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이거 다 읽을 수 있을라나. 


허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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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04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천천히 읽어시길^^..그러다 보면 언젠가 다 읽을 수 있을 거예요....저도 왜이렇게 책탐이 강한지 모를 일입니다...이것도 일종의 결핍현상중 한가지 인데 말이죠...

시이소오 2016-08-04 09:12   좋아요 1 | URL
서양철학사와 프랑스사가 관건이네요. ㅋㅋ

슈민정 2016-08-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만큼을 다 빌려주는 데가 있어요?^^

시이소오 2016-08-04 09:57   좋아요 1 | URL
도서관 책이음 써비스 이용했어요. ^^

연관 도서관 포함 스무 권까지 대출 가능하답니다.

슈민정 2016-08-0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만 몰랐던 사실..이네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8-04 10:12   좋아요 0 | URL
지역마다 차이가 있더라구요 ^^

오후즈음 2016-08-0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박입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0:13   좋아요 0 | URL
오후즈음님도 즐독하세요^^

singri 2016-08-04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성희 좋은데 맨날 다른책 빌려오고ㅋㅋ 어서 읽고 싶어요 ~

그나저나 저 두껍고 많은책을 정녕 이주에 다 읽어내신다니 대박 대단이에요.

시이소오 2016-08-04 10:12   좋아요 0 | URL
도전이죠 ㅎ ㅎ

cyrus 2016-08-0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음 서비스가 없었으면 책 반납하는 일이 불편했을 거예요. 타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집에 가까운 도서관에 반납해요. 정말 편해요. ^^

시이소오 2016-08-04 11:06   좋아요 0 | URL
좋은 제도 같아요 ㅎ ㅎ

stella.K 2016-08-04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럼 지난 번에 빌리신 책은 다 읽으신 건가요?
지난 번에 말씀드렸던 논픽션 어쩌구하는 책은 다 읽으신 건가요?

시이소오 2016-08-04 19:1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다 읽었 어요. 제가 사진을 바로바로 올리는게 아니어서요 ㅎㅎ

오거서 2016-08-04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사는 왜 저리도 두꺼울까요. 그럼에도… 시이소오 님은 다 읽어낼 것 같아요! ^^

시이소오 2016-08-04 22:03   좋아요 1 | URL
ㅋ 저도 저리 두꺼운 줄 몰랐습니다 ㅎ ㅎ

무독서 2016-08-04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세금을 많이 낸게 효과가 있네요?? ㅋㅋ

시이소오 2016-08-04 22: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이슨님^^

깊이에의강요 2016-08-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어마 해요 ㅇㅇ

시이소오 2016-08-05 05:03   좋아요 0 | URL
다 읽어야 할텐데요 ㅎㅎ

깊이에의강요 2016-08-05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독법을 배우신건지???ㅋ

시이소오 2016-08-05 06:16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요. 시간을 늘리는 마법을 씁니다 ^^

깊이에의강요 2016-08-05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법사셨네요^^ㅎ

시이소오 2016-08-05 07:33   좋아요 0 | URL
이름하야 `독서 마법사` 입니다. ㅋ

천명 2016-08-0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걸 다 읽으실려고하다니 ㅠㅠ 잼있는것만 읽으세요. 일년이가도 손이 안가는 책은 읽지 않게 되더군요 ㅎ

시이소오 2016-08-06 23:10   좋아요 0 | URL
넹, 잼없는것들은 패스죠 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8-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대단하십니다ㅎ
20권까지 빌릴수있다니 부럽네요. 책이음써비스 부럽습니다

시이소오 2016-08-09 23:14   좋아요 1 | URL
이거 책을 빌려만 읽다보니 작기나 출판사에 미안하네요. 그런데 더 이상 책을 사서 놓을 공간이 없어요. 집을 넓힐만한 돈이 생기기전까진 계속 빌려읽어야겠어요 ^^

고양이라디오 2016-08-10 07:59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의 리뷰가 작가나 출판사에 큰 도움이 될겁니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작가분들은 분명 기뻐할꺼예요ㅎ 현업작가분들은 모르겠지만요ㅎㅎㅎ

시이소오 2016-08-10 08:45   좋아요 1 | URL
고인이 된 작가들이 기뻐할거란 말씀이 위로 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힘내세요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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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은 장면 내각 출범시 장면에게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몸소 실천했던 이종찬을 강격 권고했지만 장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박정희는 사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선배인 이종찬 장군이 만일 장면 정권의 국방장관으로 계속 앉아 있었더라면, 우리가 과연 5.16 궐기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장면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앉힌다. 미군 지원설은 포함,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유에 대해 적어도 7가지 설이 난무한다. 장도영 장인 로비설, 정치자금설, 뇌물설, 어머니설, 박정희 로비설, 지연설 등등.

 

614월 초순, 박정희의 예편은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예편 일자는 5월 하순경으로 돼 있었다. 박정희는 4.19 1주년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폭동진압작전을 명분으로 내세워 쿠데타를 감행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대규모 시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김종필은 박종규에게 ‘4. 19 데모 유발 공작총책을 맡긴다.

 

한편 해병대 김동하 역시 해병대 창설 기념일인 415일 쿠데타를 계획하다 박정희와 손을 잡는다. 드디어 4.19일 박정희는 목을 빼고 기다렸으나 오후 내내 시위 소식은 없었다. 저녁 8시 경 드디어 데모가 일어났다. 그러나 창녀들과 포주들 30명이 서울역 앞에서 매춘 합법화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을 뿐이었다.

 

23일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가 창간된다. <민족일보>는 통일문제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장면 정권의 악랄하고 교활한 탄압을 맹비난하던 <민족일보>는 쿠데타를 지지한다. 그러나, 불과 몇 일만에 박정희에 의해 폐간될 뿐만 아니라 발행인 조용수는 사형 당한다.

 

장면은 총리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쿠데타 정보를 보고 받았었다. 그럴 때마다 장면은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응대했다. 56일에도 민주당 의원 윤병한, CIA 한국지부장 피어드 실바가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고, 박정희 이름까지 알려주며 경고했지만 장면은 미국이 있는데 설마라는 주기도문만 암송했다.

 

516일 새벽 330분 제 6군단 포병단은 육본을 점령한다. 장면은 330분 경 혜화동 칼멜 수녀원으로 도망친다. 쿠데타 군은 415분 경 KBS를 접수한다. 혁명공약이 장도영의 이름으로 방송된다.

 

오전 10시 육군 중장 이한림은 고민하고 있었다. 휘하에 5개 군단을 거느린 그는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이한림은 장면에게 출동 명령을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하나, 장면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

 

11시경, 매그루더와 그린이 윤보선을 방문해, 무력진압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나 윤보선은 거절한다. 그린은 윤보선에게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

 

330, 장면의 운전기사를 추궁했으나 운전기사는 끝까지 모르다고 부인한다.

6시 경, 장면의 경호관 조인호에게 장면의 행방을 추궁하나 역시나 모른다고 부인한다. 이영신에 따르면

 

이 시간까지는 아직도 희망은 있었다. 그러므로 조인호가 장면의 은신처를 노영균에게 밝히기만 했어도 역사의 궤도를 제자리로 수정해 놓을 충분한 시간적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조인호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이다. 곤두박질하려는 역사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가 조인호의 고지식함으로 해서 또 다시 그 기회가 잃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

 

장면은 도망가고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에 계속 협력했다. 미국은 과연 쿠데타를 저지하려 했던 것일까. 이완범은 이렇게 말했다.

 

장면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쿠데타를 진압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은 사실과 다른 책임회피였음이 판명된다. 또한 윤보선이 쿠데타를 지지해서 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도 자신들의 고차원적 정치 개입을 호도하고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책임회피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장면에 대한 대안을 일찍부터 고려하고 있었고 박정희가 거사하자 이 대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장면에 대한 고려를 끊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일 오후 7시 육군 첩보부대 중령 최영택이 쿠데타 군의 사기를 위해 혁명군 완장을 차게 해주자고 제안한다. 완장을 찬 군인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검문 태도가 건방지다고 신문 기자에게까지 집단 구타를 가한다. 완장시대의 개막이었다.

 

육사 교장 강영훈은 쿠데타에 반대한다. 반면 이상훈과 전두환 등 육사 11기 동기들은 쿠데타를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을 주도한다.

 

18일 낮 1230분 경, 잠적 55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20일 전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군사정권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찬양한다.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시기상조라는 사족을 달아.



 

5. 16 쿠데타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품었다. 한국군의 0.5% 정도 밖에 안 되는 병력, 게다가 민주당 정권 수뇌부, 총리, 육군 참모총장, 유엔군사령관 까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미국의 배후조정설이다. 이미 미국은 미 정보기관 대령인 크레페가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 장도영 집권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었다. 김종필의 중정에 의해 밝혀져 미국 공작원들이 추방당한 일명 크래퍼 사건5.16 이전에 있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앨렌 덜레스는 영국 BBC에 출연 내가 재직 중에 CIA의 대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주간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하기 위하여 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미 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장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3세계에서 쿠데타 사주는 미국의 상습적인 수법이었다. 과연 한국이라고 예외였을까.

 

5.16 쿠데타가 벌어지자 북한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알고서 환호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을 캐고 다녔다. 미국 측 눈에 들기 위해 기회주의자 박정희는 보도연맹 관련자, 진보정당 관련자, 좌파 지식인, 사회단체 지도자, 노조 지도자 등 4천 명에 이르는 좌익활동 경력자들을 체포, 수감한다.

 

미국에게 자신이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는 박정희의 강박은 계속된다. 심지어 빨갱이 아닌 사람도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았다.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빨갱이로 몰려 사형 당했다. 박정희는 심지어 민족일보의 자산은 물론 조용수 가족의 전 재산을 몰수한다. 재산몰수는 박정희의 특기일까 취미일까?

 

박정희는 사무라이 정신이 골수에 박힌 친일파여서 반미기질이 강했지만 쿠데타 성공 이후에는 미국에 점점 더 비굴하게 굴었다. 미국에 비굴하면 비굴할수록 박정희는 자신이 만들어낸 빨갱이들에겐 더욱 더 가혹하게 굴었다. 한 전향자의 좌익 콤플렉스로 인해 무고한 국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숱한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니

 

 

군사정권은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한다. 21일 오후, 군사 정권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비롯하여 200여 명의 깡패들에게 깡패 생활 청산하고 바른 생활 하겠읍니다와 같은 플랭카드를 들고 시내 중심가를 행진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깡패들뿐만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인간 개조 운동을 펼친다. 박정희가 꿈꾼 이상적 인간은 군사적 인간이었다. 교원들에게 국민복을 입히고,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머리를 삭발해야 했다. 고급 요정도 부패와 사치의 온상으로 지목돼 탄압당했으나, 고작 1년도 못 가서 요정 앞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연쇄강간범 박정희가 요정을 탄압하다니?



 

빨갱이로 몰려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말로를 의식해서였을까? 5. 16 쿠데타 이후 신문들은 알아서 기었다. 쿠데타 세력에 대학교수들은 적극 협조한다. 박정희는 또한 문인들과 자주 어울린다. 김팔봉, 장덕조, 이은상, 모윤숙(안 끼는데가 없다), 최정희, 박종화, 구상 등. 장준하 역시 쿠데타를 지지했다. <사상계>7월호에 가서야 쿠데타를 비판하는 함석헌의 글을 실었다.



 

610, 중앙정보부가 창설된다. ‘한국 위의 한국온갖 조작질과 부정부패의 산실. 쿠데타가 완수되었으니, 남은 일은 토사구팽. 장도영은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된다.

 

517, 쿠데타 다음 날 주요 기업인 17명이 체포되었다. 이병철은 일본으로 도피중이었다 26일 귀국, 다음날 박정희와 회동을 갖는다. 감옥에서 풀려난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717일 경제재건촉진회가 조직, 이후 68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으로 명칭을 바꾼다.

 

군사정권은 말로는 부정축재 처벌이었지만 실제로는 부정축재 이용으로 돌아섰을뿐만 아니라 부정부패의 수렁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박정희는 미국에 가기 전 동경에 들러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와 회담을 갖는다. 박정희는 만주군관 시절 교장 나구모 쥬이치를 초청해 달라고 요청해, 공식 만찬 자리에서 나구모 쥬이치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른다.

 

케네디를 만난 박정희는 미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제의한다.

 

61년 봄에 이범선 원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 상영된다. 쿠데타 후 군사정권은 <오발탄>을 상영중지 시킨다. 61년 영화계 가장 큰 화제는 김지미와 최은희의 대결이었다. 영화감독 홍성기와 신상옥의 대결이기도 했다. 홍성기는 아내인 톱스타 김지미를 춘향으로 하여 컬러영화 <춘향전>을 만들었고, 신상옥 역시 아내인 톱스타 최은희를 춘향으로 내세워 <성춘향>만들어 설날 맞대결을 벌였다. 신상옥과 최은희의 <성춘향>의 완승이었다. <성춘향>75일간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60년대는 가히 신상옥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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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4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르그 2016-08-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요약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그런 시절입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0:11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8-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죄와의 전쟁`은 정통성이 없는 정부의 민심회유 정책 1번 매뉴얼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2:24   좋아요 1 | URL
겨울 호랑이님, 제가 감사하죠 ^^
 

박그네의 가치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 


“참다운 지식인은 정치 밖에 서 있을 수 없다.” 

- 김학준, <러시아 혁명사> 


5.18 현장에서 제가 느낀 게 이것 “정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였습니다. 김정환 시인이 썼던 표현인데,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라는 말을 뼈 속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저는 518 현장에서, 카파는 쓰러져가는 소수를 살리는 일에 열정을 쏟은 게 아니라 전쟁이라는,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패악의 근원을 없애는 일에 도전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글을 쓰는 자는 자기 공동체의 미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고, 그것이 작가의 존재 의의이다,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계몽성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18쪽) 



자기 시대를 껴안고 공동체와 더불어 뒹굴고 이웃과 연대하고 노래를 앞장 서 부르는 것이 굉장히 뜨겁고 아름다운 가치이지만, 그것을 절대화, 혹은 신념화 하다보면 생산적 회의를 놓쳐버리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생각 또한 바뀌게 됩니다. 


이제 문학은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고, 작가는 무슨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무엇을 명명하는 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쪽) 


왜 미쳐도 문학은 안 될까? 하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후유증을 겪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일부러 가정을 버렸다고 울면서 후회하는 것도 봤습니다.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슴만 달구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은 미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문학에 미치라는 말의 참뜻은 어쩌면 상식을 깨뜨릴 만큼 방탕한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어가 숭고해 보일 만큼 설득력 있는 삶을 살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옳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9쪽) 



다시 말하지만 오직 사실만, 오직 상상력만, 오직 주제의식만 생각하는 것은 문학에서 굉장히 피곤한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는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직접체험, 간접체험, 지식, 사상, 공상, 역사.....그 어떤 것도 금기해야 될 것은 없습니다. (31) 


시를 백 편을 쓰면 그 중에 다섯 편쯤은 명시가 나오겠거니, 혹은 소설을 스무 편쯤 쓰면 그 중에 두 편쯤 명작이 나오겠거니, 하고 편수를 늘려가는 것은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돌팔매를 백번 쯤 하면 한 두 마리쯤 맞아서 떨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직 당면해 있는 작품을 잘 쓰는 길만이 그 다음 작품도 잘 쓸 가능성을 여는 것이니 나는 단 한편의 작품도 명작이 아니면 탈고시키지 않겠다, 이렇게요. 다시 김수영의 말을 빌리면,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태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쏜 화살에 어떤 새가 떨어집니까? (34) 


상당수의 작가들이 사실은 이렇게 외롭게 태어납니다. 헌데 이런 과정을 겪는 분들에게 흔한 오류가 무엇인가 하면 ‘주목받으려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작품도 사회적 소통양식의 하나이기 때문에 누군가 읽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래서 관중의식에 빠지다보면, 베스트셀러를 숭배하고 많이 팔리는 길을 섬기며, 독자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을 밝히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문학수업의 최대의 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4) 


문학적 지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순수이론 영역입니다. 문학원론에서 시작하여 시론 소설론 운율론 문체론 같은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광활한 영역에서 매년 수많은 박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봐서 내용이 간단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공부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드시 필요한 공부로서 문학사도 있습니다. .......동시대를 함께 걸으면서 창작의 밀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창작현실에 직접 관여하는 이론 영역도 있습니다. 이게 평론이라는 장르입니다. ....당연히 비평과 소통하고 있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는데, 난처한 것은 비평에도 수많은 견해와 다양한 노선들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공부도 한 평생 걸릴 만큼 방대하다는 겁니다. 


헌데 그런 공부가 다가 아닙니다. 다른 한쪽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영역이 있는데, 세계관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제입니다....당연히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이 결여된 감정은 문학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표현역량을 갖추어야 그걸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작 방법의 문제인데, 이게 간단해 보여도 문예사조를 통해서 흘러온 다양한 시행착오와 성숙과 축적들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납니다. 나아가 우리 동시대의 작가들이 터득한, 아직 전파되지 않은 방법들은 또 얼마나 많을는지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하면 창작조건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38)



그래서 역사적 과도기의 작가들 중에는 공부만 하다가 글은 못 쓰고 마는 사례도 없지 않았습니다. ...박영희 시인이 그런 말을 남기지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39) 


저는 이럴 때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계가 총체적이면 극복도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갗춰야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려는 삶을 ‘그냥 사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고로 가치관의 정립이 핵심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문학적 창작적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게 오늘 제가 주장하려는 바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가치관이 얻어지는 가요? 문학과 창작과 작가에다 ‘나’라는 존재를 덧칠해보세요. 나 더하기 문학, 나 더하기 창작, 나 더하기 작가, 이를 줄여서 문학관, 창작관, 작가관이라 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은 고래는 아무리 커도 물살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서 오를 줄 안다”입니다.......모두 이론의 대가가 되고 문학사의 대가가 되고 비평의 대가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세계관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를 끝없이 극복해 가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문학을 사는 것, 이것이 문학수업의 왕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1) 


고독을 견디는 것, 외로움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제 절반은 해결이 된 셈입니다. 외롭고 지치고 속상한 것을 끝없이 존재의 위엄으로 극복하면서 맟치 배가 물살을 가르듯이 도도한 세상을 조금씩 흔들리면서 그냥 헤치고 가르는 방법 외에는 문학의 길이 없는 게 아닌 가 생각합니다. (41)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은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사람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43) 


문학적 삶의 고독을 극복한다고 해서 오직 혼자서만 내공을 쌓으려 하는 건 무모합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도 도는 혼자 닦지만 지내기는 도반들과 함께 합니다. 문학수업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창작적 에너지가 증폭되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지나가는 흔적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 길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시를 (김수영, <푸른하늘>) 읽을 때면 매번 러시아의 저술가 일리인이 쓴 <인간의 역사>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쓰면서 ‘사람’이 ‘인간’으로 변모해 오는 궤적을 설명하기 위해 ‘거인’이라는 화두를 꺼내드는데, 그가 유독 사람 앞에 클 ‘거’자를 붙여서 부르고자 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존재는 모두 유한하고, 목숨은 모두 운명처럼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지구에는 그런 한계를 끝없이 뛰어 넘는, 아주 거대한 생명 능력을 소유한 종이 있어요. 인간입니다. 일리인은 인간이 바로 그렇게 사는 이미지를 거인이라는 말로 형상화하려 했습니다. 


인식의 도구들 ; 진선미, (이성 및 과학, 종교, 미) 


....작가 위화가 서울에 와서 강연을 하는 걸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데요. “문학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지요. 여기에 가장 일반화된 답변은 인간학이라는 것인데, 보통 인간학이라고 하면 의학도 인간학이다, 생물학도 인간학이다, 언어학도 인간학이다 말합니다. 


살아온 시간만큼, 몸 속 어딘가에 구멍이 생기고 꼭 그 구멍의 크기만큼 커지는 그리움. 아아, 아무리 다가가도 일정치 않은 사랑의 각도여, 사랑은 균형인가, 불을 향해 길 떠나는 긴 그림자여 목숨보다 먼저 우리를 끌어당기는 저 아득한 불빛들의 속삭임 


- 이영진, <하루살이> 부분 


하루살이는 태양이 사라지면 몸이 기울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작은 빛이라도 발견되면 정신을 잃고 다가가요. 가까이 가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빛에 접근하는데 끝내 균형을 얻지 못하고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가는 셈인 거죠. 


문학은 인간학이다, 인간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어떻게 다루느냐? 인간형 탐구로, 성격 창조로 다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격’이라는 말은 무엇이냐면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과 달리 인간유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표현 그대로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게 놓여 있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꿈을 얻거나 이런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지 않으면 성격 창조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래서 삶의 시간들이 계속 솟구쳐 나오는 한 문학의 길은 마르지 않고 계속 솟구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측면은 글 쓰는 행위 안에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말로 설명할 때 그것의 맥락을 발견하게 되고, 글로 표현할 때 더 명료하게 아주 현장 검증을 하듯이 이해하게 됩니다. 


<어느 안내양의 수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한 방울 똑 떨어뜨린 사람은 누구나 안내양에게 동화된 사람입니다. 독자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작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그 뜻에 온몸으로 공감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에요. 문학의 사회적 작용의 강력한 힘이 행사되어 버린 지점, 글쓴이의 생각과 독자의 이상이 결합해버린 지점, 이렇게 해서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느 곳까지 나의 글이 떠돌아다니며 내가 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합니다. 이를 문학의 사회적 작용이라 하면 말이 되겠는지요? 어떻습니까? 글쓰기가 고단해도 한 번 해볼만한 일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 김용택, <섬진강3> 


과학의 언어는 개념적인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형상적인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성격을 배제시킨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성격을 품고 있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해석에 사용되는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창조에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통계와 보편을 다루되, 통계, 수치 같은 데이터를 제공해서 지식을 주고 설득을 목표로 합니다. 예술의 언어는 감정을 담아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들의 삶을 통해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형상적인 사유를 잘하고 형상적인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고, 개념화를 잘 시키고 보편, 추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잘 포착하는 사람이 과학 쪽으로 재능있는 사람입니다. 


형상이란 ‘바깥으로 드러난 모양’을 말하죠? 언어라는 게 이미 ‘추상’인데 그 어디에 형상의 자리가 있을까 하는 문제예요. 이때 주의할 것은 형상의 반대편에 있는 게 ‘추상’이 아니라 ‘개념’이라는 겁니다. 


머드는 그저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머드가 인생이라면 바둑도 인생이고 축구도 인생이고 골프도 인생이다. 비유하자면 무엇에도 비유할 수 있다.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머드가 아무리 인생을 닮아간다 해도 끝내 닮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불가해함과 예측 불가능성이다. 머드는 누구나 며칠만 해보면 그 룰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게임 제작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해하는 데 십여 년이 걸리는 게임을 누가 프로그램 하겠는가? 우리 인생에는 평생이 걸려도 납득하지 못할 부조리가 널려 있으며 또한 열 번의 생을 거듭해도 이해하지 못할 신비로움이 숨어 있다. 


- 김영하, <흔들림과 집, 나의 소설쓰기2>, 우리 문학이 가지 않은 길 



즉 삶의 관찰하는 형식이 바로 서정적 방식이냐 서사적 방식이냐를 가른다는 거죠. .....삶에서 감응하는 감동의 형식이 장르의 차이를 만든 거예요. 대체적으로 문학의 장르는 크게 세 가지로 형태로 구별됩니다.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 


시란, 운문의 한 형태요, 서정시 서사시 극시가 있다고 나와요. 내가 궁금해 하는 게 서정시일 테니 그쪽을 펼쳐봤어요. 서정시란, 서정을 위주로 한 시라고 나와요. 이런, 그래서 다시 서정을 찾게 된 거예요.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주관적인 감정’이라 해설됩니다. 


서사적 방식이란, 단일한 상황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상황을 연결시켰을 때에만 통하는 전달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사의 핵심은 우여곡절이에요. 세상사의 곡절들을 잘 읽고 그리는, 또 그것에 실감을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서사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사에서는 이야기 얽음새가 중요하겠죠. 구성의 문제가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작가 박경리는 <토지>이전에는 길상이를 좋아했으나 <토지>를 쓰고 난 결과로 주갑이를 더 좋아하게 된 겁니다. 이게 우리가 서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일들이에요. 그럼, 이런 서사는 어디에 사용되는 것이냐? 역시 밀란 쿤데라는 서사문학의 본질을 “인간 성격의 새로운 측면을 발굴하지 않은 작품은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말해요. .......밀란쿤데라는 시를 “저 뒤쪽 어디에서”오는 것이라고 정의해요. 어느 날 불쑥,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서 치솟아오는 것, 서정적 방식에 의한 것은 역시 감정 표출이 핵심입니다. 


그래도 김성동의 소설에서 읽은 것만은 확실해요. 내용인즉, 이제 막 문학을 발견한 고등학생 하나가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해요. 

“운문과 산문이 어떻게 다릅니까?” 

산문이 발걸음이라면 운문은 춤이지.” 


시의 소 장르 : 만가 형식, 이야기 형식, 진술형 시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출현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장르적 계보로 따지면 고은의 적자라 할 수 있어요. 애매모호함에 가득 찬,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다루듯이 언어를 루는, 혼돈의 미광이 가득 찬 직관과 영감의 세계, 그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작용을 그려낸 언어로서의 시는 고은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신동엽 시인은 1960년 대의 명문이라 할 <시인정신론>에서 ‘닭의 세계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원근법도 하나의 인습이 제도화된 결과라는 사실을 아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어요. 


이 창작방법의 문제가 중요해진 것은 근대인들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입니다. 그런 논란의 첫 대상에 오른 사람이 발자크예요. 발자크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소설은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자크의 정치적 보수성과 미학적 진보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란이 일게 됩니다. 엥겔스가 이를 ‘방법의 승리’로 해석하면서 촉발된 논쟁이 루카치가 사용했던 유명한 논제 즉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어요. 하여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관과 방법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 작가의 똑똑함과 작품의 그럴싸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고전주의 – 낭만주의 – 리얼리즘 – 모더니즘 



고전주의의 토대가 규범이었다고 한다면 낭만주의의 토대는 상상입니다. 



리얼리즘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어요. 하나는 세부를 진실하게 그린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형’이라고 하는 것. 세부를 진실하게 묘사하되 전형성을 가지고 있어야 사회생활의 본질을 깊이 있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죠. 


비판적 리얼리즘은 현실 반영에서의 구체성과 생동성, 사회적 모순과 부정에 대한 예리한 비판 정신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변혁적 전망, 즉 ‘그렇다면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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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8-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03 20:59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1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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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만 읽어야 할 것 같다. 대개 미쳐야 미친다(다다른다)’라고 말한다. 저자인 김형수에 따르면 문학은 미쳐도 안 된다.  가정을 버려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단다. 그래도 하겠는가? 어휴, 어디 겁나서 하겠는가? 사실 어느 분야든 기저율을 고려해 봐야한다. 문학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1000명 중에 한 명? 혹은 만 명중에 한 명? 등단했다고 해서 전업 작가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런 작가는 고작 몇 백명 정도가 아닐까?

 

그래도 난 하고 말겠어라고 한다고 해서 또 이게 그리 간단치가 않다. 김형수에 따르면, 문학은 평생을 공부해도 알까 말까할 정도로 공부할 게 많다. 문학론, 시론, 소설론, 운율론, 문체론 등, 비평도 공부해야 한다. 게다가 세계관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도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 중에는 공부만 하다 글은 못 쓰는 사례도 빈번했다고. 박영희 시인이 그랬다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형수가 제시하는 대안은 이렇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은 고래는 아무리 커도 물살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서 오를 줄 안다입니다.......모두 이론의 대가가 되고 문학사의 대가가 되고 비평의 대가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세계관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를 끝없이 극복해 가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문학을 사는 것, 이것이 문학수업의 왕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일단은 글을 쓰면서 공부를 병행하라는 것이다. 두 가지를 병행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고독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은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사람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43)

 

고독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야 한다. 영적 배움에도 도반이 있듯 문반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창작적 에너지가 증폭되는 관계망을 형성해야 한다.

 

그 외 인식의 도구들, 장르의 구분, 문예사조 등은 부수적인 가르침이다. 하루살이에 관한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하루살이는 태양이 사라지면 몸이 기울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작은 빛이라도 발견되면 정신을 잃고 다가가요. 가까이 가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빛에 접근하는데 끝내 균형을 얻지 못하고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가는 셈인 거죠.


상상을 하면 왜 이리 웃긴지. 하루살이는 이미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작은 빛에도 속절없이 끌려가 죽음에 이른다니! 웃다가 섬찟해진다. 혹시 나도 하루살이는 아닐까?

 

태양이 없을지라도

균형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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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8-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은가 봐요. 많이 읽던데...
근데 제목이 처음엔 좋은 것 같았는데 다시 보면 좀 으시시해요.
한적한 시골길에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 보면 얼마나 무서운데요.
거기서 살인의 추억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가로등은 뭔 죕니까?ㅋㅋ3=33=3

시이소오 2016-08-03 13:32   좋아요 0 | URL
ㅋ 듣고보니 그러네요 ㅎㅎ

2016-08-03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4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뭇잎처럼 2016-09-06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고민하던 걸 한방에 시원하게 날려주는 글이네요. 글 잘 쓰고 싶을 때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거야,라고 자책했던 마음도 홀가분해지는 기분^^

시이소오 2016-09-06 21:3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 자체로 빛나시길. 나뭇잎처럼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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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5 부정선거 이후 시위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가에서는 418일 고대생들이 처음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오후 720분 경 유지광이 지휘하는 반공청년단과 조폭 100여명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몽둥이, 벽돌, 삽 등을 휘두르며 고대 학생들을 습격한다. 고대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졌으며, 그 일대는 피바다로 변한다

 

이튿날 시위대 군중의 수는 10만 명으로 불어난다.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한다.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진다. 시위대에 박수를 치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한다. 총성이 요란한 가운데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불어난다. 오후 3시를 기해 서울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15사단이 서울로 진주한다. 19일 하루, 사망자 수는 민간인 111, 경찰 4명이었고 부상자 수는 민간인 558, 경찰 169명이었다.



 

420일 계엄령 하에서 서울에서는 시위가 중단되었지만, 대구, 인천, 전주, 이리, 수원에서 학생 데모가 계속된다. 425일 대학 교수들마저 시위에 동참한다. 교수데모를 주도한 교수들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학에 몸담고 있는 사립대학의 노교수들이었다. 다음날 426일 아침부터 쏟아져 나온 시위 군중은 10시 경 10만을 넘어선다. 경찰의 발포로 학우 전한승을 잃은 수송초등학교 학생들까지 국군 아저씨들,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오전 1030분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된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오자 10대 청소년들은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가 이승만 동상을 파괴하고 새끼줄을 동상에 묶어 길거리로 끌고 다녔다. 4. 19 이후 희생자는 사망 186, 부상 6259명이었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강석은 28일 새벽 540분 경 일가 전원이 자살한다. (세상에, 몰랐는데 2011년에 이승만 동상을 다시 올렸군요) 



 

427일 허정 과도 정부가 들어선다. 6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해 양원제가 채택된다. 7. 29 총선은 민주당의 대승으로 끝났다. 민주당은 민의원 재적의원 233명 중 175(75.1%), 참의원 재적 57명 중 31(53.4%)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 민주당은 81개 선거구에선 신구파가 동시에 출마할 정도로 신파와 구파로 갈려 무한 내분 상태였다.

 

812일 민, 참의원 합동회의는 윤보선을 제 4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윤보선은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한다. 신구파의 갈등이 첨예화되자 구파는 신당 발기를 결의, 이후 신민당으로 발족한다.

 

장면은 미군측과 군대와의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고 ‘10만 감군 계획을 발표한다. 미국이 즉각 반발하자 감군 계획은 폐기된다. 910일 김종필과 김형욱 등 육사 8기생 중령 11명은 국방장관 현석호를 방문해 정군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이들은 이날 저녁 충무장이라는 음식점에서 쿠데타를 결의한다. 5.16 쿠데타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른바 충무장 결의였다.

 

미국의 대한 정책에 대한 권고를 담은 콜론 보고서59111일 미국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에 제출된다.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불원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어째서 오늘날 한국에 대한 보고서라고 착각했을까. 콜론 보고서는 또한 군사 쿠데타를 기대하는 미국 정계 일각의 기류를 반영하기도 했다. 일본 주재 미국 대사 라이샤워는 한국을 계승할 사람은 전쟁 마당에서 자라온 새로운 젊은 군인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군 역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다. “별은 짚차 도둑, 말똥은 부식 도둑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고, 죽어나가는 건 사병들이었다. 휴가 나온 사병들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다. 군의 부정부패는 정부 정책의 문제기도 했다. 심지어 준장 월급만으로도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는 19171114일 오전 11시경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의 5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시키려고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다고 한다. 간장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 끓여서 마시기, 섬돌에서 뛰어내리기, 자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치기, 수양버들강아지 뿌리 달여 먹기,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 대고 뒤로 자빠지기, 뒷동산에 올라가 밑으로 뒹굴기 등등 해보지 않은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고. , 한 가지 방법이라도 통했더라면.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만주군관학교에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보내, 404월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다. 박정희는 444월엔 일본 육사까지 졸업한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이름을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개명한다. 박정희는 44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해 칼 차는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곧이어 해방을 맞는다. 박정희는 465월 중순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온다. 4개월간 무위도식하던 박정희는 9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으로 입학한다. 이후 박정희의 군대생활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4881일 소령으로 승진한 박정희는 10월 여순사건이 터지자 우습게도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된다. 당시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 우두머리였다. 숙군작업의 와중 1111일 체포된다. 해방정국에선 공산주의가 우세였다. 최상천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는 절대 대세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정의로운 소수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든 적도 없다. 대세에 편승하더라도 그냥 끼어드는 정도가 아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핵심부에 들어갔다......얼마 후 그는 좌익의 사회적 주도권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조선국방경비대까지 좌익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눈에는 사회주의 승리가 요지부동의 대세로 보였다.”

 

- 최상천, <알몸 박정희>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으로 변신했다가 사형을 당할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박정희는 숙군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고 만주군 선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박정희의 배신으로 사관하교 중대장 시절 동료들과 생도들이 주로 처형된다. 김영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히 생존을 위해 열 번씩 자신의 신념을 버리도록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할 것이다. 특히 김창룡의 조건은 박정희가 어떤 인물을 목전에서 지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때 동지거나 친구였던 누군가에게 죽음을 선고하라는 의미였다.....그것은 이념과 친구를 함께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더 큰 대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최악의 생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

 

김종필은 사병으로 지원 입대했다가, 탈영했다가, 몇 개월 후 교도대 졸병으로 들어갔다가 육사 8기로 들어간 별난 케이스였다. 박정희가 근무하던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육사 8기로 졸업한 15명의 신임 소위들이 배속된다. 이들 중 한 명이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8기생 중심으로 대한음주당을 만들고 박정희를 당수로 삼아 거의 매일 막걸리를 마셨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큰 딸 영옥은 51, 김종필과 결혼한다. 박정희에게 현역 복귀의 절호의 기회가 왔다. 6.25가 터진 것.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눈물로 호소해 육군 소령으로 복직한다. 박정희는 진급을 거듭, 55년 강원도 인제 5사단장으로 발령 받는다. 당시의 직속 상관은 3군단장 송요찬이었다. 박정희는 52, 59년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노린다. 박정희는 60년 초부터 4월까지 20여회에 걸쳐 쿠데타를 위한 모임을 갖는다. 박정희는 58일을 기해 또 다시 쿠데타를 획책하지만 4. 19 혁명으로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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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0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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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08: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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