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3

*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4

* “마립간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2,3’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

 우선 ‘드팀전’님께 감정적 상처를 주지 않게 된 것은 저에도 다행입니다. 이성적인 상처?(견해 차이가 더 적절한 단어 같군요.)가 한 두 번의 의견 교환으로 해소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드팀전을 설득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드팀전님을 비롯한 다른 알라디너가 저의 잘못을 지적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지적 유희입니다. 저의 가친관은 보다 상위의 것으로 보다 완벽에 가깝기를 바랍니다. 이미 저의 취향이란 것도 있더 독서도 편식을 합니다. 저의 사고의 오류와 허점을 교정하고 채우기를 바랄 뿐입니다.

긴 대화를 마치겠다는 뜻이 ‘이 정도로 의견 교환이 충분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 편지에 대해서 드팀전은 답글을 안 주셔도 됩니다. 그러나 저의 서재를 방문하시는 분이 드팀전만은 아니니, 보수와 PD 사이의 회색인의 입장에 선 저의 입장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답글을 하던 중에 나머지에 관하여 간단하게 답을 하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별로 안 좋아 합니다. 1년에 한 두 편을 보고, 그것도 결혼 전 여자와 선본 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영화는 1970년대 TV의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 방영했던 것을 좋아합니다. 몇 편의 영화는 찾아서 봅니다. ‘아이다호’ 같은 영화는 10년 넘게 벼르다가 보았고, 이미숙의 ‘뽕’도 그랬습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도 꼭 보고 말 것입니다. 어쩌다 보는 영화이지만 인상 깊게 남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소피의 선택 Sophie's Choice’, ‘크루서블 Crucible’, ‘내겐 너무나 이쁜 당신 trop belle pour toi’, ‘The penalty phase’, ‘케이프 피어 Cape fear’ 등이 해당합니다. (몇편의 영화가 더 있습니다.) ‘둠스데이’ 결혼 후 아내와 어쩌다가 보게 되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한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준의 영화이지만 도입부의 여의사 인터뷰는 윤리적 주제이므로 인상에 남았습니다. 드팀전님이 몇 영화를 추천해 주시니 볼 영화가 늘었습니다. TV 없이 산지 20년에, 아직도 TV가 없어 볼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영화가 실제고 가능하냐는 저의 관심사가 아니고 오히려 주제에 관해 관심이 많습니다. 사회에서는 예술의 ‘사실주의’와 ‘표현주의’의 논쟁이 있는데, 영화 내용에 따라 입장차가 서로 바뀌더군요. (참조 왜곡된 사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781759) ‘슬라보예 지젝’의 책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도 읽었지만 새로운 분야는 한번 읽어 머리 속에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라딘에 남아 있는 이유가 처음 올 때의 마음, 모르는 분야에 대한 소개와 그에 대한 책의 안내입니다. 추천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자연과학의 용어보다는 인문, 사회과학에 대한 용어의 엄밀성일 떨어집니다. 아는 것, 그 방면의 독서의 부족 때문입니다. 저의 보수와 PD의 회색인 입장에 대해 설명하는 페이퍼를 올리고 싶었지만 PD에 관해 파편적인 지식을 갖고 언급하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군대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집단 정신의 진화>라는 책을 읽은 뒤입니다. 모병제를 하면 비폭력 성향의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고 폭력적, 권위적인 사람만 군대에 가며. 이는 군대의 부정적인 면을 강화시킨다고 합니다. 군대 가기 싫어하는 사람을 군대에 보내는 것은 군대가 썩지 않게 소금 역할을 합니다. 여성의 군 징집은 그 소금의 역할이 더욱 커진다고 합니다. (실제는 모르겠고 이 책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 이것도 진화의 압력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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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

*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3

*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의 댓글에 대한

 
첫 번째 댓글의 ‘과학과 신학’이나 ‘의사와 독재자’의 극단적인 비유가 논의를 과학적 논의를 유지 못하고 감정적이게끔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에피소드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여럿의 자녀에게 동일하냐는 논의를 하였습니다. 사랑이 동일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 친구에 다음과 같은 상황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 어머니와 아들, 딸이 있는데 어떤 나쁜 놈들이 아들과 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다른 하나는 죽이겠다고 한다. 선택을 못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한다. 이럴 경우 조금 더 사랑하는 자녀를 살리고 덜 사랑하는 자녀를 죽이지 않겠느냐.

 
친구는 이 비유를 듣자마자 흥분해 하며 그런 경우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으며 그 비유를 만들어 낸 제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성적 토의 중단되었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친구와 어이없어 하는 저는 그 자리를 파했습니다.
 
위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소피의 선택>이라는 소설 또는 영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상황을 극단적인 경우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위 경우도 그 한 경우가 되겠지요.) 물질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 절대 온도 0K에 접근하기도 하고 우주를 연구하기 위해 실감할 수 없는 수십억 광년의 은하계나 100억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이는 시간, 우주, 물질의 본질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극단의 상황에서 새로운 이론이 나오거나 본질에 관한 힌트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marine님의 <인간은 왜 늙는가>의 서평 ‘노화에 대한 상식적인 이야기’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09537183/1754734)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저자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선을 지켰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와 비과학자의 차이일 것이다.
과학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지키는 것이 바로 엄격한 회의주의임을 새삼 확인한 기분이 든다.

 
(일단 제가 느끼기에 드팀전님의 불편하게 생각하신) 의사와 독재자의 비유는 윤리의 본질에 대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의사의 가족이 독재자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거나 앞에 총부리가 있다고 해서 질문의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의사의 선택에는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윤리적 객관적인 기준이 있느냐 아니면 상황 윤리로 끝나는 것이냐’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진정 반대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도 질문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비유 ‘자본과 이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는 드팀전님이 주장한 것이 아니고 저의 질문입니다. 드팀전님이 ‘하지 말라’라고 답하시면 일차적 윤리적 물음은 종료됩니다. (2차적 질문이 생태근본주의 및 과학포기에 관한 질문이 될 수 있으나 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질문입니다.) 드팀전님이 ‘할 수 있다’고 답하시면, 저는 다시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영향이 10%면 만족할 만한 독립인가, 아니면 1%면 만족할 독립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에 관한 질문이 아니고 윤리 본질에 관한 의문과 회의를 던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는 0.001%로부터 99.999%까지 극단으로 몰 수 있습니다. % 정해진다면 정해진 근거를 묻겠지요.

 
영화 <둠스데이; 지구의 최후의 날>의 시작은 여의사 한 분이 바이러스를 통해 암이 정복되었다는 뉴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어 인류를 망하게 합니다. 영화에서의 여의사는 선의善意를 갖고 연구를 했겠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똑 같은 윤리적 의문을 갖게 합니다.

 
다시 한번 ‘드팀전’님에게 감정적 상처를 줄까 조심스럽지만, 의사와 독재자 환자의 이야기는 ‘초월성에 대한 반감입니다./그가 진정 반대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부르주아-테크노라트’의 글로 보아 치료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 페이퍼 ‘과학과 신학’의 비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의 페이퍼가 ‘드팀전’님의 감성을 상하게 했다면 다시 한 번 사과를 들이며, ‘사과하는 사람이 이런 글을 다시 쓰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지만 오해는 풀어야겠기에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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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5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20 19:04 
    *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5 * ‘마립간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2,3’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 - 보수와 PD사이의 회색인  앞 편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유에 대한 생각은 꾸준히 독서를 통해 보충하고 있지만 PD를 포함한 NL, CA 등은 아는 정도가 인터넷상에 떠있는 A4용지 한 장 분량도 안 될 만큼의 지식이라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우연치 않게 ‘드팀전’님과 대화에서 공개하게 되
  2.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4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20 19:05 
    *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4 * “마립간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2,3’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  우선 ‘드팀전’님께 감정적 상처를 주지 않게 된 것은 저에도 다행입니다. 이성적인 상처?(견해 차이가 더 적절한 단어 같군요.)가 한 두 번의 의견 교환으로 해소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드팀전을 설득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드팀전님을 비롯한 다른 알라디너가 저의 잘못을 지적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지
 
 
드팀전 2008-12-20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슬라보예 지젝과 한번 만나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영화적 질문에 '폭력의 소거점'을 없애는 방식으로 해방을 기획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우생학적으로 떨어진다.자린고비다.너희들의 딸과 손녀들을 강간한다...나치는 그런 주장을 하고 그것에 대한 통계적 자료를 만들어냅니다. 지젝이 뛰어난 지점은 그 질문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방식은 무엇이냐하면 '과연 유태인은 우생학적으로 떨어지는가? 정말 자린고비인가? 강간을 즐기는가?' 를 입증하려고 찾아 다니는겁니다. (마립간님의 그간의 입장으로 보자면 과학은 그걸 찾아야된다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 유태인의 본질을 알기위해..^^ ) 지젝은 '서사할 권리'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그런 상황에서 과학이 한다는 것이 결국 그런 '서사할 권리'라는 것이겠지요.) 반유대주의에 대한 가장 옳바른 답은 그 질문 자체를 거부하는 겁니다.(행여 과학적으로 가장 올바른 답이 '유태인은 인종적으로 떨어지는 것인가를 통계적으로 찾아서 그렇다 아니다.'를 밝히는 거라면 부디 좋은 성과가 있었으면 하구요.)

영화와 소설의 예를 몇 가지 드셨으니..^^
도르프만의 희곡<여인들>에서는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군부에 자기와 손자를 희생시키는 방식을 택합니다.지키고자 하는 다른 신념때문이지요.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주인공의 부인은 동전 던지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질문 자체를 소거시킵니다. 영화<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은 '자기 구타'라는 형식으로 권력이 작용하는 지점에서 해방을 기획합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서 주인공중 하나는 마지막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알약을 타인에게 주고 자신은 불구덩이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모두 그냥 그런 문제가 아니라 마립간님이 말한 '윤리적인 주체'의 문제입니다. 윤리적 선택을 하는 겁니다. 대신 마립간님의 말처럼 주어진 것 중에서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것이 낯서실 수는 있겠지요.

이것 말고도 '주체의 자기희생'이라는 비합리적 선택의 예는 영화나 소설에 수두룩할겝니다. 이 모든 것에 과학적 통계를 제시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런건 영화니까 가능해'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영화의 예를 드시건 마립간님이니까요.

감정을 상하지는 않았구요.그 정도에 감정 상하면 실험실 바깥에서는 살아가기 힘듭니다. 제 주변의 상대들은 마립간님처럼 예의바르지도,젠틀하지도,자상하지도 않습니다.

^^ 보수주의자와 PD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네요.과거PD였다가 지금은 보수주의라는 거면 이해가 됩니다. 뉴라이트에는 많으니까.그런데 친척분의 질문은 최근 몇 년사이의 일인듯한데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지지하면서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까? 과학을 주장하시면서 자연과학 이외의 개념들에 대해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마립간님과의 대화가 재미는 있었지만...마립간님의 과학적 본질주의에의 추구와 제가 가는 세속의 길은 다른 듯 합니다. 그 정도 확인으로 긴 대화를 마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

* 드팀전님께 드리는 답신2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의 댓글에 대한

 
우선 다시 한 번 저의 글이 드팀전님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 먼저 드립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 탈정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비유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페이퍼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드팀전님께서 ‘탈정치’를 유인하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의 의도는 아닙니다. (결과적인 페이퍼 내용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의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저의 손위 동서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동서는 NL 이야 PD야?” 정치 이야기를 하던 중도 아니고 갑자기 물었습니다. 의아했지만 저는 바로 “PD입니다.” 형님께서는 “동서는 대답이 바로 나오네.”하셨습니다. (아마 1초나 걸렸을까?) 그렇게 할 수 있던 것은 평소에 그것에 관하여 여러 번 심사숙고했기 때문입니다.

 
투표권을 갖은 이후 2번 정도 투표를 못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학생 시절, 지방에 있을 때 등), 그 외 나머지는 투표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투표를 위해 새벽 6시에 나가기도 하고 지난 투표는 직장에서 업무를 보던 중 점심시간에 식사를 거르고 투표를 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악착같이 투표한 이유는 2류 유권자가 3류 정치를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야 당연한 참정권이지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정치에 대해 시니컬하지만 탈정치화를 유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탈정치화는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알라딘에서는 보수를 자처하지만 직장에서는 가끔 빨갱이로 불리기도 합니다. (상대방에 악의가 없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저는 남이 나에게 정치적 의견을 묻는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투표는 빠지지 않고 합니다. 이것이 저의 정치적 움직임입니다.

 
<에코 이코노미>를 읽어보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합니다. 일방적 소모만 있는 화석 연료 보다는 태양열 또는 풍력 발전, 재생 상품을 미래 산업으로 꼽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자연과학이 바탕이 필요합니다. 정치, 과학, 환경(생태)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가이아’적인 화합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의심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의 의지, 이성, 감성이 임계점을 넘기 전에 성찰할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저의 페이퍼 ‘신석기 혁명, 농경사회로 전환(http://blog.aladin.co.kr/maripkahn/7281)’에 사람의 본성에 대해 의견을 남겼습니다.

 
<코드 그린> 에서는 ‘돌이 떨어져서 석기시대가 끝난 건 아니다. 신-재생에너지에서 기술 혁신만 일어나면 석유가 아무리 많이 남아 있어도 석유시대는 끝날 것이다. 그렇게 가려면 강력한 가격 신호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가격신호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생태주의’를 과학의 포기로 규정하는 저의 성향은 아마도 우리나라 사회의 과학에 대한 대접으로 비롯된 저의 감정적 상처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편견이길 바랄 뿐입니다.

 
저의 개인적으로는 의지와 움직임보다 성찰에 무게가 쏠려 있지만, 이것이 저의 몫이라고 생각되며, 사회적(전체적)으로는 조금 더 성찰 쪽으로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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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변호

*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

 안녕하세요. 드팀전님, 마립간입니다.

 
드팀전님의 글 대부분에 동감을 하나 저에 대한 의견 한 가지 정도가 사실과 다르군요.

 
저는 광우병 시국뿐만 아니라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는 종류의 소통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느껴왔던 겁니다.

 페이퍼 ‘광우병(http://blog.aladin.co.kr/maripkahn/2083976)’에 ‘라주미힌’님이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드팀전님은 라주미힌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 주셨죠.) 라주미힌님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또는 정보의 부족)’고 이야기하셨는데, <과학, 광우병을 말하다> 책을 읽으니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지식 정도는 밝혀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 지식에 눈길을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이 알고 있었던 것이네.’라고 느낀다면 저의 걱정은 기우였을 것입니다.

 저의 ‘
소통에 대한 상처’는 드팀전님이 이미 읽으셨던 저의 댓글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며칠 전 직장 비서(여자 30대 초반, 한 아이 엄마, 고졸학력)에게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것이냐고 물으니 당연히 먹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단편적으로 동남아 여행을 가서 스테이크를 먹을까 생각했을 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미국산 쇠고기의 가능성이 높아도) 밖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나고 물으니 답변이 '밖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돌 맞아요.'하면서 웃었습니다.
다른 여직원(20대초반, 고졸 4명, 대졸 2명) 6명에게 물으니 한 명만 주저하고 나머지 5명은 걱정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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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걱정하는 것은 ‘밖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돌 맞아요.’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괴담. (수년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자 지구 상의 어느 나라에서 광우병 위험성을 알아보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식물성 사료만 사용했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동물성 사료를 사용한 흔적이 있었고 이 나라에서도 광우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 발표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연구자(전문가) 집으로 무기명 소포가 배달 되었는데, 소포에 식칼만 하나 달랑 보냈다고 합니다.

 
드팀전님의 저에 대해서 오해하신 한 가지는 제가 (자연) 과학보다 정치를 하급으로 놓았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30년 전쯤에는 그랬습니다. 왜 정치가는 우표나 지폐에 도안되면서 수학자나 과학자는 그러지 못할까. 저는 오히려 우리나라 현실에서 정치보다 하급취급을 받는 과학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촛불 시위에 참가한 분들 모두가 과학지식에 관해 무지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통찰력을 갖고 정치적 맥락을 짚은 분이 전혀 없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드팀전님의 쓰신 글 ‘폴 크루그먼이 - (중략) - 정치의 영역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글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그래서 촛불 시위는 정치적 시위이어야 함에도 그 당시의 이런 언급은 정부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왜곡되어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역시 소통에 대한 상처입니다.

 
드팀전님의 언급하신 ‘생태주의’도 저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저의 구입도서 목록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고등학교 당시에는 독일의 ‘녹색당’이나 ‘그린피스 Green peace’를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단지 조심스러운 것은 식량의 풍요가 GMO를 비롯한 개량(육류의 경우 공장식 사육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유기농 농사나 소를 소로 키우는 축산 방식이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생산량이 근대 이전 즉 중세 시대로 줄지 않을까요? 드팀전님께서도 읽으셨겠지만 <육식의 종말>에서 보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육류 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미국의 축산이 변화되는 모습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수요)이 조절될 수 있을까요?

 
과학을 ‘이성과 합리성’과 제가 혼동하여 사용한 것을 인정합니다. 제가 의미하고자 한 것은 과학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에 해당합니다. 최근에 읽은 <인간 조정법>, <타임 패러독스>는 인문학 분야에 속하는 책이지만 방법적으로 볼 때 과학책에 해당합니다. 저의 페이퍼 ‘알라딘 서평단에 대한 단상’에서 과학책의 추천은 저 외에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루시퍼 이펙트> 추천한 분을 생각하면 꼭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 부분 때문에 페이퍼를 쓰고 조금 찜찜했습니다.) 현재의 과학이라 함은 방법적 의미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인문과학, 사회과학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자연과학의 첨단은 비선형非線型성에 대한 과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상당히 근접했습니다. 한때는 통섭이 유행했지요. 그런데 왜 ‘과학’이란 용어를 사용했는가 하면, 앞에서 언급한 자연 과학 (또는 수학)의 하대下待 (또는 학대虐待에 가까운 대접)때문입니다. 알라딘 페이퍼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 과학 및 의학은 정치, 자본, 문화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현대의 모든 학문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옛날 페이퍼에서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한 것처럼 호기심에 의해 학문을 하던 시절은 이미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해도,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측해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야는 없습니다. 의학은 더욱 심합니다. 저의 옛날 페이퍼에서 의학은 돈과의 싸움이다.’라고 쓴 적도 있습니다. 어느 분은 순수과학도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 분야이니 우리나라는 순수과학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분도 있습니다. 과학자 입장에서는 과학과 정치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분리하고 싶은 것이죠.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한 독재자가 있으며 정권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반대파에서는 대중과 전쟁 방지를 위해 테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사고 반대파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데, 독재자가 환자로 왔습니다. 저는 독재자를 치료해야 하나요? (삼국지의 조조와 길평) - 윤리적 긴장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결정은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과학자가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을 때, 부작용이 없는 순수한 연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씀하신대로 정치와 이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과학자는 연구를 그만두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권위원회는 다른 모든 조건을 무시한채 인권만을 생각한다고 하는군요.)

 
정치는 어떻게 이끌어져야 하나? 정치는 잘 모르겠고 조직이 성공적으로 이끌어지는 것에, 어느 경우는 다수가, 어느 경우는 엘리트가 기여하기 때문에 저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세상의 소통에 있어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라딘 마을에서는 아닙니다. 저의 초창기 페이퍼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다’라는 도발적 페이퍼도 이해를 받았고, 아니면 이해를 받지 못해도 거부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라딘 마을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외에는 인터넷을 잘 하지도 않아 다른 곳은 잘 모르지만 악플없이 토론이 잘 이루어지는 Website를 보신 적이 있나요?

 
마지막으로 농담 한마디 하겠습니다. 제가 가끔 재미로 ‘내가 정치를 해야 하나?’라는 한탄을 하면 아내가 절대로 못하게 말리겠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여자를 군대에 보낼 것이고, 두 번째는 수학, 철학 몰입교육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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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2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19 15:57 
    *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2 -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의 댓글에 대한  우선 다시 한 번 저의 글이 드팀전님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 먼저 드립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 탈정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비유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페이퍼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드팀전님께서 ‘탈정치’를 유인하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2.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3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19 18:09 
    * 드팀전님께 보내는 답신3 * “마립간 ‘과학의 변호’에 대한 드팀전님의 댓글에 답변 편지”의 댓글에 대한  첫 번째 댓글의 ‘과학과 신학’이나 ‘의사와 독재자’의 극단적인 비유가 논의를 과학적 논의를 유지 못하고 감정적이게끔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에피소드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여럿의 자녀에게 동일하냐는 논의를 하였습니다. 사랑이 동일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 친구에 다음과
 
 
마립간 2008-12-1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우병에 대한 페이퍼를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에 페이퍼를 올리지 못하고 일정 시기가 지나서 글을 올리게 된 것은 알라딘 마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제가 어느 정도 조절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평범하고픈 콸츠'님은 마을을 떠났지요.

마립간 2008-12-1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오후 FTA 비준을 통과에 관한 뉴스를 보니 정치가 과학 아래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위에 있을 것 같지도 않네요.

드팀전 2008-12-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꽤 춥군요. 직장인이 뽑은 올해의 한자가 '은인자중'이라고 하더군요. 잘 피하자라는 말인데...더 줄이면 누를 '압'자일 듯 합니다.

알라딘에서 제가 '진보'에 칼을 새울 때, 더 거대한 상대는 외면하고 그나마 열심히 싸우는 이들에 돌을 드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울때가 있습니다. 제게 이명박은 절대 악은 아닐지언정 '적'이기때문에 거기에 말로 하는 악다구니를 써봐야 별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래서 전 단 한번도 이명박을 '쥐명박'이니 '개xx' 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그건 그가 그런 존재가 아니기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을 보고 뜨겁다고 뭐라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언어의 사용 속에는 사라지거나 묻혀가는 무엇이 있습니다.(이건 기회가 닿으면 한 번 페이퍼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페이퍼에서 올렸듯이 저는 어떤 정치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올인 하는 것의 위험함을 말했습니다. 물론 올인 하는 사람들의 몫이 있고,또 거리를 두는 사람들의 몫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늘상 공허한 생각과 과잉된 행동만 남아 현상이 유지될 뿐입니다.(대학 다닐때 운동권 선배들의 실수중 하나는 '의지'의 과잉과 '성찰'의 부재로 오히려 감싸 안을 수 있는 친구들을 '적'으로 만들어 버린겁니다.)
그러나 성찰이란 것 역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의지와 움직임이 선행되고 그것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단지 성찰을 위한 성찰로는 공허할 뿐입니다.

생태주의는 저 역시 관심대상이지만, 생태근본주의가 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 견지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태적 사회주의' 같은 개념에 그 출구를 찾습니다. 생태주의를 신화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바로 '과학포기'로 생태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생태주의가 전근대로 회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생태주의의 과학관은 오히려 동양적 세계관,자연관과 유사합니다. 그것에 근대 서구적 과학관에 배치되는 부분도 있지만 늘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는 부분입니다.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서구과학에서도 말하는 지구 유기체론이나 가이아론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마립간님이 생태주의를 신화적으로 환원했다고 하는 지점은 어떤 사회이론이나 정치적 이론이 갖고 있는 '상상력'과 '지향','경향'것은 개념들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모델을 '과거'나 '미래'에서 찾는 대안의 방법론 이지 현실을 부정한다거나 축적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량의 생산량 감소문제를 반박하기 위해 쿠바 유기농운동에서 보여준 생산량 증가 모델을 반론의 근거로 내미는 것도 사실 이런 측면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분법적 이해와 오해가 등장하는데...각 영역의 독자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독재자를 살려야 하는가 마는가의 질문을 던진다면 결국 선택적예를 들어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 -즉 과학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게끔 만드는- 방식일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적절한 예는 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되돌려줄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의사의 가족들이 그 독재자 횡포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여있다는 조건 하나만 더 붙이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게 될 겁니다. 이 말은 마립간님의 예가 그만큼 본래 논의의 목적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설의 주체로서 의사의 위치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의사는 이미 자신의 생존과 안위에 대해 그 독재자의 파장 속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장의 예가 그렇고 마립간님이 본인 내지는 과학을 위치시키는 발화의 위치가 그럿습니다.제가 정치의 옹호를 말했다는 것은 이런 '초월성'에 대한 반감입니다. 그 예로 돌아가 볼까요? 그 의사는 독재자가 아무리 날뛰고 몰아붙여도 윤리적으로는 잠시 고민하고 반대하는 의견을 가질 수 있으나 실존적으로 피해를 그다지 보지 않는다는 위치라는 말입니다 그 위치는 흔히들 역사에서 '부르주아-테크노라트'의 결합으로서 근대 권력의 중심세력의 등장을 말하는 거기도 합니다.

만약 진정으로 그 의사가 전쟁에서 죽어나갈 수 백만의 '희생자'의 절규와 고통 위에 자기를 위치하고 고민한다면 그 의사는 독재자를 살리지 않는 쪽으로 더 기울겁니다.(앞에 총부리가 없다는 조건하에서)단순히떠밀려와서 고통에 신음하는 일개 적군의 병사와는 다르지요.그가 진정 반대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자 한 것이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자고 한 것일뿐입니다. 눈 앞의 공포 앞에 어쩔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자기 보존을 위해 담론의 외피로 변호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요. 역사에서 전문가나 관료는 그래서 어떤 시대에든 살아남을 수 있게 됩나 봅니다

FTA와 관련해서 하신 말씀은..정치가 과학 아래 있지 않지만 위에 있지도 않다는 말은 맞습니다. 어느 것도 위에 둘 수 없습니다만, 마립간님의 대응에는 '탈정치'를 유인하는-제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탈정치화'-시니컬이 있습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탈정치'하지 말라는 것이 '정치로 모든 것의 환원'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본과 이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때문에 과학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꺼낸 문제입니까? 전 한번도 그런 말을 태어나서 단 한번도 한적이 없습니다.마립간님의 페이퍼에 글을 단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꺼내신것은 여러 논의를 자의적 이해에 의해 마립간님에 쓰신 겁니다.

어쨋든 긴 댓글이었는데...이 정도에서 마감하겠습니다.

마립간 2008-12-19 15:50   좋아요 0 | URL
지난번과 같이 저의 변명은 페이퍼로 정리하겠습니다. 가을산님과 논쟁때는 대립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드팀전님의 첫 번째 댓글은 오히려 저와 보충적인 느낌을 가졌습니다. 오늘 아침 수정 전의 댓글과 지금 다시 읽은 댓글과는 많은 느낌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드팀전의 감정에 상처를 주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드팀전 2008-12-2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에요...저의 감정이 아니라 저의 이성입니다. 제가 든 '발화자의 위치'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일겝니다. 몰입교육하시고 싶으시다는 철학의 주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마립간님이 관심을 가지실 분야일 듯 합니다. 마립간님께서 말하는 그 위치란것은 다분히 초월적이군요. 신학으로서의 초월이 아니라 과학으로서의 초월...마립간님에게 과학은 종교입니까? 아닐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를 하면 어떤 것이든 몰입 교육은 막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철학이 아무리 형편없이 대접을 받더라도 수업시간을 늘리고 지금보다 강화는 하겠지만 몰입교육이란 이름으로 강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군대 보내지 않겠습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집니다. 징병제를 점차 줄여서 모병제로 나가겠습니다.굳이 농담을 하신다니 제 농담은 그렇습니다. 의외로 농담 속에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네요.^^
 
과학에 대한 변호

* ‘파란여우’님의 댓글에 대한 답변

 우선 이렇게 공개편지 형식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참 오랜만입니다. 주로 ‘가을산’님과 의견을 나눴고, 단편적인 주제에 관해 ‘강쥐’님, ‘따우(도로道)’님과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파란여우님의 질문에 답을 하면

 
폐기처분된 닭 부산물이 사료에 배합되는 문제, 조류는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 저의 답변은 시간을 통한 진화 압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광우병은 소의 병인데, 사람에게 전달 가능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진화의 압력이 포유류와 조류를 뛰어 넘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의 서평에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이 부분은 진화의 압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소, 양과 사람의 장벽은 우제목과 영장목으로 목目order이 다르지만 즉 order barrier이지만 소와 닭은 같은 척색동물 문門phylum에 속하나 그 다음 분류 단계에서 조류 강綱class, 포유류 강class으로 각각 속하니 class barrier를 넘어야 합니다. (학술 용어로는 species barrier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order barrier, class barrier란 용어를 만듬.)

 
실제 미국 도축 현장 - (중략) - 모든 쇠고기 상자를 빈틈없이 모니터링 한다고 믿으시나요? ;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저의 가치관은 맹자의 성선설보다 순자의 성악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도축업자나 한국의 육류 소매업자들이 모두 성인군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축산업이나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해 ‘파란여우’님이 현실이 그렇다고 하시면 저는 그대로 믿습니다.

 
단 한 명의 국민 건강 안(정)전을 위해 미심쩍은 수입은 차단하게 정부가 국민에게 보여주는 자세가 아닐까. ;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보다 정치권과 정부에 대한 분노가 더 큽니다.

 
우리나라도 비껴 갈 수 없는 문제 ; 도축의 위생뿐만 아니라, 광우병 자체의 위험성도 있다고 봅니다. 1980년대 (중반 또는 후반)에 MBC 뉴스에서 CJD (또는 vCJD) 환자가 있었습니다. 확진은 뇌부검을 해야 하므로 의심으로 끝났지요. 최근 PD 수첩의 광우병 관련 방송에서 이 내용이 없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한우의 광우병 가능성을 이야기하니 촛불 시위 참가자 분들 중에는 ‘미국 소 수입 반대의 논점을 흐린다. 물타기다.’라고 하며 말도 못 꺼내게 하더군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에 대한 언급 ; 읽을 때는 느끼지 못 했는데, 지금 보니 사족蛇足입니다. 괜히 오해의 소지만 만들었거나 혹시 모르죠, 저자가 정치적 의도를 품고 있었는지.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서 왜 저자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언급했을까? 정치적 의도 외에 다른 설명은 없을까?
 
저의 직장 부서는 20대부터 50대까지, 고졸학력부터, 대학원 졸업학력까지, 남녀 30명 정도가 있는데, 광우병 파동 당시 미국 수입 쇠고기가 들어오면 먹겠다는 사람이 80%정도 되었습니다. (저의 직장(또는 부서)은 이상한 직장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20대-30대 초반)과 광우병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 모두 광우병에 대해 잘 모르더군요. 특히 대중매체에서는 이와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이 또한 왜곡이겠죠.)
 
방송국 토론에서 광우병이 다른 전염병과 어떻게 다른지 그래서 전달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설명하는 중에 민주당 의원 한분이 ‘법이 광우병을 전염병으로 분류하는 데, 왜 딴소리를 하냐!’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광우병에 대한 법을 바꾸면 전파가 안 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정부가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았듯이, 촛불 시위 참가자들은 최소한의 과학적 지식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저는 설문에 책의 장점을 쓰지 않고 단점을 썼습니다. 촛불 시위 전에 이 책이 나와 광우병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지식을 갖고 촛불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시위의 초점이 정치적 요건에 맞추어졌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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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8-12-04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이 개인사업 접으시고^^ 월급쟁이 되신 이후 악플보다 더 무서운 무플로 지내는 서재입니다. 파란여우님을 비롯하여 누구시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의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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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수첩은 개인 사정으로 시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언급되지 않는 것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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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이야기를 빼 놓았네. 천천히 쓰겠습니다.

파란여우 2008-12-04 22:30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진료시간을 방해하는 댓글이었을까봐 은근 후회도 살짝했습니다.
제가 한창 허둥지둥 댈 즈음에 누가 뭘 던져주면 난감하거든요.
좋은 의견 감사드리고요,
한우 역시 많은 문제점이 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촛불현장에선 간과했거나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가 보였음에 저도 우려를 가지긴했습니다. 건강한 한우농가 몰락은 축협이나 정부정책면에서 가해를 한 입장이지만 거기엔 건강하지 못한 한우 사육도 포함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데 촛불시위대의 집단 형성 구조가 축산현장에서 먼 도시인들로 이루어졌고 반미감정이 절정이었을 무렵임을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상황이 좋지 않았죠. 굳이 답변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는데 마립간님이 애 쓰셨네요. 그럼에도 처칠 언급을 또 기대해보겠습니다. 근데 왜 이 책을 읽으신 다른 분들은 조용하신 걸까요. 글샘님의 의견도 궁금한데 말입니다.