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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비 공포가 피임을 부른다

성차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자 대학입시전쟁과도 깊이 연관된 출산파업… 엘리트층의 명문대 출신 독식을 제어하도록 ‘경쟁의 병목현상’ 뚫어줘야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일제 말기에 일제는 “낳아라! 불려라! 길러라!”라는 표어를 내걸고 10명 이상의 자녀를 낳은 가정에 대한 표창식을 거행하며 출산을 장려했다. 해방 뒤 이승만 정권도 다산 여성에 대한 표창을 계속했다.

‘3·3·35운동’에서 ‘1·2·30운동’까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1962년부터 가족계획 사업을 국가 시책으로 실시했다. 국가 시책으로서의 가족계획 사업 채택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이어 한국이 세 번째였다. 가족계획 사업은 전국의 모든 군에 보건소가 설치된 65년부터 본격화됐다. 이른바 ‘3·3·35운동’이 벌어졌다. “3명의 아이를 3살 터울로 35살 이전에 낳자”라거나 “3살 터울 셋만 낳고 35살 단산하자”는 구호를 내건 운동이었다.

1970년대 가족계획의 목표는 둘로 줄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년 앞선 생활 안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와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80년대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다.


△ 2006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는 1.08명으로 세계 최저를 기록했다. 저출산 재앙은 아이 낳기가 두려운 우리의 모순된 현실의 반영이다. 서울의 한 병원 신생아실 풍경.

그러한 구호 뒤에 숨은 치열한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정관수술 받으면 예비군 훈련 면제해준다고 유혹하던 것도 눈물겨웠지만, 자식에 대해 다다익선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일도 눈물겨웠다. 소현숙이 쓴 <너무 많이 낳아 창피합니다: 가족계획>이라는 글에 따르면, “가족계획 사업 초기만 하더라도 마을에 들어간 가족계획 지도요원들은 마을 할아버지들이 지팡이를 들고 쫓아나와 도망나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렇게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편이나 시부모 몰래 피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3년까지만 해도 남편 몰래 피임한 여성들이 57.4%나 되며, 시부모가 모르는 경우가 55.4%나 된다.”

그런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출산력은 1960년을 정점으로 해서 빠른 속도로 감소하다가 80년대 후반엔 재생산 수준 이하로까지 떨어졌다. 90년대 들어선 더욱 낮아졌다. 60년대 초 3%였던 인구증가율은 90년대에 이르러 1% 미만으로 감소했으며 출산율로는 1.6명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런 출산율 감소의 주요 원인은 산업화로 대변되는 사회구조 변동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선 자녀의 교육 문제가 출산을 억제하는 최대 요인으로 등장했다. 2004년 12월 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가 전주에 거주하는 20~40대 여성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교육비 무서워 자녀 못 낳는다”고 답한 사람이 42.1%로 나타났다.

2005년 3월28일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출산억제 기관에서 출산장려 기관으로의 변신을 선언하면서 ‘1·2·30운동’을 시작했다. 결혼 뒤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자녀를 30살 이전에 낳아 잘 기르자는 의미였다.


△ 전국적으로 뿌려진 1960~80년대가족계획 포스터들.

2005년 8월2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4년 출생·사망 통계 결과’에 따르면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합계출산율)는 1.16명으로 전년보다 0.03명이 더 줄었다. 1.16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미국(2.04명·2003년), 영국(1.79명·2004년), 일본(1.29명·2004년) 등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언론은 이를 ‘1.16 쇼크’라 부르면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특정 도의 인구 감소는 ‘재앙’ 아닌가

<중앙일보>는 “이러다가 우리는 17년 뒤부터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웃돌아 절대 인구 수가 감소하는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사회’를 맞게 된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것은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유사 이래의 재난 사태’라 할 인구의 감소를 눈앞에 두고 이 정부가 딴전만 부리고 있는 것이다”고 했다.

2006년 5월8일엔 ‘1.08 쇼크’가 찾아왔다. 통계청이 발표한 합계 출산율이 1.08로 세계 최저를 기록한 것이다. 언론은 또 한 번 ‘재앙의 도래’를 선언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면서 “서두르지 않으면 나라가 저출산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비상 상황’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가다간 경제는 주저앉고 복지는 부도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저출산 재앙’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그건 극소수고, 다른 언론과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1.08 쇼크’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나라의 인구 감소가 ‘재앙’이라면, 특정 도(道)의 인구 감소는 ‘재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여러 도가 해당될 것이나, 가장 대표적인 전라북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1966년 전북의 인구는 252만 명이었다. 당시 한국 인구는 2900만 명이었다. 그간의 인구증가율을 따진다면, 전북 인구는 오늘날 417만 명이 되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얼마인가? 178만 명이다! 다른 도들처럼 무슨 광역시가 떨어져나가 그런 게 아니다. 전북엔 광역시가 없다. 먹고살 길이 없어 무작정 다른 지역, 특히 수도권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 1973년 한 호텔에서 ‘낳는 것은 여자가, 안 낳는 것은 남자가’라는 가족계획 세미나 광경이다. 애를 낳지 말라는 국가주의적 구호는 30년이 지난 오늘 애를 더 낳자는 구호로 변했다.(사진/ 연합)

우리 언론이 지방 인구 준다고 걱정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국제경쟁력을 앞세워 수도권 규제를 풀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면서 정부 욕하기에만 바빴다. 무슨 대안을 제시하면서 욕한 것도 아니었다. 맹목적인 폭격이었다. 그런 폭격 받다가 헷가닥한 건지는 몰라도 노무현 정권은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기록될 뻔했던 ‘지방 살리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다 망쳐놨다. 노 정권의 업적은 정반대로 수도권 신도시 개발과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이 될지도 모른다. 수도권에 국내 대기업 공장 신·증설이 허용되는 것은 10년 만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거룩한 업적인가.

나라의 인구 감소하는 게 ‘재앙’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방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게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이다. 또 하나 주목할 건 출산율이 감소하는 이유다. 그 이유도 규명하지 않은 채, 출산율 감소를 부추길 정책을 고집하면서 출산율 감소를 재앙으로 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희진은 “저출산의 주원인은 가임 적령기 여성이 결혼 자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평균 출산 연령이 서른 살에 육박하는 29.7살이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여성(41.5%)이 남성(19.9%)보다 두 배 이상 부정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성 출산 독려는 ‘불가능한 임무’

“이제까지 한국이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도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복지 비용을 전혀 부담하지 않고 이를 가족 내 여성의 성역할 노동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성들은 더는 이러한 이중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현모양처’와 ‘커리어우먼’ 사이에서 분열과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 저출산은 그간의 성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조용하지만 격렬한 저항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던진 부메랑인 것이다. 저출산은 전통적인 여성 억압의 기제였던 출산을 저항의 무기로 삼은 여성들의 정치적 선택이다.”

이어 정희진은 “여성의 출산을 독려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대책이기 이전에, ‘불가능한 임무’다. 국민과 노동자의 개념을 바꾸고 인종적, 성적, 연령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다만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작게는 사교육비, 크게는 대학입시 전쟁의 문제다. 앞서 거론한 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 조사 외에도 여러 조사 결과 사교육비 부담 문제가 출산율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네 성적에 잠이 오냐?” “쟤 깨워라” “3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직업이(마누라 몸매가) 달라진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끝없는 연습만이 살길이다. 10시간: 서울대, 8시간: 연대, 7시간: 이대”

일부 고교 교실의 급훈들이다. 지난 3월 교육부가 비교육적이라며 전국 시·도 교육청에서 장학지도를 통해 해당 학교장들이 재검토할 수 있도록 당부해달라며 예시한 것들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교육적 급훈들이야말로 대학입시 전쟁의 진실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이즈음 사이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죽음의 트라이앵글: 누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2008년 대입이 내신-수능-대학별 고사로 이뤄진 ‘최악의 삼각형’이라고 주장하면서 “친구를 짓밟고 적으로 만드는 것이 창의적 인재인가”라고 물었다. 그 동영상을 만든 학생들은 “우리 가슴속의 분노와 피해의식, 그 모든 것은 바로 당신들이 키웠다”면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 대학입시를 목표로 하는 사교육비 부담은 출산율 저하의 주범이다. 묻지마 교육비 투자를 불러온 입시 전쟁의 해법 없인 출산율 저하에 대한 해법도 없다.(사진/연합)

이 동영상이 말한 ‘당신들’은 정부·학교·학원·대학 등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누구도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2003년 대학입시 전쟁으로 인해 자살을 하는 어린 학생들이 속출했으며, 그 연령대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으로까지 내려갔을 때, 언론은 자살 사건들을 개탄하듯이 보도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한국형 약육강식 시스템을 사실상 옹호했다.

대입 입시 전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걸 정상적인 ‘경쟁’의 수준으로 완화하는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그건 부모의 책임으로 간주되는, 10대 후반에 한 번 치르는 입시전쟁으로 평생을 결정하게 만드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엘리트층의 대부분이 지금처럼 서너 개 또는 대여섯 개 대학 출신이 독식하는 한, 그 그룹에 끼고자 하는 전쟁은 사라지지 않게 돼 있다.

보수언론이여,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돼라

따라서 기존 학벌의 ‘경로 의존’에 변화를 주는 게 필요하다. 기존 명문대들의 정원을 대폭 줄여 소수 정예주의로 가게 하면서 그들의 엘리트층 독식을 제어하고, 수십 개 대학 출신이 엘리트층 다수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한다면, 지금과 같은 경쟁의 병목 현상은 크게 완화될 수 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다시 한 번 경쟁을 해볼 수 있고 대학 졸업 뒤에도 경쟁이 가능하게끔 하자는 것이다. 자녀의 생존경쟁 책임을 부모가 지지 않게끔 해주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보자면 지금과 같은 ‘고교 평준화’ 정책은 올바른 대안이 아니다. ‘고교 평준화’ 철폐는 더더욱 아니다. 엘리트층의 명문대 출신 독식은 이미 오랜 ‘경로’로 설정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경로를 바꿔주지 않는 한 그 어떤 입시정책 변화도 하나 마나 한 짓이다. 그럼에도 그런 하나 마나 한 짓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입시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은 물론 정부 밖에서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 기존 경로의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예 그런 문제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로 변경 주장이 무조건적인 학벌 타파로 오해받은 측면도 있다. 진정 변화를 이뤄내고자 한다면, 교육운동가들도 학벌 타파는 불가능한 목표라는 걸 인정하고 경쟁의 병목 현상을 뚫어주자는 현실적인 목표로 이동하면 좋겠다.

보수언론에도 당부하고 싶다. 비판이 아닌 호소를 하고 싶다. 담론상으론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에선 국가주의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과연 한국에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보수언론이 부디 진정한 국가주의에 충실해주면 좋겠다. 진정 국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앞뒤가 맞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면, ‘출산율 재앙’의 주요 원인이 대학 입시 전쟁에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기존 대학 입시 전쟁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더욱 가열찬 전쟁을 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일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보수언론이 대학 입시 문제를 다룬 지면을 보라. ‘평등주의’니 ‘포퓰리즘’이니 ‘하향 평준화’니 운운하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난무한다. 입만 열었다 하면 그 소리인지라 신물이 날 지경이다. 보수언론이 원하는 대로 대학 입시 정책이 이루어진다면, 출산율은 더욱 감소할 것이다. 자신들이 믿는 어떤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이 믿는 또 다른 ‘재앙’을 자초하는 그런 어리석은 게임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보수언론이 진보 진영을 향해 쏟아내는 독설 중엔 타당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비극은 그런 독설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역설 같지만, 이는 그들이 진정한 국가주의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야는 국가에까지 뻗어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협소한 당파적 범주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총장은 서울대만 생각할 것인가

서울대 총장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총장쯤 되면 대한민국 교육 전체를 생각하는 발언을 할 법도 한데 여태까지 그런 총장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서울대 기득권 지키기에만 일로매진했다. 서울대가 잘되면 무조건 한국이 잘된다는 그들의 신앙은 자기 재벌그룹이 잘되면 그게 곧 한국이 잘되는 거라는 재벌 총수들의 신앙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국가주의자의 씨가 마른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국가주의자는 없는데 국가주의 비판이 난무하는 한국의 모습은 보기에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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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국경을넘어 > 월드컵의 나라들 -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월드컵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나라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메소아메리카


멕시코(Mexico) '군신 메히크틀리‘


메소 아메리카의 나라. 그 수도를 멕시코 시티라 부른다. 멕시코라는 지명은 처음에는 이 도시에 붙여진 지명이었다. 1521년 스페인 귀족 코르테스가 이끄는 군대가 이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 왕국의 도읍을 파괴하고 이 폐허에 노바이스파니아 식민지의 중심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중심도시는 용맹한 원주민 아즈텍족의 신앙이었던 군신 메히크틀리(Mexictli)의 이름을 따서 Mexico라 불렀다. 영어로 읽으면 멕시코이다.

1820년대 노바이스파니아 식민지가 본국에서 독립하여 멕시코 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이 멕시코 공화국으로 되고 수도는 멕시코 시티로 불리게 되었다.




코스타리카(Costa Rica) ‘부유한 해안’


메소아메리카의 공화국. 스페인어의 코스타 ‘해안’과 리카 ‘부유한’을 합성한 지명. 이 지명은 1502년 콜럼버스가 여기에 상륙하여 코스타델오로(Costa del Oro) '황금의 해안‘이라 이름붙인 데서 유래한다. 콜럼버스가 본 인디언은 황금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역은 황금의 산지라 생각하고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인 것이었으나 이 황금은 다른 지역의 것이었다. 황금해안이란 이름은 ’풍부함‘을 연상하게 하고 식민지로 되자 코스타리카 ’부유한 해안‘이란 지명을 낳아 카리브해 서안지방의 광역지명으로 되었다. 19세기에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국가가 형성되고 코스타리카로 부르고 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 ‘성령강림절의 첫 번째 일요일과 토바고’


메소아메리카의 조그만 섬 나라 공화국. 중심 섬은 트리니다드 섬. 이 섬 이름의 어원은 다음과 같다. 1498년 3회째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성령강림절의 첫 번째 일요일에 이 섬을 발견하였다. 이날은 스페인어로 트리니다드로 불리기 때문에 섬도 트리나다드섬이라 명명했다. 또한 이 지명이 선택된 또 하나의 이유는 섬의 지형때문이라고 한다. 콜럼버스가 섬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세 개의 봉우리가 보여 세 개의 섬인 것 같은데, 가까이에 이르면 하나의 섬이라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트리니다드 ‘삼위일체와 강령절 첫 번째 일요일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26년 트리니다드 섬은 토바고 섬 등 다섯 개의 섬과 함께 석유를 자원으로서 독립하고 공화국으로 되었다.




남아메리카



에콰도르(Ecuador) '적도‘


남미의 공화국. 15세기말 이 지방은 잉카제국령이었고 1532년 피사로의 스페인군이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부터 300여년의 시간동안 스페인 식민지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다른 식민지와는 격리된 상태에 있어서 독립지향이 강하였다. 1830년에 독립하여 에콰도르공화국으로 불렀다. 에콰도르는 스페인어로 적도를 의미하고 국토가 적도에 걸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파라과이 ‘파라과이 강’


남미의 공화국. 파라과이는 1811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 지방인데 파라과이천 유역지방을 중심으로 독립하여, 강 이름을 따서 파라과이공화국이라 불렀다. 파라과이 강의 어원은 인디언어 para '물, 강‘과 guay ’샘, 강’이 합쳐진 것이다.

우루과이라는 나라 이름에서도 과이(강)가 등장한다. ‘(우루)과이강 동쪽 지방’이라는 의미이다.




아르헨티나(Argentina) ‘은의 나라’ 또는 ‘라플라타강의 나라’


남미의 공화국. 1526년 이탈리인 탐험가 세바스찬 가보트가 남미 대륙을 남하하는 대하천을 답사하고 라플라타강(Rio de la Plata) '은의 강‘이라 부렸다. 이것은 그가 탐험 중에 만난 인디언이 그의 소지품과 은을 교환했다고 한데서 유래한 것인데 카보트는 이 유역에서 은이 생산된다고 추정하고 ’은의 강‘이라 불렀던 것이다(실제로는 은의 산지는 아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이 하천 연안의 비옥한 대초원은 스페인령 라플라타 식민지로 되고 많은 이주자를 맞이하게 된다.

1810년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 본국의 착취에 반대해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1826년에는 독립국이 탄생하였다. 새로운 나라 이름에는 옛 이름 라플라타 ‘은’을 대신하여 다른 스페인어 형용사 Argentina ‘은의’를 사용하였다. 현재 이름 아르헨틴은 이것을 영어화한 것으로 직역하면 ‘은의(나라)’인데 내용적으로는 ‘라플라타 강의 나라’를 의미한다.




브라질(Brazil) '붉은 나무‘


남미의 공화국. 붉은 색 염료의 원료목인 브라질 나무에서 나온 지명. 포르투갈인이 이 나라의 한 지방에 상륙했을 때, 브라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새빨간 붉은 색을 띠고 있던 이 나무를 보고서 브라질 ‘붉은 나무’(포르투갈어의 brassa '붉게 타오르는‘에서 온 말)로 이름 붙였다. 곧 이것이 지명으로 되어 식민지명으로 되었고 나라 이름으로 되었다.




아프리카



튀니지 - 튀니스(Tunis)시 '타니트흐신‘


아프리카 대륙 북부 튀니지 공화국의 수도. 이 도시는 기원전 수세기에 페니키아인에 의해서 건설되어 카르타고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튀니스’의 어원은 이 도시에서 제사지내어지던 이 도시의 수호신인 페니키아의 신 타니트흐(Tanitkh)이다. 도시의 오래된 이름은 타니트라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의 이름 튀니스로 되었다.

국명 튀니지는 이 튀니스에서 만들어졌다. 튀니스에 라틴어의 지명 접미사 이아(-ia)를 붙여 튀니지로 되어 ‘튀니스시(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의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1958년에 독립하였다.




코트디부아르 ‘상아 해안’


서아프리카의 공화국. 이 지명은 상아해안을 의미하고 영어로 표기하면 Coast of Ivory이다(Coast ‘해안’과 Ivory ‘상아’의 합성) 15세기경부터 포르투갈인이 내항하여 상아 교역을 했기 때문에 이 해안지방은 상아해안으로 불려졌다. 20세기 초두에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편입되어 1960년에 공화국으로 되었다. 식민지 시절 경험 때문에 프랑스어의 국명을 정식명칭으로 되었다.




가나(Ghana) '가나 제국‘


영국 식민지 시대에 황금해안으로 불렸던 아프리카 공화국. 가나는 독립하여 4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서해안에서 번영한 강대한 흑인 제국 가나의 이름을 새로운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고대 가나는 이 황금해안과는 떨어진 지방에 영토가 있었고 부족적으로도 관계가 없었지만 독립운동의 지도자 당쿠아가 이것을 새로운 나라의 이름으로 할 것을 강하게 제창하였기 때문에 국명으로 되었다. 고대 가나의 의미는 명확치 않다.




토고(Togo) '토고 호(湖)‘


서아프리카의 공화국. 여기에 있는 토고호에 따라 붙여진 지명이다. 토고의 어원은 밝혀져 있지 않다.




앙골라(Angola) '응골라 왕국‘


중앙 아프리카의 공화국. 1482년 포르쿠갈인 디에고 카오가 콩고강 하구 지방에 도착, 이 지방에 있었던 흑인 왕국 반투 응골라(Bantu Ngola) 즉 ‘반투족 응골라’의 응골라를 이 지방의 지명으로 하였다. 응골라는 왕의 칭호였고 그 영토를 의미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응골라 왕국은 포르투갈과 대등한 국교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곧 식민지화되고 1559년에 포르투갈의 초대 총독이 부임한다. 지명 응골라도 포르투갈어화하여 앙골라로 되고 하구 지방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식민지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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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월드컵 방송, 얘기 좀 해보자(강준만)

2006. 6. 14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606/h2006061318353024390.htm

 

[강준만 칼럼] 월드컵 방송, 얘기 좀 해보자

이탈리아 지식인 움베르토 에코는 “과연 월드컵이 벌어지는 일요일에 무장투쟁이 가능한가? 축구 경기가 있는 일요일에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서남대 김욱 교수는 “축구 경기가 없는 일요일에는 언제나 혁명이 가능한가”도 물어야 한다고 반론을 폈다. “과연 누가 ‘무장투쟁’이나 ‘혁명’을 원하는가?”라는 질문도 추가로 던질 필요가 있겠다.

● 월드컵 과잉과 시청률 지상주의

최근 들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월드컵 열풍이 강해지면서 신문에 그걸 비판하는 기사들이 실리고 있는데, 그게 영 어색하다. 주로 방송의 월드컵 과잉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그 기사가 실린 지면을 넘기면 몇 개 지면이 월드컵 일색이다. 그렇게 괜한 시늉 내지 말고 이 문제에 정면 대응해보면 안될까?

월드컵 열풍에 대한 비판은 거의 대부분 사회적 ‘기회비용’을 걱정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의 기회비용이다. 월드컵 열풍에 파묻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사건들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한 채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백번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새삼 드는 생각은 “언젠 안 그랬나?” 하는 의문이다. 월드컵 과잉이 워낙 지나치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겠다. 그러나 “월드컵 과잉은 4년에 한달이지만 나머지 3년 11개월이 더 문제가 아닌가?”라는 재반론도 가능하다.

방송사 측에선 월드컵 과잉은 ‘다수결주의’ 또는 ‘시장 논리’라는 주장을 내심 할 법도 하다. 월드컵 과잉을 비판하는 쪽은 소수이고 시청률은 그런 편성이 옳았다는 걸 입증해주니 말이다. 방송사들이 시청률이 낮게 나오는데도 그렇게 월드컵에 미쳐 돌아갈 리는 없잖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정작 논의해야 할 것은 ‘시청률 지상주의’일 게다.

시민단체들은 특별히 공영방송인 MBC와 KBS를 문제삼고 있다. 공영방송만큼은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인 것 같다. 그런데 수천명의 구성원으로 이뤄진 조직을 MBC와 KBS라 부르면서 비판해봐야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사장과의 대화를 시도해보는 게 좋겠다. 대화를 거부한다면 사장을 집중 비판하면 될 일 아닌가.

MBC 최문순 사장과 KBS 정연주 사장은 이른바 ‘개혁ㆍ진보파 사장’이다. 그들은 대단히민주적인 사장이겠지만, 기본적인 편성의 원칙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지금의 월드컵 과잉은 그들의 동의ㆍ지원하에 이뤄진 정책으로 보는 게 옳다. 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가? 이야기를 듣고 싶다. 모두 다 당당한 자세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한쪽은 비판하고 다른 한쪽은 모른 척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공영방송의 시청률이 떨어지면 일부 신문들이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고, 그로 인해 재정이 어려워지면 ‘방만한 경영’ 운운하며 공격하는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고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그밖에도 우리가 모르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자.

● 공영방송 근본 문제 짚어봐야

공영방송 이대로 좋은가? 월드컵 핑계 대고 아예 이 문제까지 건드려보자. 누가 사장이 되건 전혀 바뀔 수 없는 방송사 특유의 ‘게임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도 이번 기회에 알아두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해 도움이 될 게다. 공영방송이 공영방송다울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런 근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게 아닌가.

아니면 한달 정도의 월드컵 과잉도 인내하지 못하는 소수파의 옹졸함에 관용을 구해보자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건 얘기 좀 하고 살자. 이런 얘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면 훗날 누군가가 공영방송의 민영화를 추진해도 할 말 없게 된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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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나무 **

 

자신의 양력생일에 해당하는 나무를 찾아보세요..

 

1월  2일 ~ 1월 11일 -- 전나무

1월 12일 ~ 1월 24일 -- 느릅나무

1월 25일 ~ 2월  3일 -- 노송나무

2월  4일 ~ 2월  8일 -- 포플러나무

2월  9일 ~ 2월 18일 -- 삼나무

2월 19일 ~ 2월 28일 -- 소나무

3월  1일 ~ 3월 10일 -- 수양버들

3월 11일 ~ 3월 29일 -- 라임나무

3월 21일     ---------- 떡갈나무

3월 22일 ~ 3월 31일 -- 개암나무

4월  1일 ~ 4월 10일 -- 마가목

4월 11일 ~ 4월 20일 -- 단풍나무

4월 21일 ~ 4월 30일 -- 호두나무

5월  1일 ~ 5월 14일 -- 포플러

5월 15일 ~ 5월 24일 -- 밤나무

5월 25일 ~ 6월  3일 -- 사시나무

6월  4일 ~ 6월 13일 -- 자작나무

6월 14일 ~ 6월 23일 -- 무화과나무

6월 24일     ---------- 자작나무

6월 25일 ~ 7월  4일 -- 사과나무

7월  5일 ~ 7월 14일 -- 전나무

7월 15일 ~ 7월 25일 -- 느릅나무

7월 26일 ~ 8월  4일 -- 노송나무

8월  5일 ~ 8월 13일 -- 포플러나무

8월 14일 ~ 8월 23일 -- 삼나무

6월 24일 ~ 9월  2일 -- 소나무

9월  3일 ~ 9월 12일 -- 수양버들

9월 13일 ~ 9월 22일 -- 라임나무

9월 23일    ---------- 올리브나무

9월 24일 ~ 10월  3일 -- 개암나무

10월  4일 ~ 10월 13일 -- 마가목

10월 14일 ~ 10월 23일 -- 단풍나무

10월 24일 ~ 11월 11일 -- 호두나무

11월 12일 ~ 11월 21일 -- 밤나무

11월 22일 ~ 12월  1일 -- 사시나무

12월  2일 ~ 12월 11일 -- 자작나무

12월 12일 ~ 12월 21일 -- 무화과나무

12월 22일 ~ 1월  1일 --- 너도밤나무 

 

 

@ 사과나무 (사랑) @

가냘픈 체형, 매력적이고 애교 많으며 호소력 있음, 상쾌함 발산,

때로 경박하기도 하지만 대담하며 민감하고 항상 사랑을 빠져있으며

사랑하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한다. 믿음직스럽고 부드러운 배우자,

관대하며 과학적 재능이 있고 걱정 없이 오늘을 사는 풍부한 상상력의

낙천주의자.

 

@ 사시나무 (야망) @

비범한 매력, 활기차고 충동적이며 남들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

야심차고 현명한 재능꾼. 운명에 도전하며 이기적이긴 하지만 믿을만하고

신중한 사람. 사랑도 너무 신중하여 때때로 감성보다 이성에 지배되기도

하지만 매우 신중하게 배우자를 선택.

 

@ 너도밤나무 (창조) @

고급취향을 가졌으며 외모를 중시하고 삶과 일에 확실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재력이 있으며 흘륭한 리더, 불필요한 선택은 피하며 합리적이고

화려한 인생을 살며 운동 혹은 다이어트를 통해 외모 가꾸기에 정진.

 

@ 자작나무 (영감) @

활기차고 매력적이며 우아하고 친졀, 꾸미지 않는 순수함. 오버하는 것

싫어하며 저속함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 조용한 삶을 원하며 그다지

정열적이지 않으나 상상력풍부하고 야망은 그다지 크지 않다.

조용하고 안정적인 분위기 창조.

 

@ 삼나무 (자신감) @

미의 극치, 누구와도 어울릴 줄 알며 고급스러움을 좋아한다.

그다지 수줍음은 없으나 다른 사람들을 경향이 있고 자신감 넘치며

결단력있고 다소 성급하나 호소력 있고 많은재주가 있고 근면하며

낙천적이고 진실한 사랑을 기다린다. 속전속결.

 

@ 밤나무 (정직) @

비범한 미, 판단력이 뛰어나고 활기차고 재미있는 타고난 외교가.

그러나 쉽게 짜증내며 민감하게 반응하며 종종 자신감 결여로 이해하기

힘들때가 있다. 배우자 찾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일편단심.

민들레 단 한번의 사랑.

 

@ 노송나무 (신의) @

강하고 융통성 있으며 베풀기 좋아하고 낙천적이기도 하지만 명예와 재력을

위해 노력하고 고독을 싫어하며 쉽게 만족할 줄 모르며 성격이 급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나서기 좋아하며 부주의함. 정열적 사랑을 꿈꾼다.

 

@ 느릅나무 (고결) @

세련된 외모와 잘빠진 용모, 수수함, 리더쉽 있으나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함.

정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배우자. 타인을 배려하는 결정을 잘하며 관대하고

유머감각이 있으며 현실적임.

 

@ 무화과나무 (감수성) @

강하며 고집세고 독립심 있으며 모순이나 논쟁을 절대 호용하지 않으며

삶을 사랑혀 가정과 아이들, 동물을 사랑함. 사교계 제왕, 유머감각 뛰어나나

게으르고 태만함. 현실감각 뛰어나며 지능적임.

 

@ 전나무 (신비) @

비범한 취향, 존엄, 세련됨, 미를 사랑하며 완고하며 자아의식이 강하나

주변인을 배려할 줄 알고 다소 겸손하고 야먕이 있으며 근면하고 재능이있다.

친구도 적도 많음.

 

@ 개암나무 (비범) @

매력적이며 옥심이 없고 사려 깊다. 감동을 줄줄 알며 활동적인 사회사업가.

인기 있으나엉뚱한 짓 잘하고 변덕 심함. 정직하고 저확한 판단능력.

 

@ 자작나무 (고급취향) @

세련된 미, 외향과 조건, 고급 선호 자기위주는 아니지만 가능한 편안하고

안락함을 선택. 합리적이며 질서있는 생활을 이끌어 나가며 친절하고 정서적인

배우자를 만나 인정 받고 싶어함.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적 사랑을 꿈꾸며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의심이 많고 양심적이다.

 

@ 라임나무 (의심) @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분쟁을 싫어함. 스트레스, 노동, 안일, 태만 등을 혐오. 

마음이 부드러우며 희생정신이 강함. 다재다능하나 끈기가 부족하며 종종

비탄에 적어있거나 불만이 많고 질투심이 강함.

 

@ 단풍나무 (독립) @

풍부한 상상력, 수줍음 많으나 야망이 있으며 자신감이 넘치고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갈망함. 때때로 신경질적이며 복잡하다. 기억력이 좋으며 쉽게 배우며

얽혀있는 사랑을 하며 타인에게 감동 주기를 좋아한다.

 

@ 떡갈나무 (용기) @

강건하며 옹기있고 가차없으며 독립적이고 예민하다.

변화를 싫어하며 한가지를 고수하려 한다.

 

@ 올리브나무 (지혜) @

태양을 사랑하며 따뜻하고 합리적이며 조화로우며 폭력과 공격을 피하며

관용 있는 쾌활한 성격. 판단능력 뛰어나며 동정심 많고 쉽게 질투하지 않는다.

 

@ 소나무 (독특) @

의견일치를 좋아하며 쉽게 타협을 볼 줄 알며 활동적이며 자연스럽다.

좀처럼 친하기어려우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금방 정열을 불태우며

쉽게 포기한다.

 

@ 포플러 (불확실) @

자신감 부족하나 필요하면 용감해진다. 호의적이나 매우 까다롭고

쉽게 외로움을 느끼며 예술적 기길이 뛰어남.

철학적이며 신중한 배우자 선택.

 

@ 마가목 (민감) @

매력만점. 삶을 사랑하며 복잡 미묘, 독립적이기도 하고 의존도 강한

양면성을 지님. 고급취향을 가졌으며 예술적 기질이 뛰어나고 정열적이며

감성적이나 쉽게 용서하지 않음.

 

@ 호두나무 (정열) @

독특한 성격, 쉽게 자아의식에 빠지고 공격적이며 극과 극을 달림. 예상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나 매사에 자발적이며 야망이 크고 좀처럼 타혐하지 않는다.

타고난 전략가로 존경 받으며 쉽게 부러위한다.

 

@ 수양버들 (우울) @

동정심 많으며 매력적이지만 늘 우울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몽상가.

변덕스러우나 정직하다. 귀가 앏긴 하지만 삶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며

직관력이 뛰어남. 사랑으로 힘들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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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1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라임나무.. 질투심이 많대요..^^

조선인 2006-06-1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저같은 건망증 환자가 단풍나무래요. *^^*

해리포터7 2006-06-1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전 독특한성격 공격적이며 극과극을 달린다? 이거 지금의 저하곤 영 안맞는것 같아요. 뭐 예상할 수 없는 반응은 비슷한것 같기두 하구요.좀 퍼가겠습니다.

치유 2006-06-1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전 두갤 봐야 하나요?/3월 마지막에 걸려 있는 것들이 두 나무라서..
뭘 봐야 하나??내 맘대루 좋은 말 있는 걸루 점 찍어야 할까요??

치유 2006-06-15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 22일 ~ 3월 31일 -- 개암나무
엉뚱한 짓 잘하고 변덕 심하다??오우..맞네 맞어..변덕은 늘 죽 끓듯 하니..ㅎㅎㅎ
오늘도 웃으며 시작~!


해적오리 2006-06-1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포플러나무...ㅋㅋ
대략 맞는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6-06-1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꽃님, 우리집 작은딸도 개암나무에요. 변덕이 퍽 심하죠. 하지만 정이 많고 어떤 감정이든 참 예쁘게(마음을 당기듯) 표현하죠^^

날나리님, 배우자선택 안목이 탁월하실듯 해요^^
조선인님, 단풍나무.. 왠지 잘 맞는 것 같은걸요^^
해리포터7님, 호두나무네요^^
 

기인님의 정답판..

넵. 식민지 시기의 불운아, 천재, 삶과 예술을 혼융한 사내. 이상. 본명은 김해경 입니다. 제 동기 한 명도 이상으로 논문을 쓰고 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천재적인 면모들에 반했다고 하네요. 정말 신선한 은유와 상징들로 그만의 세계를 개척했습니다. 요절한 천재라는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시인.

 

2.

윤동주. 잘 생긴 외모와 단정하고 순결한 시들. 연대의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한 몫을 하는 시인입니다. 기형도와 윤동주가 있는 연대. 둘의 공통점이 어느정도 있겠지요. 시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섬서한 감수성으로 그려낸 시들. 그리고 또 너무 이른 죽음들...     저는 연대가 너무 좋아요 +.+ (사실 3번인가 가봄 -_-; )

3.

김기림입니다. 시인이며,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시론가. 이상의 절친한 친구여서, 이상이 죽은 후에 이상에 대한 추모시가 유명합니다. 그 시에서 이상을 쥬피터 신으로 은유한 신비로운 이미지. 그는 이상의 천재성을, 그 초월성을 잘 알고 있고 안타까워 했던 사람이지요. 구인회의 수장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이육사. 일제말기 독립운동가이며 시인. 그의 시에 나타나는 웅장한 스케일. 고등학교때까지는 윤동주를 더 좋아했는데, 대학 들어와서 읽은 이육사의 스케일은, 다른 시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박력이 있었습니다.

5.

임화. 카프의 서기장. 시인이자 문학사가, 평론가. 카프의 대표적 시인이자 대표적 논객,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문학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과 시를 동시에 고민했던 시인으로, 한 단체, 한 시기를 이끈 지도자라고 할 수 있지요. 북한에서 미제의 스파이 혐의로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안경알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정말 잘생겼었어서 영화배우도 하고, 여자관계도 꽤나 복잡하다는....

6.

박팔양. 조금 어려운 문제였나요? ^^; 카프의 시인이며 또한 구인회에도 관여했던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성격이 매우 급했다는 이야기가 있고요. 시들 또한 구인회와 카프 사이를 진동하며 흥미롭게 변모해 나갑니다. 태양의 시인이라는 별명도 있지요.

7.

김억. 김소월의 스승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근대시의 초창기 선두주자이며, 최초의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를 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시 지망생들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고요. 외국시를 많이 번역하기도 하고, 당시 세계어로 인공적으로 개발되었던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해서 한국에스페란토협회 회장이기도 했습니다. 후대에는 민요를 계승하자는 민요시 운동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8.

오상순. 공초 오상순으로 많이 알려져있습니다. 무소유를 실천한 시인이라고도 하지요. 얼마전 방영된 EBS 프로 덕택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9.

백석. 왜 뒤에 영어가 써 있냐고요? 백석은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잠시 동안 영어 교사를 했습니다. 백석의 시집 <사슴>이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요. 월북시인이라 80년대까지 해금조치가 안되어서 그의 아름다운 시들을 최근에야 우리가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음식과 관련한 빼어난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10.

주요한. ^^; 제가 관심을 갖고 논문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최종심이 끝나서 놀고 있기는 한데, 이제 또 고쳐야지요 ㅎㅎ) 한국 '최초'(?)의 근대시라는 '불노리'로 유명합니다. 이 시가 정말 압권인 부분이 여럿 있는데, 당시 한국에서 쓰여진 시들과 비교하면 그 수준 차가 엄청납니다.

수재로, 동경제국대학 예과 불법과에 입학했고, 입학한 해에 3.1운동이 발생,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얼마후 상해의 임시정부에 이광수와 함께 가담하여 <<독립신문>>을 만들고 여기에 일제와 투쟁하는 시를 쓰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민요'를 계승하는 시를 쓰자는 민요시 운동을 주창하고 귀국 해서는 민중들의 아픔을 반영하는 시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는 이광수와 함께 친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모하는 걸까. 이는 식민지라는 우리 역사의 특수성과, 그 시공간 안에서 변모하게 되는 지식인들의 모습 중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 2006-06-14 16:36

기인님의 서재 이벤트인데 배꽃님 서재에서 답을 퍼왔지요. 재미있는 이벤트네요. 

이상, 윤동주, 백석은 알아보았는데 다른 얼굴은 처음입니다.^^   박팔양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았네요.

국문과 전공하신분들은 다 알아보았을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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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6-1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과 전공이나 박팔양은 솔직히 처음 봤어요^^;
제가 아직 전공에 대한 이해가 덜한거죠 ㅠ_ㅠ
(사실 시 가르치시는 교수님과 사이가 안 좋아 수업을 안 들은-_-)

프레이야 2006-06-1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반갑습니다. 학구파강아지 이미지가 넘 깜띡해요.. ^^ 사실 다른 분야도 전공했다고해서 다 알기는 쉽지않죠. 님만 그러신게 아닐 거에요... 이 이벤트 덕분에 님과 인사도 하고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