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地圖)


서걱거리는 지도를
씹으며 부러뜨린 손가락
너의 푸르스름한 입매
번득이는 면도날이
될 수 있다면

길을 잃었어
왔던 길을 더듬어
처음으로 가야 하겠지
그 절벽에는 동굴이
너무 많아 하지만
너의 발자국이 있는
단 하나의 동굴

질기고 가느다란
실 한 가닥
입에서 뱉어내었어
읽을 수 없는
잃어버린 지도의
붉은 선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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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기원


진공청소기의 먼지통을
들여다볼 때마다
경이롭다 매일 청소를
하는 데도 어디서 그
먼지들이 나오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흰 머리카락과 회색의
솜뭉치들이 몽글몽글
며칠 전에 깎은
손톱도 하나
모래알이 자잘자잘
오리털 이불에서
나온 깃털도 있군

그 모든 것은 아주
먼 우주의 처음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속의 철이 그렇게
내게 왔듯이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부드러운 살과
눈물과 노래를 생각한다
한 처음에 있었던
어떤 손짓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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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것들


세탁기 아래의 끈끈이
커다란 바퀴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다 해마다
늦봄이면 야생 바퀴가
그렇게 들어온다 걔들은
진짜 엄청나게 크다
그 시커먼 덩어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짝을 찾아 날아다니다
우리집까지 왔을 텐데
그대로 저승길을 밟아

5월의 비가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사흘째 내리는
저녁에 작은 방 방충망에
어리는 비닐 조각 그림자
불을 켜고 보니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비를 피해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난 네가 싫어,
손가락으로 방충망을
튕기며 기어코 녀석을
쫓아내었다 우리집이
아니더라도 다른집에서
잘 쉬겠지 그냥 놔둘 걸
날 밝으면 가버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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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너에게는
귀여운 아이가 있고
괜찮은 남편이 있으며
그럭저럭 돈이 벌리는
번지르르한 직업도 있어
지금은 1년째 해외여행 중
너의 인스타 맘껏
행복을 전시(展示)하지

어디서 들으니 세상은
행복 총량(總量)의 법칙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누군가 8만큼 행복하면
어느 구석탱이의 누군가는
8만큼 불행해지는

너의 행복은
지상의 한 켠
추레하게 흐르는
불행 덕분이지

뭐, 적당히 불행한 것도
나쁘지 않아
귀신도 불행한 사람은
건들지 않는다더군

귀신의 푸른 이마를
본 적이 있어
차가운 무언가가
툭 치고 지나갔지

그 후로 오랫동안
푸른 이마의 귀신을
본 적이 없어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아

타인의 불행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
그렇게 적당히 불행한
삶을 꿈 꿔

전자레인지에 너무
달구어진 유리그릇은
터질 수도 있어
누가 알아?
너의 자부심도 언젠가
팡, 하고 터져버릴지
인생은 짧아 너의 글은
더 짧아 모자라 그러니
오늘의 행복을 즐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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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기억 속의 노래


흘러간 가요를 듣는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비가 귓바퀴에
얇은 생채기를 만들고
그곳으로 시간의 통로가
생기는데 순간,
1990년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느 가수의 얼굴
그 눈부신 웃음은
시간을 눈멀게 만들어

슬그머니 사그라든 청춘
흰머리와 얼굴에
덧입혀진 검버섯
아, 수치스러워라

지글거리는 동영상 속
그들은 뛰쳐나와
보기 좋게 살이 오른
건물주가 되고
사장이 되고 더러는
파산한 낙오자
돌아올 수 없는
낡은 소문으로

좋았던 한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흐린 기억 속의 그대, 를
마지막으로 클릭,

2024년 5월의 어느 새벽,
이 노래를 듣는 사람
있으면 손!

가만히 손을 들고는
가렵고 눅눅한 눈가
스며든 형광등 불빛
쓱, 하고 훔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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