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으며 스산한 우리네 생을 잔잔하게 덮쳐오는 파도에 눈물을 섞어 날려보낸다. 다른 사람의 인생도 하물며 내가 살아온 인생도 다 알 수 없는 것. 추측이 아닌, 단지 이해하고자 타인의 생에 한발씩 다가가다보면 자신의 인생이 벌거벗은 채 달려온다. 윌리엄처럼 캐서린처럼 루시처럼, 그들의 생처럼, 나! 아파요! 그리고 우리는 비슷하게 위로받는다.
이 책만으로도 읽는 데 무리는 없지만 루시 바턴의 생을 좀더 자세히 읽으려고 2017년에 문학동네에서 나오자마자 사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이제야 펼친다. 예전에 “다시, 올리브”를 읽다가 흥미를 좀 잃어 스트라우트의 책을 멈추었던 까닭이다. “오, 윌리엄!”에서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 하려는 말은… 같다는 거야” 이런 구절을 자주 달아 읽기에 난 좀 거슬리네. 루시 바턴이 화자로 나오는데 그 인물의 언어습관으로 그리 쓴건지 스트라우트의 문체로 그리 쓴건지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 아마도 전자인 듯.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 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 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 P82

윌리엄이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알았던 적이 없어."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음, 문을 열 때 당신 먼저 몸을 들이미는게 아니라 나를 위해 문을 잡아주면 돼."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충분히 긴 바지를 입는 것도 괜찮겠지. 당신 카키 바지가 너무 짧아서 그걸 보면 겁나게 우울해지거든. 맙소사, 윌리엄, 당신 얼간이처럼 보인다고." - P144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 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천천히―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 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 -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 P168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건-기껏해야-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 그런 경우가 아니면 우린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야 - 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따라가, 루시. - P194

나는 알고 싶다.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캐서린, 늘 자기만의 특유한 향기를 발산했던.

요점은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는 문화적인 빈 지점이 있다는 말이고, 다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점이 아니라 거대하고 텅 빈 캔버스에서, 그게 삶을 아주 무서운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그런 나를 세상으로 안내한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안내될 수 있는 만큼, 그가 내게 그걸 해주었다. 그리고 캐서린도.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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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탄생


요새 오는 책들 귀퉁이가 자주 찌그러져 있다. 찢어지고 구겨진 것도 있다. 그냥 읽어도 되지만 새 책이니 새 책다운 모양새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다. 책 포장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이앞에도 세 권이나 그래서 교환 신청해 받았는데 이번 박스에서도 이 책 포함해 세 권이 그래서 교환신청 해두고 읽는다.

다음달에 있을 대장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넷이서 속닥하니 작은 자리를 마련했다. 케이크와 꽃과 와인에 세이로무시가 있는 조촐하고 맛난 저녁이었다. 식사 후 비건 베이커리 집의 쌀로 만든 케이크를 먹으며 폭신폭신 느끼하지 않은 맛에 감탄사 연발.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우리는 각자 뽑아온 대장님의 글 중 한두 문단을 낭독했다. 나는 유키 구라모토의 로망스와 레이크 루이스를 배음으로 깔아드렸다. 지금 이 나이도 예전엔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칠십 년을 넘기는 생은 또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다. 늙음을 피해갈 수 없는 대장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다.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독자로서 우리는 어떤 문장을 재생하고 남기게 될까. 작품을 완성시키고 재생시키는 건 독자의 몫. 좋은 독자를 품는다는 건 작가로서 축복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중에 비행기를 탈 때마다 중요한 통장이나 열쇠 그런 것들을 남편이 아니라 딸아들에게 말해두고 떠난다고 한 분이 말했다. 나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비행기 탈 때는 아들 딸 갈라서 엄마 아빠가 대동하고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는 사람도 있다고. 실제로 그렇게 사고가 나 죽은 이들도 있다고. 헉 나는 그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놀랐다. 난 바로 9.11을 떠올렸고 세상의 일은 내 재간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라고 평소처럼 생각했다. 난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사는가 싶다가 방금 “오, 윌리엄!”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아래 밑줄긋기.
이거지! 나는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나 계획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인간이다. 방만한가,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걸까. 나는 그냥 불안해 하지도 애쓰지 않고 운명의 뜻대로 살 것이다. 그러고 싶다.

오, 윌리엄! 영문판 표지가 훨씬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문학동네 번역본 받아보니, 표지 깔끔하다.

나는 윌리엄이 우리가 독일에 갔던 그해 여름에 내가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당시에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 나 자신을 충분히 잘 알았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윌리엄의 어머니는 바로 전해에 돌아가셨고, 우리 딸들은 각각 아홉 살, 열 살이었다. 딸들이 두 주 동안 여름 캠프를 떠나서 우리가 독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그때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나면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두려워서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나중에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차들이 우리 옆을 쌩쌩 달려가는 아우토반에서도 얼마든지 우리 둘 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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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2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낭만적인 출판 기념회에서 구라모토 피아노 선율에 맞춘 프레이야님 낭독^^
오😍프레이야님 ^^
오디오 플레이 올려주세요😻

프레이야 2022-10-22 20:57   좋아요 2 | URL
ㅎㅎ 그냥 속닥한 자리였어요.
오래 봐온 분들이라 오붓했어요. 저 낭독하다가 울컥해가지고 또 ㅎㅎ

stella.K 2022-10-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
엄창난 말이군요.

그런데 왜 대장님께선 마지막으로 책을 내시다는 겁니까?
한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입니다.
뭐 이런 말할 자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작가는 죽을 때까지 글을 써야 작가가라고 생각합니다.
바르트의 말이 옳다면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하여.ㅋ

프레이야 2022-10-22 20:58   좋아요 1 | URL
아뇨 ㅎㅎ 출판기념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굽요. 수필집 포함 저서가 아주 많습니다. 이번엔 미국 수필 번역집과 메타에세이 비평집 두 권요. 글이 수필이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분이시니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ㅎㅎ 열정이 엄청나신 분.

stella.K 2022-10-22 21:0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뜻이었군요. 근데 대장님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이리 말씀 하시니 궁금한데요? 어떤 책인가..?흠

프레이야 2022-10-22 21:04   좋아요 1 | URL
11월에 책 나오고 사정이 허하면 소개해 볼게요. 저녁이면 제법 추워요 스텔라 님 ^^

바람돌이 2022-10-22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이런 문장 보면 정말 프레이야님 작가 맞으심요.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이 나올까요? ㅠ.ㅠ
저도 그냥 운명의 뜻대로 사는 쪽입니다. 그걸 피하려고 한다고 피해질 거 같지도 않고요.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다른 비행기를 타고 하는 사람이 있나봐요. 신기하네요. ^^

프레이야 2022-10-23 00:21   좋아요 1 | URL
긴장되면서도 감동하시는 것 같아 찡했어요 ^^. 사는 일이 갈수록 두려움이 많아지지요. 저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많아서일까요. 저도 놀랐어요.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부부가 다른 비행기를 타려고 했다가 말았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문장을 보는 순간 어제 들은 그 얘기가 떠올라 더 놀랐네요 ㅎㅎ 날마다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어떤 것들! 새롭고도 낯익은.

페크pek0501 2022-10-23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 책이 난리?인지 저자를 보고 알았습니다.

프레이야 2022-10-23 20:18   좋아요 0 | URL
저자가 그렇지요 페크님!!
 

피에르 부르디외, 읽자.


1995년 자크 쉬락이 프랑스 대통령이 된 후의 일.

우리는 규칙과 요령 그리고 임시기관 같은 것들의 지지부진함을 안고, 대파업의 흩어진 시간을 되찾았다. 몸과 몸짓 속에는 신화적인 것이 있었고 지하철, 버스 없이 파리를 완강히 걷는 일은 기억의 행위였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목소리가 68년에서 95년을 리용역에 모았다. 우리는 다시 믿었다. <다른 세상>, <사회적인 유럽을 만들자는 새로운 말들이 사람들을 차분히 흥분시켰다.
그들은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말들을 반복하며 경탄했다. 과업은 행동보다는 말이었다. 쥐페는 정책을 철회했다. 크리스마스가 왔고 원래의 자신으로, 선물로 인내로 돌아가야 했다. 12월의 시위는 끝났고, 그것은 서사를 만들지 못했다. 다만 밤중에 행진하는 군중들의 모습만 남았을 뿐 사람들은 그것이 세기의 마지막 대파업인지 깨어남의 시작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엘뤼아르의 시 구절,
온 세상에 / 몇몇뿐이었던 그들은 / 각자 혼자 믿었다네 / 갑자기 그들은 군중이 되었네를 떠올렸다. - P258

놀라운 일 없는 나날들에 두려움, 격분, 희열의 파도가 쳤다. 우리는 앞으로 10년 동안 수천 명을 죽이게 될 «광우병> 때문에 더 이상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난민들과 불법체류자들이 있는 교화의 문을 도끼로 부수던 장면은 분노를 샀다. 갑자기 불공정한 느낌과 감정의 폭발 혹은 의식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가 행진하게 만들었다. 10만 명의 시위자들이 외국인들의 추방을 용이하게 만드는 드브레 법률안에 맞서 배낭에 배지를 보란 듯이 달고, 검은 여행 가방과 «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행진했으며, 집에 돌아가서는 서랍 속에 기념으로 간직했다. - P259

국회를 해산하고자 하는 시락의 우스꽝스러운 욕망 덕분에 좌파가 선거에서 이겼고, 조스팡이 국무총리가 됐다. 그것은 96년 5월, 환멸을 느꼈던 밤의 만회였고 덜 나쁜 재정립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기초 의료 보험 혜택과 근로시간 주 35시간으로 자신의 시간을 가지며, 모두가 좋은 삶을 살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적합한, 자유와 평등과 관대함을 추구하는 조치들의 재건이었다. 우리는 우파 정부 아래에서 2000년을 넘기지 않게 됐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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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을 읽으면 부르디외도 읽어야 돼요? ㅠ.ㅠ

프레이야 2022-10-20 21:36   좋아요 0 | URL
안 읽어도 되겠지요. ㅎ 이름만 들어본 피에르 부르디외 딱 나와가지고요.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찾아보니 읽고 싶은 게 몇 권 눈에 들어와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팍 꽂혔습니다. ^^

서니데이 2022-10-2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5년 전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면, 많이 멀지는 않지만, 아주 가까운 것도 아닌 느낌 같네요.
아니 에르노의 책들은 색감이 좋은 책이 많은데, 이 책도 괜찮네요.
프레이야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20 23:14   좋아요 0 | URL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되돌아보면 엊그제 같고요. 1984북스 책들 색감도 만듦새도 포근포근해요. 본문 글자체도 참 이뻐요.
굿나잇 서니데이 님. ^^

yamoo 2022-10-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 책들은 번역되너 나오는 족족 다 구매했습니다만...
읽은 작품은 별로 없어요. 번역들이 거의 개판이라...^^;;

프레이야 2022-10-21 13:51   좋아요 0 | URL
번역이 그러면 참 난감하네요.ㅠ
그중 그래도 추천할만한 책은 어떤건가요?
처음 읽는 사람에게요

yamoo 2022-10-21 17:36   좋아요 1 | URL
텔레비전에 대하여가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데...
번역이 걍~~
그래두 그나마 읽을 수는 있어요...^^;;

프레이야 2022-10-22 04:49   좋아요 0 | URL
네. 참고할게요 야무 님 ^^
 

프랑수아 모리악(1885.10.11. ~ 1970.9.1.)

“그의 소설에 드러난 깊은 정신적 통찰, 그리고 인간 삶의 드라마를 관통하는 예술적 강렬함”
- 1952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



아니 에르노는 그해 4월이 싫었다. 보부아르와 장 주네의 죽음이 연이어 일어나고(이 책엔 적혀 있지 않지만 보부아르의 성대한 장례가 치뤄진 다음날 장 주네는 마지막 원고 교정을 보러 파리에 와 있는 동안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두 달 후 희극배우 클로슈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1986년을 지나, 이맘 호메이니가 살만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일을 지나, 독일이 통일되자 프랑수아 모리악이 했던 말을 에르노는 소환한다. 그리고 세계 전쟁이 또 일어난다.

#
철의 장막 뒤에서 이루어진 세계의 애매모호한 미분화는 특정 국가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모리악이 “나는 그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들이 둘이라는 사실이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독일이 통일됐다. 정치적인 종말론 루머가 퍼져 나갔다. “세계의 새로운 질서의 노래”가 공표됐다. 역사의 끝이 다가왔다. 민주주의는 지구 전체에 퍼질 것이다. 세계의 새로운 행보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까지 확실했던 적이 없었다. 폭염 한가운데 휴가의 무기력한 질서가 흔들렸다. 한 신문에 커다랗게 적힌 제목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차지했다”는 51년 전 같은 날짜에 실렸던, 종종 재현되는 것을 지켜봤던 또 다른 제목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다”를 떠올리게 했다. 전투를 준비하던 한 전사가 불과 며칠 만에 미국 뒤에 있던 서양 열광들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프랑스는 클레망소를 허풍 떨며 보여줬고 옛날 알제리 시절처럼 군인 소집을 고려했다.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어떤 사건을 그리워했다는 듯이 전쟁을 필요로 했고 단지 TV 시청자일 뿐이었던 사건들을 부러워했다. 오래된 비극이 욕망과 다시 만났다. 역대 가장 머리가 희끗했던 미국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히틀러”와 싸우게 됐다.
- 226, 세월, 아니 에르노



보르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적이고 다감한 아버지와 종교심 풍부한 어머니 아래 자란 모리악. 전쟁 때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고 전후 카뮈와 의견 대립도 있었다. 테레즈 데케루, 오드리 도투 주연의 영화만 보고 안 읽었네.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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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세월>이 뭔가 제가 생각한 소설과는 다른 느낌인듯하지 말입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는데요. ㅎㅎ

프레이야 2022-10-20 21:34   좋아요 1 | URL
함축된 문장 행간에 많은 걸 내포하지 말입니다 ㅎㅎ 살아온 세월이 안팎으로 에르노를 관통한 느낌요.

mini74 2022-10-20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레즈 데케루 새파랑님 리뷰 본 기억이 납니다. 영화도 있군요 ~ 영화포스터 참 세련되고 예쁩니다 ~

프레이야 2022-10-20 21:35   좋아요 1 | URL
오드리 토투 넘 이쁘죵
표지 그림이 인형의집 표지그림과 같은 거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ㅎㅎ

coolcat329 2022-10-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세월>을 샀는데요...왜냐면 아니 에르노 책 중 가장 두껍더라구요. ㅋ
근데 발췌문 읽어보니 좀 어렵습니다. 😅
아니 에르노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세월을 첨부터 읽어도 될까 싶네요.

프레이야 2022-10-21 10:19   좋아요 0 | URL
1984북스 이쁘지요. 그중엔 세월이 제일 두껍네요 ㅎㅎ 오자 있어서 조금 실망이지만요. 처음 읽으시면 세월을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쿨캣 님. 에르노의 생을 다 훑고 갑니다. 다른 책들은 거기에 세부적으로 나뉘는 시기의 글이네요. 2008년인가? 나왔으니 그전의 일들이 거의 다 들어가 있어요. 에르노의 예리하고 거침없는 생각과 문장, 모르거나 반갑거나 그런 이름, 지명 등등 나오면 찾아보게 되어요. ^^ 저도 아직 모두를 읽진 못해서 한 권씩 읽어보렵니다.
 

연필로 쓰기 / 김훈
2022.10.19 낭독녹음 세 시간
313-381쪽 14,15,16파일 완료


어제 도서관 가는 길, 차에서 쇼팽 폴로네즈 6번이 흘러나왔다. 조성진 연주로. 크흐 좋다. 언제 다 왔는지도 모르게 당도하고 겹주차하면서 그때야 고양이 습식캔 내다놓고는 그냥 온 걸 깨달았다. 아이고 치매야 ㅠ
도서관에 밥 먹으러 오는 냥이 세 마리가 있는데 여기 직원 샘 한 분이 사료랑 간식을 준다. 어쩌다 그릇 채워 놓는 걸 깜빡하면 유리창을 두드린다고 ㅎㅎ 다음주엔 잊지 말자.


<연필로 쓰기> 중, 말의 더러움에 대한 장에서 나열한 더러운 단어들 뒤 한자 일일이 찾아 한글 뒤에 첨언하느라 좀 애먹었다. 더러운 말들을 줄줄이 열거하고 뜻풀이 한 후 저자는 아래와 같이 썼다. 책에는 한자로 표기된 ‘말씀 언’이다.

들이대자면 끝이 없고 더러워서 이만하겠다. ‘언’자는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에 보이는데 그후의 역사 속에서 ‘언’은 수많은 글자를 탄생시키면서 글자마다 이처럼 무거운 죄업을 뒤집어쓰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말의 더러움, 말의 비열함, 말의 사특함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번창했다. (연필로 쓰기, 337)


김훈 쓰고 안웅철이 찍은 <공 차는 아이들> 에서 발췌한 장이 한 장 나온다. 집에 와 찾아보니 책이 앞 쪽 책탑에 묻혀 안 보인다. 책꽂이에 꽂아둔 기억까진 있는데 … 절판이고 나는 오래전 밑줄긋기를 올렸네.

‘생명의 막장’이라는 장에서는 이국종의 <골든 아워> 1,2를 읽고 쓴다. 미루다 계속 밀렸는데 다음에 조만간 읽어야겠다. 읽고 싶어졌다. 점자도서관에서도 그 책을 다른 봉사자가 녹음 중이다.

전자 시대, 스마트 시대의 ‘언’ 의 타락은 화誰, 광証, 무誣의 기능을 극대화시킨다. 추종자가 많고 왁왁대는 소리가 크면 가짜뉴스는 사실을 이긴다. 가짜뉴스를 향해 ‘너는가짜뉴스다‘라고 외치면 둘 다 가짜뉴스가 되는 판이다.
국회뿐 아니라 뉴스와 정보도 서로 물타기를 한다. 말을 섞어서 휘저어놓으면 웅성거림만 남아서 누항은 언제나 수군거린다. - P338

멀리 하프라인을 건너서 다가오는 공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의 모든 궤적과 충격, 흐름과 끊김, 전진과 후퇴의 모든 자취들을 그 안에 지니면서 늘 현재의 공이고, 닥쳐올 모든 시간의 가능성이 그 현재의 시간 속에 열려 있다. 그래서 공은 굴러가고 인간은 쫓아간다. 공이 굴러갈 때, 굴러가는 공을 작동시키는 힘은 쫓아가는 나의 힘이 아니고그 공을 차낸 너의 힘이다. - P373

이국종은 중증외상환자 수술방을 ‘막장‘으로 인식하고있다. 수술방은 어둡고 긴 복도 끝에 있다. 생업의 현장에서 추락하거나 깔려서 몸이 으깨진 사람들, 사고나 범죄피해자들, 훈련중에 부상당한 군인들이 ‘막장‘으로 실려온다. 헬리콥터는 막장에서 다친 사람들을 싣고 막장으로 날아온다.
막장은 갱도의 맨 끝이다. 한자로는 채벽이라고 하는데, 곡괭이로 벽을 찍어서 석탄을 캐내는 자리라는 뜻이다. 막장은 생산의 최전방이다. 막장꾼이 곡괭이로 찍어낸 만큼만 갱도 밖으로 나갈 수가 있고, 그가 찍어낸 만큼만 갱도는 전진한다. - P377

이국종의 저서 『골든아워』 두 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그의 후배이며 동료의사인 정경원이 나오는 페이지다. 정경원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육군보병사단에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이국종을 찾아와서 제대 후에 외상센터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자원했다. 정경원은이국종 밑에서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환자를 살려냈다. (2권 363쪽)
정경원은 이국종의 막장을 함께 지켜왔다. 지금 이국종의 왼쪽 눈은 거의 실명상태다. "눈 때문에 생긴 내 공백을 정경원이 몸을 던져 꾸역꾸역 메워나갔다" (2권 160쪽)고 이국종은 썼다. - P381

그는 수술방에서 간호사가 수술가위Mayo Scissor를 건네줄때 손바닥에 와닿는 가위의 촉감을 좋아한다고 썼다(1권33쪽). 이 가위는 사람의 혼을 이승에 붙잡아놓는다.
그는 구두 닦는 일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는 구두에 구두약을 칠하고 헝겊으로 비벼서 구두코 끝에서 광이 올라올 때 환자가 죽어나간 뒤의 허탈한 마음이 ‘조금 안정을 찾아갔다‘고 썼다. 가망 없는 수술이 끝난 밤에, 연구실에 혼자 남아 그는 신문지를 펴놓고 구두를 닦고 있다. 수술가위의 촉감이나 구두 닦는 일을 좋아하는 그는 ‘작업하는 사람‘이고 작업을 통해서 완성돼가는 사람이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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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도 낭독녹음 봉사 하고 오셨군요. 항상 생각하지만 정말 대단하시고 훌륭하세요.
연필로 쓰기에서 김훈작가의 글은 항상 그렇듯이 뭔가 결기가 가득한 글이라 낭독하시기 쉽지 않았을듯한데요.
아 그리고 저렇게 한자가 있으면 어떻게 낭독하는지도 궁금하네요. ^^

프레이야 2022-10-20 19:01   좋아요 2 | URL
잘하시는 분들 많아서 전 이제 에너지가 달립니다. 오늘 말고 어제 갔다 왔어요.
매주 수요일^^. 김훈 문장은 사실 낭독하기에 그리 좋지 않아요. 나긋하지 않고 특히 이 책은 끊기듯 좀 딱딱한 문체라 혀가 자꾸 오작동 ㅎㅎ 되돌아가 다시 여러번 발음하게 되는 곳이 많아요. 한자나 괄호안 내용, 하이폰, 주석, 사진이나 그림 설명글 모두 읽어드려요. 예를 들어, 주석 있습니다_ 주석 닫습니다, 괄호 열고_ 괄호 닫고, 요런 식으로요. 한자 난감 ㅠ 아는 건 그냥 한글 읽고 뒤에 훈과 음 달아드리는데 모르는 건 사전 찾아서요. 모르는 게 더 많아요 ㅎㅎ 흐름이 덜 끊어지는 느낌으로다가 잘 읽어드려야 하는데 에구 그날그날 컨디션 따라서도 좀 다르고요. 다음주엔 이 책 마칠 수 있기를.

희선 2022-10-21 0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분이 밥을 줘서 없으면 달라고 문을 두드린다니 똑똑하네요 고양이가 사람한테 도움을 청할 때도 있다는 거 보기도 했어요 그런 거 그냥 모르는 척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한글만 읽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한데, 한자가 있으면 더 어려울 듯합니다 시각장애인은 한자를 어떻게 배우는지 모르는군요 그런 거 배우기 쉽지 않겠습니다 한자를 나타내는 점자가 있는지...


희선

프레이야 2022-10-21 12:43   좋아요 1 | URL
한자 점자가 따로 있기는 한데, 딱히 쓰는 사람이 없대요. 일본이나 가서나 쓸까...보통 한자 나오면 괄호에 풀어써요. 월(달 월) 이런식으로 글에 풀어쓰고요. 영어, 숫자는 점자로요. 여기 도서관에도 한자 점자 아는 분은 없다고 하네요.
고양이 지능이 세 살 아이 정도래요. 얼마나 영리한지 몰라요. 거의 본능적으로 아는 느낌요^^

호우 2022-10-21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귀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봉사라는 게 마음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닌 데 이미 실천을 하고 계시니 너무 멋지십니다~~

프레이야 2022-10-21 12:15   좋아요 2 | URL
호우 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할 수 있을 때가 호우시절인거죠 ㅎㅎ
할머니 되어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