니고 옥탑방을 피난처로, 도약의 장소로 여긴다. 각 세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대변하는 듯한 이들은 문제만을 안고 고뇌하며 마냥 우울에 빠져 있지 않다. 물론 사람이 원체 많다 보니 그럴 틈도 없긴 하다.

  이들의 몇 달간의 동거기를 작가는 찌질하지만 우울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애틋하게 그리고 있다. 언뜻 보면 그 기간 동안 서로 M.T에 온 듯한 분위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지지하며 끈적한 우애를 다진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가미되었겠지만 충분한 체험이 바탕이 된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각자가 옥탑방으로 들어온 사연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면 옥탑방과의 이별은 그들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시종일관 유머가득한 잠시의 동거기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을 안겨준다. 소설에서나마 모든 이들이 가진 문제가 해결되는 해피엔딩을 맞아서 기쁘다만, 이렇게 모든 이들의 문제들이 특히나 각 세대별로 대표되는 그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밖으로 나오자 동해 바다에서 나고 자란 듯한 탐스러운 불덩이가 어두침침한 새벽하늘로 떠오른다. 세상이 밝아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명의 남자는 나란히 해변에 서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연고도 나이도 다른 네 명의 남자가 서울 한구석 옥탑방에서 만나 여기까지 동행해와 해를 바라본다. 옥탑방에서 보던 그 해와 별다를 바도 없다. 근데 뭉클하다. 지난 몇 개월,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한 이 빈대 기생충 바퀴벌레들…… 같지만, 사실은 ‘입구멍’이라는 식구. 그동안 이들을 미워하고 꽁했던 내 소갈머리는 뜨거운 태양에 소독되고 시원한 파도에 세탁되고 있다. p266


  여기서 30대의 백수 아닌 백수의 존재는 참으로 크다. 이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을 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더라도 그저, 외면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고민을 들어주는 존재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존재를 만났다는 것은 이 옥탑방에 들어온 다른 이들의 행운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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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정산


  

  이 글은 소설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조용조용한 이 기록들은 언젠가 내가 마주해야 할 일이기에 생경하지 않다. 그런데도 지극히 이 현실적인 기록들이 몽환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상실이란 이름이 뒤덮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작가는 이별을 겪는다. 작가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죽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작가의 이야기로 모든 것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장례절차를 밟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남아 있는 가족들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장례에서 사십구재를 지나 탈상까지의 실제 치러야 할 일들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이 소설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큰 사건없이 이뤄지는 전개이다. 아니, 인생에서 가족의 죽음은 가장 큰 사건이기에 이 커다란 사건을 겪은 후의 ‘나’의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나’는 죽은 이를 애도할 시간없이, 내 슬픔을 토로할 시간없이 장례절차를 밟으며 사사로운 것들을 따지고 선택해야 한다. 의사의 진단서를 받는 일, 사망 소식을 전하는 일, 사망신고서를 제출하는 일, 핸드폰도 해지하고 은행과 보험사에 연락해 계좌를 해지하는 일도 해야 하는 절차를 밝아야 한다. 그 사람이 완전히 사회 속에서 활동했던 모든 것들을 지우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는 것. 남은 자의 몫이자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전의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나’의 삶이 그대로 흘러가야 할 일들엔 신부전증 아버지를 챙기는 일도 포함된다. 아버지와 잦은 말싸움은 기본이고 병원 동행에서 집안일을 혼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아버지의 식이요법을 챙기는 일까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를 두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역할들은 손놓은 채 있던, 엄마에 대한 애도도 없이 멀쩡한 듯 보이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가득한 채. “사랑 주던 엄마는 이제 없고, 효도 받으려는 아버지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43년 인생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결혼생활엔 어떤 서사가 있기에 그런 것인지. 명령과 복종에 익숙했던 군인 아버지를 엄마는 가족을 위해 애쓰는 가장이라고 했건만 아버지는 퇴직 후 엄마의 생활을 간섭하고 힘들게 했다. 엄마의 심장이 고장난 건 아빠의 퇴직무렵이었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엔 언니의 결혼과 이민과 동생의 박사 진학 등이 있었다. 또한 늘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던 ‘나’까지 엄마의 생활에 변화와 불안이 한꺼번에 닥친 시기에 엄마는 몸의 문제가 급격히 생긴 것이다. 그런 엄마의 결혼 이전의 모습까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자랐고 어떤 학창시절을 보냈고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는지.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그리워한다. 늘 우리는 누군가가 영영 사라지고 난 후에야 그의 뒷모습을 쫓는다.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엄마’를 떠올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엄마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에서 ‘인간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우리가 맞닥뜨리는 당연한 현실이다. 지금은 나 혼자만 겪는 일인 듯하지만 모드가 겪는 일이고 우리 모두가 겪을 일이다. 그래서 보편적 죽음으로 승화된 죽음으로 상실을 소거해 나간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으로 ‘나’는 되돌아가는 것이겠지.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물론, 그렇다고 엄마의 죽음이 슬픈 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슬픈 건 슬픈 거니까. 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보며 엄마를 생각하는 일은 비단 탈상까지만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득문득 떠올릴 것이다. 한결같이 왼쪽 밑창이 오른쪽 보다 닳아 있는 엄마의 구두를 보며 엄마가 왼쪽 다리에 힘을 싣고 걸었을 걸 생각하는 일처럼.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일상의 일들을 진행하고 그냥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뿐인데도 슬픔의 강도가 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통곡과 오열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곱씹을수록 되살아나는 슬픔과 상실의 표정들이 생생하다. 아무리 ‘누구나’ 겪는 일이라 위안삼으려 해도 내게 닥친 일은 어떡하든 내가 극복해야 할 일인 것이다. 작가의 엄마의 죽음에 애도 방식은 ‘엄마를 위한 것’이었고 ‘나’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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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이공은 없다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장작인 이 소설에 어떤 심사위원은 대상이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이 전개 빠른 추리소설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세계문학상 수상작이 거의 영화화되어서인지 일찌감치 세계문학상을 읽을 때면 소설적인 느낌보다는 영화적인 느낌이 강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게 된다. 역시,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무대를 사이공으로 옮긴 이 소설은 밤이 그려지는 이미지처럼 폭력과 환락이 가득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뉴스에서 접할 이야기,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볼 수 있음직한 내용이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실종되고 또한 살해되는 필리핀이 떠오르는 것도, 가장 대대적으로 드러났던 필리핀 납치 살인사건이 함께 떠올려진다.

  볼수록 찐득찐득한 느낌이 가득한 이 소설은 경쾌하지 않다. 당연 살인과 음모와 배신이 판을 치는 내용이 진행이 되는데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될까. 죽은 사람이 될까, 죽게 될 사람일까. 저자의 시선이 계속 바뀌고 있으니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인물을 응원해볼까.

  등장인물들은 남성들이 압도적이다. 그리하여 이들 언어의 세계는 상당히 격하고 성적이다. 퇴폐적이며 부도덕한 언어가 시종일관 가득하다. 그들이 삶 역시 자신들의 언어가 내뱉는 방식으로 생활한다. 아니, 그들 생활에 맞는 언어를 구사한다.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당한 거래와 윤리를 비켜내고 그들이 얻어 내는 것은 단순하게는 ‘돈’이겠지만 ‘돈’이란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을, 재화를 얻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투자하고 여기서 얻은 수익을 쾌락을 향유하는데 바친다. 낯선 사이공에서의 느낄 수 있는 쾌락을 천국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쾌락을 위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쾌락의 방식엔 당연 술과 여자와 약물들이 빠지지 않는다. 기가막히게도 술과 약물의 등가는 그렇다치고 이것들과 등가되는 여자는 무어란 말인가. 좋게 해석하자면 그들에게는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봐야 하나.

  그들은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천국에서 그들은 권태와 욕망, 허세와 거짓말의 언어 속에 파묻혀 있다. 그것밖에 할 게 없었고 그것만 하고 싶었고 뭐 그렇다.

  하지만 이들이 이 생활을 더 누릴 수 없는 것은 고리대금업자 기승의 실종이다. 천국에 살 수 있도록 관리해주는 기승의 실종은 이들을 천국에서 추방하도록 만든다. 부랴부랴 대수와 순철과 도식은 기승의 행방을 추적한다. 이 와중에 기승의 아내는 살해된 채 발견되고 도식은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사를 받기에 이른다. 물증이 없어 풀려나지만 기이한 일은 계속된다. 베트남 여성 ‘린’이 한국행을 위해 도식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준비과정에서 기승과 순철 역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런 상황이 주어지고 이야기를 풀어 가려면 항상 예측가능한 전개가 있다. 믿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 공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패턴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똑똑하게 보여지는 그 부패한 경찰과 대사관들이 등장한다. 왜 이다지도 천국의 삶의 방식은 패턴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 네 명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사는데 이유가 없을 리는 없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이유들도 조금은 익숙하다.


도식은 기승의 사업을 믿지 않았다. 기승이 말하는 달콤한 배당금보다는 기승과 순철 그리고 대수와 함께 사이공의 밤거리를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도식은 투자의 대가로 기승과 대수와 순철을 얻었다. 그들과의 싱거운 농담, 즐거운 한때가 투자의 대가라고 도식은 생각했다.

기승과 대수, 순철 그리고 도식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도식은 그들과 술을 마시며 서로의 공통점을 곱씹었다. 목표를 손쉽게 달성한 남자들. 한때는 건실했던 남자들. 목표를 이뤘지만 그 대가로 뭔가를 잃어버린 남자들. 그 뭔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미련한 남자들. 하지만 그 뭔가를 애타게 되찾으려 애쓰는 한심한 남자들.

한때는 건실했던, 하지만 지금은 미련하고 한심할 뿐인 남자들이 기승과 대수, 순철 그리고 자신이라 생각했다. p196~197

 

  익숙한 패턴이라 흥미 유발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항상, 누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 누가 왜 죽이는지, 이런 류의 소설에선 그것이 궁금해진다. 이 속에서 뒤통수를 때릴 인물들이 가늠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뿐이다. 거듭 배신자는 있고 부패하는 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돈으로 얽혀 있던 이 네 명의 남자들 중 도식만이 살아남았다. 과연 그는 끝까지 살아남을까? 그리고 그에게 영주권취득을 위해 결혼을 제안한 ‘린’은 누구인가.

  무심히 넘기다 하나 시선이 모아지는 점이라면, 주무대인 사이공이다. 왜 사이공을 그렸을까. 우리에게 이런 류의 행태가 익숙한 곳은 필리핀이라서 건너뛴 것일까. 거기다 지금은 사라진 지명, 사이공. 베트남 여인이 한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도식에게 접근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는 그녀 ‘린’. 베트남, 과거 월남이라 불리던 이곳. 이곳에서 베트남인들을 학살하던 한국인. 무수한 라이따이한을 만들어낸 한국인. 지금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마치 ‘베트남 처녀 팝니다’같이 펄럭이는 플랜카드. 이 모든 것에 주체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한국인, 한국남성. 베트남 여성 ‘린’은 이러한 역사를 가진 한국에 대해, 남성에 대해 대척점에 있는 것일까. 그렇담 그것은 복수일까 정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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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불편한가


 

  언제부턴가 기사를 읽고 나면 기사만큼이나 댓글을 확인하게 되었다. 얼핏 보게 된 댓글이 내 생각과 감정과 너무나 다를 땐 놀라서였고 같을 땐 반가워서였다. 그리고 재밌는 것도 있었다. 아무튼, 단순하게 확인했던 이러한 댓글에 대한 의심들이 나도 모르게 생겨날 땐 나말고 이미 의심에 의심을 더해 확신까지 하는 이들이 있었고 물증을 채취하는 이들도 있었다. 단순하게는 뻔히 보이는 홍보용 댓글들 때문에 알바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한나라의 정치문제에 이런 댓글 알바단이 고용되어 활동했다는 이 놀라운 일은 여전히 법적으로 결론지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 댓글부대에 대한 관심 역시 높다. 역시 작가는 장강명. 기자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에 더욱 기대게 하는 이 소설에서 어떤 단서를, 물증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은 소설인데 여기에 실제 사건들의 윤곽을 알 수 있을까. <댓글부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댓글부대 조직이 어떻게 댓글로 사람들의 여론을 호도하는지에 대한 것이 더 부각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활발히 댓글들을 읽어 왔다면 또한 특정한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왔다면, 보아 왔다면, 이 소설 속에서 그러지는 패턴들이 꽤 익숙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확실하냐’‘라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여전히 접어 둔 채, 왜 이런 댓글부대들의 활약에 휘둘리는가’에 치중된 이 소설을 보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한들 댓글부대의 활약에 휘둘리는 일이 없다면 좀 나았으려나 하는 생각들을 가지면서도 그 힘을 알고 있는 ‘이들’에 놀란다. 사실 2012년만 해도 SNS 등, 인터넷과 모바일 등의 매체를 통한 여론전엔 야당이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선거’라는 것은 ‘매체’라는 것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모든 문명의 기기는 그것의 용도만큼이나 이용자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 하는 것도.


  어쨌든 댓글부대의 내용은 참으로 단순하다. 인터넷 여론 조작단 ‘팀-알렙’의 세 청년이 여론 조작을 위한 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상품평이나 유학 후기를 지어내며 댓글조작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에게 ‘합포회’라는 조직으로부터 거액의 제안이 들어온다. 바로 진보 사이트에 타격을 입혀 달라는 것이다. 팀-알렙 멤버 찻탓캇은 진보성향 일간지 ‘K신문’ 기자에게 온라인 조작 사실을 폭로하는 제보를 한다. 이 제보와 이들이 현실에서 벌이는 여론과 댓글조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 작업을 수행하는 팀-알렙의 세 청년들은 어떤 인물인가. 삼궁, 찻탓캇, 01査10은 사회 낙오자이다. 이들을 사회 낙오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들이 ‘지잡대’ 출신이라거나 이거나 ‘어스퍼거 증후군’과 같은 비사회적인 병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베 유저들이고 그들에게 여자는 ‘김치녀’다. 그럼에도 이들은 댓글조작으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안마방이나 유흥업소에서만 여자를 만난다. 이들은 치밀한 기획으로 이 일들을 이뤄낸다. 인터넷 세상은 넓고 게시판은 많다. 그들이 달아야 할 댓글들은 많고 가야 할 사이트는 많다. 그러나 이들이 먼저 타깃을 삼은 곳은 진보 성향을 띤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다. 그리고 10대들을 대상으로 이들을 세뇌하기 위한 ‘마케팅’을 벌인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사회적 낙오자이며 비틀리고 뒤틀린 이들이 벌이는 이 댓글조작의 세계는 한판의 심리게임과도 같은데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섬세한 심리의 세계에 통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몇 마디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혼란을 주어 잘 이끌어가는 한 까페를 파괴해낸다. 어떻게 치고 빠지는지 특정 사이트에 따라 어떤 말들을 써야 하는지를 잘 아는 이들을 보면 놀라웁다. 이러한 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활보했으면 더 큰 문제가 되었을까. 이런 이들을 ‘사회 낙오자’로 규정하며 배제시켜버리는 이 사회가 문제일까. 아무튼 이들의 탁월한 능력들에 인터넷 카페, 커뮤니티 세상은 ‘이성’을 잃고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팀-알렙의 세 명들은 일찌감치 사이트의 특성도 다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한다. 그것이 바로 인터넷의 법칙이란다. 그러니까 여초 사이트의 유명한 사람은 ‘네임드’라 불리는데 이들은 남들보다 더 쿨하고 시크하고 진보적이어야 한다. 남을 알게 모르게 까 내리고 은근한 잘난 척을 하는 만큼 추종자와 워너비 외에 벼르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남초 사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게시판에 열심히 글을 올리고 댓글 달리면 좋아하는 심리 역시 자기가 인정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보기에 별 대단치 않은 글이 관심을 받게 되면 질투를 넘어 ‘이건 옳지 않다,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고. 그래서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글로 추천과 댓글을 받으면 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에 통달한 팀-알렙은 타이밍을 잘 알고 있노라고.

  이 책을 통해 댓글의 세계와 사이트의 세계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저 무심히 넘겼던 인터넷 커뮤니티 내의 권력과 알력들에 대해서도 특정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는데 일반적인 것 이외에 필요한 절차가 있다는 것도. 단순한 정보공유 이외에 사람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뭘 하고 사는지도. 한바탕 어지러운 인터넷 세상을 돌고 온 느낌인데 앞으로 인터넷 세상의 분란을 잘 파악할 수 있을까. 나는 이성적으로 잘 대응할 수 있을까. 하긴 커뮤니티를 하지 않으니까, 딱히 그들 조장에 휘말릴 일은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심각한 정치, 사회기사들의 댓글은 잘 가려낼 수 있을까. 그것이 모든 여론을 다 반영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잘 가려서 판단할 수 있을까.

 틸-알렙은 분란을 일으키는 법을 아는 만큼 휘둘리지 않는 법도 알고 있을까. 지금 한창 떠드는 이 박근혜-최순실 사건에도 청와대 관계자의 아이디가 일베사이트에 있고 댓글을 올렸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 댓글조작단이 특정 사이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수많은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는 사이트 운영에 정부가, 아니 정부 대리인인가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참담하다. 앞에서는 멀쩡한 얼굴로 뒤에서는 저런 손가락질로 자판을 두들기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라니. 그러한 사람들이 또 많다니, 사람들 얼굴에 ‘나 댓글쟁이요’ ‘나 **사이트 이용자요’라 표시되지 않으니 팀-알렙에게 요청하여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

 팀-알렙이 인터넷 커뮤니트에 분란을 조장하는데 쓰이는 말들 중 하나, “이거 나만 불편해요?” 이 댓글들을 제법 보았던 것 같다. 그냥 무심히 넘긴 적도 있고 ‘불편한 이유를 대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한 적도 있던 댓글. 욕설이 없는 지극히 정중한 내용임에도 기사와는 맥락이 다르거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글들이 튀어나올 때, 칭찬의 내용에도 “이건 알바다” “알바 꺼지세요” 라는 글들을 볼 때. 아니, 어떨 땐 댓글 하나하나 다 의심스러워질 때도 있다. 분란을 조장하고자 하는 말은 전혀 아닌데, 지금 이 세상 나만 너무 불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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