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우울증>을 읽으려 벼르기만 하고, 음식과 여행책들에 탐닉하는 요즘이다.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를 훑어 보다 보니, <애도와 우울증>을 읽기 전에 가이드 읽기로 읽을 만한 글이 있어 옮겨 적는다. [사랑과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푸슈킨과 레르몬도프의 사랑시]라는 글이다.

 

사랑의 기쁨과 상실의 슬픔

 

"아, 누가 그 아름다운 날들을 가져다 줄 것인가/ 그 첫사랑의 날을/아, 누가 그 아름다운 시절의 오로지 한 조각만이라도 돌려줄 것인가"라며 첫사랑과 청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했던 시인 괴테(1749-1832).그러나 그는 지난 세월에 대한 영탄으로 생의 말년을 채우진 않았다. 전 생애에 걸쳐 여인들과의 사랑을 통해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던 그는 74세의 나이에 19세의 처녀 울리케 폰 레베초와 사랑에 빠져,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청혼을 결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만년의 사랑은 맺어지지 못했고, 괴테는 천국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며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남겼다.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

 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

 

 사랑의 기쁨과 그 상실의 슬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의 단골 소재이자 시적 영감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 넘치는 감성을 예찬하며 숭배했던 낭만주의 시인들에겐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시인이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똑같이 들뜨고 똑같이 슬퍼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과 품성에 따라 사랑을 노래했으며 상실의 슬픔을 위로했다.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두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과 미하일 레르몬도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시인은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 결투로 세상을 떠났다.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다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사랑의 시들은 여러모로 대조되며, 각각 사랑과 실연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표한다. 무엇이 다르며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살짝 들여다보기로 하자.

 

사랑은 움직이는 것, 애도적 유형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1856-1939)는 <애도와 우울증>이란 글에서 상실에 대한 반응 태도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구분했다. 이 두 유형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몰입과 그 대상의 상실로 인한 정서적 충격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애도적 유형의 경우에는 일단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대상에 쏟아 부었던 모든 감정적 에너지를 거둬들여야 한다는 현실의 요구를 수용하며, 그럼으로써 상실의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반면 우울증적 유형의 경우에는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에,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이는 이미 상실한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낳고, 자기 자신, 곧 자아에 대해서는 애증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응 태도는 과연 시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먼저 모든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자신의 의무로 간주하기도 했던 시인 푸슈킨의 경우를 보자. 사랑의 상실 또는 사랑의 종결을 다루고 있는 시들 가운데 <모든 것이 끝났다>(1824)는 이런 내용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너의 무릎을 껴안고,

 나는 애처롭게 호소했었지.

 모든 것이 끝났어요-너의 대답을 듣는다.

 다시는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우수로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일들은 아마도 다 잊게 되겠지-

 사랑이 날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넌 젊고, 너의 영혼은 아름다우니,

 또 많은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되리.

 

 전체 10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내용상 '우리 사랑은 모두 끝났다'(1-4행), '나는 너와의 사랑을 잊을 것이다'(5행-8행),'다른 사람들이 너를 사랑해주길 바란다'(9-10행)로 구분된다. '나'와 '너'의 사랑은 이미 끝났으므로, 이 시의 화자는 이렇게 종결된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거나 계속 유지시켜 나가려는 의지가 없다. 이러한 체념의 바탕에서, '너'는 아직 젊고 아름다우므로 ('나'말고도) 다른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 되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바로 이런 식의 단계적 진행을 밟는 것이 전형적인 애도 유형의 시다. 이 공식을 전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또 다른 시가 푸슈킨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1892)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어쩌면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서 아직 다 꺼지지 않았는지도.

 하지만 그 사랑이 당신을 더는 괴롭히지 않을 거라오.

 나는 당신을 무엇으로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소.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말없이, 아무런 희망 없이,

 때론 수줍게, 때론 질투에 괴로워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그토록 진실하게, 그토록 부드럽게,

 신이 당신을 다른 이에게도 사랑받게 해주길 바랄 만큼.

 

 이 시에서 세 차례 반복되는 동사 '사랑했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했다'라는 과거 시제다. '나'의 '사랑'은 한때 '당신'에게 집중되었던 열정이 이미 식어가지 시작했지만, 아직 조금 남았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의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당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는 서정적 화자의 진술은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어떤 행동의 원동력이 되기에 '다 꺼져가는 사랑'은 너무 모자라는 사랑이다. 이 모자라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 시의 끝부분에서 진술되고 있는 관대한 사랑이다. "신이 당신을 다른 이에게도 사랑받게 해주길 바랄 만큼"의 사랑 말이다. 요컨대, 이 시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시인이 겸손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방식이다. 사실상 시에게 '당신'에 대한 묘사는 거의 부제하며, 전체 내용은 "나는 이러이러 하게 당신을 사랑했소"하는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가장 숭고한 시'라는 일부의 평가는 좀 과장된 게 아닐까도 싶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우울증적 유형

 

 이러한 푸슈킨의 사랑의 시학과 대조되는 작품이 레르몬도프의 <우리는 헤어졌지만>(1837)이다. 이 시는 푸슈킨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 읽히기에 흥미롭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을

  나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좋은 날들의 창백한 환영처럼

  그것은 내 영혼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새로운 열정에 빠졌어도

  나는 그 초상을 그만 사랑할 수 없었다.

  버려진 사원도 여전히 사원이고

  쓰러진 우상도 여전히 신이니까!

 

 

 이 시는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와 마찬가지로 8행으로 되어 있지만, 2연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에 간결하게 공식화 되어 있는 레르몬도프의 사랑 공식은 어떠한가? 먼저, 1연의 처음 두 행 "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을 / 나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에서, '너의 초상'은 '너'를 대신하는 부분 대상이다. 이는 '너'의 흔적이자 '나'에게 남긴 일종의 각인이다. 이 각인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지만 완전히 헤어진 게 아닌 이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곧 '나'는 '너'를 상실했지만 '우리'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너의 초상'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에서는 그것이 갖는 효과를 진술한다. '너의 초상'은 "좋은 날들의 창백한 환영처럼" '나'를 즐겁고 들뜨게 만든다. '너'는 이제 없지만, '너'의 효과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연을 시작하는 접속사 '그래서'는 1연에서의 효과가 계속 이어짐을 뜻한다. '우리'가 헤어진 뒤에 '나'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서 열정에 빠졌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너의 초상)'을 내버릴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열정은 지난날의 열정을 더욱 강하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버려진 사원이 여전히 사원이고, 쓰러진 우상이 여전히 신인 것처럼, 떠나간 '너'는 여전히 '나'의 사랑이라는게 이 시의 최종적인 고백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라고 다소간 열정적으로 시작한 푸슈킨의 시는 결국엔 사랑의 종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헤어졌소'라고 사랑의 종결을 선언하면서 시작한 레르몬도프의 시는, 역설적으로 종결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확인으로 끝난다. 여기서 두 시의 차이, 더 나아가 두 시인의 사랑관의 차이가 드러난다. 통속적인 어법으로 비교하자면, 푸슈킨이 "사랑은 움직이는(변하는) 거야!"라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도프는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니?"하고 반박하는 식이다. 푸슈킨의 '성숙'은 레르몬도프에게는 '배신'을 의미하고, 레르몬도프의 '영원한 사랑'은 푸슈킨에게는 '미숙함'의 표시다. 둘은 사랑을 읽는 코드가 서로 다른 셈이다. 내친 김에 레르몬도프가 짧은 생애의 막바지에 쓴 <아니야, 나는 나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1841)까지 읽어보자.

 

 

  아니야,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

  너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

  네게서 내가 사랑하는 건 과거의 고통과

  스러져간 나의 젊음이야.

 

  때때로 너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응시하며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나는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지만,

  나는 너에게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와 말한다.

  너의 모습에선 다른 모습들을 찾고,

  살아 있는 입술에선 오래전부터 말이 없는 입술을,

  눈동자에선 이미 꺼져버린 눈빛을 찾는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현재의 '너'를 사랑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부재하는 과거와 과거의 연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의 사랑은 푸슈킨의 경우처럼 '변화하고 움직이는 사랑'이 아니라, '변치 않는 고정된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붙박여 있다. 이를 압축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1연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건 '너'를 통해 '나'의 '과거의 고통'과 '스러져간 젊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너'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매개다. 곧 '나'는 '너'의 눈동자를 바라보지만, 정작 내가 대화를 나누는 이는 '너'가 아니다.

  이어서 3연에는 1연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내'가 사랑하는 '과거의 고통'이 무엇이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실패와 상실에 대한 고통으로, 사랑의 대상은 '어린 시절의 여자친구'로 지목된다. 어린 시절로 한정되어 있는 '그녀'와의 사랑은 그 시절로의 회귀만큼이나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렇다고해서 그 사랑이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현재 연인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과 상처를 찾아 나선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모습'과 '입술', '눈동자'는 모두 부재하는 사랑의 대상을 대신하는 부분 대상이고, 그 흔적들이다. 이 시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두 가지 등장하는데, 이 둘이 겹쳐지면서 궁극적으로 단일한 대상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드러낸다.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울증적 사랑이다.

  몇 편의 제한된 사례를 통해서긴 하지만, 푸슈킨과 레르몬도프의 시에 나타난 사랑과 그 상실에 대한 시적 형상화가 각각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에 대응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간단히 공식화하자면, 애도적 유형은 '상실 슬픔 위안'의 단계를 거치고, 우울증적 유형은 '상실 각인 우울'의 경로를 따른다. 이렇듯 사랑과 이별에 대처하는 방식에 최소한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만을 절대화하는 오류에서 혹시 자유로울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p184 -p1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자매들과 톡을 하다가 막내동생이 <안나카레니나>를 재밌게 읽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방학을 하고도 2주동안이나 '방과후 수업'을 하느라 고단한, 자아가 강한 외동이를 키우느라 늘 지쳐하는 동생을 위해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읽기>에서  [안나 카레리나를 읽는 즐거움]을 옮겨 적는다. 로쟈는 이 책에서 [사랑과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 푸슈킨과 레르몬도프의 사랑시]와 겹쳐 읽기로 <안나 카레리나>를 소개하고 있다.

 

한겨울은 러시아문학의 고전을 읽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시간에 두툼한 책장을 넘기며 이내 밤을 새우고, 어스름하게 비치는 햇살과 함께 아침을 맞는 일은 이런 계절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그런 밤에는 백석의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눈이 폭폭 나린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읊조려보고, 그런 아침에는 그의 푸슈킨 번역시 구절을 음미해봐도 좋겠다. '아침 날 눈위를 미끄러지며/부산떠는 말이 달리는데 맡기어/찾아가자, 사랑하는 벗아, 빈 벌판을/ 어제런 듯 풍성하던 그 수풀을,/그리고 정다운 나의 강가를.'(<겨울 아침>)

 나타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소설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이지만, 세계문학전집 출간 열풍 속에서도 아직 '무풍지대'로 남아 있어서 내가 펼쳐든 책은 <안나 카레리나>다. 강의 시간에 주로 범우사판을 사용했는데, 요 몇 년간 3종의 새 번역본이 더 출간돼 읽을 만한 여건은 충분하다. 자세히 읽고 싶은 대목이 나오면 네 종의 번역본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도 있다. 유명한 첫 문장만 하더라도 번역은 제각각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민음사)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 나름대로 불행하다'(작가정신)

 

 가정 문제와는 사정이 달라서 번역이 제각각이라고 하여 독자가 불행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엇비슷하다면 번역본의 존재 의의가 상실 될 것이다 (베낀 번역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알다시피 <안나 카레리나> 이야기는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난 오빠 오블론스키 집안의 불화를 중재하기 위하여 동생 안나가 모스크바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전에 소설은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을 등장시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미리 알려준다. 키티에게 청혼하러 온 시골 지주가 먼저 만나는 이는 친구이면서 키티의 형부인 오블론스키다. 사무실로 찾아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고 돌아간 부유한 지주 레빈의 처지를 부러워하며 오블론스키는 부하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번역자들은 각각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게다가 얼마나 팔팔하냐 말이야!" (범우사) 

"게다가 얼마나 생기가 넘치나!"(민음사)

"게다가 또 얼마나 발랄하냔 말야!"(문학동네)

"건강은 또 어떻고."(작가정신)

 

 해서 우리가 그려보게 되는 레빈은 팔팔하고 생기가 넘치는데다가 발랄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하지만 키티의 어머니 공작부인ㅇ느 그런 레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더 젊고 부유하며 잘생긴데다가 시종무관으로서 앞날도 창창해 보이는 브론스키가 훨씬 더 나은 사윗감이라고 여긴다.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자주 집에 드나들며 브론스키가 한창 키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즈음에 나타난 레빈이 달갑지 않다. 딸이 레빈에게 대한 '성실성'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걱정한다.

 

"레빈에게 한 때는 호감을 품었던 것 같은 딸이 필요 이상의 성실함으로 인해 브론스키를 거절하지나 않을까."(문학동네)

 

이 대목의 '성실함'을 다른 번역본들이 '브론스키의 성실함'이라고 본 것은 착오이다. 성실은 '가정생활'을 모르는 브론스키와는 거리가 먼 덕복이다. 그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끌려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한다. 하지만 브론스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간 기차역에서 곧 안나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될 것이다. p187

 

더불어 혼자 읽기 아까운 서문의 일부분도 옮겨 적는다. 국어 교사들이 암기해서 학생들에게 그대로 들려줘도 '지식 공유주의자 로쟈'는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 작품에 대한 읽기를 굳이 '다시 읽기'라고 적은 것은 실제로 대부분의 글이 다시 읽기의 결과물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고전은 다시 읽기의 대상"이라는 관점을 반영한 때무이기도 하다. 다시 읽기란 단순한 반복적 읽기가 아니라 '고쳐 읽기'이고 '거슬러 읽기'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되읽기가 쓰기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다시 읽으면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읽기와 쓰기는 서로의 꼬리를 물며 순환한다. 이 책은 그러한 순환의 한 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오래전에 읽은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생각과 이해에 도달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내겐 '발견'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즐거움은 많은 부분은 '뭔가 써야 한다'는 강제에 빚진 것이다. 그런 의무가 없었다면 나는 책을 다시 손에 쥐었더라도 소홀하게 읽고 말았을지 모른다. 즉 '쓰기'는 다시 읽기의 중요한 조건이다. 써야 하기 때문에 다시 읽게 되고, 다시 읽으면 또 쓰게 된다. 이 책이 그러한 '쓰기'를 자극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 날 현장의 국어 교육이 '읽기와 쓰기'와 무관하게 흘러감은 통탄할 일이다. 국어 교육이란 모름지기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 기본이건만, 현장의 현실이란, 읽히기는 커녕 쓰기 교육은 언감생심 꿈꿀 수도 없다. 수십 년 전의 우리 세대는 학원을 안가는 여유시간이 있었기에 중고교시절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전집들을 독파하곤 했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읽은 것은 읽었다고 말 할 수가 없구나 라고 느끼긴 하지만, 그 때의 경험이 최소한 '다시 읽기'라는 선택을 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 경험도 배경지식도 전무한 덩치만 큰 아기들을 앉혀놓고, 수능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현장의 교사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면서, 또 그럴수록 부단히 '읽기와 쓰기'에 대한 화두를 놓치지 말기를 당부해본다. 정부는 방과후 수업에 예산을 쓰지 말고 교사를 확충해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고, 교사의 수업외 잡무를 줄여 교사가 학생에게 할애할 시간을 확보함이 옳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맹이 2015-01-18 12:3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ㅎㅎ 특히 마지막 단락 옳소!! 읽고 싶지만 읽을 시간은 좀처럼 안 나는 현실.. 밤 새우는 것은 더욱 무리 흑! 참 카레니나!로 고치기. 북클럽 엄마들 중에도 요거 잘못 쓰고 헷갈려 하는 사람 많았어^^
 

스산한 금요일 저녁이 오고 있다. 여행가서 읽을 책을 골랐다. 책이 짐이 된다고 가져 가지 말라는 지청구를 들었지만, 여행지에서 책을 읽어야 비로소 여행 기분이 완성되는 걸 어떡하랴. 딱히 염두에 둔 책은 없었는데, 새로 들어 온 책 코너에 플레너리 오코너의 <좋은사람은 찾기 힘들다>가 보여서 빌려왔다. 단편집이라 끊어 읽기 좋겠다. 그리고 최하림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사랑도감> 씁쓸하고 향기로운 야생초의 유혹-이라는 부제를 보고 대충 훑어 봤더니 소제목들이 모두 내가 좋아하는 풀들이라 일단 빌려왔다.산문집인줄 알았더니 소설이다. 닭오줌넝쿨, 머위 꽃송이, 머위, 뱀밥, 달래와 갓, 민들레, 개갓냉이 속속이풀, 바위취와 물냉이, 고사리와 호장근 이런 제목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 시월과 오월을 좋아한다 여겼는데, 언젠가 부터 11월이 참 좋았고, 올 해는 12월이 더 좋다.  그런 12월이 훅 가고 있다. 단순하고 싶어서 약속을 부러 안 잡았다고 여겼는데 연락을 아주 끊지 않는 다음에야 완전히 홀로이긴 역시나 어려워, 사람들에 쏠려 책을 멀리한 12월이 되었다. 아쉽고 아깝다.

 

 

  

 

 

 

 

 

 

 

 

 

 

 

 

 

 

 

 

[불멸]이 두꺼운 책을 스스럼 없이 재밌다며 읽은 것은 11월에 읽은 삶은 다른 곳에와 웃음과 망각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삶은 다른 곳에는 작가적 관점에서 읽혔는데, 불멸은 완전히 작중 인물에 동화되는 느낌으로 읽어졌다. 불멸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뭔가 인생에 대해 그 이전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사유하게 된 기분이 들었다. 다이내믹한 시공간과 관계의 씨줄과 날줄을 얽어가며 풀어가며 읽는 그런 느낌들을 즐겼다. 두 번 세 번 읽어야지 싶은 밀란 쿤데라의 책들. 다시 읽으면 어떤 것이 읽힐지 무궁구진 궁금한 책이다.

[향수]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가 워낙 강렬한 책이라, 향수하면 무조건 쥐스킨트의 향수가 떠오른다. 그 향수가 아니다. 여러모로. 장편인데 단편처럼 읽힌 향수. 그저 그렇게 쉽게 읽힌다 싶었지만 떠남과 머묾 사이의 아슬한 줄타기 같은 삶, 쿤데라의 전기적인 부분과 연결해서 읽었을 때 더 와 닿아 사는 것이 아프게 여겨진 소설. 그래서 아픔을 달래준. 향수 조차 그리운 붙박이의 삶이면서도 향수라는 말 앞에서는 무너지는 삶도 있다.

 

[만남]쿤데라의 산문집. 전집에 있어서 빌려와 봤는데, 의외로 아주 재밌게 읽었다. 무덤덤한 하루키의 산문도 좋은데, 쿤데라의 산문도 좋았다. 모르는 인물과 모르는 사상 투성이었지만 그 모름을 알아가는 기분과 쿤데라식의 서술이 마음을 잡아 끄는 책. 지명인지 인물인지 모를 단어 찾느라 흐름은 끊겼지만, 나름 끊어가며 읽는게 또 산문집의 매력인지라.

 

몇 달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놓고도, 못 읽고 반납한 책. 우연히 군산 같이 간 친구가 커피집에서 이 책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좋다며 표정이 무너지길래 믿음을 가지고 읽기 시작. 산문집 치고 두꺼운 그립감이 특징.  너무 내 맘 같은 문장 들이 많아서 한 숨 쉬며 울어 가며 읽었다. 인생 뭐 별 거 있나, 가 한국식 극단적 허무주의 라는데 이 책 읽고 인생 뭐 별 거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자리에서 평생을 산 것 같은 느낌. 온돌방이 뜨거워 움찔 움찔 옮겨 앉으면서도 결국은 그 방을 못 뛰쳐 나온 게 내 인생 아니었나. 여기 아니면 없다. 지금 아니면 없다가 평소에 하던 말들인데,

가을과 겨울을 넘어 오면서 삶은 다른 곳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들어갈 방은 좀 덜 우는 곳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더불어 한다. 혼자서 커피집에 앉아 커피 두 잔 세 잔 계속 마시며 읽기 좋은 책이다. 물론 머리 맡에 두고 일 년 내내 아무 곳이나 펼쳐도 좋을 것이다.

 

 

단숨에 읽는 책은 아닌데 단숨에 읽었다. 헤르타 뮐러의 책을 더 읽고 싶다. 외국문학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들었지만 문장이 너무 자연스러워 번역가를 찾아 보니, 국문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번역을 공부한 분이더라. 모름지기 소설은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푹 빠져서 읽었다. 처절한 이야기인데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 되었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요소요소 마음을 관통하는 문장들이 나와서 쓰면서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마더 나이트는 몇 년 전에 읽었지만 숨그네를 읽는 동안 마더 나이트 생각이 많이 나서 덧 붙인다. 읽을 당시에는 뭔가 좀 지루하다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그 후로 두고 두고 장면들이 떠오른다. 삶의 순간 순간에 끼어 드는 책이다. 영화로도 나온 걸 이참에 알았다. 책으로만 읽었는데,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이상한 경험. 조만간 다시 읽을 책이다.

 

 

 

 

흔한 여행기려니 했다가 마음에 들어 온 책이다. 뮤지션으로서의

애환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청춘의 고뇌를 가볍게 풀어 놓은

읽을 만한 책이었다. 아기자기하고 재치있는 글솜씨도 맛깔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