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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맑음 - 아빠와의 배낭여행기
뱅상 퀴벨리에 지음, 김준영 그림 / 거인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4학년 남자아이들에게 아빠와의 마음의 거리가 얼마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보통이다, 전에는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가깝다, 가깝다, 이런 대답이 나왔다. 우리집 아이들에게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두 딸에게 이 질문을 해보아야겠다. 돌아올 대답이 조금 두려워 묻지를 못하겠거든 먼저 이책을 읽어보라고 부모님께 먼저 권하고 싶다. 아이들이 품을 수 있는 불만들이란 소소한 것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걸 소홀히 할 때 문제는 확대되고 나중엔 걷잡을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제는 '킬로미터 제로'다. 21일간의 배낭여행을 뜬금없이 제안하는 자유분방해보이는 아버지와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따라나서는 벤자민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열두 살이면 사춘기가 시작되는 정도의 나이다. 부모님과 대화가 줄어들고 불만들이 쌓이고 세상사가 모두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고 철썩같이 믿게 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모와 어딜 같이 가기도 꺼리고 또래친구들과 있는 시간을 더 가지려는 경향도 있다. 아니면 차라리 혼자 있기를 선호한다.
이 책의 벤자민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아빠의 이혼을 경험하고 아빠와 단둘이서 살아온 아이다. 이 책에서는 벤자민과 아빠의 살아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자세한 에피소드도 없고 인상적인 사건도 나열되지 않는다. 어쩌면 부모의 헤어짐으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많이 나와있으므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런 부분을 피해가는 것 같다. 그 대신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여행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것도 둘만의 여행으로 21일간 300킬로미터를 걸어서 하는 여행이다. 벤자민은 프랑스 지도를 펴고 아빠가 표시해 둔 빨간색과 흰색의 선을 따라 걸어갈 예정이란 말밖에 듣지 못한다.
엄마의 권유까지 합세하여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여행 제안 앞에서 뚱한 얼굴로 출발하는 벤자민의 마음의 변화가 여정과 함께 드러난다. 21일간 300킬로미터의 길 위에서 투박해보이지만 사실은 섬세하게 나타난다. 강한 척 하지만 속으론 연약한,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갖는 이중적, 어중간한 감정의 양립은 육체적인 과도기 못지 않게 격렬하게 겪게 되는 변화다. '바보처럼 우리는 걷기만 했다. 마른 땅인데도 왜 발이 질척거리는 흙에 빠지는 것처럼 무거운지 알 수 없었다.' (11쪽) 이런 식으로 벤자민의 마음은 자연 또는 날씨 그외의 다른 것들에 비유되어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그런 글귀들을 따라가며 마음의 변화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 벤자민은 그동안 아빠의 대화가 부족하였고 아빠의 관심도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왔다는 것을 여행 중간 쯤에서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억눌려있던 감정들이 설움에 복받쳐 터져나오면서 벤자민의 마음은 점점 화해의 길로 접어든다. 어쩔 수 없는 취향의 차이, 세대차이로 인한 정서의 차이 같은 것도 둘만의 여행을 통해 서로가 알게 되며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함도 배운다.
이들이 가까워지는 시간은 삶을 통틀어볼 때 그리 길지 않다. 20일 남짓 동안, 이들은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함께 호흡하며 원시적인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숨막힐 듯 감사하기도 한다. 특히 복잡한 심경을 끌어안고 억압되어있던 벤자민은 낯선 길 위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정을 느끼며 부대끼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어려운 일 앞에서도 스스로 해보거나 도움을 청할 줄도 안다. 더구나 어른들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감정 같은 것들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성장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을 꿈꿀 정도로 말이다.
벤자민이 도착한 곳은 30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가 아니라, 아빠의 마음이다. 처음엔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아빠의 마음에 걸어서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그곳은 아늑하고 미더우며 말하지 않아도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마음의 고향, 태어난 곳이자 돌아갈 곳, 생명의 원류인 것이다. 그래서 늘 그리운 곳이기도 하다. 여행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식의 여행이라면 둘이서, 가깝고도 먼 사람 둘이서 꼭 해보고 싶다. 나의 딸, 나의 아들 혹은 사랑하는 어떤 대상과 마음의 거리를 좁혀서 서로의 종착지로 삼고 싶다면 말이다. 마음과 마음,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울 수 있는 거리가 아닐까. 제로 킬로미터로 좁혀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사이가 어디에 있을까싶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한 편의 잔잔한 여행기로 군더더기 없이 풀어냈다는 점이다. 자연 속에서 한 호흡을 하며 감정의 거리를 좁혀가는 점도 그렇다. 걷다가 지치면, 우리는 아무 말없이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아빠와 나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70쪽) 또다시 그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경험이라면 살면서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공유될 것이다. 삽화도 깔끔하다. 하지만 한 문장에서 오자가 발견되어 아쉬웠다. 138쪽 - 해자 지는 모습을 싶은데요. -->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요., 로 바뀌어야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