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회(上映會)


졸업 작품 상영회에 갔었지
변두리 허름한 극장 5층
솔기가 살짝 닳아버린
연녹색의 의자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관객들은
반쯤 졸았던 것 같아
진짜로 그랬어 나도
졸 것 같았거든 겨우 고작
저런 걸 찍으려고 4년을
그 고생을 해가며 아,
비탄의 하품에 눈물이
고이며 웃음이 터졌지
단편 영화들의 배경은
하나같이 여름이야
졸업작품은 여름에
찍거든 아르바이트로
하는 것 같은 어설픈
배우 지망생들의 연기
진정성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했지
이제는 세상에 없는
너의 졸업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어
그걸 대신 쓸 수도 없고
다만 가끔, 이렇게 맑은
5월의 아침에 그저 그런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며
너와 네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생각하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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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冒瀆)


작은 포트메리온 잔에
반쯤 남은 멀건 아메리카노
미지근한 생강차를 섞는다
진중하면서도 우스운 맛

한국 땅에서 백 년의 시간이
지나면 가장 많이 나올
흔한 그릇 포트메리온
쉽게 잊혀질 그런 시

참새처럼 쪼아먹고 마시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지
그건 시에 대한 모독이야

대붕(大鵬)의 날개를 갖고
있어도 날갯짓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거야
날아야지 날아 봐야지
흙바닥에 고꾸라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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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公園)


가끔 인생이 B급 영화
같다고 생각해 공장에서
찍어낸 인디언 인형 같지
특색이 없어 다 비슷해
넌 좀 다르다고 느꼈지
처음부터 그래, 그랬어

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공원을 지나야만 했어
가슴이 뛰며 웃음이
터져 나왔지 눈부신
흰색 개가 아마도
시베리아허스키겠지
하품을 하며 쳐다봤어

이제, 잘려진 나무를
흔들던 바람은 너에게
닿을 수가 없어 공원은
폐가처럼 잠들어 있고
털이 빠진 크고 흰 개는
어디 길바닥을 헤매고
있겠지 마른 혀에 침을
겨우 적시며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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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32분


잠이 오질 않아
가만히 오늘을
거슬러 그래,
너무 진한 커피를
커다란 컵에다
오후 6시에

누렇게 번득이는
송홧가루의 밤
널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카락 한 톨도
가져올 수 없구나

한 올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으면
참 좋을 텐데
정말 그럴 텐데

버석거리는
흰머리를 쓸어
거울에 담는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트로트 가사는
참으로 가짜

누리끼리한 벽지
오래된 시계의
형광색 분침(
)이
소리 내어 우는
새벽 3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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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날의 시인


의류 수거함에
비어지게 나온
구겨진 와이셔츠
그것들은 영영
입을 수 없는가

길 건너편 공사판
바닥에는 흐린
솜뭉치 날리는
와이셔츠의 미래
주단으로 펼쳐져 있어

버려져 누워있는
먼 훗날 나의
관짝 같은 장롱
남은 날들을 헤아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상한 날이다
어쩌다 읽은
시들은
모두 죽은 이들
젊은 나이에
불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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