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위 - 쓰기로 치면 인생 같은 머구
황사가 이는 날은 으실으실 추웠다. 누런 황사바람을 피해 이제 갓 부화한 병아리들이 한사코 어미닭 깃털 속으로 기어들었다. 그즈음이면 사람들도 그렇듯이(그즈음이란 그러니까 옛날로 치면 딱 보릿고개 시기 아닌가) 병아리들도 쪼아 먹을 것이라곤 흙먼지뿐이다. 그 중에 속없는 한 놈이 할랑할랑 굴러다니는 검불을 쫓아가다 때마침 불어오는 센 바람에 실 같은 다리가 휘청거린다.
문득 두려움에 휩싸인 병아리는 제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그제사 알고 뒤돌아서 종종종 뒤늦게 어미한테 달려오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마루에 책보를 벗어두아 앉아 골똘히 병아리들을 구경한다. 마음이 아슬아슬하다. 아무래도 병아리들이 너무 일찍 나온 것만 같아 찬바람 부는 날이 왠지 모르게 두렵다. 그래도 그런 두려움이라도 있어 덜 심심하다. 추위에 떠는 병아리들 보며 마음 졸이느라 배고픈 것을 깜빡 잊었다.
올 해도 어김 없이 머구가 났다.
집 안엔 아무도 없다. 집은 늘 그렇게 빈집이었다. 나만 배고픈 게 아니라 집도 배고픈 것만 같다. 집도 배고프고 병아리도 배고프고, 강아지도 돼지도 송아지도 나도 배고프기만 한 초봄의 오후다. 부엌문을 연다. 삐거덕, 하는 부엌문 소리도 허기지다. 밥은 양푼에 담겨서 솥 안에 걸쳐진 주걱 위에 올려져 있다.보리와 조가 섞인 밥은 거뭇거뭇하다. 밥을 퍼서 부뚜막에 놓고 찬장 문을 연다. 시큼한 군내가 코를 찌른다. 묵은지 투가리 혹은 검은 간장에 담긴 고추 장아찌 종지가 밥사발 옆에 놓인다. 젓가락도 필요 없다. 숟가락으로 밥을 퍼넣고 나서 손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는다.
설거지 함지박에 그릇을 담가놓고 나왔는데 병아리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병아리 찾는다는 명분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돌기 시작한다. 일없이,그야말로 매급시 작대가 하나 주워들고 삐약이를 찾아 헤맨다. 날씨도 춥고 안 좋은데, 그놈의 병아리들은 안마당에서만 놀고 있을 일이지 뭐한다고 자꾸 없어져서는 나를 헤매 다니게 했더란 말인가, 그래서는 암것도 안허고 처놀었다고 저녁답의 꾸중은 도맡아서 듣게 했더란 말인가. 그래서는 눈물 콧물 범벅 저녁밥을 먹게 했더란 말인가, 그놈의 햇병아리들은 내가 병아리들을 찾아 헤매 돈 코스는 이렇다. 맨 먼저, 뒤꼍, 뒤꼍 대나무밭, 그렇잖아도 추운 날, 대나무밭 안에 서 있으면 온몸이 싸늘해져온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싸늘해지면 나는 그제서야 대나무밭에서 튀어나온다. 대나무밭을 나와 뒤꼍 담장 가를 빙 한 바퀴 돈다. 작대기로 샅샅이 뒤진다. 앞마당으로 돌아나와 헛간의 거름 무더기를 탕탕 한 번 때려보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발길을 돌려 집 옆 텃밭에 이른다. 텃밭에 병아리는 없다. 나는 그쯤에서 병아리 같은 건 잠시 잊고서 작대기로 검불을 휘젓는다. 검불 밑에서 뾰족뾰족, 그 또한 영락 없이 병아리 부리같이 생긴 마늘 촉이 올라오고 있다. 여기서 뾰로옹,저기서 뾰로롱, 나도 모르게 솟아나와 있는 마늘 촉이 신기해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검불들을 막대기 하나로 걷어내는 대작업을 하고 있다. 다 걷어내놓고는 휙 한 번 돌아본다. 싸늘한 바람에 마늘 촉들이 파르르 떤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일껏 걷어 낸 검불들을 다시 덮는다. 지나던 동네 사람이 울타리 너머로 들여다보며 기어코 한마디 한다.
"아가. 일하니라고 겁나게 애쓴다잉?"
병아리들은 바로 그 울타리 밑에 있다. 어미닭이 헤집듯이 파놓은 조그만 구덩이에 병아리들은 살포시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한창 돋아나고 있는 것은 머위다. 한 겹 막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뽀얀 머위가 흙먼지 잔뜩 뒤집어쓰고 쫙 깔려 있다. 나는 작대기를 짚은 채 한 걸음 떨어져서 뽀얀 머위를 감상한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딱 넘어간다. 아,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집에 '머구'가 났다!
단 것만 맛있는 게 아니라 쓴 것도 맛있다는 걸 알려준
우리는 머위를 머구라 했다. 머구 새잎은 데쳐서 된장에 무쳐 먹고, 나중에 키가 커서 머굿대가 되면 잎은 버리고 대를 살짝 데쳐서 껍질을 볶아 먹거나, 무쳐 먹거나 여름에 '구탕'을 끓일 때 건더기로 넣어 먹는다. 어린 잎을 먹을 때는 봄이고 머굿대를 먹을 때는 여름이다. 고사리가 나오기 전에 먹는 취나물이 가장 먹을 만하듯이, 머위 잎은 취나물이 나오기 직전까지가 가장 알맞게 보드랍고 알맛게 쓰다. 맛있게 보드랍고 맛있게 쓰다. 머위잎이 가장 맛있을 때는, 그러니까 그 쓴맛의 농도가 가장 적당할 때다. 너무 어린 잎은 아직 쓴맛이 덜 나 맛이 없고 너무 센 잎은 모드랍지가 않아 맛이 없다. 세상에는 단것만 맛있는 게 아니고 쓴 것도 맛있다는 걸 제대로, 어쩌면 처음으로 가르쳐준 머구.
가만히 있는데도 차를 탔을 때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입에 건침이 고일 때, 말하자면 뱃속에서 거시가 동할 때, 가장 생각나는 것도 쓰디쓴 머구잎 무침이다. 그것 한 젓가락이면 빈속에서 저도 살겠다고 요동치건 거시도 잠잠해진다. 그래서 나는, 우리 동리의 아이들은 머구의 고마움을 알고 있다. 쓴맛이 정말로 맛있어서가 아니고 쓴맛 나는 그 나물이 고마워서 그 나물이 맛있다고 해주다 보니 정말 맛있어졌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입에서 쓴 내가 자꾸 넘어오는 세상도 그럭저럭, 좋다좋다 하고서 살아가다 보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인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이 다 머구를 먹고 컸기 때문이 아닌가. 쓴것으로 치면 인생 같은 그 머구를.
인생을 쓴맛을 달랠 수 있는 머구
황사바람을 타고 온 비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세상은 말개진다. 먼 산에 오리나무 둘레를 연두색 기운이 둘러쌀 때쯤, 밭둑가에 산수유나무가 꿈속에 본 듯한 노랑 물에 물들 때쯤, 어디선가 버들개지 풀피리 소리가 들려올 때쯤, 시냇물이 조약돌 위를 구르는 소리가 천지사방에 꽉 찰 때쯤, 머구는 허연 흙먼지 같은 겹을 한 풀 벗고 파랗게, 파랗게 탱자나무 울타리 가에, 자두나무 밑 그늘에, 대나무밭 오르는 둔덕에서 나풀거린다. 손짓하듯 팔랑거린다. 엄마는 산밭에 돈부씨를 넣으러 오가며 머구를 뜯어오고, 우리는 이제 병아에서 곧 '달구새끼'가 되는 것들 뒤를 쫓다가 문득 생각난 듯 머구를 뜯어가지고 집에 온다. 집 밖을 한 번씩 드나들 때마다 엄마가 뜯어 온 머구와, 문득 생각날 때마다 우리가 뜯어온 머구가 합쳐져 그날 밤 머구나물이 밥상에 오른다.
머구는 된장에 무쳐야 쓴 내를 감출 수 있다. 우리는 머구의 쓴 내를 된장의 짜고 구수한 맛으로 얼른 감싸서는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켜버린다. 게 눈 감추듯 삼켜 버려야지 그것을 꼭꼭 씹을 일은 아니다. 꼭꼭 씹으면 쓰다기보다 비릿한 풋내 때문에 부르르 진저리쳐지기 십상일 터이므로. 인생사 버거울 때 우리는 그래서 목구멍을 치받고 올라오는 체기 같은 울음도 '얼릉얼릉' '꿀꺽꿀꺽' 삼켜버릴 줄 알게 되었다. 된장에 무친 머구 삼키듯이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쓴 내보다 더 비릿한 인생의 풋내 때문에 몸을 떨어야 할 일이 오게 되고야 말 것을 알기 때문에.
머구를 안 먹고 큰 사람들은 그것을 할 줄 몰라 얼마나 힘들까. 얼릉얼릉, 꿀꺽꿀꺽 인생의 쓴내, 인생의 풋내를 삼킬 줄 몰라 그 얼마나들 몸을 떨어야 할까. 머구를 안 먹고 큰 사람들은 다들 그것을 어찌 다 감당하고 살아가나. 머구 안 먹고 커놓고도 잘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럼 뭘까. 그 사람들은 머구보다 더 쓴것을 먹고 컸나. 참 신기하기도 하다. 세상에, 머구보다 쓴게 어디 있다고.
인생이 쓸 때 머구가 생각난다. 인생의 쓴맛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오직 머구뿐이니, 나는 이제 도회의 시장으로 머구를 사러 간다. 그러나 도회의 시장에 머굿잎은 없다. 여름이 올 무렵, 이따금 껍질 벗겨져 물에 담겨 있는 머굿대를 발견해도 그것은 이미 쓴 내가 다 빠진 그저 풀대이기가 십상이다. 쓴물 빠진 머구는 내게 단물 빠진 껌이나 한가지다. 당신의 꿈은 달콤한 인생인가? 머구의 꿈은 쓴맛이다. 입맛 쓰디쓴 세상, 창창한 머구가 한정 없이 그립다.
P136~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