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란 철학적 모순에 빠진 문제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철학 역시 세계를 해석하거나 변혁한다기보다는 겉으로는 건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처음부터 안에서 곪아 곧 치명적이 될 종양을 발견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일종의 ‘치료의 철학’이라 볼 수 있다. 비록 후기 데리다의 모습에 이 이상의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사회적 발언은 분명 텍스트 분석에서 보여준 모습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 발언 자체를 놓고 볼 때는 지나치게 상식적인지라, 그것을 둘러싼 현란한 수사를 제거하면 평범한(물론, 논리적 복잡함은 존재하지만) 그리고 당연한 원리적인 주의주장으로 요약되고 만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 왜냐면 영향력 있는(행동을 추동시킬 수 있는) 사회적 발언이란 모순을 끝없이 피해가는 논리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감수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ꡔ법의 힘ꡕ은 환(幻)의 저서로 이야기되어 왔다. 나도 그에 대한 글을 여러 곳에서 읽었고, 작년 우연한 기회에 그 책을 읽게 되었다. 그때의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제 1부를 읽을 동안은 실망 반, 기대 반이었다. 실망 반이라는 것은 그의 사유의 힘이 생각보다 난삽하고 평범하다는 이유에서였고, 기대 반이라는 이유는 이것이 1부, 즉 맛보기(맛보기는 대개 싱겁기 마련이다)이기 때문에, 2부에서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부는 나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해 버렸다. 2부를 읽으면서 내가 얻은 것은 벤야민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는 정도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ꡔ법의 힘ꡕ의 역자인 진태원도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ꡔ마르크스의 유령들ꡕ이나 ꡔ우정의 정치들ꡕ 같은 저작들과 내용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저서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또는 전에 외국어 판본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량도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살펴봐도 이 책이 왜 그렇게 높게 평가되고 많이 논의되는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는 이 책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어온 독자들로서는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04쪽)
이런 노파심의 표현은 역자 자신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역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이 중요한 저작인 이유로 몇 가지를 든다. 예를 들어 이 책이 발간된 시기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된 것은 물론, 하이데거와 나치즘이 문제되던 때였기 때문에, 데리다는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알리바이는 증명해 줄지 모르지만, 정작 ꡔ법의 힘ꡕ이라는 책이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또 역자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철학적 전회’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데리다 자신은 이러한 전회 자체를 부정해 왔다. 다시 말해, 데리다는 자신의 철학은 초기부터 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문제를 건드려 보기로 하자. 우선 데리다는 이 글에서 자신이 외국어(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데에서, 어떤 철학적 문제(타자의 문제)를 자꾸 상기시키는데, 이는 타자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는 데에서 어떤 유리한 입지점 위에 서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아 비위에 거슬렸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그가 당연시 여기는 모국어/외국어도 탈구축되어야 한다. 오늘날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구분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명한 것이 아니다. 외국어는 모국어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것은 발화행위에서 생기는 사고와 표현의 간극의 정도를 어느 정도 감지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한데 사고와 표현은 모국어로 발언될 때에도 항상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모국어를 말할 때에도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 사람이 영어로 말한다고 해서, 영어가 외국어는 아닌 것이다. 프랑스 철학교수가 프랑스 초등학생에서 헤겔에 대해 강의한다고 할 때, 초등학생에서 프랑스 철학교수의 말은 외국어인 셈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외국어는 지역적(민족적)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문제이다.
이상 신화화의 갈림길에서 최재서와 대립했던 김문집은 일어로 쓰고 일본에서 출판된 소설집 한 권을 남기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귀국에 비평을 했던 것은 모국어로 소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모국어가 도리어 외국어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국어/외국어의 문제는 타자의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들 대부분은 바로 이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들은 모국어로 소설이나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외국어(일어)로 사유하고 쓴 글을 모국어(한국어)로 번역했던 것이다. 번역은 ‘외국어에서 모국어로’라는 정식 이상의 문제를 유발시킨다. 이 문제는 거꾸로 세운다(모국어에서 외국어로)고 해도 마찬가지다.
제 1부 타이틀은 ‘법/권리에서 정의로’라고도,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상 후자가 보다 정확하다. 왜냐면 데리다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정의’ 자체라기보다는(만약 그렇다면 책 제목을 ꡔ정의의 힘ꡕ으로 했을 것이다),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법이 계산-가능한 적용에만 힘을 쏟는 일반성이라면, 정의는 이와 같은 일반성을 이탈하는 과잉성, 예측불가능성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정의가 정의이기 위해서는 항상 ‘결단’을 필요로 하며 이것은 법으로서만 나탈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3가지 아포리아로 정리하고 있다. 1) 정의는 법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탈구축(해체)는 결정불가능한 것에 의지하여 결정하는 것이지만, 그 불가능한 것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탈구축은 적극적으로 행동함과 동시에 그것이 마치 타자로부터 도래하는 것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3) 결단이라는 사건은 타자에 대한 무한책임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바로 여기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데리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착한다. 탈구축은 정의다.
우리가 위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데리다는 계산가능성에 근거한 법을 비판하면서 정의를 우위에 놓지만, 그렇다고 그가 법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우린 그가 말하는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되물을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대해 그는 ‘법의 중지’라고 말할 것이다.
이 순간은, 이것이 없다면 사실은 어떤 해체도 가능하지 않을 정지의 순간이며, 판단중지의 순간이다. 이는 그저 하나의 순간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모든 책임의 실행이 독단적인 잠에 빠져들지 않고, 따라서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순간의 가능성은 모든 책임의 실행에 구조적으로 현전해 있어야 한다. 이때부터 이 순간은 스스로를 초과하게 된다. 이는 더욱더 고뇌를 겪게 된다. 하지만 누가 감히 고뇌를 생략한 채 정의롭게 되고자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고뇌에 찬 정지의 순간은 또한 법적-정치적 변혁들, 심지어는 혁명들이 발생하는 공간-내기의 간격을 열어놓는 것이기도 한다. (44-45쪽)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는 어떤 이념적 지향점에 기초하여 행해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법적 결단의 순간에 행해지는 ‘고뇌’(계산-가능한 법과의 내적 갈등)를 통해 새로운 법을 구성해내는(계산가능성을 파괴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그는 법을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 밑에서 동물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계산-가능한 법은 바로 이와 같은 동물의 희생(배제)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와 같이 배제된 동물, 즉 타자와 대면함으로 고뇌하고, 넘어서 그것들을 딛고 서있는 계산-가능한 법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드는 ‘결단’이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주장이다. 한데, 데리다의 법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 아쉽게도 그렇다. 그는 이 이상은 나가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 책을 단순히 서론으로만 작성을 했다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주장들이다. 그것은 그의 주장이 대단하고 새롭다기보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 아닐까? 또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가 이야기하는 법과 정의에 대한 논의는 유치원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우선, 그는 ‘법 = 계산-가능한 법’이라는 공식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러한 법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또 법은 ‘결단’을 문제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이고, ‘고뇌’의 문제라기보다는 ‘받아들임’의 문제이다. 데리다는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자꾸 어떤 ‘결단’과 ‘고뇌’ 쪽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데, 이것은 정의의 문제를 재판관의 입장에 놓기 때문이다. 한데, 진정 정의의 문제는 ‘재판을 받는 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닐까? 법을 둘러싼 정의가 문제될 때 문제의 핵심은 어떤 고뇌어린 영웅적 재판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재판관 앞에선 이들의 법에 대한 해석과 수용에 있다. 바로 이점에서 데리다는 카프카와 정반대의 놓인다.
데리다는 항상 타자에 대해 타자가 아닌 자의 행위를 촉구하는데, 다시 말해 주체로서의 인간인 우리가 동물에 대해 고뇌하고 ‘결단’을 내리길 촉구하는데, 그것은 똑같이 법을 둘러싼 희생의 문제를 삼고 있으면서도, 지라르와 정반대로 갈라지는 이유다. 데리다의 또 다른 개념어인 ‘환대’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환대를 하는 자이지, 환대를 받는 자가 아니다. 환대를 받는 자는 동물처럼 ‘행위’의 기회가 완전히 박탈되어 있다. 지라르가 ꡔ폭력과 성스러움ꡕ에서 ꡔ희생양ꡕ, ꡔ욥ꡕ 그리고 최근의 ꡔ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ꡕ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도 법에 의한 희생이다. 그러나 그는 법을, 그리고 정의를 희생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에게 ‘고뇌’나 ‘결단’은 법이나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즉 진정한 ‘정의’의 문제는 희생자의 입장에서, 동물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빌라도가 아니라 예수인 것이다.
지라르의 니체 비판은 이와 정확히 연결된다. 니체는 희생양(노예)에 대한 근심이야말로 영웅적 ‘결단’(법을 바꾸는)을 방해하고 서구문화의 퇴폐를 촉진시키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에 의해 개인은 아주 대단하게 취급되고 하나의 절대인 양 제시되어왔다. 그 결과 사람은 더 이상 ‘희생’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인류는 인간의 희생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다. 진정한 박애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희생을 요구한다. 이 박애는 인류가 스스로에 의해 지배받기를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라고 이름 붙은 이 가짜 인류는 ‘아무도 희생되어도 안 된다’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니체, <니체전집>(유고편), ꡔ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ꡕ, 김진식 옮김, 문학과 지성사, 218쪽에서 재인용. 참고로 위 구절이 들어있는 유고집이 최근 책세상 니체전집 중 한 권으로 번역되었는데, 참고하지 못해 재인용한다. 강조는 인용자)
20세기 후반의 니체주의가 이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게 대세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루카치의 ꡔ이성의 파괴ꡕ와 같은 저작에 대해 소홀하게 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변증법이란 노예의 논리이고, 노예적인 감정(원한)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 이것들을 인정한다면, 자랑스럽게 니체주의자임을 공언한다면, 김영하의 소설이야말로 초인의 소설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의 소설에서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원한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의 형태를 취한 ꡔ검은꽃ꡕ에서 인정투쟁 따위는 조롱당하고, 역사는 핀볼 게임기로 변하고 있다. 지라르는 바로 이러한 니체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나치에 대해 적대적이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허무적이고 니체에 의존해 있는 2차 세계대전 이래의 모든 새로운 지적 흐름들은 그들이 선호하는 이 사상가가 나치의 모험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궤변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하지만 나치의 극악무도함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글의 저자는 여전히 니체다. 나치 운동의 정신적 핵심이 있다면 그것을 표현한 사람이 바로 니체다. (위의 책 220쪽)
그럼 왜 오늘날의 니체연구가들은 니체를 나치즘과 연관지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일까? 혹 이야기했더라도 힘을 얻지 못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지라르의 답변은 거기에 ‘하이데거의 금지’가 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니체연구 거의 전부가 하이데거 해석(금지)을 경유한 연구라는 말이다. 그럼 프랑스의 하이데거인 데리다는 이로부터 과연 자유로울까? 물론, 데리다는 한 일본인의 질문(니체가 나치를 위해 직접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치에 의해 오용될만한 여지를 주었다면, 나치의 범죄에 대해 니체 텍스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결단’의 부족이나 ‘환대’의 부족의 문제로 보았다면, 그 역시 지라르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법에 있어 진정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이 방대한 물음에 대해 여기서 답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예컨대 그것은 ‘계산-불가능성’을 받아들여 어떤 ‘결단’에 이르는 것이라기보다는 , 역설적으로 법의 ‘계산-가능성’을 최대한 잘 지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법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왜곡에 있으며, 그것을 잘 지키지 않고 섣불리 ‘자기기만적으로’ 행해지는 ‘결단’에 있는 게 아닐까? 법은 그 자체로 충분히 해석과잉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고뇌’의 문제이기 이전에 ‘해석’의 문제이자, 해석을 둘러싼 공동투쟁의 문제이다. 데리다는 법을 해체하기 위해 ‘법’을 ‘계산-가능한 제도’ 정도로 너무 단순하게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법의 내용과 형식에는 눈을 감는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법이 바로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이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또는 무시하고), 법을 거대한 전자계산기 정도로 여긴다. 그는 환자를 배를 가르지 않고 치료하길 원하는, 요컨대 ‘결단’을 통한 배치변경을 통해 치료하길 원하는 한의사와 같다.
그는 이 책 여러 군데에서 프랑스인인 그가 미국 법률학자 앞에서 영어를 구사할 때 가지는 ‘외국어에 대한 감각’(타자의 언어)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사실 영어가 능숙한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엄살이다. 19세기 러시아 귀족이 일상생활에서 프랑스어를 말하면서, 프랑스어를 말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엄살처럼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제는 그 반대며 이상이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때 느꼈을 고통이야말로 진정한 외국어(타자의 언어) 감각이다. 나는 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법에 대한 문제는 언어이며, 정의의 문제는 바로 그 외국어인 ‘법’을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이 ‘정신적 고뇌’나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외국어와 모국어를 잇기)’과 ‘고통의 감수(외국어와 모국어 사이에 발생하는 이질감을 포용하기)’인 것처럼 정의도 그와 같은 것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 그것은 법(외국어)에 의해 내팽개쳐지면서도 끊임없이 모국어(타자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과정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한 ‘치료가 치료를 막는 사례’(ꡔ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ꡕ, 이덕하 옮김, 도서출판 b, 320쪽)가 되지 않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철학은 모순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번역’하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4. 12.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