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이랬다. 신간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 곁에 둔 책과 고전을 열심히 읽는 일. 읽었다고 믿었던 고전, 유명한 구절만 떠오르는 고전이 아니라 내가 읽고 내 것으로 만들고 새기는 일 말이다. 계획은 계획일 뿐. 야금야금 책을 샀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내 곁엔 이런 책들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책은 이벤트 당첨으로 받았다. <데미안>,<첫사랑>, <위대한 개츠비>,<삼십세>를 우선 구매했다. 사실 이 책 말고도 쌓아둔 고전은 많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서야 고전을 읽으려 하는 거다. 학창 시절, 청춘의 시절엔 책과는 조금 먼 아이였으므로. 한 달에 한 권씩, 고전을 읽으려고 한다. 현재의 계획이 그렇다는 말이다. 김미월의 책을 좀 더 읽고 싶어서 <서울 동굴 가이드>,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이 있기 때문에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 <여신들의 산책>, <웹진 문지문학상>, 대학문학상 수상작은 어떤가 궁금해서 <코끼리는 안녕,> 소설가 정한아가 아닌 시인 정한아를 알고 싶어서 <어른스러운 입맞춤>까지 가장 최근에 내 곁에 온 책들이다.

 

 

 책읽는 소녀 핑크는 기존의 것과 사이즈가 다르다. 작은 사이즈로 앙증맞다. 2개가 세트라서(아니, 예뻐서) 샀다. 그러니까 이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당신을 읽고, 당신을 만지고 당신을 곁에 두고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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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6-2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소녀가 핑크도 있었군요? 전 까망이라 한참 들여다보면서 책 읽는 소녀의 그림자 같단 생각을 하면서 공상(?)속에 빠지곤 하는데요~
님의 소녀는 정말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으네요.^^ 아주 열독중인데요?ㅎㅎ

저도 학창시절에 청춘시절에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어린시절엔 곧잘 책을 좀 읽었더랬는데요.막상 책을 왕성하게 읽어야될 그시절엔 서서히 책이랑 멀어졌던 것같아요.
아마도 주변의 유혹에 흠뻑 빠져 있었나봅니다.ㅋ
그래서 고전 소설책을 더 나이 먹기전에 읽어야겠단 다급함도 좀 가지고 있어요.
또한 그시절 간간히 읽었었던 소설들 지금은 제목만 기억나고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런 소설들도 지금 읽게 되면 어떤 감동이 전해올지? 그떨림도 다시 느끼고 싶어 또 고전 소설을 읽고 싶기도 하구요.^^
그래서 가끔은요~ 그시절 책을 많이 안읽었던 그 방황기에 때론 감사(?)해요.
책을 간절히 원하는 이순간을 만들어줬으니까요.(정말 터무니없는 자기위안~ㅋㅋ)

신간이 아닌 구간의 책들,제가 좋아하는 장면들입니다.
전 구간이 좋아요.^^

자목련 2012-06-24 20:15   좋아요 0 | URL
기존이 제품은 저도 같은 색으로 가지고 있어요.
이건 핑크라서, 작은 사이즈라서, 두개가 착한 가격이라서 구매했어요.
덕분에 책장에 핑크빛이 감돌아요. ㅎㅎ

그 시절의 감동을 잊지 못해서, 다시 고전을 읽거나, 새로운 느낌을 기대하면서 고전을 읽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저처럼 읽지 못한 책들이라 읽는 이도 있겠구요.
저도 구간 좋아요. 그래서 신간도 사고 구간도 사들여서 걱정스럽지만요.^^

이진 2012-06-2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밀란 쿤데라 이벤트!
은희경이 그를 읽고는 글을 쓰는 방향을 잡았다는 인터뷰를 보곤 한 번 읽어봐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부럽습니다.
ㅎㅎ 자목련님께서도 저 못지 않게 책을 사셨군요. 웹진문학상은 제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어요. 평은 좋던데.

자목련 2012-06-24 20:12   좋아요 0 | URL
아, 은희경이 그런 인터뷰를 했군요. 밀란 쿤데라를 마주할 때 은희경이 떠오르겠네요.
책은 사도 자꾸 또 사고 싶은. 아직 웹진을 펼치지는 못했어요. 문지 홈페이지에서 읽을 소설도 있어요.
문득 은희경의 소설은 소이진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요.^^
 

 

 여름이 되었고, 가뭄의 날들이다. 적당한 비는 내리지 않고 곧 장마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 저녁이다. 내일, 모레 비 소식이 있지만 얼만큼의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다. 저마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부디 그 마음에 맞게 비가 내려주면 좋겠다. 

 

 이은규, 허연, 김경후의 시집을 읽었고 몇 편의 시를 옮기기도 했다. 미처 전하지 못한 시들을 옮긴다. 봄보다는 바다색 여름과 어울릴 것 같은 시는 이은규의 이런 시다.

 

 <허밍, 허밍>

 

 종종 구름을 눈에 담는 습관, 당신의 폐활량이 천천히 부

풀 때 그날의 공기를 부러워한 적 있다 구름을 가리키며 바

람의 춤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허밍은 입술에 기대는 음악일

까, 기대지 않은 음악일까

 

 바람의 춤이 보인다면 그건 구름의 몸을 빌렸거나 폐활량

이 푸른 여름잎의 소관일 것, 구름은 바람으로 흐르고 바람

은 여름잎으로 들리니까

 

 언젠가 고원의 사라진 호수에 대해 이야기 나눴지 수면을

맴돌던 그때의 구름은 지금 어디 있을까 가장 낮은 하늘을

흐르고 있을 호수 저편, 깃털무늬구름이거나 물결무늬구름

 

 당신은 잠시 구름사전 속 이름들을 덮는다 구름과 노닐기

에 알맞은 바람이므로, 구름의 후렴은 음악이다 마지막 소

절이 첫 소절로 흐르는 허밍, 허밍

 

 사라진 호수 저편

 팔랑, 수면을 깨뜨리는 나비 한 점도 좋을 오후  - <다정한 호칭, p. 94>

 

 봄에서 여름으로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생이란 막을 수 없는 시간 같은 것일까. 어찌하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다고 피하고 싶지만 결국엔 나만이 감당해야 하는 게 삶이고 생이다. 그리하여 허연은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고, 생무덤이다라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생에서 포기는 어떤 좌표도 읽지 않겠다는 결의다.

생은 선택된 적이 없다. 복제된 F1 완두콩들이 생에

들어온다. 엉겹결에 생에 들어서고, 생의 한가운데

놓인다. 생은 시달리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만 생판 그게 어디 쉬운 일인

가. 늘 피를 보면서도 결국 생에서는 X축과 Y축이 와

글거린다. 이래저래 도망치는 놈은 도망치느라 생으

로 숨어들고, 살아보겠다는 놈들도 생으로 걸어 들어

간다. 무기력하게 좌표 평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가지 매력이 있다면 생에서는 사라져가는 걸 동정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다행스럽게 없다. 지금 이 생이 무덤이다. 생은 우리

들의 무덤이다. 생무덤이다. <내가 원하는 천사, P. 76>

 

 그러니 삶은 때때로 비루하고, 때때로 울울하다.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날들이 있을 것이고, 그 울음을 쌓아두고 막아두려는 의지와의 싸움이 반복되는 일은 습관처럼 되버리고 말았다. 김경후의 이런 시는 누군가를 울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울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코르크>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 튼 뱀만큼 커다랗다

 찌그러져 일렁대는

 목 그늘을 보지 못하는 그만이

 울지 않았다고 웃음을 띠고 있다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똬리를 틀고 겨울잠 자는 뱀만큼 커다랗다

 이대로 커진다면

 곧 성대 위로 이오니아식 기둥을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신에게 ‘안녕?

 인사도 참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소와 웃음의 종류가 그의 인생의 메뉴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오래 참는 것이

 크게 울어버린 것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건

 갈라진 뱀의 혀를 깁는 것보다 위험한 일

 무엇을 그는 버려야

 그를 견디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랗다

 꼬챙이에 찔려 죽은 줄도 모르고

 겨울잠 자는 뱀의 꿈처럼 커다랗다

 그뿐이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고 외치는

 울음을 참는 자의 성대는 커다랄 뿐이다 <열두 겹의 자정, 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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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이 되었다. 이제 초여름이 아닌 여름인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더위는 짙어지고 깊어진다. 냉명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시원한 냉커피를 찾을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6월은 내게 수국의 계절이다. 작년에 작약을 보았던 곳에 6월에는 수국이 핀다. 어제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더니, 아직 수국이 피지 않았다고 한다. 10일 후로 알람을 설정했다. 그러니까 10일 후에 나는 다시 그곳에 전화를 걸 것이고, 수국이 피었냐고 물어볼 것이다. 당분간 내 머리속에는 온통 수국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수국을 만나기 전에,  읽으려고 계획한 책은 이렇다.

 

 

 

접힌 부분 펼치기 ▼

 

 

 

(5월에 사들인 책은 사진 밖에도 있다)

펼친 부분 접기 ▲

 

 

 

 읽으려는 다짐을 위한 기록이기도 하다. 올해 내가 세운 계획은 읽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 다른 무엇을 잊지 않고 있다. 6월이 지나면, 올해는 절반이 남은 것이고, 계획을 실천할 시간도 그만큼 남은 것이다. 책은 그저 주문하다. 따져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른 물건을 살 때는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꼭 필요한지 생각하는데 책은 예외다.

 

 

 

 

 

 

 

 

 

 

 

 

 

 

 책을 주문할 때의 그 마음으로 열심히 읽기를 바랄 뿐이다. 주문할 때는 몰랐는데 여전히 문학뿐이다. 소설, 시, 에세이. 헤밍웨이의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눈』과 권여선의 『레가토』는 마주하니 시원한 표지가 더 좋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식혈줄 것만 같다. 지금 읽고 있는 건 김경후의 시집 『열두 겹의 자정』이다. 수국을 만나기 전에, 모두 읽을 수 있을까. 다른 통로로 도착하는 책도 있고, 읽다만 책도 있고, 밀린 리뷰를 써야 할 책도 있으니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여름이니 나는 예전보다 더 나른함을 즐길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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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기, 수국이 있었다
    from 識案 2012-07-10 10:22 
    수국을 보고 왔다. 가뭄으로 인해 수국은 한 달 가량 늦게 피었다. 그 사이 나는 문의 전화를 세 번이나 해야 했다. 전화할 때마다 수국이 피었나요? 라고 물었다. 레스토랑과 펜션을 겸한 그곳에 오로지 나는 수국을 보러 간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마음은 온통 수국을 향해 있었다. 수국은 토양의 성질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고 한다. 흰 수국, 보라 수국, 자주 수국, 파란 수국까지 다양하다. 어린 시절 마당에는 흰 수국만 떠올렸는데 막상 마주한 수국은
 
 
이진 2012-06-02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헤, 책이 많아요.
김경후는 시인 이름도 인상적이고 시집 제목도 멋진걸요?
요새는 시집에 관심이 많네요 +_+

자목련 2012-06-03 12:21   좋아요 0 | URL
낯선 제목과 이름 때문에 더 끌리는 것 같기도 해요.
시집을 많이 읽으면 좋은데, 그게 쉽지 않아요.
소이진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이진 2012-06-03 23:05   좋아요 0 | URL
책, 안 읽고 있네요.
책 정리한다고 책장에서 책 다 끄집어 내서 펼쳐놓고,
학교 수행이 넘쳐나다보니까 책 읽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어요.
흑흑... 뭐 읽지요?
 

 

 꼬박 1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책이 있다. 그건 수상작품집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 수상작을 낸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이 나왔다. 파랑색 표지가 청량하다. 올해의 수상작은 김태용의 「머리 없이 허리없이」다. 달마다 선정된 소설을 만나는 일은 흥미롭다. 몇 몇 소설은 인터넷을 통해 읽었다. 김미월, 김이설, 손보미, 황정은, 이 네 명의 작가는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에도 선정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지만 그네들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집을 기다린 것이다.

 

 그 외에도 김사과, 윤고은, 안보윤, 조현은 다른 소설을 통해 만났다. 박솔뫼, 윤해서의 소설만 나는 처음 만나게 될 것이다. 두  소설의 경우엔 인터넷을 통해 읽기는 했지만 온전하게 열중하지 못했다. 작년에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정용준와 김선재를 만나 그 둘의 첫 소설집을 읽었다. 아마도 곧 손보미의 첫 소설집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5월에 계획에 없던 많은 책을 들였다. 이유는 늘 같은 소리지만 이렇다. 울적한 기분을 달래야 했으므로, 눈 먼 적립금이 남아서, 좋아하는 작가니까, 알사탕을 많이 주니까, 다양하다. 책을 주문하고, 택배를 받고, 쌓고, 읽다 멈추고, 다른 책을 둘러보고, 신간알림 문자를 보고, 다시 또 주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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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3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들어, 나도 등단하고 단편을 내고 여러 문학상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 때문인지 그 싫어하던 단편도 많이 읽고, 덩달아 수상작품집도 애독하게 되었어요. 이상문학상이 참 좋아보여서 무턱대고 이상문학상만 읽었는데 너무 수준이 높은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젊은 작가상도 읽으려고 준비 중이지요. 황정은은 이미, 유명하다고는 못 해도, 책도 몇 권 내고 이름을 좀 날렸지 않나 싶네요. 손보미와 김이설 등은 이름이 많이 보이는 걸로 봐서 자목련님 말처럼 '주목받는다'는게 확 보여요.

그런데 왠지 웹진하면 좀 문학성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왜 그런 느낌이 드는거지...

2012-06-01 0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12-06-01 07:15   좋아요 0 | URL
문동에서는 곧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도 나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인거지요. 소이진님도 관심을 갖고 계실 듯해서요. 개인적으로 김이설, 김미월, 손보미, 황정은을 특히 좋아해요. 지금쯤 학교에 계실까 싶어요. 6월, 즐겁고 행복하게 시작하세요!!
 
기다리는 책

 

 꽃이 지고 있다. 비 내리는 아침, 남아 있는 꽃잎들이 흔들린다. 꽃 지는 계절, 꽃 비가 아름다운 요즘 가의 계절은 봄일 것이고, 누군가는 이미 여름에 속한 날들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아직까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감정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이 계절에 정확한 이름을 명명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다리던 봄처럼 도착한 시집을 읽는다. 가장 먼저 읽은 시는 이런 시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언저리에 머무는 그들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반생(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 가다 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왜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꽃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반생이 손을 흔들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배웅할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p. 100~101)

 

 비가 오는 날이라, 끝을 달려가는 봄을 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다. 봄을 보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은 때로 본능처럼 다가온다. 백작약이라는 말에, 나는 주책없이 가슴이 설렌다. 이별의 공간에, 영원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더이상 기억 나지 않는 너의 얼굴을 그려본다. 너는 알까, 가끔 네 생각을 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령 네가 나를 기억한다 해도 너는 궁금해하지 않을 걸 알기에 소리를 죽인 채 속눈썹은 울부짓는다.

 

  <속눈썹의 효능>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고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ㅡ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질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p. 68~69)

 

 이 봄에 읽지 않았다면 어쩔뻔 했는가. 손끝으로 꽃을 매만질 용기 없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비겁한 봄날에 이런 시를 읽어 흘러내리는 감정 주워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준 시가 있어 고맙고, 또 고맙다. 투박한 말 뒤에 숨겨진 여리디 여린 마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간절함 외침을 대신 해 시인이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듯하다. 

 

  <툭>

 

  빛줄기 하나 텅 비어 바닥을 향해 있다

 

  못이 박혀 있던 자리에 남은 구멍

  여백을 견디던 벽에게 못은 무엇이었을까

  한 점으로부터 출발했을 여백

  벽에 구멍을 낸 것도 막고 있던 것도 못이었다

  어떤 중심은 돌출일 뿐

  그러므로 벽과 못은 상극일까

  중심이었을 때조차 못의 허기는 허공에 닿아 있었다

  낙화가 허공에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떠 있는 것들에게 가장 불편한 이름, 허공

 

  떨어지기 직전 가장 뽀족했을 못의 촉수

  중심을 견디던 내부의 힘으로

  툭, 못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벽을 놓친다

  오래된 견딤일수록 결별의 시간을 짧고

  툭, 심장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마음을 놓친다

  마지막 소리로 제 숨을 거두어 가는 것들

  흩날리는 꽃을 보는 나무의 그늘이 깊다

 

  지친 독이 못에 펴져 있다, 푸른 전갈

  바람 한 필 걸어둘 수 없다는 벽과

  다시는 너라는 중심에 박히지 않겠다는 다짐 사이

  닿을 소식은 닿는다 바람으로라도

  툭, 멀리서의 부음이 떨어진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없다 다만 소식이 있을 뿐

 

  푸른 전갈, 검은 눈 속으로 번지는 (p. 92~93)

 

 <놓치다, 봄날>

 

  저만치 나비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을 날들이 잠시 잊힌다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안자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p. 62~63)

 

  <손목을 견디다>

 

  기다림의 손목을 잘라버려야 해 어떤 선언은 비인칭

 점.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할 수 있을

 까 그늘로만 향하는 발자국, 생장점을 지닌 기다림은 식물

 의 상상력과 알맞다

 

  고요 수목원 부채파초 앞에 서면 부채와 파초 사이 바람

 을 헤아리는 허공, 이 식물의 내력은 줄기에 고인 빗물로 한

 모금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

 

  기다림의 손목 대신 파초 줄기를 잘랐을 손에 왜 떠도는 발

 자국은 구원에 목말라 할까 그럴수록 두 눈의 수위(水位)

 만 높아질 뿐, 길 잃은 발자국에게는 나침반이 되기도 하는

 데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잎의 습성 때문이라는 것 방향을

 잃기 위해 떠도는 영혼이라면 소용없을 부채파초의 꽃말은

 흰 기다림

 

  늘 부채를 지니고 다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부채가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라는 냉정, 그는 고백과 헤어짐의 문

 장을 파초 잎에 적어 보냈다 기다림,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

 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하는 것 떠남과 기다림은 비인칭 시

 점의 선언과 감행만큼 가깝게 멀다 생장을 거듭하는 시간

 만, 그늘 쪽으로 한 뼘 더 (p. 84~85)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부적처럼 믿고 산 지 오래다. 오랜동안 소식이 닿지 않던 지인의 안부가 반갑기는 커녕 두렵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 그만큼 건조한 날들을 살고 있다는 말일 터. 아니, 사실은 기다리지 않는 척 하며 언제나 내 귀는, 내 모든 촉수는 너를 향해 있다는 마음을 들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네가 달려와 주기를, 네가 잘 지낸다는 안부를 바람에라도 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봄날에.

 

 옮기지 못한 시들이 많다. 좋은 시냐고 묻는다면, 그저 나를 울리는 시라고, 그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다정한 목소리라고, 꽃잎이 떨어질 때 속눈썹이 흔들리는 당신이라면, 반가울 시라고 답할 뿐이다.  

 

 

 

 

 

 

 

이은규 첫 시집, <다정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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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4-2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2-04-26 15:42   좋아요 0 | URL
함께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2012-04-27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