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벗어던지기 - 교회에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성경 공부
블루칼라 지음 / 미담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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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청소년 시기는 매우 우울하고 어두운 편이었다. 또래들과 조금은 다른 길을 걸어갈 뻔했던 내게 한 줄기 빛을 비춰준 것은 외할머니의 기독교 신앙이 계기가 되어 교회를 다니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이다. 교회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참 좋았다. 그때까지 내가 겪었던 세상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착하고 순수한 느낌이었다. 나도 이내 교회생활에 빠져들어 토요일 오후에 있었던 중고등부 모임부터 일요일 온 하루를 교회에서 보내기도 했다. 나는 원래부터 교과서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초기의 내 교회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몇몇 갈등이 있었더라도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는 시점부터 모든 것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성경의 좋은 점만, 지켜야 될 점만 인식하고 있던 나의 눈에 사람들은 고도의 이기적인 삶으로 비춰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결벽증 비슷한 것도 있었기 때문에 길에 가래침을 뱉는 행위조차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 위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심히 혼란스러웠다. 그런 나에게 성경내용과 어긋나는 교회의 실상들이 하나둘씩 보이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문단의 맥락을 무시하고 특정한 구절만 인용하여 자기 입맛대로 설교하는 목사나, 세상 사람들보다 더 돈이나 외모를 밝히는 또래 교회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아무리 큰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헛수고였다. 결국 나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그렇듯 종교나 신과 관련된 문제도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도 결국 신의 문제라기보다 신이나 종교라는 관념을 이용해 자기기득권을 지키고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려는 특정 계층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답답한 것은 그런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종교의 시스템 속에서 확인도 하지 않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 내용의 모순되는 부분이나 이상한 점을 느껴도 말 한 마디 쉽게 꺼낼 수 없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의 기본적인 반성의 시간(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뻔한 거 말고!)도 가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종교의 모습이다. 한 마디로 신이라는 개념만 빼면 세상의 수많은 이익집단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 속성이 어떻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설정한 어떠한 룰에 따라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읽은 ‘사회적 원자’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주적인 원리로서의 운명론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지구 위에서 기세등등한 타락한 종교의 신들은 말 그대로 만들어진 신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너무 어렵다. 

   이 책은 기독교인이었던 저자가 무신론자가 되기까지 어떤 고민과 괴로움의 시간을 거쳤는지 잘 담겨져 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귀중한 능력인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해보길 권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인간에게 나약하게 하는 무해한 도구에 불과한 것인지를 묻고 있다. 성경 내용과 일반적인 상식이 어긋나는 부분을 통해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고, 성경 내에서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내용을 근거로 신의 계시가 아닌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왜곡과 짜깁기의 결과라는 주장을 펼친다. 성경을 믿든 믿지 않든 비판을 하거나 옹호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연구가 필요한 법인데 적어도 저자는 비판을 위한 양식은 적절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믿는 사람들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소화한 성경지식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 아니라 세뇌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로서 당당한 삶을 원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가진 신앙의 견고함을 더하고 싶은 종교인 모두에게 한 번쯤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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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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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약한 개인이 특정한 약물에 의지해 자신이 처한 한계를 극복하려 하거나 도피하려 하는 행위, 또한 예술가의 경우 영감을 얻거나 감각의 확장을 통해 예술의 신기원을 이룩하려는 시도로 약물을 복용하는 일은 익히 들어온 이야기들이다. 얼마전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을 통해 비틀즈의 노래제목이 이 약물을 가리킨다고 해서 유명하기도 한 ‘LSD'라는 물질에 대해 다룬 다큐를 보면서 인간이 마약과 같은 약물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체험하는 일과 그 체험을 통해 어떤 성취를 이루려 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기도 했다. 심지어 성서의 내용을 다룬 다큐에서는 요한계시록의 경우 저자인 요한이 어떠한 향이나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본 환상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있기도 하다. 계단 하나 정도의 높이에서 살짝 뛰어내릴 때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1초 내외일 것이다. 그러나 약물을 체험한 적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살짝 뛰어내리는 시간이 짧게는 몇 분에서 수십 분까지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아마 쾌락과 관련한 행위와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왜 약물에 쉽게 빠져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쾌락의 절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니 약물을 통해 그 감각이 오래 지속된 경험을 한 사람은 다시 경험하고 싶게 될 것이고 이어서 중독의 상태로 빠지기가 쉬울 것이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소설이라고는 하나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고 얼핏 이것이 소설인지 보고서인지 명확히 정의하기가 힘든 특징을 보인다. 질병의 고통 때문에 처음 아편을 시작했던 주인공은 아편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 확장되고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철학의 경지가 한층 깊고 넓어지며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지적 욕구의 추구에 있어 아편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러나 이내 작가는 아편이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후 괴로운 꿈과 환상에 시달리면서 아편을 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며, 모든 계층의 ‘아편쟁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의 상상력과 같이 한계와 끝이 없는 신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처럼 좋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먼저 몸을 망가뜨리고 이어 마음을 불안과 우울에 빠지게 한다. 결국 몸과 마음의 불균형은 삶 자체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가나 일반인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과정이다. 순수하게 자기 통제를 해가며 자신의 의지와 약물의 조화를 죽을 때까지 잘 이룬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자신이 아편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한 시점에서조차 그 고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고통의 과정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드 퀸시의 글에 대한 평가는 이 책의 해설 부분의 인용문이 적절한 것 같다.


   ‘간절함’과 ‘지지부진’, ‘정확’과 ‘혼란’, ‘합리’와 ‘미궁’ - 서로 모순되는 이런 특징들이 이루고 있는 미묘한 균형, 바로 여기에 드 퀸시의 산문이 지니고 있는 유례없이 매력적인 생명이 있다.(중략) “덧없이 사라지는 그때그때의 영감에 수반되는 다양한 결점, 잘못, 경우에 따라서는 장점을 내포하는 거의 ‘즉흥적’이라 해도 좋은 행위”라고 그가 부른 것이다. (p.197-해설부분)


   이러한 그의 산문의 특징은 원래의 재능에 아편의 효과가 더해져 극대화된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한 법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성취를 이룰 때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인한 것이어야만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적을 이룬 장본인이 행복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의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 문학사에서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해설 속 인용문을 여기 하나 더 옮기고자 한다. 


   “드 퀸시는 문인과 저널리스트의 잡종이다. 드 퀸시의 글은 낭만주의 문화의 미학적 추상화일 뿐만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연속적인 주석이다. 낭만주의의 유기적 전체 내부에서 그는 가장 양면가치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낭만주의의 특유한 표현을 영구히 전하는 동시에 파괴하고, 19세기 문화의 더 큰 정신적 외상의 증후로서 아편 중독을 고백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드 퀸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p.203-해설부분)


   이 평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문화의 정신적 외상의 증후로서의 아편 중독’이라는 부분인데 오늘날에는 이것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중독되게 하는 문화의, 문명의 패악은 무엇일까? 2차적인 역할에 머물러야 할 돈과 같은 주객이 전도된 물질개념들이 아닐까?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고백과 거듭남이 필요한 때이다. 토머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결코 쉽지 않았을 개인의 고백이라는 차원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죽비소리 같은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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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도둑
마크 레비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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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엔 누구에게나 초능력 같은 것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특수능력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처럼 너와 내가 진실한 우리가 되는 능력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명이 발전할수록 태어난 순간부터 그 능력이 상실되는 시점 사이의 시간 간격이 급격히 짧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장 지난 90년대 초중반만 생각해보더라도 세상은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개인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세상은 지금보다 더 따뜻했다. 하지만 지금은 위에 언급한 능력이 재생되더라도 순수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부분 경쟁과 이해득실의 도구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 같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이 그저 즐기고 지나치는 것을 넘어 세상을 향한 하나의 문학적 치유도구라고 봤을 때 현실에 얼마만큼 그 효과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였다.

   "네가 누군가의 그림자를 뺏어올 때마다 그 사람의 인생을 비춰줄 수 있는 한줄기 빛을 찾도록 해. 그들에게 숨겨져 있던 추억의 한 부분, 그걸 찾아달라는 거야. 그게 우리가 바라는 바야."/ "우리라니?"/ "그림자들." (p.103) 

   마크 레비의 장편소설 ‘그림자 도둑’은 그림자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과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한 소년이 청년이 되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진실한 사랑을 찾아 한 걸음 내딛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긴 하지만 독자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쯤 꿈꿔보았을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에 대한 메시지를 더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를 통해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읽을 수 있게 된 주인공 소년은 그 능력을 이용하여 아픈 기억을 가진 주변인물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하면 자기를 괴롭혔던 덩치 큰 동급생이 왜 그렇게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어 이해하고 마음으로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의대에 진학한 후 거기서 만난, 여러 명의 전문의가 나서도 쉽게 해결하지 못한 한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고민의 원인을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알아내고 상태를 호전시키는 일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능력이 있다 하여 주인공의 인생이 잔잔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한편 자기 자신에게는 아쉬움과 아픔으로 돌아오기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 뤼크의 재기 넘치는 격려와 위로의 장면은 상당히 돋보이며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 소설은 한 편의 동화와도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환상적인 설정과 아름다운 전개는 다소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내가 한국 독자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남겨놓고 오는 작은 일들이 있다. 시간의 먼지 속에 박혀버린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걸 모르는 척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소했던 그 일들이 하나씩 모여 사슬을 이루고, 그 사슬은 곧 당신을 과거로 이어준다. (p.263)
 

   처음에 언급했듯이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원래부터 있었던, 특히 대부분 유년기에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는 소중한 능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나아가 성장하면서 완성시켜야 할 성숙한 ‘순수함’에 대한 갈증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나’로만 드러나는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부득이하게 감춰진 그 능력을, 최소한 그 순수함을 다시 되찾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아무튼 이 소설은 존재를 한숨짓게 하는 어떤 그리움,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 친구와의 소중한 우정, 알 수 없는 사랑의 힘 등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풀어낸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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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카린 H. 그림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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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로는 르누아르나 조르주 쇠라 등이 있다. 르누아르의 풍성한 색채와 아름답고 평화로운 느낌의 그림들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 했던 나에게 잘 맞는 화풍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점묘법이라는 독특한 작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의 그림에 이끌렸던 이유는 공간을 가득 매우는 그의 그림 속 다양한 색채의 입자 하나하나가 쇠라를 처음 접할 당시의 내게 세상이 비친 방식과 비슷했기 때문으로 느낀 놀라움과 작품의 차분한 느낌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의 빈 채널로 돌려보면 무수히 많은 흰 점과 검은 점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듯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조화로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그의 그림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쇠라를 접할 당시에 나는 하늘이나 하나의 색채로 채워진 공간 등을 바라볼 때 작은 점들로 꽉 차 있는 것으로 보여 내 눈에 이상이 있었던 건 아닌가 걱정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 때에 본 쇠라의 그림을 보면서 세상이 그런 식으로 보이는 시기가 길든 짧든 개인에 따라 있을 수 있겠구나 싶어 안심하기도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표현 양식에는 한 순간의 직접적이고 생생한 ‘인상’이 포함돼 있다. 이는 종종 사건 전체의 우연한 일부분으로 보이도록 표현된다. 그것은 19세기 말까지 전통적인 미술의 자산이었던 고대 이야기나 신화 주제의 그림과 대조되는 현대의 일상생활 속 인물들과 장면들이다. 노동자와 매춘부, 거리의 행인이나 카페의 손님 - 인상주의자들은 이런 사람들의 묘사가 예술적으로 가치 있다고 처음으로 간주한 화가들이다.” (p.9)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룩한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 경직된 사회의 분위기를 보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데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반 고흐에게 있어 인상주의는 반 고흐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통과점의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자체적으로 갱신하며 확장하는 특성을 지닌 인상주의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그 효용성이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인상주의 운동을 기점으로 예술의 다양성은 더욱 극대화된 것 같다. 불쾌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그림만으로라도 사랑스럽고 예쁜 어떤 것들을 계속 창조해내고자 했던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가 있었는가 하면 19세기를 휘감는 특유의 분위기를 공기의 흐름, 정물이나 사람의 표정, 군중, 현대적인 건축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 수면의 순간순간들로 담아낸 화가들도 있었다. 또한 순간의 인상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천천히 변화하는 흐름을 한 화폭에 담아내려 한 시도도 있었다. 이렇듯 인상주의는 강제되고 획일화한 시선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대중에서부터 개별적인 각 사람의 마음속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담겨 있는 세계의 초상을 모두 용인해줄 수 있는 품을 제공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세상의 출발점은 이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상주의로 분류되는 그림들을 보면 대체로 아름답다. 그림이 담고 있는 감정이 행복에 가득 차 있거나 슬프거나 메말라 있거나 혼란스럽거나 피곤하거나 불온하거나 하는 것들에 관계없이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인상주의로 통하는 작품들은 이 세계와 나를 포함하고 구성하는 모든 순간들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서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삶의 모든 요소들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어떻게 활용하며,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일까? 인상주의는 내게 이러한 선택의 몫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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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사용설명서 - 돈 잘 쓰고 잘 사는 법
비키 로빈 외 지음, 김지현 옮김 / 도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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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똑똑한 사람에 의해 발명된 돈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효율적이고 편리한 삶을 위한 수단을 넘어 어느새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사실 돈이 무슨 의지를 가지고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 스스로 마음속의 허황된 욕심을 이기지 못해 비롯된 비극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돈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속성이 가장 적절히 구현된 물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과 돈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부릴 줄 안다는 것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돈이 돈을 벌어다주는 자본으로서의 돈에만 집착하게 된 사람들에게 이 책 ‘돈 사용설명서’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깨달아야 할 돈의 본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눈뜨게 해주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다양한 실제 사례를 소개한 훌륭한 스승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재정 현실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검토한 후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과 쓸모없는 것을 분별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지구의 환경과 경제라는 큰 틀에서부터 우리 삶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실천 사항을 제시한다. 산업혁명 이후 삶의 모습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에서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일상을 살다가 정년이 되면 은퇴 후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환상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죽을 때까지 가난과 빚에 시달리다가 후회로 가득한 생을 마감하곤 한다. 이 책에 따르면 돈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부터 뒤집는 것이 우선이고 결국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통해 만족을 누리면서 자신의 생명력을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창조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삶이 올바른 의미에서의 행복한 삶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재정자립이란 돈 뿐만이 아니라 생명과 시간, 라이프스타일, 이웃, 공동체 등 보이지 않는 모든 가치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이 재정 문제에 있어 주체적이고 의식적으로 우리가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할 수 있기를 요구하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이해한 바를 단순화한다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고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실천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주변 환경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고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내 인생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돈을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풍요로울 때나 궁핍할 때 등 모든 상황에서 만족할 줄 아는 법을 터득했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허망한 것에서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의 꼬리를 잡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지켜나가면서 어느 상황에서나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돈은 그것을 실질적인 면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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