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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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세상>의 경우, 책을 읽은 독자가 독후감을 쓰는 것은 자유지만, 그걸 다른 독자, 후에 이 책을 읽을 사람이 볼 수 있게 공개하는 건 신중해야 마땅하다. 르메트르는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대중소설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이이의 작품을 “소위” 문학성 운운하기에는 좀 그렇고, 거의 전적으로 재미있어서 선택할 터인데, 독후감을 쓰면서 스토리를 소개하는 건 조심스러워야겠다. <식스 센스>를 먼저 본 인간이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래”, 하는 것하고 같은 수준의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전개부가 끝나갈 즈음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숱한 뒤집기 또는 되치기 같은 건, 독자가 읽어가면서 혹시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 저렇게 될 것이 분명해, 추리하다가 맞추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재미를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독후감을 쓸까? 이 책이 르메트르의 다섯 번째 독후감이니 작가소개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오르부아르> 3부작이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끝나고, 이제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이후 30년을 다룰 새로운 4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강조해봤자 몇 줄 되지도 않는다.

  좋다. 이렇게 하자. 이 책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정착한, 몇 천만 프랑의 부르주아 프랑스인 펠티에 가족 이야기이니,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 까지의 펠티에 씨 부부와 3남 1녀를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다.


  수천만 프랑의 현금을 갖고 레바논에 도착한 루이 펠티에 씨는 식민지에서 무슨 사업을 할까, 여러가지로 궁리하다가 1920년대 초에 작은 비누 공장을 매입해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제품을 제조하고, 여러가지 비법을 개발해서 더 좋은 품질을 만들어내는 것에 자신도 몰랐던 재능이 있는 것을 알아챈 루이 펠티에 씨는 “펠티에 상회”를 만들어 1930년대에 많은 수익을 남긴다. 이후 트리폴리, 알레포, 다마스쿠스의 소규모 공장 몇 곳을 인수해 사세를 확장하고, 자회사의 경영은 관리자에게 위임을 하더라도 제품의 품질 감독은 본인이 직접, 모든 에너지와 재능과 자부심을 쏟아부었으니, 성공을 한 기쁨과 비누 업계의 품질에 관한 한 세계 최고급이라는 가오를 즐기는 기쁨으로 누구 못지 않은 근사한 노년을 누리고 있었다. 회장님은 품질에 전력을 다하고, 회장 사모님 앙젤 펠티에 부인 또한 회사에서 인력관리, 제품 출입고 그리고 회계를 담당했다. 펠티에 부부가 애초에 부르주아로 출발한 게 아니라 전쟁 당시 고생도 할 만큼 해본 사람들이라 특히 여사님의 구두쇠 기질이 대단했으며,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기겠지만 그걸 꼭 겉으로 드러내고 싶어하는 펠티에 씨의 과한 자긍심은 3남 1녀 모두에게 가정이란 곳이 세상에서 가장 지긋지긋한 연옥이라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을 부부는 몰랐다. 하기는 이들 부부도 자식들에게 세상의 모든 부모보다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자식들도 당연히 몰랐고.

  펠티에 씨는 20세기 중반에 성공한 사업가답게 자신의 후계자로 당연히 맏아들을 지목했다. 그래서 “펠티에 상회”에서 “펠티에와 아들 상회”로 간판도 바꾸어 달고 맏이 장을 전무 자리에 꽂아 놓는다. 그런데 장이 문제다. 애초에 장은 형편없는 학생 출신이었다. 약간 살이 찌고 동작이 굼뜨지만 놀라울 정도로 힘이 센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소극적인 성격에 상당히 몽상적이며 소심했다. 아버지가 바란 대로 비누 공장의 대표가 되기 위하여 화공학을 전공했으나 자신의 적성하고는 극적으로 맞지 않은 터였다. 나중에 스스로 알아차렸듯이 장은 가게를 열어 고객들에게 직접 물건을 판매하는 일이 아주 딱이었지만 이 책에 국한해 말하자면 너무 늦게 알게 된다. 만일 이 4부작이 계속 펠티에 씨 가족의 이야기라면 언젠가는 가족 구성원 모두 장의 자질을 알게 될 듯. 하여간 공장 경영과 이에 따른 상업적 결정은 도무지 장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세상에 이런 모지리가 있을까 싶게 하는 일마다 족족 깨끗하게 말아 자신다. 그리하여 큰 희망을 가졌던 아버지조차 결국 장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가업을 잇는 데 실패한 기운 센 천하장사 장 펠티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지나가던 열아홉 살 여성의 머리통을 곡괭이 자루로 힘껏 내리쳐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만들어버린다.

  장의 아내 준비에브는 우체국장의 네 딸 가운데 유일하게 예쁘지 않은 딸이었다. 워낙 예쁘게 생긴 자매들에게 눌린 바람에 외모를 가지고 유전학적 사건이라 칭해서 그렇지 결코 못생긴 여성이란 말은 아니다. 참 독특한 여성으로 베이루트의 부르주아나 미남 청년 가운데 준비에브가 공원 수풀 속에서 베풀어준 유사성행위의 은총을 못 받은 인간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장과 첫날 밤을 치룰 때까지 어엿한 처녀였다는데, 허, 그것 참, 준비에브 자체가 유전학적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으로 기적 자체… 아니었나? 준비에브는 장이 “펠티에와 아들 상회”를 이어받을 거라는 풍문을 듣고 역시 단 한 번도 여성과 접촉이 없던 장 펠티에를 자신의 아지트였던 공원의 수풀 속으로 끌어들여 멋지게 유사성행위를 시현하고 몇 달 후 결혼에 성공하지만, 후계에서 탈락하고, 장이 살인사건이 발각날까 전전긍긍하다가 부모한테 파리로 가겠다고 하자 생기발랄하게 파리로 날아가 매사 빠짐없이 남편 장을 “뚱땡이”라고 부르면서 들들 볶아 숨만 쉬는 지옥을 만들어낸다. 책이 끝날 때까지 참으로 다양한, 기적같은 악역을 도맡아 하는데, 암만해도 남편의 살인행위를, 엣다 모르겠다, 하나만 더 일러주겠다, 한 건도 아니고 두 건 혹은 모든 살인사건을 알고 있는 거 같다는 말이지. 넹? 장이 악마같은 아내 준비에브의 바가지를 견디지 못해, 자신을 경찰에 넘겨버릴까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결국 아내의 머리통을 터뜨려 죽여버릴 거라고? 난 입틀막이다.


  둘째 아들 프랑수아는 열여덟 살이었던 1941년 5월에 르장티욤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 제1 경기갑 사단에 입대하기 위하여 1차로 가출을 감행해 비시 프랑스군과 회전을 벌인다. 그러나 해방 프랑스는 같은 프랑스 국민끼리 총부리를 맞댔다는 이유로 르장티욤 장군 부대의 공적은 인정하되 조금도 훈공을 인정하지 않아 프랑수아는 전시에 흔하디 흔한 훈장 하나 없이 집에 돌아온다. 이후 이제 심심한데 공부나 좀 해볼까 싶었더니 어린 나이에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단박에 펠티에 씨의 희망, 아니면 적어도 자랑거리로 떠오른다. 바칼로레아 통과 뿐 아니라 단박에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시험에 합격을 해버렸으니 가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고등사범학교는 죽었다 깨도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통학할 수 없는 법이라 프랑수아는 이번엔 합법적으로 2차 가출을 하게 된다. 당연히 작은 집을 얻을 수 있는 돈과 학비, 약간 부족한 수준일 것 같았지만 사실은 턱도 없이 모자란 생활비를 매달 집에서 지원 받는 조건으로. 그러나 1948년 3월, 매년 베이루트에서 벌이는 펠티에 가족의 집안 행사에 참석한 꼴을 보니, 그럴듯한 외모와 입성과 달리, 엄마 눈엔 손톱 사이에 낀 잉크와 불결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왜 그런고 하면, 애초에 프랑수아는 고등사범학교 시험도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한테 가장 적합한 유일한 직업이 신문기자라고 생각했던 프랑수아는 기자가 되기 위해서 굳이 고등사범에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1948년 3월에 둘째 아들은 신문사 ‘르 포퓔레르’에서 기자도 아니고, 흔한 리포터도 아니고 단지 신문의 배송작업을 했던 터라 손톱과 손가락에 묻은 40년대 질 낮은 신문잉크가 지워질 틈이 없었다. 프랑수아의 꿈은 4년 후에 일류 언론인이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되는 것이며, 가장 일하고 싶은 신문사로는 ‘르 주르날’을 꼽았다.

  셋째 아들 에티엔으로 말하자면 집안의 문제아이자 죄인이라 할 만했다. 게이였던 것. 그러나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부모를 포함한 가족 모두는 에티엔의 성적 선택을 존중해서 벨기에 출신 프랑스 외인부대원으로 인도차이나에서 복무중인 셋째 아들의 애인 레몽도 물론 흔쾌한 건 아니지만 인정하고, 에티엔도 레몽이 근무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지금의 베트남 사이공으로 취직해 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회계사이면서 은행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에티엔이지만 인도차이나에 무대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특정 기업에 취직을 해야 가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한 장짜리 이력서를 보내본 게 덜컥 합격을 해 사이공 소재 인도차이나 외환국에서 통지가 온 것이었다. 새끼들 키워봐야 별 거 없는 이유는, 에티엔의 취직도 사실은 펠티에 씨가 인도차이나 인맥인 사이공 무역회사 르코크&다른빌 상회를 통해 다 사바사바를 해 두어 가능했다는 걸 전혀 몰랐었다. 당시의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인들 가운데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 패배자들, 변태성욕자들이 즐겨 찾는 난잡하고 음란한 것들로 가득한 땅으로 유명했지만 진짜로 가보니 이런 내용이 든 편지가 저절로 쓰어지는 곳이었다.

  “이곳은 매우 난폭한 나라야. 여기서는 모두가 제각기 킬러를 몇 명씩 두고 있는 것 같아. 쩌런에만 가면, 단 몇 피아스트르에 네가 원하는 거의 모든 사람을 없애 줄 수 있는 킬러가 널렸어.”

  이런 곳에서 사이공 북서쪽에 있는 밀림지역 히엔지앙 쪽으로 작전을 떠난다는 레몽의 마지막 편지가 오고는 영 소식이 없어 미칠 것 같은 심정의 에티엔이 고양이 조제프와 함께 도착한다.

  1948년 현재 열아홉 살이며 문학과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막내이자 외동딸인 엘렌. 몇 주만 지나면 아주 쉽게 바칼로레아 2차 시험을 가볍게 통과할 재원이기도 하다.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하는 큰오빠 장에게는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으며, 겁나게 머리 좋은 프랑수아를 향한 존경심을 표하는 반면 막내 오빠 에티엔한테는 모종의 융합을 느끼며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 생각한다. 권위적이고 고집불통이 아버지와 모든 방면으로 막힌 사고방식을 가진 어머니를 견딜 수 없어 부모에게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불만을 엉뚱하게도 학교의 수학교사이자 사진클럽 지도교사인 로몽과 월요일 오전마다 햇빛이 환한 호텔 객실에서 동침하는 것으로 해소한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펠티에 씨는 학교에 거액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회계감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수학교사 로몽의 터무니없는 변태 행위를 발견하게 되어 학교에 쫓아내지만 엘렌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자상함과 현명함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엘렌은 아빠의 이런 면을 꿈도 꾸지 못하고.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욕구불만을 해소할 재수없는 수학 선생 로몽도 사라진 터에 아이, 못살아, 외치다가 서둘러 트렁크를 싸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찾아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 오빠들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별 거 있나? 오빠들도 자기들 먹고 사는 것만 가지고도 미치고 팔짝 뛸 거 같은데 말이지. 세상이 그렇게 쉬우면 그건 사는 것도 아니지.

  어떠셔? 참 다양하게 복잡한 집안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불행하다고? 글쎄,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 구라니까 선입견 없이 가보시면 어떨지.


  이런 상태에서 다른 건 모르겠고, 딱 하나, 재미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초 특급 대중소설의 꽃 <대단한 세상>은 시작한다. 확실하게 이건 식민주의적이고 유럽 백인들 위주로 쓴 오락물이다. 그러나 재미있어도 너무 재미있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재미에만 초점을 맞추고 읽자, 라고 제안한다. 거의 분명하게 내가 지금은 이 작품의 재미에 열광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느 새 그런 작품이 있었지, 라는 선으로 한 단계 이상 내려갈 것임을 짐작한다. <오르부아르> 3부작이 그러했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살다가 가끔은 신나는 타임 킬링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즐겨봄이 어떠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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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5-13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재미보장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

Falstaff 2024-05-13 16:28   좋아요 1 | URL
정말 재미..는 있습니다. 간혹 하드코어 적인 (살인 또는 학살) 묘사에 진저리를 칠 수도 있지만 그런 거 없으면 또 ㅎㅎㅎ 개인 차이일 거 같더라고요. 저는 좀 힘들었습니다.

공쟝쟝 2024-05-14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잠깐 막말 죄송합니다) 르메트르 미친 거 아닌가.. 이후30년이라면.. 가만있어봐.... 50.60.70년대인가요~ ㅋㅋㅋㅋㅋ 68혁명 나오나요.......푸코 나오나요....... (퍽 !!!ㅋㅋㅋ)......
퐐선생님 혹시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읽으셨나요? 제가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이탈리아 처자들 68혁명 스쳐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뻐근.... (왜, 68좋아하게 되었지?) 지금 이미 바깔로레아 통과 어쩌고에서 그시절 나의 프랑스에 대한 로망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풀리기만 해봐라.. (드릉드릉~)

Falstaff 2024-05-14 16:19   좋아요 1 | URL
넵. 저도 그 시리즈 다 읽었습니다. ㅎㅎㅎ
이 책에서는 68년에 있었던 아주 잠깐의 꼬뮌은 나오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다음이나 다음 다음 작품에는 나올 수밖에 없을 거 같네요. 프랑수아와 엘렌 때문이라도 말이지요.
이 책을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답니다. 분명히 지금 있을 거예요. 얼른 가보셔요. ^^
 
가장 짧은 낮 거장의 클래식 3
츠쯔졘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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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려고 위키피디아로 작가 검색을 해보니, 세상에나, 츠쯔젠遲子建이라는 이름을 딸한테 지어준 사람이 다 있다. 중국의 위나라 초대 황제 조비는 삼국지에서 가장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조조의 아들이다. 조조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조앙은 아버지하고 함께 완성宛城 정벌에 나섰다가 죽었다. 이 일화가 재미있어 소개를 하자면, 이때 현명한 완성의 성주 장수는 세 불리 함을 깨닫고 조조한테 항복해 성문을 연다. 이후 환영잔치가 벌어져 술이 얼큰해진 조조가 성주 장수의 숙모를 겁탈(또는 합의한 동침)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나름대로 명문가임을 자랑하던 장수가 이걸 알고 크게 열을 받아 조조의 진camp을 급습했다. 이 바람에 천하 맹장 전위가 자다가 벌떡 깨 옷을 훌렁 벗은 채로 조조의 텐트를 지키다가 죽고, 맏아들 조앙 또한 위급에 처하자 조조의 옷을 대신 입고 달아나는데, 완성의 병사들은 옷을 보고 조앙을 조조로 알고 죽자사자 쫓아가 조앙을 두 조각 내버린다. 조조는 도망 중에 말 잔등 위에서 수염을 깎아버리는 불상사를 겪으며 명을 보존했으나, 이 와중에 가장 큰 덕을 본 건 둘째 아들 조비다. 조조가 죽고 죽은 맏아들 조앙 대신 조비가 대권을 잡은 다음, 후한 헌제한테 황위를 선양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문제文帝를 칭했다. 조비한테는 형제들 모두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왕조의 비운이지 뭐. 그가 가장 센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동생이 시인이기도 한 조식. 스스로도 한 문장 한다고 자부하던 조비가 조식을 불러 네가 시 좀 쓴다고 하니, 내가 일곱 걸음을 걷기 전에 그럴 듯한 시를 하나 지어봐라. 해서 목숨 걸고 지은 즉흥시가 칠보시, 즉 일곱 걸음 시다. 여기서 주목. 이 시인 조식의 자字가 바로 자건子建, 쯔젠. 1964년 2월, 중국의 저 최북단 헤이룽장성 다이싱안 지구 모하 시의 소학교 교장으로 있던 츠쩌펑遲澤鳳 씨는 평소 조자건을 흠모해 딸을 낳았음에도 이름을 자건, 쯔젠으로 지었다. 나는 그런지도 모르고 작품 속에 여자 주인공이 많이 등장해서, 남자 작가가 여자 마음을 참 잘도 아네, 어쩌구저쩌구 지청구를 해댔다는 거 아냐?

  다이싱안 지구, 즉 대흥안령 산맥 근방에서 출생한 츠쯔젠은 헤이룽장 성의 성도인 하얼빈에서 학교를 다녔고, 1981년에 다이싱안 사범대학에 들어가 열아홉 살이던 1983년에 『북방문학』을 통해 등단한다. 이후 베이징으로 옮겨 가 공부를 더 하다가 1990년에 다시 헤이룽장 성으로 와서 전업작가의 길을 가고, 1998년에 결혼을 하지만 한일월드컵이 열리기 바로 전인 2002년 5월에 과부가 된다. 어쩐지 작품 속에 과부가 된 30~40대 여성이 종종 등장하더라니까. 지금은 국가 1급 작가의 칭호를 달 정도로 출세를 했으니, 책을 읽고 팬이 되었다고 팬레터를 보내봤자 답장도 못 받지 않을까 싶다. 소개글에 작가 생활 30년에 1백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고 해서 단편 전문 작가인 줄 알았으나 대표작이라고 꼽기도 하는 <이얼구나 강의 오른쪽>은 장편소설이다. 이것도 도서관에 있다. 꼭 읽어 봐야지. 그만큼 단편집 《가장 짧은 낮》이 좋았다는 말씀이다.


츠쯔젠


  모두 열여섯 편이 실은 단편집. 그런데 놀랍게도, 굉장히 오랜만에 단편집에 실린 모든 작품 전부 다 마음에 들어 읽는 내내 잔잔한 기쁨을 즐겼다. 내가 단편집에 이런 찬사를 보내는 건 얼마 살지 않았지만 일생에 몇 번 없었다. 한 편도 예외 없이 무대가 헤이룽장 성에서도 벽촌지대인 다이싱안 지구와 산맥, 흑룡강의 중소국경 지역의 농촌과 삼림지역이며, 필요에 따라 하얼빈의 대형병원과 노르웨이의 해변가에 위치한 작곡가 에드바르드 그리그 기념관이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다이싱안 지역의 섣달 그믐날과 설날이 여러 번 나와 다이싱안 지역 민속/풍습도 재미있게 소개한다. 그러나 츠쯔젠의 작품을 읽는데, 물론 이 작품집에 실린 것에 국한해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연민과 돌봄과 인애이며 둘째가 저 광활한 벌판의 웅장한 장면일 것이다. 영하 30, 40도 아래로 내려가는 엄혹한 추위와 큰 눈과 바람 속에서도 츠쯔젠에게 큰 유혹이었을 잭 런던 또는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같은 작가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얼어버린 손을 비벼주고, 불을 지펴주는 사람들,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 이래서 열여섯 편 가운데 비극은 없다. 정말로 없다. 작품의 무대도 촌스럽고, 인물도 촌스럽고, 작풍도 촌스럽고, 문장도 촌스럽다. 섬세한 문장도 없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쓴 문장들이 모인 문단, 문단들이 모인 전체는 독자를 웃음짓게 하고, 찔끔 소금물을 짜기도 하고, 한숨도 한 번 푹 내쉬게 만든다. 특히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섬세한 날줄과 씨줄의 감정적 난파와 간혹 발칙한 명징성이 빛나기는 하지만 (상당히 무례한 표현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걸 이해해주시면 좋겠는데) 비슷비슷, 고만고만한 작품집을 연타로 읽다가 난데없이 투박하게 아름다운 츠쯔젠을 읽을 때의 감격이라니.

  단편집의 독후감을 쓸 때 가장 난처한 것은 스토리를 옮기기 힘들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길지 않고 단순한 구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말하면 단박에 결말을 눈치챌 수도 있으니. 그저 처음 읽는 츠쯔젠이 촌스럽지만 정말 매력적인 작가였으며, 그래서 이제야 이이를 읽어 만시지탄을 금하지 못했으며, 앞으로 다른 작품도 찾아 읽을 예정, 혹시 이 책이 “나만의 명작”일 수 있어서 함부로 책을 사서 읽어보시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도서관에 있다면 꼭 한 번 골라 읽어보십사, 권할 정도라는 건 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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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5-10 0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피에르 르메트르, <대단한 세상>
수요일.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사냥꾼의 수기》
금요일. 김안, 《Mazeppa》

바람돌이 2024-05-10 09:18   좋아요 1 | URL
단편집 전체 작품이 마음에 들기는 참 어려운데 말입니다. 모르던 작가를 알게 해주는 Falstaff님 항상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4-05-10 11:47   좋아요 1 | URL
이 양반의 다른 책 한 권 빌려 놓았답니다. ㅎㅎ

다섯 2024-05-10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사드립니다. 일단 ‘가장 짧은 낮‘은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습니다. 읽어 보는 것으로 추천하는 분에게 보답코자 합니다.ㅋ

Falstaff 2024-05-10 10:42   좋아요 0 | URL
본문에 썼듯이 작품들이 전혀 세련되지도 않고, 그리 섬세하지도 않답니다. 오히려 투박해 돋보이는지라 독자마다 호오가 갈릴 듯하네요. 겁이 덜컥 나는군요. ㅎㅎ

은하수 2024-05-10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요~~~
단편집 작품이 모두 맘에 드는데 줄거리를 말할 수도 없고
리뷰는 꼭 남기고 싶고... 딜레마라니까요
저도 얼마전 같은 경험을 한지라 그 마음 어떠한신건지 넘넘 이해가 됩니다
저도 일단 도서관 검색을 해봐야겠군요!^^

Falstaff 2024-05-10 10:43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 맘 알아주셔서 고밉습니다. ㅎㅎ
도서관 이용이 갑입니다!
 
아소무아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1
에밀 졸라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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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졸라와 역자 윤진? 망설이면 바보! 득달같이 장바구니 집어넣었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보니 이게 제르베즈 아줌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목로주점>이란다. <아소무아르> ㅋㅋㅋ 웃겼어! 귀여운 민음사. 많이 파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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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5-09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군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용. 뱅글뱅글@_@;;;

Falstaff 2024-05-09 21:22   좋아요 2 | URL
이 책은 펭귄에서 나온 <목로주점>을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개정한 판일 겁니다. 저는 역자 윤진을 좋아합니다만 펭귄판을 읽어보지 않아서 함부로 얘기하지는 못하겠네요. 하여간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한 편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ㅎㅎㅎ 꼭 읽어보셔요. 이른바 필독서 가운데 한 편입니다. 물론 다른 출판사 책들도 검토하셔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시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잠자냥 2024-05-10 0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이 작픔 출간된 거 보고 아니 졸라 작품 중에 이런 게??? 게다가 윤진?! 했다가 곧….. 아아아 이런 놈들 ㅋㅋㅋㅋㅋㅋ 했답니다. 제가 펭귄에서 나왔던 윤진 번역 목로주점 읽었거든요. 번역은 역시 좋았으므로 펭귄에서 절판되었으니 목로주점 아직 안 읽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좋은 선택이 될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4-05-10 06:35   좋아요 1 | URL
진짜 제목 너무했습니다. ㅋㅋㅋㅋㅋ <아소무아르>. 그래도 이렇게 찍어주니까 윤진 번역의 목로주점을 읽을 수 있으니, 다행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루공 마카르 총서 전권 번역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메이저에서 번역 판매한 작품은 빼고요) 오래 뒷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군요. 졸라 전문 역자 가운데 한 명인 박모 선생....

윤진 2024-05-15 13: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자 윤진입니다. 펭귄에서 절판된 책을 이번에 다시 내면서(오래 전에 한 책이라 다시 읽으니 당연히 손볼 곳들이 눈에 띄어서, 많이 고쳤습니다) 제목을 저의 제안으로 <아소무아르>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사실 펭귄 판에서도 <목로주점> 대신 <아소무아르>를 쓰고 싶었는데, 독자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진 제목이라 그대로 따라갔거든요. 아소무아르는 물랭루즈, 봉쾨르...처럼 구트도르 거리의 가게 중 하나의 이름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인데... 뜬금없이 제목에서만 <목로주점>으로 하기보다는 이번에는 꼭 제르베즈의 운명을 바꾼 술집 이름을 그대로 두고 싶었습니다. 물론 고전 명작의 익숙한 제목을 바꾸는 부담이 있었고,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냈습니다.^^

Falstaff 2024-05-15 17:23   좋아요 0 | URL
앗, 윤진 님께서 직접 댓글을 주시다니. 아이고, 반갑습니다. 제가 오랜 팬입니다.
목로주점이건 아소무아르건 관계 없는데요, 민음사를 비롯해서 요즘 출판사들이 예전 작품을 제목을 달리해서 마치 새것인 양 포장하는 걸 여러번 봤습니다. 그래서 시비를 좀 했을 뿐입니다. ^^

윤진 2024-05-1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Falstaff님, 잠자냥님 글의 애독자입니다!

Falstaff 2024-05-15 20:43   좋아요 0 | URL
세상에나, 이렇게 고마울 데가... 오래 건필하세요!
 
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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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까지 읽고 계속 진행중. 근데 이거 혹시 두껍게 당의 입힌 포르노 아닐까 의심 생기기 시작함. 마저 다 읽고 백자평, 별점 수정할 것. 다 읽었음. 포르노 맞음. 수정할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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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5-09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의 입힌 포르노라니 정말 표현이 절묘하십니다. ㅎㅎ

Falstaff 2024-05-09 20:14   좋아요 1 | URL
아휴, 공감해주시는 건 고맙고 반가운데요, 워낙 좋은 평을 많이 받은 작품이라 무지 조심스럽습니다. 여전히 잘 포장한 포르노그래피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는군요.
 
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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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풍월에 의하면 휴대폰 앱 가운데 “북적북적”이라고 책 읽은 내역, 읽고 싶은 책 같은 걸 관리하는 게 있어서 나도 깔았다. 이 앱에 의하면 연초부터 오늘, 4월 두번째 목요일까지 내 키가 111.83cm 자랐고 지금은 다른 책의 388쪽까지 읽었다. 두 개를 합해 22,754 페이지, 63권이다. 앱의 재미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책을 읽으면 별점을 주게 만들었다. 다섯 개 만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건데,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어제 오후 한 시 정도에 읽기를 마쳤으며, 앱에 등록을 할 때는 틀립없이 별 다섯으로 나름대로 채점을 했건만, 26시간이 지난 지금 독후감을 쓰려니까, 도무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다행히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 둔 것이 있어 그걸 훑어본 다음에, 맞아, 이런 이야기였어, 어제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었다. 그래, 그래. 거창하게 말해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이다.

  작가 셸리 리드를 검색해봐도 별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콜로라도에 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미국인이며, 웨스턴 콜로라도 대학에서 글쓰기, 문학, 환경 및 지속 가능성을 30여 년 가까이 강의했다고 했으니 50대 이상일 듯하다. 이 작품이 2023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라고 한다. 흠. 데뷔작이라. 미국의 대학에서는 작품을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박사님한테 글쓰기 교수도 시킨다, 이거지? 좋아, 좋아. 시비하는 거 아니다. 경력 여부를 떠나 괜찮으면 흔쾌하게 교수로 임용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워 그러는 거다. 리드는 매우 미국적인 소재로, 매우 미국적인 스토리로 <흐르는 강물처럼>을 썼다. 그래서 독자는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나 스토리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읽자마자 이 책은 별 다섯 만점이야, 했다가 불과 하루 만에 스토리를 통째로 잊어버린 건?


  주인공의 이름은 빅토리아(이하 “V”) 내시. 이제 나이 들어 오랜만에 고향 근처에 돌아온 V는 콜로라도 강의 지류인 거니스 강의 물길을 막아 호수로 만든 블루 메사 저수지에 잠긴 아이올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깊은 회한에 잠긴다. 콜로라도 주의 건조한 남서부 지역에 물을 흘려 보내기 위하여 과감하게 실행한 대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댐을 건설하는 바람에 생긴 수몰지역. V가 향수병 같은 것 때문에 회한에 잠긴 것은 아니다. 아이올라에서 누구보다 먼저 집과 농장과 과수원을 팔고 훌훌 떠나온 사람이 V였으니. 이 장면은 드물지 않게 보는 평범한 오프닝. 평범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차별적인 묘사가 있어야 할 터. 셸리 리드의 문장이 좀 매력적이긴 한데 크게 어필할 정도는 아니다.

  본문의 첫 장면은 1948년. 집에서 ‘토리’라고 불린 V는 방년 17세.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진심을 다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한 살 아래 폭력적이고 매사 말썽꾼이며 어린 나이에 알코올과 럭키 스트라이크를 애용하는 철부지 남동생 세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 징집당해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은 오그 이모부와 함께 산다. 그렇다. 내시 씨는 홀아비다. 전쟁이 끝나고 쾌활한 호남이었던 이모부가 우울한 상이 제대자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엄마와 비브 이모와 큰이모의 아들이었던 친절하고 올바른 청년 캘러머스 오빠가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커브를 돌다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세 명 다 엉망이 된 채 생을 접었다. 이 사건은 아버지한테 크게 충격을 주어 이후 급격하게 말수도 줄어들고 농장 일도 신경을 쓰지 않는 우울한 중년 농부가 되었지만 딱 하나, 대를 이어 명성을 떨친 내시 복숭아 생산에는 여전히 전력을 다했다. 집안의 세 남자는 아무리 시대가 1948년이라도 그렇지, 겨우 열 두 살이었던 V한테 슬그머니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길 기대했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요구 자체가 무리였으니까. 그러나 V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름대로 충실히 가사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서 열일곱 살이 된 것.

  V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하는 거였다는 점을. 한 가정의 상실과 그로 인한 결여, 또는 결핍이 V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불행으로 향하게 만든다. 열일곱 살의 V. 당연히 사랑 문제.


  윌슨 문. 그가 마을에 나타났다. 돌로레스 탄광에서 일하다 그냥 그곳이 지겨워져서 탈출해 석탄을 싣고 출발하는 화물차에 뛰어올라 아이올라까지 흘러든 청년 또는 소년. 1948년에 십대 청소년이 탄광에서 일한다고? 그렇다. 그래서 아이올라에 첫발을 디딘 윌슨은 까마귀 날개만큼 새까맣게 빛나는 눈에 담긴 다정함이 있었고, 눈빛만큼 새까만 석탄 자국을 얼굴과 옷과, 옷으로 가리지 않은 모든 부위를 덮은 꼴이었다. 조금 지나면 독자도 알게 되는 것처럼 윌슨은 백인이 아니다. 어느 부족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나 아메리칸 인디언, 즉 북미 선주민의 후예였으며 탄광에서 거의 노예 수준의 노동학대에 시달리다 도망한 거였다.

  이날 오후, V는 다부진 몸에 유난한 성질을 가진 개 복서종을 닮은 동생 세스를 저녁 식사 전에 집으로 끌고 오기 위하여 포커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되게 작은 마을이라도 메인 스트리트가 있고, 이 거리 한 가운데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윌슨 앞에 V가 섰고, 윌슨은 V에게 자기가 머무르며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며, V는 행상이나 계절 노동자들 같이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묶는 던랩 여인숙을 추천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차리는데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유럽식 무릎절curtsy을 해버렸고, 윌슨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역시 한쪽 팔을 벌리며 답례했다. 사랑, 남자 이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법이 없는,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현재의 순간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윌슨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렇게 헤어지고 잔뜩 술에 취한 세스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던 V. 가던 길에 비틀거리는 세스를 부축하다가 둘은 함께 넘어졌고, 세스의 몸에 깔린 V의 발목이 심하게 삐고 말았다. 처음엔 절뚝이며 걸어보려 했으나 결국 주저앉은 V.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세스한테 의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나무 그늘에서 다시 등장한 이가 윌슨이었다. 윌슨은 말없이 V를 두 손으로 안아 집에 데려다 주었다. 복서 종 같은 성질의 세스가 한낱 인디언 나부랭이가 누나를 품에 안고 가는 것에 열을 받아 있었다가,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보더니 윌슨의 등짝을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윌슨이 당연히 반격을 해 세스의 코피가 터졌을 때, 아버지 내시 씨가 호통을 쳐 다툼은 짧게 끝나고 윌슨은 가버렸다. 이때만 해도 V는 길들일 수 없는 복수의 들불이 어떤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복수의 들불. 세스 마음 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불길.

  V가 추천한 던랩 여인숙의 주인 던랩 부인은 뽀얀 피부에 큰 키, 그리고 퉁퉁한 몸매처럼 친절하고 후덕한 여인이었다. 백인에게만. 부인은 윌슨을 인디언을 거의 욕설 수준으로 낮춰 부르는 ‘인전’이라고 일컬으며 인전 따위를 자기 여인숙에 머물게 하면 숙박객이 화를 내고 전염병도 옮을 것이라면서 그를 내쫓아 버렸다. 이 와중에 누군가 윌슨이 도둑질도 했을 거란 소문을 냈고, 이를 들은 마을의 유지 마틴델 씨는 보안관도 아니면서 윌슨을 현상수배 한다고 커뮤니티에 전단을 살포했으며, 이를 본 세스는 “저 20달러, 내가 따고 만다. 두고봐라.” 전의를 다졌다. 우리는 안다. 미국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결국 윌슨은 세스의 손아귀에 잡힐 운명이란 것을. 그러나 윌슨은 마을에서 도망쳐 콜로라도 산맥 한 봉우리에 있는 대피소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몇 주 후, 내시 씨가 아들 세스를 데리고 농장일을 보러 길을 떠나 하루 묵고 올 일이 생겼다. 옆집에 이웃과 격리하여 홀로 외롭게 사는 할머니 루비앨리스 에이커스 여사를 통해 연락을 하고 있던 윌슨을 만나기 위해 V는 얼른 이모부한테 점심을 차려주고, 저녁 거리를 챙겨 알아서 먹으라 일러준 후 곧바로 윌슨을 따라 산꼭대기 대피소에 도착해, 둘 다 처음으로 다른 성과 밤을 새운다. 당연히 처음엔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았으나 곧바로 익숙해졌고, 이날의 결과로 V는 임신을 하고 만다.

  아침이 되자 서둘러 집에 돌아오고, 나날이 갔으며, 가을이 되어 일손이 바빠져 내시 씨는 던랩 여인숙에 묵던 계절 노동자 포레스트 데이비스를 고용했다. 이게 V한테는 결정적으로 실패작. 가을 수확이 다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만나자마자 포레스트는 세스와 찰떡이 되어버렸다. 세스한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은 윌슨을 산 채로 잡는데 성공하고, 두 명 다, 아니면 적어도 한 명은 윌슨의 손과 발을 묶어 밧줄로 차의 뒷범퍼에 연결한 채 그대로 질주해 결국 산채로 피부가 거의 벗겨진 상태에서 윌슨은 숨을 거두고 만다. 넋이 나간 V. 계절이 또 바뀌고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자 V는 지겹고 지겨운 세 남자의 소굴인 집을 떠나 윌슨의 오두막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출산.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의 V가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V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고, 삶은 그래도 이어가고, 미국 소설이니 결국은 해피엔드까지는 몰라도 그리 사나운 삶으로 생을 마치지는 않을 것이니 독자여, 결코 마음 조리며 읽지 않아도 되리라. V 앞에 어디선가 갑자기 큰 돈이 뚝 떨어지지 않겠는가.


셸리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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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5-08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북적북적이란 앱이 있군요. 저도 요즘 만보기 사용하고 있는데 안 쓸 때랑 걷는 게 다르긴 하더군요. 저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책은 무슨 식물학 책 같은데 예쁘긴 해요. 전 미국문학은 호불호가 있어서 당장 읽게될 것 같진않고 영화나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ㅋ

Falstaff 2024-05-08 13:34   좋아요 1 | URL
북적북적이 처음엔 그랬는데 좀 있으니 시들시들해지더군요. 다 그렇지요 뭐.
책도 재미는 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같아서 아쉽지만요. ^^

페넬로페 2024-05-08 1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아는 브레드 피트의 <흐르는 강물처럼>과는 다른거네요.
V앞에 큰 돈이 뚝 떨어져 너무나 다행인데요~~
저 앞에도 그런 행운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05-08 13:39   좋아요 1 | URL
브래드 피트의 강물은 명작입지요!
돈벼락 쉽고 합법적으로 맞는 거 역시 상속이잖습니까.
근데 세상의 거의 모든 부모는 적절한 나이에 죽어서 자식들을 필요할 때 편하게 만들어주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하긴 그것도 뭐 받을 거 있는 집이나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