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흉내내고 관능을 찬양하라

그리하여 우리가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라.

   

-현존하는 최고의 고딕 비평가라 할 수 있는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처>가 출간되었습니다! 보통 미술이나 문학, 드물게는 건축, 혹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언급할 때에 종종 그 부분만을 드러내는 고딕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딕의 발생(후기 낭만주의가 대세였던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라니!)이 다분히 계급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다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애시당초 본질이란 게 없었고 사라짐과 죽음에 대한 모사로 가득찬 그 자신의 특성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하위 문화로써 변화무쌍하게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흔히 고딕 문화를 얘기할 때 이용하는 인간의 원죄의식이라든지 심리학적 고찰 대신에 문화사적인 추적을 함께하는 것은 매우 신선하고 즐겁습니다.

죽음과 어두움을 직접적으로 지향한다는 이유로 주류 문화의 영원한 공격을 받는, 그러나 오히려 그 피학성으로 인해 생명력을 유지하고 때로 이용되기까지 하는 (자본주의는 모든 추상들마저 자신 속에 내재화시켜 환전 가능하도록 만든다) 고딕 문화의 허허실실스러움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본격 하이 퀄리티 문화 비평서입니다. 번역도 깔끔합니다. 강렬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난이도: 중상, 여러 예술 작품들이 등장하므로 배경지식을 다소 필요로 함) -MD 금주의 선택

 

-다빈치 출판사에서 나왔던 <팜므 파탈>이 개정판으로 버전업되어 다시 나왔습니다. 고딕 문화의 거대한 축이며, 동시에 근현대 예술 작품들의 어둠의 어머니인 팜므 파탈들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팜므 파탈의 여왕 살로메로부터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허구의 인물들과 실존한 인물들이 그야말로 드림팀의 진형을 갖췄습니다.

주제 자체에 대한 거대한 규모의 탐색보다는, 팜므 파탈을 계열별로 구분한 뒤 각각의 특성에 대한 예술 작품을 탐색하고 그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례로 '롤리타' 꼭지에서는 소설 롤리타와 발튀스의 그림, 에곤 쉴레와 최규태의 그림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페도필리아(소아성애)적 특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소개를 하는 정도랄까요. 가이드북 정도라고 봐야겠기에 그 깊이에 아쉬움을 느끼는 분도 계시겠지만, 여성성과 파멸이라는 매혹적인 주제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었는가를 살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구성입니다. 교양 입문서 수준에서 친절하게 쓰여져서 읽기에도 편해요. (난이도: 중하, 독특한 주제의 문화 이야기를 접하고픈 분들, 혹은 여성성의 문화적 위력이 궁금한 분들께)

 

-드디어, 여왕님의 차례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뒤늦게! 완역 출간되었습니다. 그것도 오브리 비어즐리의 오리지널 일러스트와 함께요.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앗아간 미녀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풍기던 정치 음모극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냄새를 풍깁니다. 등장인물들의 온갖 욕망이 얽혀 있고, 성욕은 비틀어진 채로 점점 고파가기만 합니다. 단순히 오스카 와일드가 20세기초 반문화의 기수였기 때문에 위악적인 설정을 사용한걸까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각종 설정을 통해 은연중에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는 사드의 작품들에 비하면 <살로메>는 완전히 맹목적이고 파괴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요한을 제외하면) 자신이 무엇무엇을 원한다는 얘기 이외에는 거의 꺼내지 않습니다. 극 전체가 하나의 에너지에 홀린 듯이 맹렬하게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 중심에 완전한 욕망의 여왕인 살로메가 서 있습니다. 그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입니다. 요한을 죽인 이유도 성경에서처럼 어머니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애정을 거절한 요한을 죽여서라도 자기 곁에 두고 싶어서였죠. 저 유명한 씬, 죽은 요한의 시체 냄새를 맡으며 그의 잘린 목을 들고 키스하는 장면은 죽음과 관능이 스스럼없이 결합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뒤늦은 여왕님의 행차를 그저 반길 뿐입니다. (난이도: 중, 어둠의 포쓰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들은 모두 일어나서 영접합시다. 단, 희곡 알레르기 환자는 제외함)

 

 

 ...그러고보니

   

-심지어(?) 데이빗 린치의 책도 나왔습니다.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은 원제에 비해서는 다소 모호한 제목이네요. '월척 낚기'라고 쓰여진 원제처럼 어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데이빗 린치만의 방식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딱 펼쳤을 때 우파니샤드가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트윈 픽스를 만든 이 남자가 평정심과 고요함에 대해 끝없는 예찬을 펼치고 있어요. (작품의 기묘함과는 별개로) 그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예술가에게 보다 괜찮은 삶을 보장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영화감독답게 실제 영화 제작과정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어서 해 봐요'라고 유혹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영화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양념처럼 뿌려져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네요. (난이도: 중하,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모르는 분들은 내내 심심할 수도 있습니다)

-고딕류 팝아트랄까.. 아니.. 일본 풍의 고스(goth) 쪽이 더 가깝겠네요. 마리 킴의 작품집 <EYEDOLL>입니다. 최근 국내 유명 팝아티스트들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는 솔직히 좀 어려운데요. 앤디 워홀 류의 자기(자아)소비가 시나브로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변한 채 심드렁한 '작품'들만 양산되는 게 재미가 없거든요. 그래도 이 책을 브리핑하는 이유는, 낸시 랭 류와는 달리 마리 킴의 작업에는 싸이월드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이 진하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의 소비 문화로부터 출발한다는 팝아트의 원칙을 되새겨보면, 마리 킴의 스타일은 요시토모 나라 류의 일러스트와 싸이의 인기가 식지 않은 이 땅에 대한 적합한 소재 구성입니다. 아직 그 소재간의 결합은 어색한 편이지만, 이 노골적인 혼성문화(짬뽕) 작업은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에, 모처럼 나온 작품집이기도 하구요. (난이도: ?, 팝아트 지망생, 한국 현대미술에 관심있는 분들, 혹은 싸이월드가 어떻게 아티스트의 자의식 구축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연구하는 미학도 및 사회학도)

-마지막으로... 퐁피두 센터 특별전 도록입니다. 좀 이상한 마무린가요? -_-;; 서양미술 거장전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른 전시회죠. 근-현대의 거장들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가의 자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때로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해진 시대의 미술을 만난다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죠. 다크 포쓰 특집인 이번 페이퍼에 맞는 테마 관람도 가능합니다. 19세기의 세기말적 감수성에 연이은 방종과 전쟁과 다시 방종과 전쟁을 통해 미술이 그 자신 속에 어떻게 그림자를 품게 되었는가를 추적해보는 것이죠. MD의 일일가이드를 원하는 분께서는 리플을 달아주세요. ㅋㅋ

 

 

// 에고, 원래 다뤄보려던 책들은 쓰질 못했네요. ㅎㅎ 다음주도 있고, 또 언제 기회가 있겠죠 뭐. 모처럼 주제를 관통하는 책들이 함께 나와서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즐기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그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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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넘기셔도 좋을 고백

책을 잘 소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특히 인터넷 서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입장도 아니고, 사적인 공간도 아니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니까요. 눈 감고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균형을 어디서 잡을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저로서는 처음 해 보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늘 유혹에 휩싸입니다. 무게추를 조금만 더 진지한 쪽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죠. 고백하자면, 애시당초 고물상 옆 보물창고라는 컨셉트가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자리였으니까, 거기에 쉽고 편한 책이 들어갈 확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MD로서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거죠. 그러나 그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줄 상대가 누구에서부터 누구까지인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겨우 몇십 분 전, 막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무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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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끝에서 시작되다>

12월 25일에 1쇄가 나왔다는, 실수 치고는 아름다운 책 말미의 서지정보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데 자랑할만한 특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책이 괜찮았는데 왜 괜찮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입소문을 타고 종교분야 1위(11/26 현재 리뷰 209개)를 석권했다거나 하는 얘기는 홍보 문구로는 몰라도 제가 추천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문구는 아닙니다. 드라마틱한 실화라는 점도 진부한 자랑입니다. 스토리는 특별한 반전 없이 평탄하게 펼쳐지며, 두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얘기하는 구조 역시 특출난 것은 아닙니다.

눈에 띄는 특징이 보이지 않는 매력. 그렇다면 그 매력은 평범함이겠죠. 그제서야 미스테리가 풀립니다. 이 책의 매력은 난 체하지 않는 무덤덤함에 있습니다. 온갖 풍파를 겪은 두 주인공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휴먼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그들 특유의 무덤덤함을 통해 색깔을 불어넣습니다.

"아니, 그냥 론이라고 부르세요."

"아니에요, 론 씨."

댄버는 단호하게 '씨'를 붙이더니, "부인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라고 물었다.

"데보라예요."

"데보라 부인." 댄버는 다정하게 덧붙였다. "난 부인을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p.172

마치 하드보일드 소설의 한 장면같은 이 무뚝뚝한 대화는 노숙자로 살아온 흑인과 자수성가한 중년 백인 남성이 만난지 몇 달만에 처음으로 나눈 대화입니다. 시종일관 이 둘의 대화는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건드리는 식으로만 진행됩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도 없고, 신에 대한 절절한 찬양도 없습니다. 그 찬양의 역할은 백인 남자 론의 아내인 데보라의 몫이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이 끝날 때까지 두 남자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죽음이 가져온 비극조차 신의 뜻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담겨 있지만, 왜 항상 비극이 은총의 씨앗이 되어야 하는지는 결국 알지 못합니다. 현명하게도 이 책은 여기에서 멈춥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것 이외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이 책을 쓴 시점은 (당연히) 책에 쓰여진 모든 사건이 끝난 뒤지만, 직접 글을 쓴 두 주인공은 거기다 가타부타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매 순간의 자기자신을 충실히 복기하는 데서 그칩니다. 그들은 겸손합니다. 신이 무엇이고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정으로 시련을 극복했고 감사를 통해 기뻐했을 뿐입니다.

론 홀과 댄버 무어가 직접 쓴 <끝에서 시작되다>는 이러한 단순함으로 인해 빛을 발합니다. 놀라운 우정과 신앙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자신들이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우리 곁의 사람들임을 고백합니다. 무리하게 신을 직접 끌어들여 운명의 깨달음을 지도 편달하려는 보통의 신앙 간증서들에 비해 이 책이 더욱 와닿는 이유입니다.  함부로 말을 던지지 않는 두 남자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전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평신도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을 표현한 게 아닐까요.

C.S.루이스나 존.R.스토트 같은 인물들의 저작은 찬연히 빛나는 별과 같지만, 그 책들은 그야말로 하늘 위의 별처럼 어떤 방향을 지시해주는 길잡이같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평신도들의 곁에서 따뜻함을 발하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의 이름을 쉽게 빌어오지 않고, 무지한 자기자신으로부터 저 위를 향하려는 무뚝뚝한 의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이 책에 달린 아마존의 리뷰들을 떠올립니다. 209개, 평범한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 리뷰들이야말로 이 책이 누구의 가슴과 믿음을 위한 책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끝에서 시작되다>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완성 없이 영원히 걸어갈 뿐이라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각을 안겨주는,

한 편의 소중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p.s: 이 책에 인용된 책 중에 C.S.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이 있습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종교와 아픔에 대해 써내려간 사색록이죠. 논리정연한 루이스의 다른 책들에 비해 절절한 고통과의 사투에 가까운 <헤아려 본 슬픔>이 <끝에서 시작되다>에 인용된 것은 단지 그 내용의 유사함 때문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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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왕 vs 기타의 신

 

제게 슈베르트는 피아노 소나타 D.960과 미완성 교향곡으로 기억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슈만이 천상의 길이라고 했던, 마치 영원할 듯한 반복의 선율 말이죠. 특히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있노라면 새하얀 벽의 미로를 한참이나 걸어가는 듯합니다. 돌다 보면 아까 거기인 듯하고, 다시 먼 길을 떠났는데 문득 여기가 아까 거기가 아닌가 싶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하고, 이렇게 이 미로 속에서 영원히 헤메다 죽을지라도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천장 없이 트인 미로의 벽 위로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날씨는 화창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간지옥이 또 있을까요. 영원히 홀로- 그러나 결코 슬프다고만은 할 수 없는 애잔함이 가득합니다. 제게 슈베르트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긴 시간과 미묘한 반복이 안겨주는 담담한 절망. 낭만주의가 피워올린 소박한 모양의, 그래서 더욱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

그런데 "국내 최강의 아마추어 말러 전문가" 김문경 씨의 슈베르트 이야기 <천상의 방랑자>는 또 다른 그의 매력을 들추고 있습니다. 아참, 그는 가곡의 왕이었지! 가사와 악상이 착착 맞아 들어가고,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 변화무쌍한 분위기 전환을 꾀하죠. 고딕 호러 분위기의 섬짓한 노래는 물론, 로시니를 패러디한 유쾌한 노래도 있습니다. 저 유명한 가곡 '보리수'가 [겨울 나그네] 중에서 가장 역설적인 절망의 노래(자살 유혹에 대한 묘사라는)라는 흥미로운 이야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스토리와 함께 읽어가는 미뇽과 하프 켜는 할아범 연가곡도 슈베르트의 가곡에 대해 한층 친근함을 가져다 줍니다. 아마도 저자가 직접 번역했을 가사 번역도 상쾌하고 젊습니다. "그런거야? 그런거야?" 하고 친구에게 장난스럽게 따져묻는 자는.. 슈베르트가 아니라 포로리...네. 여튼.

더욱 좋은 점은, 음반으로 듣기 쉽지 않은 곡들까지 죄다 추려서 이 책의 보너스 CD로 제공된다는 사실입니다. 직접 곡을 들으며 읽어가는 책만큼 친절한 구성이 또 있겠어요? 왕비를 죽이고 그 자신도 영영 물가로 돌아오지 않는 '난장이'를 들으면 정말 저 멀리 사라져가는 난장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 슈베르트는 제가 알던 슈베르트가 아니었어요. 이건 마치 폴 매카트니와 리치 블랙모어의 퓨전... 진짜로요! ;;

'조사 보고서'에 가까운 김문경 씨의 대표작(?) 말러 3부작에 비하면 저자의 목소리가 많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농담은 별로 재미가 없어요(죄송). 그렇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약간 더듬더듬하는 저자의 유머가 꼭 슈베르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재밌긴 합니다(설마 이걸 노린건?!). 표지가 더 예뻤다면 평이 훨씬 좋지 않았을까요... 그게 좀 안타까워요. <난이도: 중하, 슈베르트가 왜 천재인지를 알고 싶은 분들, 클래식은 점잖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또는 가곡이나 클래식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확인하고 싶은 분들께>

 

<에릭 클랩튼>은 에릭 클랩튼의 자서전입니다. 네, 에릭 클랩튼이 직접 썼습니다. 영미권에서는 발간 당시 대단한 화제가 되었었죠. 우리나라로 치면 아마 서태지 자서전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어쨌든. 기타리스트가 직접 쓴 글이다보니 굉장한 말빨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가정사의 반전!)은 책 초반부에 나와 버리고, 이후는 평탄한(?) 연대기입니다. 이러저러하다보니 '에릭 클랩튼은 신이다'라는 문구가 런던에 나붙고, 비틀즈랑 재밌게 놀았고, 누가 자기를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났더니 지미 헨드릭스였고... 그런 대단한 이야기들을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듯이 써 놨어요. 그야말로 천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냥 기타를 치고 싶었을 뿐이고... 뭐 이렇습니다. 기타를 치고 블루스를 하고 싶었던 한 소년이 어느새 기타리스트 버전의 지구방위대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죠.

물론 영미권의 천재들을 놓아주지 않는 마약 이야기는 역시 꼭 끼어 있으며(이것도 어쩌다보니 헤어나올 수 없었다는), 수많은 비틀즈 팬들과 등을 돌리게끔 만든 조지 해리슨과의 마눌님 쟁탈전도(이것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만사가 새옹지마인데, 그래도 내 곁에는 기타가 남았다... 재능과 영혼을 동시에 쏟아버린 천재가 남길 말 치고는 상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 무덤덤함과 소박함이 오히려 와닿습니다. 그는 화려한 기타 플레이어는 아니었으니까요.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의 명성에 걸맞는 차분한 분위기가 참 어울립니다.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굉장한(제가 너무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윤병주 씨의 감수를 통해서 음악적 고증이 탄탄합니다. 매니아 분들도 마음 편히 즐기셔도 된답니다. <난이도: 중, 60년대부터의 황금기 Rock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경고: 난이도가 중급인 이유. 록 음악의 역사에 전혀 무지하다면 대체 뭔 소린가 하다가 책이 끝날 수 있습니다>

 

화려한 그림 이야기들

      

<그림이 그녀에게>는 미술 '에세이'입니다. 서른을 넘겨가는 여자-직장인의 이런저런 소회를 걸작 그림들에 엮어 풀어갑니다. 미술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동갑내기 이말삼초 여성분들의 마음을 두드리죠. 예쁘고 인상적인 그림들을 고른 솜씨가 좋고, 컬러도 잘 뽑힌 편입니다. 공부한다기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그림 견문도 넓힐 겸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우아해 보이는 문화담당 기자 생활이란 사실 물 아래에서 쉼없이 첨벙거리는 백조같은 삶이라는 것(뭐 도서MD도 그렇습니다), 결국 청춘을 슬슬 떠나보내는 나이에 이른 우리네 친구 중 한 명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난이도:하, 고급 타임킬링 책을 찾는 분들, 또는 이유없는 우울함에 시달리는 이말삼초의 여성 직장인들께>

<내 영혼의 그림 여행>은 좀 더 본격적인 에세이입니다. 사적인 이야기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겹쳐 있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미술(아기공룡 둘리도 나옵니다!) 이야기에 접어들면 질곡의 근현대사와 얽히고 설켜 때로 좌절하고 때로 절망하는 인간 군상들과 마주치게 되죠. 이 수많은 동서양의 그림들 속에서 저자가 찾아낸 것은 어떻게든 전진하려는 인간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무너지지 않게 꼭 붙잡는 여러가지의 사랑입니다. 정지원 시인의 글은 차분해서 좀처럼 솟아오르지 않고, 아마도 역사 이전부터 존재했을 쓰라린 그림자들을 조용히 쓰다듬고만 있습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절망적인 현실에 맞딱드린 젊은 혁명가와 [빨래하는 사람]에서 엄마 손을 꼭 잡은 예닐곱 살짜리 꼬마는 이 책 안에서 서로를 보듬고 조응합니다.

게다가 골라낸 그림도 인상적인데요, 민중 화가들의 그림들이 종종 섞여 있어서 독특한 반향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저도 신순남 화백의 [달은 우리의 푸른 조국 2]를 펼쳐놓고 한참을 바라봤네요. 글과 그림과 주제가 잘 엮여 들어간 아름다운 책입니다. 거창한 역사 이전의, 마음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이야기 그림책은 만나기가 참 어렵지요. <난이도:중하, 미술과 에세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에 대한 애호가들. 또는 아픈 역사와 고뇌하는 개인이란 무엇이었던가를 아직 기억하고 계시거나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예술MD 금주의 선택-

미술 에세이가 '머리에 쌓는 게 좀 모자라'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요걸로 하시죠. <색깔이 속삭이는 그림>입니다. 세계 명화들을 이용해서 풀어가는 색채론 전반이예요. 기본적인 색 이론에서 시작해서 색채심리학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교양 지식을 함께하실 수 있어요. 로트렉의 그림에서 노랑과 파랑의 색온도 비교를,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푸른 색 그림자의 신비를, 마케의 그림에서 녹색과 적색의 대비가 주는 긴장감을 함께 읽어갑니다. 각 챕터마다 색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다량의 지식 섭취가 가능한데요. 특히 좋은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쉽다는 겁니다. 근래 만난 미술 교양서 중에 대중들의 눈높이를 잘 맞춤과 동시에 성공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몇 안되는 사례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난이도:중하, 미술을 조~금 더 깊게 알고 싶은 분들, 에세이 말고 조~금 더 본격적인 미술 이야기를 접하고픈 분들께>

그리고, <서양미술거장전>입니다. 렘브란트 전으로 알려져 있죠. 사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딱 한 점에 에칭 십여 점 정도입니다만, 어쨌든 다른 그림들도 상당히 볼만한 게 많습니다. 이 책은 서양미술거장전의 도록인데요.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예습하면 나쁠 게 없다는 건 고대로부터의 진리죠. 가족, 연인, 친구들에게 1일 큐레이터가 되어 주세요. ^^ 아참, 이벤트 기간에는 이 책을 구입하시면 전시회 티켓이 1매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값 빼면 책값이...싸죠...;; <난이도:하, 미술관 갈 때 예습하면 더 좋다는 걸 깨달은 앞서가는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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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벌써 이렇게 써 버렸네요. 아직 책들은 남았는디.. 아쉽게도 차회 예고만 남겨두고 다음을 기약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네 전통 춤판의 뒷 이야기 <춤과 그들>, 초보를 위해 만화로까지 만들어진 DSLR 입문서 <디카툰>, 조선 후기 인물화와 카메라 옵스쿠라의 관계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한국과 이탈리아 비평가들이 반반씩 담긴 한국영화 감독론 <한국의 영화감독 7인을 말하다>가 이미 대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또 좋은 책들이 쏟아질 터이니... 네. 행복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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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서비스! 에필로그. <내 영혼의 그림 여행> 중에서.

둘리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버려지거나 쓸쓸한 처지이다. 둘리는 영희와 철수가 자신을 기쁘게 반겨주었듯이 도우너와 또치, 옆집 사는 가수 지망생 마이콜까지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인다. 혈족 중심의 가족이 아닌 열린 가족 관계의 형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둘리의 생각은 길동 씨와 마찰을 빚는다. 그러나 길동 씨 역시 이 불청객들을 통해 어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착한 본성으로 회귀한다. 이 집에서는 아기 희동이부터 어른 길동 씨까지 모두 평등하다. 심지어 도우너는 길동 씨를 애완동물이라고 부를 만큼 가부장적 권위가 통하지 않는 집이다....(중략)...고모집에 맡겨진 아기 희동이나 마이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들은 계속 행복한 어느 가정의 주변을 겉돌 뿐이다. 그 집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러나 둘리의 초능력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마법을 건다. 호이호이”는 고대부터 금기된 주문이다. “호이호이”를 외치면 위계질서는 사라지고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리는 이런 권위지향적인 사회를 부정하며 서로에게 따뜻한 고향이 되어주는 능력을 가르쳐 준다.          
- 본문 215~217쪽 중에서 (붉은 색 강조는 제가 그냥 넣은 겁니다)

호이호이!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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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글 2008-11-1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천상의 방랑자는 표지가 좀(...)


외국소설/예술MD 2008-11-1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게 좀(...)

안티크 2008-12-1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록은 언제나 방문기록의 증거물일뿐;
<이유없는 우울함에 시달리는 이말삼초의 여성 직장인들께> 추천의 글을 보고 그림이 그녀에게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와버리는군요; ^^

외국소설/예술MD 2008-12-1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직장인분들께 동지애와 더불어 힘내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저도 힘을 좀 받긴 해야겠구요. ㅎ
 

지난번에 이어 계속 가겠습니다. 근데 지난번에 다 하고 지나갔어야 할 분야 얘기도 좀 해요. ㅎ

히치콕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은 최근 그 세력권을 넓혀가고 있는 평론가 이상용의 영화 이야기입니다. 개별 영화에 대한 평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 미학에 대한 이론/비평서는 더더욱 아니죠. 그래서 짚고 넘어갈 필요를 강렬히 느꼈습니다 네.

목차를 볼까요. 거짓말, 웃음, 환상, 시간, 역사... 영화를 이야기할 때 필요한 요건들이죠. 영화에 사용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각각의 주제에 대해 이 책은 천천히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갑니다. 반가운 점은 이 책이 분명한 '대중' 교양서라는 점입니다. 영화의 주제와 메커니즘 모두를 다루면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쫓아가는 광범위한 이야기지만, 다행스럽게도 들뢰즈나 라깡, 보드리야르 등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해체이론도 없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몽타주 이론의 관계 등도 나오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영화의 구성물들을 평이한 문체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가는 책을 만난다는 건 드문 일이고, 그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에 대한 여러 책들이 나왔지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총체적으로 짚어보면서도 그 난이도를 대폭 낮췄다는 측면에서 환영할만한 책이네요. 총론이야말로 가장 추상적으로 빠지기 쉬운 세계잖아요. 비록 총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대신에 영화 에세이 모음집이라는 구심점 없는 구성이 되었다거나, 새로운 성찰이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거나, 쉽다고 소개했지만 여전히 좀 매니악한 영화들과 함께 '약간의'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긴 하지만, 이 책의 목적 혹은 성과에 비해서는 참 억지로 뽑아낸 정도의 단점(?)입니다. 모든 괜찮은 교양서들은 이런 운명을 타고나는가봐요. 위에서는 먹을 게 없다고, 아래에서는 먹기 힘들다고 말이죠. <난이도: 중하, 영화를 좀 더 알고 싶은 초심자 막무가내 영화 팬, 혹은 영화잡지에 질려 괜찮은 칼럼집을 찾아다니던 중급 이상의 영화팬들께>

p.s: 쉽고 친절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조금은 조심하셔야 됩니다. 정말로 영화 <카운터페이터>를 홀로코스트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으시죠? -_-;; 아, 하나 더. 이 책 속에는 소설 <장미의 이름>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여 몇몇 작품의 소소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괜히 후회하시지는 마세요...

 

-사진-

     

<청춘을 찍는 뉴요커>는 좀 특이합니다. 물론 이 책 역시 우리나라의 사진 에세이들의 고질적인 단점, 즉 글이 사진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죠. 원래 저는 거기까지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글 씀씀이의 부족함이 준수한 감각의 사진과 대비되는 느낌이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살아있는 패션사진가 지망생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더군요. 동시대의 소년소녀들과 별다를 바 없는 싸이월드 풍의 글을 써내는 그녀가, 뉴욕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유명한 사진가의 어시스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 발랄하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소녀가 뿜어내는 감각적인 사진의 언밸런스야말로 지금을 살아가는 소년소녀들에게 주어질 뜨거운 청량제가 아닌가 싶어요. 사진 퀄리티는 왠만한 아마추어들보다 확실히 위에 있으며, 필름의 흔적이 느껴지는 색감도 반갑습니다. 물론 뉴욕의 귀여운 소녀들을 보는 재미도 좋았습니다만...(흠) <난이도: 하, 패션/스냅사진 계열에 관심있는 분, 혹은 아직 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청소년들께>

<사진의 하루>는 바로 위에서 '아마추어들'이라고 폄하된(!) 46인의 블로거들의 사진을 모아 놓았습니다. 하나로 모을 수 없는 스타일이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어요. 다소 추상적인 텍스트나 들쑥날쑥한 사진의 완성도(이는 곧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괜찮은 사진들이 들어있다는 얘기기도 합니다)가 신경쓰이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사진에 관한 여러가지 힌트나 영감을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매우 잘 추려진 사례집으로 추천될 수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면, 아마추어 사진가 여러분, 한 번에 너무 멀리 가려고 하시면 안됩니다. 다른 분야의 아마추어에 비해 사진가들이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사진가 각각의 시각적/메타포적인 발전 역시 갑자기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글렌 굴드를 금방 따라하려 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는 없지만, 브레송을 금방 따라잡으려는 아마추어 사진가는 즐비합니다... <난이도: 하, 자신의 사진을 여러모로 비교하고 연구해보고 싶은 아마추어 사진가들께>

<시선 1980>은 현재 한국 사진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 구본창의 80년대 스냅 사진 모음입니다. 이 시절에 찍었던 사진으로 이미 작업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만('긴 오후의 미행'같은), 이번에는 미발표 사진들까지 이합집산해서 새로 나왔습니다. 이번에 선택된 사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요, 개발과 전통이 혼재된 80년대 한국의 아이러니한 풍경, 혹은 전통적인 사진미학에 비추어 '웰메이드된' 사진들입니다. 물론 둘 다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구요. 유럽에서 공부한 구본창의 스냅사진이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느낌을 풍기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입니다.

풍크툼(푼크툼)을 돌파하는 사진이라는 본문 해설의 격찬은 멋적은 감이 있지만, 확실히 사진을 공부했다는 느낌이 드는 잘 정리된 컷들이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사진으로 보면 영 평범해 보이지만, 사진집이라는 맥락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구요. 사진을 배우려 하는 분께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사실 동시대를 지내오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에서 80년대 한국의 푼크툼은 커녕 '스투디움'을 잡아내기조차 쉽지 않겠습니다(그런 면에서 로버트 프랭크는 '위대'합니다). 다만 하나의 주제를 사진을 통해 어떻게 소화하는가, 또한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하는가에 대해 배울 만한 선례로는 충분히 '유효'합니다. <난이도: 중상, 이제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고 느끼는 아마추어 사진가들께>

 

 -디자인 외..-

     

<디자인의 꼴>은 매우 쉬워요. 자동차, 라이터, 병 등 생활 속의 사물들의 변천사를 간단히 훑어가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살펴봅니다. 말하자면 스타벅스에서 읽기 좋은(..) 본격 고급 타임킬링 북 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골때리는 면도 있는데, 소개하는 사물들 중에 UFO도 나옵니다...... 좀 더 이쪽으로 파고들었으면 디자인의 인류학적 변용에 대한 흥미로운 논고가 될 수 있었을 듯해서 아쉽네요. 이 출판사의 차기작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외계인을 위한 지구 가이드 라고 합니다. 아니면 그 비슷한 거라고 하네요. 아참, 디자인하우스 출판사는 정상적인 곳입니다. 오해마시길. <난이도: 하, 고급 타임 킬링 책을 찾고 있는 분들, 혹은 디자인이 뭔가 싶어서 첫걸음을 내딛는 완전 초심자들께>

<최범석의 아이디어>는 보다 본격적으로 디자인 얘기에 나섭니다. 반쯤은 에세이 같은 느낌도 나는데, 책의 접근성을 높이려면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나 합니다. 발상과 그 발상의 현실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기에도 적당한 방식이고요. 디자이너로서의 태도와 직업적 환경에 대한 조언을 무난하게 풀어갑니다. 재미있는 발상의 디자인 컷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실용서와 디자인 철학에 대한 이론서가 양분한 가운데, 잘 짜여진 '디자이너의 인생' 이야기가 나와 반갑습니다. <난이도 하, 디자인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분들, 특히 지망생들께>

<음악 듣기와 쓰기>국내 최초의 청음-채보 전문서적이라는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전공자는 당연히 귀가 솔깃하실텐데, 음악을 그냥 좋아하는 분들도 관심을 가져 주세요. 특히 푸가나 대위법을 사용하는 클래식 음악은 악보를 이해하고 각 주제의 진행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굉장한 업그레이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물론 재즈나 락도 마찬가지죠. 코드 진행의 마술을 이해하는 순간 음악의 '완성도'가 눈에 들어오게 되니까요. 굳이 이론적으로 달려들지 않더라도 청음 자체가 가져다주는 '이해'의 즐거움은 대단합니다. 물론 어렵고, 저같은 단순한 팬에게는 구만리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도전해 볼 요량입니다. 여러분도 도전해 보세요. <난이도: 상(실제로 익히기가 쉽지 않음),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일단 추천합니다>

<그림책은 재미있다>는 그림책 작법입니다. 그림 연출이 이야기 진행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교육서죠. 캐릭터의 성격 묘사와 스토리의 진행을 표현하는 데 있어 글과 그림이 어느 정도에서 역할을 나누고 분담을 해야 할지에 대해 원론적인 수준의 조언들이 가득합니다. 원론적인 조언이라는 것에 대해 실망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국산이든 외산이든 간에 이 원론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운 책들이 양산되는 걸 보고 있으면(저도 한때 유아MD..) 이런 책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짧고, 쉽고, 중요한 조언들입니다. <난이도: 하, 그림책 작가 지망생 전원, 그리고 보다 좋은 그림책을 골라보고픈 부모님들께>

 

마무리는 신명나게 가죠. ^^ 출간 종수로 따지면, 드물다고 하면 제일 드문, 풍물굿의 미학입니다. 어줍잖게 풍물을 만졌던 저로써는 반갑기 그지없었는데요, 책 내용도 맛깔납니다. 요즘 대세인 클래식풍으로 말하자면 '콘체르트마스터'인 상쇠 이야기죠. 상쇠가 풍물굿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전통을 쫓아가는 내용까지는 뭐 그러려니 싶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풍물이 이 세계의 긍정을 반영하는 신명나는 굿판이며, 우리네 전통이 가졌던 미덕을 죄다 함유하고 있는 표현예술이라는 점에 다다르면 뿌듯해지기도 하고요. 잠시 잊고 지냈던 풍물의 뜻을 되새기니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풍물이란,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 갑자기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평화와 번영과 공존과 신명과 노동의 즐거움을 한데 집약한 예술에 대해, 열렬히 그리고 열심히 써내린 글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복합니다.

그럼 또 다음에 언제 뵙겠습니다. 좋은 책으로 인해 조금 더 행복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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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08-11-1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주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예술분야 책들이 원래 재밌기도 하고 감칠맛나는 글쓰기가 쏙쏙 들어와 더욱 좋네요.
예술책들이 재밌어보이지만 깊이가 없는 경우도 있고 보기보다 난해하여 접하기 힘든 경우도 있는데 이곳에만 오면 소개된 책을 사고 싶은 유혹을 느끼다가 가곤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서평 부탁드리겠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8-11-11 17:59   좋아요 0 | URL
유혹에 저항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면 제가 좀 더 강렬한 유혹을..음.

어쨌거나 오늘은 리플이 두 개나 달린 경사스런 날이네요. 오늘 많이 감동했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카방글 2008-11-15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히치콕은 얼굴이 심술궃은 노인네같이 보이네.
구본창의 스냅 사진 재밌겠네

외국소설/예술MD 2008-11-17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치콕은 심술쟁이가 맞습니다. 구본창은 보기에 괜춘합니다.
 

말도 안되는 가을입니다. 언제 오나 싶었는데 갑자기 가버렸어요. 원망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 기다리던 가을 대신에 예술을 사랑하는 책들을 넣어 봅니다. 눈에 띄는 11월 첫째 주의 예술 신간들을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분야별로 한 번.

 

-미술-

     

-<보기 배우기>는 출간된 지 50여년이 흘렀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내용이 사뭇 도발적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 결국은 어떤 스타일을 얼마나 잘 소화해냈느냐만이 관건이다.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담으려 한 주제부터 그 디테일의 표현에 있어서까지의 조형적인 완성도를(어쩌면 단지 그것만을) 필요로 한다. 그 모든 면이 완벽한 작품을 걸작이라 칭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다른 어떤 부가적인(이 경우 역사적인 경우가 많다) 요소가 추가된다고 해도 절대 위대한 작품이라 부를 수 없다.

이 원칙에 따라 수많은 작가들의 유명 작품이 도마 위에 오릅니다. 보티첼리의 수태고지는 거의 위대한 작품이지만 통일성을 저해하는 풍경 묘사 때문에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라파엘로의 유작은 제자들이 뒤이어 겨우 완성한 '거의 졸작'입니다. 저자인 마랑고니는 그 어떤 외부적 요인이나 역사적 중요도에 흔들리지 않고 작품 자체의 시각적 완성도만으로 미술사에 남은 작품들을 재평가합니다. 특히 그림의 주제나 의도까지 조형적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보는 그 기준이 논쟁적일 수 있겠네요. 국내 소개된 비 전문 미술서 중에서는 극히 드물게 정면 승부를 걸어오고 있기 때문에 읽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ㅎㅎ

1권에서는 미술 스타일의 척도가 될 수 있는 여러가지 요건 및 비평과 작품의 관계를 다루며, 2권에서는 미술사를 연대순이 아니라 각각의 주제(인물, 종교, 풍경, 역사...)에 따라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특히 2권의 전투(?)는 치열합니다. 대체 누가 카라바조의 아성에 도전할 것인가라던가...등등.

최초의 입문서로 삼기에는 쉽지 않으며, 원서가 2도 인쇄였던 관계로 흑백 그림도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이탈리아 쪽 화가들이 유달리 많은 것도 혹시 맘에 안드실 수 있겠네요.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즐겁습니다. 연대기적인 소개 혹은 에피소드 발굴에 그친 기존 교양 미술사의 대안의 몫을 충분히 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난이도 중상, 천편일률적인 교양을 넘어 자신만의 눈을 갖고 싶은 분들께-

-<아트 오브 페인팅>은 저 유명한 라루스로부터 날아왔습니다. 이 책의 목표는 어떤 그림을 마주쳤을 때 보다 잘 만들어진 그림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을 배워보자입니다. 이 책도 상당히 흥미로운 게, 회화 작법에 관한 거의 모든 범주를 한 권에 쓸어담아 놨습니다. 그림에 서명이나 제목을 하게 된 역사, 색채법, 원근법, 빛을 처리하는 법, 형태를 묘사하는 방법, 마지막으로 각 사조별 종합 특징 분석까지 가득하죠. 보통의 입문서들이 담고 있는 이론/사조적 접근뿐만 아니라 실제로 회화의 작법 과정까지 해설함으로써 보다 넓은 범위의 이해가 가능합니다. 짧은 챕터에 많은 내용을 실어야 하기 때문에 종종 전문용어가 사용되었고, 내용이 다소 압축적인 면이 느껴지지만, 다루는 범위로 보나 명확한 분류 시스템으로 보나 이 역시 만나기 힘든 기회임에 틀림없습니다.  -난이도 중상, 회화 감상에 있어 다채로운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분들, 혹은 그 지식을 정리하고 싶으신 분들께-

 

 

-영화/클래식-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실전 시나리오 작법에 써먹기 좋게 재해석한 책입니다. 상당히 솔깃한 컨셉이죠. 실제로 <시학>을 읽어보신 분은 경험하셨겠죠. 쉽게 읽기에는 무리가 따름에도 불구하고 종종 던져지는 성찰에 깜짝 놀라게 되는걸요. 그렇다면 그 책을 더 쉽게 풀어서, 그리스 비극이 아닌 현대 영화들을 통해 풀이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실제로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적용 사례도 유명한 영화들이라 이해도 빠르구요. <시학>이 워낙 뛰어난 책이다보니 이미 다른 시나리오 책들에서 강조한 부분들도 있습니다만, 이 책처럼 본격적으로 그 전체적인 내용을 담아내려 한 적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 책이 <시학>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기대하는 것이 설마 <시학>의 완전한 변용은 아니겠지요? 부담없이 읽으시고, 가슴에 하나 이상을 담아두시면 되겠습니다. 혹시 <시학>을 읽고 싶게 된다면, 그게 최고의 성과일지도 모르겠네요. -난이도 중하, 고전 기피증에 안타까워하고 있는 창작 지망생 및 영화 팬들께-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는 의외로(?) 재밌습니다. 평범한 연대기적 구성, 게다가 교향곡의 역사라기에는 (비록 그 중요성을 감안하더라도) 독일-오스트리아 계열에 지나치게 치중된 감이 없잖아 있었거든요. 목차를 보고 있을 때는 과연 괜찮을까 싶었는데, 술술 잘 읽혔습니다. 각종 강연회나 칼럼 등을 통해 다져놓은 저자의 내공이 느껴집니다. 일단 책이 상당히 쉽고, 특별히 어려운 이론적 난관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향곡과 유럽 사회간의 상호관계를 적절히 짚어갑니다. 교향곡이야말로 예술 작품 중에서 당대의 시대적 조류와 가장 크게 교감한 장르였다고 볼 때, 최은규 씨의 선택은 좋았다고 보이네요.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게 빨리 읽히며, 그러면서도 중요한 포인트는 최대한 잡아 놓는다... 어쩌면 이걸로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단, 매니아 분들은 심심하실 수 있습니다. 김문경 씨의 말러 시리즈를 아무 무리 없이 읽는 분들이시라면요. -난이도 중하, 즐겁게 읽으면서 충분한 지식 섭렵을 겸하고자 하는 클래식 팬들께-

 <올 댓 클래식>은 그야말로 클래식에 흥미를 동하기 시작한 분들께 드리는 추천입니다. 친절한 풀이와 해설로 이름나 있는 이동활 씨가 썼습니다. 재밌는 점은 모든 챕터가 경탄조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마치 한 세대 이전의 글들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책의 분위기와 얼추 어울리기도 하거니와, 존대로 쓰여진 본문이라든가, 직접적인 전문용어 대신에 에둘러 풀어가는 묘사를 택했다는 점 등, 마치 친절한 아저씨처럼 느껴지는 묘한 강점(!)을 만들어 냅니다. 결국, 여러모로 초보자를 위한 배려가 특이한 연출 위에서 빛을 발한다고 할까요. 이 책 역시 고수 분들께는 약간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면밀하고 상세한 분석과는 또다른 맛을 간만에 느끼고 싶으신 분께는 권해 드립니다. 저 초보 시절, 오로지 비유만으로 감동을 설명할 수 있던 시절의 벅차오름 말이죠. ㅎㅎ -난이도 하, 친절하고 재미있는 클래식 명곡 이야기를 찾는 분들, 혹은 초심으로 돌아가고픈 위기의 클래식 매니아들께-

 

-오늘은 여기까지! 사진, 디자인, 건축, 음악(안-클래식) 등등은 다음 주에 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번 글을 보며 느낀 바가 과유불급이었던지라.. 하여, 오늘 평안히 보내시고 좋은 책 고르시기 바랍니다. 그럼 좀 더 행복해지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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