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독자의 탄생


요새 오는 책들 귀퉁이가 자주 찌그러져 있다. 찢어지고 구겨진 것도 있다. 그냥 읽어도 되지만 새 책이니 새 책다운 모양새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다. 책 포장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이앞에도 세 권이나 그래서 교환 신청해 받았는데 이번 박스에서도 이 책 포함해 세 권이 그래서 교환신청 해두고 읽는다.

다음달에 있을 대장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넷이서 속닥하니 작은 자리를 마련했다. 케이크와 꽃과 와인에 세이로무시가 있는 조촐하고 맛난 저녁이었다. 식사 후 비건 베이커리 집의 쌀로 만든 케이크를 먹으며 폭신폭신 느끼하지 않은 맛에 감탄사 연발.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우리는 각자 뽑아온 대장님의 글 중 한두 문단을 낭독했다. 나는 유키 구라모토의 로망스와 레이크 루이스를 배음으로 깔아드렸다. 지금 이 나이도 예전엔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칠십 년을 넘기는 생은 또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다. 늙음을 피해갈 수 없는 대장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다.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독자로서 우리는 어떤 문장을 재생하고 남기게 될까. 작품을 완성시키고 재생시키는 건 독자의 몫. 좋은 독자를 품는다는 건 작가로서 축복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중에 비행기를 탈 때마다 중요한 통장이나 열쇠 그런 것들을 남편이 아니라 딸아들에게 말해두고 떠난다고 한 분이 말했다. 나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비행기 탈 때는 아들 딸 갈라서 엄마 아빠가 대동하고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는 사람도 있다고. 실제로 그렇게 사고가 나 죽은 이들도 있다고. 헉 나는 그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놀랐다. 난 바로 9.11을 떠올렸고 세상의 일은 내 재간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라고 평소처럼 생각했다. 난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사는가 싶다가 방금 “오, 윌리엄!”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아래 밑줄긋기.
이거지! 나는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나 계획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인간이다. 방만한가,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걸까. 나는 그냥 불안해 하지도 애쓰지 않고 운명의 뜻대로 살 것이다. 그러고 싶다.

오, 윌리엄! 영문판 표지가 훨씬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문학동네 번역본 받아보니, 표지 깔끔하다.

나는 윌리엄이 우리가 독일에 갔던 그해 여름에 내가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당시에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 나 자신을 충분히 잘 알았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윌리엄의 어머니는 바로 전해에 돌아가셨고, 우리 딸들은 각각 아홉 살, 열 살이었다. 딸들이 두 주 동안 여름 캠프를 떠나서 우리가 독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그때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나면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두려워서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나중에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차들이 우리 옆을 쌩쌩 달려가는 아우토반에서도 얼마든지 우리 둘 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2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10-22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낭만적인 출판 기념회에서 구라모토 피아노 선율에 맞춘 프레이야님 낭독^^
오😍프레이야님 ^^
오디오 플레이 올려주세요😻

프레이야 2022-10-22 20:57   좋아요 2 | URL
ㅎㅎ 그냥 속닥한 자리였어요.
오래 봐온 분들이라 오붓했어요. 저 낭독하다가 울컥해가지고 또 ㅎㅎ

stella.K 2022-10-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죽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
엄창난 말이군요.

그런데 왜 대장님께선 마지막으로 책을 내시다는 겁니까?
한번 작가는 영원한 작가입니다.
뭐 이런 말할 자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작가는 죽을 때까지 글을 써야 작가가라고 생각합니다.
바르트의 말이 옳다면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하여.ㅋ

프레이야 2022-10-22 20:58   좋아요 1 | URL
아뇨 ㅎㅎ 출판기념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굽요. 수필집 포함 저서가 아주 많습니다. 이번엔 미국 수필 번역집과 메타에세이 비평집 두 권요. 글이 수필이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분이시니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ㅎㅎ 열정이 엄청나신 분.

stella.K 2022-10-22 21:00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뜻이었군요. 근데 대장님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이리 말씀 하시니 궁금한데요? 어떤 책인가..?흠

프레이야 2022-10-22 21:04   좋아요 1 | URL
11월에 책 나오고 사정이 허하면 소개해 볼게요. 저녁이면 제법 추워요 스텔라 님 ^^

바람돌이 2022-10-22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뽑아낸 문장이 다른 존재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걸 또 세월을 통과한 몸이 알아채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이런 문장 보면 정말 프레이야님 작가 맞으심요.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이 나올까요? ㅠ.ㅠ
저도 그냥 운명의 뜻대로 사는 쪽입니다. 그걸 피하려고 한다고 피해질 거 같지도 않고요.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다른 비행기를 타고 하는 사람이 있나봐요. 신기하네요. ^^

프레이야 2022-10-23 00:21   좋아요 1 | URL
긴장되면서도 감동하시는 것 같아 찡했어요 ^^. 사는 일이 갈수록 두려움이 많아지지요. 저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많아서일까요. 저도 놀랐어요. 딸들이 고아가 될까봐 부부가 다른 비행기를 타려고 했다가 말았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문장을 보는 순간 어제 들은 그 얘기가 떠올라 더 놀랐네요 ㅎㅎ 날마다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어떤 것들! 새롭고도 낯익은.

페크pek0501 2022-10-23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 책이 난리?인지 저자를 보고 알았습니다.

프레이야 2022-10-23 20:18   좋아요 0 | URL
저자가 그렇지요 페크님!!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문명들을 이야기하자면 단연코 한국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수년간 취재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선사 시대부터 한반도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세우고 고유한 문화를 꽃피웠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통해 수많은 전쟁과 외세의 침입에도 흔들림 없이 발전에 온 한국의 찬란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 작가의 말, 중


퓰리처상 2회 수상, 로이터 통신 포토저널리스트 강형원 사진작가가 우리 문화유산 사진과 술술 잘 읽히는 해설을 함께 담았다. 영어로도 간단히. 사진도 글자도 시원시원하니 보기에 좋다. 작가의 성격도 그래 보인다. 오늘 낭독녹음한 김훈의 “연필로 쓰기”에서도 언급된 것들이 몇 개 보여 뻑뻑하고 침침한 눈으로 봐도 또 반갑고…. 회상을 부른 대가야 고분, 주먹도끼…

고령 대가야 고분의 순장묘를 오래전 그러니까 16년 전에 보았다. 여덟살 딸아이가 아버지와 나란히 묻힌 묘를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기억이 난다. 밖으로 나와 개망초 핀 능선을 따라 걸었다. 바람 시원한 유월 한낮이었다.
저 아래 강형원 작가의 사진 중 고령 대가야 고분 위를 뛰어가는 고라니는 어떻게 찍었을까 옆지기에게 물어보니 어스름 즈음에 하늘에 노출을 맞추었을 거라고 한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달리는 고라니와 능선의 검은 실루엣이 대비되어 멋진 장면이 포착되었다.


#
베란다 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불고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가을날. 잔잔한 바다 위로 구름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며… 책을 왜 읽지요 - 좋아서, 알고 싶어서, 필요해서, 책 예뻐서 … 이유는 여러가지겠다. 대뜸 좋아서라고 대답한 사람과 옆에서 동감이라는 미소를 띠며 가만히 쳐다보는 사람, 사랑스러웠다. 대답을 속으로 다듬고 기다리게 하는 사람보다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성질 급한 나. 아무튼 우리는 비굴하게 오래 가기로! ㅎㅎ
늦었다 싶은 때가 진짜 늦은 거라고 누군가는 우스개로 말하지만 더더 지나고 보면 그때가 늦은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후회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삶을 살고 싶군.
미루게 되는 이런 근사한 책과 기념일 아닐 때 꽃 선물하는 센스^^ 무심한 나는 좀 배워야 … 좋은 사람들과 영혼가출한 것 같이 빨리 흐른 시간. 나란 사람은 겉은 차분한데 안은 온갖 게 정신없이 우당탕탕.
마지막 사진, 멀리서 온 이란성 쌍둥이 손뜨개 트리.
원하는대로 꿈도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10-19 21: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굴하게 오래가기로 ㅎㅎㅎ 고라니 멋지지만 울음소린 무서워요 ㅎㅎ 꽃이며 고양이 참 좋네요. 우와 트리라니 누구신지 솜씨가 👍좋아서 책을 읽는 이들과 하는 시간 오래오래 함께 하시길 *^^*

프레이야 2022-10-19 23:41   좋아요 2 | URL
고라니 울음소리 들어보셨군요.
전 동물의 왕국. 꽃과 고양이 좋은 짝꿍이죠.
미니 님도 그러신 분. 오래오래 책과 만나요 ~
알라디더 티비 하시는 할머니 미니 님을 상상하며 ^^

새파랑 2022-10-19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조명의 받침대가 잃어버린 시건을 찾아서네요 ㅋ 저는 저 받침대(?)위에 안읽은 책들을 쌓아놓고 있는데 ㅋ

프레이야 2022-10-19 23:31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딱 보셨네요. 받침대요 ㅎㅎ
튼튼해 보였어요 박스가. 다용도로 ^^

바람돌이 2022-10-19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말입니까? ㅎㅎ
꽃이랑 도도한 냥이랑 너무 어울려요. 어제 저 음료수 잔을 다시 배치하실 때 알아봤지만 역시 사진찍는 솜씨가 와 감탄스럽습니다. 진짜 제가 찍은 사진과 비교돼요. ㅠ.ㅠ 어쨌든 비굴하게 오래가는걸로 다시 한번 결심!! ^^

프레이야 2022-10-19 23:29   좋아요 2 | URL
대교가 살짝 방해되지만 ㅋ 예전에 어느 사진작가가 강의에서 그러더군요. 전봇대 전깃줄 같은 거 자기는 파인더에 들어오면 안 뺀다구요. 의미있는 말이었어요.
토닥토닥 손 꼭 잡고 오래오래 다니시고요.
비하고 굴하며 오래요 ㅎㅎ

파이버 2022-10-19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댓글보고 다시보니 잃어버린 시간 책박스네요! 저는 예쁜 협탁인 줄 알았어요. 꽃과 고양이 너무 예쁩니다.♥‿♥

프레이야 2022-10-19 23:18   좋아요 3 | URL
협탁 같았나요 파이버 님 ㅎㅎ
꽃과 고양이 잘 어울리는 조합이죵

책읽는나무 2022-10-19 2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고양이가!!!!!
어쩜 고양이가 집사님을 너무 닮았군요??
집사님의 마음을 사실적으로 저렇게 잘도 알아서 표현하다니???ㅋㅋㅋ
사진들이 넘나 멋집니다.
사진을 보면서 그 시간을 추억하기에 안성맞춤이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 제목처럼요^^
저는 낱권으로 구입해서 저런 박스가 없는데...아!! 박스가 갖고 싶네요.ㅋㅋㅋ
모든 것들의 뒤에는 결국 건강이 우선인 것 같아요. 늘 건강하시길♡



프레이야 2022-10-19 23:17   좋아요 3 | URL
녀석이 꽃이랑 녹색풀 좋아해요.
달랑 와선 냄새 맡고 눈 지그시 감으며 두리번 냥냥. 책나무님 이제 굿즈를 넘어 박스를 탐하도다. ㅎㅎ 필소굿~

2022-10-19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9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9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20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2-10-19 2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제눈에
머핀으로 보입니다 💗ㅅ💗

서울 용산 박물관에 갈 때마다
항상 머무는 곳이 있어요

큼직한 관음상이 있는 곳!ㅎㅎ

고려시대 불화와 관음상을 좋아 합니다!

프레이야님 냥이 꽃 향기를 맡는 걸 보니
낭만 고냥이!

       __..,,__   ,.。=‘`1
     .,,..;~`‘‘‘‘    `‘‘‘‘<``彡 }
  _...:=,`‘    ︵  т ︵  X彡-J
<` 彡 /  ミ  ,_人_. *彡 `~
  `~=::              Y
    i.             .:
   .       ,。---.,,  ./
    ヽ /゙‘‘```;.{    \/
     Y   `J..r_.彳   |
     {   ``  `   i
              \   ..︵︵.
     `\         ``ゞ.,/` oQ o`)
      `i,          Y  ω /
       `i,      .    ˝   /
      `iミ           ,,ノ
       ︵Y..︵.,,     ,,+..__ノ``
     (,`, З о    ,.ノ川彡ゞ彡  *

프레이야 2022-10-20 00:27   좋아요 3 | URL
아고고 고양이 넘나 귀여운 🥰
이런 거 어케 만드시는지 진짜 취향도 넘사벽에 못하시는 게 없는 스캇님 ^^. 국립중앙박물관 가본 게 어느새 여섯 해 전이네요. 헉. 너무 오래되었어요. 한번 또 가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머핀 같이 보이네요 저도. 배가 고픈지. 어서 굿나잇 해야겠지요 ㅎㅎ

희선 2022-10-20 0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꾸 꽃이랑 잘 어울립니다 꽃 냄새 맡기 좋아하나 봅니다 책속에 영문도 쓰여 있군요 이건 따로 영문으로 옮기지 않아도 다른 나라 사람이 볼 수 있겠습니다 한국 문화유산을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10-20 01:23   좋아요 2 | URL
울모꾸 착하고 사랑스러운 녀석 ㅎㅎ
저러다 초록 이파리 뜯어 먹어요.
이 책 영문,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많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사진이 시원하게 많이 들어 있어요.

라로 2022-10-20 0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꾸와 꽃 넘 이뻐요!!!😍😍😍
다리위의 구름도!! 하아~~~ 좋다좋아!!!👍♥️👍

프레이야 2022-10-20 09:56   좋아요 2 | URL
구름 보며 라로 생각했어요. 😊
호기심 많은 꾸돌이 녀석 ㅎㅎ

고양이라디오 2022-10-20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지네요. 읽고 굿뽕에 취해보고 싶은 책이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22-10-20 12:58   좋아요 2 | URL
이런 책은 직접 구매가 잘 안 되는 책이라 더 반갑고 고마웠어요. 굿뽕 ㅎㅎ 까진 아니고 강형원 사진작가의 시선으로 담은 좋은 책 같습니다 ^^
 

1940년생 아니 에르노, 세월,
읽다가 잠시, 여기 나오는 사람들도 막강하다.
그중 당대 프랑스 여배우 두 사람. 에르노가 십대 시절 나중에 마리나 블라디처럼 머리를 기르고 밀렌느 드몽죠와 보부아르를 보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대목이 나온다. 브리지트 바르도도 한두 번 언급한다.
보부아르는 바르도를 스크린 위의 상징적 피조물로 보았다. 이 내용은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14장에서 자세히.

1938년생 마리나 블라디 Marina Vlady

1935년생 밀렌느 드몽죠 Mylene Demongeot

사진 찾아보고 미모와 아우라에 놀람.

마리나 블라디는 청순한 느낌이면서 강인해 보인다.
1963년 칸느여우주연상도 받았다.
발랄하고 도발적인 이미지의 밀렌느 드몽죠도 작품이 많다. 2018년 마르탱 프로보스트 영화 “더 미드와이프”에도 수표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늙은 여자, 롤랑이라는 인물로 잠시 나오는데 카리스마가! 생의 종착역으로 가는 길에 베아트리체(카트린느 드뇌브)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나이들어서도 작품 계속 해왔네. 이 영화, 생을 돌아보게 하며 희망적인 정말 좋은 영화다.

두 배우 모두 팔순을 거뜬히 넘기고도 여전히 멋짐.
물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도!

1,2번 사진은 마리나 블라디.
3,4,5,6번 사진은 밀렌느 드몽죠
네번째 사진에 맨좌측 앞모습은 진 세버그. 밀렌느 드몽죠와 같이 촬영하며 질투도 서로 있었나 보다. 5번은 크루서블(세일럼의 마녀들). 그러고 보니 5,60년대 프랑스 여배우들, 아름다운 배우가 많다. “스크린에서 소비된 상징적 피조물이었다” 해도 한때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추억과 동경을 부르는 집단기억의 파노라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0-1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을 읽으면 저렇게 아름다운 배우들도 만날 수 있군요. 나이들면서 아름다워진다는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여배우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네요. 물론 진 세버그는 일찍 죽어 아쉽지만요.

프레이야 2022-10-17 19:12   좋아요 1 | URL
이거저거 하면서 읽으니 아직 반밖에 못 봤네요. 아주 좋습니다. 그야말로 에르노와 당대 사람들의 세월이네요. 저 여배우 둘 다 넘 매력적이죠. 생존해 있고요 ^^ 진 세버그 안타까워요. 인명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ㅠ
 

Program Note

한 남자

2018년 요미우리문학상을 받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사쿠라, 구보타 마사타카 등이 출연하며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2016)으로 주목받은 이시카와 케이 감독이 연출했다.
이혼하고 아이와 함께 고향에 내려와 살던 리에(안도 사쿠라)는 다이스케(구보타 마사타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성실하고 착한 남편과 아이도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다이스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다이스케의 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죽은 남편의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은 내 동생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편이 다이스케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리에는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에게 남편이 누구였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내가 알던 사람이 한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뀔 때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한 남자>는 키도를 재일교포로 설정하면서 질문의 수위를 정치적인 문제로 확장한다. 키도는 사실에 접근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도 대면한다.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욕망과 나를 나로 만드는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미스터리 속에 충실히 담아냈다.

BIFF 2022
프로그래머
남동철

리메이크/원작 있음
Japan 2022 123min

————
히라노 게이치로 책 몇 권도 보고픈 게 있네.
안도 사쿠라 연기를 좋아해서 다음에 봐야겠다.
일본에서는 11월 개봉이라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10-16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르네 마그리트 그림이 배경!ㅎㅎ 일본어 포스팅 문구가 영화 스포네요🙊

프레이야 2022-10-16 22:30   좋아요 1 | URL
네. 뒷통수 ㅎㅎ 속이기 어려운 이면.
일어 문맹인 저는 한자만 보이네요. 대충 짐작.
이 이야긴 사실 책보다 영화가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자주 다루어진 주제라.

희선 2022-10-17 0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알던 사람이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거 처음이 아닌 듯하기도 하네요 미야베 미유키 소설 《화차》 생각납니다 여기에서는 왜 그랬을지...


희선

프레이야 2022-10-17 00:59   좋아요 1 | URL
미미 여사 화차 오래전 재미있게 읽었어요. 낭독녹음 했더랬죠. 이 책도 이유가 뭘까 왜 거짓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요. 희선 님도 포스터 글자 다 읽으시겠어요. ^^ 재일교포 3세라는 게 단초가 될 것 같긴 한데요
번역이 필요합니다. ㅎㅎ

희선 2022-10-18 01:12   좋아요 1 | URL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밑으로 쓰인 말은 <사랑했던 남편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거 알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왼쪽 밑에 큰 글자는 영화 제목이고 위쪽에 있는 작은 글자는 배우랑 여러 사람 이름이네요

밑에 로드쇼 옆에 있는 말은 “[사랑]과 [과거]를 둘러싼 주옥 같은(아름다운) 감동 휴먼 미스터리, 충격의 영화화.”예요


희선

프레이야 2022-10-18 01:11   좋아요 1 | URL
우와 희선님 고마워요
요정도는 궁금증 유발할 문구지요.
책소개에도 거의 다 나와 있어요^^
이야기 전개와 이면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현실을 살아가고 내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제대로 보려면 철학사상이 아닌 내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조건> 서문 말미에서 한나는 이렇게 조언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이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 발밑의 세계가 아닌 우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며, 잠시 멈추고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인간 조건의 활동에 대한 생각에 다가갈 수 있을지 고려하라는 간청이다.
한나의 1955년 8월 사유 일기를 보면 첫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던져진 게 아니라 정확하게 나아갈 방향을 갖고 있는 존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속성이 생겨나고 그가 속해 있는 길이 드러난다.‘ - P212

사회혁명이든 정치혁명이든 권위의 몰락이 필수 조건이다. 무력, 즉 경찰과 군대를 향한 충성심이 여전히 강한 상태에서는 어떤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정치 체제의 분열이 혁명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간절히 열망하고 날개를 펼치길 기다리면서 권력에 대한 책임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8세기에는 문인들hommes de lettres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
미국혁명을 통해 한나는 지역 정치에 뿌리를 둔 더욱 민주적 형태의 정부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한나는 공적영역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행복을 발견하는 시민의 모습을 상상하며,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의 저서를 읽고 의회 제도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미국 같은 입헌공화국에서는 시민권을 보장해주지만 정치적 행동을 통해 그러한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시민들 몫이다. 한나는 정치는 신념에서 나오는 용기가 아니라(신념은 어렵지 않다), 일상과 관습 속에서 경험한 용기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대중의 행복 경험은 혁명 정신을 유지하는 데 필수다. - P252

세상 속 경험과 사건에서 사실이 비롯된다. 다시 말해 사실 존속 여부는 기억과 이야기에 달렸다. 누군가 사실을 각색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이 공통으로 경험한 세상은 사라진다. (중략)

주어진 문제를 관찰하며 마음속에서 더 많은 사람의 관점을 떠올릴수록, 내가 그 사람들 처지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더 자세히 상상할수록, 타인을 대변하는 나의 사고 능력이 더 강해질수록 타당한 결론, 즉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끝없는 거짓말은 내 발밑의 땅을 앗아가 내가 설 땅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논문은 "진실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답하며 끝난다.
"개념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진실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고 내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이다."
진실은 이 세상에서 내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항상 움직이는 땅과 하늘과도 같다. - P258

한나는 야스퍼스에게서 경청과 대화를 하나의 예술로 이해하고 이 세속적 활동들을 자신의 삶과 일의 중심에 끌어올린 한 남성을 보았다.

이 작은 세상에서 그는 자신의 비할 데 없는 대화 능력을 펼치고 발휘했다. 매우 주의깊게 들었고, 언제나 자신을 꾸밈없이 드러냈으며, 인내심 있게 토론 주제를 음미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어쩌면 침묵으로 그칠 것을 공론화하고 대화 주제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말하고 들음으로써 그는 변화와 확장을 가져왔고 이를 더욱 갈고 다듬었다. 그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면, 밝게 비추었다.

한나에게 야스퍼스는 사유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 - P26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대지기 2022-10-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이 인상깊네요 ㅎㅎ

프레이야 2022-10-04 08:45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아 뭐라 말 못하겠지만 아렌트는 그것을 넘어섰어요. 청출어람. 69세로 일기를 마감하기 전 하이데거와 대화를 하려고 노년의 하이데거 부부를 찾아갔는데 그때도 부인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 둘만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더군요. 일생에 걸쳐 뭔가 듣고픈 말과 하고픈 말을 가지고 찾아갔을텐데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