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발뒤꿈치가 아픈지 6개월이 지났다.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발이 아프기는 했는데, 그래도 집 안에서 걸어 다닐 정도는 되었다. 아마도 '족저근막염'이겠거니, 하는 생각은 했다. 그건 별다른 치료법도 없고, 좀 쉬면 낫는다고 알고 있었다. 산책하러 나가는 것도 그만두고, 집에서 편한 비치 샌들을 신으면서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발은 계속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최근에는 맨발로는 발을 제대로 디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제대로 된 진단이라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합 병원 정형외과의 족부 전문의를 찾아갔다. 그게 지난주의 일이다. 의사 선생은 40대 초반의 차분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 동안 아팠는지, 어떻게 아픈지, 하루 얼마나 걷는지, 의사는 병력 청취를 꼼꼼히 했다. 발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갈 때는 평소 자신이 얼마나 걷는지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럴 땐 만보계가 도움이 된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의사는 발을 좀 보겠다고 했다. 나한테 아픈 부위를 눌러 보라고 하고는, 내가 아프다고 말한 뒤꿈치를 살짝 만져보았다.

  "족저근막염입니다. 근막의 두께도 괜찮아 보이니까, 일단 약을 좀 써보죠."

  이 의사 선생은 분명 명의가 틀림없다. 엑스레이도, 초음파도 찍지 않았다. 진단을 위해 추가적인 검사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족저근막염은 낫는 데에 1년까지도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좀 심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를 하기도 하지만, 비급여 치료이고 환자마다 효과가 달라서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발 마사지와 족욕을 하고, 쿠션이 있는 편한 운동화를 신으면서 지내보라고 당부했다. 나는 좋은 의사 선생이 처방해 준 소염진통제를 2주분 받아왔다.

  약을 먹어서 그런가, 발의 통증이 빠르게 나아진 듯 했다. 어제는 모처럼 날이 좋아서 정말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갔다 왔다. 그런데 웬걸, 귀신같이 발이 다시 아프다. 결국 족저근막염은 쉬는 게 답이구나 싶었다. 발이 아파서 걷질 못하니까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발이 아프다고 하면서 나는 낫기 위해서 뭔가를 꾸준히 하지는 않았다. 족저근막염이 나으려면 아킬레스건 스트레칭을 하고, 발 마사지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안 했다. 글을 쓸 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발에다 테니스공을 놓고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다. 나는 아픈 발을 위해서 '격렬하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발이 저절로 낫기를 기다렸다.

  뭔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어렵지만 시작하고 계속 해 보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인생에서 그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픈 발이 낫는 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든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쥐어짜 내는 것, 글을 써 내려가는 것. 몸은 피곤하고, 도무지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석 달이 되었다. 나는 내가 시 습작을 계속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쓰다 보니 시 쓰기가 나름 재미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힘든 일상의 숨구멍 같기도 했다. 나는 '시'가 가진 근원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과 사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시'를 통해 해나가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디에다가 응모하려고 쓴 시도 아니었다. 다만 삶을 더 잘 견디는 방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좋았다. 아이쿠, 족저근막염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렇게 시로 마무리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러하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시를 한번 써보라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느낀 평온함을 이 글의 독자들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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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수 2024-03-24 22:41   좋아요 0 | URL
빨리 나으시길바랄께요 시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푸른별 2024-03-24 22:47   좋아요 0 | URL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전쟁미망인 숙희(최은희 분)에게는 대학생 딸 경희(엄앵란 분)가 있습니다. 둘은 얼핏 보기엔 엄마와 딸 사이라기 보다는, 자매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세상의 풍파가 비껴간 것처럼 보이는 고운 외모의 미망인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네, '돈'입니다. 숙희는 양장점을 하다가 큰 빚을 지고 가게를 정리한 상태이지요. 그런 숙희에게 출판사 전무 상규(김진규 분)는 숙희의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돈을 빌려줍니다. 어려운 때에 자신을 도와준 상규에게 숙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사랑의 감정이겠지요. 그건 상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규도 숙희를 나름 연모하는 것처럼 보여요. 상규와 숙희,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영화 '동심초(Dongsimcho, 1959)'신상옥 감독의 대표작에는 잘 언급되지 않는듯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 보니, 1959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더군요(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or.kr).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동심초'에는 결코 낡지 않은 주제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말입니다.

  그렇다면 숙희와 상규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숙희의 처지를 좀 살펴보죠. 숙희의 큰 문제는 '돈'이에요. 숙희는 상규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그 돈은 그냥 받은 돈이 아닙니다. 갚아야 할 돈이지요. 물론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상규는 숙희에게 빚 독촉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숙희가 상규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어찌 보면 좀 통속적이지 않나요? 사랑이란 감정이 '돈'이 가진 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말이에요. 이 영화에서 '돈'은 중요한 내러티브적 요소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

  상규가 숙희에게 빌려준 그 돈은 그의 사업자금입니다. 그는 이 사장과 함께 투자해서 출판사를 세웠습니다. 이 사장은 상규를 사윗감으로 보고 투자한 거예요. 상규는 사장 딸 옥주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사장과 상규가 그런 사이라 해도 상규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숙희에게서 돈을 받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상규의 마음은 옥주 보다는 숙희에게로 향해있습니다. 그런 상규는 숙희에게 빚 갚으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규의 누나(주증녀 분) 김 여사는 속이 타들어 갑니다. 김 여사는 독신으로 남동생 하나 바라보며 열심히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어떤 면에서 김 여사에게 있어 상규는 아들과 같은 존재일 겁니다. 그런 남동생이 애 딸린 과부에게 눈이 돌아갔으니, 그 누나 심정이 어쩌겠어요? 더군다나 김 여사와 숙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에요. 김 여사는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동생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든 동생과 숙희를 떼어놓고 싶죠. 남동생은 번듯한 집안의 사위가 되어야만 하니까요. 김 여사는 숙희에게 빚 독촉을 하면서 에둘러 숙희가 상규의 앞길을 막고 있다며 비난합니다.

  그럼, 상규의 약혼녀 옥주(도금봉 분)의 입장을 살펴볼까요? 옥주는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습니다. 부잣집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고,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죠. 그런데 옥주는 그 남자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 여자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과년한 딸이 있는 미망인이에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도대체 저런 여자를 왜 좋아하나 생각하면 속도 상하고 분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옥주가 상규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 없어 보여요. 사랑이 어디 마음대로 되냔 말이죠. 상규는 집안의 재력으로 자신에게 어설프게 묶어놓은 상태일 뿐입니다. 옥주는 궁리 끝에 숙희를 찾아가지만, 별 말도 못 하고 돌아오지요. 옥주는 돈으로도 안되는 게 있다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숙희의 딸 경희도 '돈' 때문에 고민합니다. 엄마의 양장점이 망하면서 경희의 미래에도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경희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요. 엄마는 살고 있는 집을 팔아서 빚을 갚으려고 하지요. 그러면 경희는 딱히 머물 곳도 없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희는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생각도 해봅니다.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돈이 많다면 엄마의 빚도 갚아주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경희가 그런 기대를 하고 만난 남자는 겉멋 든 바람둥이일 뿐입니다. 경희는 '돈'만 보고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되죠.
   
  이 영화에서 돈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부산의 종이 무역상으로 나오는 김 사장(김승호 분)일 수도 있겠군요. 그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숙희에게 반합니다. 김 사장은 숙희를 아는 상규에게 숙희와 잘 이어질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하죠. 상규에게 김 사장은 사업상 중요한 고객입니다. 애 딸린 홀아비이기는 하지만 김 사장에게는 숙희와 잘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옵니다. 숙희는 그렇게 돈의 힘을 앞세우는 김 사장을 역겹게 생각합니다. 숙희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감정이니까요.

  이렇게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돈에 얽혀 이리저리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돈'을 빌려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된 숙희와 상규의 사랑은 결국 '돈'을 갚으면서 끝나버립니다. 상규는 숙희를 간절히 원하지만, 숙희는 상규의 앞날을 위해 마음을 접습니다. 그리고 살던 집을 팔아 상규에게 빚을 갚고, 시골 친정집으로 떠나버리죠. 영화 '동심초'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비탄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흐르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곰곰이 톺아보면, 그것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죠. '사랑'이란 감정은 현실이 배제된 진공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 속 두 주인공 숙희와 상규의 감정은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기는 해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 사랑도 인생의 많은 것들처럼 진정으로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죠. 거기에는 돈과 계층, 사회적 관습이라는 중요한 요인이 작동하고 있어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연인은 결국 이별을 택합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숙희는 부산 출장을 가는 상규를 배웅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갑니다. 하지만 숙희는 역사(驛舍)의 쇠창살 옆을 서성이다 그냥 돌아오지요. 영화의 마지막, 상규는 시골로 떠나는 숙희를 보고자 서울역에 가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상규 또한 숙희가 예전에 머물렀던 쇠창살에 고통스럽게 매달립니다. 이 기이한 수미상관(首尾相關)은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둘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화려한 비탄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내게 흥미 있게 느껴지는 부분은 숙희의 딸 경희의 미래입니다. 숙희는 친정집으로 내려가면서 딸 경희에게 후견인을 지정해 줍니다. 예전 경희의 과외 교사 기철에게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것이지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이었습니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아들)을 따라야 했지요. 숙희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따라야할 자식이 없는 셈입니다. 숙희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면서, 딸에게는 미래의 사윗감을 정해준 것처럼 보이지요.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뿌리가 여성들을 옥죄고 있던 전후의 한국 사회에서 경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더 지난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도 사랑과 결혼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르겠네요.


*사진 출처: kmdb.or.kr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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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습니다. 오래된 한국 영화가 나오네요. 한형모 감독의 영화 '여사장(A Female Boss, 1959)'입니다. 한형모 감독은 전후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 '운명의 손(1954)''자유부인(1956)'에는 해방 이후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가득 차 있어요. '여사장(1959)'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겠군요.

  이 영화는 원작 희곡이 있습니다. 원작자 김영수(1911-1977)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희곡과 시나리오, TV 드라마까지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김영수는 해방 직후에 자신이 쓴 희곡을 공연할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1948)'도 그 시절에 쓴 희곡이지요. 이 희곡은 '김영수 희곡
·시나리오 선집 2(출판사 연극과 인간)'에 실려있습니다. 나는 '여사장' 영화를 보고, 원작이 궁금해서 책을 주문해 보았습니다. 2007년에 펴낸 책이라 혹시 절판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요. 그런데 아주 멀쩡한 새책으로 잘 받을 수 있었어요. 아마 잘 안팔렸을 거에요. 이런 책은 관련 전공자들이나 볼 법한 책이지요.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펴낸 출판사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해두지요.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용호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화려한 양장 차림의 요안나(조미령 분)는 기다리는 뒷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게 통화 중이지요. 짜증을 내던 뒷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용호만 남습니다. 용호는 요안나의 면전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하지요. 요안나가 용호를 무시하자, 용호는 요안나가 애지중지하는 강아지 마리오를 냅다 발로 차버립니다. 아주 고약한 첫 만남이지요? 대개의 로맨틱 코미디의 도입부가 그렇잖아요. 기분 나쁜 첫인상을 갖게된 남녀가 결국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요안나와 용호도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안나는 '신여성사'라는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어엿한 여사장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장이면 사장이지, 여사장이라는 단어는 뭐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건 영화가 나온 그 시대가 1950년대라 그렇지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요. 요안나는 그런 시대에 자기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사장만 여자가 아니라, 잡지사 편집국도 여인천하입니다. 허 주임(김희갑 분)은 여자 편집국장을 비롯해 여직원들에게 늘 구박당하는 신세에요. 그는 툭하면 잡지 기사 고쳐 쓰라고, 냄새 나는 반찬 좀 먹지 말라는 말을 듣고 살지요.      

  요안나는 자신이 펴내는 잡지 이름대로 '신여성(新女性)'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과격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안나는 회사의 여직원들에게 '연애 금지령'을 내립니다. 요안나에게 연애는 독립적인 여성의 자존감을 꺾는 일입니다.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그 시대의 봉건적 남자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요안나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 싶어하죠. 하지만 요안나의 현실은 그런 바람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요안나의 잡지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그런 요안나에게 돈 많은 오 사장(주선태 분)은 후원자를 자처합니다. 영화 속에서 오 사장이 독신으로 나오는 것과는 달리, 희곡에서 오 사장은 유부남으로 나옵니다. 오 사장은 어떻게든 돈으로 요안나를 얽어매려는 흑심을 지닌 사람이에요. 자신이 원하는 잡지를 펴내기 위해 요안나는 고군분투합니다. 그즈음, 용호가 요안나의 잡지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옵니다.

  요안나는 용호에게 '두꺼비'라는 별명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맘놓고 그 별명을 불러대지요. '용호'라는 이름 대신에 '두꺼비'라고 불리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좀 안쓰럽기까지 해요. 어쨌든 용호에게 요안나는 '사장님'입니다. 용호는 요안나를 상사로 깍듯이 대합니다. 요안나는 그런 용호의 순수함과 우직스러움에 조금씩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사장'은 오늘날의 여느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별로 다를 게 없어요.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신여성, 페미니스트인 요안나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모습을 희화화해서 보여줍니다. 요안나는 자기 회사에 필요한 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해요. 요안나는 오 사장의 호의에 기대어 편하게 돈을 빌리려고 하죠. 결국 요안나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돈 많은 숙부입니다. 멋진 옷차림을 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외치지만 그건 다 껍데기처럼 보여요. 이점은 원작 희곡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요안나는 그 누구보다도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여자입니다. 연애를 거부하고 남자를 적대시하는 요안나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면에서 원작자 김영수의 관점은 매우 전근대적이기도 하고요.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현모양처의 행복을 찾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안나의 잡지사는 두꺼비에서 남편이 된 용호가 사장이지요. 이제 요안나는 양장이 아닌 한복을 입고서,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찌개를 끓여놓고 집에서 기다립니다. 그 전화를 받는 용호의 뒤편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가 있을 때는 분명 그 액자에 '여존남비(女尊男卑)'가 박혀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받던 허 주임은 편집국장 자리에 앉아 여직원에게 호통을 치지요. 영화의 이런 묘사는 일견 우스워 보이지만,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퇴행적인 가부장제의 반영일 뿐이죠.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원작 희곡이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희곡은 요안나와 용호가 함께 잡지사를 꾸려나가자는 상호 합의의 다짐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영화 '여사장'은 그런 희곡의 결말을 사정없이 비틀어 버립니다. 거기엔 일말의 융통성도 없어요. 영화 '여사장'이 보여주는 제대로 된 여성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성이고,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행복을 찾는 여성이지요. 영화 속 여사장, 아니 이제는 평범한 주부가 되어버린 요안나는 정말 행복을 찾았을까요?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가 상영된 1959년에 '여사장'을 본 여성 관객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거든요. 그들은 진심으로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며 집에 돌아갔을까요? 아니면, 여사장 요안나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분명한 건, 2024년의 여성 관객은 이 영화를 웃으면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음, 그러니까 아주 흥미 있는 영화거든요. 영화 속 시대를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kmd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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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같은 일상입니다. 그는 TV 속의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죠. 식사 시간이 되면 찬장에 있는 냉동식품을 꺼내어서 전자레인지에 넣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그 음식을 먹구요. 문득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그는 자기 아파트 건너편 집을 바라봅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기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네, 그들은 연인입니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있지요. 그는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얼른 리모컨을 집어서 TV를 켭니다. 이리저리 돌리다가, 신기한 물건에 눈길이 갑니다. 로봇이네요. 말하고 미소를 짓는 로봇 말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로봇 조립 세트를 주문합니다.

  Pablo Berger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Robot Dreams(2023)'의 시작은 그러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대사가 없어요. 감탄사와 효과음은 있지요. 아, 음악이 정말 좋습니다. 영화 내내 미국의 팝 그룹 Earth, Wind & Fire의 명곡 'September'가 흐릅니다.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곡이에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영화 속 주인공인 Dog와 로봇에게도 말입니다. 주인공이 정말로 Dog가 맞냐고요? 맞아요. 주인공은 'Dog', 달리 이름이 없어요. 로봇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애니메이션은 개와 로봇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개는 집으로 배달된 로봇 조립 세트를 완성합니다. 로봇은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하지요. 개와 로봇은 이제 일상을 함께 하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가 됩니다. 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Setember를 로봇이 좋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함께 길을 걷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죠. 여름이 오자, 개는 로봇을 해변으로 데려갑니다. 수영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 그런데 로봇이 좀 이상합니다. 움직이질 않아요. 그래요,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의 몸에 물이 들어가서 녹이 슬어버린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개는 로봇을 해변가에 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잖아요.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개는 해변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여름에만 잠시 개방되는 그 해변은 그날부터 폐쇄되었습니다. 내년 여름에 문을 연다는군요. 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래밭에 파묻혀있는 로봇을 구하려고 합니다. 시청에 민원도 내지만 소용이 없어요. 로봇을 만나려면 1년이란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 'Robot Dreams'는 로봇이 꾸는 꿈을 의미합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로봇인데, 꿈이라고 해서 못 꾸겠어요?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잠깐씩 눈을 뜨던 로봇은 꿈을 꿉니다. 다시 개를 만나게 되는 꿈이요. 로봇의 꿈속에서 개는 로봇을 잊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요. 로봇은 슬픔과 불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로봇의 꿈과는 달리 개는 잘 지내지 못해요.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여행도 하지만 개의 머릿속에는 늘 로봇이 있어요.

  마침내 개가 간절히 기다리는 그날이 왔습니다. 해변이 다시 문을 여는 날이지요. 개는 바람처럼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거기엔 로봇이 없어요. 로봇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로봇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요. 어떻게 하다 고물상에 팔려 간 로봇은 Rascal이란 이름의 너구리와 만나게 됩니다. 직업이 수리공인 너구리는 로봇을 정성스럽게 다시 조립합니다. 로봇은 다시 살아납니다. 로봇은 너구리와 친구가 되어 함께 지내지요.

  개에게도 새로운 로봇 친구가 생깁니다. 그렇게 개와 로봇은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요. 그런데 우연히, 로봇은 개를 보게 됩니다. 개는 새 친구 로봇과 길을 걷고 있었죠. 자, 로봇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개에게로 달려갈까요? 그런데 개의 옆에는 다른 로봇이 있잖아요. 개와 로봇, 둘은 어떻게 될까요?  

  'Robot Dreams'는 대사가 없지만, 아주 간결하게 정서를 전달합니다. 이 영화의 관객은 주인공 개와 로봇의 마음 속 깊이 빨려들어가게 되지요.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우리 인간과 다를 것이 없어요. 서로를 알아가고, 친밀해지는 관계.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우정이나 사랑이든,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말이지요.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영화 '추억(The Way We Were, 1973)'이 떠오르더군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그 영화요. 서로 이질적인 배경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둘은 헤어집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함께 했던 시간의 추억이 남아있겠지요. 영화의 우리말 제목 '추억'은 정말 잘 지었어요.

  개와 로봇이 서로 의지할 수 있었던 시간, 그 추억은 'September'라는 노래에 담겨있어요. 둘은 언제까지나 그 노래를 기억할 겁니다. 'Robot Dreams'는 보는 이에게 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 과거의 추억에 현재의 시간이 겹겹이 층을 쌓아가며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꼭 그 추억의 누군가와 이어지지 못해도 괜찮아요.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 테니까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arth, Wind & Fire의 히트곡 'September' 공식 뮤직 비디오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Gs069dndI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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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Nolan)
바비(Barbie, 2023),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마에스트로 번스타인(Maestro, 2023), 감독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는 러닝타임이 3시간이다. 그렇게 긴 영화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영화는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펜하이머( J. Robert Oppenheimer, 1904-1967)의 일대기를 다룬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은 정교하게 배치된 3개의 시간 축을 중심으로 영화를 짜나간다. 오펜하이머가 대학생 시절이었던 때부터 원자 폭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그리고 오펜하이머에게 오욕과 수치를 안겨준 1954년의 청문회, 오펜하이머의 반대자 루이스 스트로스(Lewis Lichtenstein Strauss)의 1959년 청문회가 그것이다. 놀런은 이렇게 시간대를 교차시켜 보여주는 데에 재미를 붙인 것 같기도 하다. '덩케르크(Dunkirk, 2017)'에서도 그런 걸 써먹은 적이 있다.

  그런 내러티브적 변형이 효과적이었는지 내게는 물음표로 남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덩케르크'는 참으로 별로였고, 그나마 '오펜하이머'는 볼만 했다. '오펜하이머'는 실존 인물인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놀런은 그의 인생이 격변의 시대와 교차하는 지점을 통찰력 있게 포착한다. 원자폭탄 개발의 주도적 과학자로서 오펜하이머에게 영광의 월계관만 씌워진 것은 아니었다. 내연녀의 비극적 죽음,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견뎌야 했던 사상 검증, 원폭 투하가 가져온 엄청난 살상에 대한 죄책감이 오펜하이머의 삶에 포개어져 있었다.

  영화는 뛰어난 과학자가 겪어야 했던 인간적 불행이 '국가'가 수행한 거대한 전쟁 프로젝트와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부각시킨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가,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순간에 과학자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오펜하이머의 삶은 그것을 통렬하게 입증한다. 결국 소모되어 버려지는 삶.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 비참함과 서글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2023년의 미국 영화계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의 바비(Barbie, 2023)이다. 완벽한 바비 인형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 주인공 바비가 한 여성, 인간으로서 눈뜨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전형적인 페미니즘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감독 그레타 거윅은 매우 영리하게 그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바비 인형 회사 마텔(Mattel)과 긴밀히 협조한 자본주의적 영악성은 영화 속에서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다. 그럼에도 영화 '바비'의 세계관은 진부함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뜻이다.

  2024년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선정에서 '바비'가 철저히 외면당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비'는 그런 대접을 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건 페미니즘에 대한 박대가 아니다. 그레타 거윅의 빈곤한 영화적 상상력과 놀라운 정치적 능력의 합작품 '바비'를 누구나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영화 나는 반대일세', 미국 아카데미 협회 회원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헐리우드의 또 다른 화제의 영화로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Maestro, 2023)'이 있다.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는 이 영화의 감독으로, 그리고 주인공 번스타인역으로 북 치고 장구 치는 놀라운 원맨쇼를 보여준다. 최근 몇 년 동안 할리우드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파는 데에 열심인듯 하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은 유럽 출신의 지휘자가 주류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미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이다. 영화는 그러한 번스타인의 음악적 성취 이면에 자리한 개인사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동성애자인 번스타인의 삶은 '결혼'과 '출세'라는 세속적 틀과 맞물리며 지속적인 파열음을 낸다. 영화 속 번스타인은 뛰어난 지휘자 이전에 기만적인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온다. 번스타인은 끊임없이 남자 연인들과 바람을 피우는 자기 삶의 방식에 한없이 관대하다. 결별을 요구하는 아내에게는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고 비난하고, 딸에게도 진실을 숨기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이 남자는 외적으로는 위대한 지휘자(Maestro)라는 광휘에 휩싸여 있지만, 그 뒤에는 일그러진 인간적 면모가 숨겨져 있다.

  영화 속에서 번스타인은 동료 음악가를 비롯해 자신이 가르치는 남학생과도 연인 사이가 된다. 명백하게도 그러한 번스타인의 행동은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의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을 예상하게 만든다. 번스타인의 모습은 영화 '타르(Tár, 2022)'에서 여성 지휘자 타르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인다. 물론 타르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감독 토드 필드(Todd Field)가 만들어낸 가상의 지휘자이다. 그 영화에서 타르는 음악적 권력을 남용하다 파국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단초는 타르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성적인 착취의 도구로 사용한 데에서 기인한다.

  영화 '마에스트로'를 보면서 나에게 든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타르를 몰락하게 만들었던 성적 취향과 권력의 속성이 번스타인에게는 그 어떤 손상도 끼치지 않았는가? 번스타인은 죽을 때까지 남자들과 자유롭게 연애하고 동거했다. 그의 그런 사생활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고, 음악계에서도 암묵적인 비밀로 유지되었다. 브래들리 쿠퍼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을 둘러싼 번지르르한 신화에 균열을 가한다. 문제는 그 균열이 번스타인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근원적 탐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영화 '마에스트로'는 젠더와 예술 권력, 결혼제도와 성소수자인 LGBT에 관해 그럴싸한 변죽만 울리다 끝내버린다. 브래들리 쿠퍼는 감독으로서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 듣기 좋은 노래와 볼거리만 있는 음악 영화는 한번 보고 잊혀질 뿐이다. 결국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진정성 있는 이야기이다.


*토드 필즈의 영화 '타르(Tár, 202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12/todd-field-tar2022.html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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