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우리의 하루'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원은 전직 배우입니다. '전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현재는 배우 일을 그만둔 상태입니다. 해외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상원은 선배 정수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어요. 이 집에는 '우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있습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주 통통하고 귀여운 고양이예요. 홍상수의 영화 '우리의 하루(In Our Day, 2023)'에는 고양이 '우리'의 하루가 살포시 들어가 있어요. 고양이 집사들을 위한 영화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영화 '우리의 하루'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영화에는 2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합니다. 전직 배우 '상원(김민희 분)'과 시인 '홍의주(기주봉 분)'가 그들입니다. 영화는 두 인물이 각자 보내는 하루의 일상을 대비시켜서 보여줍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상원은 낮잠을 청하고, 나중에 조카 지수의 방문을 받습니다. 나이든 시인 홍의주도 아침나절에 잠을 좀 잤다가 일어납니다. 그런 그에게 배우 지망생 재원이 찾아오지요. 상원의 조카 지수도 배우 지망생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지수는 유명 배우였던 상원에게 배우의 길에 대한 조언을 청합니다. 재원은 시인 홍의주에게 인생의 지혜를 듣고 싶어하구요. 그리하여 상원은 지수에게, 홍의주는 재원에게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하루는 다른듯 하지만 비슷하게 보이지 않은가요? 초심자(novice)는 권위자(expert)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하루'는 각각 배우와 시인이라는 예술가가 들려주는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 영화에서 상원의 캐릭터에는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 김민희의 이야기가, 시인 홍의주의 모습에는 감독인 홍상수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홍상수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좀 다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런 데에는 아마도 감독 자신의 매끄럽지 못한 사생활이 포개어져 있기 때문이겠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자기 삶과 사랑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워요.

  "그냥 입 좀 조용히 하세요! 다 자격 없어요!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 그러구 살고 있어. 다 사랑받을 자격 없어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에서 여배우 영희를 연기한 김민희의 대사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영화는 명백하게 홍상수의 자기 변명과 연민이 범벅이 된 영화에요. '당신들이 뭔데, 우리의 사랑에 왈가왈부 하는 거냐?' 네, 그렇습니다. 그게 홍상수의 본심인 거죠. 좀 뻔뻔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런 뻔뻔함에도 불구하고,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구현해 내는 영화적 세계에는 기이한 매력이 있거든요. 그 영화는 배우 김민희에게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이라는 명예를 안겨주기도 했구요.

  자, 다시 '우리의 하루'로 돌아갑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자신의 배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상업 영화가 배우의 내면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진정한 배우로 연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죠. 상원은 배우란 직업은 '솔직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글쎄요, 그게 어떤 걸까요? 배우라는 직업도 멀게 느껴지는데, 상원이 말하는 '솔직함'이 무엇인지 일반인이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영화 속 초심자 지수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상원은 지수에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냐고 확인하듯 묻습니다.

  지수가 상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막막함을 시인을 찾아간 재원도 느낍니다. 재원은 존경하는 시인 홍의주를 만나서 삶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삶과 사랑의 의미를 아는 것이 배우를 꿈꾸는 재원에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요? 시인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건져낸 지혜들을 풀어놓습니다. 인생은 짧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짜' 삶을 살아라. 그런데 그 '진짜 삶'이 뭘까요? 의외로 홍의주가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이 인생철학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건 홍상수 자신의 인생 철학이기도 할 테니까요. 상원이 조카 지수에게 했듯, 역시 시인 홍의주도 재원에게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듣냐고 묻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홍상수는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술가는 오롯이 예술가가 성취해 낸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예술지상주의인 낭만주의적 관점이지요. 그런 그에게, 자신의 사생활이 논란이 되는 것은 참기 힘든 역경일 거예요. 작가로서 그는 영화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합니다. '우리의 하루'에서 홍상수는 연인 김민희를,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영화 속에서 상원이 말하는 배우의 '솔직함'과도 일맥상통하는군요. 예술가로서 그들 자신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홍상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과 김민희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강변합니다. 그건 영화 속에서 정수와 고양이 '우리'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정수는 '우리'를 잃어버린 걸 알고서는 실신해 버립니다. 정수는 현관문 앞에서 쓰러져서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죠. 겨우 정신을 찾은 정수는 고양이를 찾기 위해 현상금 '천만 원'을 내 건 전단지를 만듭니다. 물론 고양이는 나중에 정수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하지요. 고양이의 이름 '우리(We)'는 어쩌면 뻔한 클리셰(cliche) 같기도 해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뿐인가요? 상원은 홍의주가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서 먹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라면을 먹습니다.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죠. 물론 영화 속에서 상원과 홍의주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명백한 암시는 없어요. 관객은 그냥 그럴 것이다, 라고만 추측할 뿐이죠.  

  영화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가 써낸 어느 하루의 일기 같은 인상을 줍니다. 무겁지도 않고 담담한 이 일기에는 뚜렷한 감독 자신의 각인이 찍혀 있어요. 예술가의 삶은 자신의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홍상수는 자신이 바라보는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습니다. 거기엔 가식이 없어요. 영화 속에서 시인 홍의주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에 무알콜 맥주를 마시면서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영화의 마지막, 시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양주를 한 잔 들이키죠. 그것이 자신의 남은 삶을 재촉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가 그에게는 시인으로서의 '진짜 삶'을 살아가게 만드니까요. 영화 속 시인 홍의주의 '술과 담배'는 홍상수에게는 '영화'임이 자명하죠.

  홍상수의 삶에서 '영화'는 시인 홍의주의 '부서진 기타'와도 겹칩니다. 홍의주에게는 기타가 있었는데, 후배가 술 마시다 실수로 부수어 버렸죠. 후배는 홍의주에게 멋진 새 기타를 선물해 주지만, 홍의주는 그 기타를 자신의 다큐를 찍는 대학생 기주에게 선물해 버립니다. 시인은 기주에게 새 기타는 연주하기도 어렵고 익숙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직 배우 상원에게도 누군가 선물해 준 작은 기타가 있어요. 상원은 그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시인의 '부서진 기타'는 상원의 작은 기타를 통해서 노래를 이어가는 거죠. 그건 감독의 영화와 삶을 함께하는 배우 김민희의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고요.

  영화 '우리의 하루'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감독 자신의 영화적 선언문 같아요. 홍상수는 자신과 김민희가 잘 견뎌왔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세간의 비난이야 어찌 되었든, 그들에게는 버팀목과 같은 예술, 그러니까 '영화'가 있어요. '우리의 하루'를 통해 관객은 작가 홍상수의 진솔한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영화를 통해 들려줄 부서진 기타의 노래는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on-beach-at-night-alone-20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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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시작되면 중년의 한 남자가 모니터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신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나름 숭고한 봉헌의 기도인데, 첫 장면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래요. 홍상수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삶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객은 주인공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 균열의 지점이 나에게는 늘 흥미롭습니다. 홍상수가 '인트로덕션(Introduction, 2021)'에서 보여줄 등장인물들의 삶 속 균열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영화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제목 'Introduction'처럼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에 대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게 기부하겠다고 기도한 중년의 남자는 한의사입니다. 그에게는 청년이 된 아들 영호가 있지요. 영호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영호는 여자 친구 주원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한의원에 왔습니다. 영호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지요. 따로 떨어져 사는 아들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한의원에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좀 이상합니다. 그는 급한 환자도 아닌 지인을 먼저 만나고 아들에게는 그냥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지인은 유명한 배우(기주봉 분)입니다. 아버지는 지인에게 침을 놓아주고는, 영호를 만나는 대신에 자신의 방으로 가버립니다. 그렇게 1부는 영호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2부에서는 영호의 여자 친구 주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주원은 패션 공부를 하겠다면서 이제 막 독일로 유학을 왔죠. 지원은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자신의 화가 친구(김민희 분)를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화가 친구가 당분간 딸의 숙소를 제공해 주기로 했거든요. 영화의 제목 'Introduction'의 뜻인 '소개'에 걸맞는 부분이군요. 엄마와 딸, 엄마의 화가 친구가 한자리에서 만나서 짧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여기에 영호가 등장합니다. 유학을 떠난 여자 친구가 보고 싶다며 갑작스럽게 독일로 찾아온 거죠. 엄마가 주원에게 그런 영호를 '황당하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어쨌든 주원은 영호를 잠깐 만납니다. 영호는 주원과 거리에서 기쁨의 포옹을 나누며, 자신도 주원처럼 유학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죠. 연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납니다. 둘 사이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여요.

  3부는 다시 영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영호의 엄마는 지인과 강원도 바닷가의 음식점에 앉아있습니다. 그 지인은 1부에서 영호 아버지의 한의원을 찾았던 유명한 배우입니다. 영호의 엄마는 영호를 배우에게 소개시킬 생각이죠. 영호는 친구 정수와 함께 그곳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왜 영호의 엄마는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일까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1부에서 영호는 한의원에서 그 배우를 만났고, 그걸 계기로 영호는 연기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런데 지금 영호는 연기를 그만둔 상태에요. 엄마는 그런 아들이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거죠. 이 어색한 만남은 과연 어떻게 끝날까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트로덕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연령대가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아주 젊은 친구들이죠. 홍상수의 영화적 관심사가 이제 젊은 세대로 이동한 것일까요? 관객은 '인트로덕션'에서 소위 MZ 세대라고 하는 요즘의 청년 세대들에 대한 홍상수 나름의 관찰과 탐구를 볼 수 있어요. 홍상수는 그들을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2부에서 영호와 주원이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죠.

  영호는 주원을 따라서 유학이나 올까, 하고 즉흥적으로 말하죠. 주원이 학비 이야기를 하자, 영호는 아버지에게 돈이 많다고 말합니다. 영호의 부모는 일찍 이혼했고, 영호는 엄마와 함께 살았죠. 그런 면에서 1부에서 영호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영호는 주원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돈 욕심이 더럽게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식인 자기가 유학 가는데 아버지가 돈을 대주지 않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왜 영호는 아버지를 그렇게 경멸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돈을 받는 건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좀 웃기지 않나요? 청년 영호는 그렇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은 아닌듯 싶어요.

  그건 주원도 마찬가지죠. 주원과 엄마의 사이는 따뜻한 모녀 사이 같지는 않아요. 주원은 엄마의 권위에 주눅든 어린 아이처럼 보여요. 주원이 유학을 온 이유도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하고 온 것도 아니고요. 엄마의 화가 친구가 주원에게 왜 의상 공부를 하려고 물으니, 그냥 어렸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있었다고만 말하죠. 그러자 화가 친구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그쪽 일을 하고 있어서 잘 안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주원에게 '그거 너무 힘든데 할 수 있겠냐'고 묻죠.

  '너무 힘들다'는 이 문장은 영화에서 기이하게 반복됩니다. 3부에서 주원은 영호와 우연히 만나지요. 주원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병 때문에 공부도 그만 두었고, 독일인 남편과도 헤어졌죠. 과거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서글픈 만남이로군요. 주원은 영호에게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주원이 처한 상황이 힘든 것처럼 보이기는 하네요. 그런데 그 힘듦을 표현하는 부사 '너무'는 과도한 주관적 해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는 MZ 세대의 어법에 어울린다고나 할까요?

  영호에게도 삶은 '너무' 힘듭니다. 영호의 삶도 방향성이란 게 없어요. 영호가 연기를 시작한 건 아버지의 한의원에서 만난 유명 배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어요. 그는 영호에게 얼굴이 잘생겼으니 배우 해도 좋겠다, 라고만 말했을 뿐이에요. 영호는 생판 모르는 남이 한 말 한마디에 기대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죠. 그렇게 들어선 연기자의 길에서 영호는 여배우와의 포옹 연기를 할 수 없다며 때려칩니다. 영호가 생각하기에 그건 진짜가 아닌 가짜의 감정으로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건 영호가 진실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정작 영호가 연기자가 되는 데에 일조한 유명 배우는 그런 영호를 한심하다며 크게 면박을 줍니다. 기성 세대가 보기에 영호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는 즉흥적이고 유약하며, 끈기라고는 없는 애송이죠.   
  
  하지만 영호와 친구 정수가 바라보는 기성세대는 속물적이고 비합리적이에요. 영호의 엄마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배우는 영호와 친구 정수에게 술은 마시되 절대로 취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라며 다그치죠. 술을 마시는데 취하지 않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그게 가능한 일도 아니구요. 영호와 정수의 눈에 유명 배우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다지 존경할만하지 않습니다. 진정성도 없는 그냥 우스꽝스러운 술꼬장일 뿐이죠. 그렇게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는 소통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유리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영호는 갑자기 겨울 바다에 뛰어듭니다. 죽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구요. 차디찬 바닷물에 흠뻑 젖은 속옷 차림으로 '너무 춥다'고 계속 말하는 영호에게 청춘의 현실은, 진짜 춥기는 할 겁니다. 영호는 연인과는 진작에 헤어졌고, 직업도 없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홍상수의 영화 'Introduction'은 그가 바라본 MZ 세대에 대한 삐딱한 미소처럼 보여요.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즐겁게 보았습니다. 홍상수는 자신의 과거 영화들을 끊임없이 갱신하며 나아가고 있어요. 작가로서 현실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그것을 영화적인 세계로 엮는 솜씨도 여전하고요.

  아,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있는 점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네요. '담배'에 관한 것입니다. 해외의 평론가들에게 홍상수의 영화는 흔히 '소주 영화(soju movie)'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소주'는 홍상수의 영화를 흘러가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인트로덕션'에서는 '담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주인공 영호를 비롯해 주원의 엄마, 그 엄마의 친구 화가는 담배를 아주 길게, 맛깔나게 피웁니다. 물론 '소주'도 나옵니다. 홍상수는 여전히 '소주'를 사랑하니까요. 담배와 소주가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영화 'Introduction'은 좁혀질 수 없는 세대 간의 간극을 흥미 있게 드러냅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홍상수의 영화 '물안에서(In Water, 2023)'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4/01/in-water-2023.html

***담배가 주요한 내러티브적 요소로 나오는 중국 영화 리뷰
중국 현대 여성의 서사와 담배, The Cloud in Her Room(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cloud-in-her-room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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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발뒤꿈치가 아픈지 6개월이 지났다. 나는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발이 아프기는 했는데, 그래도 집 안에서 걸어 다닐 정도는 되었다. 아마도 '족저근막염'이겠거니, 하는 생각은 했다. 그건 별다른 치료법도 없고, 좀 쉬면 낫는다고 알고 있었다. 산책하러 나가는 것도 그만두고, 집에서 편한 비치 샌들을 신으면서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발은 계속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최근에는 맨발로는 발을 제대로 디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제대로 된 진단이라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합 병원 정형외과의 족부 전문의를 찾아갔다. 그게 지난주의 일이다. 의사 선생은 40대 초반의 차분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 동안 아팠는지, 어떻게 아픈지, 하루 얼마나 걷는지, 의사는 병력 청취를 꼼꼼히 했다. 발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갈 때는 평소 자신이 얼마나 걷는지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럴 땐 만보계가 도움이 된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의사는 발을 좀 보겠다고 했다. 나한테 아픈 부위를 눌러 보라고 하고는, 내가 아프다고 말한 뒤꿈치를 살짝 만져보았다.

  "족저근막염입니다. 근막의 두께도 괜찮아 보이니까, 일단 약을 좀 써보죠."

  이 의사 선생은 분명 명의가 틀림없다. 엑스레이도, 초음파도 찍지 않았다. 진단을 위해 추가적인 검사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족저근막염은 낫는 데에 1년까지도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좀 심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를 하기도 하지만, 비급여 치료이고 환자마다 효과가 달라서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발 마사지와 족욕을 하고, 쿠션이 있는 편한 운동화를 신으면서 지내보라고 당부했다. 나는 좋은 의사 선생이 처방해 준 소염진통제를 2주분 받아왔다.

  약을 먹어서 그런가, 발의 통증이 빠르게 나아진 듯 했다. 어제는 모처럼 날이 좋아서 정말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갔다 왔다. 그런데 웬걸, 귀신같이 발이 다시 아프다. 결국 족저근막염은 쉬는 게 답이구나 싶었다. 발이 아파서 걷질 못하니까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발이 아프다고 하면서 나는 낫기 위해서 뭔가를 꾸준히 하지는 않았다. 족저근막염이 나으려면 아킬레스건 스트레칭을 하고, 발 마사지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안 했다. 글을 쓸 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발에다 테니스공을 놓고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다. 나는 아픈 발을 위해서 '격렬하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발이 저절로 낫기를 기다렸다.

  뭔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어렵지만 시작하고 계속 해 보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인생에서 그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픈 발이 낫는 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든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쥐어짜 내는 것, 글을 써 내려가는 것. 몸은 피곤하고, 도무지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석 달이 되었다. 나는 내가 시 습작을 계속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쓰다 보니 시 쓰기가 나름 재미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힘든 일상의 숨구멍 같기도 했다. 나는 '시'가 가진 근원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과 사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시'를 통해 해나가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디에다가 응모하려고 쓴 시도 아니었다. 다만 삶을 더 잘 견디는 방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좋았다. 아이쿠, 족저근막염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렇게 시로 마무리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러하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시를 한번 써보라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느낀 평온함을 이 글의 독자들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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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수 2024-03-24 22:41   좋아요 0 | URL
빨리 나으시길바랄께요 시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푸른별 2024-03-24 22:47   좋아요 0 | URL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전쟁미망인 숙희(최은희 분)에게는 대학생 딸 경희(엄앵란 분)가 있습니다. 둘은 얼핏 보기엔 엄마와 딸 사이라기 보다는, 자매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세상의 풍파가 비껴간 것처럼 보이는 고운 외모의 미망인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네, '돈'입니다. 숙희는 양장점을 하다가 큰 빚을 지고 가게를 정리한 상태이지요. 그런 숙희에게 출판사 전무 상규(김진규 분)는 숙희의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돈을 빌려줍니다. 어려운 때에 자신을 도와준 상규에게 숙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사랑의 감정이겠지요. 그건 상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규도 숙희를 나름 연모하는 것처럼 보여요. 상규와 숙희,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영화 '동심초(Dongsimcho, 1959)'신상옥 감독의 대표작에는 잘 언급되지 않는듯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 보니, 1959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더군요(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or.kr).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동심초'에는 결코 낡지 않은 주제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말입니다.

  그렇다면 숙희와 상규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숙희의 처지를 좀 살펴보죠. 숙희의 큰 문제는 '돈'이에요. 숙희는 상규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그 돈은 그냥 받은 돈이 아닙니다. 갚아야 할 돈이지요. 물론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상규는 숙희에게 빚 독촉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숙희가 상규에게 느끼는 고마움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어찌 보면 좀 통속적이지 않나요? 사랑이란 감정이 '돈'이 가진 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 말이에요. 이 영화에서 '돈'은 중요한 내러티브적 요소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

  상규가 숙희에게 빌려준 그 돈은 그의 사업자금입니다. 그는 이 사장과 함께 투자해서 출판사를 세웠습니다. 이 사장은 상규를 사윗감으로 보고 투자한 거예요. 상규는 사장 딸 옥주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사장과 상규가 그런 사이라 해도 상규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숙희에게서 돈을 받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상규의 마음은 옥주 보다는 숙희에게로 향해있습니다. 그런 상규는 숙희에게 빚 갚으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규의 누나(주증녀 분) 김 여사는 속이 타들어 갑니다. 김 여사는 독신으로 남동생 하나 바라보며 열심히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왔거든요. 어떤 면에서 김 여사에게 있어 상규는 아들과 같은 존재일 겁니다. 그런 남동생이 애 딸린 과부에게 눈이 돌아갔으니, 그 누나 심정이 어쩌겠어요? 더군다나 김 여사와 숙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에요. 김 여사는 숙희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동생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든 동생과 숙희를 떼어놓고 싶죠. 남동생은 번듯한 집안의 사위가 되어야만 하니까요. 김 여사는 숙희에게 빚 독촉을 하면서 에둘러 숙희가 상규의 앞길을 막고 있다며 비난합니다.

  그럼, 상규의 약혼녀 옥주(도금봉 분)의 입장을 살펴볼까요? 옥주는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습니다. 부잣집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고,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죠. 그런데 옥주는 그 남자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 여자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과년한 딸이 있는 미망인이에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도대체 저런 여자를 왜 좋아하나 생각하면 속도 상하고 분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옥주가 상규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 없어 보여요. 사랑이 어디 마음대로 되냔 말이죠. 상규는 집안의 재력으로 자신에게 어설프게 묶어놓은 상태일 뿐입니다. 옥주는 궁리 끝에 숙희를 찾아가지만, 별 말도 못 하고 돌아오지요. 옥주는 돈으로도 안되는 게 있다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숙희의 딸 경희도 '돈' 때문에 고민합니다. 엄마의 양장점이 망하면서 경희의 미래에도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경희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요. 엄마는 살고 있는 집을 팔아서 빚을 갚으려고 하지요. 그러면 경희는 딱히 머물 곳도 없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희는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생각도 해봅니다.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돈이 많다면 엄마의 빚도 갚아주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경희가 그런 기대를 하고 만난 남자는 겉멋 든 바람둥이일 뿐입니다. 경희는 '돈'만 보고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되죠.
   
  이 영화에서 돈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부산의 종이 무역상으로 나오는 김 사장(김승호 분)일 수도 있겠군요. 그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숙희에게 반합니다. 김 사장은 숙희를 아는 상규에게 숙희와 잘 이어질 수 있게 해달라며 부탁하죠. 상규에게 김 사장은 사업상 중요한 고객입니다. 애 딸린 홀아비이기는 하지만 김 사장에게는 숙희와 잘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옵니다. 숙희는 그렇게 돈의 힘을 앞세우는 김 사장을 역겹게 생각합니다. 숙희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감정이니까요.

  이렇게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돈에 얽혀 이리저리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돈'을 빌려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된 숙희와 상규의 사랑은 결국 '돈'을 갚으면서 끝나버립니다. 상규는 숙희를 간절히 원하지만, 숙희는 상규의 앞날을 위해 마음을 접습니다. 그리고 살던 집을 팔아 상규에게 빚을 갚고, 시골 친정집으로 떠나버리죠. 영화 '동심초'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비탄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흐르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곰곰이 톺아보면, 그것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죠. '사랑'이란 감정은 현실이 배제된 진공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 속 두 주인공 숙희와 상규의 감정은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기는 해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 사랑도 인생의 많은 것들처럼 진정으로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죠. 거기에는 돈과 계층, 사회적 관습이라는 중요한 요인이 작동하고 있어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연인은 결국 이별을 택합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숙희는 부산 출장을 가는 상규를 배웅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갑니다. 하지만 숙희는 역사(驛舍)의 쇠창살 옆을 서성이다 그냥 돌아오지요. 영화의 마지막, 상규는 시골로 떠나는 숙희를 보고자 서울역에 가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상규 또한 숙희가 예전에 머물렀던 쇠창살에 고통스럽게 매달립니다. 이 기이한 수미상관(首尾相關)은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둘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화려한 비탄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내게 흥미 있게 느껴지는 부분은 숙희의 딸 경희의 미래입니다. 숙희는 친정집으로 내려가면서 딸 경희에게 후견인을 지정해 줍니다. 예전 경희의 과외 교사 기철에게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것이지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전통적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이었습니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아들)을 따라야 했지요. 숙희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따라야할 자식이 없는 셈입니다. 숙희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면서, 딸에게는 미래의 사윗감을 정해준 것처럼 보이지요.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뿌리가 여성들을 옥죄고 있던 전후의 한국 사회에서 경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더 지난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도 사랑과 결혼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르겠네요.


*사진 출처: kmdb.or.kr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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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습니다. 오래된 한국 영화가 나오네요. 한형모 감독의 영화 '여사장(A Female Boss, 1959)'입니다. 한형모 감독은 전후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대표작 '운명의 손(1954)''자유부인(1956)'에는 해방 이후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가득 차 있어요. '여사장(1959)'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겠군요.

  이 영화는 원작 희곡이 있습니다. 원작자 김영수(1911-1977)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희곡과 시나리오, TV 드라마까지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김영수는 해방 직후에 자신이 쓴 희곡을 공연할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1948)'도 그 시절에 쓴 희곡이지요. 이 희곡은 '김영수 희곡
·시나리오 선집 2(출판사 연극과 인간)'에 실려있습니다. 나는 '여사장' 영화를 보고, 원작이 궁금해서 책을 주문해 보았습니다. 2007년에 펴낸 책이라 혹시 절판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요. 그런데 아주 멀쩡한 새책으로 잘 받을 수 있었어요. 아마 잘 안팔렸을 거에요. 이런 책은 관련 전공자들이나 볼 법한 책이지요.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펴낸 출판사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해두지요.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용호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화려한 양장 차림의 요안나(조미령 분)는 기다리는 뒷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길게 통화 중이지요. 짜증을 내던 뒷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용호만 남습니다. 용호는 요안나의 면전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하지요. 요안나가 용호를 무시하자, 용호는 요안나가 애지중지하는 강아지 마리오를 냅다 발로 차버립니다. 아주 고약한 첫 만남이지요? 대개의 로맨틱 코미디의 도입부가 그렇잖아요. 기분 나쁜 첫인상을 갖게된 남녀가 결국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요안나와 용호도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안나는 '신여성사'라는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어엿한 여사장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장이면 사장이지, 여사장이라는 단어는 뭐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건 영화가 나온 그 시대가 1950년대라 그렇지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요. 요안나는 그런 시대에 자기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사장만 여자가 아니라, 잡지사 편집국도 여인천하입니다. 허 주임(김희갑 분)은 여자 편집국장을 비롯해 여직원들에게 늘 구박당하는 신세에요. 그는 툭하면 잡지 기사 고쳐 쓰라고, 냄새 나는 반찬 좀 먹지 말라는 말을 듣고 살지요.      

  요안나는 자신이 펴내는 잡지 이름대로 '신여성(新女性)'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과격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안나는 회사의 여직원들에게 '연애 금지령'을 내립니다. 요안나에게 연애는 독립적인 여성의 자존감을 꺾는 일입니다.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그 시대의 봉건적 남자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요안나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 싶어하죠. 하지만 요안나의 현실은 그런 바람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요안나의 잡지사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그런 요안나에게 돈 많은 오 사장(주선태 분)은 후원자를 자처합니다. 영화 속에서 오 사장이 독신으로 나오는 것과는 달리, 희곡에서 오 사장은 유부남으로 나옵니다. 오 사장은 어떻게든 돈으로 요안나를 얽어매려는 흑심을 지닌 사람이에요. 자신이 원하는 잡지를 펴내기 위해 요안나는 고군분투합니다. 그즈음, 용호가 요안나의 잡지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옵니다.

  요안나는 용호에게 '두꺼비'라는 별명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맘놓고 그 별명을 불러대지요. '용호'라는 이름 대신에 '두꺼비'라고 불리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좀 안쓰럽기까지 해요. 어쨌든 용호에게 요안나는 '사장님'입니다. 용호는 요안나를 상사로 깍듯이 대합니다. 요안나는 그런 용호의 순수함과 우직스러움에 조금씩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사장'은 오늘날의 여느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별로 다를 게 없어요.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신여성, 페미니스트인 요안나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모습을 희화화해서 보여줍니다. 요안나는 자기 회사에 필요한 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해요. 요안나는 오 사장의 호의에 기대어 편하게 돈을 빌리려고 하죠. 결국 요안나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돈 많은 숙부입니다. 멋진 옷차림을 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외치지만 그건 다 껍데기처럼 보여요. 이점은 원작 희곡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요안나는 그 누구보다도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여자입니다. 연애를 거부하고 남자를 적대시하는 요안나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 면에서 원작자 김영수의 관점은 매우 전근대적이기도 하고요.

  영화는 여사장 요안나가 현모양처의 행복을 찾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안나의 잡지사는 두꺼비에서 남편이 된 용호가 사장이지요. 이제 요안나는 양장이 아닌 한복을 입고서,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찌개를 끓여놓고 집에서 기다립니다. 그 전화를 받는 용호의 뒤편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여사장 요안나가 있을 때는 분명 그 액자에 '여존남비(女尊男卑)'가 박혀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받던 허 주임은 편집국장 자리에 앉아 여직원에게 호통을 치지요. 영화의 이런 묘사는 일견 우스워 보이지만,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퇴행적인 가부장제의 반영일 뿐이죠.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원작 희곡이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희곡은 요안나와 용호가 함께 잡지사를 꾸려나가자는 상호 합의의 다짐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영화 '여사장'은 그런 희곡의 결말을 사정없이 비틀어 버립니다. 거기엔 일말의 융통성도 없어요. 영화 '여사장'이 보여주는 제대로 된 여성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성이고,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행복을 찾는 여성이지요. 영화 속 여사장, 아니 이제는 평범한 주부가 되어버린 요안나는 정말 행복을 찾았을까요?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가 상영된 1959년에 '여사장'을 본 여성 관객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거든요. 그들은 진심으로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며 집에 돌아갔을까요? 아니면, 여사장 요안나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분명한 건, 2024년의 여성 관객은 이 영화를 웃으면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음, 그러니까 아주 흥미 있는 영화거든요. 영화 속 시대를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kmd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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