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병역거부?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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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의 평화의 얼굴은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당시 나의 도서 구매 정책 때문에 (2달간 구매 금지!) 선뜻 구매하지도 못하고 얼래벌래하다가 천원 할인 쿠폰도 놓쳐버렸다. 하지만 두달간 저 정책을 (어쨌든) 지켜준 나 자신에게는 스스로 매우 뿌듯함을 보내주고 있는 중이다. 흐흣- 그리고 천원 더 주고 산 이 책은, 그 천원이 절대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김두식 교수의 쉽게, 말하듯 흐르듯 글쓰기는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글을 써야 한다면 그의 말투를 빌어오고 싶을 정도로 그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분명하다. 한껏 예의를 갖췄으며 모난 표현으로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드물다. (사실 나는 나름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 '상대'의 자리에 서보지 못했기에 '없다'라는 단언은 섣불리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논리까지 두리뭉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중하면서도 확실한 논리로 일단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밖에 없도록 자신의 글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상대의 논리를 설명하며, 그 논리가 가진 한계를 짚고, 그것으로 다시 상대의 논리가 가진 모순을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소개가 늦었다. 이 책은 그가 오랜동안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에게 단순히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먼저 (그들이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기에)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서 온 주류 기독교에 대한 비판 및 반성의 촉구를 선행한다. 그 역시 주류 기독교에 속한 자이기에 자신의 반성 또한 곁들인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주류 기독교가 정치권들이 불편해할 만한 것들은 하지 않아 왔던 것과 주류 기독교에서 정의한 '이단'이라는 것을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규정해버리는 우리 사회의 몰지각성에 대해 지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사유하지 않음, 그리고 예수님의 평화의 명령을 몸소 실천하지는 못할 망정 그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모순에 대해 가감없이 지적한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들 또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였으며, 이는 기독교 내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일임을 설명한다. 

또한 정부와 국가에게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남북대치를 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지의 근본적인 원인부터 되묻는다. 남북대치의 목적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인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가 진정 옳은 것인지 묻는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그것의 기본정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는 일부 사람들의 정당한 전쟁도 있을 수 있깅 양심에 따른 무조건적인 병역 거부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에도 일침을 가한다. 정당한 전쟁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 나가기 전 그 전쟁이 정당한 지 여부에 대한 깊은 고찰과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진짜 정당한 전쟁론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하며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이 이론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역설한다. 상대를 악에서 구하기 위해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논리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만약 진짜 정당한 전쟁론자라면 전쟁의 상황이 닥쳤을 때 평화주의자와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맺음말에서 그는 다시 입대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택하겠노라, 고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전신 격인 칼을 쳐서 보습을을 읽고 그에게 병역거부를 하겠다며 편지를 보냈다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러지 말 것'을 당부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이없게도 박민규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찾아온 독자를 돌려보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공동체의 성원이 없는 가운데 '홀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택하기에 이 땅의 토양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설명한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의 몫을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근거한 선택을 하게 될 때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고 보는 듯 했으며 향후 그가 그 역할을 그답게 충실히 해 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쟁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병역 및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문제 앞에 민감하게 고민해 보지 못했던 스스로를 돌아 본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기성 교회의 시각에 젖어 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음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 책은 이런 나로 하여금 그들에 대해 또한 나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으며 향후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갖겠다는 다짐의 시작이 됐다.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에 이어 그가 준비중이라는, 교회와 정치, 그리고 그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담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세번째 책에 담겨 있을 그의 목소리 역시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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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 드네요 ^^

웽스북스 2007-08-13 13: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

멜기세덱 2007-08-13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김두식 교수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와 주류 기독교 계는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웽스북스 2007-08-13 13:03   좋아요 0 | URL
네, 멜기세덱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바람결 2007-08-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부터 관심하던 책인데, 좋은 리뷰를 만나 반갑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한 명의 종교인으로써 '평화'의 참된 의미와 대면할 수 있는 계기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웽스북스 2007-08-13 22:56   좋아요 0 | URL
네, 바람결님, 평화의 참된 의미를 마구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감사드립니다!

마늘빵 2007-08-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 서재 통해 건너왔습니다. 왜 여길 몰랐을까.

웽스북스 2007-08-27 21:10   좋아요 0 | URL
저는 이미 유명인이신 아프락사스님 서재를 여러번 다녀왔는걸요 ^^
제 서재는 뭐, 모를만 합니다 흐흣

2010-03-15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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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 줄기는 바로 신학자 월터 윙크가 말하는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입니다. '평화를 되찾아주는 것은 언제나 정당한 폭력뿐이다'라는 거짓된 신화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73쪽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랑을 통한 구원' 이야기가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통한 구원'을 약자들의 자기정당화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거나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기적으로 평가절상함으로써 가능성을 우리 상상 속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75쪽

'평화를 위한 전쟁'은 '착한 살인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독재자'만큼이나 모순된 표현입니다. 존재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경이로울 정도지요.-141쪽

상대방을 악에서 구하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할까요?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엄중함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이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144쪽

누구 하나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이단'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여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독교의 '이단' 정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류에 속한 특정 집단이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그 소수파를 이단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반공, 애국, 기독교, 독재정권 등이 일체를 이룬 주류 사회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결합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78쪽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그 근거로 남북 대치 상황이 주로 거론됩니다. (중략) 그러나 남북 대체 상황을 생각함에 있어서 먼저 왜 우리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자유, 믿고 싶은 종교를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 등과 분리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남북 대치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자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입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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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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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당연히 알 수 있듯, 바리데기는 우리 나라의 전통 설화인 바리공주 설화를 그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다. 바리공주처럼 일곱번째 딸로 태어나 버림받을 뻔했다 하여 '바리'라고 이름지어진 북한 소녀. 그 출생만큼이나 그녀의 운명 또한 참 지속적으로 기구하다. 한 번도 역사의 중심에 선 적은 없지만, 항상 역사와 세계의 직격탄을 맞으며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할까? 

이 책은 그의 전작인 손님, 그리고 심청의 연장선 상에 있다.
예전에 심청을 읽고 간단히 리뷰하면서 이런 글을 썼었다. 

손님이 굿의 형식으로 한민족의 역사와 한을 잘 풀어냈다면
이번엔 역사와 함께 성숙해가는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좀더 방대한 역사를 써내려갔다


전통 설화의 설정을 빌려온 한 여성이 온몸으로 역사를 살아내면서 성숙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심청의 연장선 상에 있고, 전통 무속의 형식을 빌어 세상과의 화해를 꾀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 작품은 손님의 연장선 상에 있기도 하다. 심청의 여주인공이 19세기를 온몸으로 살아냈다면, 바리데기의 여주인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21세기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손님이 개인과 개인의 화해를 통한 세계와 세계의 화해를 추구했다면 이 책은 자신과 자신의 화해를 통한 개인과 세계의 화해를 시도한다. 

자신과의 화해가 곧 세계와의 화해의 시작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결국 세계란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개개인에게 묻는 것이 틀린 논리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힘들게 세상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물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더욱 가혹했을지도 모른다. 너가 그들을 뒤돌아보지 못했잖아, 너가 그들을 미워했잖아, 결국 너부터야, 라는 마치 어르신에게 혼나는 듯한 황석영 선생님의 직설적인 메시지는 참 강하면서도 아프게 다가온다.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가혹하지만 그게 정답으로 가는 첫 걸음임을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에서는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었고, 세상은 여전히 희망적일 수 없음을 암시하며 끝내는 이 작품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나약한 개인일 뿐인 인간 개개인이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이 세계의 유일한 희망임을 말하기에 또한 지극히 이상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읽으면 매우 희망적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읽으면 매우 절망적이기도 한 이 책 안에는 결국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고 싶다,는 황석영 선생님의 바람이 간절히 녹아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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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8-10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 구입을 망설이는 중인데~~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만요!
요즘엔 무거운 독서는 피하는 중이지만 좋은 서평에 추천 꾸욱!

웽스북스 2007-08-10 12:50   좋아요 0 | URL
균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의식적으로 무거운 책들을 피하다 보면 또 어느순간 너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싫고, 그래서 다시 무겁게 읽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하고, 암튼 적절히 균형감 있게 읽는 걸 좋아한답니다 전 ^^ 유치뽕한 책들도 가끔 얼마나 재밌는데요 흐흐

leeza 2007-09-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보고 나니깐 왠지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드네요. 요즘 여기저기에 자주 나오는 책이다 보니 오히려 더 미뤄지게 된다는... 인간에게 희망을 보게 되는 그 날을 위해~ 추척 꾸욱 누르고 갑니다.

웽스북스 2007-09-08 23:58   좋아요 0 | URL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미흡한 서평보다 더 좋은 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영하의 여행자 하이델베르크 김영하 여행자 1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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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독자들보다는 실은 김영하 그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었을 것 같다. 그가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연회에서 했던 말에 따르면 그의 안에 살고 있는 어린 예술가가 이게 하고 싶었던 거지-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니까. 자신의 어린 예술가를 위해 낼 필요가 있었던 책이 시장에서의 상품성과 맞아떨어지기까지 하니, 그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 그는 이 책을 아무도 안내준다고 할 줄 알았다지만, 요즘 독서 트렌드는 점점 가볍고 비주얼한 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는 탄탄한 고정독자층까지 확보하고 있으니, 안내줄 이유가 없지 않는가. 

사실 기획의 측면에서 봐도 굉장히 재미 있는 기획이다. 일곱대의 카메라, 그리고 일곱개의 도시, 거기에서 받은 느낌을 단편소설로 만들어서 낸다는 것. 사진찍기와 여행하기,라면 사실 가장 인기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책에는 일반인들이 내는 여행집만큼의 정성도 들어가 있지 않은 듯했다. 단편소설 하나, 그리고 뒷편의 그가 찍었던 사진들이 다시 그 단편에 나왔던 문구들과 만나고 있다. 사진에 대해 잘 모르기에 사진의 퀄리티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 그가 느낀 것과 그의 삶의 괴리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때문에 뭔가 계속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기록이란 자신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느낀 '죽음'이라는 감정은 소설을 염두에 두고 느낀 기획된 감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록도 아니고, 타인의 기록도 아닌, 그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어린 예술가를 달래기 위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예술이 아닌, 철저한 상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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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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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영하의 신작 '여행자'를 읽다 보면 번역가 김화영님의 말을 인용해 놓은 부분이 있다. "한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그 장소는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세월이 흘러 변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여행이 주는 매력이라는 것이다. 자꾸만 다른 것들이 들어오게 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데서 감흥을 느끼게 되는 것, 이는 무릇 여행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흐르게 되면서 새로이 보이게 되는 것들, 내가 변한 만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의 진수는 나는 역시 '책읽기'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애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많이 접해본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 아빠가 아는 분을 통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정에 이끌려서?) 구매하셨던, 실은 구성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던 추리 전집에 들어있던 애드거앨런포 작품집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안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역시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검은 고양이'였다. 그 때 내게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사건의 잔혹함 자체가 주는 그 소름 끼치던 막연한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10년도 더 흐른 지금(어머, 정말? 순간 계산하면서 진짜로 충격 받아버린 사건 ㅠ) 다시 읽은 검은 고양이에서, 내게그런 잔혹함은 그리 큰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그간 살면서 공포나 잔혹함에 대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읽고, 보며 겪어 왔던가. 그 정도의 잔혹함-눈알을 파고, 목을 매달고, 도끼로 찍어서 벽에다 묻어 다시 벽을 바르는-은 여전히 잔혹하긴 하지만, 새롭거나 특별할 것은 없는 정도의 잔혹함이었다. 거친 세월을 살아온 건가? 아니면 거친 작품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 건가? 이제 마음만 먹으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영상으로도 구할 수 있는 정도의 공포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순수한(?) 아가씨는 보지 못했던 그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약함으로부터 비롯한 악함,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불러 오는 공포에 주목한다.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자기 중심적 사고, 자기애, 그리고 보호본능, 그것으로 인해 자기 안에서 키워 가는 생각, 편집증적 두려움, 이것이 이 작품에서의 공포의 핵심이다. 심지어 그런 공포의 극한에서도 '자기 과시'를 잊지 않아 주시는 인간은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소름끼치는 존재인가. 분노로 환원된 두려움이 가져왔던 끔찍한 결과의 잔혹함은 오히려 부차적인 이야기이다. 검은 고양이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온 다른 작품들 역시 공포의 핵심은 어떤 불가사의한 존재도, 잔혹한 사건도 아닌 '사람' 그 자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레니체에 나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서 비롯한 공포, 구덩이와 시게추의 극한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포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폴짝 개구리나 아몬티야도 술통에서 표현된 조롱과 멸시가 가져다 주는 분노의 결과 등은 모두 인간 본연의 감정, 그리고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포의 작품은 그대로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해버린 건 그 작품을 읽던 나였고, 사람을 향한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이 작품을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변하고 있는 내가, 다시 10년이 흐른 후에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나는 또 어떤 감정, 어떤 모습에 주목하게 될까- 어디 한 번, 고운 모습,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괴기스럽고 두려운 사람의 내면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30대 웬디아줌마가 되도록 곱게 곱게만 살아볼까?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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