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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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같은 시대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결혼관과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결혼관이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찾아보니 100년의 세월이 흘렀더라. 그 100년동안 결혼관은 지금 내 관점에서 볼 때 제자리에 있었구나, 물론 그 100년을 살아온 사람이 말한다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했다고 말할런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리고 100년이 또 지난 지금은 바뀌었나? 뭐가 얼마나 바뀌었나? 

결혼에 대한 모습은 역시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가치관적 측면에서 예전의 그런 모습들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으로 답습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100년 후에는 또 달라질까?
 
아, 그리고 또 한가지! 바람피우는 남자의 그 전형이라니! 예전에 종종 들어가던 모 게시판에서 남편 바람 피우는 문제 전문이라는 모 님의 글을 읽으며 그 촌철살인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 분도 아마 책을 내셨다지) 뭐랄까, 그 적나라하면서도 촌철살인이어서 여전히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그 글 속 바람피우는 남성, 그 모습 그대로인 이 책 속 찰스를 보니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사실 한 편의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렇게 술술 읽어내려가다가 갑자기 지나쳐버린 문장에 다시 눈이 가게 된다. 아, 잠깐... 이 부분 다시 읽어볼까? 술술 내려가기엔 분명 아쉬운 문장들이 많이 있다. 잠깐 마음에 남긴다. 그리고 다시 읽어 내려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키티의 성장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인형처럼 결혼 시장에 나가고, 동생보다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남편감을 고르고, 아무런 가책 없이 바람을 피우며, 그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이 철없는 여인을 보면서,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지고 있는 지금의 현상이 오히려 다행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 후 파경을 맞이하게끔 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그런 문제들은 더 팽배하지 않았을까? 다만 그 때 그 여성들은 제도적으로 억압받고 있었기에 표출하지 못했을 뿐.

암튼, 그토록 철이 없는 키티는 실은 어쩔 수 없는 계기로 삶의 지경을 넓히게 됐지만, 그것을 계기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삶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보게 된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듯 보였지만, 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좀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자신을 내던지며,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간다.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고 다른 시각을 접하면서 그녀의 영혼을 되찾기 시작한다.

사실 변화란 천천히 오는 것이긴 하지만, 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순간에 시작되는 변화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변화된 키티의 모습에 조금씩 익숙해져갈 무렵 그녀는 그녀의 의지보다는 본성에 가까운 육체의 정욕을 탐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은 이 부분을 읽으며 조금 당황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완벽함을 추구하나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에 대한 서머싯 몸의 성찰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다.

그 외에도, 30년이라는 세월을 아내와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한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온 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심리에 대한 묘사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제 자유롭고 싶은 그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여전히 남아 있는 아버지라는 굴레 내에서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여전히 의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 한켠에 씁쓸해져 왔다.

이 소설에서 화려하고 달콤하게 잠깐 빛났던 건 키티와 찰스의 사랑이었겠지만, 책을 덮은 후 마음에 남는 것은 월터의 사랑이다.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던 키티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한 번 정도는 사랑으로 마음이 돌아설 법도 한데, 월터가 죽는 순간까지 키티는 그녀를 연민하고 존경할 지언정 끝내 사랑으로 돌아서지는 않는다) 분노에 떨고, 한없이 그녀를 증오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끝없는 자기에 대한 번민에 치닫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그 마음이 어땠을까? 그러면서도 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사실 키티가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남자 치고 그는 꽤나 '홈런' 감인데 말이다.

암튼, 보편적이면서도 전형적이지 않고,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고,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좋은 작품을 만난 기분이다. 영화는 이 책 속 성장과 변화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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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의 리뷰 읽으니까 읽고싶어지네요.

웽스북스 2007-08-07 18:49   좋아요 0 | URL
네, 심지어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는 미덕? ^^
 
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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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의 호미에서 그녀는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며 70년은 끔찍하게도 긴 세월이라고 말한다. 사실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세월 70년, 그 시간동안 그녀는 참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짧으나마 일제시대도 겪었고, 전쟁도 겪었으며, 사회의 급격한 변화도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빠의 죽음도 겪고, 부모의 죽음도 겪고, 자식의 죽음까지 겪었으니 시간이 참 길고 힘들게 느껴졌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긴 세월을 이 책 호미 안에서 참 조곤조곤하게도 풀어놓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히 우리는 그 시간은 그녀에게 끔찍하게 길었던 시간이 아닌, 참 많은 것들을 선물해 준 시간이었고, 참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참 글을 쓰고 싶어진다. 삶의 작은 일에도 어쩌면 그렇게 많은 것들을 느끼고 고찰해 내는지, 사실 그 고찰들은 언젠가 나도 한번쯤은 생각해봤던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아서 , 그러면서도 나는 절대 글로 이렇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이어서, 하나도 힘주지 않은 글을, 하나도 멋부리지 않는 글을 읽으면서도 그 내공이 실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괜히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환경 하나 하나에, 뇌가 산문 버전으로 변모한다. 생각을 하는 걸 꼭 글쓰듯 하는 거다. 이런 느낌 알려나 모르겠다. ㅎㅎ 이건 왜이러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 자체를 '나는 그 순간, 이건 왜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책의 첫부분에서는 그녀가 아끼는 텃밭(꽃밭)을 가꾸는 이야기들을 한다. 지난 봄 꽃시장에서 화분을 잔뜩 사와 봄, 꿈, 맘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까지 지어주고는 죄다 죽인 전력만 아니었으면 아마 당장이라도 달려가 꽃을 사와, 나도 꽃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철따라 소소하게 피는 백여 종의 꽃을 키우며, 그것을 삶의 기쁨으로 삼는 모습이 참 예쁘다. 나이 들어 돈이나 자식의 출세가 자랑거리가 아니라 내 텃밭의 꽃이 자랑거리인 삶이라니, (그러고도 본인이 너무 으스대는 것 같다고 자책하는 그 마음이라니!) 나이 들어 내 삶도, 그렇게 소소하고 예쁜 자랑거리로 가득해지길 소원해본다.

그리고 책이 중간으로 가게 되면, 삶의 곳곳에서 그녀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또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한 단상들도 있다. 때로는 늙은이 노망이라며, 젊은이들 정치판에 한소리 하고 (하지만 글의 말미에 그녀의 딸에게 쓴 편지에, 본인이 노망이 들어서까지 명예욕으로 글을 쓴다면 부디 말려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본인은 '노망'이라는 말이 진심은 아닌 듯 싶다) 자연을 사랑한다면서도 벌레들과는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자신의 이중성을 자책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자책은 나 자신이 하루가 멀다하고 하는 것이어서 (결심과 삶과의 그 간극이라니) 존경해 마지않는 박완서 선생님도 스스로 이렇게 작은 걸로 자책하면서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헤헷

앗 그리고 중간에 한 챕터를 '음식'에 할애했는데, 세상에나, 마치 이 배고픈 시간에 약을 올리는 것만 같은 그 음식에 대한 묘사라니! 오히려 너무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그 음식을 꼭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먹어본 적도 없는 메밀 칼싹두기는 왠지 그 맛을 알 것만 같다. (물론 그 맛이 그 맛이 아니리라는 것은 안다) 그리고 강된장과 애호박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이 표현을 읽으며 우리 말이 참 예쁘다는 걸 다시 한 번 새삼 느낀다.  고작 혀 끝에 불과한 것이 이렇게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이 부분에 다다르면 어느 순간 배가 꼬르륵 하게 될 것이다. 흐흣! 게장에 대한 표현은 또 어떻고...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혀 전체가 반응하고 입 안의 점막까지도 그 맛을 한번만 보면 생전 잊지 못한다. 하하하, 박적골 게 번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지금은 없겠지만)
 
책이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가면서 흘러흘러 이제 그녀의 과거의 삶에 대한 이야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책은 단순한 하나의 산문집이 아닌, 그녀의 문학 세계들의 또 다른 연장선이 된다. 미처 하지 못했던 얘기가 되기도 하고, 그 후의 뒷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를 읽으면서 참 꼬장꼬장하셔서 기억에 남았던 그 엄마, 하지만 엄마의 말뚝을 읽으면서,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그 엄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차마 직접적으로 산문에 쓰기가 어려워 우회적으로 표현한 오빠의 죽음, 적어도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내게 낯설지 않고 오히려 반가웠던 건, 그간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의 삶과 많이 마주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부분에서는 그녀와 함께 했던 소중한 인연들에 대해 나와 있다. 김상옥 선생님과의 인연이 참 인상적이다. 특히 그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절절 매는 김상옥 선생님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선생님과의 인연이 끊어지게 됐다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주변 사람들과의 사별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도 그 마음이 이해가 되니 본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절절했을까. 나목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도 그의 사후까지 이어 나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중간에 (아주) 살짝 등장한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괜히 인사 한 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문구 선생님과의 인연도 참 반갑게 느껴졌다. 한 번도 차를 마시거나 직접적으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으나, 늘 마음으로 가깝게 느꼈던 사람. 물론 나의 작가들에게 괜히 친한 척 하고 싶은 마음과는 차원이 다른 관계이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무언지는 왠지 알 것 같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는데, 그녀는 맨 마지막, 딸에게 쓰는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본인이 살짝 노망이 들어 괴발개발 글을 쓰게 되는 날이 오면, 그것은 사회적인 노망이니 모질게 제재해 달라고. 하지만, 노년의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부디 오래 오래 사셔서 많은 글들을 남겨주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건강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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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씨는 정말 내공이 출중하신 분이라는 생각. 전 작가의 산문집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리뷰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웽스북스 2007-08-07 18:49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박완서님은 읽기 쉽게 술술 쓰시는 게 좋아서 저도 자주 읽게 된답니다, 워낙 다작을 하셔서 전작 읽기는 포기했지만요 ㅋ

순오기 2007-08-10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칭 '완서님의 팬'이어서 책이 나오는 족족 읽었는데~ 좀 질리는 기분이어서 '오래된 농담' 이후 한 권도 안 읽었습니다. 좀 심했나요? ㅎㅎ
경남 하동에 최참판댁 복원하고 가진 제1회 토지문학상 시상식 때 박경리 선생과 같이 오신 완서님과 사진도 한 판 찍었는데... 두 거인이 너무 비교되더라고요!
하지만, 님의 친절한 서평 읽고 다시 '완서님의 팬'으로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라 추천!

웽스북스 2007-08-10 12:49   좋아요 0 | URL
우와~ 무한 영광입니다 ^^ 감사드리고 반갑습니다 순오기님!
 
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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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인정하며 시작하자면 내게 이 책은 참 낯설고 어려웠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머릿속에서 시각화 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그 시각화된 이미지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도, 수없이 쏟아지는 그 기표와 기의들을 하나 하나 파악하며 넘어가는 것도, 그리고 앞에 나왔던 기표의 기의가 뒤에 나왔을 때 그것을 캐치하는 것도 내게는 모두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이해한대로, 내가 이해한 만큼의 리뷰를 써보려 한다. 사실 한 자 한 자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것은 내가 이해한 것이 사실은 책을 주의깊게 읽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수도 있고 뒤에 가니 또 그게 아니었는데, 나 혼자 그 부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걸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책이 내게 어렵게 느껴졌던 건, 내가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낯선 나라 만큼이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내게는 낯설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더 이해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럴 때 내가 좋아하는 건, 내 멋대로 일반화 하기.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 혼자 일반화한 리뷰를 써보련다. 사실 너무나 다분이 내멋대로 쓰는 리뷰라 생각을 풀어놓기가 조금은 두렵다. 

이 책에서 말하는 새로운 인생이란 어떠한 '유토피아'를 뜻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시대에 따라 사람과 그 의미가 다르겠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찾을 수 있는 지리적인 곳에 존재하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행위는 아마도 일련의 상징적인 행위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대, 어떤 지리적 장소에도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늘 존재해 왔다. 터키를 상대로 생각해 보는 건 조금 어려울 수 있으니, 가까운 우리 나라를 대상으로 생각해 보면, 근대 조선 시대에 누군가는 개화된 나라를 갖는 것을 유토피아로 여겼을 것이고, 반면 누군가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유토피아로 여겼을 것이다. 일제 시대에는 독립된 국가를 갖는 것이 우리들의 유토피아였을테고, 그 독립을 억제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또 누군가의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또한 독립된 국가를 가진 후에 사상적 대립이 있던 시대에 누군가는 맑스주의에 기반한 국가를 꿈꿨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본주의에 기반한 국가를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민주화라는 유토피아를 통한 끝없는 열망과 그를 억압하는 세력들, 그렇게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은 끊임없는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과 그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의 대립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유토피아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유토피아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사람, 그를 억압하거나, 혹은 반대되는 것을 향해 달리는 사람, 그리고 그와 상관 없이 사는 사람. 

이 책에도 역시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어떤 종류의 새로운 세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그 세계를 향해 달리는 오스만, 메흐메트, 자난 등으로 대표되는 인물, 그리고 그 세계에 저항하려는 나린 박사로 대표되는 인물, 그리고 그와 상관 없이 살아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혹은 중립적 인물)

새로운 인생에서 말하는 그 유토피아가 거대 음모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는 확실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린 박사는 책 속의 새로운 인생에 대해 저항하며, 또한 그 거대 음모에 저항하는 자이니, 그 둘은 어느 정도 일맥 상통하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인생의 저자인 르프크 아저씨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도'와 '카우보이' 역시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인생이 말해주는 것은 그 나라에 다가올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었으며,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아마도 그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매료되어 그것을 꿈꾸며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물결을 확인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나라의 곳곳을 여행다닌 것은 아니었을까? 

오스만이 다니는 여행은 이 책에서 크게 세 파트로 구분된다.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 새로운 세계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리고 나린 박사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떠나는 여행, 그리고 그 모든 열망이 식어버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기 위해 떠나는 또 한 번의 여행. 

그 여행 길에서 그는 터키의 전통 및 터키에 흘러 들어오게 되는 새로운 물결과 모두 조우하게 된다. 특색 있는 터키 전통 상품들이 하나 하나씩 규격화 된, 코카콜라, 럭스비누 등으로 대표되는 상품으로 대체돼 간다. 이러한 규격화된 상품을 파는 '대리점'들은 나린 박사에게 대항하는 인물들로, 책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에 동조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오스만은 새로운 인생의 선배격인 메흐메트를 다시 만난다. 그에게 열망의 시작이었던 메흐메트는 이제 그 열망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한 때 그의 열망이었던 것은 이제 그에게 먹고 살기 위한 한 생존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훗날, 새로운 인생의 저자인 르프크 아저씨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다. 그는 그 책을 쓴 후, 어떤 신념을 갖고 그것을 지켰던 게 아니라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말라는 검사의 말에 다짐까지 했던 인물이었던 것, 오스만은 자난에 대한 질투심으로 메흐메트를 죽이려 했지만, 종국에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허망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파묵이 말하는 새로운 인생은 주인공이 읽은 책으로만 대표되는 것은 아니다. 터키의 수천가지 민요가 쓰여진 터키의 전통 캐러멜 이름 역시 '새로운 인생'이다. 결국 이는 각자가 꿈꾸던 새로운 인생들이었으며, 주인공은 이 새로운 인생을 모두 만나게 되고, 그 여행의 끝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두 세계를 모두 이해하게 됐을 때, 오스만은, 이제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광장의 이명훈이 남쪽과 북쪽 어느 쪽도 택할 수 없어 중립국 행을 택하고,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된다고 쓸 수 밖에 없었던 최인훈의 마음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파묵 역시 전통적인 가치와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결국 모든 이상은 다 나름의 이유를 갖게 마련이고, 그 가운데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 라는 가치 판단을 흑백논리로 내린다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인생은 근본적으로는 우리 나라도 온 몸으로 아프게 겪었던 그 몇 번의 대립들을,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들을,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좀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자 노력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터키 버전으로 그린 책인 것이다. 우리 나라와 상황적으로 다르고, 문화적으로 달라 조금 낯설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나라 해방 이후 문학들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는 책이었던 것.

몽환적인 분위기의 로드 소설로 정통적인 방법으로도 맞서기 어려운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거침 없이 꺼낸 준 파묵의 작가적 재능에 박수를 보낸다.

 * 하지만 너무 내 멋대로 단순화해버린 것 같아, 살짝 걱정은 된다는 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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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gghhhcff 2007-08-0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이렇게 글을 잘 쓰실 수가 ^_^ 북꼼에서 웬디양이란 별명 본적이 있는데
알라딘 서재에도 계셨군요. 홋홋 추천누르고 갑니다.

웽스북스 2007-08-07 18:50   좋아요 0 | URL
그 웬디양이 그 웬디양입니다 하핫! 감사해요 우아한인삼님!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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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이 생각과는 많이 달랐던 게 사실이다
 
나는 그냥 인문학이 어떤 효용이 있는지, 사실은 조금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 이조차도 이공계의 위기에 파묻혀 있으니 참... 같은 위기끼리도 인문학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나도 더 인문학을 사랑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집어 들었으나...
 
이 책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의 실질적인 삶에의 적용이랄까? 암튼, 이 책의 실질적인 삶의 적용 내용은 사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사실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다. 배운다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어디에 나가서 써먹을 수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기에 거대한 실용주의 노선 아래서, 점점 인문학은 등한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 가난한, 어디 나가서 써먹을 지식이 당장 필요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당위성과, 그 실효성에 대해 굉장히 길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 부분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될 만큼 그 당위성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내가 전공한 것은 다소 실용적인 학문이었지만, 그 과정은 굉장히 인문학적이었다. 스스로를 인문학도라고 말하기는 다소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 많이 안타까웠던 게 사실이다. 페미니즘의 경우 중산층 배운 여성 지식인들의 학문이라는 인식이 굉장히 팽배하다. 그들은 덜 배우고, 못 가진, 사회적 약자이자 타자인 여성들을 위해 애쓰지만, 정작 덜 배우고 못 가진 여성들은 그들의 논리에 공감하지 못하며, 사회에 순응하며 그저 자신이 박복하려니,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는 여성을 한 예로 들었을 뿐, 상황을 여성에 국한시키는 것은 아니다. 범위를 좀더 확장해 서민 전체로 놓고 볼 때 가난한 사람, 서민들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노력하는 정당이 있어도, 서민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의 정치적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정당을 지지한다. 자신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인 신문(조중동 등)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생각을 보면, 그 생각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안타까우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이 참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먹고 사는 데 바쁜 이들에게 생각과 성찰의 여유는 오히려 욕심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 책의 저자 얼 쇼리스의 주장을 읽으며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정말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세상 한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하는 감동-
 
이 책은 이런 클레멘트 코스에 대한 매우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필요성에 대한 촉구를 넘어선, 세세한 적용 실례까지. 특히 뒷부분에 실제적인 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은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런 내용으로 수업을 받고 싶을 정도로) 책 내용 중 클레멘트 코스 수강생이 본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겪었을 때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어요"라고 대답한 부분은 참 인상적이었다. 사람의 성품을 바꾼다는 게 곧 그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이고,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건, 그 사람은 세상을 원망할 줄만 알았지, 바라보고 성찰할 줄은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어린 시절 좋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그가 좋은 것을 많이 배우면서 자랄 수 있었다면, 그런 안타까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멘트코스야말로 정말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제 클레멘트 코스가 조금씩 정착되는 단계이다. 사실 책을 처음 받고 머리글을 읽었을 때의 두근거림으로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나 클레멘트 코스의 강사로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야? 라는 괜한 사명감까지 느꼈으나, 나의 수준으로는 어림없는 짓이다. 그저 나의 위치에서 조용히 응원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클레멘트 코스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날이 오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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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나의 여행
임영신 지음 / 소나무 / 200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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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책을 받았을 때, 아기자기하게 감각적이고 예쁜 편집이 참 기분 좋았다. 하지만 싱긋 웃으며 책을 펼친 후, 갑자기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

이 한마디가 이 책에 대해 모든 걸 말해주는 듯 했다. 그리고 내 머리속엔 자꾸 이 말이 맴돌기 시작했다

임영신, 그녀는 가정을 버렸다?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기 전 이렇게 누군가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것을 보았다. 세 아이이자 한 남편의 아내인 여자가 가정을 버리고 전쟁 현장으로 뛰어든 것은 이기적이고도 무모한 일이라고 가정의 평화는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느냐고

한비야씨의 글을 읽을 땐 누구도 그녀에게 무모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렇다면 그녀가 혈혈단신이기 때문이었단 말인가? 가정이 없는 여자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되고, 가정이 있는 여자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면 이기적이고 무모한 걸까? 

우리에게, 또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가정,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가 참 많이 왜곡돼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갈 때 진정으로 지지하고 힘이 되 줄 수 있는, 본인을 가장 잘 알고, 박수쳐줄 수 있는 공동체이다. 가족이 있으므로 갇히고, 발목 묶여 그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긍긍하는 공동체가 아닌 오히려 그로 인해 안심할 수 있고, 한 발 앞서나갈 수 있도록 서로를 긍정해 줄 수 있는 곳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가정의 모습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런 가정의 모습, 그리고 이런 지지자가 되어줄 수 있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 (남편 분, 제 이상형이십니다) 아이들 역시, 이런 남편이 있었기에 믿고 떠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라는 '선명한 거짓'을 좌시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이러한 본인의 모습을 긍정하고 격려해 주는 가정은 큰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대 여성학과 정희진 교수는 진정한 모성이란 엄마가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부어주는 것이 아닌, 엄마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롤모델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했으며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한다. 사회의 한 곳에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엄마에게 어려서부터 평화에 대해 듣고, 평화를 배우고 자란 아이는 올바르게 자랄 수 밖에 없다. 다른 나라 아이들을 제 아이처럼 사랑하고 그들을 향해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역시 온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바르게 키워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그녀는 가정을 버렸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가정을 너무나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했다

앗살라 말라이쿰, 평화가 인사인 그곳

이 책을 들고 지하철에서 읽는데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녀의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녀가 전하는 그 곳의 소식에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다. 그곳 사람들은 앗살라 말라이쿰, 이라고 인사를 한다. 당신에게 평화를... 평화가 일상인 우리는 사람들을 만날때 평화를 기원해주지 않는다.오히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이 곳에서, 한 때는 "부자되세요"가 인사인 적은 있었다. 그게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이 곳 사람들은 그렇게 인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서로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늘 기도하고 기도해줄 뿐이다. 이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자체가 나에겐 정말 슬펐다. 평화가 그렇게 간절한 사람들이 있구나. 비둘기떼 따위를 보면서 막연히 저게 평화의 상징이야, 하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평화가 너무 당연해서 사실 진짜 평화가 뭔지 모르는 우리들도 있는데 그들은 일상이 아닌 평화가 일상이 되길 바라며 그렇게 서로에게 늘 일상적으로 인사한다. 참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들은 참 강인하게도 그들의 일상을 지키려 노력한다

"다시 전쟁이 온다 해도, 폭탄이 쏟아진다 해도 이 강가에 와서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실 거에요. 전쟁이 우리들의 일상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는 걸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우리가 전쟁보다 강한 일상을 가졌다는 걸 볼 수 있도록"
- p49, 티그리스 강변에서 마주한 한 젊은 부부

평화롭지 못한 그들의 일상이기에 한 순간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픈 마음 또한 강렬한 그들의 모습에 또 나는 가슴이 아프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기본 인권인 존엄을, 생명을, 그리고 평화를 빼앗을 권리를 누가 주었던 것일까. 경제 제재를 이유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영아 살해를 자행했던 그 모습을 어떤 이유를 들어 용서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의 시작이, 평생의 인격을 결정하는 시기가 '전쟁'이라는 치명적인 기억, 아픈 기억으로 시작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그 권한은누구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일까. 이런 사실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그저 무기력한 존재,라며 이러한 것들을 합리화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몰랐다,고 그저 방관해도 되는 걸까? 오히려 무기력하다고 포기했고, 몰랐다고 방관했던 게 더 큰 잘못은 아니었을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대답 없는 물음만, 답 없는 질문만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다

정직한 물음, 정직한 대답

그녀는 이러한 현장들을 마음에 안은 채,평화를 향한 여행을 계속한다. 라브리와 떼제를 다니며, 그 곳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녀는 계속되는 우리들의 대답없는 물음, 답없는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찾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정직한 물음 정직한 대답을 통한 자기 자신과의 깊은 대화이다

라브리는 깊이 묻고 정직한 삶을 살 것을 그 곳에서 쉼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말해주고 있다. 떼제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가 선 곳에서 깊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기도와 화해의 삶으로 희망을 이끌어나가는 삶, 단순하고 소박한 삶덜 갖고 많이 존재하는 삶, 생각한대로 살아가는 삶, 앎과 삶이 일치하는 삶,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돌보는 삶, 화해와 일치의 삶으로, 세상을 향해 화해의 문이 되어주는 삶- 이러한 삶을 살 것을 추상적 선언이 아닌, 손으로 매만져오는 일상으로 말을 걸고 있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임영신은 돌맹이국을 끓이는 지혜로운 곰 이야기를 하면서 곰에게 그렇게 평화로운 지혜를 가져다 준 것은 숲에서 혼자 보냈던 시간, 자신의 분노를 돌아보고 고요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과 세계에 이러한 물음들이 있다면 세계는 좀 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의 첫장에 신영복 선생님의 친필로 쓰여진 한마디처럼 평화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 속 평화의 추구가 곧 평화를 향한 길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 잘 살고 있는 거니? 

라브리의 설립자인 프란시스 쉐퍼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물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함께한 물음이다. 대학 2학년 때 저 책을 읽고, 나는 답을 찾았던가? 지금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신영복 선생님을 향한 말없는 흠모가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나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나 역시 대학시절, 학부의 선생님들을 참 존경했었고 감히 그 앞에서 부끄러워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그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곳에 잠깐 취직했다가 자꾸만 마음에 밟히는 선생님들의 이야기 때문에 그 심어주신 삶에 대한 가르침, 가치관 때문에 NGO쪽으로 다시 취업하기 위해 알아보고, 노력했으나,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적은 상황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끝까지 갔으나 번번히 최종에서 탈락하면서 그냥 이 곳은 내가 갈 곳이 아닌가보다, 하고 다시 안주해버린 내가 나름 지금의 편안하고 스위트한 삶에 만족하면서, 내가 가서 직접 일하고 싶었던 기관들의 후원자로 남으며 만족하고 있는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존경해 마지않는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며, 그 삶을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다시 한 번 그녀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보면서 얼른 두근거리는 이 가슴 진정시키고, 나에게 정직한 물음과 정직한 대답을 던져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만의 평화 여행을 계획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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