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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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말로만 들으면 어쩐지 습지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의 생태과학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은 책이지만, 실은 습지의 생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눅눅한 자취방에서 사는 지지리 궁상스런 대학생들의 생활을 다룬 만화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비루한 현실 속의 초라한 욕망, 혹은 비굴한 마음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는 데 있다. 늘 웃으며 만나는 사람들, 항상 쿨하고 시원시원한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지만 실상 그 안에는 쪼잔한 마음, 은근한 시기심, 차마 말할 수 없는 궁상맞은 계산들이 들어있게 마련이지. 화려한 웃음의 이면에는 초라한 현실과 비루한 일상이 숨어있기도 하고 말이다. 습지생태보고서는 그런 것들을 정면으로 이야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 안에 타자처럼 존재하는 녹용은 끊임없이 그들의 그런 마음에 다분히 속물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꽤나 적나라하게 현실성을 더한다. 그 적나라한 표현을 듣고 있노라면 헛, 하고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 웃음은 역시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이지. 마치 재호의 미소처럼 말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측면을 제외하고는 실은 재호의 미소와는 좀 다른 맥락이긴 하다. 실은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재호를 보는 건 어쩐지 슬프다. 하지만 책의 뒷면에 그렇게 똑같이 웃고 있는 실재 재호를 본 순간, 나는 다시 웃어버렸다) 

작가 본인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최군은 상대적으로 좀 더 섬세하게 묘사됐다. 재호나 정군의 경우 역시 작가에게는 타자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겠지만, 그래서 표면적으로 묘사된 부분도 많았지만 최군의 감정은 비교적 명확하다. 초라한 현실을 명분으로 감싸고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을 합리화하는 다분히 자기만족적인 최군의 모습, 초라하지 않아! 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에게 가장 많이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을 추천해준 세찬은 본인이 정군의 궁상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대인'이나 일기장에는 소인배스러운 모습이 가득한 그를 보면서 나도 참 많이 웃었다. 세찬의 일기장을 검사해야겠다는 말에 그녀는 다 불태워버렸다고 했으나, 실은 방구석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는 걸, 그 일기장에 내가 등장하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그녀에게 잘해야지. 헤헷 (그런데 벌써 등장한 사건?)

당신의 궁상은 누구를 닮아있는가? 물론 당신 쿨하고 멋진 사람인 거 안다. 내가 말하는 건 그 쿨한모습 이면의 지지리 궁상스러운 모습 말이다. 당당하게 난 뼛속까지 쿨해요! 라고 말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 난 너랑 안놀아 ㅋㅋ

(아, 정말 짱유치하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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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왔구나!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8-06-16 14:32 
    한겨레 21을 볼 때마다 기대하던 마음으로 보곤 하던 만화가 있었다 솔직한 그림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시절의 이야기를 묵묵하게 풀어나가던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은 나를 먹먹하게 만들곤 했다 그 책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서 나왔구나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 한겨레 21을 다 챙겨보지 못했기에 못본 것들이 많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반가운 소식이다! 바로 구매버튼 숑숑! (아흐, 책 안사려고 했
 
 
누에 2007-08-1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의 이 책은 모르고 있었네요. 프랑스에도 그의 책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볼 수 있어서 관심있게 보고 있었거든요.

웽스북스 2007-08-14 10:02   좋아요 0 | URL
프랑스에도 최규석의 책이 있다고요? 우와~ 신기하네요 ^^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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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그냥 편하게 술술 읽어넘기려는 심산으로 들었는데, 너무 읽는 데 너무 몰입해버렸나보다. 사실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몰입했을 객관적 이유는 없다. 그냥 젊은 애들이 하룻 밤 걸으면서 일어난 일? 우정? 사랑? 출생의 비밀? 사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이 책은 오히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이건 정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온다리쿠의 매력. 흔들리기에 오히려 빛나던 청춘, 그 때이기에 할 수 있던 고민들, 가질 수 있던 마음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이 안에 있었다. 

실은 흔들림을 거부하고, 그저 얼른 앞으로만 나가며 어른이 되려 하는 도오루의 모습을 보며 너무 나 자신과 동일시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도오루가 그토록 자신을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토록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던 것은, 흔들리기 시작하면 본인도 본인을 겉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오루의 내면은 오히려 더욱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마음의 방비'

실은 나 자신을 지키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로운 문제라고. 그저 조금 흔들리고 무너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스스로를 이렇게 지키려 애써왔는지 모르겠다. 감정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고, 실은 저 바닥에 어떤 마음들이 존재함을 알면서 마주치지 않으려 빙빙 돌아가려 애쓰는 내 안의 모습들을 도오루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허둥대지 않으려 늘 애써 여유롭고, 애써 쿨했으나, 실은 누구보다 허둥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부정하던 다카코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실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충분히 돌아보고, 고민하고 긍정할 수 있던 작업이 선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둘이 화해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분에서 나는 내가 마치 그들이 된 양 어찌나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는지 모르겠다.) 의식은 굳이 자각하지 않는 듯 애썼으나, 자신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자각하고 있던 어떤 마음에 대해, 어떤 존재에 대해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실은 그 자신의 내면에 굉장한 변화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이 일은 보행제가 있던 날 '하루의 기적'이라고 표현되지만, 실은 기적이 아니다. 걷는다는 일이 가져다 준 성실한 결과일 뿐이다. 걷기는 그만큼 매력적인 일이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오로지 두 발을 움직이는 것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게다가 '마지막'이 부여해 주는 플러스 알파의 정서는 눈 앞에 마주치는 그 어떤 것도 그저 지나칠 수 없게 만들어 주는 묘함이 있지 않은가. 그냥 머릿 속에 드는 생각, 지나치고 있는 마음들, 이런 것들을 다 안고 거리를 마구 쏘다니고 싶어졌다. 그리고 얼마간은, 평소보다 좀 많이 걸었고, 또 당분간은 좀 걷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매우 적절한 날씨와, 적절히 마음을 이끌어내주는 풍경이 콤보로 도와주고 있으니까. (--> 봄에 쓴 리뷰라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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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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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전에 꼭 거치는 의식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에서 시작된다. '쓴다'는 행위는 곧 인정을 뜻한다. 애써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스스로 기록함으로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래서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체인지링에서 그와 그의 친구 이타미 주조 감독의 인생을 뒤흔들었던 끔찍한 기억을 '그것'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으며 작가 김형경은 자전적 소설인 세월에서 선배에게 성폭행 당했던 기억을 쓰기에 앞서 너무 괴로운 마음에 '모두가 예상하는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돌려 말하고 싶은 마음을 극복해야만 했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얘기하며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와 우정을 언급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적어내려감으로써 자신을 극복하고 삶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 정의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서 배리와의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정은 사랑만큼이나 치열했다. 마음을 쏟아낼 대상을 끊임 없이 찾던 그 시기에, 친구란 단순한 교감을 넘어선 집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배리가 중요한 것은 그가 핼과 사랑과 우정을 나눈 대상이기도 하지만, 실은 핼이 집착한 대상이었고, 그 집착을 극복함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끝이 핼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작이었다. 이를테면 자신과 마주함의 시작이랄까?  

나는 핼이 배리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 주목하고 싶다. 배리는 그와 다른 존재였다. 아직 무엇 하나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핼에게 에너지틱하고 주도적인 배리는 매우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리의 죽음 이후, 헬이 그의 무덤에서 춤을 추지 못하고,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제정신이 아닌 채 날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시 혼자가 되서 스스로를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배리가 핼에게 자신의 무덤에서 왜 춤을 춰달라고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핼이 춤을 출 수 있게 됐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배리가 죽고 처음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춤을 출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찾아간 배리의 무덤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알고 있었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 없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로 조금씩 완성되기 시작한다.(물론 삶이라는 게 끝까지 완성이란 없지만 말이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본인이 차마 들여다 보기조차 두려워하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 작업이었다. 처음 사회사업가를 만났을 때의 핼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여전히 그는 두려워 하고 있었고,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다. 젠체하기도 하고, 이따금씩 과잉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고 묘사되던 그는 사회사업가에게 자신과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즈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과 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또 그 기간 동안 본인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솔직하게 글로 써 내려가면서 핼은 지난 시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그 관계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 건강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배리의 다른 모습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 내면의 열망을 받아들이게 된다. 핼이라 불리기 원했던 소년. 실은 본인의 이름도 헨리였으면서, 그는 굳이 셰익스피어의 '헨리'를 차용해 본인을 핼이라 불러주길 바란다. 이름이라는 것, 불린다는 것은 단순한 기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그저 듣기에 예쁘고 좋아서 자신의 또다른 이름을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신의 소망을 반영한다. 그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시늉하기'의 일종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은 부모님이 원하는 길과 달랐고, 매우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고, 실은 자신조차 그게 가장 맞는 일인 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열망을 인정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조심스럽게 조금씩 그 소망을 표현할 뿐 그 소망을 남들과 자신 앞에서 자신있게 인정하지 못한다. 특히나 글을 쓴다는 일이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줬던 배리를 극복한 순간, 그는 스스로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확실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그 무언가'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은 학교에 남아 영문학을 공부하는 일임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성큼 인생의 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 시기 대부분의 아이들이 혼돈을 그저 혼돈으로 끝내고 마는 것에 비한다면, 자신을 긍정하고 어떤 상황적 당위성이 아닌, 마음이 원하는 것을 끌어내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핼은 행운아였을 것이다. 

그 이후 핼이 어떻게 살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계속 공부를 하고, 예쁜 아가씨를 만나 사랑도 해보고, 아마 살면서 몇 번은 더 흔들리며 자라갔을테고, 어쩌면 지금쯤 어디선가 좋은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지. 또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시기에 진심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핼의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고 감히 바라고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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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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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책을 ‘여자와 도박에 관한 이야기’라 정의하며 다소 도발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도 도박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카지노에 빗대어 실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이다.  슬롯은 한마디로 이길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세상, 우리의 감정이 어떻든 여전히 돌아가고 있으며, 심지어 세팅한 사람마저도 이길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그 거대한 시스템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전에 한창 로또 광풍이 전국을 강타하던 시절, 헛된 꿈에 매달리는 사람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얘기했다. 그들이 로또에서 수십억원에 당첨될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희박하나마 존재하는 그 확률이 그가 평생 일해서 그 돈을 벌 수 있을 확률보다는 높다고. 

삶의 유일한 희망이 불확실성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슬픈 현실이다. 현실은 현실에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고, 우연에 기댄 환상만이 나의 현실의 유일한 희망이 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카지노. 아무 희망 없는 세상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느니 그보다 좀 더 높아 보이는 확률에 기대어 열정을 보이는 쪽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곧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미 환상에 사로잡혔던 이들은 세상으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카지노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모든 것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운이 그들을 비껴갔을 뿐 룰은 공정했다’라고 믿고 만다. 

승자는 늘 불확실성 따위에 기대지 않는 이들이다. 시스템화된 구조 위에 선 자들. 세계에 발을 담그고 아웅다웅 사는 자들이 아니라, 정작 자신의 한 발은 살짝 그 세계에서 빼버린 채 교묘하게 그들의 불확실성을 이용하는 자들이 이 세계의 승자이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 조바심을 내지도 않고,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이미 시작이 달랐으며, 이기도록 디자인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카지노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저자의 접근은 나름 참신했고 나 역시 그 시각에 일부 동의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 구조 내에서 설명하려 하는 작가의 시도는 세상을 지극히 단순한 곳으로 일반화시켜버리고 만다. 분명 세상에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고, 그 불확실성을 교묘히 이용하며 자신의 확실성으로 치환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도 존재한다. (책 속 주인공 같은)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살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이 미지근하게 세상을 관망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제나름의 긍정적인 열정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에 기대는 것이 차라리 이길 확률이 높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견뎌내고 있다. 

따라서 카지노 속 세상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없으며 작가의 그 무기력한 시선(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겠으나)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따라서 그 곳은 세계가 될 수 없다. 세상에 양극화나 무기력함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다만 전체를 아우를 수 없는 범주의 어떤 이야기에 빗대어 크고 넓은 것을 정의하려 했던 작가의 욕심이 지나쳤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으면 쫌 잘하던가. -_- 

허공에 떠 있는 듯 끝까지 정곡을 찌르지는 못했던 내용도 문제지만, 실은 나는 작가의 문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빠르고 흥미진진하지 않음에도 술술 읽히는 문체, 그런데 문제는 꼭 술술 읽히다가 한번쯤 턱 걸린다는 거다. 그건 주로 작가가 무엇에 빗대어 어떤 현상을 설명한 부분인데, 그건 뭐랄까, 너무 노력한 티가 났다고 해야 하나?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 내느라 고민좀 한 흔적이 보여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꼭 마음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은 표현이어서, 그리고 그게 너무 자주여서 '뭐냐, 이표현~' 하면서 한 번씩 탁탁 맥이 끊겼었다.

세계문학상은 이번 작품에 시상함으로 조금 그 성격이 명확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지는 모르겠지만 자극적인 소재를 삶과 인생으로 일반화시키는 작품, 조금은 톡톡 튀는 시도를 한 작품에 심사위원들이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 교수님이 아이들이 레포트를 내면 사실 너희들 수준은 내 보기에 다 비슷비슷하다며, 좀 더 참신하거나, 좀 더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과제에 결국은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고 하셨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이쯤 되면 사실 내년 세계 문학상 심사대에는 온갖 자극적인 소재들이 다들 인생을 말하겠다고 시도하는 건 아닌지, 살짝 우려가 들기도 한다. 받을 만한 작품이 없다면 주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존심과 공신력은 다른데서 세워지는 게 아니니까. 특히나 금액 따위가 세워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니까. 

실은 오지랖이 하늘을 찌르듯 넓고 걱정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이 웬디 아가씨는 이 책을 읽으며 또 한가지 걱정을 했다. 세계 문학상에 작품을 낸 수많은, 어쩌면 미래에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수많은 작가 지망생 분들. 절대적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그래, 내 작품이 상을 타기에 부족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분명 누군가는 상대적 기준으로 이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하며, 내 작품이 이 작품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았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으리라. 

작품을 보는 눈과 기준은 누구나 다른 거니까, 부디 구체적 대상을 앞에 두지 말고,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의 절대적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 주세요! 라는 당신의 예비독자의 바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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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매 웃기다 2009-06-0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첫번째 작품이라는데, 노련하다고 말한다면,...웃기지 않나요? 글을 좀 못 읽는 편이시네요. 다소 거칠다고 봐야죠.
장편은 긴호흡으로 가는 건데, 술술 읽혔다면서 재미없다고 말하고, 웬디님은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 지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웬디님도 나름 글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본데,...할 수 있으면 차라리 도전해 보시는 게 좋으실듯.. 셈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 쬐매 안타깝네염.
" 내 작품이 이 작품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았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으리라." 자신의 상황은 아니겠죠?...ㅎㅎ

웽스북스 2009-06-29 13:26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알라딘에 잘 안들어와서, 이 댓글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글을 좀 못읽는 편이시네요- 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습니다. 겸허히 새기겠습니다.

사실 제가 글을 잘 못읽어서 그런지 쪼매웃기다님이 진짜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첫번째 작품이니까 노련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웃기지 않냐. 술술 읽히는 거면 잘쓴 거지, 술술 읽었다면서 왜 재미없다고 말하냐,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장편은 긴호흡으로 가는 것이지만 술술 읽히는 것만이 꼭 미덕은 아니지요. 재미있다,가 역시 전부도 아니지만 술술 읽히면서도 그 재미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도 허다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 이야기가 왜 모순이 있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작품이라고 해도, 평가는 객관적으로 받아야지요. 아울러 첫번째 작품이라 노련하지 않다,라고 평가한다면 제가 글을 잘 읽는 사람이 되는 건가요? 둘간의 연관성도 전혀 성립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참고로 저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소설을 써본 적은 없습니다. 그럴 깜냥도 안되고요- 그냥 평범한 독자일 뿐이지요. 다만, 이런 책이 대상을 받았다면 거기에 낸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겠지요.
 
문학 속의 서울 - 한국문학이 스케치한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2
김재관.장두식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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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역사책보다는 문학책을 통해 배웠다. 역사책에서 만난 역사는 나열된 사실들을 보며 읽고 암기해야 할 시험의 대상이었지만, 문학 책에서 만난 역사는 보고 울며 웃는 공감의 대상이었다. 태백산맥이나 장마, 엄마의 말뚝 같은 책을 보며 한국 전쟁의 아픔을 읽고, 광장, 손님과 같은 책을 통해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생생하게 느꼈다. 조정래의 한강을 거슬러 읽어 오며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친 전반적인 시대 상황을 보고, 난쏘공과 같은 책을 통해 특별히 그 시대에 난장이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아파했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과 같은 책은 내게 개발 독재 정권의 폐해를 그대로 배울 수 있게 한 교과서적인 책이었고, 김원일의 푸른 혼은 나로 하여금 인혁당 사건의 부조리함에 다시 한 번 분노하게 했던 책이었다. 이렇듯, 나에게는 문학이, 특히 소설이 곧 역사 교과서였다. 

문학 속의 서울이라는 책은 그런 의미에서 참 반가운 책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들 중 대한민국 역사의 많은 부분의 터가 된 '서울'을 생생하게 그려낸 문학 작품만 추려내 한 곳에 모은 책이기 때문이다. 서울 문화 재단에서 서울 문화 예술 총서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책임에도 서울의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이 아닌, 어둡고 슬픈 과거들을 재조명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새삼 시대가 새롭게 느껴졌다. 서울문화재단이라는 기관을 아는 건 아니지만, 괜히 생각하기에 불과 일,이십년 전에 팽배하던  "아아~ 우리의 서울,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라는 식의 노래와 꽤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의 재단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아름다운 핑크빛 환상만을 노래하는 눈가리고 아웅, 시대는 그래도 아니구나 하는 마음에 이 책에 더욱 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시대별로, 또 주제별로 작품들을 나눠 각 작품 속의 인물, 혹은 사건들에 대해 저자가 설명하고, 그것들이 가진 함의들, 그것들이 나타내고자 했던 서울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또 다른 많은 문학 작품을 만나게 하는 게이트의 역할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작품 한 작품을 다루는 깊이가 조금은 아쉽다. 잘 몰랐던 작품은 잘 몰랐던 작품대로, 조금 더 소개됐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 잘 알고 좋아하는 작품은 좋아하는 작품대로 아, 이런 부분도 같이 서술됐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서운함. 오랫만에 반가운 작품들을 만나 옛 기억 새록새록 떠올리며 읽고 있는데 너무 빨리 끝나버려 조금 김이 빠졌다고나 할까? 암튼 그런 아쉬운 마음을 느끼며 이를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작품들이 다뤄진 깊이를 역으로 추론해 냈고, 그 책 역시 많은 부분을 다루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그만큼 아쉬움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조금 덜 소개하더라도 깊이 있게 텍스트를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작가들이야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지면이 모자라고, 작품 하나 하나가 나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어 뺄 수도 없고, 결국 조금씩 조금씩 줄여가며 다 다룰 수 밖에 없던 마음 왜 모르겠는가. 

지방에 살던 내 친구는 '서울' 하면 '남산 타워'가 제일 먼저 떠오른단다. 높게 뻗은 남산타워, 그 반짝 반짝 거리는 화려함은 온갖 문화와 예술과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이 곳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는 상징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서울'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남산타워(와 같은 높은 곳-남산타워는 사실 안가봤답니다, 하하)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빼곡함이다. 화려한 불빛으로 반짝반짝 위장된 모습이 아닌,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의 적나라한 모습.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풍경. 사람이 먼저 보이지 않고 집이 먼저 보이는 도시, 그런 도시가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이다. 거주지를 마련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고, 그걸 위해 때론 개인의 평생이 희생되기도 하는 곳, 서울. 이 책 역시 서울의 그런 모습을 굉장히 큰 비중으로 다뤘다. 최수철의 '소리에 대한 몽상'은 처음 알게 된 작품인데 인간의 정이 점차 사라져가는 서울의 아파트 문화를 단적으로 잘 그려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역시 맹목적 내집 마련의 꿈 뒤의 씁쓸한 뒷맛을 느끼기에는 그만이었다. 

발전했다고 말한다. 또 극복했다고 말한다. 분명 발전한 것처럼 보이고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발전했고, 무엇을 극복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내 집 마련은 더욱 어려워졌고,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사람들의 머리 속에 팽배한 물질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돼 이러한 세태를 더욱 견고히 하고 있는 걸. 뭐가 옳고 그른지를 고민하던 사람들은 적어지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떤 불합리라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사람들, 부족할 것 별로 없는 환경 속에서도, 그저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술집으로 나가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영자보다 더욱 슬프다. 

2007년의 서울, 정말 발전한 거 맞나요? 정말 극복한 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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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8-07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에 우선 추천!
정말 할 말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을 것 같군요.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는 외울 필요도 없지만, 쉬 잊혀지지 않기에 정말 좋습니다!

웽스북스 2007-08-07 18:49   좋아요 0 | URL
네, 읽어보세요- 읽어본 분들마다 다들 좋아라하신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