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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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되던 해 여름, 마리화나에 푹 빠져 있었다는 담담한 주인공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결코 만만치 않은 500쪽 가까운 분량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청소년 시기의 혼란과 방황 가운데서도 자신만의 인생의 법칙을 세워가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담고 있기에 오히려 그 두께가 부족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채피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이혼, 계부의 학대, 친모와의 닫힌 소통, 가난 등으로 점철된 절망뿐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가족 외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는 처지의 친구 러스와, 약물에 쩔어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폭주족들이 전부였다. 폭주족들 중에는 그나마 인간적으로 그를 대하는 브루스라는 인물도 있긴 했지만 뜻밖의 사고로 그는 죽게 되고, 더 이상 살던 동네에서 지낼 수 없게 되어 러스와 함께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돈도 희망도 없는 그들의 생활은 계속 지속되지 못하고 두 사람은 이내 헤어지게 된다. 드디어 주인공 채피는 혼자가 되고, 본격적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변태 포르노 업자에게 붙잡힌 소녀 로즈를 구하게 되고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스쿨버스에서 아이맨이라는 자메이카 출신의 불법체류자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잠시나마 활기를 찾게 된다. 이때 삶에 대한 희망을 엿본 채피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평범한 인생을 사는 꿈을 꾸게 되지만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가족과의 관계에 절망하여 평생의 멘토가 되는 아이맨을 따라 자메이카로 떠난다.

자메이카에서 아이맨의 도움으로 조금씩 삶에 대한 희망을 회복해가던 채피는 운명적으로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결국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이 마리화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소설 전반에 걸쳐 보여주는 것이 내게는 아주 흥미로웠다. 고향에서의 우울한 시기를 마리화나를 피우며 버텼고 마리화나를 거래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해가는 모습, 인생의 스승이라 할 수 있었던 아이맨조차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리화나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나오는 점, 그를 따라 떠난 자메이카에서의 생활도 마리화나 재배와 거래가 주를 이루고, 기적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그와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조차 약물 없이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소설적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언제부턴가 약물과 같은, 사람을 혼미하게 만든는 것들에 중독되어 있지 않으면 삶이 성립하지 않는 현대인의 피폐한 정신세계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말미에,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주인공 채피가 자신의 의지와 믿음만으로 올곧은 삶을 살게 될지, 기본적으로 마리화나는 인생의 필수옵션으로 안고 가게 될지 궁금증을 안고서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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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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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왜 이렇게 기억을 하고 있느냐 하면, 6학년으로 올라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께서 남은 초등학교 생활 1년 동안 꼭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정해보자, 는 말씀에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소설을 한 편 써보겠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렸을 때라 해도 갑자기 생각난 것을 말했을 리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면 직전의 겨울쯤에 글에 대한 관심이 발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전부터 만화를 그리면서 유치하기 짝이 없었어도 이야기를 만드는 취미랄까, 혹은 습관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생활이 다 끝나가도록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 당시 초등학생들이 보통 사던 얇은 두께의 원고지가 아닌 제법 두툼한 원고지까지 준비해놓고서 말이다. 아마 그때 어떻게 해서든 이야기를 써봤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지금까지다. 글에 대한 내 마음의 불씨가 확 퍼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어버리지도 않은 채로 평생을 정확한 이유도 모르는 채 안고 살아야 하는 미열처럼 자리 잡게 된 것은. 글을 써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펜을 잡고 공책 앞에서 머뭇거리다 어느새 그만두는 장면을 내 인생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 글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허영과 욕망으로 점철된 겉치레에만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솔직하고 편안하게 끄적거리는 것조차 힘들게 되고 글쓰기라는 행위와 나와의 거리는 꽤나 멀어졌다. 일기를 다시 쓰고 서평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조금씩 글쓰기와 다시 친해져보려는 때에 읽은 ‘라이팅 클럽’은 이런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처음 시작할 때 밑천이 들지 않아 누구나 시도해보기에 좋은 것이 글쓰기이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대가로 내놓아야만 진정한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와닿았고, 수많은 경험, 생활의 축적도 중요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타인의 말에 넉넉히 귀 기울일 줄 아는 열린 태도, 자신의 고집을 비우고 버릴 줄 아는 힘도 길러야 함을 깨달았다. 외모도 별로고 학벌도 변변찮은, 글쓰기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주인공의 심정이 굉장히 답답했을 것 같은데 나 역시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인지 동질감 같은 것을 읽는 내내 느꼈다. 그러나 작가가 굉장히 유머러스하게 인물을 그려내고 있어서 비참하거나 초라한 느낌은 크지 않다.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삶에서 결정적 돌파구가 되는 무언가를 만나는 일은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글쓰기라는 것으로 풀어내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거다 싶은 느낌이 왔을 때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집중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본다. 그것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말이다. 이것저것 다 맛보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서운 일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자기가 아무리 못나고 내세울 것 없다 해도 중심을 지탱해주는 단 하나의 무언가가 있다면 견디고 견뎌 냈을 때 결국 빛을 보게 될 테고 또 다른 음식을 여유 있게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작중에 인용된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와 잭 런던의 ‘강철군화’, 시몬드 보봐르의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의 구절들과 작가들의 삶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조만간 도서관에 들러 꼭 찾아봐야겠다. 참, 돈 키호테에 대한 애정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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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명언집 - 강하게 살아가게 하는 가르침
노다 교코 엮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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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뉴욕의 어느 지하도에 누군가 ‘신은 죽었다 - 니체’라고 써놓았다. 한참 지나고 난 후 그 옆에 다른 글귀를 누군가 써놓았다. ‘니체는 죽었다 - 신’.

10대 중후반 시절, 한참 교회를 열심히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다. 목사님은 가끔 예배 중에 위의 예화를 들면서 ‘신은 죽었다고 했던 니체는 죽었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라는 식으로 설교하곤 했다. 그리곤 허허 웃으면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도 따라서 하하하 웃었다. 그 당시 나는 분위기 때문에 웃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항상 불편을 느끼고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니체라는 사람이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하기까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겪어왔던 것인지, 어떤 고통을 당했기에 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도 반기독교적인 철학적 명제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너무나도 어려운 니체 철학에 감히 도전해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이 흘러왔지만 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의문은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니체의 저작들 중에서 당장 삶에 적용할 수 있을 만한 문장들과 짧지만 많은 생각들을 요구하는, 말 그대로 지갑에 따로 끼워두고 한 번씩 보고 싶은 문장들을 따로 엮어놓은 책이기 때문에 니체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본격적이라기보다는 우선 색깔을 한번 맛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할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니체의 문장들에는 의지, 의미, 목표 등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니체는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 즉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에 상당히 집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로부터 니체가 살았던 시대에 이르는 동안 종교는 확실히 타락했고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에 담긴 속뜻은 실은 ‘세속화되고 계급화된 종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사라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린 종교에 절망한 니체가 다른 대안을 찾고 찾다가 이른 결론이 허무주의이고, 허무주의 이후의 초인사상이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니체는 그 누구보다 신이 확실한 역할을 해주길 원했고 신의 자리를 제대로 ‘만들어드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다. 정신적으로, 의지적으로 가장 우뚝 서 있어야 할 시기에 일어난 발작은 그의 누구보다도 강한 삶의 의지, 절망을 딛고 신을 초월한 ‘강인의 삶’으로의 열망과 집착의 결과로 여겨진다. 그의 발병부터 죽음에 이르는 시기는 그때까지 그가 주장해왔던 그의 철학, 사상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보이니……

개인적으로 이 책은 그의 슬픈 유산이라 생각되지만, 왠지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지금 이 세상이 가만히 눈과 귀를 막고 웅크리고 있거나, 아니면 니체처럼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엉망진창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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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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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더 이상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돈을 위해 일한다. 돈이 이 세상을 접수하고 말았다.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것을 팽개치면서 고유의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한 대상을 숭배하고 경배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화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불평등과 환경파괴와 인간에 대한 경멸을 촉진하는 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p.16) 

처음에는 단순한 시스템이었을 화폐경제가 오늘날에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심지어 숭배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람이 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돈이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이상한 세상이 정상적인 시대가 된 이때에 아주 황당한 실험을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실험은 다름 아닌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년을 사는’ 것이다.

유기농식품 관련 회사에 다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본질적인 지구환경의 문제를 느낀 저자는 가장 큰 문제의 원인으로 ‘돈’이라는 요인을 찾아내게 된다. 돈으로부터 야기되는 각종 문제, 예를 들면 식량 문제, 자원 낭비, 환경 파괴, 공동체 붕괴 등을 돈 없이 사는 삶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시도로 이해되었다.

이 세상에 수치로 표시되는 모든 돈이 100이라고 가정할 때,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10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금융시스템의 발달로 인해 빌리고 빌려주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오늘날의 거품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거품으로 인해 실제적인 가치를 지니는 자연 환경이나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인류가 환경재앙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경제가 수축되고 있는데도 돈을 계속 안전을 위한 도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빈틈없이 촘촘하게 잘 짜인 공동체의 삶이 다시 일어나도록 해야 할 것인가? 말하자면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하고 운명을 공유할 줄 아는 능력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p.26~27)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저자는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하고 운명을 공유할 줄 아는 능력’을 다시 배우고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저자는 구체적으로 돈을 쓰지 않고도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 단계로 스스로 돈 없이 사는 삶을 실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저자는 먼저 자신의 주거용 배를 팔아 ‘프리코노미 커뮤니티(Freeconomy Community)'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개설한 관련 웹사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고 도움을 주고 받는 등 대안경제의 가시적인 성과를 얻은 저자는 이후 실제로 1년 동안 돈을 포기하는 삶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저자는 자신의 삶이 극단적인지, 끊임없이 재앙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기존의 생활방식이 극단적인지 묻고 있다.

세면용품 없이 청결을 지키는 방법을 설명해주는 부분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화장품 회사들이 사람의 피부에서 습기와 천연 오일을 닦아내는 제품을 팔아놓고는 다시 그 피부에 습기와 천연 오일을 입히는 제품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다른 부분에 적용해보면 인간은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는 것을 억지로 변화시켜 다시 되돌려놓는 행위에 상당히 집착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집착은 지금의 비상식적인 경제성장 욕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삶도 소개하고 있는데 비슷하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그들의 철학과 실천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돈을 최소한으로 쓴다든지, 돈을 선한 방향으로 이용한다든지, 지역화폐라는 경제시스템을 통하여 지역공동체를 되살리는 방법을 모색하는 등의 방법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하며, 그 중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돈을 포기한 삶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 하나가 바로 삶에 대한 믿음이다. 만약 하루하루를 베풂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필요한 것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그것을 얻게 되어 있다. (중략) 나는 그 믿음을 지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느낌과 삶의 경험에서 얻은 믿음이다.”(p.317)

“나의 경험에 비춰볼 때, 만약 당신이 아무런 보답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베풀면 당신도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의 유기적 흐름이다. 우리의 생태계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마법의 댄스이다. 하지만 그런 마법의 댄스가 일어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자연이 당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p.317)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들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옛날에,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많은 문제와 난관을 헤쳐 왔던 조상들의 지혜를 오늘날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신뢰가 무너진 자리를 돈이 대신하고 있는데 그 경과는 참혹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돈 없이 살아보기로 결심한 저자의 의도가 단순히 돈 없이도 인간은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닌, 가장 행복한 삶의 형태, 즉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베풀고 나누는 삶만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최상의 상태로 살리고 지속가능한 개발도 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성 지구도 살리는 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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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엑스포메이션
하라 켄야.무사시노 미술대학 히라 켄야 세미나 지음, 김장용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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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엑스포메이션’은 ‘알몸’이란 주제에 대한 작가들의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담긴 재미있는 책이다. 물론 예술서적 특유의 난해함이 있어서 그런지 책 속에 소개된 작품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통로, 즉 ‘하라 켄야 세미나’를 이끄는 하라 켄야의 총평과 자신의 결과물에 대한 작가들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각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는 것으로 서평 아닌 서평을 쓰게 될 것 같다. ‘information'의 상대어로 고안된 조어 ‘ex-formation’이 담고 있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을 미지화하여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세미나의 목적에 걸맞게 책에 담겨 있는 ‘알몸’에 대한 다양하고 독특한 표현방식들을 보며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먼저 프롤로그에서 ‘알몸’의 통상적인 감정인 부끄러움의 근원을 개체의 편차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아무런 연출도 없는 여성의 나체사진을 통해 알몸이란 것이 단순히 성적이거나 수치심, 부끄러움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알몸의 가치를 밝히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작품 마에지마 준야의 ‘Material + baby'는 갓난아기를 표현한 순수한 조형물에 꽃이나 유리조각, 나무껍질, 금속재료를 각각 덧씌워 표현했는데 아기를 통해 일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충만한 사랑스러움부터 낯설고 공포스럽고, 심지어 죽음과도 같은 어두운 이미지까지 느낄 수 있었던 특이한 작업이었다. 두 번째 작품인 엔도 가에데의 ‘나체의 인형’은 기존의 예쁜 여자캐릭터 인형을 O다리로 만들거나 뚱뚱하게 혹은 갈비뼈가 튀어나오도록 비쩍 마르게 만들어냈는데 왠지 신체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획일화하여 강요하는 현 세태를 꼬집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꼬야마 게이꼬의 ‘나체의 소녀만화’는 순정만화의 등장인물들을 모두 알몸으로 만들어 원작과 비교해 보여주는 작업을 선보였는데 설명하는 것처럼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좀 지나 다시 보니 굉장히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앞서 세 작품에서 다뤄진 아기의 모습과 소녀의 이미지는 우리가 ‘알몸’ 하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다시 말해 접근하기에 용이한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네 번째 작품인 무라카미 사치에의 ‘팬티 프로젝트’에서부터 이 세미나의 개성이랄까 특징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피망이나 포크, 장도리, 수도꼭지, 빨래집게 등 입힐 수 있는 모든 사물에 팬티를 입혀봄으로써 ‘알몸’의 의미를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맨몸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팬티를 다양한 사물에 입혀본다는 발상 자체가 무척 재미있었고 신선했다. 장도리나 피망 같은 경우는 의외로 섹시(?)했고 포크나 스패너, 계란에 입힌 팬티를 입힌 모습은 어찌나 귀여웠는지! 다섯 번째 작품인 다까야나기 에리꼬의 ‘「완성」을 벗기다’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제품들, 즉 연필이나 콘센트, 스푼, 고물줄 같은 완성품들의 미완성된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낯설고 특이한 기분이 들게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보는 노란 고무줄 같은 경우, 절단되어 고무줄 형태로 나오기 직전의 둥글고 누런 고무관의 형태를 보니 지금 내 눈앞에 굴러다니고 있는 고무줄이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미지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물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끼야 나오의 ‘알몸의 알몸’은 일상 속의 다양한 행위들, 예를 들어 전화를 받거나 물건을 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의 행위들을 알몸으로 하고 있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준다. 이런 상상은 어쩌다 한 번쯤 하게 되는 상상이 아닌가 싶어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다.  
 
가장 특이한 ‘알몸’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었던 일곱 번째 작품, 도야마 아이의 ‘알몸의 색상’은 우리가 보는 피부색을 단순한 하나의 색이 아니라 살과 혈관, 지방, 뼈 등의 각각의 색으로 분석하고 해체한 다음 다시 작가의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혼합하여 피부 색채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여덟 번째 작품인 후지가와 코다와 후나기 아야의 ‘엉덩이’는 앞서 ‘「완성」을 벗기다’와 ‘알몸의 색상’을 보며 너무 어려워서 머리가 아프고 빙빙 돌던 나에게 휴식과도 같은, 그러면서 미소를 짓게 하는 깜찍한 작업이었다. 엉덩이라는 신체의 특징을 비누, 마시멜로, 떡, 각설탕, 성냥의 디자인에 적용하여 귀여운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엉덩이 모양을 한 캐스터네츠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그것을 딱딱 두드리는 느낌은 어떨까? 약간 묘할 것 같은데... 책에서는 체벌의 의미로서 엉덩이를 두드린다는 의미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불붙는 부분을 엉덩이 모양으로 만든 성냥개비는 엉덩이가 불탄다기보다는 하트에 가까운 느낌으로, 불타는 사랑을 떠오르게 했다. 아홉 번째 작품인 후나비끼 유헤이의 ‘먹어서 벗겨내는’은 먹고 마시고 난 후의 흔적을 ‘알몸’의 이미지와 연결시켜 숨겨진 것이 드러났을 때의 흥미로운 순간을 작가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솜사탕 막대기를 양 모양이나 비행기 모양으로 하여 솜사탕을 다 먹고 났을 때 양 모양 막대기가 나온다면 우리가 먹은 행위는 양털을 모조리 깎아낸 행위로 느낄 수 있고, 비행기 모양 막대기라면 우리가 먹은 행위는 비행기를 둘러싸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는 행위로 느낄 수 있는 식의 재미있고 독특한 상상을 실물로 표현했다. 커피나 죽을 담는 그릇 바닥을 고래나 상어, 부표와 같은 형태가 나오게 하여 먹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드러나게 하도록 만든 것도 독특하고 참신했다. ‘엉덩이’와 ‘먹어서 벗겨내는’ 이 두 작품은 실제로 제품화해서 판매해도 인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바야시 츠브라의 ‘알몸의 지구’
는 ‘알몸’에 대해 어떤 것과 연결시키는 상상력의 스케일이 가장 큰 작업이었다. ‘알몸 엑스포메이션’이란 책의 정보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끌렸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지구를 뒤덮고 있는 바다를 전부 걷어내버림으로써 황량하게 드러나는 지구의 모습을 지구의 ‘알몸’으로 생각한 작가의 상상력이 독특하고 대단해보였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예전에 일본의 어떤 과학연구에 관련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얼핏 나서 혹시 그것과 이것이 관련이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튼 ‘알몸’의 개념이 이렇게 전지구적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니 부끄럽게만 느끼고 있기엔 너무나 중요한 것이로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여본다.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인 와따히끼 마사히로의 ‘정보를 벗김’을 생각하면 다시 머리가 아파진다. 하나의 사물에서 심벌이 되는 핵심적인 이미지만 남기고 모든 것을 배제해버린 상태를 ‘알몸’의 이미지와 연결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보를 벗김’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우리는 보통 서로 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핵심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이게 되는데 결국 핵심이 분명하면 부연 설명은 길어도 좋고 짧아도 상관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한 사물이나 개념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곁가지들을 많이 들이대고 있지만 결국 그것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의 심장과도 같은 가장 중요한 핵심, 즉 심벌이 되는 이미지가 확실하다면 곁가지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 그런데 만약 가지가 꼭 필요하다면 아주 질서정연한 형태로 뻗어나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해가 잘 안되어서 이렇게 말을 비비 꼬게 된 것인데, 아무튼(또 아무튼!이라니...) ‘알몸’이란 것이 순수하고 본질적인 하나의 ‘핵심’, ‘상징’과도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터무니없게 결론을 지어버렸다. 

 
이상 하라 켄야 세미나에서 도출된 ‘알몸’에 관한 ‘엑스포메이션’ 열한 가지 작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감상을 길게도, 참 길~게도 이야기해보았다. 사실 이 글도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벗기고 벗기다 보면 몇 줄에 다 요약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 본질은 그다지 복잡하지도 장황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도 않고 텍스트도 많지 않아서 짧은 시간에 몇 번이고 훑어볼 수 있을 정도이지만 물리적으로 담긴 그 이상의 생각을 요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엑스포메이션’ 작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미지화하여 새로운 가치를 깨닫고 그에 따른 인생의 목표를 세워 열정을 다해 달려가고 싶다는 희망이 당장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통해 많은 자극을 받은 것은 분명하며, 언젠가는 그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되리란 믿음을 가지고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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