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링크: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2 
https://blog.aladin.co.kr/sirius7/15597949



  "에이씨, 나 안할 거야!"

  한 인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단에 울려 퍼졌다. 열린 우리집 현관문 사이로 화가 잔뜩 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잘 안되어서 저러나 보네... 현장 인부들 가운데 지 성질 못 이기고 저러는 건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형님, 진짜 힘들어 죽겠어. 뭐가 이렇게 일이 많아."
  "야, 나도 힘들다."
  "아, 그럼 나하고 형님하고 일 바꿔서 할까. 바꿔! 바꾸자고."

  퉁퉁한 남자는 일도 안 하면서, 우리집에서 작업하는 늙은 인부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하는 '노가다의 세계'를 TV로 시청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우리 라인의 보일러 공사가 있었다. 공사는 아침 7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온갖 소음과 먼지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보니까, 이 공사팀은 대략 7명에서 8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일을 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의 공사를 했다. 대략 정해진 순서에 따라, 앞 공정이 끝나면 다음 공정을 맡은 인부가 그 일을 했다. 하루 종일 대문은 열어놓아야 했는데, 낯선 외부인이 내 집에 그 어떤 예의도 차리지 않고 마구 드나드는 것도 참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들은 결코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았고, 예의도 없었다. 아침에 제일 먼저 보일러 포장 뜯으러 온 인간은 전등을 켜놓지 않았다면서 큰 소리로 불평했다.

  내가 이제까지 보아온 그런 현장직 노동자들은 대개 '밝기'에 민감했다. 작업 현장은 무조건 환하게 밝아야만 한다. 이건 아주 환한 대낮에도 적용된다. 낮에도 전등을 켜놓아야만 한다. 나는 아침까지도 집안의 짐을 치우느라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침의 그 노가다는 아주 무례한 인간이어서, 전등불이 안 켜져 있다며 대놓고 성질을 부렸다. 그 더러운 성질머리는 공사로 드나들 때마다 신발을 내팽개치는 소리에서도 드러났다.

  이런 공사를 하게 되면 용역을 주는, 그러니까 공사비를 지불하는 집주인은 '갑'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을'이 되어버린다. 보일러 시공은 일반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다. 대개 '노가다'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제 현장의 전권을 쥐고 있는 전문가 '갑'이 된다. 집주인이 시공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저, 계약한 대로 공사가 무사히 잘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러니 인부들이 성깔을 부리는 것도 좀 너그럽게 보아야 한다.

  그런데 중간중간 인부들이 일해놓은 것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수도 배관을 연결할 때는 테플론 테이프로 감아서 연결을 하는데, 그 테이프 감아놓은 꼬라지가 정말 웃겼기 때문이다. 테플론 테이프는 마감이 잘 안되어서 깃발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야, 내가 감아도 저거보다는 더 잘 감겠다. 정말이지 물이나 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난방 분배기를 교체하느라 깨어놓은 시멘트 덩어리는 분배기함 안쪽에 대충 쌓아두었다. 내가 그걸 치워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곧 그 일을 맡은 인부가 와서 철판으로 그냥 덮어버렸다. 언젠가 TV 뉴스에 나온 인테리어 괴담이 떠올랐다.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입주한 집주인이 1년 뒤에 베란다 누수로 바닥을 뜯었더니, 거기엔 온갖 건축 쓰레기가 다 있었다는. 그렇게 분배기함에는 지저분한 시멘트 조각들이 그대로 매장되었다.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나는 마지막 현장 인부가 내민 작업 확인서에 서명을 해주고 문을 닫았다. 

  "일도 못 하면서 곤조는 오지게도 부리네."

  곤조. 근성(根性, こんじょう)이라는 뜻의 이 일본어는 영화 현장에서도 많이 쓰인다. 오래전의 일이다. 후배의 졸업 작품 상영회에 갔었다. 후배의 작품은 20여분 가량의 단편으로 장르는 드라마였다. 그런데 촬영이 좀 이상했다. 핸드헬드(Hand-held)로 촬영된 화면은 내내 정신 사납게 흔들렸다. 아니, 왜 저걸 저렇게 찍었지? 나는 중간 휴식 시간에 그 후배를 만났다.

  "근데 말이야, 왜 촬영을 그렇게 한 거야?"
  "아, 그게요. J가 촬영 감독이었는데, 핸드헬드로 하겠다고 빡빡 우겨서... 내가 끝까지 그건 아니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냥 걔한테 밀린 거죠."

  후배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J는 잘 알고 있었다. J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에 속했다. 그게 좀 웃긴 게, 뭔가 대단한 전문가적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쓰잘데기 없는 자부심에서 오는 거였다. 아마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 과정에서 후배와 제작팀은 대략의 작업 과정을 합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J가 정작 로케이션 현장에 가서는 핸드헬드로 찍어야겠다고 곤조를 부렸던 모양이다. 어쩌겠는가. 후배의 졸업작품은 어쩔 수 없이 J의 뜻대로 촬영되었다.

  1) 일머리도 없으면서 곤조를 부리는 것
  2) 맡은 일을 잘하면서 곤조를 부리는 것

  2번의 경우는 그나마 봐줄 만하지만, 1번을 인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떻게든 1번과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사람 사는 일이 꼭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보일러 시공 인부들의 곤조 부리기. 나는 그런 것을 관찰하는 것도 작가로서 나름대로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는 큰 그림을 생각하고, 책임감 있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 인부들은 보일러 설치를 누군가의 집에 온기와 편안함을 더하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대충대충 해버려도 괜찮은 일이었을 뿐이다. 노가다와 전문가의 그 머나먼 간극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수도 배관의 나풀거리는 테플론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감싸주었다. 테프론 테이프도 제대로 감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전문가'의 칭호는 결코 합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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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글: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1편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5583628


  폭풍 전야. 드디어 내일은 대망의, 아니 그 빌어먹을 보일러 공사가 있다. 오늘은 바로 옆라인 공사였는데, 하루 종일 들리는 공사 소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보일러'라는 기계는 전자레인지나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일러는 가스와 냉온수 배관, 난방 분배기와 연결을 해야 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당연히 보일러의 설치 과정은 까다롭다. 집안에 그런 기계가 들어온다는 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골칫덩이를 장만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개별난방이 기존의 중앙난방보다 더 좋은 점은 약간의 난방비 절약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의 90퍼센트의 입주민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개별난방 전환을 찬성했을까? 물론 기존 중앙난방으로 부과되는 난방비에 대한 불만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보다 아파트 소유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아파트 인근의 2개 단지는 여전히 중앙난방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개별난방 방식으로의 전환은 매매(賣買) 시, 그 아파트 단지 대비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아파트 단지 보다 더 오래된 그 아파트는 왜 개별난방 전환을 고려하지 않는가? 그곳은 그런 공사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 아파트 단지에서는 '재건축'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어차피 재건축할 거, 개별난방 공사를 해서 뭐하겠는가? 거긴 재건축 추진 위원회가 열심히 활동 중이다. 어떻게든 집값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먹고 자고 쉬는 곳이 아니라, 거대한 물질적 욕망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나처럼 공사 소음과 먼지가 귀찮아서 개별난방 전환에 '반대' 표를 던진 사람은 어떤 면에서 참으로 나이브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앙난방의 비효율성이 정말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선은 주민들의 전반적인 양해를 얻어서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동대표 회장의 독단적인 안건 상정에 이어 단 한 번의 설명회, 주민 투표, 공사 착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별난방 전환 공사는 전체 입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투표가 부결되면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입주자 대표 회의는 반대표 세대를 설득해서 정족수에 필요한 찬성표를 받아내면 된다. 기존의 찬성표는 그대로 유효표 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건 최근의 법원 판례를 근거로 한다. 법원은 입주자 대표 회의의 신속한 사업 추진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사에 반대하는 개별 세대의 선택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지난번 글에서 이제 개별난방 공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칭 '개별난방 공사를 우려하는 입주민 모임'이 실제적인 행동에 나섰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그들은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들이 오늘 엘리베이터에 붙인 종이 쪼가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 다음 주에는 담당 주무관이 아파트로 현장 실사를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다. 2) 보일러 공사 대금을 업체에 납부하는 일을 유예해달라. 그들이 부과한 보일러 가격과 공사비는 공동구매임에도 별로 저렴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청의 현장 실사가 끝난 후에 납부해도 늦지 않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점검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시공 과정에서 행정 절차상의 심각한 문제가 없는 이상 공사가 중단되기도 어렵고, 이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구청 공무원이 가진 권한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들은 관련 법 규정에 근거한 위법적인 사항만을 지적하고 행정적인 조치만을 부과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면, 시장이 온다고 해도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 기구가 가진 권한은 막강하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는 아파트 단지의 최종 의사 결정 기구로, 입주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각 동의 입주자 대표들에게 양도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도 그 담당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어떻게 싸우지 말고 잘 알아서 하세요', 정도일 것이다.

  오늘 엘리베이터에는 새로운 공사 일정이 나붙었다. 아파트 단지의 주변 도로를 다 파헤쳐서 새롭게 도시가스 배관을 설치할 거라는 공사 공지였다. 이 작은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의 전망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재건축에 필요한 용적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재건축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개별난방 전환으로 집값이나 올리자, 이런 생각으로 90퍼센트의 주민들은 기꺼이 찬성표를 던졌다. 집안 곳곳을 죄다 들쑤시고 뒤집어엎으면서, 거대한 흰 벌레 같은 보일러 호스가 덕지덕지 연결된 거실의 정경은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감격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입주민들의 기대대로 집값 천만 원의 상승을 가져다주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집은 그렇게 엄청난 물욕과 총체적인 불합리성이 조우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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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요새 틈이 날 때마다 하는 일이 있다. 구글 서치 콘솔(Google Search Console)에 들어가서 내 블로그 글들의 색인 생성을 요청하는 일이다. 이제까지 써온 영화 글들이 대략 500편 정도이다. 이 글들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다가 직접 요청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려 500편의 글의 URL을 일일이 클릭해야만 한다. 클릭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구글에다가 '요청'하는 것이지, 그걸 들어주는 건 구글 마음이다.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인 셈. 구글이 보기에 내 글이 지들의 검색 결과에 나올 만큼 영양가 없다고 생각하면, 퇴짜를 놓을 수도 있다.

  아이구, 구글 행님요. 좀 잘 봐주이소. 겉으로는 이렇게 말을 해도, 속으로는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만 든다. 내 머릿속에는 문득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대사관의 비자 신청은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구불구불, 마치 전국구 맛집의 대기 줄처럼 미국 대사관 앞에서 비자 신청을 하려고 기다리는 이들은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기나긴 줄을 선 이들의 사진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이 가지는 힘을 상징했다. 구글 서치 콘솔을 드나들면서 내 많은 글의 URL을 일일이 찍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딱, 그 사진 생각이 났다. 천조국 미국은 구글이며, 나는 그 구글 왕국의 방문 비자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는 최근까지도 '구글 서치 콘솔'이 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의 블로그 개설기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블로그의 글이 구글 검색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 직접 글의 색인 생성을 요청해야 합니다'는 구절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내가 글을 쫙 쓰면 구글 갸들이 다 알아서 검색하도록 해주는 거 아니었어? 정말로 나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내 구글 블로그는 원래 알라딘 서재의 영화 글 백업 창고 개념의 블로그였다. 그런데 그쪽 블로그의 방문자 유입은 아주 적었다. 나는 그 블로거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내 블로그 글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 글이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해주십사' 나는 구글에 정중하게 요청해야 하는 거였다.

  나처럼 구글 왕국 행 방문 티켓을 얻으려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블로그로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더욱더 열심히 구글의 대문을 두드리고 두드릴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글, 콘텐츠가 구글 검색 결과에 나와야지 사람들이 와서 볼 테니까. 구글은 그런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즉시 응답하지 않는다. 아니, 하기 어렵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구글의 입장은 이러하다.

  "우리 시스템에는 매일 엄청난 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우리가 그걸 다 들어주려면 시스템에 부하가 걸려. 그러니 시간이 걸린다고. 기다리던가, 아니면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당신 글이 인터넷의 어디쯤에 있는지 찾아서 알려줘. 물론 그렇게 알려줘도 언제 등록이 될지 확답은 줄 수 없어."

  산더미처럼 쌓인 곰 인형의 눈알 붙이기 부업. 구글 서치 콘솔에다가 500편이 넘는 글의 URL을 찍고 있는 내 모양새가 그러하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을까? 그건 내 새끼들, 내 피와 시간과 정신이 들어간 그 글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는 속담. 여기에서 '함함하다'는 말은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함함하기 그지없는 그 글이 구글의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딱, 그것뿐이다.

  나에게는 아직도 인터넷으로 눈알을 붙여주어야 할 곰인형이 300개나 남아있다. 구글은 하루에 기껏해야 10여 개 안팎의 색인 생성 요청을 받아들인다. 나는 새삼 새로운 시대의 정보 권력자 구글의 위엄을 실감한다. 그것은 나에게 카프카가 쓴 '성(城)'의 거대한 성문 벽 앞의 한 인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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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방 가위를 찾기 위해 나는 방 2개를 왔다 갔다 했다. 이곳저곳을 훑어보고 나서야 가위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는가? 아니다. 지금 집안은 난민 캠프를 방불케 한다. 작은 방에는 생수가 쌓여있고, 다른 방에는 세탁 세제와 항아리며 잡다한 살림살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바로 '개별난방 전환 공사'이다. 내가 살고 있는 32년 된 이 구축 아파트는 중앙난방에서 개별난방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다. 400 세대가 못 되는 이 작은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공사판으로 변했고, 하루 종일 공사 소음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끔찍하다.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동대표 영감탱이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주워듣고는 귀가 펄럭였던 모양이다. 갑자기 '개별난방 전환 공사'를 입주자 대표 회의 안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더니 입주민을 위한 설명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렸다. 그 설명회에 주민 몇 명이 참석했는지는 모른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방송으로 내보내길, 많은 입주민이 개별난방 전환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곧 개별난방 전환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냥 부결되려니 했다. 공사가 시작되려면, 전체 입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찬성을 해야 한다. 나는 반대 입장이었다. 그 지난한 공사는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물론 겨울이면 난방비가 많이 나오기는 했다. 특히 가스 요금 인상률이 무척 높았던 작년 겨울은 난방비만 30만 원 가까이 나왔다. 주민들 사이에서 난방과 관련한 이런 저런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난방을 넣는 날씨와 시간대로 인한 민원도 매해 반복되는 문제였다. 그런 불편함이 있기는 해도, 중앙난방에 익숙해진 나는 구태여 개별난방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겨울만 그럭저럭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다수 주민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무려 90퍼센트가 넘는 압도적 찬성률로 개별난방 전환이 결정되었다. 그 결정에는 공사가 완료되면 '집값이 오른다'는 장밋빛 전망도 깔려있었다. 우리집 포함, '반대' 표는 겨우 20세대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 1차 공사로 가스계량기 교체와 가스관 연결 공사가 이루어졌다. 관리사무소의 공지문에는 다용도실을 치워달라고 적혀 있었다. 공사 1주일 전부터 나는 다용도실의 짐을 빼내었다. 무슨 화수분처럼 살림살이가 나왔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그릇과 화분도 있었다. 그것들을 내다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공사를 하게 되면 먼지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 먼지들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부엌의 잡다한 물건들도 치워놓아야 했다. 내가 오늘 주방 가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입주민 찬반 투표에서부터 시공사와 보일러 선정, 이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과연 그 세부적인 결정이 얼마나 투명한 걸까? 겨우 몇 명의 입주자 대표라는 사람들이 거수기처럼 참석하는 회의와 회장 주도의 사업 추진은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찬성표를 던진 90퍼센트의 주민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불만과 균열의 지점은 엊그제 엘리베이터에 붙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서 드러난다.

  자칭 '개별난방 공사를 우려하는 모임'이라는 사람들이 글을 써 붙여놓았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사 내용과 상황이 주민들에게 제대로 공유되지 않고 있다. 공사 업체에 입주민의 불만을 전달하고 시정을 요청하려고 한다. 뜻이 있는 입주민분들은 일요일 저녁 8시에 주민회관에 모여달라.

  "웃기고 자빠졌네."

  그걸 읽자마자 그 말이 나왔다. 아니, 그럴 거면 공사 전에 입주자 대표회의 방청 신청을 하고 발언을 하던가,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던가 해야지. 이제 와서 도대체 뭘 하자는 건가. 이미 아파트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한 마당에. 머저리들. 버스 떠난 다음에 등신처럼 손 흔드는 격이다. 공사 업체에 뭔 요구를 한다는 건가? 공사 완료 기념 열쇠고리라도 받아내겠다는 건가? 그 거지같은 종이 쪼가리는 멸시 받아 마땅하다.

  일주일 뒤에는 보일러 설치 공사가 있다. 또 한 번 이 집은 먼지와 소음에 휩싸일 것이다. 이 공사를 해서 얼마나 세대 난방비가 절약될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원치 않는 공사를 다수결이라는 다수의 횡포로 한 달 넘게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공사는 8월 말이 되어서야 끝날 예정이다. 개별난방 전환 공사는 아파트라는 애증의 주거공간과 입주자 대표회의라는 불투명한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불신만을 나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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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2021)'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1. 밑바닥 인생 넬리의 선택

  케이블 방송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채널은 국회방송(NATV)입니다. 외국의 다양한 다큐는 물론 괜찮은 영화도 방영합니다. 특히 '다양성 영화관'이라는 프로그램이 눈길을 끕니다. 주로 제 3세계 영화들, 아시아권을 비롯해 유럽 변방 국가의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거든요. 그 영화들의 작품성이 균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시청자들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특색있는 영화들을 틀어준다는 데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국회방송에서 방영한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도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좀 길어요. '비밀과 거짓말: 시크릿 네임'이 한국어 제목이고, 영어 제목은 'Secret Name'이죠. 프랑스어 제목 'La Place d'une autre'은 번역을 해보면 '타인의 장소'가 되더군요. 제목부터 번잡스럽고 뭔가 의문을 품게 만드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하거든요.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약간의 스릴러 느낌도 있구요. 자, 그럼 영화 '시크릿 네임'의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죠.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대, 여자 주인공 넬리는 고아입니다. 하녀 생활을 하던 넬리는 주인집 남자의 추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옵니다. 하층민 고아 여성의 삶은 고단할 수 밖에 없지요.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넬리는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넬리에게 적십자사의 여성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요. 넬리는 간호사의 일을 배우고, 전장에 파견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졌거든요.

  전쟁터는 매우 참혹한 곳이지요. 그렇지만 넬리는 놀라운 적응력과 활달한 성품으로 간호사 일을 잘 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라는 이름의 스위스 여성이 프랑스군 막사에 머물게 됩니다. 로즈는 프랑스로 가야하는데, 전쟁통에 길을 잃었어요. 로즈는 넬리에게 프랑스에 있는 엘레노어 부인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로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인인 엘레노어 부인이 후견인이 되어줄 수 있다고 믿죠. 상류층 여성이기는 해도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잃은 로즈 앞에 놓인 삶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요. 그렇게 넬리와 로즈, 두 여성이 잠깐 통성명하는 사이에 폭탄이 떨어집니다. 쾅, 로즈는 죽고 넬리는 겨우 목숨을 건지죠.

  넬리는 무척 영리한 여성이에요. 넬리는 재빨리 로즈의 소지품을 챙기고, 로즈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네, 넬리는 로즈의 삶을 살아보려는 겁니다. 어렵사리 전쟁터를 빠져나온 넬리는 엘레노어 부인이 있는 낭시로 향합니다. 그리고 곧 부인을 만나죠. 부유한 사교계 인물인 엘레노어 부인은 로즈를, 아니 로즈 행세를 하는 넬리를 환대합니다. 특유의 붙임성과 신실한 태도로 넬리는 부인이 신뢰하는 손님이 되죠. 손님이라기보다는, 우리말의 '수양딸'이 더 어울리는 단어겠군요.

  넬리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봐 좀 불안하기는 하죠. 그건 영화를 보는 관객도 마찬가지구요. 넬리는 충분히 불우한 삶을 살았거든요. 넬리가 로즈에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로즈는 전쟁통에 불운하게 죽었으니까요. 부인에게는 목사인 조카 줄리앙이 있는데, 그도 넬리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엘레노어 부인은 넬리를 더 아끼게 되고, 사교계에도 소개하려고 하죠. 이제 넬리에게 꽃길만 펼쳐지는 걸까요? 그런데,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넬리에게 다가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로즈가 짠, 하고 나타나는 거죠. 넬리는 자신의 사교계 데뷔 파티에 나타난 로즈를 보고 기절해 버립니다.

  오, 영화가 꽤나 흥미진진해집니다. 과연 넬리는 어떻게 될까요? 넬리의 정체를 알게 된 엘레노어 부인은 어떻게 할까요? 로즈는 길길이 날뛰면서 넬리가 자신의 행세를 하는 가짜라고 외치죠. 그런데 거렁뱅이같은 행색의 로즈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부인은 넬리를 철썩같이 믿습니다. 넬리는 로즈만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면 자신의 평화로운 삶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죠.

  이후 넬리와 로즈의 대결은 스릴러물의 경로를 따라갑니다.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게 되죠. 줄리앙은 넬리가 진짜 로즈인지 적십자사의 기록이며 전쟁 때 로즈와 함께 일했던 군의관까지 만나봅니다. 로즈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며 정신병원에 갇히고요. 와우, 이 영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요?

  그런데 영화 '시크릿 네임'은 중반부가 지나면서 이야기의 힘을 잃어갑니다. 넬리는 로즈가 겪는 고초를 외면하질 못해요. 넬리는 결국 자신이 로즈 행세를 했다는 걸 부인과 줄리앙에게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길거리 여성들이 머무는 구빈원으로 가버리죠. 엘레노어 부인은 그런 넬리를 찾아와서 같이 살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넬리는 미국행을 결심합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딱, 끝나버립니다. 대체 이 허망한 결말은 뭔가요? 스릴러물도 아니고, 로맨스도 아니고, 뭔가 감동이 있는 드라마도 아닌 '시크릿 네임'은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는 영화에요.

 
2. 소설 'The New Magdalen(1873)'과 Wilkie Collins(1824-1889)

  나는 영화 '시크릿 네임'이 뭔가 더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찬찬히 읽어봤죠. 영화의 시나리오는 원작이 되는 소설을 바탕으로 쓰여졌어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작가인 Wilkie Collins(1824-1889)가 쓴 'The New Magdalen(1873)'이라는 소설이었죠. 제목의 '막달레나'는 신약 성서 속의 창녀 막달레나가 맞아요. 소설은 중편 소설의 분량입니다. 오래전에 저작권이 풀린 작품이라 인터넷으로 원본을 구해서 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Project Gutenberg: Free eBooks www.gutenberg.org). 나는 원작 소설이 궁금해서 한번 읽어보았어요.

  거리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 여자 주인공 Mercy Merrick이 영화의 넬리입니다. 로즈는 'Grace Roseberry'라는 이름으로 나오고요. 성씨의 로즈베리에서 로즈의 이름을 따온 것이 재밌군요. 엘레노어 부인은 Lady Janet으로 나옵니다. 재닛 부인의 조카 줄리앙은 영화와 이름이 같습니다. 주요 등장 인물이 하나 더 있죠. 재닛 부인의 지인으로 중산층 남성인 Horace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와 거의 비슷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영화 속 1차 대전이 아닌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이구요.

  원작 소설에서 호레이스는 머시(영화의 넬리)와 사랑에 빠집니다. 줄리앙도 넬리를 사랑하게 되죠. 좀 통속적인 삼각관계 로맨스군요. 이 로맨스는 그레이스의 등장으로 와장창, 깨져버립니다. 그레이스는 머시를 사기꾼 범죄자로 비난하며, 머시의 천한 신분을 비웃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고아 출신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머시에게 온정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소설 속 머시의 과거에는 매춘부로 살았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화의 넬리가 그냥 거지로 살았던 것과는 좀 다르죠. 말하자면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의 머시는 진짜 영락한 하층민 여성의 전형적인 인물인 셈입니다.

  작가 윌키 콜린스는 최하층민 출신인 머시를 인간적인 품격이 있는 여성으로 그려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그레이스입니다. 이 상류층 출신의 여성은 오만하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재닛 부인이 그레이스의 신분을 알고 나서도 머시에게 마음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결한 여왕이 다스리는 영국에서 '가정'은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죠. 그런데 소설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 가정에 매춘부 출신의 여성이 중심인물로 자리합니다. 작가 윌키 콜린스는 그런 면에서 아주 남다른 시대적 감수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작가 '윌키 콜린스'의 이름은 진짜 처음으로 들어봤습니다. 영화 '시크릿 네임'을 보고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영문 위키에 나온 작가의 이력을 읽어보니, 동시대 영국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와 교류도 했을 만큼 이름있는 작가였습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주로 추리소설이었어요. 소설 'The New Magdalen'은 콜린스에게 약간 막간극 같은 느낌을 주죠. 이 소설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막달레나'는 그의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오죽 인기가 있었으면 연극으로까지 상연되었을까요. 콜린스는 소설을 희곡으로 직접 각색도 했습니다. 나는 희곡도 읽어보려다가 그만두었어요. 뭐 소설하고 같은 내용일 테니까요.

  소설의 인기는 콜린스 사후에 무성 영화 시절로도 이어집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무성 영화가 여러 편 있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그걸 구해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검색되는 자료가 없어서 아쉽더군요. 결국 그 무성영화 시절의 유산이 프랑스 영화 '시크릿 네임(La Place d'une autre, 2021)'로 이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이 소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을까요? 그건 '새로운 막달레나'에 내포된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일 겁니다. 소설에서 머시의 신분이 탄로 나면서 호레이스는 머시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매춘부 여성은 신성한 가정의 여주인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목사인 줄리앙만이 머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함께 합니다. 재닛 부인은 둘의 사랑을 묵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줄리앙과 머시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지요. 신대륙 미국만이 신분과 과거를 뛰어넘은 사랑을 포용할 수 있으니까요. 윌키 콜린스는 불행한 매춘부에게 자비(여주인공 Mercy의 이름 그대로)를 베풀지 않는 당시 영국 사회의 폐쇄성과 이중성을 에둘러 비판합니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윌키 콜린스 자신의 경험이 어느 정도 소설에 투영되었다는 겁니다. 콜린스는 이른바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는 애 딸린 과부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그 두 여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 콜린스에게 동시대 사람들이 큰 돌맹이는 아니더라도 작은 돌맹이라도 던졌겠지요. 그의 행실은 분명히 비도덕적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콜린스는 '두 집 살림'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마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고수하며 살았던 모양입니다. 콜린스는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이들이 가식적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는 너희들은 뭐 얼마나 깨끗하냐,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빅토리아 시대라는 번지르르한 도덕 우위의 시대에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결국 영화 '시크릿 네임'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여정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나에게는 즐거운 여정이었어요. 한 편의 영화는 그렇게 접혀진 새로운 길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시대, 놀라운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요. 독자 여러분들에게 나의 이 글도 그러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작가 Wilkie Collins(1824-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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