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yo의 버킷 리스트에는 어제까지 7개의 항목이 들어 있었는데, 오늘 하나를 추가하였다. 겨우 7개 만드는 데 10년이 더 걸릴 정도로 원체 일을 벌리는 것을 꺼리는 성격이라, 하나가 더 등재되는 것은 기록에 남겨도 될 만한 일이다.




2


원래 버킷 리스트라는 게 좀 그런 면이 있지만, syo의 것은 다소 충동적으로 만들어진다. 룸메이트 하나 끼고 자취하던 시절, 내 책상 위에는 그야말로 버킷이 하나 있었는데, 동전을 던져넣는 곳이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짤랑짤랑 동전 소리 내면서 다니는 거 아니라는 선친의 호랑말코 같은 교육의 효과였을까, syo는 100원짜리 물건을 사도 1000원을 내고 잔돈으로 돌아오는 900원은 버킷에 던져 놓는 반자본주의적인 소비 행태를 고수했다. 그러나 어쩐지 동전이 모이는 속도가 예상보다 더뎠고, syo는 그 동전들이 하이에나 같은 룸메이트의 밥이 되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하이에나-룸메이트가 동전을 한 움큼 집어나가려다 마침내 현행범으로 적발되었다. syo는 분개하여, 저 프로필 사진과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그 하이에나-절도범-룸메이트에게 콩밥 먹기 싫으면 그간 야금야금 해쳐먹은 액수에 시중금리를 붙인 다음, 죄다 동전으로 바꿔 버킷에 집어 넣으라고 권고하였다. 변태 같은 놈아, 그냥 액수만 맞춰 주면 되지 왜 꼭 동전으로 가져 오라는 것이냐, 따져 묻는 하이에나-절도범-그러나콩밥사절-적반하장-룸메이트에게 syo가 대답했다. 동전 모아서 테헤란로에 빌딩 올릴 거다, 이 잡놈아. 


버킷 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3


가을이 왔다. 가을은 단풍의 계절, 붉은 계절이다. syo는 사상도 빨갛고, 프사의 얼굴도 빨갛고, 서재 이름도 흰 글씨에 빨간 바탕이고, 어딜 가나 맑덕(마르크스 덕후)을 자처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어제는 세 종류의 마르크스 평전을 페이퍼에 올렸는데, 세 권 다 표지가 아주 단풍마냥 빨갛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서재 친구분들이 꽤 계셨고, 그 중 한분과 댓글로 대화하는 중에 syo 왈, 가을은 빨간 단풍 마르크스의 계절, <내장산 마르크스 축제>가 없어서 아쉽다. 그러자 그 분 대답하시길, <내장산 마르크스 축제>라니, 그야말로 망삘이다. 뭐라고! 망삘이란 말입니까? 정말요?


그렇게 버킷 리스트 여덟 번째 항목이 탄생하였습니다. <내장산 마르크스 축제> 개최.




4


syo는 포기를 모른다. 버킷 리스트는 추가가 느려서 그렇지, 한 번 올라가면 결코 그냥 슬쩍 내려오지는 않는다. syo가 하고자 마음 먹은 것들 중, 하지 못한 것은 없다. 그저 "아직" 하지 못한 것만 수두룩할 뿐. 뭐, 저거 죽기 전까지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죽기 전에 다 할 거예요. 동전 모아서 테헤란 로에 빌딩도 올리고, 유시민 선생님이랑 건대 시민호프 가서 헌팅도 할 거고, 애기 멍멍이 300마리 데리고 풀밭에서 개처럼 뒹굴고 뛰어 놀기도 다 할 거라구요. 급할 거 없잖아요, 당장 내일 죽을 것도 아니고.


그러나 아무리 syo가 정신나간 놈이지만, 솔직히 1번은 어렵겠다 싶다. 최경환이 말아먹기 전이었다지만, 정말 철이 없었다. 사실 어느 땅값 싼 시골 나대지에 2층짜리 가건물 하나 올리고, 집 앞 공로에 '테헤란 로'라고 나무 팻말 하나 박아 놓는 얍삽이를 생각 중이다......


 


5

 

연휴라, 도서관이 주욱 쉰다. syo도 주우욱 쉰다. 명절 당일 친척집 방문 이외에 스케쥴이 전혀 없다. 놀면 뭐하겠노, 책이나 봐야지. 하여 연휴 독서 목록을 만들어 어거지로 스무 권을 꽉꽉 채워 빌려왔다. 내가 가진 책도 몇 권 넣었다. 연휴 동안 다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지만, 솔직히 절반만 읽어도 대박, 반의 반만 읽어도 선방이겠다. 저 두께 좀 보소.






<마르크스 일당>



1. 마르크스 평전 / 자크 아탈리

2.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켈리니코스

3. 자본과 노동 / 요한 모스트 외

4. 자본론 함께 읽기 / 박승호

5.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 류동민

6.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 이진경

7. 생각하는 마르크스 / 백승욱

8. 자본을 넘어선 자본 / 이진경

9. 칼 마르크스 전기 2 /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10. 아미엥에서의 주장 / 루이 알튀세르

11.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 루크 페레터




<정신분석 패밀리>



12. 강영계 교수의 프로이트 정신분서학 이야기 / 강영계

13. 프로이트 패러다임 / 맹정현

14. 자크 라캉의 <세미나> 읽기 / 강응섭

15. 라캉으로 시 읽기 / 이승훈

16. 리비돌로지 / 맹정현

17. 라캉의 인간학 / 백상현




< 그리고 그 외>



18. 난생 처음 경제 공부 / 박유연

19. 물욕 없는 세계 / 스가쓰케 마사노부

20. 히로시마 내 사랑 / 마르그리트 뒤라스

21. 일요일의 인문학 / 장석주

2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 / 미카미 엔

23. 법 앞에서 / 프란츠 카프카



이게 될까? syo가 다독은 다독이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호기롭다, 호기로워. 질러 놓고 나중에 무슨 쪽을 얼마나 팔려고...... 오늘부터 식음을 전폐하고(말이 그렇다는 거지, 먹는다, 돼지처럼) 독서에 들어갑니다. 우리, 연휴 끝나고 살아서 만나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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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09-29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언젠가 <내장산 마르크스 축제>가 생기면 저도 거기에 일조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군요. 망삘인지 아닌지 꼭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ㅋ
그런데 읽기에 ˝울˝증이 왔다던 분 어디 가셨나요? 지난번 울증 호소가 진정이었음을 전제로, 이번 연휴에 syo님이 제일 먼저 집어들 책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일 것이라는 데 100원 걸겠습니다.

syo 2017-09-29 20:23   좋아요 1 | URL
대박, 정확히 1분전에 그 책을 다 읽고 읽은 책으로 등록하려 북플에 접속했는데.....

작두 타셔도 되겠어요. 이렇게 정확한 예측력을 보여주시니 마음이 더욱 무겁네요. 독서괭님 예측대로 <내장산 마르크스 축제>는 망삘이란 말인가......

syo 2017-09-29 20:35   좋아요 0 | URL
아이고 도사님, syo가 다음에는 저중에 뭘 읽어야 연휴의 독서가 순풍순풍 잘 풀리겠습니까요....

독서괭 2017-09-29 20:46   좋아요 0 | URL
어흠 어디보자 어디보자아... 다음 책은...
예끼 요놈! 도에 기대어 독서를 하려 하다니 혼이 나야겠구나. 제일 두꺼워 보이는 <마르크스 평전>부터 읽거라!
(반말 드립 죄송합니다...)
꼭 다 읽으시고 페이퍼 쓰시는 겁니다 화이팅!!

syo 2017-09-29 20:49   좋아요 0 | URL
아이고 도사님, 그러므닙쇼, 시키는 대로 하게씁니다요. 굽신굽신. (두 손을 비비며 눈치를 슬쩍 보다가 복채를 안 내고 튄다)

독서괭 2017-09-29 21:05   좋아요 1 | URL
전국의 도서관에 수배령을 내린다... 어쩌고 저쩌고 썼다가 이러다 끝이 없을 것 같아 지웠습니다. 북플에서 농담따먹기를 하게 될 줄이야 ㅋㅋ
마르크스와 함께 긴긴 밤 즐겁게 보내세요!^^

다락방 2017-09-29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 책들 목록 엄청 근사하네요! 멋져!! 아무쪼록 다 읽으시기를요. 그리고 읽을때마다 페이퍼 써주기예요!!! >.<

syo 2017-09-29 20:24   좋아요 0 | URL
읽는 것도 큰 일인데요..... 벌써 호기롭게 벌려놓은 거 조금 후회중....ㅠ

sprenown 2017-09-2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스와 프로이트는 이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보나 혁신의 아이콘이지요! 결국은 인정 욕구인거 같아요..북풀 누르면서,,몇명이나좋아요! 했는지, 댓글은 얼마나 달렸는지..조금 잘난척 하자면.. 헤겔의 인정 욕구.. 애정 결핍일지도 모르죠. 글 좋아요! 그러니까, 그럼에도 중독되는 거...이게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떠나서 본능인 거겠지죠... 잘 나가는 장강명도 그럴테고.금정연도 마찬가지고.. 가만 보자, 내일 부터 10일 휴가를 어디를 갈까.. 제르미날 2를 들고 싸이판이나 다낭을 갈까? 고민되는 인간들도 있고.. 알바와 월급쟁이들,임금 노동자의 눈물. 그것이 악어의 눈물일까? 먹고 산다는게 참, 슬픈 일이구나! 결국은, 모두들 죽음은 두렵구나.산다는 거 천상병 시인의 말 처럼 소풍! 이구나.

syo 2017-09-29 20:34   좋아요 0 | URL
말씀 들으니 반드시 <내장산 마르크스 축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건해집니다. 장난 아니라 진짜요 ㅎ

sprenown 2017-09-2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세요...조금은 흥분을 가라 않으시고.. 과연 될까요? 이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서? 하면은 저도 깨갱 깨갱.. 성공하기는 힘들거예요. 인간이 얼마나 영악하지..통일 반대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 아직 모르시고 그런 말씀하시지는 않겠죠?

syo 2017-09-29 21:05   좋아요 0 | URL
통일하고 마르크스가 관련이 있거나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요.....;; 그냥 축젠데요, 마르크스 부흥회나 제사 이런게 아니라 ㅎㅎㅎ

sprenown 2017-09-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재충전 하세요! 책보다는 여행이나 아름다운 우리 강산 둘러보시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을 듯 싶네요... 막스나 자본의 유령에서 벗어나서.. 잘 주무시길!

syo 2017-09-29 21:08   좋아요 0 | URL
sprenown님도 좋은 추석 보내세요!! 그 유령들은 제가 잘 타일러서 명절 잘 보내고 오라고 하겠습니다 ㅎ

sprenown 2017-09-29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강퇴 되지 않는 한, 여기 알라딘에서 독서 일기 쓸거예요...누가 보든 말든.여기에서 끝내 겠습니다. 노원역 까지 가야 하거든요 집에 인터넷이 안되고 컴퓨터도 없어요..나중에 뵙겠습니다.. 실물이든지 여기 알라딘에서든지.먹고 사는 게 차~암 힘드네요!

sprenown 2017-09-29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선물로 감 한 박스 보내드리고 싶은데,,물컹한 걸 루! 밝으시레한 놈으로

syo 2017-09-29 21:15   좋아요 0 | URL
아직 그걸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게 더 감사하네요 ㅎㅎ

올해는 벌써 감 이래저래 실컷 먹는 중입니다^^

sprenown 2017-09-30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노원정보도서관입니다. 집에서 한 20분 걸어오면 도서관이 있다는게,게다가 디지털 룸에서 공짜로 인터넷을 할수 있다는게 얼마나 고마운지... 사실 감 얘기는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해마다 특별한 인연이 있던 분에게서 진영단감을 1박스씩 받고 좋아 하셨던 추억이 있어서예요..조울증 치료도 할겸 단풍든 내장산에서 마르크스 축제 신나게 즐기고 오세요. 제가 의사는 아니어서 프로작을 처방해 드릴수는 없고... 적당한 운동과 여행이 좋을 듯 싶네요.. 저도 노안이 와서, 책 읽을때는 무척 피곤하더라고요. 맑고,푸른 하늘, 바람.. 참 좋은 날입니다. 저는 마르크스 축제보다 무정부주의자 축제, 아나키즘에 더 관심이 있긴 합니다... 내일도 노원정보도서관 오게 되면 글 올릴지 어떨지...
 


1


일기 쓰기의 정신병자, syo의 울증 기간이 도래한 것 같다. 작게는 보름 거리, 크게는 한 계절 거리의 파장을 그리면서 조와 울을 반복하는 의욕이 이번에는 더위와 함께 시원하게 물러간 듯하다. 한 번 다운되면 한두 달씩 한 줄도 안쓰고 그저 산소를 소비하면서 비루한 목숨만 연명하곤 한다. 아무것도 아닌 글이지만 꼬박꼬박 써 보려 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글이라서 쓰기가 싫어진다. 써서 올려 놓은 것들도 다시 읽어보면 한 줄에 한 군데 꼴로 뜯어 고치고 싶다. 뭐야, 이 멍청한 놈은, 이런 땅거지 양말 같은 문장을 써서 올려놨네? 저, 저, 그래놓고 의기양양한 것 좀 보소...... 와, 내는 안 볼란다......




2


읽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문제다. 희한하게 이런 때일수록 눈은 더 밝아지는 거라, 그냥 못 보고 지나쳐도 됐을 작은 문장들까지도 하나하나 속속들이 발견하여 어찌나 아름답고 뜻 깊고 탐나고 소중한지 감탄에 찬탄을 얹어가며 읽다보면 문득, 저기 저 알라딘 세상 속 슬럼가 어느 후미진 골목에는 syo의 서재라는 곳이 있고, 얼굴이 붉고 거대한 분노의 포도알갱이와, 그 포도알갱이가 어둠 속에서 제조하는 밀주 같은 값싼 글들이 선량한 알라디너들의 정신 세계를 더럽히고 혼탁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그야말로 저 프로필 사진과 똑같은 얼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독서에는 평정심이 조금은 필요하고, 저런 얼굴로는 시위에 참가하거나 홍준표 기사에 소소하게 진심을 담은 악플은 달 수 있어도, 도저히 차분하게 책을 읽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책도, 책 머리의 먼지도 쌓여만 가고......


결국 syo의 독서라는 게 다 한철 장사라, 울증의 정점이 마음에 도착하면, 막 한 달에 세 권 띡 읽는데 그 중에 한 권은 명탐정 코난 신간인, 독서인으로서는 실형을 선고받아 마땅한 아주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먹는 게 없으니 싸는 것도 없는 거지. 없는 와중에 그래도 좀 있는 것들의 면면은, 아, 이건 정말 쓴 게 아니라 싼 거다, 싶은 글들 뿐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두려운 일이 벌어진다. 최소한 syo에겐, 북한이 보유한 핵이 터지는 것보다 syo가 보유한 중2병이 터지는 것이 몇 배는 무시무시하다. 바로 상상만 해도 손발이 소멸되는 무서운 폭탄, 이제는 나의 존재조차 잊고 행복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향해, 그 사람들이 읽고 눈물을 흘릴 일은 없고 그저 알라디너들이 읽고 배꼽을 흘릴 일만 있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광대역 공용 와이파이 버전의 '자니?' 드립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다! 알코올은 냄새도 안 맡았는데! 으아아아!!.....




3


그러니까, 이 모든 묵시록적 결말을 막아내려면, 뭐라도 써야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런 글이라도, 혹시 발로 쓴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뭐라도 써야 된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지금 필요한 건 기세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지금 '자니?'의 "ㅈ"까지 나온 상태다. 하자. 쓰자. 몸부림이라도 치자.






내가 충분히 깊게 나아가지 않은 것, 그것이 문제다. 고독 속에서도 우리는 파고들어야 하고 견뎌야 한다. 냉정한 시작이야말로 최악이다. 그 모든 것을 지나가야 한다. 비통함을 뚫고, 정당한 감정을 뚫고 줄곧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스러운 도시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향해 가야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게 불러오려고, 그것이 나타나게 하려고 애쓴다. 나는 그것이 거기 있다고 확신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오지 않는다. 당연히 쉽지 않다. 흔들려야 한다. 몸부림쳐야 한다.

_제임스 설터,『스포츠와 여가』



언제나 가까운 데서 찾고, / 다른 데서 가져오려 하지 마세요. / 무엇보다 자기에게 절실해야 해요. / 쓰고 나서 많이 아파야 해요.

_이성복,『불화하는 말들』



너는 속속들이 작가인가. 말하자면 너의 모든 점에서 너 자체가 살아 있고 역동적인 글쓰기인가? 작가에게 던져진 이러한 물음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그것은 즉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거나 그의 장례식에서 바보 같은 찬사를 보내는 격이 될 것이다.

_모리스 블랑쇼,『카오스의 글쓰기』



믿음과 행위는 하나다. 만일 행위가 스스로 믿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거짓이다. 즉 그 믿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신이 인정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론과 실천은 하나이거나 아니면 하나이어야만 한다.

_이사야 벌린,『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고독 속에서 읽고 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도우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책의 힘, 그리고 책에 담긴 타인의 힘을 빌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뭔가에, 누군가에 의지해서 애쓰고, 어렵게 알아내고, 그리고 그 가치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 사람만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관대하고 타인에게도 잘 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_정혜윤,『삶을 바꾸는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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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27 22: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syo님 너무 열심히 독서를 하셔서 피곤을 느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책을 불태우고 싶을정도로 읽기 싫을 땐 책을 덮고 잠시 꽃만 바라봐도 책 읽는 것보다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syo 2017-09-27 22:45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님 말씀이니까, 믿고 한 번 멍하니 있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하면서요. 감사합니다 ㅎㅎ

서니데이 2017-09-27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쓰기의****이라고 하셨으니 매일 쓰셔야 합니다. ^^ 일기는 매일 쓰지 않으면 주기와 월기와 연기가 됩니다. ^^
하지만 그렇더라도. 연기도 좋고 월기나 주기도 좋으니 쓰고 싶을 때 써주세요. ^^
늘 재미있게 또는 기분좋게, 때로는 여러가지 생각하면서 읽고 갑니다.
syo님 좋은밤되세요.^^

syo 2017-09-27 23:07   좋아요 1 | URL
매일 꾸준히 쓰시는 서니데이님은 정말 대단하신 거예요. 게다가 기복도 안 느껴질만큼 안정적인 글..... 저는 그런 게 안 되더라구요. 맨날 빡쳐 있고ㅜ

서니데이님도 좋은 밤 되세요.

서니데이 2017-09-27 22:52   좋아요 1 | URL
저는 잡담을 쓰니까 그렇고, syo님은 책읽은 느낌을 잘 전해주시잖아요. syo님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그러니 마음편하게 쓰셔도 좋을거예요.
네. 고맙습니다. 좋은밤되세요.^^

秀映 2017-09-2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문을 글을 잘 어떻게 하면 쓸수있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syo 2017-09-27 22:50   좋아요 0 | URL
정말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법을 알게 되시면 꼭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2017-09-28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웃겨서 댓글을 안달 수가 없군요.^^^^
그래도 읽으시니 됐습니다.

syo 2017-09-28 07:41   좋아요 0 | URL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만 쑥님의 응원(?)에 힘 입어 힘껏 정상인 척 버텨보겠습니다 ㅎㅎㅎ

독서괭 2017-09-28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럼프를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syo님의 읽기에는 슬럼프가 왔어도 쓰기에는 아직 안 온 듯. 약간 취해서 쓰신 듯한 느낌도 괜찮은걸요 ㅋ

syo 2017-09-28 16:28   좋아요 0 | URL
안 취했는데!! 일기에서 술냄새 나요?? ㅎㅎㅎ

독서괭 2017-09-28 16:52   좋아요 0 | URL
˝자니?˝의 ㅈ에 취하신 거 아니었나요?ㅎㅎㅎ

syo 2017-09-28 17:48   좋아요 0 | URL
콜라 마시고 쓴 건데..... 제로콜라....

이하라 2017-09-28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증일 때 눈이 더 밝아지신다니 울증도 부러움을 사실만하네요 저는 글솜씨가 없는데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고나면 그저 읽었다는 표시를 해두려고 리뷰를 남기는 거라 남다르게 잘쓰시는 분들을 보면 부러울뿐입니다^^

syo 2017-09-28 20:05   좋아요 2 | URL
글솜씨가 없다는 그런 거짓말을 하시다니.... 이하라님이 읽고 올리시는 책이 제 관심사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눈으로만 읽고 댓글은 달지 않고 있지만, 글솜씨 없다는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이하라 2017-09-28 20: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란 말씀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는 칭찬이시네요^^

공쟝쟝 2021-01-22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쇼.... 역시 끌리는 거라... 근데 이미 읽은 쇼님 참 대단하고, 이 와중에 중2병 구 쇼님 발굴해서 기뻐 손뼉👏

syo 2021-01-24 21:35   좋아요 0 | URL
이때 더 잘썼네....ㅋㅋㅋㅋㅋㅋ syo, 퇴보의 아이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1


그리스는 최초로 민주주의를 발명했다. 시민들이 직접 광장에 나와 의견을 내놓고 조율하여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 이 위대한 체제를 벌써 몇 천년 전에 그들이 고안해냈다. 비록 그 '시민'은 일정 연령 이상의 남성으로, 여성이나 노예는 '시민'안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1776년 미국은 독립과 동시에 스스로 위대한 나라임을 뽐내기에 충분한 진리를 독립국의 이념으로 선언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양도할 수 없는 몇몇 권리들을 부여하였으며....."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최초의 국가였다. 비록 흑인은 그 '사람' 안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평가해야 한다.


1848년 2월, 프랑스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켜 기어코 선거권을 쟁취해냈다. 신분과 경제력에 관계 없이 누구나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선거'가 시민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비록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보통'의 범주 밖이라고 생각되어졌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 시대의 피치못할 사정 때문에 위대한 혁명의 결과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한계가 있었다"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들이 "한계가 있었으나", "한계에도 불구하고"로 서술되는 수없이 많은 예들, 그것은 어쩌면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모양새 뒤로 주관적 관점이나 기득권을 가리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2




 "이제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놈들이 널 죽여도 내가 모를 텐데. 놈들이 널 해칠 수도 있는데.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톰이 불편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 케이시 말처럼,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잇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 톰?"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죠. 저는 어둠 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케이시 말이 옳다면, 사람들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러댈 때도 제가 있을 테고, 배고픈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릴 때도 제가 있을 거예요. 우리 식구들이 스스로 가꾼 음식을 먹고 스스로 지은 집에서 살 때도, 저는 거기 있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_존 스타인벡,『분노의 포도 2』


절망에 빠져 있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민중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 스타인벡은 그 민중 가운데에서 두 명을 뽑아 각각 임무를 맡긴다. 톰은 광야의 시련을 겪고 돌아온 예수처럼, 어두운 동굴에서 혼자 긴 시간을 고뇌한 끝에, 민중 속에 스며드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깨닫는다. 그는 영혼의 투쟁을 맡았다. 그는 이제 동굴에서 나와 사람들 사이를 걸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되고, 생각이 되고, 믿음이 되고, 이념이 될 것이다. 배고픈 사람, 얻어맞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들은 모두 톰을 가지게 될 것이다. 톰으로 하나가 될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주인공, 톰의 여동생 로저샨 또한 같은 임무를 받는다. 사람과 사람을 엮는 다리,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의 고난과 배고픔을 나누며 그 속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 로저샨의 임무는 결국 '톰'의 임무와 같다. 그러나 방식이 다르다. 로저샨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스타인벡은 그녀에게 가혹한 선택을 강요한다. 헛간에서 죽어가는 노인에게, 처음 보는 노인에게 젖을 물리는 일. 그녀는 기꺼이 그 일을 받아들이고, 젖을 빠는 노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기까지 한다. 그렇게 소설이 마무리된다.




3


나는 스타인벡이 도저히 다른 도리가 없어서 그런 식으로 임무를 분배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작중 인물들 가운데 톰이 해야 할 일을 가장 잘 해낼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톰의 어머니다. 로저샨의 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젖'이 나눔과 희생을 표상할 수 있는 유일한 상징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톰이 엉덩이나 허벅지의 살을 끊어내 구워 먹이는 선택지를 만들 수도 있었다. 나는 스타인벡이 이 결말을 놓고 한차례 정도는 고민했으리라고 보지만, 톰이 맡은 일을 로저샨에게, 로저샨이 맡은 일을 톰에게 줄지를 고민하진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렇게 나눠줬을 것이다. 이념은 남자의 몫이고 모성은 여자의 소유다. 투쟁은 남자가 하고 희생은 여자가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보면 우습고 화가 나는 역할분담이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더 큰 그림, 작품이 하나의 커다란 전체로서 주장하는 가능성을 봐야하지, 지엽적이고 소소한 작품 내적 표현의 문제들을 따지는 것은 이 위대한 걸작을 대하는 방법으로 옳지 못하다.


나는 이 작품에 별 다섯 개를 던질만큼 좋아하고, 저 충격적인 결말을 고려하고서도 반드시 한 번은 읽을 책으로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닐 것이지만, 젖을 물리는, 그러면서 미소를 짓는 저 결말만큼은 아무래도 똥이다. 그땐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똥이다. 그땐 그랬으니까 그때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난 모른다. 그저 내겐, "그땐 어땠을지 알 수 없는 지금의 똥"이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한계요 진실은 이것이다-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때, 거기가 아니다.


_이언 매큐언,『넛셸』




4


과거와 오늘날의 현실을 비교하며 작품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아무에게나 그런 권리가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어떤 일본 군인이 본인의 의사에는 어긋나지만 상부의 명령과 시대 현실에 굴복하여 식민지 여성을 성 노예로 착취하는 일에 동참했다고 할 때, 만에 하나 그 군인의 행동에 자발성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하거나 용서해 줄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피해자에게만 있다. 그 어떤 경우든,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그 어쩔 수 없는 일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면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입에 올려도 아무런 사회적 의미가 없는 말이다. 그저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의 개인적 의식을 드러낼 뿐이다. 그땐 어쩔 수 없었으므로, 나라도 같은 상황이었으면 아마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하는 정도의.




5


고전이란 시대를 건너며 생명을 유지하는 작품이라는 정의는, 새 시대에는 새 시대의 기준으로 다시금 고전을 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윤리적인 부분에서는. 과거에 발표된 어떤 작품이 비윤리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그 작가가 그 글을 쓸 무렵 비윤리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냥, 그 작가가 갑자기 오늘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똑같은 작품을 발표한다면 그 작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비윤리적인 인간으로 취급당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더 긴 시간이 흐른 뒤는 어떨까. 수많은 오늘의 고전들이 내일의 똥이 될 것이고, 수많은 어제의 똥들이 새로운 고전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작품은 별자리처럼 어느 시대에 떡하고 박혀 있는 화석이 아니다. 그저 쓰려고 쓰는 게 아니라, 읽으라고 쓰는 작품이라면, 우리가 오늘의 안경으로 읽었을 때 똥인지 된장인지,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한 순간을 살며 오늘 읽고, 그때는 똥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역사일 뿐이다. 오늘 다시 읽어야 한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역사는 누가 어디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나와 당신들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수많은 역사들이 존재할 뿐이다.


_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한 순간만 하세요. 우린 단 한순간만 다룰 겁니다. 순간을 연기하세요. 이 순간에 당신이 뭘 연기하건 그것만 연기하세요. 그리고 다음 순간으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될지는 중요치 않아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세요. 그저 순간, 순간, 순간, 순간으로만 인식하세요.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걱정은 접고, 이 다음에 어떻게 되든 이 순간 안에 존재하는 겁니다.


_필립 로스,『전락』


하나의 문장은 그 자체로 완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을 다른 맥락 속에 위치시킬 때, 다른 문장들과 만나게 할 때, 완벽함이 생각만큼 대단한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_금정연,『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과거의 사유를 그저 답습하고 되뇌는 사람은 그것이 마음의 빗장이 되어 세계와 존재의 의미가 들어오는 통로를 스스로 막아 버린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_김종엽,『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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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 시간 쯤이면 페이퍼가 올라와 있지 않을까 와봤는데 있다!! ㅎㅎ
읽었으므로 나는 잡니다. 굿 나잇.

syo 2017-09-25 22:30   좋아요 0 | URL
전 이제 놀기 시작합니다 ㅎㅎㅎ 다락방님은 새나라의 어린이시군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아 걔는 일찍 일어나는 애였지;;

단발머리 2017-09-2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바야흐로 판결의 시간.
똥과 된장의 시간이 왔네요.
이 와중에도 가슴을 파고드는 필립 로스의 문장. 아, 나는 이런 사람을 사랑했네ㅠㅠ

8시간 전에 공지영 작가님을 만나고 왔어요. 북콘서트 주제가 ˝가장 소중한 것˝이었는데 자신이 깨달은 소중한 건 3가지는..
지금, 여기, 그리고 나 자신...
이라고 하더라구요.
<전락>의 순간, 순간, 순간과 닿아있네요.
나도 다락방님과 같은 생각했어요.
일단 고정팬 2인 확보^^

syo 2017-09-25 23:26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단발머리님하고 다락방님이 요즘 필립 로스의 똥들에 대해 논하고 계셨었죠.....

고정팬 2인 감사합니다. 첨 가져보네요, 그런 멋진 건^^

cyrus 2017-09-25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고등학생 때 배운 국어교과서에 축약된 <분노의 포도>가 실려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걸 왜 배워야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어요. 틀에 박힌 해석(답)을 찾도록 요구하는 우리나라 교육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소설을 가지고 비판적 독서를 시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syo 2017-09-25 23:28   좋아요 0 | URL
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수레바퀴 아래서˝가 있었는데..... 이 세대차이 뭐죠? 슬프다ㅠ

cyrus 2017-09-25 23:43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용 국어교과서가 한 종이 아니라 10종이 넘을 정도로 수가 많아요. 교과서 종류가 다양하니까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들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syo님이 같은 세대라고 가정하면 저는 ‘분노의 포도‘가 있는 국어교과서를 사용했고, syo님은 ‘수레바퀴 아래서‘가 있는 교과서를 사용했던 것이죠. ^^

syo 2017-09-25 23:42   좋아요 0 | URL
명쾌하군요. 위안이 됩니다.

독서괭 2017-09-26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과 6펜스>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며 ˝여성에 관한 부분은 맘에 안 들지만 그땐 다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던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네요. ˝이 부분에선 똥내가 나지만 그래도 훌륭한 작품이다˝가 아니라 ˝이런 부분은 훌륭하지만 저런 부분은 명백한 똥이다˝라고 말해도 되는 거였어요. 깨달음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저 결말 좀 충격적이네요. syo님 스포 덕에 안 읽게 될 듯.. ㅋㅋㅋ

syo 2017-09-26 06:58   좋아요 0 | URL
와.... 전 그냥 결말은 똥이다. 그리고 오늘의 똥은 그냥 오늘의 똥이다. 뭐 이런 말을 한건데, 독서괭님의 해석이 훨씬 고퀄이시다.... 꿈보다는 역시 해몽이죠!

그나저나, 스포라고도 할 수 없는게, 마지막 장면이긴 하지만 저건 사실 결말이라기보다는 결말 다 난 뒤의 일종의 에필로그 같은 장면이라고 보이거든요. 저런 결말을 향해 전개가 차근차근 흘러가는 게 아니라 그냥 갑툭튀다보니.... 솔직히 이 책은 사람들이 빨리고 분노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 가치가 있습니다.

독서괭 2017-09-26 07:3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럼 언제 읽을지 기약은 없지만 보관함에 넣어둬야겠습니다ㅋ 그리고 여기 고정팬 1인 추가입니다.

syo 2017-09-26 08:06   좋아요 0 | URL
3번 고객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1


빨갱이는 되는 것이 아니다. 되어지는 것이다. 제아무리 마르크스부터 레닌, 트로츠키, 마오, 심지어 주체사상까지, 짝퉁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 사상에 통달해 있다 하더라도, 밥 숟가락을 뜨기 전이면 항상 식사기도 대신 김일성 삼대를 찬양고무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나타나서 와, 저 빨갱이 새끼, 하기 전까지는 결코 저 혼자 힘으로 빨갱이가 될 수 없다. 이게 바로 빨갱이 생성 법칙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월화수목금토를 일하게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으므로, 빨간 날 노는 놈들을 보고 와, 저 빨갱이 새끼, 하셨다. 그러자 기적처럼 빨갱이가 있게 되었다. 이것이 빨갱이 탄생 신화다. 물론 신화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혐오를 담은 모든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은 달라도 같은 방식으로 발생한다. 누가 그 이름을 붙여주기 전까지, 그는 밉고 더러워도 그저 두루뭉수리하게 밉고 더럽다. 이름 붙는 순간 허상이 덩치를 키워 실체가 된다. 알아야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내게 와서 똥이 된다. 그리고 정정하자면, 혐오를 담은 모든 단어가 같은 방식으로 발생하듯이, 가리키는 대상도 결국 다르지 않다. 내가 가진 권능에 근거가 없으니 내어 놓으라는 날강도 같은 자, 그리고 그런 몹쓸 생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전염병 같은 자.





"하인즈 씨, 제가 여기 온지 얼마 안 돼서 그러는데요, 그 망할 놈의 빨갱이라는 게 뭐죠?" 그랬더니 하인즈가 대답을 했지. "우리가 시간 당 25센트를 주겟다고 할 때 30센트를 달라고 하는 개자식들이 다 빨갱이야!" 이 젊은 친구는 그 말을 좀 생각해보다가 다시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지. "세상에, 하인즈 씨, 전 개자식이 아니지만 만약 빨갱이가 그런 거라면 저도 시간 당 30센트를 받고 싶은 걸요. 다들 그래요, 하인즈 씨, 그럼 우리는 전부 빨갱이에요."

_존 스타인벡,『분노의 포도 2』


이 땅은 '가해자의 땅' 입니다. 가해자가 계속 권력과 영화를 누리는 땅이고, 그 가해가 한 번도 제대로 정리되어보지 못한 나랍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물적 토대를 장악하고 있고, 재생산 구조를 아주 강건하게 가진 그런 구조 속에서는, 인간의 탈을 쓰고 과연 그러한 것을 할 수 있겠나 싶을 정도의 행태도 반성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사회의 혐오의 뿌리를 그런 데서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_천정환 홍세화,『홍세화의 공부』



2


솔직히 나는 '보수'라는 말이 웃긴다. 진보는 욕심의 이름이다. 진보는 더 가지려 한다. 현재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진 다음, 더 많이 나누려 한다. 보수는 가지려 하지 않는가? 보수도 가지려 한다. 사람은 누구나 더 가지려 한다. 그런 인간상은 보수가 선호하는 경제학에서 제시하는 기본적 인간형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보수라고 한다. 자신들이 보전하여 지킨다고 한다. 더 가지고 싶다는 말을 숨긴다. 그리고 숨길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를 보전하여 지키기만 하여도, 미래에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비열한 판이 이미 잘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양심이 있어서 차마 더 가지고 싶다는 말을 못하는 건지, 양심이 없어서 부러 더 가지고 싶다는 말을 숨기는 건지는 알고 싶지도 않지만.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지닌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는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_김규항,『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우리는 왜 위로만, 그리고 슬금슬금 오른쪽으로만 향하는가. 우리에게는 왼쪽으로 그리고 아래로도 세상을 탐험할 권리가 있으며, 바로 그러한 자기 확장을 통해서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더 높은 곳으로만 향하는 지루하고 어리석은 경주를 거부하고, 상하좌우로 온전히 세상을 경험하며 자아를 확장할 수 있었던 사람들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렸으며, 그들만이 애벌레에서 나비로 환골탈태하는 도약을 경험했으리라.

_목수정,『월경독서』


사장이 고용인에게 말한다. "젊은 친구, 이 회사에서 아주 빠르게 출세했군. 2년 전 사환으로 시작해서 두 달 뒤 사무직원이 됐고, 판매요원, 부지배인, 지배인을 거쳐 어느덧 부사장이네. 소감이 어때?" 고용인이 대답한다. "고마워요, 아빠."

_버텔 올먼,『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국가권력 사유화와 헌법 파괴, 부정부패, 직무유기에 가까운 태만의 실상이 분명하게 드러난 시점까지 박근혜 정부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다르는 일부 국민들의 견고한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고 국민들이 집권 보수여당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유사한 사태가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념형 보수'를 무식하다고 경멸하거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현실과 희망사항을 잘 구별하지 못한 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생명력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끈질기다.

_유시민,『국가란 무엇인가』


지배계급들은 이성이 확산되면 머지않아 전 세계 민족들이 자신들이 주모자가 되어 펼치고 있는 어마어마한 사기극을 알아차리게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전 세계 민족들은 교회의 신성함, 왕의 신적 권한, 민족적 자부심, 혹은 부나 권력의 소유 등과 같은 허구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타고난 권리를 포기한 채, 특권을 요구할 아무런 권리도 없는 소수계급을 부양하기 위해 불평없이 노력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위계구조 속에서 상층에 자리잡고 있는 계급은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자연적 인식이 자기 계급이 갖고 있는 권위의 자의적 성격을 폭로할 위험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런 인식의 발전을 저지한다. 

_이사야 벌린,『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3


읽고 또 읽고 있는데, 간혹 과속방지턱처럼 나타나는 문장들이 의욕을 확 꺾는다. 요새 것들 염색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유행이 개성인 줄 착각한다, 개성은 마음 속에 있는 본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하는 식의 문단을 보면 네이버에 저자의 나이를 검색하게 된다. 76년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발견되면, 역시 그렇지, 하는 생각에다 이어서 읽어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포개진다. 그 뿐일까. 여성의 특성이 돌봄 노동에 적합하게 발달되어 있어서 여성이 돌봄 노동을 하는 것이 효율이 높다는 식의 글을 읽고 나면, 혹시 저자의 메일 주소 같은 것이 없나 책날개를 뒤지게 된다. 만사 시장에 맡기면 무조건 오케이라는 말은 보이는 족족 그냥 다 찢어버리고 싶다. 보이지 않는 손, 이 손 이거는 아주 보이기만 해라, 내 눈에. 니빠로 손톱을 다 뽑아버릴라니까.


요는, syo의 좌편향된 사상이, 자꾸만 독서를 왼쪽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이런 충고들은 대놓고 쓰라리다. 




독자는 자신이 알게 모르게 쌓아 온 선입견으로 책을 읽지는 않는지, 그래서 반성적 자아를 키우는 대신 완고한 자아의 성을 쌓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도서는 오히려 세상이 인정한 권위 있는 책과 저자를 내세워 스스로의 부족함을 가리려는 허위의 몸짓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앎과 실천이 아니라 읽은 책의 목록을 훈장으로 삼는 허영의 독서를 하는 것이지요.

_김이경,『책 먹는 법』


끊임없이 책을 읽는데도 안정된 판단력과 정신을 갖추지 못하는 사람은 책에는 조예가 깊을지 몰라도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_조지 스웨인,『공부책』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텍스트 쪽이 우리를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로 형성합니다.

_우치다 타츠루,『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4


자, 이만하면, 나도 충분히 빨갱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syo를 빨갱이로 만들어 주실 분을 찾습니다. 자격요건은 딱 하나 뿐입니다. 한국 공인 빨갱이 자격증 발급을 독점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당원이신 분. 댓글로, "와, 저 빨갱이 새끼"를 올려주세요. 비댓도 환영합니다. 당신이 나를 빨갱이라 불러 주었을 때, 나는 당신께 달려가 아주 새애애빨간 빨갱이가 한 번 되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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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9-20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공부책, 표지가 조금 특이하지만, 읽어보고 좋았던 것 같아요.
실제로 해보면 절대 쉽지 않을 책이긴 했지만요.^^;
syo님, 좋은밤되세요.^^

syo 2017-09-20 23:10   좋아요 2 | URL
유유는 사랑입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꿈 꾸셔요^^

책한엄마 2017-09-21 10:09   좋아요 2 | URL
저도 유유책 좋아해요.^^
반가운 마음에 불쑥!!

독서괭 2017-09-21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혐오는 이름 붙이는 순간 실체가 된다는 것, 현재를 보전하여 지키기만 해도 미래에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비열한 판이 이미 짜여져 있기에 ˝보수˝라는 것- 공감합니다.
분노의 포도를 왜 강추하시는지 점점 더 알 것 같네요.

syo 2017-09-21 06:49   좋아요 0 | URL
분노의 포도는 진리입니다. 책은 또 어찌나 퍼뜩퍼뜩 넘어가는지 몰라요....

다락방 2017-09-21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릴 때부터 빨갱이였습니다. 저를 빨갱이로 칭하였으므로 저를 빨갱이로 만든 사람은 바로 우리 아빠였지요. 아빠...
아빠 말에 대들면 빨갱이, 밤에 늦게 들어오면 빨갱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빨갱이, 빨갱이...
그러니까 이를테면, 제가 아빠가 하라는대로 하지 않으면 빨갱이였던 셈입니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래요. 저는 여즉 빨갱이란 말을 듣고 삽니다. 아빠로부터...

여기있습니다, 빨갱이.....

syo 2017-09-21 08:38   좋아요 1 | URL
우리 아버지도 살아 계셨으면 지금의 저한테 빨갱이라고 하셨을 겁니다. 제가 채 빨갱이가 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참 아쉽네요.
 


1


백 일 정도를 초점 없는 마음으로 멍하니 살다 보니, 겨우 조금씩 희미해지던 짝사랑이 있었다. 유행가 가사가 다 내 이야기 같지는 않았지만, 내 이야기로 유행가 가사를 만들면 정규 앨범 3집까지는 너끈하겠다 싶었다. 담배를 할 줄 알았다면 꽤 태워 없앴을 것이다. 담배값 인상 전이었다. 굉장히 좁은 방에 살고 있었는데, 사방의 벽이 다 코 앞에 있었다. 그러면 코 앞의 벽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국면부터는 그 사람도 그랬다. 코 앞에 앉아 있는데 벽 같았다. 오히려 벽과의 대화는 수월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이기적인 대화는 내가 했던 모든 실수들을 되짚어 수정액을 바르고, 결국 품에 안는 것으로 결말을 정해놓은 채 세부적으로 오가는 말들을 한없이 변주하며 백 일을 갔다. 하나같이 다 더는 일이었다. 주었으나 그 사람이 받지 않았던 것들을 덜 주거나, 하였으나 그 사람이 듣지 않았던 말을 덜 하거나, 바랐으나 그 사람이 주지 않았던 마음을 덜 바라는 식으로. 


쑥과 마늘 대신 환상과 환청을 먹으며 굴 속에서 백 일을 보내고, 나는 인간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윤중로엔 벚꽃이 피었다. 나 말고는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쌓여 있는 읽을거리들을 하나씩 척척 해치우며, 오늘의 나와 조금 더 가까운 내가 되었다.


작년 이맘때의 나는, 재작년에는, 그 전해에는, 이렇게 몇년을 거슬러보다가 떠올랐던 기억이다. 그때는 아직 그 사랑에 희망이 있을 때였다. 행복하고 초조했으며, 미우며 고마웠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이미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 인정할 수 있는 과거로 바뀌는 것. 들뜬 흙과 모래가 층을 이루며 찬찬히 가라앉고 얼굴을 비춰 볼 수 있을 만큼 말간 물이 고요히 괴는 것. 이뤄졌든 그렇지 않든, 가끔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꽤 훈훈하게 덥혀진다.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_히라노 게이치로,『마티네의 끝에서』


소금기 진한 바람은 식당의 빛바랜 간판을 바꾸기도 합니다. 오래 전 '이모네 식당'은 '모네 식당'이 되었습니다. 곰치국의 간이 조금 진해졌지만 여전히 수련 같은 고명들이 가득 들어간 일이나 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같은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일, 어제 자리한 곳에 오늘의 빛이 찾아 비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큰 일도 아니었습니다.

_박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사랑도 예술도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푸념이 됩니다. 마음에 품은 걸 다 쏟으려다가 결국은 상대를 질리게 만듭니다. 살짝 비켜서기도 하고 잠자코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숨죽여 그 놀라운 기적에 경의를 표하고 감당 못할 축복을 삼가 받들어야 합니다.

_홍승찬,『오, 클래식』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_아니 에르노,『남자의 자리』




2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소설은 정작 사랑의 중요한 순간이면 내 옆에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삶의 영점을 맞추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나를 감동시켰던 소설들은 항상 나와는 다른 시간 속 다른 사람,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먼 곳을 그린 것들이었다. 소설을 도대체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은 흔하다. 하지만 그럴 때 해줄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온통 상투적인 것들만 떠올라서 난감하다.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지독한 불일치. 나는 그저 읽을 뿐이므로 공급할 대답이 항상 부족하여, 뭐 꼭 이유가 있어야만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랄지, 대체 미적분 이거 살면서 쓸 일도 없는데 왜 배워야 되는 거냐고 따지는 아이들은 백발백중 수학 못합니다, 랄지, 이런저런 궁색한 말이나 내놓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다. 쩝, 당장은 이유를 알 수 없겠지만, 결국 소설을 읽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소설을 읽는 것 뿐입니다. 다들 그렇게 찾았을 겁니다. 찾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찾은 줄 알았을 겁니다.




상상력이란 사회적인 것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슷한 것들을 꿈꿀 때, 그것은 현실화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제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 힘을 가졌던 시기, 소설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믿게 만들었다. 같은 것을 상상하게 했다. 그렇게 문학은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더이상 아니다. 더이상 소설은 보편적 상상력이라는 과도한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소설이라는 말을 예술로 바꾸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예술은 보편성을 포기했다. 그렇게 자유를 얻은 뒤 거침없이 하찮아졌다.

_김사과,『0이하의 날들』


이 지도과정은 변증법적이다. 문학이 우리를 좀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_제임스 우드,『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문학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미미한 것들을 소환해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비슷비슷한 하루의 반복은 그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표상된 외면을 찢고 들여다볼 때 거대한 새로움이 있다. 문학은 우리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가는 단상이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파편적인 모습들을 정밀하고 미묘하게 묘사해 내서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현상에 대한, 기억에 대한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_최은주,『책들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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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09-18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는 방법은 배우가 되는 것 외에는 소설을 읽는 것이 유일하지 않을까 합니다. 영상물은 이미지가 너무 강해 완전한 몰입이 어려우니까요. 어쨌든 소설을 읽는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못 할사람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syo님의 s는 soon정파의 s였던 것입니다...

syo 2017-09-18 23:2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soon정파의 s였군요. 제가.

사실은 순정이라기보다는 집착 쩔어서 걷어차인 것 비슷한 각이었습니다ㅠㅠ

AgalmA 2017-09-18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쑥과 마늘 대신 환상과 환청을 먹으며˝...아이고, syo님 이런 표현 정말 재밌다니까요ㅎ
˝사랑도 예술도 적당해야 합니다.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푸념이 됩니다. 마음에 품은 걸 다 쏟으려다가 결국은 상대를 질리게 만듭니다.˝ 홍승찬 씨 이 문장 쉬우면서 공감되게 잘 표현하셨네요. 많이 읽고 많이 안다고 짜증과 푸념 가득한 태도와 말투 쓰는 사람들 정말 많죠. 엔터테인먼트처럼 비치려고 하지만 성격 안 되는 사람은 곧 죽어도 못하지. 암요. 신영복 선생님 말씀은 그자체가 진짜 말씀이잖아요. 겸양이 뚝뚝 묻어나면서도 인간미 가득한. 사랑도 처음엔 열정이지만 자기 맘대로 안되면 폭력 휘두르기 십상이고.

문학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syo님이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읽고 얘기 좀 해주시죠. 저보다 많이 읽으시니까 대리 독서 문의ㅋ/

syo 2017-09-18 23:58   좋아요 0 | URL
와, 신영복 선생님 말씀은 그 자체가 말씀이라는 AgalmA님의 말씀도 좋은 말씀이네요. 진짜 그러네요.

내 사랑이 열정에서 폭력이 되는 지점은 알기도 힘들고 인정하기도 힘들더라구요. 지나고 나면 너무 선명하게 보이지만.... 차라리 모든 경우에 열정을 제압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쪽이 차라리 낫겠다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