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 연구 발제문.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의 제3장 '중세의 철학적 신학' 요약.>

 

  철학적 신학으로서의 중세철학


  서양의 중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기독교가 유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기독교적인 신 개념의 지위 또한 기독교의 확산과 일반화에 따라 이전과 달라졌다. 기독교적 신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신의 말씀, 곧 진리가 성서를 통해 계시라는 형태로 선포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교부시대 이래로 성서-계시-신앙으로 이어지는 신에 대한 접근법은 여전히 경험-지식-이해로 이어지는, 인간에게 고유하다고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접근법, 즉 이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기독교적인 철학, 기독교적인 의미의 철학적 신학은 바로 이 두 영역을 어떻게 하나의 체계 속에서 양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 의문은 중세철학에서도 여전히 문제적이었다. 특히 문제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이성이었다.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신앙은 거부할 수 없는 전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였다. 반면, 이성은 분명히 인간의 내부에 국한된 능력이고, 따라서 이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중세의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였다. 그렇다면 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졌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범위, 대상,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중세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신앙와 이성의 영역에 동시에 걸쳐진 과제로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적 증명’이 중세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의 존재는 신앙과 직결된 문제이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절차는 인간의 이성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논증의 형태가 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완결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면, 이성을 소유한 모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모든 인간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증명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는가, 그리고 이 증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서 철학자의 특징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철학적 신학의 고유한 과제, ‘이성을 사용하여 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가?’ 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중세 시대까지 내려온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철학은 철학적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과 신앙에서 이성의 지위와 역할


  이 두 가지 논점에 대해 인상적인 의견을 제시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이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이성은 언제나 신앙에 기초해 그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능력은 개념적으로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이 두 가지 능력을 모두 잘 갖추고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의 말씀으로서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진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인간의 이성은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인간의 이성이 이런 기반 위에서 발휘된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계시된 진리에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입장에서 그는 신의 개념에 대한 전제적인 믿음을 배제한 채, 이성적 능력 즉 논증을 통해서 신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능력, 즉 이성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발상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식으로 인간에서부터 출발하는 신 존재 논증을 구사한다. 첫째, 인간은 이 세상에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하다’는 단일한 것, 단 하나의 선한 것, 따라서 최고의 선이 모든 선한 것을 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최고의 선이 바로 신이다. 둘째, 인간은 여러 대상들의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차이들은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본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셋째, 인간 외부의 대상들을 바라보지 않고 좀 더 내적으로 성찰해보았을 때, 인간은 자신에게 ‘최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인간의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성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존재라도 그것보다 더 높은 존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개념이 있다는 것은 진짜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최고의 존재’가 바로 신이다.

  보나벤투라(1218~1274)와 로저 베이컨(1214~1294)은 ‘이성은 신앙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한다’는 안셀무스의 주장을 더욱 강한 형태로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성과 철학에만 기대어서는 결코 계시적 진리, 참된 지식에 이를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기반 위에 있는 철학은 얼마든지 허용되며, 신앙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탐구한 주제들은 결코 신학에서 설명해야하는 과제들과 다르지 않다. 보나벤투라는 이것을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베이컨은 철학의 전통에서 거론된 모든 진리를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지식은 성서에 담겨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아벨라르(1079~1142)와 헤일스의 알렉산더(1185~1245)는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였다. 아벨라르의 경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사용되는 철학적 방법인 변증술을 신앙의 방법으로 이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계속 질문하고 토론함으로써,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철학적 방법과 그 방법을 통해 획득한 지식으로 진리의 어렴풋한 모습을 파악할 수도 있다. 이것을 명증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신앙이다. 헤일스의 알렉산더는 아예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나눈다. 신앙을 정교하게 구축한 학문은 신학이며, 이성을 사용한 정교한 학문은 형이상학인데, 그가 보기에 이 두 학문은 모두 신에 대한 지식, 진리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도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후대의 입장들


  신앙와 이성 사이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고, 이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더욱 긍정적으로 답한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물론 그 또한 신학자인 만큼 이성만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단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반면 신앙은 이런 존재하는 신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 즉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해준다. 따라서 이 두 능력은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각기 다른 방법과 영역을 가지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이성은 이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는 능력이고, 반대로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도출해내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신에 대한 인식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이에 대해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간이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이러한 조건에 처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신 때문이다. 신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창조하였고, 인간 또한 그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들의 피조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 피조성은, 존재자들의 존재로부터 도출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도 여전히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것을 얻는데 필요한 이성보다는, 신앙을 통해서 신을 직접 인식하고 진리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안셀무스의 증명을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혼동한 결과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고유한 신 존재 증명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어떤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은 다른 운동하는 것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운동자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최초의 운동자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둘째, 어떤 작용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시나 원인 또한 무한히 추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최초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셋째, 이 세계의 존재자들은 존재하지 않고 소멸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오류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신이다. 넷째, 우리는 고귀한 것,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더 고귀한 것,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무한히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로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다섯째, 모든 존재자들은 완벽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운동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자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 목적을 향해있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하지 않으므로,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아퀴나스의 이 논증들은 결함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첫째, 이 논증들은 모든 존재자가 목적을 내포하며 이것을 향해 운동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정하고 있다. 둘째, 감각적인 세계와는 구별되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 셋째, 최초의 무엇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며 원인/근거와 결과/작용의 연쇄를 자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넷째, 아퀴나스가 증명한 것은 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자이다. 즉, 그의 논증이 최초의 원인이나 최고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에서 말하는 그 신인지는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결론은, 끝내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에서 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철학에서의 형이상학을 이용하여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의 대상, 이성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사유는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에 도달할 뿐이며, 그것이 신이라고 인식하는 도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신앙이다. 윌리엄 오컴(1288~1348)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신앙은 학문적 체계로 만들어질 수조차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듯하다. 신에 대한 인식은 학문적 인식과 같은 방법이나 구조일 수 없다. 신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들처럼 명백하게 알려진다면, 그것 자체가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렴풋한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며, 이성은 이 과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신비주의자들


  이 맥락에서 시대를 거슬러 신비주의적 전통을 살펴보는 이유는, 신앙과 이성이 명백하게 구분된다는 오컴의 주장이 인간과 신의 단절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전통 내지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두 전통은 중세 신학에서 신비주의 전통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 철학자들로는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5~877),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생빅토르의 후고(1096~1141), 생빅토르의 리카르트(?~?), 보나벤투라 등이 있다.

  에리우게나의 출발점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여러 철학자들의 출발점과 유사하다.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신과 인간은 개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고대의 전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성은,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신적인 체험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능력으로 간주된다. 또한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된다는 것은, 이성이 신앙의 형태라는 뜻으로 바뀐다. 이후의 신비주의자들은 신앙 안에서 신과 하나되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과는 다른 직관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한다.

  신비주의적 전통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인식의 단계를 명확하게 설정한다는 점이다. 리카르트와 보나벤투라의 견해를 참고해보면, 인식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진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이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 각각 신을 반영하고 있는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작용이 우리에게 단순한 존재자들 뿐만이 아니라 무형적인 것, 작용하는 것 등이 있다는 것 또한 일러준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데, 이것이 두 번째 수준의 인식이다. 그 다음 내적 반성을 통해 이 정신이 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우리의 구조가 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을 향해 넘어가는 ‘정신의 고양’을 경험한다. 신비주의적 체험 신학은 이렇게 완성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또한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독특함은 인식의 단계에 대한 정의와 신적 체험을 향해 가는 방법론에 있다. 신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 때부터 그러했듯, 신비주의자들은 대개 상승이나 도약, 고양같은, 위계성이 갖춰져있고 계속해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은유를 사용한다. 에크하르트는 반대로 아래로 향하는 은유,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향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존재자들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격리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정신의 고려사항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존재자들이 추방된 정신 그 자체가 발견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이 피조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다시 말해 신적인 영역으로 자신을 옮겨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발견된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며, 이 정신에 대한 체험이 신에 대한 인식이다.

  나의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라는 인식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바로 신이라는 인식으로 유비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존재자들의 총합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신은 오히려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존재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존재성은 마치 내가 나의 내면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신을 체험하듯이, 신이 모든 존재자들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을 에크하르트는 ‘통찰’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인간이 격리성을 통해 체험할 수는 있으나, 규정할 수는 없다. 도저히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은 기술될 뿐, 설명되지 않는다.

  신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번번히 좌절된다는 것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의 철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립하는 어떤 대상을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자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구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그 안에 비단 현재뿐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거대한 가능성의 덩어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타자가 없는 존재, 즉 비-타자로서의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가능성이 끊임없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변화하는 존재인 신은, 그래서 인간의 개념에 포착될 수 없고 따라서 가능성 그 자체라는 묘사 이외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신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존재는 이성의 규칙인 모순율마저도 뛰어넘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립하는, 즉 모순된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식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그에게 신은 인식이 아닌 체험을 통해 다가오고,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연모 즉 신앙이다. 그는 이 신앙을, 이성적(즉 인간적) 요소를 모두 배제한 순수한 바라봄이라는 뜻에서 ‘관조’라고 말한다. 이 관조 속에서 신은 인간에게 다가오며, 여기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체험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 또는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단적으로 말해 신비주의자들이 철학, 즉 철학적 신학을 한 철학자들인지 되묻는 것이다. 신에 대한 고찰이 체험이나 믿음의 영역으로 돌려지는 순간, ‘철학적’ 신학은 포기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에 대한 중세적 사유를 끝맺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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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 발표문.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의 3장 '자유주의 공동체의 우연성' 요약.> 

벌린의 자유주의와 상대주의 문제

  언어와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한 로티는, 그 다음으로 개인들이 모여서 구성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에게 확고한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인데,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견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에서 그가 논하려는 내용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즉 개인은 합리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선택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이다.

  로티가 자신의 견해와 가까운 것으로 제기한 이사야 벌린의 자유주의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과는 구별된다. 그의 자유주의는 개인이 각각 선택한 신념들이 절대적-보편적-필연적 타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는 내용이 들어간 근대적 자유주의와는 구별된다. 물론, 인간에게는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나 벌린의 생각 그리고 지금까지 로티가 전개한 논증에 따르면 개인은 근본적으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벌린이나 슘페터의 말처럼 ‘신뢰할 수 없는 상상 속의 토대’를 자신의 행위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샌들은 벌린의 자유주의적 견해가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만약 개인의 신념에 확고한 토대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그 신념을 굳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과 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은 서로 모순인데, 만약 합리적인 것이 더욱 근본적이라면 자유는 단지 합리적으로 선택가능한 사항으로서의 가치 정도밖에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합리적으로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게다가 자유가 ‘자유롭게’ 포기할 수 있는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유’를 공동체 구성의 기본 원리로 삼는 자유주의 또한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로티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대립시키는 샌들의 구도 자체가 전형적인 근대인의 태도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상대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상대성을 판단하기 위한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해, 상대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정초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샌들은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정초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로티가 보기에 인간은 오로지 역사적인 존재일 뿐이며, 역사성을 벗어나 합리적으로 신념들을 선택할 능력은 없다.

  또한 그는 데이비슨의 견해를 빌어서, 역사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쓰는 행위, 즉 은유(메타포)의 변화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절대적-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합리성조차도,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합리성이라고 부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각 시대의 합리성조차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샌들의 질문은 벌린이 제기하는 현대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질문 또는 비판일 수 없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변화를 불러오는 새로운 은유가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념이다. 절대적, 보편적 정초를 요청하는 경우 그 정초와 어울리지 않는 특정한 은유들은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는 로티 식의 자유주의에 반하는 행위이다. 지금 우리를 규정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여기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는 그들이 등장했을 당시에는 매우 세련되고 신선한 은유였다. 그 은유의 확산은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법과 공동체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의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와 결합된 상태로 계속 머물러서는 안된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들이 공동체에 대한 또 다른 은유들을 상대로 절대성과 보편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절대적-보편적 정초에 대한 열망, 즉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적 욕구와는 결별해야한다. 그 자리에 시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은유의 자유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태로 다시 쓰여야 한다. 자유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 행위는, 샌들의 반박이 그렇듯 다른 것을 철학적 기초로 삼는 자유주의의 반대자들에 의해 선택가능한 이념 가운데 하나로 격하되며, 그 가치를 상실한다. 나아가서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특징 자체를 퇴색시키게 된다.

  이런 재서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효과는 중립성의 포기이다. 역사적 인간은 결코 모든 신념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 어떤 은유에 대한 선택은 곧 어떤 신념에 대한 선택인데, 인간은 결코 어떤 은유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은 중립에서 선택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유들의 배열을 바꾸어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은유는 그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사라지거나 또는 확장되는데, 그 불투명성이야 말로 진짜 자유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이 로티의 생각이다.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문제

  그렇다면 이전에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어떻게 관계를 맺었으며 또 지금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것이 로티의 두 번째 질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잘 알려져있듯이 이 관계에 대해 연구한 고전이다. 인간들은 계몽주의의 핵심인 비판과 반성을 통해 인간에게서 (도구적) 합리성을 끄집어내고 인간의 본성을 이념적으로 정초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한 비판과 반성에서 비롯된 ‘철저한 세속화’로 인해 자기 스스로 세운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포함한 어떠한 신념도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뿌리를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 기초를 잃은 자유주의 또한 공동체를 지지하는 원리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판과 반성의 원리에 따라 자유주의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서 더욱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로티는 그 비판과 반성을 허용하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며, 자유주의가 계몽주의와 동시에 탄생했다고 해서 이 둘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그들이 그것을 비판하려고 시도한 때에 와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실제로 그 두 은유를 만들어낸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이 분석한 그 결과들이 등장할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자유주의와 긴밀한 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에 듀이, 오크쇼트, 롤즈 등 현재에도 여전히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연결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유라는 철학적 정초와 합리성에 기초한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자유주의적 상황을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내용들을 인간들이 스스로 구성한다고 보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어떤 공동체의 가치가 정당화되는 것은 오로지 다른 공동체의 가치와 비교했을 때 뿐이다. 이들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치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놓는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자유주의가 갖추어야 할 진짜 모습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정초라는 말은, 거의 무의미한 말이다. 만약 그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가치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보편성이나 절대성을 띌 수가 없다. 가치에 대한 이론의 구성은 다양한 규범과 덕목들이 갈등하는 가운데, 특정한 것들을 더욱 명료하게 말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은 이론에 대해 우선된다. 이론은 실천의 유형화, 일반화, 체계화이며, 그 요점을 밝히는 도구로 한정된다. 오크쇼트는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공동체의 유형을 우니버시타스universitas에서 소시에타스societas로 변화하는 것, 즉 통합적 사회에서 상호존중이라는 가장 약한 약속만으로 결합된 연대체로 변화할 것을 제안한다.

  셀라즈가 도덕성이라는 말을 ‘우리-의식’으로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들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가치는 엄밀하게 갖춰진 형식에 들어맞는 무엇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존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의 ‘목소리’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는 도덕에 선행한다. 가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부여되며, 또한 형성된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견해에서 역사성을 배제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오히려 합리성이 배제된 자유주의에서는 역사성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 역사성에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찾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니며, 언제나 발생하는 갈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관계의 규정은 그 역사성에 의해 언제나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그리고 자유주의가 공동체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인 시인이 그 사회의 영웅이 된다. 그는 새로운 은유를 지속적으로 창조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말을 찾아 끊임없이 모험한다. 동시에 자신의 은유의 근거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의 역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새로운 은유의 근원이 그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창조되었던 은유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진리에 대한 열망과 어느 정도의 폭력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영웅인 혁명가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푸코, 하버마스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이러한 설명에 따라,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는 개념은 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로티는 (자신의 관점에서) 아이러니스트이지만 자유주의자는 아닌 푸코와, 자유주의자이지만 아이러니스트는 아닌 하버마스를 비교한다.

  로티는 자아에 대한 이해와 니체에 대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견해를 비교해보도록 권하고 있다.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적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아가 우연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더 나아가서, 근대 사회의 자유가 역설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속박하는가를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이 푸코의 중요한 철학적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하버마스는, 니체가 개인의 내면적 정초로부터 실천의 원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주의적 공동체에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인간에게 목적이 있다는 생각까지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니체의 입장과 자유주의는 모순된다. 하버마스는 사회의 구성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영역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니체의 입장을 반박하고 자유주의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

  하지만 푸코는, 그런 상상력과 의지는 이미 개인으로서 인정받는 사회화의 과정 동안에 충분한 제한을 받고 따라서 개인은 그 사회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 이상의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근대사회는 전근대사회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주체성을 구성한다. 이 방법은 대단히 정교하고 풍부해서 탄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다양한 행동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공동체 내의 주체들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히 창조적이며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어버리는데, 푸코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 위험한 사회이다.

  로티는 먼저 푸코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푸코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가장 해서는 안될 모습을 가장 정교한 형태로 적어놓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가장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지향해서는 안될 사회에 대한 혁신적인 은유를 고안해낸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의 과제는 푸코가 말한 형태의 사회를 극복할 대안을 내놓는 것이며,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로티 스스로가 정초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들이 그 사회에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많이 포진되어있는가에 달려있다.

  게다가 푸코의 저서에 대한 비판적으로 읽어보면 그가 여전히 ‘내면적 인간’과 그의 자유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사회화 이론은 ‘내면적 인간’이 일그러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것은 현재 사회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변화시킬 혁명 정국 내지는 총체적 변화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거치면 이 자유가 온전히 드러나는 사회가 도래한다. 하지만 그의 사회화 이론 내에서, 그리고 그의 철학 속에서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며,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인간들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총체적 혁명에 대한 이러한 동경을 거부하고, 공공 영역에서의 편견과 지배적 구조가 없는 의사소통을 통해서 역사적 변화(와 진보)가 가능하리라고 주장한다. 그가 의사소통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푸코가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의 출현과 그에 비례한 총체적 혁명에 대한 혁명가적 전문가들의 갈망이며, 다른 하나는 전문가집단의 관료화로 인한 ‘합리적’ 관료지배현상이다. 이러한 우려는 로티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는 하버마스의 경우 총체적 혁명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하버마스적인 의사소통은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데 비해서, 로티의 모델인 ‘시인’의 인간형은 이전의 역사적 전통에서 도약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고 단절적인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이 두 입장은 대립한다. 또한 의사소통은 서로가 이해에 수렴하는 모델이지만, 시인은 그 사회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방식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는 발산적 모델이다. 이 부분에서 하버마스와 로티는 다시 충돌한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티는 자신과 하버마스의 차이가 철학적인 차이일 뿐 정치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로티의 하버마스 비판은, 그가 보편주의를 포기하는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그들의 철학적 결론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하버마스의 이런 견해는 로티가 폐기하고자 하는 이성과 비이성의 영역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하버마스는 공공영역의 의사소통에서 사용되는 인간의 능력이 이성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공의 영역에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이 난입하여 지배적 견해를 형성할 경우, 그것은 공적 영역의 이성을 포기하는 일이 되며 공동체에 비합리주의를 유통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매우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로티는 그들의 은유 또한 존중받을만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공공영역이란 사실 사적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것, 즉 상존하는 것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굳이 그들이 비합리주의 또는 합리주의라는 단일한 토대를 바탕으로 단일한 견해에 집중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이런 논리에 따라 거부하는 것이, 자유주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로티가 결론짓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푸코와는 달리 ‘모든 곳에서의 자유’를 열망하는 모습도 아니면서, 하버마스와 같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이념을 거부하면서 공공영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보편성을 귀환시키는 시도 또한 아니다. 이 둘을 절충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서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연역적 체계가 아니면서도, 자신의 역사성과 자신의 독창성을 연결하는 분명한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로티 스스로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서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잔인성의 회피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당신을 유도할 정치적 태도에 빠져드는 것을 스스로 막기 위해서, 참됨과 순수성을 향한 니체-푸코적인 시도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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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 발표문> 

  후설의 현상학 –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사이에서

  후설은 초기에 수학에 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였지만, 점점 철학으로 연구 분야를 옮기면서 현상학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구축하였다. 현상학의 여러 요소들과 그 태도는 이후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철학에서 거장으로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이 후설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현대철학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특히 후설의 철학은 현상학이라는 흐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상학에 대한 구상은 당시 후설을 둘러싸고 있던 학문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계몽주의의 기획과 구상, 즉 자연과학의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이란 ‘모든 것의 자연과학적 해석’을 의미했고, 인간 또한 자연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심리학이 등장하였다.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을 방어하려는 조류 또한 만들어졌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맞먹는 방법과 체계를 기반으로 인간의 정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분과, 즉 ‘정신과학’을 만들고자 했고 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이론적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후설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물론 그가 각 개별학문들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탐구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후설이 비판하려 했던 것은, 개별학문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그 방법을 사용해 드러낸 특정한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라고 주장하려는 시도였다. 특정한 방법은 이미 그 안에 세계를 예비하고 있고, 따라서 특정한 세계 밖에는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방법에 의해 드러난 전체 세계의 특정한 모습일 뿐, 그것이 세계 자체이거나 혹은 그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각 개인에게 드러나는 그 모습이 전부라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현상학을 통해서 세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에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후설은 이 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장하며,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정신과학의 흐름 또한 비판한다. 정신과학을 세우려 했던 이들은 주로 인간의 정신이 활동해온 결과들의 축적이라는 점에서 역사, 문화 등을 강조하며, 또한 현세대의 인간의 정신도 이들에 비추어 고찰할 수 있다고(고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을 역사와 문화의 경계 안에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후설이 보기에 인간의 정신은 이 영역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보편성은 여기에서 갖추어진다.


  현상학의 목표와 대상 – 선험적 자아의 구조, 현상

  당시 주류이던 학문적 경향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은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토대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각각의 세계를 담고 있으며, 그 세계는 몇몇의 가장 기초적인 근거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한가? 그렇지 않다면, 개별학문들이 기초로 삼는 그 근거들은 또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가?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주는 의심과 매우 유사하다.

  정신과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보편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개별학문의 연구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이 말하는 보편적 세계란,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그에게 보편과 객관은 다른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세계는 어떤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는가? 후설은 전반성적인 영역이라고 답한다. 학문적 인식을 포함한 모든 인식은 반성의 산물이다. 반성을 통해 인간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 형식은 수학적일 수도 있고(저것은 부피가 1ℓ이다), 실용적일 수도 있으며(저것은 내가 물을 마실 수 있게 도와준다), 미학적일 수도 있다(저것은 예쁘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규정은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내 의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유의미한 것(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정신이 참여한다 -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그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목하는 것은 그 의미들로 이루어진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가 부여되기 전 가장 즉자적인 세계 – 즉 전반성적인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이 활동을 수행하는 자아가 경험 이전의 자아, 즉 선험적 자아이다.

  이 선험적 자아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결합한 장소를 후설은 현상이라고 부른다. 현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인식의 근원이며, 학문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의 대상은 바로 현상이어야 한다. 그는 철학을 바로 이 현상에 대한 학문, 즉 현상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체계를 표현하는 단어로서 선택하였다. 모든 개별학문들은 현상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서 끄집어낸다. 이것은 그 학문이 전제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태도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은 객관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보다는 특수한 정신적 태도와 절차의 산물이다. 현상학은 그 모든 가능성들을 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서 모든 특수한 정신적 절차들을 예비하고, 그 학문들이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학문이 된다.

  따라서, 현상학의 정신에 따르면 세계는 주체의 능동적인 구성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객관적 존재자들의 여러 특성을 지각함으로써만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 자아는 근본적으로 지향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상에게 다가가고, 대상은 선험적 자아에게 다가온다. 이 관계에서 주체의 특성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지향성으로 정의된다. 반면에 현상인 대상은 형상(eidos)에 근거해 반성을 통해서 판단하고 규정될 수 있다. 후설의 입장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선험적 자아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자아가 현상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대상 또는 세계를 어떤 태도로 고찰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형상적 학문이다.


  현상학의 방법 – 판단중지, 현상학적 환원, 기술

  현상학의 연구영역인 전반성적인 세계와 마주하기 위한 첫 단계는 판단중지이다. 후설에 따르면, 각 개별학문들은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의 다양한 정신활동의 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보편적 세계는 아니다. 이 세계에 매이는 한, 그 세계를 구성해낸 방법, 즉 정신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존재의 가정을 거부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정신이 그 자신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는 이 단계를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의 용어를 빌려와 판단중지(epoche)라고 표현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다. 판단중지는 판단과 규정에 의해 대상에 부여되었던 모든 의미들을 세계에서 걷어낸다. 이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 뭉뚱그려져 드러난다.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들의 보편성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그 전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었던 정신의 절차가 걷어진 존재자는 온전히 그 모습을 보전한다. 이 때 모든 인식은 이 하나의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전체를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며,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할 수 없는 내적 구성물이다.

  이 단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자유로운 변환이다. 객관적 대상이 구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이 드러난 이후, 의식은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 방식은 온전히 의식의 방향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대상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다른 대상으로서 무한히 열려있게 된다. 후설에 따르면, 이 자유로운 변환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상의 형상이다. 의식의 구성 방식에 따른 무한한 변환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 무엇이 인식과 판단의 기초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라는 것을 변환 속에서 깨닫는다.

  그러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성은 이 차원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이성은 판단하고 규정하는 인간의 능력이므로, 판단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전체인 세계,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세계를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매개 없이 대면한다. 직관에 의한 대면은 선험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능력이다. 직관은 인식의 기초를 이루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모든 판단에 작용하여 대상을 우리의 정신에 드러낸다. 직관의 능력은 정신을 형상과 마주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현상학적 연구의 표현방법은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전체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나는 그대로 적는 것을 뜻한다. 기술의 방법에 대비되는 것은 설명의 방법이다. 설명은 세계가 왜 그렇게 변화하는가에 대해서 표현한다. 따라서 한 사태와 다른 사태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이러한 표현은, 설명이 자연과학의 설명방법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판단과 규정,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해야만 하며 이성이 개입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기술의 방법은 어떻게 세계가 드러나는지에 대해서 표현한다.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는 중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인과관계나 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모순적인 표현도 허용된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으로 정신의 능동적인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법칙에 의한 설명이라는 정신적인 틀이 오히려 세계의 진정한 구조를 그려내는 데 제한을 가할 수도 있다.


  현상학의 객관성 - 상호주관성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든 구분이 사라진 세계에서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뿐인데,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체와 대상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후설의 철학에서 객관적 세계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로서만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다.


  현대 사회의 위기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을 통해 확보한 상호주관성은 인간 사이의 소통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후설은 현상학의 구상이 자신 이외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닫힌 철학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독특한 상호주관적 영역을 개척하였다. 또한 이것을 단순히 인식론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의 이론적 도구로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진단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유럽 사회는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건전한 공동체를 성립하기 위한 소통에 필수적인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적 방법에 따라 깊은 숙고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경지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모든 삶에 걸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의 자명한 진실을 가리키는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과학에 대한 신봉은 이와 같은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 그 방법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결국에는 사회가 파괴되는 위기를 정신적인 수준에서부터 발생시킨다.

  자연과학이 위기를 초래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세계를 도외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선험적 자아가 참여하는 세계, 즉 현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인 것으로 호도한다. 이 세계가 반성 이후의 모습처럼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숫자로 표시하여 접근하려는 태도를 후설은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주의적 태도에 의해 진실로 존재하는 세계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궁극적으로 자연주의적 태도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로서 자리를 잡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엄밀하게 자신을 비판하며 가장 자명한 토대에서 시작해야 하는 학문적 작업이, 단순한 정확함을 확보하는 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정신의 위기란, 이성의 기능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그 능력을 현재의 정신적 경향을 강조하는데만 끊임없이 사용하는 실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후설이 보기에 현상학은, 그가 정립한 하나의 철학적 사조 또는 정신의 방법론인 것과 동시에 사회의 해악을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단순히 특정한 정치세력에 반대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으로 도래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 위기는 가장 심층적인 측면, 즉 정신적 측면에서 유래하는 위기이며, 따라서 그 극복 또한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들은 철학의 표현이었다. “유럽인의 진정한 정신적 투쟁은 철학 내적인 투쟁의 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김태길 외, 『현대사회와 철학』, 문학과지성사, 1981
Richard Kearney,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곽영아, 임찬순, 임헌규 옮김), 한울, 1997
W. Marx, 『현상학』(이길우 옮김), 서광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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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4 16:16   좋아요 0 | URL
선택한 건 아니고 선생님의 강요로 첫 발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고요.

음... 현상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상에 대한 학문(...)이겠습니다. 후설의 저서는 『데카르트적 성찰』 하나밖에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가 독일관념론의 전통에서 여러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더라고요. 초월(선험)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고, 현상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칸트가 그런 말을 한 건 어느 맥락인지 저는 잘 몰라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말을 썼는데, 현상학이라는 말보다는 정신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일반의 정신이 전개되는 과정을 밝혀내겠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현상은 정신이 자기를 현현해서 나타나는, 일종의 부수적인 것?이겠고요.

반면에 후설에게 현상은 의식(정신?)이 지향하는 것이라, 의식과 현상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연구는 곧 의식에 대한 연구이고, 현상학은 의식과 현상이 상호의존하는 관계 또는 상호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됩니다. 그가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지향성인 것에서 이런 면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처음과 끝이 있는 이론체계는 아닌 것 같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방법론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상학의 연구를 발표하는 형식이 '기술'이라고 후설은 주장한다고 하는데, 사실 말이 좋아 기술이지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적으라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는 이야기죠.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 같은거요.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을 차용하고도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등등의 전혀 다른 학문적 경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용은... 음... 저게... 저렇게 읽고 그냥 머리에서 생각나는대로 정리한거라... 상호주관성 부분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읽고 쓴 것입니다.

2011-09-2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5 02:28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겠어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방법론이다! 라는 것입니다. 후설만의 독특한 체계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방법의 토대를 닦은 것이죠.

차이점이라면, 후설은 초점이 인식론적인 부분이고, 인식을 통해서 존재가 생성(자각?)된다고 보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인식 이전의 존재(자)들과 그 존재(자)들의 양식과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 표현방법에 있어서 기술적이라는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고요. 이 정도가 예전에 『데카르트적 성찰』과 『존재와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나 어휘가 책을 꼼꼼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터라(ㅠ.ㅠ) 저도 힘에 부칩니다......

바오 2015-03-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기 힘든,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전후 맥락을 잘 전달해주어서 어리숙한 머리에 그래도 잘 넣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효진 2015-03-28 18:41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양미술사 숙제> 

1. 들어가는 말

  낭만주의 시기는 회화의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이 때를 거치면서 회화는 형식과 내용, 즉 기법과 주제가 큰 폭으로 확장되었으며, 그 깊이를 더해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제의 확장은 매우 눈여겨볼만한 현상인데, 이것은 회화가 무엇을 그려야하는지에 대한 답변의 변화, 즉 회화의 대상에 관해 던지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따라 이 바뀐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이 등장하게 되고, 그것은 곧 회화의 본질을 변화, 확장시키는 작업에 다름아니다.

  특히, 미술사적으로는 이 시기에 풍경화가 특히 대두되는 시기였다. 이전에 풍경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머무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리켜주는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었다.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을 모티프 삼고 있는 작가의 주제의식 같은 것들이었다. 그마저도 매우 한정되어 있어, 성화나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옮겨놓는 고전주의적 경향은 그림 속의 세계를 그림 안에 한정시킴으로써 그림의 세계와 감상자의 세계를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그것이 설령 원근법과 명암법을 준수하여 아무리 세밀하게 그려졌다고 하더라도, 회화에 의해 묘사된 것들은 분명히 환상적인 무엇인가였다.

  반면 풍경화의 대두는 이러한 회화의 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인간의 인지 구조를 반영하여 그리는 기법 - 즉 원근법과 명암법은, 개발 당시에는 환상적인 소재들을 실제이게끔 보이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는 점점 변화하였고, 끝내는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을 실제로 보고있는 것처럼 그릴 수 있게끔 하는 국면 또한 열어주었다. 그래서 회화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 가운데, 묘사의 대상을 인물에서 다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 또한 행해졌다. 풍경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험들은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하였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낭만주의 시기 이전까지도 풍경화는 그것을 연구하는 소규모 집단만이 있거나 혹은 화가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화가들의 소일거리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낭만주의 시기에 와서야 이런 노력들이 표출되어 풍경화가 회화의 하위 장르로서 인정받게 되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풍경화는 주목할 만하다.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고 그런 경향을 띄는 작품에 높은 점수를 매기던 프랑스의 아카데미 비평계와는 달리, 영국의 아카데미 비평계는 풍경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미학적 개념과 논의를 생산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에 힘입어, 또 그렇게 생산된 풍경화들이 다시 그 논의들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영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빠르게 풍경화를 비평적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인 터너와 컨스터블은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최고의 풍경화가로서 회화의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렇듯 풍경화를 빠르게 수용한 것은, 풍경화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거나 그것을 폄하했던 예술선진국 - 예를 들어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매우 특기할만한 것이다. 풍경화가 회화의 주제가 아니었던 것에서 회화의 주제로서 편입되는 낭만주의적 경향이 회화의 대상의 확장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때, 영국의 풍경화를 둘러싼 환경을 알아보는 것은 회화의 본질에 대해서 사고하는 과정의 한 가지 양태를 고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회화라는 개념 자체가 일견 무의미해진 현대의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사회적 배경

  예술사적으로 낭만주의가 발흥한 시기인 18세기 후반은 두 가지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첫째는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충격은 다른 무엇보다도 삶의 방식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간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였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은 점점 수공업에서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로, 그리고 다시 대공장제로 바뀌어갔다. 런던 근교, 그리고 주요 항구도시에는 하루가 다르게 대형공장들이 들어섰고, 사람들 또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공장은 증기기관으로 가동되기 때문에 매일 많은 양의 석탄이 태워졌고, 밀집한 인구들이 배출해내는 폐기물 또한 자연이 스스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도시적인 환경오염은 자연스럽게 초래되었다.

  반면 대도시 이외의 지역은 아직 산업혁명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목가적인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중세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양식을 영위하고 있었다. 농사를 짓고, 수확한 것을 먹으며, 자신들의 배경과 자연스럽게 섞여서 살아가는 어떤 전형적인 모습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이미지들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도시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덧씌운 것이긴 했지만, 도시의 사람들에게 불어닥친 급격한 변화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데 충분한 조건이었다.

  둘째는 시민혁명이다. 프랑스처럼 순식간에 체제가 뒤바뀌는 급진적 혁명은 아니었지만, 영국 또한 긴 기간에 거쳐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시민혁명을 달성해냈다. 산업혁명을 이끄는 계층들도 사실상 이 시민혁명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부르주아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예술소비계층으로 떠올랐으며, 예술가들은 이들의 취향을 잘 배려한 작품을 생산해내야 했다. 따라서 예술작품에는 이들이 생산해내는 담론이 충실하게 담겨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현상보다 예술사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의미는 모든 인간들이 인식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 철학적 보편자는 곧 정치, 사회적인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통치의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그가 옳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학적인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민혁명은 더 이상 이와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모든 이들의 인식의 위계를 정치적으로 평등하게 바꾸어놓았다. 따라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본다거나, 그것을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뚜렷하게 재현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방법은 보편의 재현에서 개별의 재현으로 점점 옮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이 두 측면에서 모든 유럽국가보다 앞서있었다. 산업혁명과 그에 따르는 경제, 사회적 변화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또한 시민혁명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에, 산업혁명과 함께 두터운 부르주아지 계층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들은 풍경화의 탄생 자체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풍경화의 소재와 기법, 그리고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화가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작가의 작품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3. 풍경화를 위한 이론적 도구들

  3.1. 18세기 영국 경험론과 그 미학적 경향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평등한 인식주체들은 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여기에 대한 가장 영국적인 답변은 홉스-로크-흄으로 이어지는 경험주의 인식론이다. 인간은 언제나 경험을 통해서만 타자를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경험 이외에 외부에 다가갈 수 있는 매개 또는 능력이 없다.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통해 감각기관에는 어떤 것이 맺히는데, 이것이 인상(impression)이며 경험의 시작이다. 이 인상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상태를 관념(idea)라고 한다. 하지만 기억은 언제나 희미해지기 때문에 한 번 얻은 관념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념을 다시 떠올려보는 행위는 반성(refletion)이다. 인상과 관념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결합시켜서 인간은 사고를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인식론에서 핵심은 바로 관념이다. 이 관념은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절대자 혹은 보편자, 보통 명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관념은 개인에게 고유하다. 그 이유는, 어떤 관념은 그 관념을 만들어낸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서 만날 수 있는 외부의 대상과 아무런 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빨강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외부의 대상 안에 빨강이라는 관념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구조가 그 인과관계가 빨강이라는 관념을 생성하게끔 이뤄져있기 때문에 나는 빨강이라는 관념을 갖게 된다. 따라서 외부의 단일한 대상을 같은 장소와 시점에서 보더라도, 인식주체가 다를 경우 그것은 다른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경험주의자들에게 미학, 즉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에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관념들이다. 회화 역시 인간의 외부에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경험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고 그것을 관념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실제에 가장 가까운 그림이란, 다름 아닌 직접 경험의 순간에 가장 가까운 그림, 최대한 인상에 가까운 관념을 그려낸 그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무엇을 그리는 행위일 수 있을까. 경험주의자들은 단연 ‘관념들을 그려내는 행위’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은 끝내 내가 경험한 것에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오히려 경험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직접성이 떨어지므로, 점점 허구에 가까워진다. 이전의 회화들이 추구했던 이상성이란, 경험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허구 내지는 관념들의 연합에 따른 상상적 사고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미학적인 경험주의자들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개념은 취미(taste, 취향)다. 취미는 미학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가치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이 ‘좋다/싫다’를 판별할 수 있는 근거이다. 물론 이 취미도 경험에 따라 형성된다. 특정한 경험에 반복적으로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 관념은 좋은 것이 되고, 그 반대라면 그 관념은 나쁜 것이 된다. 취미에 대한 위와 같은 개념화에서, 자연스럽게 취미는 상대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낭만주의 이전에 고전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의 이상성은, 취미 판단의 상대성으로 말미암아 낭만주의적 경향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인식주체들에게 이상적인 무엇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즐거움과 기분나쁨으로 환원될 수 있거나, 또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무엇일 수밖에 없다.


  3.2. 자연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무관심성과 숭고

  그러나 경험주의 인식론에 기반한 미학적 입장만으로는 풍경화가 미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말 그대로, 경험주의 인식론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이 경험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해 인식되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인간도 인식되고, 풍경이 아닌 사소한 사물들도 경험을 통해 인식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풍경화이다. 풍경화의 미학적 기반을 찾기 위해서는 경험주의 인식론 이외의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18세기 영국에서 자연에 대해서, 또는 미학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특별한 느낌에 대해서 제시되었던 대표적인 두 가지 개념이 바로 무관심성과 숭고이다. 미학적인 감흥은 인식을 통해 인간에게 느껴지는 여러 즐거움 가운데서도 매우 특별한 종류의 것인데, 무관심성과 숭고는 이같은 즐거움을 다른 감각적 즐거움과 구별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된 개념들이다. 특히 이 두 개념은 풍경에 대한 미학적 해석, 즉 자연에 대한 입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관심성이란, 대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관심사, 즉 자신의 이익과 결부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관조하는 상황을 뜻한다. 근대적 인간, 특히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자연 혹은 대상은 주체의 행복을 위해 주체의 세계에 편입되고 이용될 수 있는 대상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홉스가 근본적 심리적 이기주의의 형태로 제시한 이래, 경험주의의 전통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기능해왔다.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었을 때 대상은 미학적 대상이 아닌 다른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줄 수 있는 대상 또는 그 매개체로서 보이게 된다. 아무리 좋은 회화 작품이라도, 그것을 감상하려 하지 않고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작품은 미학적 감흥이 아닌 다른 감각적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무관심성은 미학적인 감흥과 여타의 감각적 쾌락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풍경화에 등장하는 나무는 의자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림 속의 증기선은 인간이 타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풍경화를 그리는 작가는 자연을 무관심적으로 포착해내어 그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따라서 그 풍경 안에 등장하는 사물들 또한 무엇인가의 수단이나 매개로서 표현되지 않으며, 그저 그 자체로 그림 속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며 존재한다.

  이와 같이 표현된 그림을 감상자는 작가의 의도와 기법에 따라 무관심적으로 읽어내고, 그 가운데서 미학적 감흥을 즐기게 된다. 이 감흥은 단순히 예쁜 색깔이 쓰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색깔들이 전형적인 어떤 배열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 그림을 통해 생성되는 관념들은 그 그림의 여러 배치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순수하게 인지적인 유희의 상태이기 때문에 감상자에게 무관심한 만족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18세기 전반에는 무관심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면, 에드먼드 버크가 ‘숭고’를 또 다른 표준으로 제시한 뒤에는 논의의 중심이 자연의 숭고함으로 옮겨갔다.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져있는 무관심성 개념과는 다르게, 숭고는 그림 앞에 압도당하며 감상자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는 감흥을 일컫는다. 즉, 자신의 존재와 그림 사이에 밀접한 연관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같은 숭고함은 사실 그림이 아닌 자연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것인데, 화가는 이러한 자연의 숭고함을 캔버스에 옮겨놓고 감상자들이 이것을 느낄 수 있게 해야한다. 그것이 더 잘 느껴질수록 좋은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숭고의 핵심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데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수많은 자연재해들은 그 자체로 아주 역동적인 숭고함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힘이며, 그 앞에 인간은 자신이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또한 이것은 그림으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직접 그림 속에 들어가야만 체험할 수 있는 효과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자연재해라도 그것이 그림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면 감상자는 안심하고 그것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곽을 흐릿하게 처리하거나 비정형적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감상자에게 그 역동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효과를 낳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된다.

  다른 종류의 숭고함도 있는데, 그것은 아주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모든 대상을 인식하지만, 숭고한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인식에 모두 담기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담으려는 시도을 좌절당한다. 인식의 실패에서 느껴지는 이같은 숭고 또한 캔버스에 표현되어야 하며, 그런 감흥을 감상자에게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감상자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서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두 개념이지만, 그 시선이 자연, 인간의 외부 그대로의 모습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개념에 대한 논의는 인물과 시공간을 설명하는 장치에 불과했던 배경을 회화의 전면으로 이끌어냈다. 풍경, 자연은 그 자체로 충분히 미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충분히 느끼게끔 잘 조직된 그림, 즉 풍경화가 미학적인 감흥을 극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그림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3.3. 픽처레스크picturesque 유행

  경험주의 인식론, 무관심성, 그리고 숭고 개념은 풍경화의 미학적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론이다. 이같은 개념들은 이후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의 미학 이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무관심성과 숭고 개념은 칸트에게 계승되어, 칸트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이런 일반론 이외에도, 18세기 영국 특유의 풍경화에 영향을 미친 개념은 또 있다. 이를 픽처레스크라고 하는데,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이 말은 일종의 반-프랑스적인 조경 양식을 가리켰다. 당시 프랑스 궁전의 조경은 인위적이고 그것을 잘 관리할수록 좋은 조경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있었다. 풀이나 꽃을 자르고 깎아 일부러 기하학적인 구성과 패턴으로 모양을 냈다. 여러 대칭과 비례들이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그런 조경으로서 그 조경을 관리하는 자의 위대함, 그리고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의 능력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양식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도 처음 조경을 알아갈 때에는 이러한 프랑스적 양식을 따라했지만, 점점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게 되었다. 그 가운데 식물들을 꺾고 관리하기보다는 그 모습 그대로 놓아두어 기하학적이지 않은 모양을 하도록 일부러 내버려두는 방법도 있었는데, 그 방법을 일컬어 픽처레스크라고 했다. 이와 같은 풍경에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그런 자연스러운 풍경들이 17세기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양들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어원에서부터 이미 풍경화를 지칭하고 있었다. 그 말이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자연스럽고 불규칙하며 곡선적인 모든 예술작품, 특히 회화작품의 특성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물론 이런 뜻 또한 반-프랑스적인 조경양식의 형태에 포함되어있는 의미이기도 했다. 픽처레스크는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졌으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의 예술계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말이 되었다.

  픽처레스크의 여러 의미 가운데서도, 풍경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역시 자연에 대한 주목이다. 자연을 그려내더라도 그것을 꾸며낸다거나 수식하는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는 것이 이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그림이었다. 영국의 비평계에서 이것은 하나의 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표준이었고, 사람들은 이 의미에 따라서 그림의 완성도와 의미를 읽어냈다.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짜여진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를 드러냄으로써 감상자 스스로가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픽처레스크적인 성향은 도시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비도시의 풍경, 흔히 도시인들이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그 풍경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도시의 구조물들은 이 세계에서 가장 인위적으로 기획되었고, 그것은 곡선적이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않았다. 반면에 자연은, 마치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처럼, 매우 아름답고 유려한 존재들의 결합체였다.

  따라서 이 유행은 단순히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도 아니었고, 숭고가 가져다주는 위협감에 시달리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경향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둘 모두와는 다른, 어떤 제 3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서 픽처레스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들은 픽처레스크한 풍경을 찾아서 여행을 다녔고, 그 풍경에 대한 감식안을 높이기 위해 귀족와 부르주아의 자제들도 여행을 자주 다녔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유행뿐만이 아닌, 일종의 사람들의 생활의 방식이기도 했다.


4. 숭고와 픽처레스크의 실제

  4.1. 터너와 숭고

J.M.W. Turner, "Snow Storm".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터너의 후기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함.

  터너의 풍경화는 후기로 갈수록 역동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 가장 특징적이다. 기법의 측면에 있어서, 후기 대표작들을 살펴보면 사물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고, 전체적인 구도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듯 한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그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르네상스 시기부터 발전되어 온 원근법을 강의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은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회화의 기법으로부터 탈피했다.

  또한 주제의 측면에 있어서, 그는 조난당한 배, 알프스를 넘는 병사들에 대한 묘사 등 인간이 직접적으로 자연의 위엄에 노출되어있는 상황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는 실제로 많은 곳을 여행했고, 그 여행의 중간 과정들을 수많은 스케치로 남겨두었다. 그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스케치들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여러 작품들은 실제로 그가 다녀갔던 곳, 그가 보았던 곳들을 그림의 전체적인 주제로 삼거나 시선에 가장 잘 들어오도록 배치하고 있다. 이런 특정한 상황들은 숭고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점에서, 터너는 숭고 미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그 기준에 충실했던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터너의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숭고의 감정을 캔버스에 보이는대로 그려냄으로써 마치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감상자가 직접 그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점이다. 모든 사물들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은, 시각적인 인과의 결과는 그러할지 몰라도 관념의 속성은 아니다. 관념들은 언제나 모종의 혼란에 의해 뒤섞일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으며, 그 형태가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을 때도 있다. 오히려 단지 스쳐갔을 뿐인 풍경들을 명확히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감행하는 일종의 환상이다. 환상이 아니게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풍경화의 임무라면 터너의 풍경화는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가 숭고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는 대상들은 단순히 자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는 전원적 풍경 못지않게 도시의 풍경 또한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의 도시생활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그가 눈에 보이는 존재들을 뿌옇게 처리하여 그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든 것은 도시오염의 정확한 결과물이다. 스모그는 항구를 가려버리고 자신의 눈 앞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기법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감상자의 미학적 감흥을 자극하려는 고도의 계산이다.


  4.2. 컨스터블 - 무관심성과 픽처레스크의 경험

John Constable, "The Hay Wain". 터너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컨스터블의 대표작.

  도회지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터너와는 다르게, 컨스터블은 비도시의 풍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비도시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른이 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자신의 고향을 방문하였다고 알려져있다. 그는 이러한 풍경들을 그의 그림의 주된 소재로 삼았다. 실제 그림이 될 만한 곳을 찾아 여행을 다니면서 풍경을 수집하는, 어떤 면에서 전형적인 픽처레스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란 여러 자연물들이 그대로 녹아들어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거나 혹은 그 대상에 자신을 이입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전원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감상자에게도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미적인 감흥을 일깨워주는 것이 그 그림이 의도한 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터너의 그림에 비해서는 역동성이나 위기감은 덜하며, 대신에 정적인 분위기가 많이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대표작들에 담긴 전원의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며, 이전에는 그림의 주체로 등장했던 인물들마저 그림 - 그 인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전원 안으로 녹아들어가 있다. 이전의 전통적인 화법에 대한 일종의 역전인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전원은 비-도시의 전형들이다. 도시와 비도시의 구분이 확연히 생겨나기 시작했을 무렵, 도시의 부르주아들에게 자연은 반-도시적인 개념이 중첩되어있는 특별한 장소였다. 그곳은 쉬는 곳이고, 나를 편안히 안겨주는 곳이고, 분과 초 단위로 시간을 관리하며 하루하루 급변하는 도시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다. 픽처레스크란, 도시 부르주아들의 반도시적 욕망의 표상이다. 컨스터블의 회화는 정확히 그 지점을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반영한다는 의미가 있다.


5. 나오는 말

  낭만주의 시기 이전까지 풍경은 회화에서 독립된 주제가 될 수 없었다. 풍경은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구일 때도 있으며, 회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몇몇 인물들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을 가르쳐주는 역할만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또는 그들이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의 역할만 하기도 했었다. 풍경은 풍경이 아니라 배경이었고, 회화 속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어야만 했다. 풍경화는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무르며 회화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기에 들어오면서 배경은 풍경으로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이의 심정을 대변하는 개체로서, 혹은 풍경 그 자체를 드러내어 특별한 미적 감흥을 일궈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로서 도입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서유럽 전체에서 진행된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풍경화는 특기할만하다. 주목받는 계기와 그 시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고, 미학적으로 정당화되는 과정도 매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정치, 경제적 혁명이라는 사회상과 더불어 세 가지 미학적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경험주의 인식론을 미학적으로 변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보이는 것을 인식주체의 내부에 새겨진 그대로 그리는 것이 미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전주의적인 이상적 형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예술적 대상은 더 이상 캔버스에 담길 수 없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자연에서부터 느껴지는 다른 감각적 쾌락과 미학적인 감흥을 구별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무관심성과 숭고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다. 자신의 이익에서부터 나오는 어떤 관심사를 적용시키지 않고서 바라보았을 때 순수한 미적인 쾌감이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 무관심성 개념의 핵심이며, 반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 그리고 한 눈에 담을 수 없는 장엄함으로부터 느껴지는 인식적 혼란과 충격이라는 자연과의 깊은 관계맺음이 숭고의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당대에 영국의 예술적 취향이었던 픽처레스크는 영국 특유의 풍경화 화풍을 만들어내는 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이같은 개념들은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 작가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터너의 경우 숭고와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하고 구도를 일부러 어그러뜨리거나 열어놓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리고 자연 앞에 무력해진 인간들을 소재로 택하여 그림을 통해 숭고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전략을 차용하고 있다. 반대로 컨스터블은 픽처레스크의 전통을 자신의 화풍으로 승화시켜 반-도시적 이미지의 전원 풍경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서 재현한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상, 그리고 컨스터블 스스로가 의도한 자연에 대한 경외와 맞물려 풍경화를 미학적 가치가 있는 회화로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풍경화는 낭만주의 시대의 의미 있는 발견이다.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적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통해 아름다움 이외의 다양한 미학적 감흥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영국의 풍경화는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아카데미 비평의 여러 개념들과 맞물려 스스로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인 터너와 컨스터블은 자신의 시대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여 회화의 주제와 기법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참고문헌 

마순자, 『자연, 풍경, 그리고 인간 - 서양 풍경화 전통에 관한 연구』, 아카넷, 2003
미학대계간행회, 『미학의 역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미하엘 보케뮐, 『윌리엄 터너』(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6
윌리엄 본, 『낭만주의 미술』(마순자 옮김), 시공사, 2003

김한결, 「관념으로서의 미 - 허치슨 취미론의 로크적 토대에 관한 고찰」, 『미학』 37집, 한국미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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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진 2011-07-17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험주의 철학과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지녔던 '자연의 낭만성' 사이의 연결고리가 부족하다는 선생님의 평... 이 있었으나 수정, 보충 없이 그냥 제출... ㅠ.ㅠ
 

<프랑스 문화와 예술 숙제> 

  『어린 왕자』는 자신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어린 왕자는 자신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그래서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은 자신의 세계 밖으로 언제나 내쫓아버리는 존재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순수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순수함으로 덧씌워진 가장 근원적인 이기심이다. 이야기의 중심인 어린왕자가 거쳐온 여러 별의 독특한 존재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 듯이 보게 되고, 그것이 결정적으로는 지구에 다다라서 완성된다.

  등장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읽어보면, 어린 왕자를 포함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전달할 뿐이다. 글쓴이의 질문에 어린 왕자는 전혀 대답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증거이다. 또한 지구 이전의 다른 행성을 여행하며 여러 존재들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도, 사실은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뿐 대화라고 보기엔 힘든 수준이다. 강조되는 것은 오로지 어린왕자의 느낌, 그리고 그 느낌에 의해 비친 그들의 모습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철저하게 소통이 부재된 세계의 모습이다. 대화를 배우기 전까지의 아이들은, 설령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자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안되는 페이지에 압축해놓았기에 그 여행이 길어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어린왕자는 정말로 먼 거리를 돌아서 온 것이다.

  따라서 어린 왕자가 ‘어른들’이라고 표현하는 많은 존재들은, 사실 어린 왕자와 구별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 왕자 자신의 거울들이다. 자기 생각, 자기 말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어린 왕자와 동급이다. 그래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 수단들은 왜곡되며, 어린 왕자와 꽃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랑조차도 그 마음을 그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은 몸은 자랐지만 마음은 아직 어린 왕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그래서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별에서는 자기 이외의 그 누구도 살 수 없다. 이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말은, 소통을 배우지 못한 왜곡된 성장들, 실제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 정신적 아이들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자면, 어린 왕자가 그토록 싫어하는 숫자에 대한 집착 또한 이해할 만한 것이다. 숫자란, 다름 아닌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표준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은 두번째 별에서 보듯이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충족적이지 않으며, 상대적 격차에 따라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에 화폐-숫자와 같은 공통된 표준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자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의 방점은 소통에 찍혀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서로 같은 것들 속에서 다른 것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마음에 새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타자를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야만 한다. 그것이 숫자로는 환원되지 않는 그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물론 이것은 영원 - 즉 보편을 찬양하는 지리학자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정체성은 개별적이며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오롯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만, 우리는 타자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자를 이해하고 그것을 나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더 이상 예전의 아이와 같은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온전히 자신을 보전하는 것에서, 자신을 세계로 - 타자로 확장시키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진짜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장 뒤의 어린 왕자는 더 이상 어린 왕자가 아닌 ‘그’라고 지칭된다. 어른이 되는 것이란, 어린 왕자가 어른들의 세계라면서 배척했던,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아이들의 세계를 가만히 고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글쓴이의 표현처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술주정뱅이이고 왕이며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고 지리학자로 살아가는 지구라고 할지라도, 결국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지구에서 어른이 되는 이유는 혼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막에서조차도 왕자는 글쓴이를 만나지 않았던가! 어린 왕자가 배운 것이란 바로 그 공존, 그리고 그들과 말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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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진 2011-07-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아이/숫자-어른의 구도로 뻔하게 읽는 법을 택하지 않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감행.

육호수 2011-08-26 0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명/

박효진 2011-08-28 02:3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