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라는 말에 잔뜩 묻어나오는 것은 정겨움...따스함... 그리움... 그런 것일게다. 그런데 난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 두분이 모두 돌아가신 상태였기에 할머니에 대한 막연한 감정을 갖고 살았었다.
결혼을 하니 시댁에는 시골에 아직도 할머니께서 살아계셨다. 이야기 속에서나 텔레비젼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시할머니를 상상했다. 하얀 머리에 조그마한 체구, 바지런하시고 정갈하신 모습, 손주며느리가 이뻐서 주섬주섬 밤이며 곶감같은 것을 챙겨주시는 그런 할머니.
그런데 이게 왠일... 명절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시골에 내려갔다 -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께서는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하시고 할아버지만 올라오셨었다. 할아버지는 정말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 정겨운 우리네의 바로 그 할아버지셨다. 그러기에 난 할머니에 대해서도 추호의 의심의 여지없이 달뜬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내려갔다. 그런데....허걱!
할머니의 첫인상은 너무너무 무섭다였다. 크지 않은 키에 실이 찌신데다가 목소리도 이상하시고 눈이 어딘가 불편하신지 약간 사팔뜨기처럼 보여 정말 엄마야...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할머니라고 하면 자신보다는 자손들 챙기시느라 늘 마음이 분주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할머니는 자식들이고 손주고 안중에 없으시고 그저 당신이 최고..셨다. 내가 낳은 아이가 당신의 증손자이신데도 이뻐라...이리 와봐라...뭐 그런 말씀 하나 없으시고 애가 점점 자라면서 시골집을 천방지축 뛰어나니자 정신없다고..애가 왜 저런대니? 자꾸 이런 말씀만 하시는 것이다. 뭐..내 애들한테만 그런게 아니라 당신의 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셨다고 시어머니께서는 원래 그러니 이해하라고 하셨지만.
시골에 가는게 점점 고역이 되었다. 7형제 중 둘째네의 며느리인지라 작은 어머니들도 많이 계셔서 시골에 내려가면 딱히 할일도 없고 어디서 무얼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다가 노상 내 아이들이 정신없다고 구박(?)하시는 할머니께 정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다가 시아버지는 왜그리 뭔가 내세우길 좋아하시는지.
시골에 내려갈 적마다 나한테 뭔가 따로 음식을 장만하라고 준비를 시키셨다. 시어머니는 가게를 하셔서 못내려가실 때가 많아 며느리인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말이다.아니, 솔직한 말로 작은어머니들도 안해오시는데 왜 손주며느리인 내가 해가야 한단 말인지... 더구나 왜 그런 걸 남자가 일일히 챙기고 살피려 드는지...꼼꼼한 시아버지는 내 숨통이 턱턱 막히게 할 때도 참 많다.
하여간..그랬던 분이 돌아가셨다. 그것도 양치기 소년마냥 위독! 위중! 준비하라! 이런 말을 들으며 넉달을 보내셨는데 이번엔 진짜였다. 하긴..결혼해서부터 할머니는 늘 올해를 넘기실 수 있을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오래 사시긴 오래 사셨다고 할 수 있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심으로 해서 그 긴긴세월을 오로지 할머니 병수발을 하시느라 보내신 할아버지께서도 이제 당신만의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 시골에 갔다가 올라올 때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릴 때마다 눈물이 났다. 당신의 그 허허로운 삶이 너무 안스럽고 그 골진 얼굴이 너무나 풍상스러워서 말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또 말씀하시길 "저 양반, 할머니 돌아가시면 바로 따라가실 거야. 그동안 지탱해온 건 할머니를 누가 돌보나 그것 때문이었는데 할머니 가시면 저 양반도 중심을 잃어서 바로 가실거야"라고 하신다.
여러가지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